제 3 장
 

제 3 장

 

1

 

빈자리 하나 없이 나무들이 꽉 들어차있는것 같은 백두산주위의 무변광대한 밀림속에도 군데군데 나무가 거의나 서있지 않는 곳들이 있다.

한낮이 좀 지난 때, 사령부를 찾아 행군을 계속하던 2련대는 눈덮인 번번한 새초밭에 다달았다.

그 새초밭 한가운데로는 물이 흐르고있었다. 물줄기는 눈에 묻혀 보이지 않고 흐르는 물소리만 들렸으나 간혹 얼음이 드러난데도 있고 어쩌다 옴폭 꺼져들어간 눈구뎅이안에서 흐르는 물이 옹달샘같이 들여다보이는데도 있었다.

물소리가 들리자 소는 물을 켜고싶었던지 그쪽으로 자꾸만 머리를 돌렸다. 눈녹인 물만 며칠째 마셔왔던 유격대원들도 진짜 물맛을 느낄수 있는 그 물을 마시고싶은 생각들이 났다.

그들은 맛이 각별히 좋고 시원한 그 물을 량껏 마시고 물통에도 가득가득 채워넣은 다음 소에게도 물을 실컷 들이키게 하고나서 그 물줄기옆으로 눈길을 내며 행군을 이었다.

환히 트인 눈판에 해빛이 반사되여 눈이 몹시 부셨다. 채 묻혀버리지 않은 새초대들과 마른잎들만 눈우에 드러나있는 넓은 새초밭의 한곳에 울창한 가문비나무숲이 보였다.

새초밭을 지나 다시 침엽수들과 봇나무들이 엇섞인 숲속에 들어서서 한참이나 행군했을 때 언제나와 같이 선두척후를 책임지고 맨앞에서 눈길을 헤쳐나가던 오중흡소대장은 저앞의 숲속에서 얼씬거리는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날쌔게 나무뒤에 피해서며 싸창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누런 새 솜옷에 개털모자를 쓰고 배낭을 멘 사람이 다리를 힘겹게 옮겨디디며 엇비스듬히 마주 걸어왔다. 좀더 가까이 다가온것을 보니 코밑에 수염이 달린 나이 지긋한 사람인데 이따금 멈춰서서 잠간씩 숨을 돌리면서 숲속의 여기저기를 눈여겨살피군 했다. 가죽띠가 달린 권총집만 메고있지 않다면 눈덮인 수림의 신선한 대기를 마시며 아름다운 설경을 감상하기 위해 등산하는 사람이라고 여길만치 숲경치에 취해있었다. 분명 유격대원차림이였는데 그렇게 여유작작한 태도가 미심쩍었다.

《서시오!》

오중흡은 그가 몇걸음앞에 다가왔을 때 불쑥 길에 나서며 그를 막아섰다.

상대방은 일순 당황해하는 빛을 감추지 못하면서 멎어섰다.

《당신은 누굽니까?》

《…》

그 사람은 아무말없이 자기앞에 나타난 불의의 출현자를 유심히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오중흡의 뒤에서 줄레줄레 나타난 다른 척후대원들을 한사람한사람 둘러보았다.

《당신네들은 누구요?》

그는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은채 되물었다. 이상사람앞에서는 응당 나이대접을 해줘야 할것이라고 훈계하는듯 한 태도였다.

《우리는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입니다.》

오중흡은 깍듯이 대답했다. 그의 태도와 그들이 입고있는 낡고 해진 여름군복차림에서 오중흡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것을 믿었던지 나이 지긋한 코수염쟁이는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단마디말로 자기 신분을 밝혔다.

《내가 〈대통령감〉이요.》

조선인민혁명군 대원이라면 응당 자기를 알고있으리라는 태도였다. 하지만 오중흡이나 그옆에 선 척후대원들이 자기를 전혀 알지 못하고있는것 같은 기색을 보았던지 나무람같기도 하고 질문같기도 한 말을 덧붙였다.

《주력부대사람들이 아닌게구만?》

《그럼 아바이는 주력부대입니까?》

《사령부출판소에 있소.》

그 말을 듣는 순간 오중흡은 심장이 멎는듯 했다.

《그래요?! 반갑습니다. 우린 2련대사람들입니다. 오중흡이라고 합니다.》

그는 권총을 질러넣고 두손으로 벙어리장갑을 낀 아바이의 손을 꽉 잡아쥐고 흔들었다.

《아, 2련대!》

리동백이도 퍼그나 반갑게 맞잡아 흔들었다.

《오중흡이라구 동무였구만. 동무에 대한 얘길 많이 들었소.》

오중흡은 이 낯선 사람이 자기를 알고있는데 저으기 놀랐다.

《제 얘길…? 어디서요?》

《춤도 잘 추구 노래도 잘 부르구 또 축구도 잘한다면서? 지난해 봄 어느날엔가 삼도하자인민들과 축구경기를 할 때 동무가 누구보다 맹활약했다는 얘기랑 내 다 들었소. 사령관동지께서 2련대동무들을 늘 외우시면서 동무얘기랑 자주 해주시더구만.》

《사령관동지께서요?!》

오중흡은 코허리가 시큰했다. 장군님께서 얼마나 자주 자기들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면 이 낯선 《대통령감》이 지난해 봄에 있은 일까지 알고있으랴싶었다.

《아바이, 사령부는 지금 어데 있습니까?》

《사령부야 멀지 않지. 기운내서 둬시간만 걸어가면 될거요.》

그러며 그리로 가는 길을 대주었다.

《아, 그래 사령관동지께서는 무고히 지내십니까?》

《언제나와 같이 건강하시오.》

《그래요?!》

오중흡은 눈을 슴벅거렸다.

《대체 웬일이요?》

척후대가 전진을 멈춘 까닭을 알려고 무릎으로 눈을 걷어차며 달려온 곽두섭중대장이 그들곁에 다가왔다.

《중대장동무! 이분이 사령부에 계신답니다…》

오중흡의 말에 곽두섭은 눈이 둥그래졌다.

《무어? 사령부에?》

곽두섭은 너무 기쁜 나머지 오중흡에게 화내듯 나무랐다.

《그런데 알리지 않구 혼자 붙잡구있다니?》

그리고는 살괭이같이 거쿨진 손을 아바이앞에 쑥 내밀었다.

《사령부에 계신다구요? 곽두섭이라고 합니다.》

《〈대통령감〉이라고 부르우. 사령부 비서처 출판소에 있소.》

《〈대통령〉이요? 아하, 전에 꽤 높은 벼슬깨나 한 아바이구만. 이거 정말 반갑수다.》

곽두섭은 그의 류다른 별명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채 초면통성을 허물없는 롱말로 받아넘기며 다시한번 억세게 손잡아흔들었다.

《〈대통령〉은 무슨 〈대통령〉이겠소? 내가 하두 담배를 좋아하니 담배대통을 별명으루 달았겠지. 담배를 즐기는데는 대통령자리쯤은 차지할지 몰라두.》

반죽좋게 말한 리동백은 솜군복호주머니에서 담배진이 배고 손때가 올라 반질반질한 해원파이프와 권연곽을 꺼냈다.

그를 만난 모든 사람들이 다 기뻐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곽두섭이 제일 좋아했다.

《이거 참 알구보니 사돈이라더니 내사 제대루 만났구만. 나는〈막담배〉올시다. 담배라면 아무 담배건 오금을 못폅니다.》

《그렇소? 손톱과 이발을 보니 그 말이 옳구만. 자 그럼 한대 붙여보우. 이건 〈막담배〉정도가 아니요. 왜놈장교들이나 맛본다는 〈미도리〉요.》

리동백은 고급권연을 한대씩 나누어주었다.

《이 아바이 꽤 잘사누만!》

《사령부에 가면 동무네 몫도 있을거요. 사령관동지께서는 동무네가 오면 공급할 담배까지 따로 내놓고 기다리고계시오.》

《네에?!》

그 말에 가슴이 저릿하여 다들 담배가치를 주무르기만 하면서 피울 생각마저 잊어버렸다. 지금 그들에게 있어서 사실 담배따위가 무슨 큰 관심거리이랴.

사령관동지께서 자기들에게 주실 담배까지 갖춰놓고 기다리신다는 사실이상 더 마음을 뜨겁게 하는 일이 있을수 없었다.

《둬시간만 더 가면 밀영이 나진답니다.》

오중흡이 곽두섭에게 귀띔해주었다.

《그렇다오? 그걸 왜 이제야 말하오?》

그렇게 맛보고싶었던 진짜담배, 그것도 이만저만한것이 아닌 고급권연을 받아쥔 곽두섭이였으나 그는 피워물기를 그만두고 바지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동무들! 여기서 어물거리지 말구 떠납시다. 밀영이 멀지 않은데 있다고 하오.》

《갑시다. 어서 떠납시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화답했다.

《대통령감》과 헤여진 일행은 걸음발을 다그쳤다.

깊은 눈때문에 더 빨리 걸을수 없는것을 안타까와들 했다. 눈속에 깊숙이 빠져드는 다리가 날아가는 마음같이 빨리 움직여지질 않아서 자꾸만 어푸러들졌다. 마음 급해진나머지 어떤 대원들은 종대에서 빠져나와 마구 헤덤비며 생눈길로 앞질러나가기도 했다.

확실히 얼마쯤은 제정신들이 아니였다. 사령부까지 끌고가서 그리웠던 사람들에게 소고기맛을 보이겠다고 여직껏 잡아먹지 않고있던 한마리의 소가 홀로 뒤떨어지는줄도 몰랐던것이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덤비지 않고 침착하게 모든 일을 살피군 하는 권영벽이만이 그 소를 버려둔줄을 알고 맨 뒤에 혼자 떨어져 한정없이 느리게 걷는 소를 몰고왔다. 그 미물은 권영벽이도 역시 남못지 않게, 아니 남보다 오히려 더 빨리 사령부에 가닿고싶어하는줄을 알리 없었다.

 

2

 

2련대를 맞아들인 사자봉밀영은 벅적 끓어번졌다.

언제나 정숙이 깃들어있군 하던 밀영이였다. 출전했던 부대들이 승전의 기쁨을 안고 돌아올 때에도 별로 떠들썩하는 일이 없었다. 싸우면 언제나 이기는데 습관된 유격대원들은 또 이기고 돌아온다는 소식쯤은 례상사로 여겨 한두마디 심상한 축하의 말이나 소리없는 웃음 혹은 인사치레의 심드렁한 악수로 맞아들이군 했다.

 그러나 2련대가 들어선 이 시각에는 열광적인 환성이 터져오르고 격정적인 탄성이 메아리쳤다.

《밀영이다!!》

《2련대다!!》

《동무들! 우리 사람들이다!!》

헐레벌떡거리며 밀영지에 들어선 2련대사람들과 놀란 소리를 지르며 병실에서 달려나온 밀영사람들이 맞부딪치며 서로 얼싸안았다.

찾아온 사람들과 기다리던 사람들이, 낡은 여름군복을 입은 사람들과 새 겨울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저 마주치는대로 잘 아는 사이이건 모르는 사이이건 마구 부둥켜안고 볼을 비비며 머리도 쓰다듬고 잔등도 두드리고 가슴팍도 쥐여박았다.

《살아있었구나! 죽은줄 알았더니 시퍼렇게 살아있었구나!》

《나는 살구 그는 죽구… 나는 살아서 혼자 왔다. 죽지 않았으니 나만은 돌아와서 너를 다시 보게 됐다!》

《어디 좀 다시 보자. 수염두 검실검실해지구 키는 전보대처럼 꺽두룩해지구 볼따구니에는 여드름이 돋구 총알자리가 나구. 오, 정말 진짜 자라구 쌈군이 됐구나.》

격동적인 포옹… 얼싸안고 빙빙 돌아가다가 그대로 눈우에 같이 번져져 뒹굴기도 했다. 일부러 뒹굴며 온몸에 눈을 묻히기도 했다.

회오리바람에 떠오른 나무잎들처럼 웃음이 허공중에 흩날리고 때아닌 눈물비가 눈우에 내렸다. 웃음에 울음이 따르고 울음에 웃음이 겹쳐 뒤범벅을 이루기도 했다.

밀영지가 그대로 감격의 란무장, 환희의 란무장이였다.

《이게 누구요? 〈막담배〉중대장동무 아니시우?》

들끓는 사람들속에서 허둥거리며 조분옥을 찾아돌아가던 곽두섭에게 작달막하고 통터무레한 녀대원이 두손을 벌리며 매달렸다.

《아, 철구아주머니!!》

곽두섭은 그의 팔을 맞잡으며 기뻐 소리쳤다.

《그새 얼마나 고생하셨수? 얼마나…》

이미 눈물자국이 나있는 장철구의 반겨웃는 그 어진 눈에 핑그르 새 눈물이 어린다. 곽두섭을 만난 몫으로 흘려주는 기쁨의 눈물… 여덟달전에 마안산에서 헤여질 때 장철구는 조분옥이와 함께 《민생단》혐의자로 몰려 4중대에 떨어져있었다. 늘 수심에 잠기고 공포에 질려있던 전날의 창백하던 얼굴이 얼마나 생동해졌는가!

《저야 무슨 고생을 했겠습니까. 아주머니가 퍽 마음고생을 했댔지요. 지금은 어느 련대에서 무슨 직무를 맡아봅니까? 〈민생단〉보따리가 불타 없어지구 다들 혐의를 벗었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렇다우. 장군님 덕분에 세상일이 뒤번져서 나같은것이 글쎄 사령부작식대에서…》

《아, 그래요?! 그거 정말 잘되였습니다. 잘돼두 이만저만 잘된게 아니군요! 그때 그 4중대에 속해있던 녀성동무들이 다 여기서 무사히 지내겠지요?》

《아무렴, 다 장군님 슬하에 와서 마음편하게 지낸다우.》

(그런데 분옥동문 어디 있습니까? 왜 안보입니까?)

곽두섭은 이렇게 묻고싶었지만 자기들사이의 엄격한 비밀로 되여있는 관계를 조금이라도 드러내게 될것 같아서 차마 그 말은 입밖에 내지 못했다.

《녀성동무들이 퍽 많군요. 수태 많아졌는데 보지 못하던 동무들이 많습니다. 그전에 있던 동무들은 얼마 없는것 같군요.》

《많아졌지. 녀성전투원들만 해두 한개 중대가 되잖우. 장군님께서 〈민생단〉보따리를 불살라버리셨다는 소문이 나자 녀성중대장동무를 비롯해서 사처에서 녀성동무들두 수태 장군님 휘하에루 모여들왔댔다우. 새로 무송과 장백과 국내에서 입대한 동무들도 더러 있구.》

조분옥이와 아주 가깝게 지냈던 사이였으면서도 조분옥이와 곽두섭의 관계에 대해서는 감감 알지 못하고있는 장철구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기대하고있는지도 역시 알리 없었다.

《음, 그래서 저렇게 많구만…》

건숭 대답하며 환희의 란무장을 두릿두릿 살피는 곽두섭의 마음속에는 다른 말이 울리고있었다.

(저렇게 많으니 분옥일 쉽게 찾아낼수 있나? 제길, 대체 어느 구석에 배겼나?)

마침 누군가 달려오며 장철구아주머니를 보고 반갑게 소리쳤다. 곽두섭은 그 고마운 누군가에게 철구아주머니를 맞세워주고 슬며시 빠졌다.

웃고 울며 떠들썩 좋아하는 녀대원들가운데는 그리웠던 조분옥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찌된셈인가? 어디 배겨있는가?)

곽두섭은 보람없이 헛눈을 팔며 사람들속을 돌아쳤다.

《중대장동무!》

누군가 또 그의 팔소매를 붙잡았다.

(분옥이가?!)

신통히 분옥이의 목소리같은 그 목소리에 놀라며 멈춰선 곽두섭의 눈에는 얼굴생김도 인상도 키도 전혀 다른 녀대원의 모습이 비껴들었다. 유격대의 미인으로 알려져있는 녀성소대장 라명희였다.

《영벽오빠가 어데 있어요? 왜 보이지 않아요?》

오래간만에 만났다는 인사말도 없이 대뜸 이렇게 묻는 시원한 라명희의 눈에는 불안과 초조감이 함뿍 어렸다.

《누구라구?》

《영벽오빠말예요. 다들 같이 오셨다는데 어째서 안보일가요?》

라명희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했다.

《왜 없겠소. 찾아보우. 아마 헤덤벼서 아직 보지 못했을거요.》

《아니 없어요. 안보여요. 무슨 일이 있었을가요? 제가 일마나…》 라명희는 얼굴을 숙이며 손등으로 눈굽을 훔쳤다.

《그럴수 없소. 찾아봅시다. 나하구 같이 찾아봅시다.》

(나도 찾아야 할 사람이 있소.)

그는 라명희를 데리고 여기저기 숲속에 무리지어 몰켜선 사람들속을 헤치며 또 한바퀴 돌았다. 녀대원들만 눈여겨 살피면서… 구태여 여기 와있을 권영벽을 찾아 남성대원들에게 눈을 팔 필요는 없는것이다.

《보세요. 없지 않아요?》

숲가에 나온 라명희는 두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소대장이란 사람이 울긴?》

《소대장은 뭐 사람이 아닌가요?》

《울지 마오. 있소, 있다니까.》

《어디?》

《저어기… 저기 오지 않소.》

숲에서 소방울소리가 울려왔다. 지는 해가 그 숲 저편에서 빨갛게 타며 수만개의 불꽃으로 부서졌다. 그 불꽃들을 가리우며 커다란 황소 한마리가 언덕우로 올라섰다. 그뒤로 권영벽이가 이와실이를 갔다가 자기 집에 돌아오는 농사군처럼 별로 서두르지 않고 느직느직 걸어왔다.

《아―!》

라명희는 가벼운 탄성을 지르며 권영벽에게로 달려갔다.

《오긴… 오셨군요.》

곽두섭은 권영벽에게로 달려가는 명희와 역시 몹시 반기며 마주오는 권영벽을 부럽게 바라보았다.

불현듯 귀틀집 저편에서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울려왔다. 웅성거리는 뭇사람의 말소리때문에 곽두섭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여러 사람이 헤덤비며 골짜기아래쪽으로 달려나갔다.

《저게 무슨 소리요?》

권영벽이도 소방울소리때문에 알아듣지 못한듯 와와 소를 멈춰세우며 그에게 물었다.

《나도 못들었구려.》

《곰산밀영에 가셨던 사령관동지께서 지금 오시나봐요.》

명희의 말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 오신다―!》

이번에는 바람이 실어다준 그 웨침소리를 곽두섭이도 권영벽이도 제대로 가려들었다.

《저렇게 무질서하게 맞이하겠소?》

마구 달려가는 2련대사람들을 눈짓하며 권영벽이 귀띔해주었다. 곽두섭은 그가 무엇을 암시하는지를 곧 알아차렸다.

그는 마당 한끝으로 달려가며 구령을 질렀다.

《2련대 모엿!》

한데 뒤엉켜있던 사람들이 흩어지며 끼리끼리 갈라졌다. 밀영사람들은 마당옆으로 물러섰다.

《중대단위로 횡대로 정렬!》

2련대사람들은 두줄로 늘어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총가목과 배낭들을 부딪치면서 자기 자리를 찾아 바삐 서둘렀다.

《명희, 이놈을 맡아줘.》

권영벽은 붉은 저녁노을빛에 불타는듯 한 라명희의 손에 소고삐를 넘겨주며 정렬해 서는 사람들에게로 달려갔다.

숲속길에서 서둘러 눈을 밟으며 다가오는 발자욱소리와 함께 장군님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이의 바로 뒤에는 방금전에 2련대사람들이 왔다는것을 알려드리기 위하여 그쪽으로 달음쳐갔던 전령병 주봉길이가 그리고 또 그뒤에는 장군님을 모시고 곰산밀영으로 갔던 리동학경위대장이 따라왔다.

장군님께서는 어찌나 빨리 걸음발을 다우쳐오시는지 어깨에 둘러치신 위장포가 바람에 날리듯 펄럭였다.

《련대 나란힛!》

곽두섭의 흥분된 구령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어깨들의 가벼운 설레임이 두줄로 길게 늘어선 대렬을 따라 물결쳐갔다.

《차렷!》

흥분때문에 자꾸만 비척거리던 사람들이 한손으로는 총부혁을 꽉 틀어잡고 다른 한손은 바지혼솔에 꽉 붙이면서 부동의 자세를 취했다.

《련대, 좌로 봣!》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시던 장군님께서는 질서정연하게 늘어서서 엄숙한 영접차비를 하고있는 련대대렬의 첫머리에 이르시자 걸음을 늦추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천천히 대렬앞으로 향하시면서 한사람한사람씩 훑어보시였다.

낯익은 사람, 낯선 사람, 키가 큰 사람, 키가 작은 사람, 총을 멘 사람, 군복을 입은 사람, 사복을 입은 사람… 각양각색의 사람들에게 한결같은것은 어느 누구나 낡고 해지고 얇은 여름옷과 여름모자차림이라는것이였다.

솜을 두고 두툼하게 누빈 말쑥한 새 동복을 입고 주위에 둘러서있는 밀영사람들에 비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대조적이였다.

깁고깁고 덧기운 자리들, 미처 기워입지 못해 이 엄동에 벌겋게 살을 드러내보이는 찢어진 자리들, 볼품없이 된 행전, 든것없이 내리처진 배낭들… 신코숭이밖으로 불쑥 나온 한 대원의 엄지발가락에는 검은 피가 배여있는 헝겊이 처매져있었다.

침묵이 서린 마당에는 천천히 옮기시는 그이의 무거운 발자욱소리만이 울렸다.

마침내 그이께서는 대렬앞 복판에 멈춰서시였다.

대렬 한끝으로부터 군모채양에 오른손끝을 올려붙인 곽두섭이 몹시 흥분하고 긴장한 나머지 걸음을 약간 비척거리며 장군님앞으로 다가갔다.

《사령관동지! 2련대 제2중대와 제3중대는… 사령부를 찾아… 사령부를 찾아… 전원… 무사히…》

말을 떠듬거리며 가까스로 이어나가던 곽두섭의 목소리는 끝내 도중에서 끊어지고말았다. 목이 꽉 메여버린 그는 온몸과 함께 채양옆에 올려붙인 손을 와들와들 떨었다. 눈에서는 노을빛에 홍보석같이 반짝이는 굵다란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울음은 일시에 온 대렬로 번졌다. 장군님께로 쏠려있던 백수십쌍의 눈들에서 홍보석들이 굴러내려 눈우에 떨어졌다. 억누르는 흐느낌소리가 대렬에 번지고 평행을 유지했던 어깨들에서도 파도가 번져갔다.

전사들을 지켜보시던 장군님께서도 두눈을 슴벅이시였다.

그이께서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시고 천천히 털모자를 벗으시여 가슴에 안으시였다.

《이 기쁜 날 웃어야지 울어서야 되겠소?!》

약간 갈린듯 한 그이의 우렁우렁하신 음성이 대렬 저끝까지 울려갔다.

《동무들을 무척 기다렸습니다. 만난을 무릅쓰면서 이렇게 와준 동무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동무들의 도착을 환영합니다.》

소리를 억제해가며 흐느껴울던 대렬에서 만세의 함성이 터져올랐다.

장군님께서는 긴 만세의 환호와 박수소리가 갈앉기를 기다리셨다가 다시 말씀을 이으시였다.

《동무들도 알고있겠지만 지난 봄에 남호두회의결정에 따라 새로운 부대들이 조직편성되였습니다. 새로 조직된 부대들가운데서 지금 백두산밀영에 기지를 둔 주력부대는 전반적조선혁명을 앞장에서 이끌고나가야 할 사명을 지닌 핵심력량입니다. 참으로 할 일이 많은 때에 동무들이 와준것이 더없이 기쁩니다. 나는 지금 이곳에 도착한 제2련대 2중대와 3중대 성원 전원이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에 편입되였다는것을 선포하면서 동무들모두가 새로운 각오와 높은 혁명적열의를 가지고 부대의 강화발전과 조선혁명의 승리적전진에 적극 기여하며 매진하리라는것을 확신합니다.》

또다시 만세의 함성이 터져올랐다. 수백쌍의 손들과 수백자루의 총들이 하늘을 찌르고 수많은 군모들이 노을이 비낀 붉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열광적인 환성을 올리며 벌떼마냥 흩어진 대원들은 장군님께로 모여들어 그리웠던 그이의 손길을 잡고 그이의 품에 안기고 그이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그이를 겹겹으로 둘러싸고 또 둘러싸며 감격과 환희의 란무를 펼쳤다. 돌봐주는이 없이 지내온 고아들마냥 수모받고 천대받고 설음을 받아오던 사람들이 자기들을 한품에 안아 따뜻이 보살펴줄 어버이의 품으로 돌아온것이다.

 

×

 

 단란한 가정생활의 보금자리를 떠나 산에서 지내면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유격대원들의 생활은 두말할것없이 어렵고 고생스러웠다. 굶어죽고 얼어죽고 총에 맞아죽을 각오밑에 집을 떠나 싸움길에 나선 사람들의 생활인것만큼 낟알은커녕 풀뿌리조차 씹지 못하고 지낼 때도 있었고 박달나무마저 얼어터지는 모진 추위속에서 입을것과 덮을것도 없이, 때로는 불없이 지낼 때도 자주 있었다.

하지만 이런 유격대원들의 생활이라 하여 언제나 어렵고 고생스럽게만 지내는것은 아니였다. 없을 때는 못살았지만 때때로 괜찮게 먹고 입으며 지낼적도 있었다.

유족을 맛볼 때의 유격대생활처럼 랑만적이고 매력적인 생활이 또 어디 있으랴?

사령부를 찾아온 2련대사람들은 사자봉산밀영에 도착한 그날밤으로 곧 이와 같은 유족을 향유하는 행복을 체험했다.

그들에게 지체없이 개인소비품들을 공급해줄데 대한 장군님의 지시에 따라 사령부군수관 김주현은 그들모두에게 한사람도 빠짐없이 세수수건, 치솔, 치분, 세수비누, 머리빗 등 세면도구일식과 바느질자리가 생생한 새 솜군복 한벌씩과 광목내의 한벌, 행전 한컬레, 양말 두짝, 생고무냄새가 풍기는 포장한 지하족 한컬레 그리고 고급권연 두곽씩과 아연도금을 한 쇠통속에 들어있는 담배 다섯통, 성냥 열곽씩을 안겨주었다.

그 희한한 새 물품들을 받아안은 2련대사람들은 고생스럽고 서럽게 살아온 지난날을 더듬으며 또 눈물들이 글썽해졌다.

참말로 무슨 명절날저녁처럼 흥성거렸다.

밀영사람들은 세수도 하고 발도 씻으라고 더운 물을 끓여주었다. 싸한 박하냄새나는 향기로운 치분으로 치솔질도 하고 향긋한 비누로 세수도 하고 부드럽고 폭신한 세수수건으로 얼굴들도 닦았다. 길어진 수염들도 말끔하게 밀어냈다. 다음엔 새 내의에 새 솜군복, 새 양말, 새 지하족, 새 행전차림을 했다.

그러고나니 아주 딴 사람들이 되였다. 다들 멀쑥하고 끌끌하고 쌩한 미남, 미인들로 변하였다. 거칠던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과 생기가 넘쳐흘렀다.

이날 저녁상은 또 얼마나 푸짐했던가!

보리쌀을 약간 섞은 이밥에 소고기분탕장국, 감자채와 고사리채, 게다가 이 즐겁고 경사스러운 날밤의 흥취를 한껏 돋구어주며 춤과 노래까지 절로 불러내는 조화를 가진 음료도 있었다. 그우에 또 식후의 일미라는 담배다운 진짜담배까지… 실로 그이상의것을 상상할수 없는 진수성찬이였다!

화락한 만찬까지 치른 2련대사람들은 모두가 무한한 행복감을 느끼며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3

 

권영벽은 2련대사람들을 돌봐주며 그들과 함께 사령부를 찾아오는동안은 언제나 아침해빛이 퍼지기전에 깨여나군했었다.

그러나 사자봉밀영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에는 해가 하늘높이 떠올랐을 때까지도 잠에 취해있다가 무척 부드럽고 만만하고 따스한 애기의 손길같은 해살이 자기 눈두덩을 마치 일부러 장난하듯 살며시 어루만지며 간지럽히는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벌써 해가?)

그는 움쭉 상반신을 일으켰다. 혼자 늦잠을 잔줄 알고 놀라 귀틀집안을 휘둘러보니 아직 단 한사람도 잠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혹은 베개삼아 벤 배낭이나 접어넣은 겉옷에서 머리를 떨어뜨린채, 혹은 다른 사람의 배우에 진대통같이 실한 다리를 올려놓은채, 혹은 더워서 모포를 발밑으로 걷어차버린채 그냥 기신없이 잠자고들 있었다. 간밤에 늦도록 잠못들고 줄담배를 피우던 곽두섭이도 맨먼저 코골며 잠들었던 오중흡이도 여전히 맹렬한 기세로 야단스러운 코고는 소리들을 내고있었다.

(꽤 늦은것 같은데 어째서 기상구령소리를 못들었을가?)

그가 부시럭거리며 옷을 주어입고있는데 조심스러운 인기척이 났다. 출입문곁에서 그림자 하나가 얼씬하더니 당직근무를 서고있는 대원이 발끝걸음으로 그의 발치쪽에 다가왔다.

《밀영에서는 아직 기상시간 안됐소?》

권영벽은 입속말로 물었다.

당직대원은 대답 대신 한손을 오그리며 입가에 갖다붙였다. 권영벽은 그의 요구를 알아채고 귀를 그에게로 돌려댔다.

《기상시간은 이미 지났습니다.》

당직대원의 귀속말이였다.

《그런데 왜 우린 기상시키지 않았소?》

권영벽은 더 낮은 입속말로 물었다.

《2련대동무들에게는 오늘아침만은 기상구령을 치지 말구 실컷 쉬우도록 하라는 사령관동지의 특별지시가 있었습니다.》

권영벽은 놀란 눈길로 당직대원을 돌아보기만 했다.

《그리고 권영벽동지가 깨여나게 되면 아침식사를 하고 사령부에 오도록 이르랍디다. 사령관동지께서 만나시려고 깨여나기를 기다리신답니다.》

《그럼 왜 날 좀 깨우지 않았소?》

《사령관동지께서 절대로 깨우지는 말라고 엄격히 말씀하셨답니다. 깨우지 말고 실컷 쉬고 저절로 깬 다음에 알려주라고말입니다.》

권영벽은 어제밤에 군수관이 공급해준 새 세면도구를 배낭에서 꺼내들고 바깥에 나왔다.

해는 꽤 높이 떠올라있었다.

(무슨 일로 찾으실가?)

권영벽은 사령부에서 찾는 까닭을 몰라 궁금해하면서 개울로 통하는 오솔길을 걸어내려갔다. 량쪽에 눈을 높이 쳐올려 전호바닥처럼 된 길바닥에는 드문드문 얼음버캐가 붙어있었다. 개울에서 길어오다가 흘린 물이 얼어붙은것이다.

법랑소랭이에 물을 가득가득 담아든 몇명의 녀대원들이 물을 흘릴가봐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놓으면서 개울쪽에서 마주 걸어왔다. 맨앞에는 먼 빛으로도 언제나 환히 나타나는 라명희의 예쁜 얼굴이 보였다.

라명희는 길바닥을 살피며 언덕길을 춰오르다가 마주 내려가는 그를 보자 따뜻한 웃음을 보였다.

《잘 주무셨어요? 근데 왜 개울에 가세요? 저기 더운물이 많아요.》

권영벽은 길을 비켜주었다.

《수고들해. 난 시원한 찬물이 좋아.》

《아이참!》

라명희는 속상한듯 권영벽을 곱게 할겨보았다.

《2련대동무들때문에 일부러 끓여놓은 더운물을 둬두고 부디 찬물에 나가 세수하겠어요?》

권영벽이 되려 놀랐다.

《그럼 우리들때문에 일부러 물을 길어들여다 끓이고있냐? 엊저녁이나 더운물세수를 했으면 됐지 우리가 무슨 큰 고생을 한 사람들이라구 여기 와선 세수할 때마다 본부대사람들도 안해본 호강을 해? 괜한 수고들을 그만두라구 해라.》

권영벽은 소랭이를 든채 눈이 휘둥그래서 서로 쳐다보며 머리를 기웃거리는 녀대원들옆을 와삭와삭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치솔질을 하고 세수를 하고나니 정신이 들었다. 서둘러 귀틀집에 돌아와 세면도구를 배낭안에 정돈해넣고 다시 밖에 나온 그는 곧장 사령부귀틀집으로 향했다.

작고 아담한 사령부귀틀집앞에 서있던 보초가 총대를 바싹 가슴에 당겨붙이며 말없는 경의를 표했다.

《사령관동지께서 계시오?》

《계십니다.》

옷매무시를 바로잡으며 출입문앞에 다가선 권영벽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시오.》

장군님의 음성이시였다.

노루발쪽으로 된 문손잡이를 잡아열고 아담한 귀틀집안에 들어서자 손수 난로불을 돌보고계시던 장군님께서 뒤돌아보시였다.

《아, 권동무구만. 좀 잤소?》

그이께서는 한손에 장작가치를 드신채 난로불앞에 굽히셨던 허리를 펴시였다.

《지나치게 자서 죄송합니다. 찾으셨습니까?》

《찾은게 아니라 동무가 깨여나면 만나보려구 했소. 당직을 선 동무가 깨운게 아니요?》

《아닙니다.》

《그런데 조반은 왜 자시지 않고 왔소? 어서 식사나 하구 오시오. 동무하구 좀 긴하게 의논할 일이 있소.》

아무래도 무슨 긴급한 일인것 같아서 곧장 이리로 왔던 권영벽은 시치미를 뗐다.

《식사를 했습니다.》

난로불앞으로 돌아서시던 장군님께서는 그의 말에 어이없으신듯 소리내여 웃으시였다.

《허허, 동무도 꽤 능청스럽구만! 사령관을 앞에 세워놓구서두 곧잘 거짓말을 하는군.》

《네?!》

권영벽은 자기가 식사를 하지 않은채 곧장 여기로 온줄을 장군님께서 어떻게 아시는지 놀랍기만 했다.

《시치미를 떼지 마오. 금방 세수하고난 동무의 얼굴에서는 아직 물기도 채 마르지 않았소. 그럴듯이 속여넘기자면 얼굴에서 물물 나고있는 그 김이 다 날아난 다음에 들어오던지 했어야지.》

말문이 막혀버린 권영벽은 그만 어줍게 웃으며 머리를 수굿했다.

《조반을 안자신 대신 동무는 한가지 비판을 더 받아야 할가 보오.》

《네에?!》

권영벽은 머리를 들고 의아쩍게 쳐다보았다.

《밀영에 있던 녀대원들이 먼길을 고생하며 온 동무네 2련대사람들을 위해서 세수물을 끓이는 모양인데 동문 왜 그 성의를 받아들이지 않구 개울에 나갔소?》

권영벽은 자기가 방금 개울목에 세수하러 갔었다는것을 장군님께 아뢴것이 누구네들이였다는것을 짐작했다.

《사령관동지, 오늘부터는 저희들에게 특혜를 베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저희들이라구 유별히 늦잠을 자구 따로 더운물에 세수하구 그러겠습니까? 저희들도 어제 사령관동지께서 선포해주신대로 이제는 다같은 주력부대성원들이 아닙니까?》

《특혜랄게 뭐 있소? 오래 잠을 밀려온 동무들이니 한두시간쯤 더 자게 하는것이고 또 헌 여름옷을 입고 언몸으로 먼길을 걸어온 동무들이니 오늘아침까지만이라두 더운물세수를 하게 하자는것이겠지. 조금도 특혜가 없다는건 이제 식사를 하고 다시 와보면 곧 알게 될거요. 내가 그걸 깨닫게 해줄테니 자, 어서 가서 식사를 하고 오시오.》

어쩔수 없이 권영벽은 작식대로 갔다.

갑자기 식구가 많이 불어나서 야외에 천막을 치고 림시로 차려놓은 식당안팎에서는 작식대원들뿐아니라 여러명의 녀성전투원들도 식당일과 물끓이는 일을 도와주고있었다.

천막에 들어서는 그를 본 라명희가 얼른 김이 물물 나는 밥그릇과 국그릇 그리고 찬그릇을 통나무식탁우에 날라다놓았다.

권영벽은 조반인지 점심인지 저자신에게도 똑똑치 않은 식사를 대강 설때리고는 다시금 서둘러 사령부귀틀집으로 올라갔다.

그제야 장군님께서는 권영벽에게 난로옆자리를 권하시고 자신께서도 가까이 마주앉으시였다.

《권영벽동무는 고향이 경성군 어디라고 했지?》

권영벽은 장군님께서 두해전 왕청에서 자기를 료해하실적에 들으신적이 있는 자기의 고향지명을 상기 기억하고계신데 대하여 마음속으로 은근히 놀랐다.

《네, 경성군 룡성면 수성리입니다.》

《경성서 살다가 곧장 연길현 구수애엔가 이사했다지?》

《네.》

《이 백두산지방에 와본 일은 있소?》

《없습니다.》

《이 지방에 친척이나 혹은 친구는 없소?》

《장백땅에 저희집식구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동무네 가족이야 전에 연길쪽에 있다고 하지 않았소?》

《유격구를 해산할 때 적들의 눈을 피해 장백쪽으로 멀찍이 나왔다는 말을 전해들은적이 있습니다.》

《그렇지. 내가 왕청에서 동무를 만난게 다홍왜회의가 있은 때였으니까 유격구를 해산하기전이였지.》

장군님께서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시였다.

《그후의 집소식을 모르면 식구들이 다 무고한지 어떤지도 알지 못하겠구만.》

장군님께서는 잠시 동안을 두셨다가 문득 생각나신듯 비치시였다.

《안해에 대한 소식도 모르겠구만?》

권영벽은 지방부녀회지도사업으로 나가있던 안해가 그곳 부녀회원들과 함께 적《토벌대》와의 격전을 벌린 유격대의 식사보장을 하다가 희생되였다는 소식을 교하방면으로 떠나기 직전에 들었었다. 아마도 장군님께서는 그 소식을 권영벽이 모르는줄로 여기신 모양이였다.

《들었습니다.》

《어제 여기 와서 들었소?》

《전에도 들었고 또 어제 도착하여 밤에 명희한테서 자세히 들었습니다.》

《내가 지난봄에 그 소식을 알 때에는 동무의 아들이 어머니를 잃은후 어떻게 됐는지를 몰라 걱정들했댔소.》

《아이는 저의 형이 데려갔답니다.》

《그건 다행이요. 형이 무사하다면…》

잠시 동안을 두셨던 장군님께서는 혼자말씀처럼 외우시였다.

 《희생을 각오하고 나선 싸움이지만 우리의 희생은 너무나 크오. 왜놈들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조선을 통채로 먹어치웠는데 그것을 도로 찾는 우리 싸움에서는 걸음마다 우리 사람들이 피를 바친다는걸 생각할 때에는 이가 갈리오. 그러나 이제 놈들은 비싼 값을 치르게 될거요.》

그이의 말씀을 들으면서 권영벽은 그 누구보다도 장군님께 가장 큰 상실들이 있었다는것을 상기했다. 아버님도 어머님도 나라를 찾기 위한 광복의 싸움길에서 일찌기 잃으신 장군님이시였다. 사랑하는 철주동생 역시 항일혁명전에서 전사한지 얼마 되지 않으시다는것을 권영벽은 어제밤에 라명희한테서 들었다.

그토록 크나큰 비극을 련속 체험하시고도 처 하나밖에 잃은것 없는 자기를 동정하시고 위안하시며 함께 가슴아파해주시는 장군님의 뜨거운 마음에 접한 권영벽은 위로해올려야 할 자기가 도리여 위안을 받고있는 처지에 있는것을 두고 내리사랑은 있어도 올리사랑은 드물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였다.

《이제 아이소식이랑 부모형제소식이랑 알게 될 기회가 생기겠지. 언젠가는 동무가 제집식구들을 만나게도 될거구.》

장군님께서는 혼자말씀처럼 외우시였다.

장차 자기에게 맡겨질 적후지하공작사업까지 념두에 두시고 하시는 그 말씀의 깊은 뜻을 권영벽은 아직 리해할수 없었다. 그는 그저 송구스럽기만 했다.

《사령관동지, 저희 집 식구들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아버님이나 형님도 제가 혁명승리를 이룩할 때까지는 집생각에서 떠나있기를 바라는줄로 저는 알고있습니다.》

장군님의 안광에 한줄기 추억의 빛이 어렸다.

《혁명의 길에 아들딸들을 내세운 우리의 부모형제들은 거의다 그런 고매한 정신을 지니고들 있소. 우리 어머니도 나라를 찾는 큰일을 하자고 결심한 사람은 나라찾을 생각을 해야지 집걱정을 하면 못쓴다고 하시며 나를 떠나보내셨소. 우리 동무들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은 알고보면 거의다 그렇소. 그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우리 조선인민처럼 훌륭한 인민도 많지 않을거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시여 어지간히 밝아지신 기분으로 사령부귀틀집안을 거니시던 장군님께서는 다시 자리에 와앉으시며 이번에는 전혀 다른것을 물어보시였다.

《삼도만에서 인민혁명정부회장사업을 얼마동안이나 했다던가?》

그것은 한해반쯤 되였다.

그이께서는 다시 옹구일대에서 지하공작사업을 하던 당시의 사실들에 대하여서도 여러가지로 알아보시고 나중에는 영벽이자신도 잊고있었던 왕청군정학습때의 일까지 상기시키시였다.

《전에 왕청에서 있은 군정강습때 동무가 지하군중공작경험에 대하여 강습참가자들앞에서 발표하던 생각이 나오?》

《네.》

《이것 보시오. 권동무!》

장군님께서는 마침내 이렇게 부르시며 그의 팔을 다정히 잡으시였다.

《수고스러운대로 동무가 맡아해줘야 할 한가지 중요한 일이 있어서 동무를 찾았소. 2련대동무들을 며칠동안은 푹 쉬우자고 생각했는데 동무 한사람만은 쉬우지 못할것 같소.》

장군님께서는 미안해하는 웃음을 지으시였다. 권영벽은 정중히 말씀올렸다.

《많은 일을 하고싶어서 사령관동지곁에 왔습니다. 어서 과업을 주십시오.》

《고맙소.》

권영벽에게로 향한 장군님의 부드러운 시선에 새삼스러운 기쁨이 어린다.

《내 사실 동무가 오기를 몹시 기다렸소. 동무한테는 로련한 지하공작경험이랑 있으니까 이제는 한몫을 맡아줘야겠소. 앞으로 동무가 수행해야 할 전반사업에 대한 얘기는 따로 하기로 하구 우선 이제부터 지하공작사업에 대한 상세한 강의안을 곧 준비하시오. 할수 있겠소?》

권영벽은 사령부에 도착하자마자 누구보다먼저 사령관동지로부터 과업을 받게 된것이 기뻤다.

《제 능력껏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동무들에게 하게 됩니까?》

《여러 사람이 아니구 한사람이요. 장백현 20도구 신흥촌에서 촌장노릇을 하는 리제순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우리가 잘만 가르쳐주구 이끌어주면 장백현에 조직하게 될 조국광복회조직의 믿음직한 핵심일군으로 될수 있는 동무요. 우리를 만나보겠다고 리동학동무네 별동대를 따라서 곰산밀영까지 들어와 검질기게 기다렸다가 끝끝내 소원성취한것만 봐두 시작한 일은 기어이 끝장낼줄 아는 사람인것 같소. 나를 만나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시켜달라고 하는것을 그보다 장백지구에 조국광복회조직들을 내오기 위한 사업을 하는것이 우리에게는 더 절실하다는것을 설득시키고 그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하였더니 그렇게 하겠는데 강습을 좀 달라고 제기했소. 혁명을 하자는 열의도 높고 세상물계도 알고 사람이 호방하고 쾌활하고 겸손하기도 하고 또 대중을 이끌만한 자질도 갖추고있는데 아직 우리의 정치로선을 잘 알지 못하고 지하공작경험이 거의 없소. 정치로선과 정치정세에 대한 강습은 내가 직접 주겠소.》

장군님께서 친히 강습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대상인것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이만저만 중요한 과업이 아니였다.

《강습은 언제부터 며칠간이나 하게 됩니까?》

《그 동무가 불원간 오게 될거요. 갑산에 국내 반일운동자들의 현실태와 실정을 잘 알뿐아니라 자기처럼 투쟁방도를 몰라서 모대기는 전날의 동무가 한사람 있다고 해서 그러면 그 사람이 갑산에서 그냥 살고있는지 알아보고 다시 오라, 다시 오면 강습을 주겠다고 일러보냈는데 오늘이나 래일이라도 오게 될지 모르오. 오면 곧 강습을 시작해야지. 그러나 오래 할수는 없소. 오래 끌 시간이 없소. 우리는 하루빨리 백두산지구에 조국광복회조직을 내와야 하오. 우선 이번에 짧지만 실속있게 강습을 주어서 사업에 착수시키고 그 다음은 실천과정을 통해 지도해주어야 하겠소…》

권영벽은 자기가 맡고있는 과업이 비단 이번 강습자체에 국한되지 않는것임을 비로소 명백히 깨달았다. 그는 장군님의 말씀속에서 앞으로 자기가 맡아보게 될 사업이 이번 강습의 연장으로 되리라는것을 예감하였다.

《권동무, 이 점을 명심하오. 우리가 며칠내에 앞으로 백두산지구에 뻗칠 조국광복회조직망의 한 핵심일군을 키워내지 않으면 안된다는걸말이요. 그런 각오밑에 강습을 잘 줄수 있도록 준비를 하시오.》

《명심하겠습니다.》

권영벽은 엄숙히 대답을 올렸다.

《앞으로 권동무가 부대에서 맡아해야 할 사업은 강습뒤에 따로 의논하기로 하구… 강습대상자에 대한 사전료해를 하고싶거든 〈보따지〉동무를 만나보시오. 그 동무가 〈보따지〉동무네 별동대를 따라 곰산에 들어와서 그곳 밀영동무들하구두 친하게 지냈소.》

권영벽이 장군님앞에서 물러나오려고 일어서자 그이께서는 한가지 좀 물어볼것이 있으니 잠간만 더 앉아있으라고 말씀하시였다. 권영벽은 슬며시 도로 앉았다.

《별다른게 아니요. 엊저녁에 동무네 2련대의 도착을 축하해서 벌린 연회와 오락회자리에서 보니 다들 기분좋아서 벙글거리며 법석 떠들어들대던데 곽두섭동무만은 영 활기가 없어보이더구만. 밤에도 잠못들고 담배질만 자꾸 하더라는데 무슨 곡절이 있는게 아니요?》

장군님의 밝고 민감하신 혜안에 권영벽은 새삼스럽게 내심 놀라며 경건히 머리숙였다. 엊저녁에 곽두섭은 환희에 넘친 주위사람들의 분위기에 맞추어 웃기도 하고 없는 재간으로나마 노래까지도 불렀다. 그랬으나 그 억지로 지어낸 어색한 웃음과 노래뒤에 감춰져있은 곽두섭의 울적한 기분을 어느결에 간파하신것이다.

《그럴만한 개인적인 사정이 있습니다.…》

권영벽은 자기밖에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고있었던 사연에 대하여 장군님앞에 솔직히 말씀드리기 시작하였다.

《…그 동무에게 기구한 운명의 곡절속에 비밀약속을 맺었던 녀동무가 있었습니다. 조분옥이라고 하는 동무인데 제가 삼도만유격구사람들을 데리고 처창즈유격구로 옮겨오던 당시부터 아는 동무입니다. 적들의 〈토벌〉에 일여덟이나 되는 일가족을 몰살당하고 혼자 남은 동무로서 원쑤를 갚자고 처창즈에 와서 입대했습니다. 곽두섭동무는 처창즈에서 조분옥동무의 구원을 받은 일이 있는데 그때부터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일시 헤여졌다가 약 반년이 지나서 마안산에서 다시 만났는데 그때는 분옥동무가 〈민생단〉혐의를 쓴 때였습니다. 그러나 분옥동무를 여전히 몹시 사랑하고있었던 두섭동무는 절망에 빠져있다싶이한 분옥동무에게 앞날에 대한 신심과 삶에 대한 의욕을 주고싶은 열렬하고 적극적인 애정심으로부터 그와 약혼했습니다. 때가 때였던만큼 이 약혼은 비밀리에 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 두사람만 아는 비밀이 돼서 저도 모르고있었는데 지난 여름에 교하에서 최현동무네 부대를 만나 그 동무들에게서 마안산에 남은 4중대동무들이 모두 〈민생단〉혐의를 벗고 〈민생단〉문서보따리도 사령관동지께서 친히 불사르셨다는 꿈같은 소식을 들은 날 곽두섭동무가 처음으로 저에게 비밀약혼에 대해 고백하는 말을 듣고 알았습니다. 두사람사이에 엄격히 비밀에 붙여두기로 약속돼있었지만 두섭동무는 〈민생단〉문서보따리가 불타버리고 모든것이 무효로 선포되였다는걸 알자 너무 기쁜 나머지 저에게 고백한것입니다.…》

권영벽은 비밀약혼의 래력과 그들이 마안산에서 슬픈 리별을 하던 정형에 대하여 들었던대로 요약하여 말씀드리고 뒤말을 이었다.

《…교하땅에서도 그랬지만 사령부를 찾아오는 길에서도 두섭동무는 늘 분옥동무를 생각하고있었습니다. 그 동무는 주력부대에 오게 되면 지난날의 다른 4중대원들과 같이 〈민생단〉혐의루명을 벗고 활기차게 지내고있는 분옥동무를 꼭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어제 여기 와보니 그 동무는 주력부대에 있지 않았습니다. 장철구아주머니에게 알아보니 사령관동지께서 북만에서 마안산으로 나오시기 얼마전에 행방불명이 되였다는것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잃어졌다는거요?》

시종 그늘진 안색으로 묵묵히 듣고만계시던 장군님께서 조용히 물으시였다.

《림강현 마의하부근 어디라던데 갑자기 맞다든 적과 뜻하지 않은 싸움을 벌릴 때 없어졌다고 합니다. 급한 정황에서 잃은 그 동무를 찾아볼만한 형편이 못됐기때문에 그냥 걱정만 하며 떠났다고들 합니다.》

《그럼 생사여부도 알지 못하겠구만?》

《네.》

장군님께서는 사뭇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앉아계시다가 마음을 진정하실수 없으신듯 자리에서 일어나시였다. 그이께서는 한참동안 귀틀집안을 천천히 거닐으시며 무슨 생각엔가 잠겨계시더니 어느결에 바람처럼 소리없이 슴새여들어왔던지 아까부터 출입문곁의 통나무의자끝에 앉아있는 전령병을 문득 찾으시였다.

《봉길이, 사령부작식대에 가서 장철구아주머니를 사령부에 이제 곧 왔다가란다구 이르오.》

주봉길이가 장철구한테 간 뒤에도 장군님께서는 자리에 앉지 못하시고 그냥 거니시며 지난 일을 추억하여 말씀하시였다.

《내가 지난봄에 마안산에 나와서 〈민생단〉문서보따리를 불사르기전에 4중대동무들을 한사람씩 따로따로 만나서 다 담화해본 일이 있는데 그때엔 조분옥이라는 녀대원이 없었소. 〈민생단〉혐의문건은 있으나 사람이 없는것이 몇건 있었는데 그가운데 곽두섭동무의 애인의 문건도 있었는지 모르겠소. 그때 내앞에 그 〈민생단〉문서보따리를 내놓은 정치주임이라는 사람이… 그 사람이 연길사범학교엔가두 다녔다는 홍범이라는 사람인데 아주 편협하기 짝없었소. 그 사람이 문제거리로 된다는 사람들의 명단을 내놓고 문건만 남아있는 사람들은 유격대에서 도주해버리고 본인들은 현재 없다고 하기에 내가 혹시 〈민생단〉으로 몰아 없애치우고 그따위 소리를 하지 않는가 따진 일이 있소. 그러나 모해를 받아 죽은건 아니고 본인들도 없고 해서 더 문제를 세우지 않고 그 문건들도 다 함께 불태워 없애치우게 했소… 곽두섭동무가 자기 애인이 어떻게 없어졌는지를 몰라서, 말하자면 불명예스럽게 행방불명이 된것이 아닌가 해서 더 기분없어하며 고민하는게 아니요? 애인이 없어졌다는 그 사실자체도 물론 가슴아프겠지만…》

《그런것 같습니다. 전날의 다른 4중대동무들은 거의다 있는데 꼭 만나게 될줄 알았던 분옥동무가 없다는것자체두 가슴찢기게 아픈 일이구 더구나 그전날의 루명을 벗지 못한채 없어졌기때문에 더 괴로와하는것 같습니다.》

조심스러운 손기척소리와 함께 장철구가 들어왔다. 방금 점심식사차비를 하다 온듯 손과 얼굴이 시뻘갰다.

《바쁜 시간이겠는데 찾아서 미안합니다. 한가지 알아보고싶은 일이 있어서 와달라고 했습니다. 어서 여기 들어와 앉으시오.》

장군님께서는 출입문곁에 주밋거리며 서있는 그에게 자리를 권하시고 자신께서도 그옆에 나란히 앉으시였다.

《내가 지난봄에 북만에서 마안산으로 나오기전에 4중대에 조분옥이라는 동무가 같이 있었다는데 그 동무가 어디서 어떻게 잃어졌는지 알고싶어서 찾았습니다.》

그이의 말씀이 떨어지자 장철구는 얼결에 권영벽을 돌아보았다. 엊저녁에 권영벽이 역시 곽두섭을 대신하여 그에게 꼭같은 질문을 했던것이다. 어찌하여 장군님께서까지 조분옥의 실종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물으시는지 철구는 잠시동안 의아스러워했다. 하지만 그 까닭을 모른채 조분옥이 잃어지게 된 자초지종을 자상히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때가 아마 장군님께서 마안산에 나오시기 얼마전이였으니 3월중순쯤 될 때였겠습니다. 그때 마안산 삼포밀영에 갇혀있다싶이 지내던 우리 4중대사람들은 언 풀뿌리조차 캐먹을게 없어서 한 동무는 굶어죽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민생단〉험턱을 쓴 사람들을 죄인다루듯 취급하던 사람들이 낟알 한줌인들 쥐여주나요? 그 문서보따리를 지키고앉은 홍범이라는 정치주임한테랑 먹을걸 좀 달라구 구걸하다싶이 했는데도 눈섭 하나 까딱 안하구 손톱만 깎더라질 않겠습니까. 너희들은 죄진놈들이니 굶어죽는편이 차라리 자기네한테도 시끄럽지 않고 좋다는 심보였지요…》

지난날의 천대받고 수모받던 일을 더듬지 않을수 없었던 장철구의 눈가에서는 부지중 이슬방울이 굴러내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른들두 어른들이였지만 더구나 죄없이 〈민생단〉험턱을 쓰구 령너머골짜기에서 굶어죽구 얼어죽어가는 아동단원들의 기막힌 정상을 보구들와서는 다들 참지 못해서 이대로 굶어죽을수 없으니 아무데 가서나 식량을 얻어오자구 들고 일어들났습니다. 홍범이랑 못간다고 막는것을 막 우겨대고 림강쪽으로 나갔습니다…》

그렇게 하여 간것이 마의하방면이였다는것이다. 4중대대원들은 몇개 소조씩 나뉘여서 산간주민들에게서 식량을 구하기도 하고 놈들에게서 빼앗아내기도 했는데 어느날 밤 장철구와 조분옥이 속했던 소대는 중대의 집결지점을 향해가다가 불의에 마주오고있던 적《토벌대》놈들과 조우했다는것이다. 너무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불시에 몰사격을 가하며 덮쳐드는 적앞에서 곁사람을 살펴볼 경황도 없었다고 하였다. 총도 쓸만 한 총이 못되였던데다 탄알도 서너발씩밖에 없었으므로 대적해 싸울 형편도 못되여 다들 제멋대로 적을 피해 들고뛰여 집결지점에 가보니 조분옥을 비롯해서 두사람이 없어졌더라는것이다. 그후 얼마 안되여 장군님께서 마안산에 나오시여 4중대대원들을 부르신다는 통신이 와닿아 그들은 마의하부근에서 떠나 마안산으로 달려왔었다는것이다.

 《…나랑 같이 터무니없는 험턱을 쓰구 숱한 마음고생이랑 했던 그 마음씨 고운 분옥이가 〈민생단〉문서보따리에 불이 붙는걸 보지 못하는게 섧어서 저는 그때 남보다 더 울었습니다. 저는 살아서 장군님덕에 밝은 날을 보는데 분옥이도 살아서 그걸 같이 당했더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분옥이두 저처럼 일가친척 다 잃은 홀몸으루 혁명의 길에 나섰다가 나쁜놈들한테 걸려서 갖은 수모를 다 당했는데…》

장철구는 뒤말을 채 맺지 못하고 눈물을 삼켰다. 어느새 눈두덩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적〈토벌대〉놈들과 불시에 맞다들었다는데가 어디쯤 되는지 모르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그가 어느 정도 진정되기를 기다리셨다가 다시금 조용히 물으시였다.

《마의하부근에 있는 샘물골이라는데를 지나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달밤에 지나며 보니 대여섯호나 되는 귀틀집이 띠염띠염 널려있는 작은 마을이 하나 있었습니다.》

《샘물골… 그 마을에서 무슨 다른 특징적인것을 본 기억은 안납니까?》

장철구는 나지 않는다는 대답이였다.

《알겠습니다. 여기 좀 앉았다가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그이께서는 장철구를 잠시 눌러앉히셨다가 보내시였다. 혹시 여기 왔다가 눈물을 보이며 나가는 철구를 곽두섭이 보면 자기가 채 알지 못하고있은 가장 슬픈 일이 자기 애인에게 있은것으로 생각하게 될것 같아서 그러시는 장군님을 뵈오며 권영벽은 가슴속이 찡하니 저려들었다.

《그래서 곽두섭동무가 영 기분이 없어했구만…》

철구아주머니를 바래주시고 출입문가에서 돌아서신 장군님께서는 문득 끊어졌던 말씀을 잇듯 혼자말씀을 하시고 두팔을 결으신채 시름겨운 무거운 걸음으로 이리저리 거닐으시였다.

《그 동무가 손맥이 풀리겠는데 맥을 놓지 말구 혁명가답게 고민하는 기색두 보이지 말구 사업을 잘하도록 영벽동무도 도와주고 나도 도와줍시다. 내 생각에는 두섭동무의 애인이 대렬에서 기피했거나 도주한것 같지 않소. 전사하지 않았으면 피치 못해서 대렬에서 떨어지게 됐을거요. 그 녀동무가 어디 살아있다면 혁명에 대해서도 그렇고 곽두섭동무에 대해서도 그렇고 잊지 못하고있을거요. 마음속에 변함이 없을거요. 원쑤놈들에게 일가족을 다 몰살당하고 그 원쑤를 갚자고 입대까지 했다는 동무이니 시련이 있어도 자기의 절개를 엔간해서 꺾지 않을거요. 동무이야기랑 철구아주머니이야기랑 들어보니 의지도 굳고 마음도 깨끗한 동무같은데 그런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소. 살아있으면 언제든 혁명의 길에서 떳떳이 만나게 되리라는 신심을 가지고 두섭동무가 혁명을 잘하도록 도와주시오.》

권영벽은 그 말씀대로 할것을 다짐하며 일어났다.

《됐소. 그럼 가서 강습을 줄 준비랑 하오.》

권영벽이 사령부에서 나서기도전에 리동학이 들어섰다.

《최현동지네 부대에서 통신원을 보내왔습니다.》

리동학은 례의 그 미처 알아들을수 없을만치 빠른 말씨로 보고를 드렸다.

《최현동무가 통신원을 보냈다? 어디서 보내왔소?》

《통신원은 송풍라월에서 열흘전에 떠나왔다는데 우리를 찾지 못해서 2련대동무들처럼 이 백두산일대를 수태 헤매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최현동지는 부대를 데리고 우리가 이미 무송땅에서 자리를 떴기때문에 룡강산맥을 타고 림강방향으로 나가겠다고 하더랍니다.》

《무송현성전투에 참가하게 하자고 서강쪽에 오라고 했는데 너무 늦어와서 무송땅에서 우릴 못만났구만. 최현동무네가 몹시 지체된걸 보니 오는 도중에 뜻하지 않은 정황들이 여러번 생겼던 모양이요. 그래 통신원은 어디 있소?》

《옷이 너무 험상해서 갈아입히는중입니다. 여름옷을 입고왔는데 말이 아닙니다.》

《옷을 갈아입거든 여기 데려오시오. 최현동무네가 그새 어떻게 지내왔는지 내가 직접 들어봐야겠소.》

곽두섭이의 애인에 대한 이야기로 하여 그늘지셨던 장군님의 안색은 비로소 여느때처럼 밝아지시였다.

 

4

 

림강현 삼도구하는 룡강산줄기의 깊은 계곡을 누비며 서쪽으로 흘러내려 압록강중류에 합쳐들면서 서부조선의 최북단인 중강진 여울목에 가래섬이라고 하는 섬을 만들어낸 압록강의 한 지류이다.

이 삼도구하와 그의 곁가지강인 마의하의 합수지점에서 마의하물줄기를 따라 산골치고는 꽤 넓다고 할 버덩으로 들어가면 그 버덩이 점점 좁아지다가 아주 막혀버리는것 같은 골짜기어귀에 하천이름과 같은 마의하부락이 자리잡고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룡강산줄기너머의 무송땅에 이르기까지 백수십여리의 무시무시한 원시림지대라고 이르는 깊은 산간이다. 그러나 이 깊은 산간지대에도 두셋 혹은 대여섯호의 귀틀집들이 모여앉아 이름조차 없는 마을을 이루고 사는데들이 간혹 있었다.

마의하의 한 골짜기인 샘물골에도 그런 조그만 산간마을이 있었다. 마의하의 흐름을 이루어주는 수많은 골짜기들가운데서 유독 이 골짜기에 샘물골이라는 이름이 붙은것은 마의하의 원천이 여기서 시작되고있기때문인지 그것은 알길이 없다.

아무튼 맑은 벽계수가 흘러나오고있는 이 산골짜기를 따라 침활혼성수림속으로 한참 들어가노라면 그 벽계수가 검은 바위짬에서 솟아나와 우묵한 흰 너럭바위속에 충충 고이는 샘물이 나지고 그 주변의 숲속에는 분비나무껍질로 지붕을 해씌운 나지막한 귀틀집 몇채가 띠염띠염 자리잡고있다.

열서너해전에는 아무 인적도 없던 여기에 처음으로 발길을 들여놓은 윤로인이 이 고장에 눌러앉은것은 바로 그 약효험이 있는 샘물을 만났기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를 따라 만포땅에서부터 예까지 쫓아들어온 검둥이는 모가지에 비루가 먹어서 보기가 망측스러웠다. 그런데 이 산골짜기에 들어오면서 물밑의 돌을 들추어 가재도 잡아먹고 버들치도 잡아먹느라 몇번 미역을 감고나더니 비루먹었던 모가지가 씻은듯이 아물어버리고 반질반질 윤기나는 새까만 털까지 다시 돋아나더라는것이다.

이 샘물에서는 비누 없이도 때가 얼마나 잘 지는지 시중들어줄 사람 없는 고독한 늙은 인생이 혼자 살기엔 아주 편리했다.

윤로인한테도 한때는 남부럽지 않은 번듯한 가정이 있었다. 그러나 저주할 운명은 그에게서 무던한 마누라와 끌날같은 자식들과 어진 며느리를 무정하게도 차례차례 빼앗아갔다. 처음에는 마누라가 병들어죽고 다음에는 작은 아들이 굶어죽고 그다음에는 큰아들이 그 무슨 부역장에서 돌에 치워죽고 나중에는 시아버지 공대에 극진하던 젊은 며느리가 윤로인이 어쩌다 집을 뜬 사이 밤중에 뛰여든 왜순사놈에게서 모욕당하고는 자기몸을 스스로 드레박우물속에 던져버렸다. 그 어질고 예쁘던 며느리를 모욕한 순사놈으로 말하면 금방 열병을 앓고난 맏아들을 부역장에 내몰아 돌에 치워 죽게 했던놈이였다.

며느리마저 잃은 윤로인은 그를 묻은 이튿날로 며느리가 빠져죽은 마당안의 드레우물을 허물어 묻어버리고 이부자리 한채와 가마솥 하나만을 뽑아 지게에 얹은채 왜놈들의 꼴을 보지 않고 살데를 찾아서 압록강을 건너 이 깊은 산골에까지 들어온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 적막강산에 하나뿐이던 귀틀집이 일곱채로 늘어나고 반백도 채 안되였던 그의 머리와 수염과 눈섭에까지 백설이 하얗게 덮이도록 윤로인은 여전히 고적한 혼자살림을 해왔다. 그의 유일한 식솔이란 검둥이의 증손인 복둥이뿐이였다.

그렇던 윤로인에게 올해 춘삼월 어느날 귀한 식솔 한사람이 문득 생겨났다.

아직 눈석이가 시작되기전, 만산에 눈이 그냥 하얗게 덮여있던 때의 일이다. 그날 새벽에 부엌아궁에 지펴넣을 땔나무가 모자라서 바깥에 나갔던 윤로인은 새벽바람에 어디 가서 돌아다니다왔는지 온몸의 털에 눈을 잔뜩 묻히고 마당안에 달려들어온 복둥이가 바지를 자꾸 물어당기기에 무슨 큼직한 노루라도 옹노에 걸려든줄로 여겼다. 덫이나 옹노에 걸린 짐승은 맹수가 채가기전에 끌어와야 한다. 불이 사위여가는 부엌아궁속에 서둘러 통나무를 서너토막 물려놓고난 윤로인은 지체없이 복둥이를 따라 산에 올랐다.

간밤에 심상치 않은 자지러진 총소리가 울렸던 등판의 이깔나무밭머리에 이른 그는 곰바위라고 이르는 눈덮인 청바위돌옆으로 난 어지러운 발자국자리를 따라가다가 눈을 온통 시뻘겋게 물들이고 쓰러져있는 숨진 나그네와 맞다들었다.

윤로인은 우선 눈가림이나 시켜놓고 후에 묻어줄 작정으로 눈을 퍼서 대강 묻어주었다.

그리고 돌아서려는데 령리한 복둥이는 다시금 그의 바지를 물어당기며 저편 이깔밭머리에 보이는 섶나무가리쪽으로 이끌어갔다.

우에 쌓인 눈이 한쪽으로 무너져내려앉은 그 나무가리속에서 윤로인은 가슴에 총을 부둥켜안은채 정신잃고 쓰러져있는 묘령의 단발머리녀자를 발견하였다. 누덕누덕 기운 누런 솜군복같은것을 입었는데 아래도리가 온통 피자박이였다. 그 역시 숨진 사람인줄 알았더니 피기없는 밀랍같은 얼굴에 날아떨어지는 이른새벽의 성에가루들이 녹아서 물방울로 변하는것이 보였다. 아직 온기도 있고 맥박도 뛰고있었다.

윤로인은 그를 조심스럽게 둘쳐업고 자기의 귀틀막에 내려다 눕혀놓았다. 꼭 오래전에 그를 남겨두고 저승길에 갔던 며늘아기가 피자박이 되여 누워있는것만 같아서 윤로인은 더운 물에 적신 토스레수건으로 손발을 닦아주고 찜질해주며 그옆에 종일 지켜앉아있었다. 묘령의 단발머리녀자는 이미 집안에 광솔불을 켜놓은 초저녁에 가서야 눈을 떴다. 그러나 인차 다시금 정신이 혼미해지는지 새까맣게 말라버린 입술을 움직거리려다 말고 무겁게 눈을 감고말았다.

이튿날 새벽에야 두번째로 눈을 떴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정신이 들었는지 자기를 지켜보고 앉은 윤로인과 천정낮은 어둑어둑한 귀틀막안을 이상스럽게 둘러보고나더니 여기가 어딘가고 물었다. 윤로인은 그에게 말을 못하게 하고 그가 눈뜨기를 기다리며 끓는 가마안에 넣어두었던 감자녹말미음을 꺼내 입에 떠넣어주었다. 단발머리녀자는 미음을 받아넘기며 처량하고 구슬퍼보이는 오목한 눈에 그들먹이 맑은 눈물을 담았다. 그가 조분옥이였다.

왼쪽 장딴지에 관통상을 입고 뼈까지 다친 조분옥은 다행히 제때에 나무가리밑에 숨어앉아 손수건으로 무릎밑을 졸라매여 지혈을 시킨 덕에 소생의 가능성을 잃지 않았었다. 그러나 《민생단》 혐의를 받고 4중대에 속한 때로부터 낟알이라군 변변히 입에 대보지 못하고 눈속에서 언 풀뿌리나 캐먹으며 지내오는동안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데다가 심하게 출혈하기까지 한 그는 자주 까무러치며 빈사상태에 빠지군 했다.

윤로인은 두차례나 산 노루를 잡아다가 생노루피를 억지로 받아 마시게 했다. 눈속에서 약초뿌리를 캐다가 달여주고 짓찧어 붙여주기도 했고 또한 범뼈를 갈아서 붙여주기도 하고 여러날동안 달여서 그 국물을 마시게도 하였다. 슬하에 단 한점의 혈육도 남아있지 않는 윤로인은 그 역시 혈혈단신인 조분옥을 딸처럼 여기고 보살피며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계절이 바뀌여 시내가 개버들에 버들강아지가 피여나면 그 버들강아지를 꺾어다가 분옥이에게 보여주고 양지쪽 산비탈에 진달래가 피여나면 그 진달래를 꺾어다가 분옥이한테 가져다주었다. 해볕이 쨍쨍하게 내려쬐는 따뜻한 날에는 종종 그를 업어내다가 샘물가의 흰 너럭바위우에 앉혀주기도 했다. 친딸이라 해도 쑥스러워할 그 극진한 사랑앞에서 조분옥이가 약간이나마 주저하는 기미를 보일 때면 불로 지지는것 같이 가슴을 뜨끔하게 하는 사랑넘친 욕설을 꺼리낌없이 퍼부어대고 준절히 힐책하였다. 그 진정어린 보살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윤로인은 노염만 내는것이 아니라 슬픔에 잠기군 하였다. 정녕 윤로인에게 있어서는 조분옥이가 친자식맞잡이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더 귀중한 존재였다. 자기의 혈육들에게 못다 퍼부어줬던 애정을 윤로인은 분옥이에게 아낌없이 몽땅 기울였던것이다.

옹근 석달동안 조분옥은 뼈를 상한 그 다리에 부목을 처맨채 땅을 디뎌보지 못하며 지냈고 그다음 다시 한달동안 쌍지팽이와 윤로인의 팔에 의지하여서만 바깥을 나다녔다.

허구한 나날 집안에 누워있거나 앉아있어야만 했던 분옥은 많은 시간을 심심풀이로 자기를 찾아오는 마을아이들과 보냈다. 그 아이들은 그에게 재미나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 분옥은 그들에게 삼도만과 처창즈에 있었던 아동단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그 아이들이 부른 혁명가요도 배워주었다. 이야기도 노래도 밑천이 떨어진 다음에는 마을아이들에게 그들의 이름이 어떤 모양으로 생겼는가를 그려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 이름자모양을 보고 무척 신기해하고 기뻐하는것을 보고는 그들에게 자기가 아는껏 글을 배워주기 시작했다.

분옥의 가르침을 받은 마을아이들이 목판에 담은 모래나 땅바닥에 사람의 말을 그림으로 옮기는것을 볼 때면 윤로인은 더없이 흡족해했다. 분옥이가 자기 집에 있게 된 때로부터 자기만이 아니라 온 동네아이들도 사는 보람을 맛보게 된것이다.

마을에 어쩌다 수상한 사람이라도 나타나면 윤로인이 분옥의 곁에 붙어있지 않아도 아이들이 교대로 망을 보며 지켜섰다가 저들만이 아는 그 무슨 신호를 하여 나타난 정황을 분옥이에게 미리미리 귀띔해주군 하였다. 온 마을아이들이 《만포집》누나를 따르고 《만포집》할아버지를 전보다 더 잘 도와주었다. 그 애들은 윤로인을 대신하여 누나를 보살펴주고 그의 시중을 들어주고 집일을 도와주었다. 그의 집에는 언제나 나무가 가득 쌓이고 그의 크지 않은 부대기밭에는 김이 돋아날새없이 말끔히 뽑히군했다.

아이들만이 아니였다. 마을의 처녀들과 아낙네들도 분옥이에게서 유격대의 이야기를 듣고 유격대의 노래를 배우고 글까지 배우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비위좋은 마을의 더꺼머리총각들까지 그런판에 끼여들었다. 하여 윤로인네 작은 귀틀막은 낮이나 밤이나 흥성거렸다.

분옥이가 윤로인곁에 얹혀있은 몇달동안은 윤로인에게 있어서나 마을사람들에게 있어서나 또 분옥이에게도 산다는것이 얼마나 즐거운것인가를 가슴흐뭇이 느끼게 한 날들이기도 했다. 분옥은 이해에 윤로인이 진갑을 맞이한다는것을 알아내자 생일날을 기다려 수수하나 정성어린 진갑잔치를 차렸다. 그때에는 이미 분옥이가 불편없이 자유로이 움직이기 시작한 때였다. 온 마을의 아낙네들과 처녀들이 분옥을 도와 성의를 합쳤다.

 쉰여섯살때 마지막 식솔마저 잃고 이 샘물골에 들어와박힌 다음에는 자기가 이 세상에 태여난 날을 오히려 저주하며 살아온 윤로인이였다. 환갑날도 그냥 번지며 열네해동안 알아주는 사람 없이 해마다 허무하게 지내왔던 그날 뜻하지 않은 진갑상을 받고 분옥이가 올리는 큰절까지 받은 늙은이는 이제는 죽어도 유한이 없겠노라며 상머리를 감격의 눈물로 즐펀하게 적셨다.

고독한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서야 자식을 가진 부모의 행복이 뭣인지를 새삼스럽게 맛본 윤로인은 그 귀중한 양딸을 위하여 모든 사랑을 아낌없이 바쳤다. 늙은이는 갸륵한 정성을 가진 분옥이가 자기를 다시금 고독속에 버리고 곁을 떠날수 있다는데 대하여서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의 양딸에게 지난 생활에 대한 미련이 없지 않겠지만 죽을 고비를 겪었던 녀자의 몸으로 그가 고생스러운 그전 생활에로 되돌아갈 생각은 감히 못할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윤로인의 극진한 사랑도 청춘이 날마다 날개를 달아주는, 젊은이의 날아가는 마음을 자기의 좁은 귀틀막에 든든히 잡아매둘수는 없었다.

밤마다 소쩍새는 어째서 그리도 지꿎게 울었던것인가? 소쩍새가 우는 밤이면 분옥은 고동하강반의 그 소쩍새 울던 달밤에 자기앞을 막아서며 불같은 말을 뿜던 그 무서우면서도 고마운 사람이 못견디게 그리워 윤로인 모르게 한숨을 짓거나 눈물을 짓군 하였다. 윤로인은 때때로 그 한숨소리를 듣거나 눈물을 보고 분옥이가 무슨 일로 가슴을 태우며 근심에 잠겨있는지 묻군 하였다. 그러나 윤로인은 그 한숨과 눈물이 진정 어디에서 생기게 된것인지를 알아내지 못하였다. 만약 밤의 숲속에서 울어예는 소쩍새가 귀중한 자기 양딸의 마음을 자기곁에서 멀어가게 만든다는것을 알았더면 윤로인은 온밤 어두운 숲속을 헤매 돌아다니면서라도 분옥이 듣는데서는 그 눈치없는 미물들이 울지 못하게 쫓아버렸을것이다.

어느날 윤로인은 분옥이가 낡고 험상궂은 지난날의 솜군복을 정하게 손질하는것을 보았다. 분옥은 깨끗이 빨아 감춰두고있었던 그 솜군복을 꺼내놓고 꿰진데를 깁고 녹쓸었던 단추를 반짝반짝하게 닦아서 다시 달았던것이다. 변변치도 못하고 수상한놈의 눈에 띄우면 위험하기도 한 그 옷가지를 손질해서는 무얼하겠느냐고, 차라리 오는 겨울을 맞아 토스레솜저고리나 해입고 그건 부엌아궁에 집어넣으라고 권하는 윤로인앞에 분옥이는 여태 마음속에 묻어두고있던 말을 처음으로 내비쳤다. 이제는 몸이 다 나았으니 래일 유격대를 찾아 떠나련다고.

윤로인에게는 그 말이 무서운 청천벽력이였다. 너무나 충격이 컸던 윤로인은 금방 받아놓았던 감자옹배기에서 한알의 감자조차 집어들어 목구멍에 넘기지 못하였다.

끼니도 못들고 엽초만 풀썩풀썩 피워대며 괴로와하는 늙은이앞에서 분옥이도 래일의 리별이 지레 가슴을 에여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윤로인은 자기곁을 꼭 떠나야 하는 까닭을 구태여 묻지 않았다.

분옥이의 안타까움이 그대로 내비친 그 눈물로써 늙은이는 떠나고싶지는 않으나 떠나지 않을수 없는 그의 마음을 너그럽게 샀던것이다. 곁에 영원히 붙잡아두고싶은 양딸을 아무말없이 떠나보내기로 마음먹은 그것이야말로 늙은이가 그에게 베풀어준 가장 큰 사랑이고 마지막 사랑이였다. 분옥이가 하고싶다는대로 해준 윤로인의 양보에는 리기적인것이란 티끌만치도 없었다.

윤로인은 밤새껏 한잠도 자지 않고 네컬레의 초신을 삼았다. 분옥이가 떠나는 순간에 그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안겨준것은 그 네컬레의 초신과 두장의 노루가죽두루말이였다. 벌써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으니 길을 가면서도 또 유격대에 가서도 한장은 땅바닥에 깔고 한장은 꼭 몸에 덮고 쉬도록 하라고 그는 젖은 눈으로 당부하였다. 이웃집 아낙네들과 처녀들은 강낭떡보따리와 감자엿보따리를 안겨주었다.

온 마을사람들의 눈물어린 전송속에 분옥은 언제 다시 와볼는지 알수 없는 정든 고장과 살아서 다시 만날지 알수 없는 정든 사람들을 뒤에 남기고 반년가까운 세월을 꿈같이 흘러보낸 샘물골을 떠났다. 이곳에서 흘러간 그 생활은 압록강으로 흘러가버린 샘물골의 물처럼 다시는 되풀이될수 없는것이였다.

 

×

 

명색이 무기라고는 하나 방아쇠를 당겨도 총알이 나가지 않는, 하나의 쇠붙이나 막대기에 불과한 총을 지닌 혼자몸으로 제자리에 있기나 한지 알길 없는 중대를 찾아서 수백리 무인지경 숲속길을 헤쳐가야 했던 조분옥의 걸음은 생각만 하여도 몸서리가 쳐질만치 수난에 찬 걸음이였다.

맹수들이 사처에서 으르렁대는 밀림속의 무시무시한 밤들은 혼자서 어떻게 견디여냈던지, 헤여나올길 없는것 같던 무서운 진펄속에서는 과연 어떻게 빠져나올수 있었던지, 까마득한 낭떠러지에서 굴러떨어졌을 때엔 또 과연 어떻게 다시 일어나서 그 벼랑을 톺아오를수 있었던지 돌이켜보면 분옥이자신에게도 기적처럼 생각된다.

한번은 앞을 막아선 진대통밑을 빠져나가려다가 갑작스럽게 옆으로부터 나타난 한개 중대가량의 《토벌대》놈들에게 띄울번 하였다. 올데갈데 없이 놈들에게 잡히게 됐다고 생각된 순간 분옥은 그냥 진대나무밑에 엎드리고말았다. 그는 급했던 나머지 자기의 한쪽 발과 다리가 애어린 나무대에 걸려 그 굵은 진대나무밑에 숨겨지지 못했다는것을 알았다. 그러나 바투 다가온 적들이 이미 진대나무를 타기 시작한데다 다리를 끄잡아당기면 바싹 말라떨어진 가랑잎이 엄청난 인적기를 내게 될것이므로 어쩌지 못하고 그냥 조마조마한대로 견디고있어야만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진대나무를 타고 맨 앞머리에서 지나가던 어느 한 척후놈이 던진 담배꽁초가 행전우에 떨어져 불이 꺼지지 않은채 타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총상을 당했던 자리가 있는 왼쪽 장딴지였다. 행전을 태우며 점점 밑으로 타들어온 불티는 지난날의 상처자국에 대이며 참을수 없는 고통을 가해왔다. 말그대로 심장을 수많은 바늘로 마구 찔러대는것 같은 뜨거운 아픔이 온몸을 뒤틀게 했다. 옹근 한개 중대가 한줄로 늘어서서 진대나무를 타고 지나가는 그 시간은 몇시간 맞잡이로 길었다. 마지막놈이 지날 때까지 발가락 하나 옴짝달싹하지를 못한채 참고 견디느라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고 어찌나 억세게 깨물었던지 이발자리가 박힌 그 주먹에서는 피가 솟아나왔다. 그전날 관통상을 당했다가 아물었던 상처자리는 화상을 받아 새로운 고통으로 그를 괴롭혔다.

분옥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이전에 자기네 4중대가 있었던 마안산의 삼포밀영으로 찾아갔다.

오기가 몹시 두려웠으면서도 몹시 오고싶었고 또 오지 않을수 없었던 마안산이였다. 분옥은 설사 자기에게 터무니없는 《민생단》감투가 다시 씌워진다 해도 자기 량심앞에서 대렬기피자이며 도주자라는 불명예와 치욕은 당하고싶지 않았었다. 자기스스로 택했던 혁명의 대렬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할지언정 이 대렬에서 떨어져있을수 없는 분옥이였다. 자신을 위해서도, 자기가 돌아오지 않으면 더 큰 련대적인 화를 당할수 있는 4중대원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좋건 궂건 이 대렬속에 있어야만 자기에 대한 가냘픈 희망이나마 잃지 않고있을 곽두섭을 만나게 될것이기에 마안산에 오지 않을수 없었던 분옥이였다.

저주로움보다도 그리움이 더했던 마안산에서 맨먼저 분옥을 맞아준것은 밑둥언저리의 껍질들이 벗겨져있는 여러대의 굵다란 분비나무들이였다. 유격대에서는 흔히 녀대원들이, 특히 작식을 맡은 사람들이 저렇게 나무껍질을 자주 벗겨다 칼도마 대신으로도 쓰고 소랭이나 함지 대신으로도 쓰고 음식그릇 대신으로도 쓰군 하였다.

여기가 바로 유격대원들의 밀영이 있은 곳이라고 말해주는것 같은 그 껍질 벗겨진 나무들을 본 조분옥은 마치 그리웠던 전우들을 만나기나 한듯 그것들을 정답게 쓸어만졌다. 쓸어만지며 걷다가 어느 한 나무에 락서처럼 숯으로 씌여져있는 새까만 네개의 글자를 보고 그앞에 멈춰섰다.

 

명혁!

혁명!

 

분옥이자신의 글씨였다.

언젠가 장철구아주머니와 같이 둘이서 나무껍질을 벗기려 이리로 나왔다가 (그때에는 작식도구로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아먹기 위해서 껍질을 벗겼다.) 혁명이라는 두 글자를 자리바꿈하여 명혁이라고 이름을 붙였노라고 하는 장철구의 죽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무심결에 불타는 나무꼬챙이로 새겨놓은 글이였다. 초신발로 락엽들을 밀어버리고 이미 시들기 시작한 무성한 수풀을 헤쳐보니 그때 장철구아주머니와 같이 눈우에 피워놓고 언손을 녹이군 하던 불무지자리가 시꺼멓게 드러났다.

《왔구나!》

분옥은 저도 모르게 혼자말을 뇌였다. 천신만고한끝에 드디여 제 고향집으로 돌아온 방랑자와 같은 심정으로 그는 가슴을 울렁거리며 절뚝거리는 다리를 한결 재게 옮겨짚었다.

누렇게 황이 든 관목덤불밑에서 등어리에 한쌍의 줄무늬가 박힌 커다란 다람쥐 한마리가 불쑥 뛰여나와 귀를 쭝긋거리며 눈이 올롱해서 그를 쳐다보더니 제 몸체보다 오히려 커보이는 소담한 꼬리를 흔들거리며 풀속에 가리워지다싶이 한 오솔길을 따라 둔덕너머로 사라졌다. 바로 그 둔덕너머에 4중대의 귀틀집이 자리잡고있었다. 다람쥐란 대개 사람들이 거접하고있는 숲속에서만 산다는 말을 상기한 분옥은 금시 자기를 보고 소리치며 달려나와 얼싸안을 자기네의 중대원들을 만나게 될것만 같았다.

마침내 둔덕우에 올라섰다. 그러나 아직도 빽빽하게 들어선 분비나무들과 봇나무들이 눈앞을 가리우고있어 둔덕아래에 숨어앉은 귀틀집은 보이지 않았다.

(동무들, 제가 왔어요!)

한바탕 그렇게 소리라도 지르고싶었다.

심장은 달음박질쳤다. 몸을 앞질러 마음은 벌써 그 귀틀집안에 들어가있었다.

지금껏 한순간도 긴장을 늦춰보지 않았던 조분옥은 이제야말로 아주 조심해야 한다는것조차 망각하고 가랑잎들을 마구 밟아 와삭와삭 소리를 내며 귀틀집 뒤울안쪽으로 내려갔다.

별안간 어디선가 무엇인지 탁― 하고 부러지는 되알진 소리가 튕겨났다. 불시에 들린 그 소리에 조분옥은 머리칼이 주뼛해졌다. 그는 온몸을 옹송그리며 바싹 예민해진 귀를 도사렸다. 사위는 잠잠했다.

어디서 난 무슨 소리였을가?

귀틀집이 있는쪽으로만 긴장하게 살피고있던 분옥은 금방 자기가 지나온 뒤켠에서 와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삭정이가 부러지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선채로 말라죽은 강대나무밑에서 금방 꺾어져내린 나무가지 하나가 허리를 치게 자라있는 누런 수풀을 눌러대며 서서히 번져지는것이 보였다. 그제야 분옥은 금방 자기가 넋없이 지나오면서 그 강대나무에 낮추 드리워있던 가지를 자기 몸으로 꺾어댄줄을 알았다. 노루가 제방귀소리에 놀란다더니 분옥은 자기가 꺾어버린 나무가지에서 난 소리에 놀랐던것이다.

그는 이마에 돋아났던 진땀을 씻어대며 다시금 숲을 헤쳐내려갔다. 웬일인지 귀틀집이 있는 아래쪽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마침내 나무잎사이로 거뭇거뭇한 귀틀벽이 언뜩거리는 어방까지 다가선 분옥은 한결 조심하며 앞을 가리는 나무가지를 헤쳤다.

먼저 그의 눈에 띄운것은 시든 잡풀이 듬성듬성 돋아나있고 마른 새똥들이 널려있는 반나마 썩어버린 새초이영이였다. 그 지붕의 한복판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러져있었다.

다음으로 분옥의 눈에 비쳐든것은 굴뚝모퉁이에 번져져있는 통나무굴뚝이였다. 그 굴뚝을 지붕언저리에 비끄러매여 세워놓았던 칡넝쿨이 세월의 비바람에 썩어서 끊어지며 굴뚝이 번져졌는지 통나무굴뚝 웃동아리에 썩은 칡넝쿨이 헐거분하게 감겨져있었다. 그 굴뚝나무에 상기도 푸른 기운을 채 잃지 않은 이끼가 덮여있는것으로 미루어보면 이 귀틀집에서 사람들이 살지 않은지가 벌써 퍼그나 오래였던 모양이다.

헐벗음과 굶주림, 수모와 천대 속에서도 혁명을 해야 하겠다는 변함없는 뜻을 간직한채 서로 힘과 용기를 주고 동지적인 정을 나누며 억척같이 살아왔던 4중대동무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자기가 중대사람들과 떨어져 림강 마의하의 심심산골에서 반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는 사이 자기 중대원들의 운명에 얼마나 거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는지를 알리없는 조분옥은 페허로 변한 어제날의 중대병실안에서 망연한 기분에 잠기고말았다. 문짝이 떨어지고 위태롭게 한옆으로 씰그러진 귀틀집안에 남아있는것은 공허뿐이였다. 썰렁한 바람이 감도는 그 집안에서 제멋대로 나와놀던 쥐새끼가 분옥이 들어서는 인기척을 느끼고 유들유들하게 살찐 몸을 벽밑의 커다란 구멍속에 별로 서둘지도 않고 천천히 숨겨버리고말았다.

작식가마가 걸려있었던 가마후렁에는 빈구멍이 뚫리고 부뚜막은 허물어져내려앉았다. 썩어서 내려앉은 지붕의 새초가 무드기 쌓여있는 집안의 한복판에는 해볕을 보지 못한채 콩나물대처럼 희멀겋게 자라오른 몇대의 가냘픈 풀대가 집안을 감도는 바람결에 흔들거렸다.

분옥은 맥풀린 걸음을 옮겨 마당으로 도로 나왔다. 인적이 미쳤던것 같지 않게 잡초가 성한 마당 한옆에는 풀대속에 끼여있는 잘다란 숯덩이들과 평평해진 재무지가 있었다. 지난날의 자취를 더듬으며 중대원들의 행처를 알아낼 티끌만한 건덕지라도 찾아볼가 하여 눈을 살피던 분옥은 땅바닥에 붙은채 그밑으로 돋아난 쑥대에 구멍이 뚫려버린 한쪼박의 누렇게 썩은 종이장을 보았다. 고르롭지 못한 한쪽 가생이에 까만 테가 둘린것으로 보아 타다 만 종이쪼박이였다. 거기에 벌거우리한 인즙이 찍힌 흔적같은것이 있었으므로 분옥은 웬 문서쪼각이 아닌가 하여 조심스럽게 그 종이쪼박을 들어 살펴보았다. 인즙으로 손도장을 눌렀던 자리 같았으나 잉크로 썼던 글자흔적이 비를 맞아 죄다 지워져있어 무슨 문서쪼각이였던지 알도리가 없었다.

썩어버린 종이쪼박은 불에 타버린 종이마냥 그의 손에서 바스러떨어져 바람에 흩날렸다. 분옥은 흩날려 허공중으로 날아가는 썩은 종이가루를 바라보면서도 그것이 다름아닌 《민생단》혐의문서보따리를 불태워버리고 남은 마지막 흔적이였다는것을 몰랐다. 자기의 지장이 찍혀있는지도 모를 그 저주스러운 문서장들이 이미 재가루로 변해버린지 오래 된다는것만이라도 알았던들 조분옥은 페허로 변해버린 지난날의 병실과 병실앞마당에서 허무한 절망감에 빠지지는 않았을것이다.

뉘엿뉘엿 저물어가고있는 늦가을해가 텅 비고 썩어버린 귀틀집과 잡초무성한 마당에 쓸쓸한 그늘을 던지며 숲머리에서 기울어져내렸다.

분옥은 페허로 변한 귀틀집보다는 더 마음이 끌리는 서쪽 산비탈의 숲속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마른 바늘잎들이 우실우실 떨어지는 분비나무숲을 헤치며 한참동안 걸은 그는 꿈속에서도 잊지 못할 구새먹은 봇나무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모진 눈이 펑펑 쏟아져내리던 이른 봄날 여기서 맺은 자기와 곽두섭의 비밀약속을 지켜봐주었던, 늙은 할머니같은 봇나무는 변함없이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잎사귀 하나 없이 앙상한 가지들만 벌리고 서있던 그전과는 달리 채 누르지 않은 푸른 잎사귀들을 달고있었지만 그 이른봄날의 정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있었다.

자기앞에서 끝끝내 약속을 받아내고는 자기와 이 늙은 할머니봇나무를 한품에 걷어안고 오래동안 눈물만 흘리던 곽두섭의 모습이 가슴속을 아프게 저미고들었다.

구새먹은 봇나무구멍에서 푸드득거리며 새 한마리가 날아났다. 어디로 날아가는지 어둑어둑해진 숲 저편 하늘로 날아가며 처량하고 구슬프게 울었다.

새가 날아가버린 어둑시근해진 하늘을 쳐다보며 서있던 분옥의 두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슴새여나왔다.

(그 동무는 지금 어느 머나먼곳에 가있는지? 만약 그라도 살아있게 되면 어느때든 여기에 나타나게 되련만…

분옥은 이제 더는 자기 혼자서 이 천고의 밀림속을 헤쳐나가기가 어려우리라는것을 알고있었다. 샘물골에서 꿍져가지고왔던 먹을것들과 초신짝들은 어느 한가지도 건지지 못한채 솟아나오지 못할번 했던 진펄속에 빠뜨리고말았다. 그때 목숨과 함께 건져낸것은 쓸모없으나 버려서는 안되였던 총뿐이였다. 윤로인이 말아준 노루가죽도, 부시돌과 부시깃도 배낭과 함께 죄다 진펄속에 묻어버렸다. 먹을것도 입을것도 불도 못주는 총 한자루밖에 가진것 없는 자기가 이제 혼자서 어떻게 살아날 길을 찾을것인가?

맥없이 봇나무밑에 주저앉은 분옥이는 봇나무밑둥을 그러안고 거기에 몸을 실었다. 몹시 굶주리고 지친 그는 하염없이 흐르는 절망의 눈물로 봇나무껍질을 적시다가 그대로 잠들고말았다. 누기찬 소슬한 늦가을바람이 마안산 숲우로 무거운 구름장들을 몰아왔다.

백두산보다 겨울이 늦게 오는 마안산에는 이날밤에 이해의 첫눈이 내렸다. 분옥은 잠든 그대로 눈속에 묻히기 시작했다.…

 

5

 

최현부대에서 왔던 통신원 신아바이가 며칠간 머무르며 몸을 추세워가지고 떠나간 그날 그와 엇바꾸어 박달을 만나러 갑산으로 나갔던 리제순이 곰산밀영으로 돌아왔다.

리제순이 다시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친히 곰산밀영에 가시여 그를 만나시였다.

박달이 지내고있는 형편과 그가 유격대선을 찾기 위하여 퍼그나 애써왔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장군님께서는 리제순의 수고를 거듭 치하하시고 이미 약속하신대로 그에 대한 강습을 곧 진행하도록 하시였다. 장군님께서 주신 과업에 따라 미리 강습제강을 준비해두고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있던 권영벽이 이 강습을 조직집행했다.

몸소 전투대오를 거느리시고 이틀이나 사흘이 멀다하게 출전하셨던데다 사령부에 집중되는 혁명의 전반사업을 돌보셔야 했던 장군님께서는 언제나와 같이 매우 분망하시였으나 옹근 이틀이나 일부러 시간내시여 곰산밀영까지 오셔서 리제순에게 친히 조선혁명의 전략전술적문제들과 국제국내정세에 대한 강의를 해주시였다.

한편 권영벽은 곰산에 와서 거의 보름동안 밤낮 리제순과 함께 붙어지내면서 지하사업방법에 대한 강의를 해주었다. 그는 이 특수사업과 관련되는 자기가 아는 지식과 자신이 축적한 모든 경험을 깡그리 그에게 전수하기 위하여 하루하루의 일과를 지하사업을 직접 하듯이 짜고들었다.

하여 마침내 리제순이 그 강습을 마치고 곰산밀영에서 떠나게 된 때에 이르러서는 이곳에 들어올 때와는 대비도 할수 없으리만큼 많은 혁명의 원리들과 지하공작방법들을 터득하였을뿐아니라 대중속에 능히 혁명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낼수 있는 전도유망한 혁명가로 변하였다.

그가 떠나게 된날 장군님께서는 그를 바래주시기 위하여 전령병을 데리고 소백수골에서 몸소 곰산밀영까지 나가시였다.

《장군님! 저는 쌀 한말을 지고 이곳에 들어왔다가 참으로 엄청난 혁명의 량식을 얻어가지고 가게 되였습니다. 천만냥의 금을 준들 제가 장군님의 곁에 와서 얻은것과 같은 혁명의 원리들과 사업에 대한 지식들을 이 세상의 그 어디 가서 얻을수 있겠습니까!》

리제순은 작별에 앞서 장군님께 진정 감사에 넘친 자기 심정을 이렇게 아뢰였다.

《쌀 한말을 지고 왔다가 천만냥의 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할것을 얻었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말을 되받아 외우시며 유쾌히 웃으시였다.

《그러니 제순동무가 별로 밑지는 걸음을 한것 같지는 않구만. 어떻소? 권영벽동무, 그런것 같지 않소?》

《제순동무가 별반 손해보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권영벽이 능청스럽게 리제순을 돌아보며 올리는 대답이였다. 그 말에 장군님께서는 다시한번 소리내여 웃으시였다.

《그건 아마 권영벽동무가 제순동무에게 리가 나게 남몰래 도와준 덕일거요. 그래 이제는 제순동무를 떠나보낼 차비가 다 되였소?》

그이께서는 차츰 웃음을 거두시고 정색하시며 물으시였다.

권영벽은 리제순이 내려가서 당장 착수해야 할 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토의까지 진행한것만큼 이제는 떠나보내도 될것 같다는 말씀을 올렸다.

잠시 리제순의 리해정도에 대하여 료해하신 장군님께서는 그가 조직결성의 절차에 이르기까지 당면하게 착수해야 할 사업을 제 손금보듯 횅하게 꿰들고있는것을 아시고 만족한 미소를 지으시였다.

《그만하면 내 생각에도 사업에 착수해도 될것 같은데 본인은 어떻습니까? 이제 마을에 내려가서 스스로 조국광복회의 하부조직들을 무어낼 자신이 있는가 말입니다?》

리제순의 준수한 얼굴에 엷은 홍조가 비꼈다.

《장군님, 저는 아직…》

약간 머리를 숙이며 송구스러운 심정을 아뢴 리제순은 뒤이어 주저없이 솔직히 말씀드렸다.

《혁명사업에 대해선 까막눈이나 다름없던 제가 여기 들어와서 혁명의 대학을 마쳤다고 생각될만치 혁명의 물계를 아는 사람으로는 된것 같습니다만 유격대에서 하는것과 같은 거창하고 본격적인 혁명사업이라군 전혀 해본 경험이 없다보니 아직 자신은 없습니다. 그런만큼 유격대에서 유능한 사람을 파견해서 처음 얼마동안만이라도 지도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리제순의 눈길은 저도 모르게 옆에 있는 권영벽을 얼핏 스쳤다. 이왕이면 때묻히고 정든 교사인 권영벽을 파견해주셨으면싶은 심정이였던것이다.

《처음 해보는 일이니 그럴수 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가벼이 머리를 끄덕이시였다.

《그에 대해선 념려하지 마시오. 나도 생각하고있으니 내려가서 우선 신흥촌에서 조국광복회조직을 결성할 준비사업부터 하시오. 준비가 성숙되여 조직을 결성하게 될 때는 사람을 내려보내주겠습니다.》

지체없이 확언을 주신 장군님께서는 그밖에 또 앞으로의 사업과 관련하여 애로로 될수 있겠다고 생각된 점이라든가 제기하고싶었던것이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말씀하시였다.

그 말씀이 떨어지자 리제순의 두눈은 한결 더 명민하게 반짝이였다. 하지만 금시 무슨 말인가 할듯이 실룩거리던 입술은 그냥 다물린채 열리지 않았다.

《왜 말하려다가 주저합니까? 제순동무답지 않구만.》

인자하게 웃으시며 가벼이 나무라시듯 하시는 그이의 말씀에 리제순은 약간 당황해하며 어망결에 혼자소리마냥 중얼거리였다.

《너무 무엄한 청을 올리게 되는것 같아서…》

《일없습니다. 생각한게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야지 내앞이라구 꼭 해야 할 말도 못하면 오히려 간격을 느끼게 돼서 나도 기분좋을게 없지 않습니까.》

《말씀드리겠습니다.》

리제순은 입술을 감빨고나서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장군님께서 친히 주신 특별위임에 의해서 상강구지역에서 조국광복회조직들을 내오기 위한 사업을 하게 됐다는것을 사람들이 보고 인정해줄수 있는 신임장을 한장 가지고 가게 해주실수 없겠는지 해서 그럽니다.》

《필요하다면야 그런것쯤 하나 만들어주기야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꼭 있어야 할 까닭은 어데 있습니까?》

《장군님, 저야 뭐 명색이 있는 사람입니까. 더구나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마을사람들한테 가서 사업하자면 장군님께서 보증해주셨다는 담보가 없이는 난관이 적지 않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일 저를 모르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제가 그 사람들속에서 진행하는 사업이 바로 장군님께서 뜻하시는 사업이구 또 장군님께서 친히 과업을 주시구 위임해주신 사업이란걸 알게 되면 일은 빠르고 순조롭게 풀려질게구 사람들은 너도 나도 하고 앞다투어 혁명조직에 뭉쳐들것 같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신중히 듣고계시던 장군님께서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시며 한마디 비치시였다.

《그러니 결국 나의 신임장이 있어야겠다는 말이겠군?》

《네.》

내내 아무 말없이 앉아있던 권영벽이 끼여들며 그이께 말씀드리였다.

《제순동무는 사령관동지의 권위만 있으면 못해낼 일이 없을것 같다고 합니다.》

장군님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신채 리제순을 덤덤히 건너다보시였다. 그이께서는 만일의 경우를 예상해보시면서 리제순의 신변에 대한 고려도 하지 않을수 없으셨다.

장군님께서 자기를 마주보시며 무슨 생각을 하고계신지를 륙감적으로 느낀 리제순은 앞질러 말씀드렸다.

《장군님, 제 그 신임장을 받으면 절대로 적들이 알수 없게 중히 건사하겠습니다. 그게 바루 제 목숨인데 제가 자기 목숨건사야 허술히 하겠습니까.》

리제순은 두손으로 자기 가슴을 짚으며 엄숙하면서도 열정적으로 부르짖듯 했다.

《좋습니다. 써주겠습니다.》

시원스럽게 응낙하신 장군님께서는 때마침 장작단을 한아름 안고들어와 난로불을 드다루는 전령병 주봉길이더러 미농지와 먹물과 붓을 준비해놓으라고 이르시였다. 그리고는 기뻐서 벌써부터 싱글벙글 입을 다물지 못해하는 리제순의 행색을 새삼스럽게 살펴보시며 이제 내려가면 적들이 한동안 없어졌던 촌장이 돌아온데 대하여 관심을 돌릴텐데 그에 대하여 어떻게 처신할 작정인가고 물으시였다.

《유격대에 붙잡혀갔다가 요행 구사일생으로 도망쳐나왔노라고 꾸며대겠습니다.》

《붙잡혀서 어디 가 있었느냐 하고 물으면? 적들은 우리가 있는 장소를 알고싶어 몹시 안달아있을거요.》

그이께서 다시 물으시자 이번에는 리제순이 대신 권영벽이 대답을 올렸다.

《유격대에서 제순동무를 내내 눈싸매고 끌고다녔기때문에 장소는 알수 없다고 대답하기로 협의했습니다.》

《그건 그럴듯 하오. 그런데 도망친 장소와 정황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얼버무려넘길수 있겠소?》

《네, 그래서 유격대가 산속기지를 떠나 신흥촌 부근 어느 마을 가까운데 내려왔을 때 제순동무에게 길안내를 시키기 위해 눈싸맸던것을 풀어주었는데 휴식참에 그를 감시하던 보초가 조는 틈을 타서 겨우 도망쳐 살아나온것으로 하자는것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아무 말씀없이 잠시 생각하시더니 고개를 약간 기웃하시고 의논하시듯 넌지시 물으시였다.

《그런 말만 가지고 적들이 완전히 믿어줄가? 그놈들의 신용을 얻자면 그 말을 확증해줄만 한 사실을 안배해줘야 하지 않겠소?》

《여기서 나갈 때 행색이랑 행동거지랑 사지에서 도망쳐 살아나온 사람답게 하면 저놈들이 의심을 안할겁니다.》

이번에는 리제순이 어지간히 자신있게 말씀드렸다.

《행색도 행동거지도 물론 그래야 되겠지만 만단의 대책을 취해줘야 하겠소. 꿩먹고 알먹는 조치를 하나 취해봅시다.》

그 무슨 결심을 내리신듯 이렇게 잘라 말씀하신 장군님께서는 책상우에 미농지와 먹물, 붓을 준비해놓고 다시 난로불을 돌보고있는 봉길이에게 이르시였다.

《나가서 경위대가 도착하지 않았는가 알아보고 도착했으면 경위대장동무를 이제 곧 나한테 오라구 하시오.》

그러나 봉길이가 미처 출입문 가까이 다가가기전에 밖에서 날랜 발걸음소리가 났다.

《범이 제 말을 하면 온다는 속담이 그른데 없구만. 〈보따지〉동무가 제발로 오는걸 보니.》

장군님께서는 문밖에 누가 왔는지 벌써 알아차리고 봉길이를 멈춰세우시였다.

그이의 말씀대로 리동학이 들어서는것을 보고 권영벽이도 리제순이도 주봉길이도 일시에 소리내여 웃었다.

자기가 나타나자 마치 약속이나 한것처럼 일시에들 웃어대는것을 본 리동학은 인사법도 잊은듯 문곁에 멈춰선채 얼떨해서 사람들을 둘러보기만 했다.

《범이 제 말을 하면 온다는 소리를 해서 웃는거요. 갔다오느라 수고했소. 어서 뜨뜻한데 들어와 앉소. 나도 동무를 기다리던 참이였소.》

장군님께서 자리를 권하셔서야 리동학은 멋적은듯 싱긋 웃고나서 경례를 붙이며 례의 그 빠른 말씨로 보고했다.

《명령대로 곰의골에서 억류해둔 사람들을 심문하고 그중에서 세명의 청년을 데리고 왔습니다. 유격대에 입대하려고 우리 밀영을 찾아헤매던 청년들이 확실했습니다.

한놈은 밀정이기에 처단하고 두사람은 사냥군이므로 돌려보냈습니다.…》

《새 식구 세사람 또 불었군. 흥할 때면 집안에 사람이 성해진다는데 그것 또 반가운 소식이요. 어디서 온 동무들이요?》

《두사람은 장백현에 사는 사람들이구 한사람은 국내에서 찾아들어왔습니다.》

《국내에서?!》

리동학의 뒤말을 받아외우시는 장군님의 안광에 유별한 기쁨이 어렸다. 국내에서 입대를 지망하여 찾아오기는 처음이였던것이다.

《그게 어떤 사람이요?》

장군님께서는 자못 궁금하신듯 서둘러 물으시였다.

 《마동희라고 키가 크고 뼈대가 굵은게 사람이 남자답게 생겼습니다. 갑산 백암리라는데서 살았다고 합니다.…》

《갑산에서 살았다?》

장군님께서는 리제순을 돌아보시며 알만한 사람인가고 물으시였다.

《제가 몇년전에 갑산 처가에 가서 지낼 때 백암리쪽에 동광서당을 꾸리고 동리 아이들과 청년들을 배워주는 마씨성을 가진 똑똑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만나본적은 없습니다만 그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어디서 들은 이야기입니까?》

장군님께서는 그것이 혹시 박달이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아닌지 하는 기대속에 물으시였다.

《백암리에서 살다가 제가 있던 널밭데기에 이사온 한 집에 저한테 글을 배우러 다니는 총각이 있었습니다. 그 총각이 백암리 서당에서 자기에게 글을 배워주던 사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소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했지만 독학으로 중학강의록을 뗀 유식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였다고말입니다.》

리제순의 대답이 끝나기 바쁘게 리동학이 얼른 뒤말을 달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마동희인것 같습니다. 경력을 물으니 소학을 좀 다니다가 맞갖지도 않고 월사금도 없어서 중퇴하구 집에서 부친을 도와 농사를 지으면서 두루 지냈다고 대답하였는데 몇마디 말하는것만 봐두 사람이 씨가 먹고 세상물정에 밝다는게 알렸습니다. 서당훈도이야긴 하지 않았는데 그건 유격대에서 모든것을 새롭게 배우려는 립장에서 겸손을 부려 일부러 말하기를 삼가한게 아닐가 생각됩니다. 정말 그 동무가 김주현동무에 대해 잘 알고있습니다.》

그것은 뜻밖이였다.

《주현동무를?》

《네, 김주현동무가 지난 여름에 선발대를 책임지고 백두산지구에 나왔을 때 장백현 상풍동에 사는 자기 동무를 통해 만나봤답니다. 알고보니 같은 성진태생이구 해서 쉽게 통했다는겁니다. 그때 주현동무한테서 장군님께서 기본부대를 이끌고 백두산에 나오시면 입대시켜줄테니 찾아오라는 약속을 받았다고 합니다.》

《허허… 그럼 김주현동무가 지방적친분관계를 가지고 입대약속을 해줬던게구만.》

웃음절반으로 하시는 말씀이시였다.

《그 동무도 우리 동무들을 만나자 김주현동무부터 찾더랍니다. 보증인을 만나지 못해 몹시 안달아하는것 같습니다.》

《소백수골에 가서 이제 주현동무하고 만나면 동향구면이라 그 상봉장면이 볼만 하겠소. 알겠소. 이따 내가 그 동무들을 만나보겠소.》

그 말씀으로 일단 입대청원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맺으신 장군님께서는 화제를 돌리시였다.

《동학동무가 오자마자 한가지 의논해야 할 일이 있소. 제순동무를 우리 밀영에 데리고 들어온것이 동학동무였으니 제순동무를 바래워주는것도 역시 동무가 맡는것이 합당하지 않을가 해서 그러는데 어떻겠소?》

마치 량해를 구하시는듯 한 어조였다.

리동학은 제순에게 뜻있는 눈웃음을 보내며 선뜻 대답을 올렸다.

《언제 떠나랍니까?》

언제 봐도 말을 내기 바쁘게 대답이 시원스러운 리동학이였다.

《오늘밤에 한번 더 수고해주시오.》

당부하시듯 이렇게 말씀하신 장군님께서는 그가 수행해야 할 과업을 설명해주시였다.

《동무의 임무는 리제순동무가 무사히 내려가도록 신변을 보호해주고 자그마한 전투를 하나 치르는것이요. 화약내를 맡고싶어 몹시 안달아하는 대원을 스무나문명 골라 데리고 가면 될거요. 신흥촌까지 가지 말고 신창동이든가 또는 그만큼 떨어진 어느 적당한 장소에서 제순동무를 보내고 동무네는 휴식한 자취만을 남기고 좋은 매복처를 찾아 매복하오. 그랬다가 리제순동무가 동무네 매복장소에 적들을 보내주면 혼쭐이 나게 한바탕 답새겨주고 돌아오시오. 알만하오?》

《알았습니다.》

일어나 대답하고 다시 앉은 리동학은 희색이 만면했다. 그에게는 미구에 있을 또 한차례의 전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게 될지 환히 짐작이 갔던 모양이다. 그러나 리제순은 자기가 어떻게 적들을 경위대장네가 매복해있는 곳으로 보내게 될지를 몰라 어리둥절해있었다.

장군님께서는 그러한 리제순에게 말머리를 돌리시였다.

《제순동무는 경위대장동무와 헤여진 다음 집으로 가지 말고 곧장 경찰분서에 찾아가서 유격대에 붙잡혀갔다가 금시 도망쳐오는 사람의 흉내를 내시오. 그러자면 깊은 밤중이나 새벽시간이 적당합니다. 놈들앞에서 당신들이 나를 촌장으로 부려먹으면서도 보호해주지 않았기때문에 이번에 사지판에 잡혀갔다가 천행으로 살아나왔는데 더는 촌장질을 못하겠다, 내가 다시 유격대에 붙잡히게 되는 날에는 어김없이 저승길에 가게 될텐데 나를 조선에 다시 건너가 살게 해달라 하는 식으로 적당히 행악을 부리면 더 그럴듯해질수 있습니다…》

겁에 질린 적들이 자기를 의심하기는커녕 도리여 《보호》해주지 못한것을 미안해하며 촌장일을 대신할 사람이 없으니 제발 노여워말고 마음을 좀 가라앉혀달라고 얼림수작질할 꼴이 눈앞에 펼쳐지는것만 같아 리제순은 소리없이 고소한 웃음을 지었다.

장군님께서는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틀림없이 놈들은 제순동무의 노염을 눅잦혀놓고 당신은 어디서 도망쳤는가, 산에서 내려온 유격대가 몇명쯤 되던가, 지금은 어디쯤에 있을것 같은가를 알려고 할것입니다. 그러면… 산에서 같이 내려온 유격대는 몇명밖에 안되더라, 유격대에서는 식량이 없어서 촐촐 굶다못해 나를 길안내자로 세워가지고 내려왔으니 식량을 구하자고 어디쯤에서 멀리 벗어날수 없었을게다 하면서 〈보따지〉동무와 약속한 지점을 대주시오. 놈들이 유격대가 있던데로 길을 안내하라고 요구하면 장소만 대주고 무서워서 나는 못가겠다고 나 누워야 합니다. 알만 합니까?》

리제순은 혼자속으로 새삼스럽게 자기의 신변안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적들을 골탕먹이는 장군님의 지략에 감탄해마지 않으면서 이러한 일거량득하는 묘수들로 하여 유격대편은 나날이 강성해가고 적들은 더욱더 궁지에 빠져드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장군님, 잘 알겠습니다. 그런 묘한 보호책으로 저를 감싸주시는데야 아무리 날고뛰는놈들이라 한들 코를 꿰서 질질 끌고다니지 못하겠습니까.》

그는 의기양양해서 장담했다.

《그럼 그대로 하기로 하고 상세한 협의는 두 동무가 내려가면서 하시오. 경위대장동무는 먼저 나가서 식사전에 인원선발을 하고 간단한 차비를 시키시오.》

리동학이 나가자 장군님께서는 책상앞에 옮겨앉으시여 오른소매를 약간 당겨올리시며 아까 봉길이가 준비해놓은 붓대를 잡으시였다. 붓깃을 먹물에 적시고 그끝을 벼루판에 다스리신 그이께서는 먹물빛을 가늠하시는 겸 붓글씨에 손을 익히시려고 미농지 한쪽옆에 준비되여있는 백로지장에 《백두산》이라는 세글자를 먼저 써보신 다음 미농지장에 붓을 대시였다.

반투명한 엷은 종이장우에 활달하고 세련된 글자들이 한자한자 나타났다.

 

신 임 장

리제순씨는 조선인민혁명군사령부 및 조국광복회 총본부의 위임에 의하여 조국광복회 장백현지방조직을 위한 특수활동을 진행하게 되였음을 증명함

1936년 10월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

조국광복회 회장  김 일 성

 

일필휘지하여 신임장을 쓰신 장군님께서는 붓대를 벼루우에 얹어놓으시고 그 미농지를 리제순에게 보이시였다.

《이렇게 하면 원하는대로 되겠는지 한번 읽어보시오.》

가슴을 들먹거리며 숨죽이고 앉아있던 리제순은 장군님께서 자기앞으로 내미시는 미농지를 황송스럽게 받아들었다.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참으로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한 력사의 순간이였다. 장군님께서 친히 맡겨주신 사업을 신속하고도 순조롭게 잘해보자는 그 한가지 생각으로 무엄함을 무릅쓰고 그이께 유격대의 신임장을 떼주셨으면 하는 청을 올리긴 했으나 정작 다름아닌 장군님께서 친히 자신의 존함까지 밝히시여 신임장을 써주시는것을 목전에 당하게 된 그는 꿈을 꾸는것 같기만 했다.

그것은 몇줄의 범상한 글이 씌여진 한장의 얇다란 미농지가 아니였다. 세상사람들이 민족의 영웅으로, 절세의 위인으로 우러르는 장군님의 신성하고 거룩한 명예와 존엄으로 보증된 혁명전사의 신분증이였으며 신임장이였다.

떨리는 손으로 신임장을 받쳐들고 한동안 머리숙이고 서있던 리제순은 장군님을 우러르며 격정에 넘쳐 말했다.

《장군님, 감사합니다.》

그의 두눈에서는 뜨거운것이 번쩍였다.

《제가 이같은 신임장을 품고있으면서 앞으로 장군님의 존귀한 성함과 신성한 명예와 거룩한 믿음에 티끌만치라도 손상이 갈수 있게, 한순간이나마 죄되게 산다면 저는 열백번 고쳐죽는대도 죄를 씻지 못할 배신자로 될것입니다. 저는 장군님께서 이 신임장을 제게 써주신 사연을 두고 언제건 후회하실 때가 없도록 한생을 장군님의 뜻대로, 장군님께서 바라시고 기대하시는대로 살며 싸우겠습니다.》

고결한 눈물로 다지는 맹세였다. 그 숭고한 혁명적맹세의 눈물을 대하신 장군님께서도 저윽 가슴이 뜨거워지시였다.

《한생을 우리와 뜻을 같이 해주겠다니 나도 고맙습니다. 나도 제순동무가 그러리란 믿음을 가졌기에 우리 군대밖의 사람에게 줘본적 없는 신임장을 주저없이 썼습니다. 그러니 아마 제순동무에게 신임장을 써준 일에 대해서는 어느때든 후회하게 될것 같지 않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믿음에 차신 밝은 미소로써 한동안의 너무 엄숙하기만 하던 분위기를 눙치시였다.

이어 그이께서는 리제순의 사업을 지도해줄 유격대의 파견원을 내려보낼 날자와 상면장소, 시간을 약속하시고 수첩에 기록까지 해두시였다. 그이께서 어찌나 빈틈없이 세밀하게 짜고드셨던지 리제순은 수하에 수많은 군사를 거느리시고 천하가 좁다하게 산야를 주름잡아다니시며 왜적을 쥐락펴락하시는 장군님의 거인적풍모와 가장 주도세밀하고 찬찬한 어머니다운 성정이 어쩌면 이리도 조화롭게 일신에 겸비되여 이 세상에 다시 없는 독특하고 비범한 성격을 형성하셨을가 하고 마음속으로 새삼스럽게 놀랐다.

《자, 그럼 이젠 때도 된것 같은데 작별식사나 같이 나누도록 합시다.》

…그날밤 리제순은 리동학이 인솔하는 전투소조와 함께 권영벽의 바래움을 받으며 곰산밀영에서 떠났다.

세차게 이는 눈보라가 밀영에서 떠나간 그들의 발자국을 메워주었다.

 

6

 

백두산의 수많은 동생들중의 하나인 홍두산도 백두산을 닮아서 그런지 한해에 겨울이 일여덟달동안이나 계속되는 아주 춥고 바람세찬 곳이였다.

그 모진 추위와 드살이 센 바람때문에 이 산목덜미에서 사람의 반생에 맞먹는 오랜 세월을 자란 가문비나무도 그 키가 사람의 한길을 넘을가말가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홍두산의 날씨는 몹시 변덕스러워 금시 맑게 개인것 같다가도 어느덧 흐리고 불시에 주먹같은 눈이 펑펑 쏟아져내리기도 했다.

이 홍두산기슭의 깊은 수림속에도 지붕을 봇나무껍질로 씌운 한채의 크지 않은 귀틀집이 있었다. 김해산이네 밀영건설분대가 곰의골에 밀영을 꾸려놓은 다음 여기저기 다니며 병원이며 재봉소며 하는 후방부건물을 지을 때 이곳에다 련락소 겸 세운 병실이다.

여기서 시오리쯤 산속 더 깊이 들어가면 대낮에도 해빛이 거의나 스며들지 않는 어둑한 원시림속에 자그마한 사냥군초막같은 초막 하나가 있었다. 유격대가 제기한 모연금과 모연물자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지양개의 김정보와 그 《애물두상태기》를 지키며 허무한 나날을 보내고있는 두 유격대원이 어울려사는 막이였다.

곰의골에서 백두산쪽으로 륙칠십리나 더 깊이 들어와있는 이곳 홍두산골짜기에서는 압록강연안 도처에서 거의 매일같이 피어린 싸움의 총성이 울리고 각지 밀영들에 떠들썩할 일이 생기건말건 늘 조용하고 한적한 생활이 진행되고있었다.

이곳에서 지내는 최성필이와 《만강》의 생활은 이루 말할수 없이 무료하고 단조로왔다. 하루 세끼 잡곡밥에 시래기소금국정도의 음식이나 끓여먹고 며칠에 한번씩 그 흔한 땔나무나 주어오는것이 하는 일의 전부였다. 무슨 일거리를 만들어서라도 손을 놀렸으면 좋으련만 만들 일거리도 없었다. 젊은 나이에 말주변들도 없는 최성필이와 《만강》은 이미 서로 이야기를 들려줄만 한 밑천이 다 떨어져서 심심풀이로 나눌 이야기거리도 없었다.

세상의 한끝인 이곳에서는 세상에 돌아가는 소식도 맨나중에야 들어오군 했다. 소백수골에서는 두말할것도 없고 곰의골에서조차 이딸리아침략군에 의하여 점령당한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일레 셀라씨예의 따님인 싸하이공주가 영국 런던에 망명해가서 어느 병원 간호원노릇을 하는 기구한 운명에 처했다든가 어느 나라의 함몬드라는 사람이 얼마전에 라지오원리를 응용하여 전기풍금을 만들었다든가 하는 등 먼먼 세계의 다른 끝에서 생긴 새 소식들도 혜산진이나 장백현소재지에 앉아서 신문을 받아보는 사람들과 다름없이 제때에 휑하게 알고있었지만 이 홍두산골짜기에서는 에티오피아토민군이 자기들의 수도를 점령하려는 이딸리아침략군에 대한 공격을 단행했다든가 베를린올림픽경기대회에서 조선사람이 마라손경기에서 1등과 3등을 했음에도 국기게양대에는 일장기가 날렸다든가 하는따위의 한물이 지난 소식을 새 소식처럼 얻어듣고는 며칠씩 우려먹군 했다. 그런 묵은 소식조차도 어쩌다 한번씩 이곳에 소금과 식량을 날라오는 후방부운반대나 련락원이 나타날 때만 얻어들을수 있었다.

실로 곰의골이 그들에게 있어서 《도소재지》였다면 홍두산골짜기는 시골중의 《시골》이였다. 이곳에서는 불속에 묻었던 감자알이 탕소리를 내며 재를 풀싹 날린다든지 보지 못하던 거미 한마리가 나타나서 초막 한구석에 줄을 늘이게 되여도 커다란 사변처럼 여겼다.

 이처럼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에서 어느날 뜻밖의 놀라운 하나의 사변이 생겼다. 여기 호송되여온 이후 내내 우거지상을 하고 말 한마디 없이 지내오던 김정보가 어쩌다 자기를 지키고있는 최성필이네한테 말을 걸어온것이다.

《보아하니 자네들은 요즘 별로 경기가 좋지 못한것 같군. 그렇게나 먹구 살바에야 뭣때문에 사서 고생하며 《비적》살이를 해? 집에 가서 뜨뜻이 지내구 배불리 먹으며 농사짓구 사는게 낫지.》

이것은 어느날 조반을 먹고난 이후에 있은 일이다. 시키는 말도 하지 않았을뿐아니라 도대체 한초막안에서 지내면서도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괴벽한 옹고집쟁이 령감태기가 제편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으니 사변이라도 이만저만한 사변이 아니였다.

연금상태에 있는 주제에 자기를 지키는 사람들을 감히 시비하고 비양하고 훈계하려는것 같은 그 반말질에는 불손하고 모욕적인데가 많았지만 어쨌든 그가 말을 걸어왔다는것은 놀라운 변화였다

최성필이와 《만강》은 이게 웬일이냐는듯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최성필은 《만강》에게 눈을 끔쩍해보이며 히죽 웃더니 모처럼 걸어온 김정보의 말에 응수했다.

《령감은 우리가 불쌍해보이시우?》

《불쌍하네, 불쌍해.》

김정보는 아주 진지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며칠 지내며 봐야 언제 한번 자네들이 음식다운 음식을 먹는걸 내 보지 못했네. 돌을 삼켜두 새길 한창나이들인데 통강냉이죽이나마 언제 한번 배불리 먹는 일이 있나, 된장국 한숟갈 맛보는 일이 있나? 조선사람이라는건 워낙 고기 없인 살아도 장과 김치를 입에서 떨구면 하루도 못산다는 민족인데 자네들은 김치를 한쪼각 맛보기라두 하는가? 아무리 가난한 집에서두 장과 김치를 떨구는 법은 없네. 그런데 자네들은 뭘 먹나? 최상이라야 시래기소금국이네. 바른 소금마저 떨어지면 소금국도 첸신못하구 쩝쩔한 느릅나무재에 군감자를 찍어먹지, 입성이라는건 또 어떤가? 지금은 솜옷들을 얻어입었네만 며칠전까지만 해두 자네들이 무얼입구 지냈나? 눈이 강산같이 쌓였는데 여름옷을 입구 우들우들 떨며 지냈지. 도대체 그게 무슨 사는꼴인가? 아무렴 농사짓구 살면 된장이야 못먹고 토스레솜옷따위라도 못입고 살텐가?》

《흥―》

최성필은 어이없어 코방귀를 뀌였다

《계급적처지가 다르니 어쩔수 없군. 농사라구? 농사를 짓는게 낫다? 령감같은 지주에게 착취를 당하며 농사짓는게 낫단 말이지요? 지주령감, 어디 좀 물어봅시다. 지주에게 착취당하지 않고 농사지을 땅이 어디 있소? 령감은 우리에게 땅을 공짜루 줄수 있소?》

최성필은 모처럼 마련되게 된 대화를 파탄시켜버릴 위태위태한 상대에 빠뜨린다는것을 생각할만 한 기분상태가 아니였다.

《나도 농사군의 아들이구 이 〈만강〉동무도 농사군의 자식이요. 우리도 농사짓던 사람들이요. 지주의 땅을 소작짓던 사람들이요. 그런데 우리는 총을 잡았소. 왜 그랬겠소? 왜놈들의 압박뿐만아니라 당신같은 지주의 착취를 없애기 위해서란 말이요. 우리가 땅의 주인이 되구 제땅에서 착취를 당하지 않구 농사짓기 위해서란 말이요.》

놀랍게도 최성필의 말을 웃음으로 (그렇게 웃는것 역시 첫 일이였다.) 듣고있던 김정보는 그의 간단한 열변이 동강난 틈을 타서 조용한 목소리로 언명했다.

《자네들이 제뼈를 아끼지 않구 농사짓겠다면 땅은 내가 주겠네. 물론 자네들이 땅임자로 될 땅말일세.》

성필은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김정보는 자못 정색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네, 이제라도 자네들이 나하구 같이 우리 마을에 내려가면 당장 오는봄부터 농사지을 땅두 마련해주구 며칠사이에 우리 동네 사람들을 다 동원해서 쓰구살 집도 마련해주겠네.》

성필이와 《만강》은 그만 어이없어하며 서로 돌아다보았다. 말없이 나눈 서로의 눈길은 이 령감이 교활하고 흉측스럽기 그지없다는 견해의 일치를 보였다. 그렇지만 성필은 짐짓 그의 속심을 꿰뚫어보지 못한척하면서 중떠보는 말을 건넸다.

《세상에 맘좋은 지주가 있단 말을 못들었는데 제 땅을 공짜로 주겠다는 지주가 다 있구만. 지주령감, 그 말이 진짜오다?》

김정보는 풍만하고 보기 좋은 턱수염으로 가슴을 쓸며 머리를 저었다.

《자네들은 나를 잘못 알고있네. 나는 지주가 아닐세. 나도 초야벽지에 묻힌 일개 농사군일세.》

성필이와 《만강》은 두눈들을 껌벅거리면서 김정보를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각성을 높여야 하겠다는 기색이 완연한 얼굴들이였다. 들을수록 김정보는 점점 그들의 정신을 얼떨떨하게 하는 이야기들을 한다. 방금전에 땅을 주겠다더니 이번에는 또 지주가 아니라는것이다.

《이보시오. 지주어른.》

마침내 최성필은 올방자를 고쳐틀고 앉으며 위엄스럽게 말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땅도 주고 집도 주겠다는 어른이 우리가 내라는 모연금은 왜 못내겠다고 하는지 그게나 좀 말해보오. 령감 말대루 강낭죽도 배불리 못먹구 된장, 고추장맛도 못보구 김치도 못먹구 엄동설한에 하복을 입구 우들우들 떨며 지내는 우리가 불쌍해서 땅도 주고 먹을것도 주겠다는 어른이 땅값, 집값의 절반의 절반도 안될 모연금을 좀 내라는건 왜 안내구 앙탈을 쓰는거요? 제 목숨 아까운줄두 모르구? 그걸 진작 내겠다구 했다면 여기 와서 우리처럼 강낭죽도 안먹구 기름진 음식을 자시구 고래등같은 기와집에서 비단이불 덮구 뜨뜻이 지낼게구 또 우리도 여기서 말도 없는 등신같은 령감을 지키면서 허무한 날을 보내고있지 않을텐데 어째서 그랬는지 우리 서로 모처럼 말을 나누게 된김에 그거나 어디 좀 말해보시오.》

《어흠.》

김정보는 쓰겁게 입맛을 다시더니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내가 비적을 모른다구 비적단에 돈을 주구 물건을 줘? 사람두 몰라보구 밤중에 뛰여들어 총을 내대는 놈들에게 내가 설설 길 사람인가, 엉? 자네들이 그렇게 백번을 강박하구 총을 내들어서는 나한테서 쥐뿔두 얻지 못해. 의롭지 못한 비락질일수록 곰살궂게 해야 되는거야.》

최성필이도 눈살이 꼿꼿해졌다.

《이 령감이 또 〈비적〉이니 뭐니 험한 소릴 하는구만.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데 쓸 모연금이라는걸 그때두 내 몇번이나 말했소? 우리가 애국군대라는건 또 몇번이나 말했는데 〈비적〉이니 뭐니…?》

《애국하는 군대가 날 붙잡구 내앞에 총을 내대? 감히 내앞에?》

휘딱 최성필을 돌아보는 김정보의 눈에서 불찌가 일었다.

《이 령감이?》

최성필은 흥분을 억제하느라 잠시 씩씩거리기만 했다.

《령감이 순순히 말 들었으면 총을 내댈테요? 그래 말 안듣는 지주령감앞에 총을 못내들건 뭐요? 애국모연금을 좀 내라는데 응하지 않는 반동지주에게 우리가 총을 안내대?》

《에끼, 이 고현놈! 내가 반동지주야? 내가 반역자야?》

사태는 돌변했다. 모처럼 마련되였던 대화가 파탄된것이다.

《옳지, 또 앙탈을 쓰는군. 그 본성을 어디 감춰?》

목줄띠가 살아오른 성필은 그냥 앉아서는 참아낼수 없었던지 불끈 틀어쥔 주먹을 멀리 가져가버리려고 일어났다.

《흉측한 령감태기, 뭐 우리를 꼬드겨 여기서 도망쳐보자구? 우리가 그렇게 떨떠름해보여? 〈자네들이 불쌍하다〉, 〈땅두 주구 집두 주겠다〉…나 원 참 기가 막혀서!》

《이… 잇… 잇…》

이미 출입문고리를 잡은 성필이의 등뒤에 대고 안깐힘을 쓰며 주먹삿대질을 하던 김정보는 그 주먹으로 구들바닥이 들썩하게 꽝 내리쳤다. 구들바닥에서 먼지가 풀싹 일었다.

《이놈! 내 네놈따위나 얼려넘기구 비겁스레 도망칠 허잡쓰레기 같을거면 애당초 돈내놓구 무릎 꿇며 빌었겠다. 저들을 생각해주는줄도 모르는 무지한놈…》

그러나 이미 최성필은 바깥에 나가버리고 없었다.

《령감, 좀 가만 못있겠소?》

《만강》의 그 소리에 김정보는 그제야 그의 존재를 느꼈다는듯 새삼스레 피발이 선 시뻘건 눈찌로 흘끔 돌아보더니 초막출입구쪽에 가래를 톺아올려 내뱉고는 더는 아무 말도 없이 자기의 구석자리에 돌아들어와 눕고말았다.

그후 며칠동안 초막안에서는 쌍방간에 대화없는 가운데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는 배심으로 《누가 누구를》하는 심각한 랭전이 다시 지속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전의 랭전과는 약간 차이 나는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서로가 상대방에 대하여 전보다 약간 정중히 대한다는 점이였다. 비록 서로 거의나 말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서로 보는 눈길에서와 서로의 행동에서 그런것이 느껴졌다. 가령 식사때 밥그릇이나 숟가락을 상대방앞에 먼저 놓으려 한다든가 문으로 같이 들어가게 됐을 때 서로 말없이 양보심을 발휘하여 뒤에 들어가려 한다든가 하는데서 표현되였다. 이것은 그들쌍방이 서로 상대방에 대하여 의혹을 풀기 시작하고 상대방을 리해해보자고 노력하기 시작했던때문이였다.

최성필이네는 김정보가 《괴이한 지주》일뿐더러 도무지 리해할수 없이 괴이하게 굴고 괴이하게 배짱쓰는데는 그 어떤 단순치 않은 까닭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알아내려 애썼다. 그러면서 유격대에 대한 그의 인식을 《바로 돌려 세우기 위하여》선전공세를 들이댔다. 즉 둘이서 학습토론을 자꾸 조직해서 김정보가 듣기 싫어도 듣지 않을수 없게 하면서도 그 과정에 리해를 달리하게 해보자는것이였다.

김정보측에서도 역시 이 젊은 《동무》라고 부르는 순박하고 어질고 사리사욕 없어보이는 사람들이 자기를 나삐 보고 자기에게 대해 《괴이하게 군》까닭을 리해해보자고 노력했다.

서로 이러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며칠후 그들은 마침내 말문을 다시 열수 있게 되였다.

그 시각에 마침 《만강》은 이미 스무번도 더 소리내여 읽고 또 읽어서 이제는 떠듬거리지 않을뿐아니라 뜬금으로 휑하니 외우기까지 한 《조국광복회창립선언》과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순 선전적인 목적으로 일부러 떠듬거리며 읽고있었는데 김정보가 불쑥 손을 내밀며 그걸 좀 볼수 없느냐고 했던것이다. 이런 기회를 노려보고있었던 《만강》은 마지못해 준다는듯 한 시뜻해하는 표정으로 《볼테면 보시우다.》 하고 자기의 학습교재를 넘겨주었다.

《흠, 자네네들한테도 더러 문장가가 있는 모양이군.》

김정보는 한번 읽어보고 이런 말을 하더니 다시한번 더 눈으로 읽었다.

《이게 말하자면 자네네 공산군들의 주장인가?》

두번 읽고나서 그는 이렇게 물었다.

《만강》은 그렇다고 대답하며 신입대원으로서 자기가 아는만큼 리해를 시키느라고 했다. 이런 때 만일 최성필이가 나무패러 나가 있지 않았더면 《만강》보다는 좀더 능란하게 교양사업을 했을것이다. 그러나 지식이 밭은 《만강》의 강의도 김정보의 리해를 돕는데는 꽤 이바지되는 모양으로 김정보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한가지 질문을 했다.

《내 자네에게 한가지 묻겠네. 내 듣기로는 자네들 공산군들은 세상을 왼통 나라두 없구 민족두 없는 아라사판으루 만들구 집이구 물건이구 녀편네구 다 네것 내것 따루 없이 어울려쓰구 살게 하자구들 한다던데 여기엔 그렇게 안씌여있군그래? 〈강도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고 진정한 조선인민정부를 수립할것〉 그런즉 이건 어찌된 셈인가?》

《만강》은 입을 딱 벌렸다.

《허― 이거, 령감님이 한심한 말씀하시누만. 영 셈판을 모르십네다. 도대체 누가 우릴 보구 세상을 왼통 아라사판을 만들자고 싸운다고 그럽디까? 그리구 네것 내것 다 없이 산다는건 또 뭐요? 그래 우리가 제 녀편네구 남의 녀편네구 구별이 없게 하기 위해 싸운단 말이요? 내 그럴것 같으면 뭣때문에 총잡구 고생하는델 따라다니겠소? 만강에서 감자농사나 지으며 편안히 사는게 낫지, 난 유격대에 들어온지 서너달 돼오도록 우리가 아라사판을 만들기 위해 싸운다는 말 못들었소다. 제 좋은 조선판을 만들자구 싸운다는 소린 귀에 못박히게 들었어두.》

《음, 이 강령하구 선언이란걸 봐두 그래, 자네 말을 들어봐두 그래 또 내 요즘 옆에서 자네들끼리 공부하는것과 말하는걸 여겨 봐두 또 그래, 자네들한테두 애국은 없지 않네. 자네들의 주장만은 그럴듯싶기두 하네. 조선사람들의 귀맛 동하게 할만한게 없지 않단 말일세. 하지만…》

하고 김정보는 머리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자네들은 지금 부질없는 헛고생을 사서 하고있어. 승산없는 싸움에 헛된 피를 흘리고있단 말일세.》

괴이한 령감은 또 이런 괴이한 소리를 했다. 알다가도 모를 반동소리를 하군 하는것이다.

《아니 우리가 헛고생하구 헛된 피를 흘려요?》

《그렇네, 안될 일이야. 그 안될 일을 믿구 아까운 청춘들이 이런 귀맛좋은 소리에 들떠 헛고생하며 헛된 피를 흘리는게 불쌍하네.》

《아하, 이 령감이 또 흉측한 와해공작을 들이댄다?》

《이사람,〈만강〉! 내 이래뵈두 자네가 에미젖을 빨고있을만한 때 나라를 찾아보겠다구 륙혈포를 차구 조선 만주일판을 다 돌아다니던 사람이야. 내 휘하에 한때는 수백명의 자네들같은 군사가 있었어. 자네따위들이 하는 놀음에 댈텐가? 자네들은 정말 범 무서운줄 모르는 하루강아지들이야. 철들이 없거던, 철들이 없어. 자네들을 령솔하신다는 김장군은 청년장군이란 말이 있던데 그건 사실인가?》

《네, 젊으셨수다. 왜 그래요?》

《대체 춘추가 얼마나 되신분인가? 년세말일세. 한 삼사십쯤 난 어른인가?》

《건 왜 알자는거요?》

《글쎄 묻는 소리에 대답이나 하게. 그거야 군사비밀일게 없지 않나?》

《아직 서른도 안잡히신 20대외다.》

《뭐 20대?!》

김정보는 화닥 놀랐다.

《20대장군이라? 과시 난분은 난분일세. 20대에 자네들 공산군 모두를 통솔한다니 분명 인물이야.》

그러나 김정보는 또 뒤이어 인차 괴이한 소리를 쳤다.

《헌데 아직 너무 젊어, 너무 젊었네… 그러니 그럴수밖에 없지, 그럴수밖에…》

김정보는 저혼자 중얼거리며 《만강》의 무릎에 《조국광복회10대강령》과 《창립선언》을 묶은 얄팍한 소책자를 던졌다.

 《만강》은 그 소책자를 받아들며 역시 괴이하게 구는 령감을 아무리해도 리해할수 없었던지 두눈만 뜨부럭거렸다.

최성필이나 《만강》의 눈에 괴이하게 보일수밖에 없는 김정보였다. 그는 서로 모순되는 사상과 질서와 제도가 갈피를 잡을수 없이 뒤바뀌고 뒤섞이면서 정의와 부정의, 선과 악, 애국과 매국, 혁명과 개량, 덕행과 악행이 마구 뒤엉키기도 한 혼탁된 시대, 나라가 망하고 구국의 지향도 스러져가고 민족의 생존마저 위협당해가던 비참한 시대가 배출해낸, 남들은 물론 그스스로도 자기를 무어라고 규정해 말하기 어려운 애매하고 모호한 인물, 바로 김정보라는 사람이라고 말할수밖에 없이 특이한 인물이였다. 그는 우국지사임을 그만두었으면서도 자신을 여전히 우국지사로 자부하고있는 사람이였으며 자신을 지주라고 생각지 않았지만 지주나 별반 다를바 없는 야릇한 사람이였다.

그는 령세한 량반가문에서 서자로 태여났다. 어머니는 몹시 가난한 촌선비의 딸이였다. 아버지는 많지도 못한 땅뙈기를 그에게 한쪼박도 물려주지 못하고 일찍 돌아갔다. 정보는 젊은 어머니와 함께 외가집에 얹혀살며 자라났다. 이때 체험한 무서운 가난이 후일에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덕있는 사람으로 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또한 유교의 신봉자였던 외조부의 덕행에 대한 부단한 교양의 소산이였을수도 있다.

외조부는 정보의 어린 넋속에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위해 충성 다하는것은 백성된 사람들의 도리라는것을 뿌리깊이 심어주었다.

정보는 자라서 외조부가 일러준대로 임금을 몸가까이에 섬기며 나라에 충성할수 있는 구한국군의 궁중보초병이 되였다. 몇해 지나서는 하졸 몇명을 거느리는 하사로까지 승격했다. 오늘날까지 그를 존대하여 《김하사님》이라고 부를 때면 그가 대단히 만족해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 처지는 하루아침에 끝장나고말았다. 이등박문이 끌어 들인 섬오랑캐군대가 그들에게서 임금을 몸가까이에서 지키고 섬기던 권리를 박탈한것이다.

그는 해산당한 자기 병졸들과 함께 의병장 차도선을 찾아갔다. 그때로부터 빼앗긴 국권을 도로 찾기 위한 피어린 투쟁의 길을 여러해동안 헤쳐왔다. 처음에는 의병부대에서, 다음에는 독립군부대에서… 매캐한 화약연기로 뒤덮인 언덕과 골짜기도 수많이 타고넘었고 산탄파편에 허벅다리와 팔을 찢기우고 쓰러진적도 한두번이 아니였으며 살을 베여주어도 아깝지 않을 전우에게 흙 한줌 못덮어주고 발걸음을 떼지 않으면 안되였던적도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 숱한 사람들의 목숨을 바치고 피를 바쳤건만 국권회복의 길은 점점 더 료원해지고 섬오랑캐놈들이 세워놓은 신질서는 더욱더 공고해져갔다.

항일독립전에 총을 들고 나설 때는 금시 조선땅에서 왜놈들을 씨종아리 하나 남기지 않고 몰아낼것 같았던 독립군부대들은 사처에서 쇠퇴몰락해갔다. 차츰차츰 하나씩 괴멸당한 부대들은 더러 스스로 해산해버리기도 했다. 자기들에게도 불가피하게 닥쳐 올 그러한 종말을 미리부터 예감해오면서도 고집스럽고 손탁이 센 김정보는 최후의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독립전에서 물러나지 않으려던 초지대로 거의나 고군독전을 계속 진행했다.

마침내 그에게도 미리부터 예감했던 비참한 종말이 닥쳐들었다. 어방없이 많은 적을 상대로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던 태룡강전투에서 그의 부대는 거의나 전멸당하였다. 포탄파편에 허벅다리를 찢기우고 실신된 그를 떼목에 태우고 피로 물든 태룡강을 건너 겨우 살아남은 사람은 단 여라문명밖에 안되였다.

부하들은 그를 초막에 눕혀놓고 먹을것과 입을것과 덮을것을 구하기 위하여 그런것들을 가지고있을만한 부자들을 털기 시작했다. 이때로부터 그들의 총은 그 사명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적과 싸울 힘이 더는 없었다. 그렇다고 적들에게 손을 들고 무릎을 꿇수도 없었다. 그러나 먹고 살아야만 했다. 김정보는 먹고 살것을 구할바엔 의롭게 구하고 의롭게 나누어쓰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악질토호나 지주, 악질관리들의 재물을 빼앗아내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무서운 의적단두령》으로 알려지게 되였다. 남만일대의 악질 토호, 지주, 관리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그의 존재로 하여 항시적인 공포와 불안속에 지내던 지방행정과 경찰당국은 《의적단두령》김정보에게 장백오지의 골짜기 하나를 통채로 《의적단》소유의 《소왕국》으로 제공하는 대가로 의적 행위를 그만둔다는 조건부의 《신사협정》을 체결할것을 제의하였다. 이것은 넓은 장백땅에 모두해서 만명의 사람도 살고있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이 광대한 대원시림지대는 그것을 통채로 주고라도 편안하게 목숨잇기를 바라는자들에게 있어서는 전혀 아까울것 없는 불모의 땅이였다.

김정보는 그 《신사협정》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자기밑에 남은 여라문명의 부하들과 함께 압록강물속에 무기들을 던져넣고 자기들의 《소왕국》지대로 들어왔다. 그것이 오늘의 지양개골이다.

김정보는 자기들의 《소왕국》지대를 개척하여 자기나름의 《리상촌》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의 옛날 부하들과 함께 공동으로 개간한 땅을 공동으로 경작하고 공동으로 관리하는 자기류의 농촌공동체를 만들었다. 어제날 부대장이였으며 《의적단두령》이였던 김정보는 물론 이 공동체의 최고관리자로 되였다.

김정보는 이 공동체가 고국에서 건너온 류랑민들을 구제하는데 이바지하도록 이끌었으며 류랑민들의 희망에 따라 그들을 자기의 공동체속에 흡수시켰다. 살길을 찾아 압록강을 건너 지양개골의 김정보마을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살길이 열려졌다. 김정보는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집도 지어주고 햇곡식이 날 때까지 먹게도 해주었던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주고 누구나 골고루 살게 하는 공동체―리상마을의 건설―이러한것으로 그는 나라 잃고 살길 잃은 민족을 살릴 길을 찾은것이며 또 그것으로 하여 자신을 우국지사로 자부하고있었다.

마을사람들은 김정보의 덕행과 공동체 리상촌민들에 대한 그의 선정을 찬양하여 마을어귀에 《김정보선정비》도 세워놓았고 그에 대한 최상의 찬사로서 《선덕》이라는 호를 붙이고 《선덕선생》혹은《선덕님》으로 불렀다.

그들은 자기네 공동체의 최고관리자인 김정보에게 특별우대를 하였다. 그들은 김정보가 자기들보다 부하고 자기들보다 넉넉하고 자기들보다 권위가 있어야 덕행도 더 많이 베풀수 있고 자기들의 리익을 더 잘 대변하고 고수해줄수 있다고 인정하고는 그에게 온갖 특혜를 돌렸다. 즉 벌들이 왕벌 모시듯 했던것이다.

이러한 특전적지위는 그에게 온갖 권력과 부의 집중을 가져왔다. 형식상 공동으로 개간한 땅은 여전히 공동경작을 진행하였지만 그 모든 경작자들은 그 땅의 주인을 김정보로 인정했으며 자기들은 그의 땅을 모두 어울려 부쳐먹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상 김정보는 이미 지주나 다름없이 그 땅들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고있었고 그 어느 공동경작자들과도 비길수 없을만큼 호화롭게 살고있었으며 그들을 머슴군 부리듯 하고있었다.

그러면서도 김정보는 자신을 여전히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지 않고 압박하지 않는 선량한 공동경작지의 책임자로 간주했고 뭇로동벌들의 특혜와 존경을 받아 마땅한 《왕벌》로 간주하고있었다.

《위만》경찰이나 행정관리들도 그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며 경건히 대했다.

김정보는 자신을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릴수 없는 위엄스러운 존재로 간주하고있었던만큼 의연금을 내라는 성필이네의 요구를 자신의 권위를 모독하고 훼손하는 행위로 받아들이고 성난 맹호마냥 으르렁거릴수밖에 없었던것이다.

게다가 그는 최성필이네 모연공작성원들이 자기 집에 나타났을 때 그들을 한때의 자기네처럼 그 무슨 항일구국전이라는것을 해오다가 이제는 토비화되여버린 《공산비적단》의 잔병들인줄로 여겼던것이다.

그러나 홍두산에 호송되여와서 지내는 사이에 어느덧 그는 인식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고 악질지주 대하듯 했다는것과 이들은 결코 비적들이 아닐뿐더러 무엇인가 과거와 현재의 자기와 상통한데도 없지 않는 사람들이라는것이다. 즉 이들에게도 나라를 광복시키자는 뜻이 있고 또한 이들에게도 모든 사람들을 골고루 잘살게 하자는 뜻이 있다는 사실이였다. 그러나 이들이 한때 자기가 헛된 피를 흘렸던것처럼 헛된 피를 흘리며 헛된 고생을 하고있다는것을 생각할 때 그는 이들이 자기에게 모르고 가한 모욕은 잠시 잊어버리고 더없이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겼다.

그가 헛고생을 하며 헛된 피를 흘리는 이 불쌍한 젊은이들에게 집도 주고 땅도 주겠다고 한것은 바로 그런 심정에서였다. 이것이 새로운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때문에 모처럼 마련되였던 첫 대화는 파탄되고말았다.

다시 며칠 지나면서 마침내 유격대의 정치강령으로 되여있는 《조국광복회 10대강령》과 《조국광복회창립선언》문까지 본 김정보는 유격대에 대한 리해를 더욱 깊이하게 되였다. 유격대는 확실히 애국군사가 틀림없는것 같다는것과 조국광복을 해보겠다고 판을 벌린 본새가 그전 자기네의 독립군들이 하던 식과는 다르다는것이였다. 그는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으나 내심으로는 처음으로 진정 유격대에 대하여 호감이 가기 시작했고 동정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호감과 동정은 산전수전 다 겪어온 늙은이가 멋모르고 헤덤비는 착하고 기특한 젊은이에게 품는것과 다름없는 호감이였으며 어디에 함정이 있고 어디에 덫이 있는지를 알고있는 늙은 호랑이가 제 죽을덴줄 모르고 함정과 덫이 있는데로 내달려가는 새끼호랑이를 근심에 차서 바라보는것과 같은 우려에 가득찬 동정이였다.

유격대에 대한 호감과 동정이 더 커갈수록 애국충정을 품은 이 기특한 젊은이들을 아끼고싶은 그의 마음도 자라났다.

드디여 어느날 김정보는 경비조장 최성필을 불러앉혀놓고 그더러 유격대의 사령관 김일성장군을 만나게 해달라는것을 정중히 제기하였다.

《우리 사령관동지를 령감이 만나요? 이 령감이 정말 셈판을 영 모르누만!》

최성필은 놀라서 펄쩍 뛰였다. 모연공작대상 인질로 잡혀와있는 주제에 감히 사령관동지를 만나뵙겠다니 온전한 정신인것 같지 않게 여겨진것이다.

《도대체 우리 사령관동지를 만나서 어째보자는거요? 할 말이 있으면 우리한테 하시오.》

《아니 내 꼭 자네들의 사령관을 만나 할 얘기가 있네. 자네들에겐 말해봐야 안되는 일이네.》

《령감, 바로 말해보시오. 그래야 상부에 보고라도 할것 아니요.》

그것도 그래야 할듯싶었다.

《내가 말하면 자네가 그걸 그대로 전해주겠나?》

《들어보구 보고할만한거면 보고하지요.》

《그러면 자네하군 상대 안하겠네. 자네네 그 군수관이란 사람이 언제건 오겠지. 내 그 사람한테 말할테네.》

할수없이 최성필은 보고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럼 내 말하지. 다름이 아니라…》

김정보는 반백의 풍채좋은 턱수염을 내리쓸고나서 자못 엄숙하게 말하였다.

《자네네의 그 젊으신 장군이란분이 길을 잘못 들고있는걸 내 만나서 깨우쳐주자고 그러네. 이래뵈두 이 늙은이의 말을 한번 들어보는게 랑패없을게라구 보고를 드리게.》

최성필이와 《만강》은 아연해지고말았다.

하지만 이 괴이한 늙은이의 괴이한 제기는 며칠후 이곳에 왔던 사령부군수관 김주현에게 정확히 보고되였다.

《그 령감이 정신이 잘못된게 아니요?》

김주현이도 그 말을 듣고 아연해했다.

《그따위 얼빠진 미친 수작을 줴치우구 제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겠거든 집에 모연금을 내주라는 편지나 쓰시오.》

그는 김정보에게 딱 잘라말하고 초막을 떠났다.

사령부로 돌아간 김주현은 각 밀영성원들의 생활형편을 현지료해하고 해당한 대책을 세울데 대한 장군님의 지시에 따라 자기가 여러개의 밀영들을 돌아본 정형을 보고드리면서도 매우 불쾌하게 군 김정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보고를 통해 여러 밀영에서의 생활형편을 료해하시고 친히 대책적인 가르치심을 주신끝에 모연공작대상으로 억류시켜놓았다던 인질들과의 사업은 다 결속짓고 깨끗이 돌려보냈는가고 물으시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돌려보냈는데 아직까지 못되게 굴면서 모연금과 모연물자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는 한사람만은 그냥 남겨두고있습니다. 코집이 세기가 말이 아닌데 이제 수그러들게 만들겠습니다. 인차 해결하구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올리는 김주현의 표정은 락관적인것이 못되였다.

《한사람만 남았다? 대체 어떤 사람이게 지금껏 남아있소?》

장군님께서 따져물으시게 되자 김주현은 김정보한테로 갔을 때의 부아가 다시 치받쳐올랐다.

《지양개골에서 붙잡아온 김정보라는 옹고집쟁이 늙은인데 최성필동무의 말대로 영 이발이 들지 않습니다. 자기를 애국자연하면서 얼마나 모독적으로 나오는지…》

《뭐라고 말하는거요? 좀 들어봅시다.》

《들어보시나마나 정말 한심하고 험악합니다…》

김주현은 그 괴이한 령감이 줴친 소리들과 그가 제기했던 무엄하기 짝없는 청원에 대해서까지 사실대로 실토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의 말을 흥미있으신듯 한 표정으로 듣고계시던 장군님께서는 김정보의 청원이야기까지 나오자 자못 의아쩍어하시였다.

《나를 만나겠다? 그 령감이 어째서 나를 만나보겠다고 한답니까? 나를 한번 구경하자는겁니까?》

《사령관동지를 그저 호기심으로만 뵙자는게 아닙니다. 그 령감이 꼭 해드릴 이야기가 있다는겝니다.》

《나에게 해줄 말? 그게 무슨 말이요?》

김주현은 어이없는듯 허거프게 웃어댔다.

《그 령감이 좀 정신이 돈것 같기두 하구 모자라는것 같기두 한 소리를 했습니다. 자기는 제법 진지하고 정중하게 말합디다만…》

《혼자 웃지만 말구 그 어처구니없는 소릴 나도 들어보기요. 그래 어쩌자는거라오?》

김주현은 또다시 어처구니없어하는 웃음을 앞세우면서 말씀을 드렸다.

《사령관동지를 일깨워드리구 설복해드리겠다는겁니다.》

《뭐요? 나를 교양하겠다? 거 아주 흥미있구만. 그래 나를 만나서 뭘 교양주겠다오?》

《왜놈들하구 승산없는 싸움을 벌려놓구 아까운 젊은이들의 피를 헛되게 흘리게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도록 일깨워주겠다는겁니다.》

《아하하하…》

 장군님께서는 앉으셨던 자리에서 일어까지 나시며 폭소를 터뜨리시였다. 그이께서는 한참동안이나 허리도 펴지 못하시며 어찌나 웃으셨던지 두눈에 눈물까지 글썽해지시였다.

《아 참! 세상에 별로 웃겨주는 일도 다 있구만…》

장군님께서는 손수건으로 눈언저리를 닦으시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시였다.

《이렇게 나를 허리끊어지게 웃게 해준 그 령감에 대하여 더 알아본건 없소? 그 령감이 사는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는가말이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최성필동무의 말을 들어보면 자기 말로는 한때 독립군부대를 지휘한 경력이 있는것 같은 소리도 하고 의적단두령질을 한 소리도 하더랍니다. 그런가 하면 무슨 리상촌이야기도 좀 하고 여하튼 아주 괴이한 령감이라는겁니다.》

《그럼 동무네가 대상도 똑똑히 알아보지 않고 모연대상인질로 잡아온게 아니요? 만약 그가 실제로 지주라고 하더라도 반일적이고 애국적인 경향을 가진 량심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소한 요소라도 가지고있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달리 대해야 하오. 그런 사람들이 돈과 재산으로 스스로 광복혁명에 이바지할수 있도록 우리는 이끌어주어야 하오. 정견이나 신앙, 주의주장의 여하, 재산의 유무를 막론하고 각계각층의 모든 애국적인사들과 인민들의 힘을 다 합치려는것이 혁명의 시초부터 가장 중시해온 우리의 전략적로선이였고 또 지금 가장 절박한 당면목적이 아니겠소? 그 령감에 대해서 똑똑히 알아봐야겠소. 여하튼 괴짜령감임에는 틀림없소. 흥미있는 인물인것 같은데 지양개쪽으로 가는 동무들이 좀 알아보게 합시다.》

장군님께서는 이런 말씀으로 그 화제를 마치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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