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 장
게으름을 부려 느지막이 떠올랐던 초겨울해는 강변길에 누워있던 그늘을 밀어내며 따스한 해살을 넓게 펼쳤다. 압록강가녁에 붙기 시작한 얼음판은 거울처럼 반짝였다. 길옆의 벼랑에 뿌리를 박고 내리드리운 나무가지들과 길바닥에 얼어붙은 소똥우에서는 간밤에 낀 성에가 녹아내렸다. 장백현소재지에서 19도구쪽으로 올라가는 강변길로 후리후리한 키에 검은색 목세루두루마기를 입고 검은 중절모를 쓰고 검정가죽가방을 든 점잖은 중늙은이가 역시 새까만 단장을 천천히 옮겨짚으며 점잖게 걸어가고있었다. 훤하고 풍채좋은 그의 얼굴에서 유별히 두드러지는것은 속세를 벗어난 거룩한 사람다운 인상을 주는 두눈과 류달리 크고 귀방울이 길게 처져내린 량쪽귀였다. 살갗이 희멀쑥한 얼굴에 잡힌 주름살들은 그의 얼굴에 무엇인가 심각한것을 가미해주고있었다. 꼿꼿한 허리와 방정한 걸음걸이, 긁힌 자리 하나 없는 낡은 가방과 곧은 지팽이… 그의 모든것에서 허투루 말하고 허투루 걷고 허투루 살지 않는 사람일듯 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입고있는 두루마기에는 고름대신 단추고리가 달렸는데 그것도 단추 하나가 아니라 두개를 채우게 된 고리였다. 천도교도들만이 바로 그와 같은 유표한 단추고리를 단 옷을 입는것으로 자기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해놓는것이다. 천도교 령북도정 박인진이다. 삼수, 갑산, 풍산을 비롯하여 후치령 이북의 넓은 지역과 장백현일대의 천도교인들을 관할하는 령북지방 천도교도들의 최고권력자이며 지도자였다. 조선사람들의 가호만 해도 오륙백세대가 있는 19도구와 20도구일대에 교세를 뻗치기 위하여 지양개에 새로 전교실을 내올것을 이미전부터 생각해왔던 박인진은 지양개골의 가장 유력한 세력가이며 유지인 김정보를 만나러 떠난 걸음이였다. 교세를 뻗치려면 천도교를 보급선전할 전교실부터 먼저 내와야 한다. 유력자이며 부자인 김정보의 후원이 없이는 전교실을 지을수도 없거니와 또한 김정보의 동의와 지지가 없이는 지양개골사람들을 전교실에 끌어다 앉히기도 어려울것이였다. 그래서 박도정은 김정보를 자기들의 교의에 동화시키려고 종종 그를 찾아가군 하는것이다. 고집스럽고 괴벽한 김정보는 조선독립을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천도교를 믿어야 한다는 박인진의 설교에 쉽게 동화되지 않았다. 천도교가 목적으로 삼는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의 리념에는 공감하면서도 천도교가 주장하는 《한울님》을 믿어야 한다는데 대해서는 잘 리해하지 못했다. 아니 리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는 그런 《한울님》을 믿지 않아도 덕으로 천하를 다스리고 경리를 널리 발전시켜 백성을 살릴 생각을 할뿐아니라 그것을 실천에 옮겨나가고있다는것이다. 오늘 걸음에 기어이 김정보를 설득시킬 생각에 골몰한 박인진은 멀리서 뒤따라오던 말파리가 자기에게 바싹 다가온줄 모르고 그냥 천천히 걷다가 금시 귀전에서 울리는 사람의 목소리와 말방울소리 그리고 뚜벅거리는 말발굽소리를 듣고 길을 비켜섰다. 후더운 비린내가 풍기는 세찬 코김을 앞세우면서 허연 당나귀대가리가 불쑥 나왔다. 핑핑하게 살찐 당나귀에게 메운 말파리의 앞자리에는 말갈기처럼 희슥희슥하고 텁수룩한 수염을 덧저고리 가슴에 드리운 늙은이가 앉아있었다. 박인진을 흘끔 돌아다본 늙은이는 고삐를 나꿔채여 말파리를 멈춰세우며 앉은자리에서 벙거지부터 벗어들었다. 텁수룩한 수염속에 가리워졌던 입술이 벙글써해졌다. 김정보네 마을에 사는 마로인이였다. 《도정님, 그간 편안하셨소다?》 《마서방이시구려, 아침나절에 벌써 어디 다녀오시오?》 박인진이도 중절모를 가볍게 벗어들었다. 지난여름 박인진의 제자인 리창선이와 마로인의 외딸사이에 혼사말이 난 뒤부터 그들은 서로 사돈간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어제 장백읍에 내려왔다가 하루밤 묵고 돌아가는 걸음이오다. 도정님은 어딜 가시오다?》 《김하사님을 만나보려구 나도 지양개엘 가는 걸음입지요.》 리조말기에 하사로 군대에 복무한 경력을 가지고있는 김정보에게는 《김하사》라는 별칭이 있었다. 《그럼 어서 이리 올라타시우다. 자리는 루추하오다.》 마로인은 자기가 깔고앉았던 마대 한짝을 덜어 뒤에 실은 자루짐들우에 박인진이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박인진은 별 사양없이 말파리에 올라앉았다. 편안히 앉아가게 된 대가로 그는 이따금 바람에 날려오는 당나귀코김과 마로인의 입김을 받아마셔야 했다. 《장백읍엔 무슨 일로 내려오셨게 어제 와서 묵기까지 했다면서 우리 집에도 들려보지 않고 가시오?》 박인진의 나무람하듯 하는 말에 마로인은 황감해하며 대꾸했다. 《도정님께서 나같이 비천한 사람의 집안일을 너그러이 굽어보살펴주신 덕에 불쌍한 우리 딸년이 세상에 흔치 않는 두벌혼사를 치르게 됐는데 어찌 도정님을 찾아뵙고 갈 생각이야 없었겠소다. 하지만 저같은것까지 장백에 내려오는 때마다 번번이 찾아들어서야 손님성화에 견디겠소다?》 《그래 장백엔 무슨 일로 내려오셨소?》 《시골에 깊이 처박혀 사는 나같은것이 다른 일로야 도회지에 내려올 일이 있겠소다? 딸년의 잔치차비나 하려구 왔지오다.》 물어주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던듯 마로인은 흥에 겨워 말했다. 《꽃나이에 혼자 나앉아 평생 청승맞게 살아가며 우리 늙은 에미애비속을 태워줄번 하던것이 팔자를 고치게 됐는데 그 일을 허술히 맞을수야 있겠소다?》 박인진은 말파리에 실린 자루짐들을 새삼스럽게 돌아보았다. 《세상에 귀한 자식에게 생기는 좋은 일보다 더 기뻐할 일이 어디 있겠소? 더구나 늦게 본 귀한 외동딸의 일이니 정말 기쁘시겠소.》 《네, 갓마흔에 첫버선이라는 말두 있소만 내사 실루 우리 죽순일 꼭 마흔에 접혀서 보질 않았겠소? 그게 언제 자라서 머리를 얹을가싶더니 세월이 류수지오다. 고사리같은 손으루 내 수염을 잡아뜯던게 엊그제 같았는데 웬걸 우리 내외가 환갑나이를 먹기전에 한여름날 도라지꽃처럼 활짝 피여나질 않았겠소다? 마침 겉보기만도 어리무던한 부모없는 총각 하나가 내 눈에 들길래 옳지 저게 우리 죽순이하고 비둘기처럼 의좋게 살아갈 사위감이로다 하구 생각했지오다. 본 그대루 어리무던한 실농군이였소다. 헌데 사람이 그렇게 맹랑하게 흉사를 당할줄 뉘 알았겠소다? 메돼지함정에 메돼지가 빠졌나 돌아보러 갔다는 사람이 이튿날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길래 온 동네 사람까지 다 떨쳐 산을 훑고 숲을 훑으니 얼굴엔 호랑이 발톱자리 하나 난것 없는데 넋을 잃어버린 사람이 나졌단 말이우다. 호랑이를 대하자마자 얼이 쳤던가보우다. 그걸 보면 그 사람이 대가 약했지. 이번에 만난 그 도정님의 제자되는 사람은 눈이 배긴게 사람이 담차게 생겼더랑이…》 말파리는 압록강변길을 벗어나 19도구 골안에 접어들었다. 눈덮인 개버들 저편에서 물살빠른 개천이 얼음덩어리들로 변해버린 바위돌에 부딪쳐 비말을 뿌리기도 하고 개바닥에 널린 돌들을 늠실늠실 타고 넘기도 하면서 시꺼멓게 흘렀다. 백여리나 된다는 깊은 골안을 흘러내려 압록강에 합쳐드는 19도구하의 물줄기였다. 소란스러운 물소리가 좁은 골안에 메아리쳤다.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골안은 점점 더 넓어졌다. 띠염띠염 귀틀집들이 나타나고 불에 타서 시꺼멓게 그슬은 나무드덕들이 듬성듬성 서있는 비탈밭들이 벌거벗은 이깔나무숲속 여기저기에 나타났다. 골안은 잠풍하고 아늑했다. 자기 딸에게 다시 행복을 안겨주게 된 기쁨때문에 어지간히 수다스러워진 마로인은 새로 맞아들일 사위를 만나보던 때의 자기의 흡족했던 심정을 또 한참동안이나 늘어놓고 나중에는 지양개일판이 들썩하게 잔치를 차려보려는 자기의 내심까지 토로했다. 《살림도 어려울텐데 뭘 그리 야단스럽게 차리시겠소?》 《풍산에 있다는 사돈집에서 우리 딸을 데려갈 형편이 못된김에 마침 내 소원대루 데릴사위를 데려오게 됐는데 두 잔치를 엎친만큼이야 차려얍지오다. 부대기밭이나 뚜져먹고 사는 우리네 형편이사 무슨 잔치를 변변히 차릴 힘이 있겠소만 선덕님(김정보의 다른 별칭)의 보살핌을 받아서 우리 지양개골 잔치가 다른 시골잔치들보다는 막되지는 않지오다. 어제두 선덕님께서 찾으시기에 댁엘 갔더니 함에 넣어보낼 옷감에다 음식차리는데 쓸 적잖은 돈을 부조명목으루 쥐여주시며 잔치차비나 잘하라질 않겠소다? 내 그래서 장보러 왔지오다. 벌방에서 나는 찹쌀과 입쌀두 사오구 비단이부자리를 할 감과 햇솜도 얻었지오다.… 선덕님 아니면 우리 같은게 무슨 돈이 있어 그런 희귀한걸루 잔치차비를 해보겠소다?…》 지양개의 대소사는 다 김정보가 봐준다는 이야기였다. 늙은이는 또 한참 선덕님의 덕망에 대해 늘어놓았다. 말파리는 발구자리가 난 달구지길을 따라 점점 골안깊이 들어갔다. 골안은 마을들이 있는데서는 넓어졌다가 다시 좁아지군 했다. 들어갈수록 개천도 더 많이 얼어붙었다. 하긴 봄은 개울 아래쪽에서 올라오지만 겨울은 개울 웃쪽에서부터 내려가는것이다. 여울진데서는 강판이 거의다 얼어붙어있었다. 바지괴춤이 흘러내려 시뻘건 배가 드러나는 헌 토스레옷을 입은 조무래기들이 맨발에 초신이나 나막신바람으로 얼음판에서 썰매를 타기도 하고 팽이를 돌리기도 하다가 박인진의 중절모가 구경스러웠던지 한참이나 말파리를 돌아다보았다. 《김정보씨는 요새도 무고하시던가요?》 박인진은 늙은이의 이야기가 잠시 동강난 틈을 타서 물었다. 《무고합지요. 무쇠처럼 단단하신 어른인걸요. 평생 감기 한번 앓는 법 없이 지내오신분이지오다.》 《요즘 더러 나다니시진 않던가요?》 《그 어른이야 어디 세상밖에 나다니는 일이 있소다? 지양개골에 딴 세상을 꾸려놓구 살자구 마음먹은 어른이신데 바깥세상에 나가보길 하겠소다? 또 돈이 그리워 농한기에 이와실이를 다니겠소다?》 《더러 사냥하러 나가진 않으시오? 사냥하기를 즐기실것 같은데…》 《그건 우리 선덕님을 모르시는 말씀이오다. 사냥이 다 뭐겠소다? 압록강물속에 총대를 던져넣구 지양개골에 들어와 박힌 담에는 총소리를 듣기만 해두 질색이라우다. 전전년에 혜산서 일부러 곰사냥을 온 사냥군이 우리 골안에 들어와 사냥총소리를 낸적이 있었지오다. 마침 우리 선덕님이 그 총소리를 듣구 사람들을 파해서 그 사냥군을 붙들어다놓고 어찌나 엄하게 신칙했던지 그담부턴 우리 골안에 다른 사냥군들두 함부로 얼씬 못했소다. 선덕님은 총멘 사람이라면 누구든 우리 지양개골에 그림자두 얼씬 못하게 합지요.》 늙은이는 덧저고리섶을 들고 안에 입은 조끼주머니에서 담배쌈지를 꺼냈다. 그는 괴춤에 질러두었던 곰방대를 끄집어내여 그것으로 담배를 피워물었다. 《한데 요즘은 사냥군들두 얼씬 못하던 지양개골 막바지에 총멘 사람들이 더러 얼씬거린다질 않겠소다?》 《웬 사람들이랍디까?》 《유격대라구두 하구 공산군이라구두 하구 또 공산비적이라구두 하구 떠도는 이야기는 여러가진데 아무튼 그전에 못보던 사람들이 전달에 덕부동막치기에 있는 몇집에 와서 자고 갔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며칠전에두 그 수상한 사람들이 또 덕부동에 나타나서 조선독립을 시키자는 연설이랑 했다는 이야기가 있소다. 도정님은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길 못들었소다?》 박인진이도 정체모를 무장단에 대한 뜬소문을 들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공산군》이라고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공산독립군》들이라고도 했다. 《나도 뭐가 뭔지 통 알수 없는 여러가지 뜬소문들만 들었습니다. 마로인은 그 사람들을 봤다는 덕부동사람은 못만나봤습니까? 그저 뜬소문만 들었는가요?》 《그랬지오다. 덕부동이 우리 지양개골막치기라지만 우리 마을서 몇십리나 들어가 있는데우다. 골안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니 사람들이 어데 서로 래왕이나 하우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지만 그래두 말에 발이 달렸으니 그 먼 막치기에서 한입 건너 두입 건너 우리 있는데까지 소문이 날아왔지오다. 그렇게 소문이 전해지는 사이에 어느게 실말이구 어느게 지어낸 말인지 가릴수 없게 되기두 하겠지오만…》 《그래 지양개에 전해지는 소문으로는 그 사람들이 어떻더랍니까?》 《사람들이 좋더라구 하오다. 마을에 들자 신식노래와 춤두 배워주구 조선독립을 해야 한다는 연설두 하구… 일들두 잘하구 례의범절에두 밝구… 도무지 군대라는게 무섭지두 어렵지두 않구… 군복입구 총을 멨으니 그렇지 군대들 같지 않더라지오다. 새벽에 일어나자 집마당들부터 쓸구 하는게 그저 제집 사람들 같더라질 않소다? 그래두 군대는 군댄게 총두 그전에 독립군들이 메고다니던 총과는 생판 다른 번쩍번쩍하는 신식총들을 메구 줄을 지어 나팔을 푸파거리며 붉은기를 앞세우구 산을 오르는게 볼만하더라지오다. 그 사람들가운데는 군복입구 총을 멘 녀자들두 여럿이더라오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남녀구별이 엄격하더랍데다. 전에 떠도는 말로는 공산독립군은 남녀구별이 없이 한데 마구 어울려 자구 녀자두 네사람 내사람 가림이 없다던데 그렇지를 않더라질 않겠소다? 도정님같이 학식이 많구 들은게 많은 어르신네야 잘 아실터이지만 공산한다는 사람들은 안깐네두 네사람 내사람 구별없이 산다는게 정말이우다?》 마로인은 곰방대를 빨며 그를 돌아다보았다. 그의 볼이 오무라들적마다 곰방대안에서는 가랑거리는 대진끓는 소리가 났다. 《글쎄 그런 말이 없지 않던데 전들 보지 못하구서야 어찌 알겠습니까.》 늙은이는 입에서 곰방대를 뽑아들고 머리를 끄덕이였다. 《하긴 그렇습지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랬는데…》 혼자말로 유식한 말마디를 외운 마로인은 다시 제대로 돌아앉았다. 사개맞지 않는 마로인의 유식한 말에 박인진은 혼자 소리없이 너그럽게 웃었다. 《허, 저것 보시오다. 올해엔 한가위전에 첫눈이 내려서 저렇게 곡식대를 눈속에 세워둔채 이삭만 잘라 가을해들인 농가가 적지 않지오다…》 마로인은 곰방대를 들어 이삭만 잘라낸 산비탈의 눈덮인 수수밭을 가리켰다. 《이 백두산아래에 그렇게 많은 첫눈이 내린건 우리가 여기 들어와 살아오면서는 첫일이우다. 이제는 마을에 다 왔소다.》 늙은이는 마지막 모금을 빨고나서 곰방대를 손바닥에 툭툭 털어 괴춤속에 질러넣었다. 산굽이를 돌아서자 좁은 골안이 넓게 열리면서 아늑한 분지를 이루고있었다. 마을 첫어구 길옆의 벼랑아래에 《김정보선덕비》라고 새긴 높다란 대리석비석이 서있었다. 김정보에 대한 경의를 표시해서인지 마로인은 그 선덕비에 다가가기전에 말파리에서 내려 걸었다. 순 귀틀집들로 이루어진 화전마을 복판에 추녀를 높이 쳐든 김정보의 커다란 8간집 기와지붕이 우뚝 솟아있었다. 그 집도 마을의 다른 모든 집들처럼 귀틀벽을 쌓아올렸지만 껍질을 벗긴 재목으로 유독 큼직하게 지은데다 동기와 대신에 닭의 변두처럼 새빨간 토기기와로 지붕을 씌우고있어 마치 병아리를 거느리고 선 암닭처럼 두드러져보였다. 점심상에 마주앉을만 한 때가 되여서인지 바깥에 나와노는 아이들도 보이지 않고 마실을 다님직한 어른들도 보이지 않았다. 김정보네 집으로 꺾어드는 길목에서 마로인은 당나귀를 멈춰세웠다. 박인진은 말파리에서 내렸다. 마로인은 고삐를 사려 당나귀잔등에 얹어놓았다. 《같이 들어가기우다. 나도 장보고 온 이야길 드리구 올라가겠소다. 선덕님 덕으루 남못잖게 잔치차비가 되는줄 아시면 기뻐할거우다.》 마로인은 마냥 기분이 좋아서 씨엉씨엉 앞서 걸었다. 심산유곡의 화전마을에서는 그 어디 가서나 좀처럼 볼수 없을 넓다란 널바자 한가운데에 소코뚜레보다 더 큰 문고리가 달린 육중한 쌍대문이 달려있었다. 작은 지붕까지 씌운 대문이였다. 사람이 드나드는 문은 그 한쪽 대문 귀퉁이에 자그마하게 달려있었다. 그들이 문앞에 다가서기전에 찌꾹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그 작은 출입문을 밀치면서 때가 반질반질한 저고리소매안에 두손을 엇가로 질러넣은 사람이 나오다가 그들을 보고 문간에 그대로 멎어섰다. 《아, 춘삼이 자넨가?》 마로인이 그를 반기며 인사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춘삼은 소매안에서 손도 뽑지 않은채 그냥 문간에 멍청히 막아서고있었다. 《이사람아, 어서 나오게. 자네 귀한 손님이 선덕님을 찾아오신것두 못보나?》 늙은이가 깨우쳐주어서야 그는 문간에서 물러서며 박인진을 흘끔 곁눈질해보았다. 그러더니 늙은이를 향해 부르튼 소리로 말했다. 《선덕님은 안계셔요.》 《왜 어디 나가셨나?》 그는 또다시 박인진을 흘끔 쳐다보더니 마로인의 귀에 대고 뭐라고 수군거렸다. 그의 말을 듣던 마로인의 눈꼽이 낀 두눈이 대뜸 화등잔만해졌다. 《무어? 붙잡혀갔다구?!》 마로인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이 말이 튀여나왔다. 《좀 조용하시우. 이건 함부로 말하면 안된답니다.》 춘삼은 귀속말로 일깨워주고는 또다시 박인진을 이상한 눈길로 흘끔 치떠보았다. 《이런 변이 어데 있나? 응, 이런 변이?》 마로인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하튼 들어가보시우. 그저 지금 초상난 집 한가지우다.》 춘삼은 다시금 소매속에 두손을 엇가로 질러넣고 부산스럽게 대문가에서 물러나버렸다. 《붙잡혀가다니 누가말입니까?》 박인진은 마을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채고 까닭모를 불안을 느끼며 물었다. 《우리 선덕님이 간밤에 붙잡혀가셨다오다.》 《네에?! 누구한테말입니까?》 《그 사람들한테지요.〈공산군〉인지 〈공산비적〉인지 하는 사람들말이오다. 선덕님을 붙잡아간걸 보니 비적은 비적이 옳은가보오다. 이런 불행한 일이 어데 있겠소다?》 박인진은 두다리가 후두두 떨렸다. 지체없이 이 자리를 피해 물러가지 않으면 자기도 그런 화를 당할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초상난 집에 왔다가 위문도 하지 않고 돌따서는것 같아서 얼른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갑자기 음산하고 무시무시해보이는 널대문안의 어디에선가 소리를 죽여가며 흐느껴우는 아낙네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름군복을 입고 지내는 유격대원들에게 한시바삐 솜군복을 해입힐데 대한 과업을 받고 대담하고 날파람있는 여러명의 월동물자공작대원들을 데리고 백두산밀영지를 떠나온 사령부군수관 김주현은 지난 여름 선발대로 나왔을 때에 이미 안면을 익힌 사람들의 적극적인 방조밑에 적지 않은 천과 솜, 신발 등의 월동용물자들과 세수수건, 비누, 치약 등의 세면도구들 그리고 담배들을 해결했다. 그러나 엄청나게 많이 소용되는 물자들을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의거하여 해결하게 되면 가뜩이나 궁색한 그들의 살림에 부담이 되리라는것을 타산한 김주현은 꽤 잘산다고 소문난 몇몇 지주집에 경제모연공작조를 파견했다. 그리고 나머지 성원들에게는 먼저 해결된 월동용물자들을 지워가지고 백두산밀영지로 들어왔다. 사령관동지께서는 7련대의 일부 전투성원들을 친히 인솔하시고 어디로인가 떠나신 뒤였으므로 밀영지에 계시지 않았다. 밀영을 책임지고 꾸리느라 소백수골에 남아있는 7련대장 강세호에게 그간의 공작정형을 알리고 그와 협의해본 뒤에 우선 밀영에 날라들여온 천과 솜으로 솜군복제작에 착수하도록 한 김주현은 그 새벽으로 다시 돌아서서 소백수골을 떠났다. 그가 경제모연공작을 내보냈던 대원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인 덕부동치기의 바위굴어방에 당도한것은 점심무렵이였다. 눈에 깊이 묻힌 산골길 수십리를 내처 바삐 걸어왔더니 홑여름군복에 안에도 낡은 토목내의 한벌밖에 입은것이 없었지만 온몸에 땀이 돋았다. 눈길을 벗어져 바위굴을 향하기전에 그는 주위를 재삼 둘러보고 자기를 보는 사람이 없다는것을 확인한 다음 가문비나무가지로 자기 발자국을 쓸어 지워버리면서 뒤걸음쳐 바위굴쪽으로 다가갔다. 다른 방향으로부터 바위굴로 들어간 흔적이 보였다. 공작나갔다 돌아온 동무들이 자기들의 발자국을 지워버린 자리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바위굴을 가리워주고있는 마른 단풍나무숲 앞으로 다가가던 김주현은 이상한것을 눈치채고 민첩하게 목갑총을 뽑아들었다. 바위굴 웃턱으로 솔금솔금 날려나오는 희미하고 푸르스름한 연기를 본것이다. 비밀련락장소에서 낮에 불을 피우는것은 금지되여있다. 또한 바위굴에서 만나기로 약속돼있는 경제모연공작대원들가운데는 담배질을 하는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굴속에는 지금 우리 사람들이 아닌 딴 사람이 숨어들어있는것이 아닌가? 무슨 예상치 못한 정황이 생겼는가? 《군수관동지, 왜 그러십니까?》 귀에 익은 낮은 목소리와 함께 단풍나무숲뒤에서 최성필의 의아해하는 얼굴이 나타났다. 《만강》동무와 함께 지양개쪽으로 공작을 내보냈던 소조장이였다. 《아, 돌아왔구만… 나는 또 굴에서 연기가 나오길래 딴 사람이 비밀련락장소에 들어배긴줄 알았소. 무슨 연기요?》 성필은 굴입구쪽을 힐긋 돌아보더니 량어깨를 으쓱 추켰다가 내렸다. 《하, 그 두상태기가 또 담배질을 하는군요.》 《두상태기라니? 누구말이요?》 목갑총을 도로 차고있던 김주현이 물었다. 《그 지양개지주 있지 않습니까? 김정보말입니다.…》 최성필은 마치 이발이 쏘기나 한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체, 일이 좀 별랗게 됐습니다. 모연에 응하지 않기때문에 여기 붙들어왔습니다.》 《붙들어왔다? 어째서 응하지 않소?》 《그 까닭을 알수가 있어야지요. 거의 한시간이나 해설설복두 하구 위협두 해봤는데 끝끝내 못내겠다구 하기때문에…》 《충분히 말로 해봤소?》 김주현의 눈길은 최성필의 드센 주먹을 얼핏 스쳤다. 그것을 감촉한 최성필은 얼결에 두손을 바지뒤로 슬그머니 끌어갔다. 《충분히 말로 했지요. 정 모욕적으로 나오기때문에 그저 한번 약간…》 《약간 다쳐줬겠구만?》 최성필은 울기가 오른 얼굴이 벌개지며 이마에 피줄이 살아올랐다. 《글쎄 이제 들어가 만나보십시오. 그런 두상태긴 보다 첨입니다. 웬간했으면 제가 붙잡아왔겠습니까? 애당초 우리를 상대하려구 안한단 말입니다. 말두 안하구 주먹밥을 줘두 안먹구 어제밤부터 장 담배만 피우구있습니다. 〈대통령감〉이 구해다 달래서 얻어논 권연을 그 두상태기가 저러단 다 피워버리고 말겠시다.》 《대체 어째서 모연에 응하지 못하겠다는거요?》 《그걸 글쎄 알수 있습니까? 못낸다 하니 그뿐인걸요》 《겁내지도 않소?》 《겁이 다 뭡니까? 죽이겠으면 죽여보라는 배심인걸요. 글쎄 그런 고집불통은 보다보다 첨이라니까요. 그저 꽝하구 쏴갈겨치울가 하다가… 군수관동지를 기다리던중입니다. 우리끼리 처리할순 없고 해서… 〈만강〉동무도 몇마디 건네보군 손을 바짝 들었습니다. 영 이발이 들지 않거던요. 여하튼 만나보십쇼.》 《우럭골쪽으로 갔던 동무들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오? 그 동무들은 안왔소?》 《돌아왔습니다. 그 친구네는 일이 괜찮게 됐습니다. 의연금두 얻어오구 또 이틀후에 우리 요구대루 물자를 마련해놓겠다는 다짐두 받구 왔답니다. 그 친구넨 맘이 편해서 저안에서 지금 밀린 잠을 늘어지게 자구있습니다.》 《들어가보기요.》 《저어― 시장하시겠는데 좀 요기부터 해야지 않겠습니까?》 《괜찮소. 우선 그 두상부터 만나보구. 어떤 위인인지 어디 좀 보기요.》 김주현은 허리를 구붓하고 최성필을 뒤따라 굴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겨우 어길만 한 굴어귀 바위벽에서는 하얗게 낀 성에들이 반짝거렸다. 맹맹한 흙내와 약간 시큼하고 알싸한 건초냄새 그리고 독한 담배냄새가 배인 후덥고 눅눅한 공기가 얼굴을 감싸주었다. 어두운 굴안쪽에서 가락맞지 않는 두사람의 코고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암질이 굳은 바위굴안이 통채로 공명관이 되여서인지 정작 가까이 다가가 들어보니 그닥 세차게 골지도 않는데 입구쪽에서는 요란하게 들린것이다. 최성필은 길을 가로막고 누운 두무지의 건초무데기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그 건초무데기속에서 코고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숨을 들이긋는 코소리가 울릴 때마다 건초무데기는 서서히 부풀어올랐다가 내부는 소리와 함께 꺼져내리군 했다. 최성필은 김주현을 돌아보며 귀속말로 물었다. 《깨우랍니까?》 《둬두오.》 두사람은 건초무데기들을 조심스럽게 타고넘었다. 안쪽에서 누군가 부시럭거리며 일어났다. 《만강》이였다. 지난 여름 만강에서 입대한 그는 구대원들보다 장백실정에 밝다고 인정되여 모연공작대에 속했는데 《애물두상》과 맞다들리는바람에 따스한 건초무데기속에 몸을 파묻고 실컷 잘수 있는 행운 대신 졸음을 참아가며 그 애물을 지키는 신세가 된것이다. 김정보는 구석에 들어앉아있었으므로 어둠에 눈이 익지 않은 김주현은 어떻게 생긴 위인인지 보지 못했다. 어둠속에 벌그스레한 한점의 불꽃이 떠있었다. 잠시후 그 불꽃이 밝게 살아났다. 그 순간 문제의 인물초상이 담배불빛속에 희미하게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더더욱 캄캄해진 어둠속에는 또다시 한점의 벌그스름한 담배불꽃만 찍혀졌다. 그러나 김주현의 눈에 얼핏 비쳐들었던 김정보의 얼굴모습은 뇌리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우묵한 눈확속에서 차돌같이 차겁게 빛나던 매서운 두눈, 굵고 숱진 시꺼먼 눈섭, 칼등처럼 날카롭게 솟은 코등, 모가 진 넓은 턱을 가리워주고있던 위엄있고 풍만한 반백의 턱수염, 창백한 량볼에 깊이 패운 《ㅅ》자형의 굵은 한쌍의 주름살, 숱진 눈섭에서 바늘처럼 길게 내뻗친 몇오리의 장미와 턱수염에는 작은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새사람이 자기앞에 나타났음에도 김정보는 김주현에게 전혀 눈길을 돌리지 않고 그 무슨 조각상처럼 들어앉아 담배만 피우고있었다. 김주현은 자기의 의지와 설득력에 대해 언제한번 자신을 못가져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담배불빛에 드러난 문제의 인물의 얼굴모습을 얼핏 보게 된 이 순간에는 그를 휘여잡기가 조련치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주현은 《만강》이 앉았던 마른 새초자리에 들어앉았다. 《그 〈대통령감〉의 담배를 나한테두 한대만 개평해주오.》 《여기 있습니다.》 《만강》은 권연갑을 꺼내여 한가치 뽑아주었다. 그리고는 이어 부시를 쳐서 불까지 붙여주었다. 《고맙소. 동무는 이제부터라두 좀 자라구. 성필동무는 바깥을 살피구.》 《저는 졸리지 않습니다. 제가 경계근무를 서겠습니다.》 신입대원인 《만강》은 언제나 열성스러웠다. 《졸리지 않거든… 맘대루 하오.》 《만강》은 주춤거리다가 입구쪽으로 물러갔다. 스스로 맡아나선 임무를 수행하려고 물러나가면서도 김주현이 《애물두상》을 어떻게 휘여잡는지 옆에서 구경하고싶었던 모양이다. 김주현은 어둠에 눈이 익을동안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차츰 어둠에 익숙해진 그의 눈에는 김정보의 이마를 가리워주고있는 털벙거지와 얼굴과 수염과 외투 그리고 흰 한복바지와 구두가 희미하게 가려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담배불을 꺼버린 김정보는 외투소매에 두손을 엇가로 질러넣고 털벙거지를 쓴 머리를 바위벽에 기댄채 눈을 감고있었다. 《춥습니까?》 김주현은 피우던 담배를 던지고 신발로 비벼꺼버리면서 조용히 물었다. 《…》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찬 바위벽에 그대로 기대앉으면 잔등에 풍을 맞을수 있습니다. 그렇게 기대앉지 마시오.》 《…》 역시 김정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으나 눈만은 떴다. 그는 온곱지 않은 눈길로 김주현을 건너다보았다. 《아바이, 풍을 맞지 않겠거든 그렇게 기대앉지 말구 나하구 이야기나 합시다.》 김주현은 거듭 일러주었다. 불시에 김정보의 눈에서는 시퍼런 적의가 번뜩였다. 《개수작 말아, 돼먹지 못한 녀석들!》 김정보는 바위벽에 침을 탁 뱉었다. (보십시오. 어떤가?) 김주현에게로 향한 최성필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있었다. 김주현은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령감, 말 좀 삼가하시오. 우리 사령부 군수관동지시오.》 최성필이가 옆구리에 찬 목갑총을 툭툭 치며 한마디 귀띔해주었다. 김정보는 바위벽에 기댔던 잔등을 떼고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군수관?! 그건 뭘하는 직분이요?》 《이 두상태기가 영 셈판을 모르누만.》 최성필은 물러서라는 김주현의 손짓을 마다하고 그의 손을 물리치며 한마디 더 하였다. 《사령부 후방책임을 맡은 높은 어른이요. 괜히…》 김정보의 도끼눈이 금시 김주현의 머리를 찍을듯이 번뜩였다. 《비적단 자금과 물자를 맡아 주관해 나누는 사람이란 말이지? 그렇소?》 김주현의 눈에서도 시퍼런 불찌가 튀였다. 성미급하고 격하기 쉬운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오른손을 목갑총에 가져다댔다. (해치웁시다. 말해봐야 울화밖에 치밀게 없습니다.) 다시금 김주현을 돌아보는 최성필의 열기띤 눈은 이렇게 말하고있었다. 《함부로 아무렇게나 말씀하면 재미없습니다.》 김주현은 이발자리가 난 새파래진 입술을 겨우 놀려 내뱉듯 목소리를 억눌러가며 타일렀다. 김정보는 쓴웃음을 지었다. 《재미없겠지. 당신에겐 총이 있구 나한테는 총이 없으니까.》 《…》 김주현은 꽉 졸라맨 혁띠를 풀었다. 《이 총이 그렇게 험한 말을 시킨다면 치웁시다. 나는 순한 말을 듣는걸 좋아합니다.》 그는 목갑총이 달린 혁띠를 통채로 최성필이에게 넘겨주고 물러가라고 턱질하였다. 최성필은 김정보를 흘겨보며 마지못해 입구쪽으로 물러갔다. 《이보시오, 젊은이. 총따위나 풀어놓는 얼림수작을 말구 사람을 풀어놓소. 당신이 총을 풀어놓은건 아무 뜻도 못가지오. 나를 이 굴안에 잡아놓고있는 이상은…》 김정보는 풍만한 턱수염을 내리쓸었다. 《차라리 그 총을 차고있는게 격에 맞을거요. 늙은이한테는 수염이 있어야 하는것처럼 비적상관한테는 흉기가 있어야 하오.》 김주현은 결김에 무릎으로 땅을 짚고 일어섰다. 어느틈에 김정보의 턱주가리밑으로 간 그의 손은 텁숙한 수염을 움켜쥘듯 하다가 말았다. 《령감, 똑똑히 듣소!》 김주현은 곤두세운 둘째손가락을 그의 코앞에 대고 흔들었다. 《당신은 지주요. 사람들의 피땀을 짜내여 배를 불리는 착취자요. 우리는 당신같은 무산대중의 착취자를 여기서 당장 처단해버릴수도 있소. 뭐 우리가 관용을 베푸는것이 당신이 이뻐서 그러는줄 아시오? 처단해버릴 대상이지만 당신이 만약 우리를 지원하게 되면 당신을 용서하구 고스란히 돌려보내주자구 당신이 풍맞을것까지 걱정해주었소. 당신한테두 자식들이 있구 당신한테두 조선사람의 피가 있겠는데 당신은 부끄럽지도 않소? 저 사람들을 좀 보시오.》 김주현은 굴바닥 건초더미속에서 몸을 파묻고 자는 두 대원을 가리켰다. 《모든 조선사람들이 일일천추로 갈망하는 조선독립을 시키겠다구 집을 떠나 헐벗고 굶주리며 지내는데 자기만 뜨뜻이 입구 배불리 먹는게 미안하지두 않소? 이 동삼에 아직까지 홑옷을 입구 이불두 없이 마른풀을 덮고 자는걸 보면서 미안하지두 않소? 당신같이 잘사는 사람이 저 사람들이 입을 몇십벌의 솜옷감이나 의연금 얼마를 내는게 무슨 그리 어려운 일이라구 제목숨 아까운줄두 모르구 로망을 부리는거요? 우리는 당신을 처단해치우구 당신의 가산을 강제로 털수도 있소. 그러나 우리는 당신을 생각해서 당신 스스로가 의연금이나 물자를 내도록 일깨워주었소. 그래 당신은 이런 애국군대를 도와줄 의사가 전혀 없소?》 눈섭하나 까딱하지 않고 눈살이 꼿꼿해있던 김정보는 별안간 고함을 질렀다. 《나같은 사람을 붙잡는 네놈들이 무슨 애국군대구 독립군대냐? 이 천하에 무도헌놈들!》 굴안이 금시 무너져내릴것 같은 그의 고함소리에 잠자던 두 대원이 와닥닥 뛰쳐일어나고 최성필도 달려들어왔다. 《네놈들이 날 용서해? 용서라구?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용서란 말이냐? 사람두 몰라보는 고현놈들 ! …》 김주현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김정보를 등지고 돌아서서 모연공작대원들을 데리고 입구쪽으로 나왔다. 《오늘밤에 최성필동무와 〈만강〉동무가 저 령감을 깊은 산중에 호송하시오.》 김주현은 분기를 억누르며 지시했다.
김주현의 월동준비공작대와 리동학의 별동대를 떠나보내신 다음에도 며칠간 신설중의 밀영지에 머물러계시면서 밀영건설이며 개별공작원의 파견이며 선전물제작이며 월동용 화목준비며… 하나같이 급하고 또 중요한 여러가지 크고작은 일들을 돌보시던 장군님께서는 9월말경에 소부대를 거느리시고 소백수골을 떠나시였다. 백두산지구를 친히 편답하시면서 지형도 익히시고 이 지구의 실정도 손수 료해하시고 위성밀영들의 건설이 어떻게 추진돼가는지 현지에 가서 알아도 보시고 또 새로운 밀영지를 직접 탐색설치하실겸하여 떠나신 걸음이였다. 먼저 선오산밀영지로 가신 장군님께서는 어느새 귀틀벽을 다 쌓고 서까래를 올리기 시작한 김해산이네들의 일손을 도우시면서 그곳에서 하루밤을 묵으신 다음 압록강최상류의 깊은 계곡을 지나 백두산의 서남쪽 턱마루밑에 자리잡고있는 대탁온천지로 넘어가시였다. 김주현이와 김해산을 비롯한 백두선발대성원들에게서 이미전에 그 백두산턱마루밑에 좋은 온천이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으시던 때로부터 간직해두고계신 생각때문이였다. 적과의 거듭되는 혈전아니면 빙천설지에서 풍찬로숙으로 낮과 밤을 이어가다싶이하는 빨찌산생활에서는 전장에서 부상당했거나 차고 습한 맨땅우에서 잠잔탓에 신경통 혹은 류마치스병을 얻어 고통받는 환자들이 어차피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런 환자들에게는 온천치료가 대단한 효험을 보이는것이다. 대탁온천에 세상을 등지고 외로이 사는 늙은이 한분밖에는 아무도 없더라는 이야기를 주의깊이 들으신 장군님께서는 몸소 현지에 가보시고 그곳에도 밀영을 하나 두어 부상자들과 환자들이 온천치료도 하고 료양도 할수 있게 하시자는 속궁냥을 품고계셨던것이다. 선발대원들의 말대로 대탁에는 고독한 여생을 백두산정에서 보내다가 그대로 백두의 한줌흙이 되리라고 마음먹은 백두산정의 유일한 주민이 살고있었다. 백두산꼭대기에 사는 사람은 자기 하나뿐이라는 그 엄연한 현실적근거밑에 자신을 이 나라 조종의 산인 백두산과 백두산천지와 이곳 온천의 유일무이한 주인으로, 소유자로 자처하며 바로 그것으로 하여 단 한개뿐인 가마와 단 두개뿐인 짐승뼈로 된 그릇과 한두사람이 겨우 들어앉을 조꼬만 오돌막과 한개의 부시따위의 가장 원시적인 생존수단밖에 수중에 간직한것이 없는 자기를 천하의 통치자로, 부자로 자부하고있는 로인이였다. 했지만 로인은 장군님과 자리를 같이한 단 하루밤사이에 자기의 권위를 스스로 사양포기하고 그 신성한 지배권과 소유권을 고스란히 스물다섯살의 청년장군님앞에 섬겨바치며 제발 이 나라 조종의 산과 조상유래의 땅이 섬오랑캐놈들의 더러운 발길에 더는 짓밟히지 말도록 해달라고, 이 늙은것도 거치장스럽게 여겨지지 않거들랑 10대강령을 받드는 광복회원으로 받아달라고 줄줄이 흐르는 눈물속에 거듭거듭 애원하고 간청했다. 장군님께서는 이틀동안 온천지에 머무르시며 로인의 오돌막을 확장하여 앞으로 인민혁명군 밀영으로 겸해 쓸수 있도록 고쳐지으시였다. 로인은 자연스럽게 새로 생겨난 대탁밀영의 공식적인 관리원겸 련락소책임자로 승격되였다. 무송의 대영땅을 떠나던 지난 여름 이후로는 몇달만에 처음 온천욕까지 하고 기분들이 거뜬해진 장군님휘하의 소부대는 로인의 길안내를 받으며 대탁을 떠나 곰의골로 향했다. 장군님께서 소부대와 함께 곰의골에 들어서신 날이 바로 음력으로 8월 보름인 한가위날이였다. 년중의 명절가운데서도 한가위는 햇곡식들이 다 여물어 걷어들이게 된 때 맞는 명절이라 예로부터 설에는 굶는 사람이 있어도 한가위날엔 굶는 개조차 없다 했지만 이곳의 밀영꾸림을 위하여 선오산에서 갈라져와있는 밀영건설부대는 한가위날에 오신 장군님께와 늙은이에게조차 한사발의 통강냉이죽밖에 대접해올리지 못했다. 통강냉이죽에 홑여름군복차림, 그런 가위에도 그들은 어느새 벌써 두채의 병실귀틀집을 아담하게 꾸려놓았고 사령부귀틀막도 반나마 쌓아올렸다. 곰의골에서의 그 한가위날밤에 백두산일대에는 이해의 두번째 눈이 내렸다. 소백수골에서 맞이한 첫눈처럼 엄청나게 많이 내린 눈이였다. 장군님께서는 눈이 멎지 않은 그 이튿날도 이곳의 대원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일손도 거들어주시였고 손수 장작도 패주시였으며 밤에는 새노래도 배워주시였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시면서 여기에 위병소까지 꾸려놓은 다음에는 횡산과 홍두산에 들어가 밀영을 꾸리라는 과업을 주시였다. 이 고장의 지세들을 유심히 살펴보시면서 삼개골을 거쳐 19도구 지양개골막치기의 이름도 없는 사오가호의 화전마을까지 내려오셨던 장군님께서는 화전민들의 살림형편을 료해하시던중에 이도강에 둥지를 틀고있는 군경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갈개며 악착하게 구는지 이 주변의 인민들은 하루도 발편잠을 못잔다는 원한에 사무친 하소연을 들으시였다. 혼례상을 받고앉은 신랑신부도 군량미운반에 내몰고 제상도 군화로 걷어차엎고 조객들을 길닦이에 끌어내는놈들이라고. 이도강은 장백 제2의 군사정치적요충지다. 함흥주둔 호리에부대와 혜산수비대의 분견대―수백의 정예군이 무시로 류동순찰하며 돌봐주는 이곳에서 그 뉘가 감히 군경의 요구에 불복할손가. 이도강에 도사리고있는 군경들은 그런 관념에 쩌들어 더 오만무례하게 구는것 같다고… 범을 모르는 하루강아지는 범이 무서운줄도 모른다. 범이 뭔지를 알게 되면 무서워 벌벌 떨며 꼬리를 사릴줄도 알게 된다. 10월 4일밤, 수하의 소부대를 친히 거느리고 출전하여 이도강의 적들에게 범이 뭣인지를 알게 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드센 첫 징벌타격을 가하신 장군님께서는 벌둥지를 쑤시운 벌떼가 끓듯하는 적들속에서 바람같이 자취를 감추시였다. 어느새 쥐도 새도 모르게 압록강을 건너 소백수골로 유유히 돌아오신것이다. 밀영지에서는 단꺼번에 여러가지 기쁜 소식들이 그이를 기다리고있었다. 강세호가 소백수골과 합수목에 밀영들을 다 꾸려놨을뿐아니라 김주현의 공작대와 리동학의 별동대가 임무들을 수행하고 각각 한두시간 앞서 돌아와있은것이다. 새로 꾸린 재봉소에서는 재봉대원들이 월동물자공작대가 이미전에 해결해온 천과 솜으로 겨울군복을 짓고들있었다. 소백수가의 개버들가지들에는 가둑나무껍질로 물들인 누런 광목천필들이 줄줄이 뻗었고 알뜰하게 정리해놓은 샘물터에서는 금방 씻어낸 하얀 입쌀이 무둑무둑 담긴 소랭이들의 포위속에 든 장철구아주머니가 발디딜 틈사리를 찾느라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뱅뱅 돌았다. 송진내가 물씬물씬 나고 후끈후끈한 열기가 풍기는 정결한 경위대원실에는 번쩍거리는 새 총들과 각가지 전리품들이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사령부귀틀집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일매지게 잘다랗고 곱살한 백두산부석자갈이 깨끗하게 깔려있었고 반듯한 납작돌들을 깔아놓은 아담한 마당가에는 미끈한 기대가 세워지고 그 기대우에는 한폭의 붉은기가 엄숙히 드리워진채 장군님을 영접해주고있었다. 출입문에는 한겨울에 쥐여도 차겁지 않을 노루발쪽손잡이가 달리고 더운 기운이 확 풍겨나오는 집안에는 도끼로 통나무를 정성스럽게 깎고 다듬어 만든 책상과 걸상들, 석유초롱으로 만든 난로, 양철로 만든 주전자, 잉크병으로 만든 등잔, 새하얀 새 구름노전, 새 솜외투, 덞은 자리 한점없는 새 조선지도… 지어는 뾰죽하게 깎아서 이제 당장이라도 잡으면 쓸수 있도록 필갑안에 가쯘히 챙겨넣어둔 붉고 푸르고 까만 색연필들에 이르기까지 모든것이 구색맞게 죄다 갖추어져있었다. 그리고 난로우의 주전자에서는 물이 설설 끓으며 부리에서 김을 내뿜고있었다. 전에 없던 이 모든 변화가 어떻게 생겨났겠는지 장군님께서는 일일이 보고받지 않고도 짐작이 가셨다. 《동무들의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였구만. 련대장동무는 이렇게 번듯하게 꾸리느라고 수고했을거구. 군수관동무는 없던 숱한 천이랑, 쌀이랑 구해들이느라 수고했을거구. 경위대장동무는 없던 새 총들과 새 사람들을 얻어내느라 수고했을거구. 정말 다들 고생했겠소.》 자신께서 기울이신 로고는 잊으시고 언제나와같이 아래사람들의 수고만을 헤아려보시고 높이 사주시는 장군님이시였다. 《밀영지에 남았던 강동무네 수고한 이야기는 천천히 듣기로 하고 나가 활동한 월동준비공작대와 별동대이야기부터 들어봅시다. 어디 먼저 주현동무가 좀 얘기해보오. 동무네가 무슨 요술이라도 피운게 아니요? 그 숱한 천필이랑 어디서 그렇게 빨리 해결했소?》 장군님께서는 강세호가 부어올린 더운물을 훌훌 불어 마셔가며 김주현을 정찬 눈길로 건너다보시였다. 《그저 그럭저럭… 번호가 잘 맞아떨어져서…》 김주현은 과분한 치하에 송구해서 뭐라고 대답해올릴지 몰라 몇마디 우물거리다가 웃호주머니에 접어넣어둔 종이 한장을 꺼내 펼쳐서 장군님께 올렸다. 그것은 월동물자공작대가 해결해온 피복용 물자들과 생활필수품, 식량들의 품목과 수량이 적혀있는 명세서였다. 거기에 밝혀져있는 피복과 필수품량은 밀영에 있는 전체 성원들에게 차례지고도 남을만 한것이였다. 그들의 공작성과에 장군님께서는 저윽 놀라시였다. 퍼그나 대견해하시는 장군님앞에서 김주현은 여느때없이 겸손을 보였다. 《뭐, 저희들의 솜씨보다는 백두산지구 인민들의 지성의 덕입니다. 지난번에 선발대로 나왔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 대해보니 더욱 강하게 느껴졌는데 백두산지구 사람들이 우리에 대한 성의가 참 지극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모를 때는 곁을 안주다가도 알기만 하면 당장 아들딸의 잔치를 하자고 장만해뒀던 이부자리감이나 첫날옷감 같은것도 막 꺼내 안겨주면서 그저 하루빨리 우리 땅에서 왜놈들을 쫓고 제 땅에서 가슴펴고 살게 해달라고 그러질 않겠습니까. 이번에 두집이나 그런 집을 보았습니다. 그런 성의는 물리치기가 어려웠습니다.》 《례장감은 사양했소?》 《네, 너무 섭섭해해서 그 집에서 달여주는 감자엿만 받았습니다. 여기 가져왔습니다.》 김주현은 자기 배낭속에 넣어가지고 온 감자엿덩이를 그이앞에 내놓았다. 《례장감은 안받길 잘했소. 나도 이번에 19도구 화전촌에서 이런 감자엿이랑 대접받아보았는데 확실히 백두산지구 인민들이 좋은 사람들이요. 성의만이라도 얼마나 고마운 일이요. 그런 성의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담이 가지 않게 처신하길 잘했소. 그 가난한 사람들이 례장감을 장만하자면 감자말인들 얼마나 팔아야 하겠소.》 《네, 그래서 이번에 가난한 농민들을 착취해먹으며 호의호식하는 지주들에게서 적지 않은 자금과 물자들을 털어냈습니다. 일여덟명 지주들집에 모연공작조를 파해서 모아왔는데 더러 순순히 응하지 않아서 좀 애먹기도 했습니다만…》 시뻘겋게 단 난로가 어찌나 세게 열기를 뿜었던지 김주현은 손수건으로 얼굴과 목덜미에 끈끈하게 내밴 땀을 훔쳤다. 《무슨 불상사를 내거나 물의를 일으킨 일은 없었소?》 과격한데가 없지 않은 김주현의 성미를 잘 알고계시는 장군님께서는 미심쩍은 점이 없는지를 알아보시고 마음을 놓고싶으시였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몇몇 부자가 수월하게 응하지 않기때문에 하루이틀씩 산에 붙잡아다가 설복도 하고 교양도 했더니 우리의 요구대로 응낙하면서 자기 집에 편지들을 써보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집에서 모연물자와 모연자금이 오면 보내줄것을 약속하고 깊은 산에 림시 호송해다두었습니다. 그 물자들까지 받게 되면 앞으로 신입대원들과 2련대동무들이 많이 와서 불어나도 걱정될것이 없습니다. 아직 한 둬명이 완강하게 응하지 않는데 그들도 수그러들게 하겠습니다.》 《너무 우격다짐으로 강박하거나 위협하지 말고 비록 착취자들이라 해도 잘 해설하고 타일러서 그들이 조금이나마 인간적량심과 수난받는 민족적처지에 돌아서서 스스로 응하도록 하오.》 그렇게 타일러주신 장군님께서는 그의 수고를 다시금 치하하시고 전부대적으로 군복제작을 다그치도록 하라고 지시를 주시였다. 《자, 이 엿덩이는 감자엿을 아직 맛보지 못한 밀영에 남아있던 동무들에게나 갖다주오. 강세호동무와 김주현동무는 나가서 군복제작을 다그쳐주오.》 두사람을 내보내신 장군님께서는 이어 리동학의 보고를 받으시였다. 리동학은 자기네의 별동대가 압록강 최상류연안마을로부터 시작하여 장백현을 한바퀴 돌아보고온 정형에 대하여 세세히 말씀드렸다. 적의 큰 무리들과는 될수록 싸움을 피하고 적의 작은 무리들은 주저없이 답새기면서 또한 인민들의 원성높은 악질주구들을 처단하면서 림강현과의 경계지대에까지 내려갔던 그의 별동대는 다시 돌아오면서 또 여러개의 화전민부락들을 거쳤다. 깐깐한 리동학은 자기네가 돌아보고 온 그 마을들의 위치와 지형조건이며 세대수며 주민구성은 물론 이런저런 계층이나 개별적인물들의 사상정치적동향과 살림살이 형편에 대해서까지 필요한것을 죄다 수첩에 적어가지고 왔다. 앞으로 지하혁명조직들이 비교적 쉽게 뿌리박을수 있겠다고 인정되는 좋은 경향을 가진 기본군중들이 많다는 신흥촌과 요방자, 도천리를 비롯하여 여러 마을들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드린끝에 리동학은 자기들을 따라 곰산밀영까지 들어온 손님이 한사람 있다는 말씀을 올렸다. 《동무네를 따라 우리 밀영까지 들어왔다? 대체 그 사람은 어디서 만나서 어떻게 들어왔소?》 《좀전에 제가 좋은 마을의 하나로 꼽은 20도구 신흥촌의 촌장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기전에도 여러 마을에서 촌장이라는 사람들을 만났댔는데 그 사람만은 좀 유별난데가 있었습니다. 우리를 척 만나자 별스럽게 이리 훑어보고 저리 훑어보고 하더니 한다는 소리가 대뜸 당신네들이 혹시 김일성장군님부대사람들이 아닌가고 묻질 않겠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 어느 부대라는 말을 앞질러 하지 않도록 하라고 주의주셨던만큼 저는 뭘보구 그렇게 생각하는가고 되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이 당신들이 비록 낡은 여름군복을 입었지만 차림새가 하나같이 단정하고 끌끌한걸 봐서 그렇게 생각된다, 김일성장군님부대는 대학생부대라는 말을 들은적이 있는데 당신네가 바로 그렇게 보인다는겁니다.…》 언제나와 같은 리동학의 재빠른 말씨였다. 《저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라는 말을 안하고 그 사람에게 쌀을 좀 줄수 없는가고 했더니 념려말라고 하면서 마을 집집에서 적지 않은 피쌀이랑 밀쌀이랑 감분이랑 모아주고 자기 집에서도 좁쌀을 한말이나 내왔습니다. 그리구 마을청년들을 휘동해서 자기네가 직접 지여다주겠다고 자청해나서기까지 했습니다. 그 성의가 고마와서 한 절반길을 짐들을 지고 따라오게 하다가 마을사람들을 돌려보냈는데 그 제순이라는 사람은 자기는 기어이 우리가 가는데까지 끝까지 따라가야겠다고 성화가 아닙니까. 알고보니 사령관동지를 만나뵙자는 속심으로 우리를 지꿎게 따라오겠다고 지드레기를 썼던겁니다.…》 대오밖의 사람은 그 어떤 사람이건 함부로 밀영에 데려와서는 안된다는것을 용의주도하고 경각성높은 리동학이 잊었을리 없다. 그렇다면 노상 따라온듯이 말하는 리동학의 말에는 모순이 있는것이다. 《지꿎게 따라왔다? 동무가 데려오진 않고?》 웃음어린 그이의 물으심을 받은 《보따지》는 자기가 한 보고에서 정확하지 못했던 표현을 시정했다. 《하도 사람이 극성스럽게 따라오기때문에 제가 더 어쩌지 못하고 져버리고말았습니다. 그래서 곰산밀영까지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정에 못이기겠더군요.》 《동무눈에 좋게 보이는 사람이였던게구만?》 《그렇습니다. 저 보기엔 좋은 사람입니다. 아주 흥미있는 사람입니다.》 리동학은 이런 평가부터 앞세우며 입술을 감빨았다. 《흥미있다? 어떤 점에서?》 《사람이 어찌나 싹싹하고 푸접이 좋은지 저와는 물론이지만 우리 별동대의 거의 모든 동무들과 다 친했습니다. 우리와 같이 지내는 사이에 우리 유격대 춤과 노래도 다 배우고 〈조국광복회 10대강령〉도 유격대원들 찜쪄먹게 한자도 틀림없이 다 외워넣었습니다. 소탈하고 사귐성도 좋아서 그가 무엇이든 청하면 누구도 거절해낼 재간이 없을지경입니다.》 리동학은 미처 앞말을 끝내기전에 뒤말을 주어섬겼다. 《허허… 좀 숨을 돌리면서 천천히 말하오. 듣는 사람이 더 숨가쁘구만.》 웃음절반으로 하시는 장군님의 말씀이시였다. 마음이 즐거우실적이면 사랑어린 롱으로 《보따지》의 이야기에 한층 활기를 돋구어주군 하시는 장군님이시였다. 《그래 그 사람이 나이는 좀 든 사람이요?》 《아닙니다. 젊었습니다. 저보다 고작 네살 우입니다.》 《그러니까 스물일곱이란 말이지? 촌장이라니 미혼자는 아니겠구만.》 《네, 스물두살엔가 결혼했다는데 색시가 참해보입디다.》 《그 사람의 지나온 이야기도 들어봤소?》 《네, 마을사람들한테서도 알아보고 본인한테서도 좀 들어봤는데 길주태생으로 여라문살 때부터 부친을 대신해서 사오년간 머슴살이도 해왔구 소작살이도 해본 사람입니다. 길주에 있을 때 적색소년회와 청년운동에 관여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일제경찰에 체포될 위험을 겨우 모면해서 한달 가까이 산으로 피신해다니다가 처가가 있는 갑산지방으로 이주했다는것입니다. 거기에서도 뜻이 맞는 동지들을 찾아내여 비밀독서조랑 뭇고 견실한 청년들을 결속하는 사업에 착수했던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그곳까지 뻗쳐온 경찰의 마수를 피하여 고국땅을 떠나왔다고 합니다. 지금 신흥촌에서는 촌장이라는 허울을 쓰고 야학간판이랑 내걸구는 청년들과 마을사람들을 계몽시키면서 반일애국사상으로 교양하고있습니다. 제가 야학에 가보니 거기에 퉁소도 있고 노루가죽으로 만든 장고도 있고 야학마당에는 철봉대도 세워져있고 씨름판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마을에 이사온 다음부터 그 마을의 생활기풍이 건전해졌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공부는 얼마나 한것 같소?》 장군님께서는 또다시 촌장에게로 화제를 돌리시였다. 《야학에서 글을 배웠다는데 정력적인 독학가인것 같습니다. 다독가이구 취미도 다양했는데 지금 그가 가장 큰 관심을 돌리고있는것은 사회과학서적들 특히 맑스―레닌주의리론서적들입니다. 곰산밀영에 들어와서 〈사회주의대의〉랑 〈레닌주의기본〉이랑 보자 밥먹는것까지 잊어버리구 그 책들을 읽더군요.》 《집걱정을 하거나 집에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소?》 《집에 대해선 일언반구 말한적이 없습니다.》 《집에서나 혹은 마을에서는 그가 동무네를 따라 우리한테 왔다는걸 알고있소?》 《우리가 그를 붙잡아가지고 오는것으로 위장했습니다. 촌장집에서는 몹시 걱정하고있을겁니다. 그래서 더구나 빨리 돌아가라고 했는데…》 《위장한건 잘했소. 그런데 그 사람의 의도는 무엇인것 같소? 혹시 우리한테 영영 떨어지자는게 아니요?》 《자기 속심은 말한적이 없습니다. 리제순동무는 단 한가지 청만 되풀이해 말하고있습니다.》 《뭔데?》 《사령관동지를 꼭 한번 만나뵙게 해달라는것입니다. 장군님을 만나뵙기전에는 안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잠시 침묵속에 잠기시였던 그이께서는 쾌히 응낙하시였다. 《만나줍시다. 래일 내가 곰산밀영에 가서 만나주겠습니다.》 그 약속은 다음날 곰산밀영에서 그대로 실행되였다.
백두용암대지우에 높이 치솟아 백두산줄기의 주봉들을 이루고있는 북포태산과 남포태산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가림천은 좁고 깊은 내곡골짜기를 따라 서쪽으로 급급히 내달려오다가 보천에서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곤장덕의 가파로운 동남쪽비탈을 에돌아나와서 압록강에 합쳐든다. 곤장덕발치밑에 퍽 작은 평지를 이루고있는 이 합수목의 좁은 땅뙈기에 가림이라고 불리우는 크지 않은 화전마을이 자리잡고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대안의 장백현 20도구부락을 지척에서 비스듬히 마주 건너다보는 국경마을이다. 올망졸망한 동기와집들뿐인 이 국경마을에서도 역시 두드러지는것은 우뚝 솟아있는 돌포대다. 복면강도의 눈깔처럼 포대에 숭숭 뚫려져있는 네모진 시꺼먼 구멍들은 대안의 장백땅과 얼어붙은 압록강과 기이한 오후의 정적이 깃들고있는 마을의 곳곳을 음험하게 굽어살피고있다. 《수건과 양말, 화장품들을 사시오. 분도 있고 비녀, 빈침도 있습니다.》 돌포대옆으로 지나가는 행상군의 김빠진 광고소리가 적막한 국경마을에 공허하게 울려퍼진다. 《연필이나 지우개, 공책들을 사시오. 대포연필과 색연필도 있고 크레용도 있습니다.》 행상군은 여러날째 등짐장사를 하며 떠돌아다니느라 면도질을 하지 못해서 구레나룻이 시꺼멓게 자라있지만 얼굴에 주름살이 거의나 잡히지 않은 젊은 사람이였다. 갑산의 큰웅덩에 사는 갑산공작위원회 책임자 박달이다. 《흠, 요즘은 〈공산군〉의 총소리에 놀라서 들뜬 촌색시들의 돈주머니를 털러 다니는 도부쟁이라군 이 근처에 통 얼씬도 못하더니 어디서 저렇게 용감한자가 나타났군. 오이, 기무라, 저놈은 겁도 없는 모양이지?》 《사람이 돈맛을 안 담에야 겁이 다 뭔가. 돈에 미치면 제 애비구 제 네편네구 제 자식이구 다 몰라본다는판인데.》 돌포대우의 망루에서 총을 메고 어정거리는 두 경찰놈이 저희들끼리 지껄여댔다. 《자네두 그러찮아? 조선에 오면 돈벌이가 잘된다는 소릴 듣구 현해탄을 건너오지 않았나말야? 결국은 이 무시무시한 산골에 와서 언제 〈공산군〉의 감장콩알을 받을 신세가 될줄 모르구…》 《하긴 그래, 나두 돈에 홀려 조선에 건너왔다가 여기 와서 이 모양 이 꼴이 됐지…》 박달은 일부러 걸음을 늦추며 놈들끼리 줴치는 소리에 귀를 바싹 도사렸다. 그러나 포대우에서는 잇달아 나눠질수도 있으리라 기대했던 《공산군》의 출몰과 관련한 이야기는커녕 다른 말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수건과 양말, 화장품들을 사시오. 학용품도 있습니다.》 그는 행상군들을 흉내내여 외워둔 말을 또 날리며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여러해전부터 공산주의를 신봉하면서 무산자들이 주인으로 되는 새 조선, 새 세상을 동경해왔던 박달은 지난해 초봄에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갑산지방의 여러 사람들(그 대부분이 박달자신이 야학과 비밀독서조들을 통해 계몽육성해낸 사람들이였다.)을 규합하여 《갑산공작위원회》라고 이름을 붙인 하나의 반일조직을 무었다. 그것은 수난당하고있는 겨레와 가난한 사람들을 기어이 도탄속에서 구원해보자는 자기딴의 포부와 리상으로부터 시작한 자작조직이였다. 포부도 크고 리상도 컸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적으로 구체화해보자니 걸리는 문제거리가 한두가지만이 아니였다. 조선과 같은 식민지나라에서 무산혁명까지 수행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그 어느 맑스―레닌주의고전가도 가르쳐준적이 없는데다 또 그와 그런 문제들을 놓고 일깨워주거나 의논해볼만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다 도대체 지하조직이란것을 어떻게 꾸려야 하는지도 잘 알지 못하는 박달이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조직의 강령도 규약도 작성하지 못했다. 무산자들의 밝은 새 세상을 동경하여 그의 두리에 점점 더 크게 뭉쳐드는 뭇조직원들은 박달에게 투쟁의 앞길을 밝혀주고 투쟁의 방법을 가르쳐줄것을 간절히 요구하였다. 이로 하여 골머리를 앓으며 번민하던 박달은 공작위원회의 핵심간부들과 의논한 끝에 다른 지방에 있을수 있는 조직을 찾아내거나 지난날 지하조직에서 사업해본 경험있는 사람들을 찾아낼 작정으로 길을 떠났다. 그는 우선 길주로 나왔다. 공사판이 벌어진 북선제지공장건설장에서 목도질도 하고 쌍룡, 문암, 석성 같은 여러 농촌마을에서 삯김도 매면서 탐문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얼마전에 이곳에서 있은 적색농조사건관련자검속바람이 웬만한 사람은 몽땅 휩쓸어갔던것이다. 박달은 이번에는 성진쪽으로 내뻗었다. 혹시 피신자들을 찾을수 없을가 하여 설봉산에도 헤바라봤고 상평과 금천산골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마천령에서 단천쪽으로 내려서는 산중턱의 깊은 수림속에서 비바람이나 대강 막을수 있게 나무와 풀로 하늘을 가리워놓은 초막 하나를 발견했다. 세상의 온갖 창조물과 마찬가지로 이 어설픈 초막에도 자기의 력사가 있었다. 이 초막에 거주하고있는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여러해전에 있은 《조선공산당》에 대한 몇번째인가의 검거바람이 불었을 때 서울에서 겨우 몸을 피하여 리원땅에 돌아왔던 한 운동객이 다시 자기 집에 들이닥친 경찰놈들의 손아귀에서 빠져 산에 들어와 숨어지낸 곳이 지금의 초막자리라는것이다. 세월의 비바람을 맞아 이 피신처의 첫 개척자가 세워놓았던 초막은 썩은 뼈다귀만 남고 그 주인공 역시 생사운명을 알수 없는 행방불명자로 되였으나 그가 개척해놓은 뙈기밭과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개축된 초막은 당초의 사명을 여전히 수행하고있었다. 이 작은 초막에서는 단천과 북청 그리고 멀리 함흥에서까지 피신해들어온 어제날의 사상객들과 운동객들이 다섯사람이나 모여살고있었다. 그들을 찾아낸 순간의 박달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가 하는것은 곧 그가 자기의 약간한 길량식을 한끼에 다 털어내놓고 그중 제일 험상스러운 옷을 걸치고있는 함흥선생님에게 하나밖에 없던 여벌 신발(그것도 새 지하족이다.)을 선사한것만으로도 족히 짐작할수 있다. 피신자들은 여기서 참으로 존경이 갈만큼 가난한 원시인 같은 생활을 하고있었다. 뙈기만한 부대기밭에 감자나 심어먹고 맨살이 드러나는 옷을 걸치고 밤이면 불도 덮개도 없는 초막에서 모기에게 뜯기우며 사는 이 로빈손 크루소 같은 사람들의 입에서 공산주의와 프로레타리아혁명승리에 대한 불같은 말들이 쏟아져나왔을 때 그리고 무산혁명의 승리에 대해 말할적마다 그 숯덩어리 같던 눈들이 이글이글 불타오를 때 박달은 얼마나 희열과 행복감속에 잠겨들었던가. 박달의 출현은 공산주의와 조선혁명의 승리에 대한 꺼지지 않은 신념을 가지고있는 피신자들의 활기를 돋궈주었다. 그들은 박달이 제기한 문제에 불같이 달려들어 자기의 견해들을 력설했다. 조선의 무산혁명은 어떤 길을 거쳐 승리에 도달할수 있는가 하고 박달이가 알고싶어한 문제를 놓고 론하는동안 그것은 어느덧 조선무산혁명의 전위대로 될 당을 재건하는 문제에로 번지면서 격렬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자신을 맑스정통자로 자처하는 머리를 어깨까지 내려덮게 기른 함흥의 안선생은 프로레타리아트의 당을 먼저 내오지 않고서는 그 어떤 혁명도 전진시킬수 없다고 열변을 뿜었다. 레닌의 명제를 인용하기 즐기는 북청의 림선생은 당장 당재건이 불가능한 조건에서 적색로조나 적색농조 같은 대중단체를 조직하는것이 조선혁명의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론리적전개도 얼마 없이 우격다짐으로 우겨대던 말다툼은 어느 사이엔지 목에 피대를 돋구며 이놈저놈 하고 소리치는 경지에 도달하더니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목침을 던지고 옷을 쥐여뜯으며 폭행을 가하는 란장판을 빚어내고말았다. 알고보니 이 초막의 동거인들은 그들의 드팀없는 신념에 따라 안씨를 필두로 한 함흥패와 림씨를 필두로 한패 그렇게 두패로 갈라져있었는데 이들은 당을 먼저 건설해야 하는가, 대중단체를 먼저 건설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벌써 두해반동안이나 한치의 양보도 없는 고집을 부리며 《론쟁》하였으나 아직도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있는판이였다. 박달이 보고느낀데 의하면 그 승부는 10년후에도 끝날 가망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박달이 제기한 문제를 가운데 놓고 굶주린 개처럼 서로 물고뜯을내기를 계속한것이였다. 슬픈 현실이였다. 이런것을 보자고 그 먼 갑산에서 동해변까지 나와 숱한 걸음을 걸었던가. 박달은 아무 미련도 없이 그 초막을 떠났다. 그에게는 더 이상 객지에 머무르며 지낼만한 로자도 없었고 또 그럴 마음도 없었다. 발길을 돌린 박달은 갑산으로 되돌아오는 걸음에 길주역전의 한 책방에서 판매금지된 책을 하나 구하려다가 류치장의 콩밥신세를 지는 처지에 빠지고말았다. 지난날 그 무슨 운동을 하느라다가 변절한 책방주인놈의 밀고로 그를 무턱대고 붙잡아들였던 경찰놈들은 한달 가까이 가둬두고 조회도 하고 심문도 했지만 금지된 공산주의서적을 구하려 했다는것외에 별로 걷어쥘만 한 건덕지가 없게 되자 몇마디 으름장을 놓고는 그를 내놔주었다. 그는 거의 두달만에 갑산땅으로 돌아왔다. 갑산서 떠나갈 때는 록음방초 우거진 무더운 한여름이였으나 그가 백암령을 넘어들어올 때에는 때이르게 시작된 겨울이 이내 온 산천에 새하얀 계절옷을 바꿔입힌 뒤였다. 변한것은 산천만이 아니였다. 공기도 변하고 민심에도 변화가 생겼다. 장백땅에 김일성장군님부대가 나타나 맹활약을 하고있다는 소식이 온 갑산땅에 짜하게 퍼져있었다. 그가 마천령산중에서 보람없이 헤바라다니고 길주경찰서류치장에서 덧없는 세월을 보내는 사이에 이런 큰 사변이 일어난것이다. 오래전부터 동경해왔던 김일성장군님께서 부대를 이끄시고 갑산건너편의 장백땅에 와계시다는 소문을 들은 순간부터 그는 피가 끓어번졌다. 박달은 지체없이 자기 조직의 간부들을 발동하여 산하의 모든 조직원들로 하여금 《공산군》과 접촉할수 있는 연줄을 찾아쥐면 지체없이 위원회에 통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편 자기자신이 직접 《공산군》의 행적을 찾아보기 위해 행상짐을 짊어지고 행상의 길에 나섰다. (갑산 건너편 땅에서 활약하는 그분들이 갑산땅에 넘어오지 않을리 없다. 설사 총을 멘 군대를 만나지 못한다 해도 변장한 공작원 같은 사람은 반드시 압록강을 넘나들것이다. 찾고 또 찾아 돌아다니느라면 아무때든 만나고말리라.) 박달은 큰웅덩에서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국경마을 가림부터 찾았다. 《공산군》이 최근에 가장 맹활약을 했다는 19도구, 20도구도 가림에서 그중 가까운편이였다. 가림사람들은 며칠전에 대안의 20도구부락에서 타오르는 불길도 보았고 총소리도 들었으며 또한 《공산군》을 추격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황황히 달려가는 수비대와 경찰대 무리들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무장한 《공산군》이나 변장한 《공산군》공작원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어떻게 하나 연줄을 찾아쥐도록 노력하라, 마을에 나타나는 모든 낯선 사람을 무심히 대하지 말고 주의깊이 살펴보고 우리가 찾으려는 사람이 아닌가를 알아보라. 박달은 가림에 사는 자기의 조직원 덕삼이에게 거듭 일러주고 가산, 화전, 송봉, 산위… 등 압록강변의 여러 마을들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가림천을 따라 보천과 내곡, 대진평까지도 들어가며 탐색했다. 《공산군》에 대한 소문은 산간의 마을마다 집집마다에 퍼져있었다. 하지만 행상군으로 변장하고 돌아다니는 이 《갑산공작위원회》 책임자에게 《공산군》의 발자취를 찾아낼 실마리를 주는 마을은 어디에도 없었다. 구레나룻이 더부룩해지고 새로 삼아신고 떠난 짚신 신총이 몇개 닳아끊어지도록 행상짐을 지고 보람없이 돌아다니던 박달은 집에 가기전에 행여나 며칠사이에라도 그 무슨 소식이 생기지 않았을가 하여 맨처음에 들려봤던 이 국경마을에 다시 걸친것이다. 《수건과 양말들을 사시오. 화장품과 학용품도 있습니다.》 적들의 눈과 귀를 속이기 위한 그 소리에 응하여 문을 열고 물건을 사자고 불러세우는 집은 하나도 없다. 한손에 얼음꼬투리가 달린 드레박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머리에 인 물동이굽도리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떨어버리면서 드레우물가에서 마주 걸어오던 한 처녀가 길을 내여주며 짚신을 신은 맨발로 생눈속에 비켜선다. 누덕누덕 깁고 때가 오른 희여스름한 토목적삼가슴을 타고 앞으로 길게 드리운 소담한 머리태… 그 끝에 댕기가 달려있었으면 그리고 그 발에 버선이나 양말이 신겨져있었으면 좋으련만 처녀는 자기 발을 따뜻이 감싸줄수 있고 자기 머리태를 아름답게 장식해줄수 있는 물건들을 지고 마주가는 박달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우물옆집 퇴마루에 쪼그리고앉아 봉수봉우로 기울어진 겨울해가 비쳐주는 어설픈 해볕을 쪼이며 동기와지붕 처마끝에서 뜯어낸 가느다란 고드름을 깨물어먹고있는 조무래기남매도 심드렁한 눈길로 그를 내다볼뿐이다. 그러나 박달은 또다시 사구려소리를 냈다. 자기 조직원이 자기에게 접근할 구실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여보시오, 도부장사, 수건이나 하나 삽세다.》 나무밑에 앉은 찌글써한 오막살이에서 애젊은 농사군청년이 행길쪽을 내다보며 건방지게 불러댔다. 《미안한대루 예 좀 들어오실수 없소다? 다리쉼두 할겸 말이오다.》 박달은 사립문안에 들어섰다. 덕삼은 얼른 퇴마루에 나와서 그를 맞아주었다. 《선생님, 이거 진짜 도부장사를 대하듯해서 미안하오다.》 순박하고 정직한 청년은 어줍어하였다. 《잘했소. 그래야 하오.》 박달은 그의 도움으로 행상짐을 퇴마루에 벗어놓았다. 《여러날동안 고생하셨소다. 방에 들어가기오다.》 박달은 덕삼의 권고를 마다하고 퇴마루에 걸터앉았다. 《그래 〈리득〉을 좀 봤소다?》 덕삼은 박달의 곁에 쭈그리고 앉으며 은근스레 물었다. 《아무 〈리득〉도 못봤소. 여기 다시 오면 좀 〈리득〉이 있을가 해서 또 들렸는데… 어떻게 됐소?》 《19도구 지양개골에 유격대가 나타났던 기척이 있다오다.》 덕삼은 주위를 살펴보며 귀속말로 말했다. 《어떤 기척이요?》 《얼마전에 군복입구 권총차고 모자에 붉은 오각별을 붙인 사람 둘이 지양개골에서 김정보라는 유지령감을 붙잡아갔다오다. 조선독립투쟁에 쓸 군자금을 내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구 붙잡아간 모양이오다. 그러니 유격대가 지양개골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 머물러있는게 아니겠소다?》 《어디서 나온 소식이요?》 《그 유명짜한 령북천도교쟁이들의 우두머리령감 있지 않소다? 그 령감이 유격대에 붙잡혀갔다는 지양개 유지령감네 집에 갔다가 상가집모양이 된 집을 보고 와서 한 소리라우다.》 《그 도정령감이 여기 왔댔소?》 《그그저께 저녁엔가, 바로 선생님이 저한테 왔다간 그날 저녁에 우리마을에 와서 하루밤 묵고 갔는데 그때 그런 소리를 하면서 말이오다.》 령북일대에 널리 알려져있는 도정 박인진에 대해서는 박달이도 전부터 알고있었다. 가난한 사람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농민들속에서의 박인진도정의 설득력있는 교리선전과 권위있는 영향력때문에 박달은 종종 애먹는 때가 있군 했다.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였다든가 가난한 조선사람들이 자유롭게 잘살자면 쏘련과 같은 로동자, 농민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든가 하고 야학에서랑 배워준 박달의 주의주장들은 박달이로서는 알고도싶지 않는 그 어떤 《한울님》의 전지전능성을 주장하는 박인진도정의 설교에 의하여 뒤집혀지군 했다. 뿐만아니라 박달을 따라올것 같던 사람들이 천도교숭배자로 변해버리는 경우도 가끔 생기군 했다. 워낙 충실한 유물론신봉자로서 일체의 관념론적주의주장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있은 박달은 이런 까닭으로 하여 더구나 박인진도정에게 반감을 품고있는터였다. 《그래 그 령감이 유격대에 대해서 어떤 못된 소리를 했다는거요?》 마치 덕삼이가 박인진도정이기나 하듯 따져묻는 박달의 눈에서는 적의의 불꽃이 튀였다. 《〈공산비적, 공산비적〉 하는 소리가 무슨 소린가 했더니 머사니 김정보같은분을 붙잡아간것만 봐두 비적은 비적이 분명터라 그랬다지 않겠소다. 공산주의라면 기를 쓰고 반대해보자는 심산인지 그런 꾀인 소리만 하더라는거오다.》 박달은 입안이 쓰거워나서 침을 탁 뱉었다. 《그 도정두상의 그따위 험담은 하나도 믿을게 없소.》 단마디로 잘라버린 박달은 큰저고리 안주머니에서 담배쌈지를 꺼내여 큼직하게 한대 말았다. 《그밖에는 뭐 걷어쥔게 없소?》 마치 자기가 박달을 노엽힌것만 같아서 잠시 무참해하는 표정으로 덤덤히 앉아있던 덕삼은 잊고있던것을 문득 상기한듯 불쑥 물었다. 《선생님, 정말 그 화전얘긴 들었소다?》 《그건 또 무슨 얘긴데?》 《못들었소다? 화전쪽에 가보지 않았소다?》 《며칠전에 가긴 했지만 그때 무슨 소릴 들은게 없소. 지금 나는 내곡골안에 들어갔다 나오는 길이요.》 《아 그러문사 못들었지오다. 어제새벽에 일어난 일이라니까 그게 혹시 혁명군분네들이 아닌지 모르겠소다. 어제새벽에 화전쪽에서 정체모를 사람들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월경해서 장백쪽에 넘어서다가 국경수비를 서는 순찰대놈들의 총에 맞아 한사람은 그자리에서 죽고 한사람은 피자국을 남겨놓구 어딘가 종적을 감추었다질 않겠소다?》 박달은 저으기 놀랐다. 《어디서? 어느쪽에서 종적을 감추었다는거요?》, 《건너편 장백쪽이지요. 그런데 그게 무슨 사람들이겠는지 모르겠단 말이오다. 확실한 소린지 알수 없소다만 들리는 소리엔 아편밀수업자같다고들 하던데?… 선생님, 혁명군들두 위장하는수가 더러 있소다?》 그것은 박달에게도 역시 수수께끼였다. 《글쎄 그렇게 위장할수도 있겠지.》 《제 모르는 소견에는 위장하구 다니더라두 아편밀수업자루 변장할것 같진 않소다. 〈공산군〉이야 사자본반대자들이겠는데 하필 공산주의하구 제일 반대되는 사자본을 도적모양으로 뿔궈보자고 하는 아편밀수업자로 가장할턱이 있겠소다?》 박달은 어이없어 웃어버렸다. 《그럼 내가 장사군으로 위장하구 다니는데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오?…》 덕삼은 말문이 막혀 뒤더수기를 썩썩 긁었다. 《하, 그리구보니 그분네들이 밀수업자로 위장하구 다닐수두 있겠소다. 그런걸 나는 또 그건 절대 그분네들일수 없겠다구만 생각했댔소다. 그럼 그게 그 사람들이 아니겠는지?》 (과연 무슨 사람들일가?) 박달은 덕삼이가 들려준 소리를 무심히 흘려버릴수 없었다. 이색적이기만 하면 례외없이 조선인민혁명군사람이 아닐가 하고 기대를 걸어보게 되는 그는 화전쪽에 내려가 탐색을 더해볼 작정을 하고 신총이 몇개 닳아떨어진 짚세기를 헝겊오래기로 단단히 동여맸다. 《이 눈길에 괜히 헛걸음 마시구 집에 들어가 좀 쉬오다. 그게 〈공산군〉사람들이라면 맞총질두 안하구 그저 왜놈들의 총알만 받을리 있었겠소다?》 《맞총질을 못할만 한 사정이 있었을수도 있지 않소? 여하튼 가서 알아봐야겠소. 어떻게 하나 혁명군을 찾아야 그 연줄을 타고 국제당지도선을 잡을수 있소.》 박달의 그 말에 덕삼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국제당의 지도선이요?》 덕삼은 박달의 마지막 말마디를 되뇌이더니 반색하며 넌지시 물었다. 《선생님, 인민혁명군의 줄을 찾아쥐면 우리도 국제당의 지도를 받게 되오다?》 《혁명군이란게 〈공산군〉인데 국제공산당의 지도를 받을거야 뻔하지 않소? 틀림없이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게 국제당이 직접 조직하고 지도하는 조선사람들의 공산군부대일거요.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하나 인민혁명군을 찾아내야 한단 말이요.》 박달의 말을 들은 덕삼은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소다.》 흥분하기를 잘하는 덕삼은 두손바닥을 힘주어 맞비비며 다짐했다. 《어떻게 하든 내 기어이 〈공산군〉을 찾아내서 선생님께 알려드리겠소다. 여기서 연줄을 못쥐면 가만히 장백에 넘어가서라두 찾아보겠소다.》 그와 헤여져 화전으로 내려간 박달은 강변언덕우에 자리잡고있는 어느 한 집에서 어제새벽의 참변을 목격했다는 사람까지 만나보았지만 덕삼이한테서 들은것 이상으로 걷어쥘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사살당한 사람과 부상당하고 겨우 도망친 사람은 전혀 맞불질을 하지 않았다는것이다. 다리맥이 풀린 박달은 강변언덕우에 걸터앉아 멍하니 건너편 장백땅을 넘겨다보았다. 좁은 압록강을 건너서면 장백이다. 강폭은 열메터도 될듯말듯… 그야말로 지척에서 맹활약을 하고있다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어찌하여 이리도 애타게 그들을 찾는 이 박달의 눈에는 단 한사람의 그림자도 비껴들지 않는것인가? (아, 장군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어디에서 장군님을 찾을수 있습니까?) 박달은 마음속으로 애절하게 찾으며 강건너 장백의 눈덮인 험한 산발들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밤이 어지간히 깊어진 모양이다. 행길에서 뻔질나게 들려오던 발자국소리들도 뜸해졌고 개짖는 소리들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정지간에서 나던 어린 딸애의 칭얼거리는 소리도 잠잠해졌고 잠결에 우는 어린것에게 젖을 물리며 달래던 안해의 잠내나는 목소리도 이미전에 잦아들어버렸다. 방에 홀로 누운 박달은 여전히 잠들지 못한채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였다. 여러날만에 제집에 돌아와 안해가 끓여주는 더운물에 몸을 씻고 시래기토장국에 감자가 섞인 조밥을 말아먹고나니 도부장사를 돌아다니는동안 겹치고 쌓인 피로에 식곤증까지 겹쳐들어 쉬이 잠들것 같았으나 정작 잠자리에 들고보니 밤이 깊어갈수록 정신이 점점 더 말똥말똥해졌다. 머리속에 떠오르는 오만가지 생각들이 그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뒤척이고 또 뒤척이는 그의 머리밑에 깔린 베개에 잡히는 주름살보다도 생각은 갈래갈래 많았지만 그것은 어느것이나 다 오직 하나의 존재, 《공산군》 혹은 《조선홍군》,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가지각색 이름을 띠고 박달의 앞에 나타난 미지의 신기루와 같은 존재, 수많은 의혹과 동시에 한없는 동경심을 자아내는 청신하고도 매력적인 존재의 발산물들이였다. 이즈음 그의 모든 정신생활은 그 미지의 존재에 대한 환상적인 동경으로 가득찼다.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그 가장 유혹적인 존재는 어느날, 어느 시각에도 그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어둡던 그의 마음속 하늘에 혜성처럼 나타난 빛나는 별이였다. 그것은 컴컴하게 흐려있던 궂은 하늘 한끝을 푸르게 열어헤치며 홀연 아름답고도 신비한 자태를 내보인 칠색무지개이기도 했다. 그 별, 그 무지개는 박달에게 그리워 못견딜 그리움을 자래워주었다. (내가 과연 하늘의 별을 따보자는것과 같은 허황한 망상을 품은것인가? 내가 무지개를 손에 잡아보자는것이나 다름없는 헛된 열망을 안고 헛된 노력을 해오는것인가? 정녕 만나뵐래야 만나뵐수 없을분들을 기어코 만나뵙자고 헛되게 애써오는것인가?) 박달은 또다시 몸을 뒤척였다. 하던 생각도 뒤번져 생각했다. (아니 그럴수 없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분들은 압록강건너편에서 맹활약을 하고계신다지 않는가? 만일 압록강만 넘어선다면? 덕삼의 말대루 장백에 넘어가 찾는다면?) 또다시 그의 생각은 저절로 이 곬을 타고나갔다. (장백의 마을과 산발들을 샅샅이 훑으며 찾아돌아다니면 어김없이 장군님부대 사람들을 만나리라는건 불보듯 명확하다. 문제는 장백에 넘어가서 어떻게 적들의 눈을 속여가면서 돌아다닐수 있겠느냐 하는데 있다. 이건 어려운 숙제거리다. 다른 사람에게 무턱대고 맡길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다. 어쨌든 내가 직접 가서 찾아내고 만나봐야 한다. 그런데 무슨 명목으로 장백에 갈수 있는 허가를 받으며 또 어떻게 거기 가서 마음대로 돌아다닐수 있는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어 놈들을 납득시키겠는가?… 생각에 열을 올리고있던 박달은 문득 어디선가 나는 달그락 소리를 들었다. 그는 쥐새끼가 쏠라닥거린줄로 여겼다. 그러나 두번째로 다시 들려온 그 소리는 분명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문쪽으로 얼굴을 돌린 박달은 달빛이 비낀 간살이 많은 문창호지의 한옆에 손그림자가 얼른거리는것을 보았다. 《누구요?》 그는 베개에서 머리를 들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날세.》 어딘지 귀에 익은 목소리였지만 누군지 얼른 가늠이 가지 않았다. 《나라니?》 《제순이야.》 《뭐 제순이라구?!》 박달은 지체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제순이로 말하면 몇달동안 사귀다 헤여졌지만 너나들이로 통할만치 친해진 흔치 않은 박달의 동무다. 길주에서 살다가 그 무슨 적색소년회와 청년운동에 관계한것이 빌미로 되여 일제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자 그는 이곳 갑산 널밭더기에 있는 처가에 피신해 와서 한동안 숨어지냈다. 두사람은 그때에 처음 상종했다. 알고보니 리제순은 박달이와 같은 길주 덕산면태생의 동향사람인데다 나이도 동갑이였으며 지나온 경력과 마음속의 모대김도 비슷했다. 인차 마음과 뜻이 통했던 두사람은 매일같이 만나 서로 모르는것을 배우고 더 아는것을 배워주면서 비밀서적도 함께 읽었고 마음속의 울분도 같이 토하며 쌍둥이형제처럼 지냈다. 그러다가 재작년 초봄 리제순이 장백으로 옮겨가면서 서로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그런 제순이가 이밤중에 갑작스레 찾아들줄이야. 박달은 가벼운 불안속에 문고리를 벗기고 문을 열었다. 문곁에 바싹 붙어서있던 제순은 그를 떠밀치듯 하며 얼른 문턱을 넘어섰다. 박달은 문을 닫기전에 마당밖의 행길을 살폈다. 달빛이 희미하게 비낀 행길쪽에는 무엇이 얼씬거리는 낌새하나 안보였다. 《대체 웬일인가? 또 피신인가?》 《가만, 신발이나 좀 벗고.》 문턱앞에 주저앉은 리제순은 어둠속에서 얼어붙은 신발을 벗느라고 갑잘랐다. 《불을 켜달라나? 문을 가리우구…》 《괜히 그러지 말게. 저 웃방은 랭돌인가?》 《거긴 불기운이 미치지 못해서 랭방이나 다름없네.》 《앉아 견딜만 하겠지?》 《왜? 그리루 들어가자나?》 《될수록이면…》 《화로나 들고들어가면 그 방도 견딜만 하네. 그런데 몸이나 좀 녹이구 들어가지.》 《몸을 녹이구 어쩌구 할새가 없네. 들어가세.》 웃방으로 자리를 옮긴 그들은 화로를 가운데 놓고 마주앉았다. 박달은 부저가락으로 재속에 묻힌 불을 헤집어놓았다. 어둠속에서 리제순의 단정하고 준수하게 생긴 얼굴이 벌거우리하게 나타났다. 눈섭에 붙어있던 성에가 화로불기운에 녹아 작은 이슬방울로 맺혔다. 박달을 마주보고있는 리제순의 얼굴에는 생기있고 쾌활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말하게, 무슨 변을 당해서 이 한밤중에 뛰여들었는지.》 박달이가 물었다. 《자네가 집에 제대로 있기나 한지 알아보려구.》 《그건 갑자기 알아서 뭘하려구?》 《박동무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있는데가 있어서지.…》 리제순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내게 대해서? 어디서? 누가?》 박달은 더욱 의아해했다.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해서 들은적 있나?》 《있지.》 박달은 가슴이 후둑후둑 뛰였다, 《김일성장군님에 대해서도?》 《들었네.》 리제순은 잠시 입을 봉했다가 불쑥 왕청같은 소리를 꺼냈다. 《만일에 내가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였다면 자넨 어떻게 생각하겠나?》 《음?…》 박달은 얼떠름했다. 《무슨 소린지 다시 말해보게.》 리제순은 그의 요구대로 꼭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자네 말이 사까로와서 나는 통 갈피를 못잡겠네.》 박달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뭬가 사까로울게 있나? 내가 이 압록강의 동서남북일판에서 김일성장군님을 맨 선참으로 만나뵌 사람이 되였다면 자넨 나를 어떻게 대할 셈인지를 묻는건데…》 《자네가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웠다고?》 리제순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렇네. 나는 지금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뵙고오는 걸음일세.》 그는 은근히 뽐내는 어투로 당당히 선언하듯 말했다. 일순간 박달은 온몸에서 저릿한 마비감을 느꼈다. 감각신경 그자체도 갑작스럽게 놀라게 되면 순간적인 기능정지현상을 일으키는지. 《그… 그게 실말인가?》 한참후에 박달은 굳어졌던 입술과 혀를 가까스로 놀렸다. 《왜? 믿어안지나? 믿게. 실말이네. 나는 장군님의 손도 잡아봤구 장군님하구 겸상을 해서 그분께서 잡수시는 통강냉이죽도 맛봤구 그분과 같은 목침을 베구 그분의 곁자리에 누워 한밤을 같이 지내도 봤었네. 이건 정말이네.》 리제순은 천연스럽게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박달은 웃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키득거렸다. 《어째서 웃나?》 박달은 가까스로 웃음을 눌러버리고 대꾸했다. 《자네의 그럴듯한 말에 속아서 난 하마트면 이자 심장이 다 멎어버릴번 했어. 놀라서 말이야. 나의 이 바보성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네. 자, 이젠 실없는 소릴 그만하구 찾아온 용건이나 말하라구.》 《아니? 자네… 진짜 어처구니없는 사람이군.》 리제순은 짐짓 억울해하는 기색이더니 박달에게 추궁했다. 《그래 자넨 정말 내가 할일 없어 심심해서 거짓말이나 꾸며대는줄로 안단 말인가?》 《됐네, 나를 한순간이라도 바보로 만들어놓고 구경거리로 삼았으면 됐지 뭘 아직도 성차지 않아서 그래?》 억이 막힌듯 리제순은 한참 씩씩거리며 숨소리만 내더니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달래듯 말했다. 《이 사람 박달이, 내 롱으로 한 말이 아닐세. 내 얘길 좀 들어보라구.》 《에끼 그만두게. 거짓말도 믿게 하자면 신빙성이라는 조미료를 가미해야 하네. 김일성장군님이 통강냉이죽을 잡숫구 목침을 베신다고 해서야 누군들 자네의 그 서투른 거짓말을 믿겠나. 책깨나 읽었다는 사람이 장군이란 어느급의 군직에 붙여지는 칭호라는것도 고려하지 못하구 꾸며대다니. 그 주제에 어디서 내가 장군님부대행처를 찾자구 행상흉내를 내며 떠돌아다녔다는 소린 얻어들은게지? 그따위 각본이라두 지어가지구 온걸보니… 가림촌 덕삼이가 내 얘길 하던가?》 한마디의 반박도 항변도 못한채 꿀먹은 벙어리마냥 입만 쩝쩝 다시며 박달의 힐난을 고스란히 앉아 듣기만 하던 리제순은 후유 긴 한숨을 뽑으며 뭐라고 저 혼자 입안의 소리를 했다. 《자네 뭐라고 두덜대나?》 《답답해서 그러네. 이보라구, 박달이!》 리제순은 박달의 무릎을 꽉 거머잡고 쥐여흔들었다. 《자네 언제부터 그런 의심병이 들었나? 남의 말을 들어도 안보구 두마디 안팎에 의심부터 하니 답답한 노릇 아닌가? 응? 거짓말을 꾸며댈꺼리도 따로 있지 인생에 몇번 없을 그런 중대사를 가지구서야 어떻게 함부로 꾸며대겠나.》 박달은 리제순의 이 말에서, 자기 무릎을 거머잡고 흔드는 그의 손길에서 안타까와하는 그의 마음을 감촉하였다. 그의 불신에 의혹의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하다면 리제순이 좀전에 한 말을 믿어야 한다는것인가? 그대로 믿기엔 지나치게 벅찬 사연이고 안믿기엔 리제순의 사람됨이 너무나 진실하다. 반신반의의 애매모호한 계선에 선 박달은 부저가락으로 화로불만 헤집었다 모았다 하며 말없이 제순의 말을 듣고앉아있었다. 《하긴 글쎄 나도 아직까지 꿈만 같이 생각되네. 내가 진짜 장군님을 만나뵌게 사실인가 하구말일세. 당자인 나한테두 꿈같은 일이니 그걸 쉬이 믿지 못해하는 자네한테도 무리는 없지.》 제순은 박달의 무릎을 잡았던 손을 도로 걷어갔다. 《여하튼 자네 믿어두 좋구 안믿어두 좋네. 굳이 자네한테 납득시키려구 공연한 시간을 허비할것두 없네. 사실 여기 눌러앉아서 긴 이야기판을 벌릴 경황도 없네.》 하더니 리제순은 어조를 바꾸어 아주 실무적으로 나왔다. 《내가 박달일 찾아온건 두가지 용건때문이였네. 첫째는 자네가 여기서 그냥 살고있는가 없는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네. 헤여져 지낸 지난 2년간에 혹시 어디로 이사갔거나 감옥에 잡혀갔거나 하지 않았나 해서. 이 용건은 이미 봤으니 둘째 용건을 보세. 내 묻는 말에 딱 찍어서 단마디 명창으로 대답해주게. 자네 유격대에서 찾으면 만나볼 의향이 있나?》 《있다면?…》 《있다면 일러둘 말이 있네.》 《말하라구.》 《명심해듣게. 이제부터 절대 집에서 자리를 뜨지 말구 기다리고 있게. 유격대에서 무슨 기별이 있을 때까지.》 자기에게도 미구에 무언가 아주 중대한 사변이 닥쳐든다는것을 예감하며 고대하던 상급학교입학추천서를 받아들었을 때와 같은 느낌속에 빠져있던 박달은 부시럭거리며 일어서는 제순을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왜 일어나?》 《빨리 돌아가야 하네. 날밝기전에.》 《가다니?!》 《가야 하네. 집에서두 눈이 까매 기다리겠지만 저쪽에서는 내 소식을 더 기다리네. 신발을 좀 찾아주게. 저쪽방에 벗어놨지. 문턱안에 있을걸세.》 《안돼.》 박달은 그의 한복바지가랭이를 잡아쥐고 밑으로 끌어당겼다. 《앉으라구.》 《붙잡지 말게. 난 아직 집에도 못들렸네. 곧장 이리로 온 걸음이네.》 《글쎄 앉으라구! 꼭지를 떼놓은 얘길 헤쳐뵈지두 않구 그냥 덮어가지고 가는법두 있나? 그럴라면 아예 빛갈조차 뵈지 말게지.》 《이왕 일어선 사람을 놔주게. 백번 듣기보다 한번 보는게 낫다는 말도 있지 않나. 지금 내 말을 듣기보다 자네 눈으로 직접 보는게 백배 나을걸세. 그럴 기회가 꼭 있을테니 당장 좀 아쉽더래두 날 놔달라구. 자네의 노염을 받는건 두려울게 없지만 촌장이라는 허울을 쓰고있는 내가 놈들의 의심을 받게 되면 큰 일이 랑패를 보네. 자네도 그걸 리해할수 있잖아?》 《리해고 뭐고 안되네.》 박달은 막무가내였다. 《장군님을 만나뵌 얘길 다 털어내놓기전엔 내앞에서 떠나지 못할줄 알게. 이파리나 잔뿌리 한개도 떨구지 말구 자네 기억속에 심거진걸 고스란히 고대로 내앞에 뽑아내놓으라구.》 갑산운흥일판에서는 그와 대적할만 한 씨름상대가 없어 경찰놈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박달의 그 아귀센 손에서 샌님같은 리제순은 풀려날수 없다는것을 자각했다. 어쩔수 없이 그는 도로 앉고말았다. 그제야 박달은 그의 바지를 잡았던 손을 풀었다. 《자, 얘길하게. 자네가 어떻게 보통유격대원도 아닌 장군님까지 만나뵐수 있었는지 그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말해주게.》 그리고는 재미있는 옛이야기를 기다리며 눈이 초롱초롱해가지고 얌전하게 앉아있는 아이들처럼 리제순을 쳐다보았다. 마침내 리제순은 자기 마을에 별동대가 나타났던데로부터 시작하여 백두산가까이에 있는 어느 한 밀영까지 따라 들어가서 장군님을 만나뵙던 과정이야기를 자상히 들려주었다. 그리고 장군님께서 국내의 현재실정에 대하여 자꾸 물으시기에 국내실정은 자기보다 더 잘 알수 있는 박달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장군님께 필요되시면 그를 만나보시도록 해올리겠다고 말씀드리자 꼭 한번 만나보고싶다시며 유격대가 그와 련계를 취할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시던 사연의 이야기도 구체적으로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으면서 박달은 몇번이나 가슴이 뭉클했고 코허리가 시큰했다. 천하에 유명짜하신 장군님께서 이 미거한 갑산감자바우를 꼭 한번 만나보고싶다시다니?! 나같은것한테 이 어인 꿈꾸지도 못했던 행운이 닥치는것인가? (아, 장군님!) 그는 아직 한번도 뵙지 못한, 그러나 상상의 눈앞에 신기루마냥 신비롭게 떠오르는 한없이 인자하고 거룩하신 영상을 우러르며 마음속으로 아뢰였다. (장군님, 감사합니다! 장군님께서 천리, 만리밖에 계신다 해도 아니 이 세상 한끝에 계신다 해도 제 이제 기꺼이 기꺼이 장군님곁으로 달려가겠나이다.) 박달은 불이 황황 이는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세. 당장 떠나세. 한시각이라도 어서 빨리 떠나세!》 《어디말인가?》 《어디라니? 장군님 계신데밖에 어데가 또 있나?》 《좀 진정하라구. 그렇게 다급하게 굴어서 될 일은 아니네. 내가 자네에 대해서 통지하면 유격대에서 차후기별을 보내기로 약조돼있네. 그러니 속이 달더라도 꾹 참고 기다려야 하네.》 《정말 꼭 기별을 보내줄가?》 《꼭 보내줄걸세. 믿고 기다리게. 장군님께서 친히 하신 약속일세.》 《아! 그렇댔군! 고마우이. 고마우이.》 그다음 박달은 어둠속을 더듬으며 정지간으로 나갔다가 인츰 돌아들어오며 화로불을 헤집어달라고 부탁했다. 밝아진 화로불빛에 그가 들고온 두개의 사발이 나타났다. 《이 경사스러운 날 어떻게 그냥 슴슴하게 지내겠나.》 박달은 제순에게 사발 하나를 넘겨주고 제의했다. 《마시세. 우리 김일성장군님의 안녕을 위해 마시세.》 두사람은 크나큰분을 위하여 큼직한 《잔》을 마주 찧고 단꺼번에 쭉 밑굽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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