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장

 

제 10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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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감》은 돈화의 어느 한 산간마을에서 장군님을 처음 만나뵙고 입대하게 된무렵부터 하루도 번짐이 없이 내내 참군생활기록을 남기군 하였는데 주력부대의 국내진공작전이 벌어지던 이 당시에는 벌써 그런 일기책이 네개째였다.

낡은 여름군복자락에서 찢어낸 천쪼박으로 알뜰히 덧가위를 해붙인 그 네번째 일기책뚜껑에는 《압록일기》라는 표제가 씌여져있었다.

《압록일기》장의 갈피들을 절반쯤 번지면 종이를 무척 아껴 나무잎만 한 종이장에도 글을 깨알같이 박아써넣군 하는 리동백이답지 않게 옹근 한장에 큼직한 다섯개의 글자만을 적어서 특별히 구획지어놓은 페지가 나진다. 그것이 바로 《조국진군기》이다.

이 《조국진군기》의 몇페지들에는 깨알같은 글자로 씌여진 다음과 같은 일기문들이 적혀져있었다.

 

조국진군 제1일

1937년 6월 2일(수요일)개임

 

력사적인 출발

 

오늘아침 6시, 드디여 우리 원정대는 우럭골 가마웅덩마을을 떠나 조국으로의 진군길에 올랐다.

이 장엄한 진군의 개시는 매우 조용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였다. 기상나팔소리도 없이 잠들을 깼고 집합구령나팔소리도 없이 모였으며 또한 기세찬 진군나팔소리도 없이 움직임이 시작되였다.

그 엄숙한 순간에 은회색봄외투차림으로 만단의 준비를 갖추고 숲속에 정렬한 원정대원들앞에 나타나신 장군님께서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명령을 내리시였다.

《출발하시오.》

음성은 낮으셨지만 그 한마디 명령은 매우 심오하고 심각한 의미를 띠고있었다.

출발!

그것은 단순한 출발이 아니였다. 고대하고 고대해온 조국으로의 진군의 개시였다.

《출발! 》

하는 구령소리를 지금껏 하루에도 무수히 들어왔지만 오늘새벽에 출발명령을 받은 그 시각처럼 가슴이 울렁거려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얼마나 그리웠던 조국땅을 향해 떠나는 걸음인가!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조국으로 향해 첫걸음을 뗀 오늘은 유난히도 날씨가 좋았다.

어제저녁무렵부터 내리던 비는 밤사이에 그치고 이 봄따라 희귀할만치 청명한 하늘이 머리우에 펼쳐졌다. 구름 한점 없이 맑게 개인 하늘!

풀숲에 맺힌 간밤의 비방울들은 은구슬알들처럼 빛났다. 조국진군의 길을 떠나시는 장군님의 걸음앞에 그리고 곽두섭이와 우리모두의 걸음앞에 분옥이가 간밤에 슬그머니 은보석들을 뿌려놔준것 같기만 하다고 장철구동무는 길을 떠나며 분옥동무가 누워있는 건너편 산등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어쩐지 나도 그 은구슬들을 무심히 밟을수 없었다.

우리는 발막장부락과 샘물치기마을들을 거쳐 점심무렵에 이곳 23도구 큰절수마을에 와댔다.

부대기밭가운데 띠염띠염 여라문채의 귀틀집들이 널려있는 자그마한 강변산골마을이다. 귀틀집들은 대개 나무껍질로 지붕을 씌웠으나 몇집은 초가이영이였다. 그래서인지 첫눈에 보이는 마을풍경부터가 고국정서를 진하게 풍긴다.

사람들의 말씨도 향토색이 짙은 함경도 사투리, 등성이와 골안의 비탈에 널려있는 부대기밭들에도 함경도 고산지대의 밭들에서 흔히 볼수 있는 조와 수수, 보리와 감자따위의 곡식포기들이 자라나고있다.

온 동네의 아이어른들이 다 떨쳐나와 우리를 맞아들였다.

적정에 무슨 변동이 없는가를 알기 위하여 몇개의 소조가 파견되고 도강보장조원들도 압록강쪽으로 내려갔다.

사령부에서는 오늘밤을 이 마을에서 숙영할 준비를 갖추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와 함께 저녁식사때에 미리 두끼분의 식사를 준비하여 간수해두라는 지시도 함께 내렸다.

 

조국진군 제2일.

1937년 6월 3일(목요일)개임

 

구시등판에서 조국땅을 건너다보며

 

오늘은 날밝기전에 기상명령에 이어 출발명령이 내렸다. 우리는 려명을 알리는 닭울음소리를 들으며 새벽어스름속에 마을뒤산을 타고 수림이 울창한 이 등판에 올랐다.

우리는 산제비들이 깃들기 좋아한다는 등판의 끝언저리 벼랑턱우에 나서서 조국으로 진군하는 로상의 두번째아침을 맞았다.

자욱하게 서렸던 압록강의 물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가운데 바로 지척에 있는 조국의 산등판이 드러났을 때 나는 그것이 조국의 산등판이라는 말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돌팔매질을 잘하는 사람이면 능히 돌을 던져넘길수 있을만큼 너무도 가까운 눈앞에 그리웠던 나의 조국의 모습이 보였기때문이다.

겉보기에는 이 구시등판이나 다름없이 같은 색갈의 토질과 같은 수종의 나무들을 가지고있는것 같은 저 곤장덕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조국을 빼앗겨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토록 강하게 체험해볼수 없는 남다른 정을 자아내는것은 무슨 까닭인지? 나는 그것을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다. 나의 머리에도 흰서리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꿈결에도 그리운 어머니의 모습을 눈앞에 대한것 같은 심정이기만 하다.

조국의 산발너머에서 둥실 떠오르는 아침해를 나는 넋잃은듯이 바라보았다.

무심히 맞을수 없는 해돋이였다.

 

근 1만번째의 해돋이를

맞이한 오중흡.

 

내앞에 서서 해돋이를 맞이하고있던 오중흡중대장동무가 뒤짐지은 손으로 무슨 속셈을 하는지 손가락을 곱았다 폈다 하는것을 보고 내가 뭘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도대체 자기가 생후 몇번이나 해돋이를 맞았는지 계산해봤다는 대답이였다.

《그래 얼마나 되오?》

《대략 계산해서 9천 8백 스물서너번, 사사오입해서 근 1만번째 되는것 같습니다.》

《한데 그건 뭣때문에 새삼스럽게 계산해봤소?》

나의 물음에 그는 천진스러운 웃음을 띠우며 대꾸했다.

《이날 이때껏 근 1만번이나 해돋이를 맞이했는데 나는 오늘아침에야 우리 나라가 해솟는 나라라는걸 알았거던요. 저것 보십쇼. 아침해가 우리 조선땅에서 솟아오르지 않습니까!》

생글 웃음짓는 오중흡중대장의 량볼에 보조개가 패인다.

나는 해가 뜨는 내 나라 강토를 새로운 눈으로 건너다보았다.

아, 조선은 정녕 해솟는 나라였다.

 나는 오중흡동무보다 한배반이나 더 많이 해돋이를 맞이해오며 40고개를 넘겨왔지만 우리 나라가 해솟는 나라였다는것을 곤장덕에서 솟아오르는 아침해를 맞은 오늘처럼 절절히 느끼고 깨달은적이 없었던것 같다.

 

도강준비.

 

아침식사는 어제저녁때 큰절수마을에서 미리 준비하여 군용밥통속에 넣어두었던 조밥을 절반 덜어 굼땠다.

아침식사를 마치자 도강보장조원들은 군복을 토스레적삼으로 갈아입고 구시물동으로 내려갔다.

점심때가 채 못되여 김운신동무가 등판으로 올라와서 사령부에 물동으로는 몹시 미끄러워서 도강할수 없다는것과 엊그제 오전까지도 건널수 있으리라고 봤던 물동아래의 얕은 물목도 그제 내린 비때문에 건느기 어려울것 같다는 보고를 하였다.

그러면서 강기슭에 떼목이 붙어있더라는 말씀을 장군님께 드렸다.

《그 떼목을 돌려 강에 가로질러놓으면 량쪽기슭이 이어질수 없겠소?》

장군님의 물으심이였다,

《떼가 한묶음쯤 모자랄것 같습니다.》

《좋소. 떼를 한묶음 더 무어서 덧달고 떼목다리를 놓도록 합시다.》

장군님께서는 류벌경험이 있는 대원을 있는대로 골라내도록 각 부대들에 지시를 내리시였다. 그런 경험을 가진 대원은 열일곱이나 되였다. 그가운데서 선발된 열두사람을 데리고 김운신은 다시 구시물동쪽으로 내려갔다.

우리모두에게는 긴 장대를 하나씩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렸다.

 

흥미있는 생일준비

 

큰절수부락에 내려가서 저녁식사를 마련한 식사보장조성원들이 돌아왔다. 저녁과 래일의 세끼분 끼니거리로 모두 원정대원들에게 네끼분씩의 조밥덩어리가 차례졌다.

나도 내 몫을 받으려고 우리 사령부성원들의 식사를 가져온 장철구동무한테 갔다가 두개의 군용밥통속에 무둑히 담긴 닭알더미를 보았다.

찬거리로 나눠주는 삶은 닭알인줄 알았더니 생닭알이였다. 그건 나눠줄것이 아니고 그저 장군님께서 마을에서 꼭 구해보라고 특별히 당부하여 구해온 닭알들이라는것이다.

지난해 초봄, 장군님을 처음 만나뵙던 날 저녁일이 생각났다.

장군님을 만나뵌 옥수천부근의 어느 한 작은 산간마을을 떠나 미혼진으로 향해가던 숲에서 숙영한 첫밤이였다. 무슨 일인지 모르고 장군님의 숙영천막에 들어갔던 나는 뜻하지 않은 생일음식머리에 앉게 되였다. 알고보니 전령병 주봉길의 생일날이였다.

남호두에서 백두산기슭으로 나오던 그 어려운 행군로상에서도 장군님께서는 부모곁을 떠나 처음으로 맞이하게 되는 나어린 전령병의 생일날을 잊지 않으시고 몇알의 닭알이나마 구해서 생일을 쇠도록 하시였었다.

당자였던 주봉길은 더 그러하겠지만 나도 그 일을 잊을수 없다. 나는 거기에서 수하의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책임지신 장군님의 위대한 풍모를 처음으로 보았던것이다.

조국진군의 길에 오른 지금 장군님께서 일부러 마련해놓게 하신 저 닭알들은 누구의 생일을 위한것인지?

그것을 알고싶어하는 나에게 장군님께서는 때마침 그이앞에 다시 와서 무슨 상황인가를 보고하고 물러가는 리동학경위중대장을 뜻있는 눈길로 바래주시며 조국진군기간에 생일을 맞을 사람은 저《보따지》중대장일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6월 4일, 바로 래일이면 그가 스물세번째생일을 맞는다고 하시였다.

《장군님, 그러면 〈보따지〉중대장동무의 생일을 쇠여주시려고 그 닭알을 마련하게 하셨습니까?》

《네, 우리 사령부의 경위사업을 맡은 리동학동무의 생일은 어느 누구의 생일쇠기에 비할바없이 뜻깊게 될수 있습니다. 이제 그 닭알이랑 톡톡히 은을 낼겝니다.》

언제나와 같이 장군님의 웃음어린 안광에는 자애로움이 넘쳐흘렀다.

 

조국진군 제3일

1937년 6월 4일 (금요일)개임

 

조국의 등판―곤장덕수림속에서.

 

여기는 조국땅이다.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도 다 정다운 내 나라땅이다.

나는 조국땅, 조국의 숲, 조국의 꽃들이 풍겨주는 신성한 조국의 향기를 맡으며 이 일기를 적고있다.

나의 생전에 다시 이렇게 내 나라땅을 밟아보고 내 나라 품에 안겨볼 때가 있으리라고는 지난해초까지만 해도 나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백두산에 이어 또다시 나의 어머니, 나의 조국의 품에 안겨있다.

우리는 간밤에 압록강을 건너 이 조국땅에 넘어섰다.

 

압록강을 건널 때

 

구시등판에서 떠난것은 엊저녁 아홉시쯤이다. 마침내 이제 곧 조국땅으로 넘어서게 된다는 생각으로 마음들이 급해져 한달음에 강기슭에 내려섰다.

구시물동을 넘쳐흐르는 압록강의 물소리가 폭포수마냥 요란스럽게 울렸다.

떼목다리를 놓고 지키며 기다리고있던 김운신동무네가 떼목다리를 놓아둔데로 안내했다.

장군님께서는 척후대원들과 함께 몸소 맨 앞장에서 떼목다리에 들어서시였다. 나도 그이를 뒤따라 떼목다리에 올라섰다.

어두워서 강기슭과 떼목다리, 강물이 잘 분간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수면에는 별들이 총총히 깔려있어 그것을 보고 어둠속에서지만 압록강이라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압록강!

조국의 강!

장군님께서는 강물에 잠간 한손을 담그시고 휘저어보시였다.

열네살되실 때 반드시 조선독립을 이룩하시고서야만 다시 돌아오리라는 굳은 맹세를 조국땅기슭에 남기신채 압록강을 건느셨던 장군님!

백두산밀영에 나와계시는 때로부터 이 강의 최상류는 수없이 건너다니시였어도 강다운 체모가 잡힌 이 중류로는 열두해만에 다시 건너보신다는 장군님!

력사의 이 순간에 장군님께는 얼마나 많은 감회가 있으셨으랴.

이 강의 흐름과 함께 장군님의 소년시절의 몇해가 흘러갔다. 어리신 장군님께서는 8도구의 소년들과 함께 이 강물에서 미역도 감으시고 물장구도 치시고 물고기잡이도 하셨으리라. 아버님께서 주신 련락임무를 받아안으시고 이 강을 넘어 조국땅의 독립운동자들에게도 다니셨으리라. 이 강의 여울에서는 어머님의 빨래방치소리인들 얼마나 자주 울렸겠는가.

빼앗긴 내 나라를 되찾자면 내 나라를 잘 알고 내 나라의 귀중함을 더 잘 알아야 한다시던 아버님의 말씀은 또 얼마나 자주 들으신 장군님이시였으랴!

이미 흘러가버린 강물처럼 이미 흘러가버린 소년시절도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어린시절에 뇌리에 뿌리박힌 표상이나 마음속에 뿌리박고 자라오른 열망은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거나 스러져버리는 법이 없다.

열두해만에 떼목다리를 타고 다시 넘으시는 장군님을 모신 압록강은 이 뜻깊은 1937년 6월 3일 밤이 수천만년의 자기 력사에서 가장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기념일로 된다는것을 알고나있는지?

별빛을 담아싣고 유유히 흐르는 어둠속에 잠긴 압록강을 향하여 나는 마음속으로 웨쳤다.

압록강아, 네 이날을 영원히 잊지를 말어라!

보천보를 치고 원정대가 철수할 때 다시 건너가야 할 떼목다리를 지키기 위하여 도강보장조성원들은 강기슭에 남았다.

우리는 산개하여 몹시 가파로운 곤장덕의 비탈을 춰올랐다. 돌을 굴려 소리를 내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주의를 받았던만큼 한발한발 품을 들여 움직였다.

어찌나 긴장하여 조심스럽게 올랐던지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몹시 숨차서 몇번이나 숨을 돌리고 다시 톺아올랐다.

오랜 시간을 걸쳐 비탈을 춰올랐다. 평평한 등판언저리에 올라섰을 때에는 동녘하늘이 훤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사람들이 다 올라올 때까지 다리쉼을 하며 기다렸다가 집합하여 대렬을 정돈하고 지금의 휴식장소로 왔었다.

이곳에 도착하시자 곧 장군님께서는 가림주재소가 내려다보이는 남서쪽둔덕 앞코숭이와 산위주재소가 내려다보이는 서북쪽둔덕 앞코숭이에 경기관총들을 가진 두개의 경계근무조성원들을 파하시고 휴식장소부근에는 잠복보초들과 농사군이나 나무군 차림을 한 류동보초들을 배치하시였다.

 

곤장덕에서의 휴식중에.

 

이곳에 오고보니 나에게도 한가지 유감스러운 일이 있다. 원정대원들의 모습을 사진찍어 기념으로 남겨둘수 없는것이다.

홍두산전투가 있기전의 어느 전투에서 곽두섭동무가 로획해다 준 그 휴대용사진기가 성한채로 남아있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때에 얼마나 요긴하게 쓸수 있었겠는가? 지금 같은 뜻깊은 걸음을 하는 때야말로 꼭 있어야 할 사진기를 마사먹고 소탕하강반의 대숲속에 버렸던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알찌근해진다. 하긴 그것은 나의 부주의탓이 아니였다. 뜻밖에 날아온 눈먼 적의 탄알이 우리에게 유일한 그 사진기에 명중될줄 누가 알았던가. 사진기가 마사진덕에 나는 그 전투에서 부상당하거나 혹은 생명까지도 빼앗길번 할수도 있은 위험을 면할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때 가벼운 부상을 당했더라도 사진기가 성한채로 남아있었더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된다.

환희에 찬 저 원정대원들의 모습을 찍어둔다면 먼 후날에도 그것을 보며 오늘을 두고 많은것을 회고하고 많은것을 이야기할수 있을것이다.

자연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천초목은 신록단장한 청신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들였다. 취할만치 싱그러운 풀향기와 꽃향기가 숲속에 차고넘쳤다.

한물 지났으나 상기도 향기를 잃지 않은 연분홍빛 진달래, 류달리 향기 짙고 아름다운 흰꽃을 피운 마가목나무와 구름나무, 붉은 동자꽃과 철쭉꽃 그리고 산딸기꽃… 곤장덕은 지금 한창 꽃계절이다.

이곳에 온것을 기념하여 여러명의 남대원들과 녀대원들이 곤장덕의 식물을 채집하여 수첩갈피들에 끼워넣는다. 이 원정의 길을 함께 오지 못하고 밀영에 남아있는 동무들에게 이 고장의 꽃향기를 맡게 해주겠다고 그 갖가지 꽃들을 모자가 불룩하도록 따서 배낭속에 정히 건사해두는 대원들도 있었다.

곽두섭은 자기 련대 휴식장소에서 얼마쯤 떨어져있는 어느 한 늙은 봇나무밑에 외따로 숨어앉아 뭣인지를 하고있었다. 그의 등뒤로 슬며시 다가간 나는 그가 혼자 있도록 해두지 못한 자신의 처사를 후회했다. 곽두섭은 언제인가 조분옥이가 만들어줬다는 수놓은 담배쌈지에 한줌흙을 떠담고있은것이다.

장군님앞에서 담배를 끊기로 결심한뒤에 곽두섭동무는 장군님의 말씀대로 그 담배쌈지를 기념삼아 건사해두고있었다. 분옥이가 만들어준 그 담배쌈지에 이곳의 흙을 담는 곽두섭의 심정을 나는 짐작하였다. 아마 그는 그 한줌의 흙을 자기와 함께 조국땅에 오지 못하고 압록강의 저편 기슭에 묻힌 조분옥의 무덤우에 갖다얹어줄것을 생각하였으리라. 비밀약속을 맺은 그 마안산의 구새먹은 늙은 봇나무처럼 역시 늙은 봇나무아래의 조국의 흙을…

그 흙을 받으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채 조국땅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던 분옥동무가 눈을 감을수도 있으리라.

나는 곽두섭동무를 봇나무밑에 홀로 남겨둔채 슬그머니 그의 등뒤에서 물러났다.

 

전투준비

 

점심때가 좀 못미처 사령부에서 전투행군준비를 갖추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조용히 휴식하고난 원정대원들은 총과 총알들을 닦고 배낭과 장구류들을 정돈하고 신발들도 고쳐신었다.

나는 보천거리에 내붙일 포고문과 선전문을 복사하는 정치선전준비사업에 참가했다. 나뿐만아니라 권영벽, 김주현, 오중흡, 리창선을 비롯한 여러명의 지휘원들과 명필로 알려진 대원들이 장군님께서 백두산밀영에서 작성해가지고 오신 포고문과 선전문들을 복사하였다.

장군님께서도 친히 몇장의 포고문을 백로지에 쓰시였다.

 

밝혀진 생일준비의 비밀

 

어제저녁에 싸가지고 온 마른 조밥으로 아침요기도 했고 점심요기도 했다. 물통에 넣어가지고 왔던 물이 떨어져 몹시 목이 말랐다. 진흙땅우에 고인 비물을 찾아마시고 돌아오니 웬 젊은 농사군부부가 장철구동무의 배낭에서 닭알들을 넘겨받아 커다란 싸리광주리에 담고있었다. 고사리와 병풍, 수리취따위의 먹음직스러운 산나물이 무둑히 담긴 광주리였다. 두 젊은 부부는 그 산나물광주리속에 닭알들이 깨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알 한알 담았다.

농립모의 채양밑에서 마동희의 검은테안경을 본 나는 저윽 놀랐다. 흰 무명저고리차림에 토목수건으로 머리를 가리운 젊은 아낙네, 그는 재봉대의 김확실동무였다.

나를 보자 그들 젊은 《부부》는 싱긋 웃기만 할뿐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숲속의 오솔길로 사라졌다.

얼마뒤에 나는 그들이 보천보시내로 내려갔다는것을 알았다. 어제 큰절수마을에서 마련해온 닭알은 김확실동무를 닭알장사군 아낙네로 가장시켜 정찰을 내려보내는데 소용된것이였다. 《보따지》중대장동무에게는 이 이상 더 희한한 생일맞이가 아마 없을것이다.

그들을 보천보거리로 떠나보내신 뒤에 장군님께서는 친히 시가지가 한눈에 굽어보이는 숲머리에까지 나가시여 망원경으로 시가지를 살펴보시였다는 이야기를 나는 역시 뒤늦게야 들었다.

장군님께서 전투계획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시였을 그 장소에 따라가지 못한것은 나의 커다란 실책이다. 잠시동안 장군님의 곁에서 떠난 사이에 그런 중대한 걸음이 계실줄을 나는 몰랐다.

 

전투장으로 떠나며

 

방금 전투명령을 하달받는 사령부에서의 지휘간부들의 모임에 이어 각 전투조들에서 오늘밤의 전투를 승리적으로 진행할것을 결의하는 궐기모임들이 끝났다.

몇몇 전투조들에서는 벌써 저녁식사까지 마쳤다. 척후대로 앞장 서서 시가지로 내려가게 된 최성필이네 소대원들은 적《토벌대》군복차림을 하느라고 분주하다.

지금은 상세히 기록해둘만한 여유가 없다. 나도 곧 이 일기장을 접어 배낭에 넣고 떠나야 할것이다.

장군님께서 내리신 각 전투조들의 전투임무만을 간단히 적어놓아야겠다.

리동학 제1습격대… 보천보경찰관주재소와 면사무소, 소방회관의 적을 습격 소멸하고 면사무소와 소방회관에 불을 지를것.

강세호 제2습격대… 산림보호구, 농사시험장, 우편국 등을 습격하고 불을 지를것.

오중흡 제1차단대… 혜산방향의 도로를 차단하고 전투개시와 함께 적의 경비전화선을 절단하며 혜산방면의 적증원부대를 제압, 소멸할것.

리철범 제2차단대… 무산, 대진평방향의 도로를 차단하고 적의 경비전화선을 절단하며 증원부대를 격파할것.

김주현 정치공작대… 시가지 각처에 포고문을 붙이고 선전물과 삐라를 뿌리며 해설선전담화를 진행하는 동시에 군수물자를 로획하고 운반하는 사업을 조직할것.

※ 지휘처… 가림천기슭의 황철나무가 서있는 곳.

공격개시시간… 10시 정각.

공격신호… 지휘처에서 발사하는 한방의 총성.

 

이것은 전투전에 기록하는 나의 마지막일기로 될것이다. 이제 출발하면 전투전에 다시 일기장을 펼칠 기회를 못가질것이다. 곧 우리는 저 골안바닥 깊이 내려다보이는 보천보거리를 향하여 이 등판에서 내려서게 된다.

력사의 밤이여, 어서 오라! 하고 나는 밤을 소리쳐 불러오고싶은 심정이다.

곤장덕수림에 조국의 하루해가 저물어가고있다.

 

2

 

원정대는 외줄로 늘어서서 곤장덕의 가파로운 비탈길을 내렸다.

맨 앞장에는 길도 잘 알고 일본말에도 능한 권영벽이와 낮에 보천거리 정찰을 내려갔던 마동희 그리고 혜산방면의 차단대 성원들인 최성필이네 소대원들을 인솔한 오중흡이가 뒤따랐다.

날은 채 어두워지지 않았지만 하늘이 안보일만치 빽빽이 들어선 이깔나무숲이 기나긴 종대의 행렬을 가리워주었다.

경사가 약간 완만해진 산기슭에 내려서자 내굴내와 함께 구수한 토장국냄새가 풍겼다.

뿌연 저녁연기가 서린 펑퍼짐한 둔덕우의 이깔나무숲속에 일여덟채의 올망졸망한 살림집들이 어설프게 들어앉아있었다. 가림천을 사이에 두고 보천읍거리의 동북쪽 변두리에 약간 떨어져 앉아있는 웃보천마을이다.

길섶에 뉘인 통나무우에 걸터앉아 군감자를 먹으며 저들끼리 히드득거리고있던 더벅머리총각애 둘이 불쑥 나타난 척후대원들을 보고 화닥닥 놀라며 뛰쳐일어나더니 비실비실 피해 달아났다. 척후대의 선두에서 내려오던 권영벽과 마동희와 오중흡은 의아한 눈길로 자기들을 피해 달아나는 그 두 아이를 쫓고있다가 자기들의 변복한 일본군《토벌대》군복과 팔에 낀 완장들을 내려다보고는 쓸쓸한 웃음들을 지었다.

이 웃보천마을에는 낮정찰을 내려왔을 때 마동희가 미리 자리를 봐둔 좋은 샘물이 있었다. 해종일 곤장덕에서 지내며 갈증에 시달렸던 원정대원들은 그 샘물로 목들을 추겼다.

종대는 다시 전진하여 가림천기슭의 물방아간 모퉁이에 놓인 나무다리목으로 내려섰다. 어둠속에서 사품치며 흐르는 가림천의 여울물소리가 기세차게 울렸다. 커다란 수차는 돌아가지 않고 멎어있었다. 거뭇하게 유들거리는 수면우에 좁은 나무다리가 희미한 자태를 드러내며 가로누워있었다.

척후대가 나무다리를 넘어서자 뒤따르던 제2차단대는 종대에서 빠져나와 상류쪽으로 향하였다.

하천흐름을 거슬러 얼마쯤 올라가면 가림천은 두줄기로 갈라지고 가림천기슭을 따라 뻗어오르는 큰길도 역시 물줄기들과 같이 두가달로 갈라진다. 북쪽갈래길은 포태리와 삼지연, 대홍단을 거쳐 무산으로 통하게 되는 국경경비도로이며 남쪽갈래길은 내곡을 거쳐 대진평과 이어지는 자동차길이다.

그러므로 갈림목아래쪽에서 길을 막고 지키게 되면 무산과 대진평, 량방면에서 보천보로 몰려오는 적 증원부대들을 한자리에서 소탕할수 있는것이다.

다름아닌 그것을 목적으로 하여 리철범은 제2차단대원들을 인솔하고 강흐름을 거슬러 려수덕기슭에 붙어 올라가면서 전화선이 지릉지릉 우는 소리를 내는 전주대밑에 두명의 대원을 떨궈놓았다. 경비전화선을 끊어버릴 과업을 맡고있는 절단조성원들이였다.

한편 선두척후대를 뒤따라 큰길에 들어선 기본전투대오는 보천보거리쪽을 향하여 내려갔다.

빈 소달구지 한채가 돌뿌다구에 바퀴를 덜컥거리며 마주 올라오다가 바삐 길을 피해주며 멈춰섰다. 보천읍거리의 어느 려인숙이나 료리점에 화목을 실어다주고 돌아오는 달구지일수도 있다. 한바퀴를 도랑창에 빠뜨리며 위태롭게 멈춰세운 빈 달구지우에서 희여스름한 그림자 하나가 산탁쪽으로 꿈지럭거리며 내려섰다.

그 달구지 주인 역시 말없이 줄지어 자기앞으로 마주오는 원정대를 적《토벌대》의 행렬로 여겼던 모양이다. 무산과 삼지연, 포태리쪽에 나타났다가 안개속에 사라졌다는 최현부대를 찾아내려고 백두밀림속을 보람없이 헤발며 실컷 고생만 하다가 잔뜩 언짢아진 기분으로 귀환하는 《토벌대》라고 생각할수밖에 없었을것이다.

지치고 악에 받친 《토벌대》놈들은 공손히 길을 걸어가거나 달구지에 앉아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피하지 않았다거나 건방지게 달구지우에 앉아있다는 리유로 터무니없이 화를 내며 행패를 가하기 일쑤다. 비위에 거슬리면 군화로 걷어차는 정도가 아니라 대뜸 군도를 뽑아들고 목을 치거나 총창으로 찌르는놈들이였다.

왜놈군복빛갈만 봐도 비실비실 피해달아나는 어린것들의 모습, 왜적들의 군화소리만 들어도 황황히 달구지에서 내려서는 저 늙은이의 모습, 그것은 그대로 기가 죽어사는 겨레의 모습이며 숨이 끊어져가는 조선의 모습이 아니던가?

달구지너머로 원정대의 행렬을 말없이 흘끔 치떠보는 늙은이의 시선에서는 차디찬 적의와 증오가 번뜩인다.

그의 공포엔 가슴쓰렸으나 그의 적의엔 오히려 가슴이 후더워진 원정대원들도 말없이 늙은이를 돌아보며 멸적의 길을 다우쳐갔다.

서너채의 허술한 농가들이 있는 나지막한 왼편 등성이우에서 개들이 짖어댔다.

그 등성이를 굽이돌자 불빛들이 가물거리는 밤거리가 눈아래에 펼쳐졌다.

보천보!

원쑤놈들은 조선을 강점한 이 세기 10년대초에 벌써 여기에 첫 헌병파출소를 내왔고 이어 경찰관주재소를 앉혔다. 그것은 조선의 목언저리에 박힌 비수였다.

그대로 두고서는 조선이 되살아날수 없을 그 비수를 뽑아버리고 원쑤놈들의 비수가 뽑혔다는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홰불을 지펴올리시기 위하여 장군님께서는 이밤 이 백두산아래 두메거리에 원정대를 이끄시고 몸소 내려오시였다.

걸음을 잠시 멈추시고 보천보의 밤거리를 굽어보시던 장군님께서는 리동학중대장이 인솔할 제1습격대를 거리로 들어서게 되는 큰길어구에 떨궈두시고 나머지 전투대오는 이미 하달된 명령대로 가림천기슭을 따라 신속하고 은밀하게 전진을 계속하면서 지정된 장소에서 전투단위별로 떨어지도록 하라고 재삼 이르시였다.

제1습격대에 속하여 면사무소습격에 참가하여 불을 지르게 된 곽두섭이와 제1습격대의 길잡이군으로 지목되여있은 마동희도 큰길어구에 떨어졌다.

큰길을 벗어나 길아래 강녘의 풀밭으로 내려선 권영벽은 가림천흐름을 따라 활등마냥 굽이도는 거리변두리쪽으로 척후대와 나머지 원정대원들을 안내해갔다.

물흐름이 급해진 가림천은 한결 소란한 물소리를 냈다. 그런가운데서도 바람에 우수수 설레이는 황철나무 잎사귀들의 다정한 속삭임소리가 자기 존재를 또렷이 알려주었다. 지휘처의 표식물로 정해진 한그루의 황철나무였다.

장군님을 황철나무밑까지 모셔드린 권영벽은 자신도 장군님곁에 남았다. 이 거리지형과 적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에게는 장군님의 전투지휘를 보좌해드려야 할 임무외에 스스로 자신에게 걸머지운 또 하나의 다른 속깊은 과업이 있었다.

장군님께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조선을 구원해주시기를 바라는 겨레앞에 장군님의 거룩한 영상을 뵈올수 있는 기회, 장군님께서 조국인민들에게 인사보내실 기회를 가장 뜻깊게 마련해올리려는것이였다. 이런 기회를 마련하기 위하여 그는 이미 제일 적절한 장소까지 마음속에 점찍어두고있었다.

장군님을 호위할 사명을 띤 몇몇 경위대원들과 전령병 주봉길, 언제나 장군님곁에서 떨어질줄 모르는 《대통령감》과 장철구도 백양나무밑에 남았다.

척후대로 앞장서왔던 오중흡의 혜산방면 제1차단대와 김주현의 정치공작대, 강세호의 제2습격대는 권영벽이와 마동희를 대신하여 길잡이로 나선 김확실의 안내를 받으며 다시금 강기슭을 따라 전진했다.

거리의 서남쪽 변두리에 이르러 강세호의 제2습격대와 김주현의 정치공작대는 오중흡의 제1차단대와 갈라졌다. 그들은 이 변두리로부터 김확실을 길잡이로 삼아 우편국과 산림보호구, 농사시험장을 비롯한 거리의 요소요소에 스며들어가기로 되여있었다.

마지막으로 오중흡의 제1차단대는 거리의 서남쪽변두리를 벗어나 혜산으로 통하는 큰길목 둔덕우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보천보의 관문이였다. 적의 증원부대들이 밀려들 경우에 가장 치렬한 싸움이 벌어질곳이였다. 그리고 원정대가 보천보거리에서 철수할 때에도 최후까지 지키고있어야 할 지점도 역시 거기였다.

차단대를 책임진 오중흡중대장은 지체없이 적당한 사격좌지를 정해주고 기관총을 버텨놓도록 지시했다. 동시에 최성필소대장을 조장으로 한 두명의 경비전화선절단조를 전주밑으로 보냈다.

기관총이 다리를 벋디디고 자리를 잡았고 차단조원들이 땅바닥에 배를 붙이고 싸울 차비를 시작했다. 최성필은 배낭속에 미리 준비해가지고 왔던 가는 바줄끝에 돌맹이를 단단히 붙잡아 매달고 그것을 던져 전화선에 휘감기게 했다. 천막을 치군할 때 쓰던 바줄이다. 몇개의 전화선을 다 그렇게 걸어휘감고 다른 한끝을 모아쥐였다. 공격개시신호총성이 울림과 함께 바줄을 하나씩 차례로 당기게 되면 보천의 적들은 가림에도 산위에도 혜산에도 증원대를 보내달라는 전화련락을 해낼수 없게 될것이다.

오중흡, 최성필이네와 같이 거리 곳곳에 널린 각 전투단위들에서 저마끔 야음을 타고 자기들이 차지해야 할 전투초소들에 접근해갔다.

전투에 진입할수 있는 만단의 태세를 갖춘 습격대와 차단대들에서는 황철나무밑의 지휘처에 전령대원들을 보내여 그 정형들을 보고했다. 그러한 보고들이 속속 장군님께로 와닿는 가운데 밤이 깊어가고 공격개시시각이 다가왔다.

×

조선의 북변, 압록강의 상류지대에서는 6월초가 한창 봄이다.

1937년 6월 4일, 거대한 사변을 앞둔 보천보의 이 밤도 역시 아직 여름에 채 접어들었다고 느끼기는 어려운 봄밤이였다.

보천보를 감돌아 압록강에 흘러드는 가림천가의 황철나무밑에서는 얼굴을 간지럽히는 하루살이들이 떠돌지 않았고 풀숲에서는 풀벌레소리도 모기소리도 나지 않았다.

차겁고 눅눅한 밤대기는 슴슴한 물비린내와 함께 알싸하면서도 싱그러운 고산지대의 봄향기를 진하게 머금고있었다.

보천골안을 울리며 기세차게 여울져 흐르는 가림천의 물소리가 어두운 공간에 가득히 서린 가운데 이따금 꽃분내를 날리며 바람에 설렁대는 황철나무의 여린 햇잎사귀들의 속삭임소리가 여전히 정답게 들릴뿐 사위는 고요했다.

밤은 퍼그나 어두웠다.

음력 4월 그믐께가 가까와진무렵이여서 맑은 밤하늘엔 달도 없었다.

드넓은 밤하늘에 쫙 깔리며 펼쳐진 뭇별들도 이 보천바닥에서는 서로 이마를 맞붙일듯 바싹 다가서며 하늘을 좁혀버린 곤장덕과 려수덕의 소소리높은 릉선들에 막히여 자기들의 작은 세계밖에 나타내지 못했다.

은하수마저 허리를 뭉텅 잘리웠다. 그나마 그 빈약한 별세계가 어설픈 빛을 던져주어 가까이에 있는 물체들을 아슴푸레한대로 분간할수 있게 해주었다.

집집의 창호지에 어렸던 누런 불빛들도 거의다 사라져버렸다.

좁은 신작로바닥에 흘러내리던 면사무소의 불빛도 꺼진지 오래다. 경찰관주재소 유리창에서 흘러나오는 남포등불빛이 돌담장우에 겹겹이 둘러친 철조망들을 희미하게 내비쳤다. 주재소를 겨누며 돌담장우에 걸쳐놓인 기관총이 유난스레 번들거리며 무시무시한 반사광을 냈다.

밤거리의 소음이 잦아들어버린지도 역시 오래다. 거리의 저쪽끝에서 어딘지 구슬픈 샤미셍소리가 아슴푸레하게 들려오고 때때로 개짖는 소리가 일었다가는 어둠속에 잦아들어버렸다.

점점 높아지는 물소리속에 고대하던 시각은 한초한초 다가왔다. 거리의 요소요소에 몸을 감춘 원정대원들은 긴장한 침묵속에서 공격개시의 신호가 오르기를 초조히 기다렸다.

《장군님, 제 지금 한가지 꼭 알고싶은것이 있습니다.》

봄외투의 소매자락을 들추시고 10분전 열시를 가리키는 야광시계의 문자판을 내려다보시던 장군님께서는 옆에서 조심스럽게 귀속말로 아뢰는 《대통령감》에게 역시 낮은 음성으로 되물으시였다.

 《그게 뭡니까?》

《저는 항상 력사를 연구하면서 력사적인 위인들이 력사적인 위업을 수행하게 되는 위대한 시각을 앞두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가 하는 의문을 자주 품군 하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력사저술가들은 저의 이런 의문에 만족할만한 글줄들을 적어놓지 않았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지금 이 시각에 무슨 생각을 하고계셨는지 저는 그걸 꼭 알고싶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리동백의 진지한 청원의 이야기에 너그럽고 다정한 미소를 지으시였다.

《나는 방금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 생각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이제 공격개시를 알려야 할 권총탄환이 불발탄이 아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뢰관을 맞아도 제대로 발사되지 못하는 오작탄환이 더러 있으니말입니다.》

장군님께서는 다시금 은회색봄외투소매를 들추시고 야광시계의 문자판을 굽어살펴보시였다.

리동백은 잠시동안 그냥 장군님곁에 머물러 선채 남모르는 경건하고 감동어린 눈길로 그이를 우러르며 저혼자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두눈을 슴벅이며 슬며시 장군님곁에서 물러나서 권영벽이와 주봉길, 장철구의 앞을 지나 저앞에 버티여있는 기관총곁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십여명의 대원들을 거느리시고 북만의 남호두에서 백두산기슭으로 나오시던 장군님을 리동백이 처음 만나뵈올 때 단 한문밖에 없던 바로 그 기관총이다. 무적의 강철의 대군으로 자라난 주력부대의 조국원정대와 함께 부대의 좌상기관총은 조국땅우에 두발을 벋디디고 서서 지금 원쑤놈들의 아성을 노리고있었다.

자신을 주력부대의 좌상성원으로 간주하는 리동백은 부대에서 자기같은 늙은이취급을 당하는 그 기관총곁에서 그와 함께 지나온 길을 더듬어보고싶었던지 모른다.

장군님을 처음으로 만나뵙던 지난해 초봄에만 해도 그 기관총이 조국땅에 나와 불을 토하게 될 날이 오게 되리라는것을, 불과 십여명뿐이던 대오가 대부대를 이루어 압록강처럼 도도히 굽이쳐흐르며 조국땅으로 진군해나오게 될 날이 오게 되리라는것을 믿지 못했던 리동백이였다.

야광시계의 바늘은 밤 열시 8분전을 가리켰다.

아직 8분전… 장군님의 바로 옆에 약간 뒤켠으로 비켜서있는 권영벽은 공격개시신호발사가 실수없는것으로 되기를 바라시는 장군님의 다감한 심정을 자기나름으로 받아들였다.

낮에 곤장덕에서 휴식할 때 장군님께서는 여느때에는 좀처럼 말씀하시지 않던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를 잠간 들려주시였다. 아버님께서 두자루의 권총을 남기시고 운명하시던 11년전의 그날에 대하여… 그것이 바로 1926년 6월 5일, 래일이면 만 열한돐이 된다고 하셨다.

그 잊지 못할 날의 바로 전야에 울리게 될 장군님의 첫 총성은 실로 얼마나 의미심장한 의미를 띠고있는것이랴!

권영벽은 이제 울리게 될 그 신호총소리가 원쑤놈들에 의하여 며칠전에 참살당하여 이밤 이 가림천가에 오지 못하게 된 조분옥의 충성스러운 절개를 위해 울려주는 조총소리로도 된다는것을 뜨거운 마음으로 생각하고있었다.

그런속에서 력사의 순간은 한초한초 다가왔다.

장군님의 야광시계의 바늘은 밤 열시 l분전을 가리켰다.

장군님께서는 가림천에서 피여오른 물안개때문에 약간 선뜩하고 촉촉한 이슬기가 느껴지는 권총의 안전장치를 푸시고 마침내 방아쇠에 손가락을 가벼이 대시며 총구를 어두운 허공을 향하여 쳐드시였다. 초저녁잠에 취하여 졸고있는듯 하던 뭇별들이 일시에 모두 잠을 깨기나 한것처럼 또렷또렷하게 빛을 냈다.

장군님께서는 열시 정각을 향해 각일각 다가가고있는 파아란 야광시침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신채 천천히 방아쇠에 손가락을 거시였다.

어쩐지 가림천의 세찬 여울물소리마저 침묵을 지켜버린듯 한 정적이 그이의 전신을 휩쌌다. 그 기이한 정적속에서 야광시계의 잘칵거리는 소리만이 최후의 1분을 재촉하며 어두운 공간에 가득히 서린듯싶었다.

수만번이나 방아쇠를 당기셨던 손가락끝으로부터 짜르르한것이 그이의 가슴속으로 전류처럼 흘러들었다.

그것이 무엇이며 무엇때문인지 장군님자신께서도 딱히 아실수 없으시였다. 너무도 많은 지난날의 일들이 이 순간에 단꺼번에 번개같이 그이의 뇌리를 스쳤기때문이였다.

이 고국땅을 마지막으로 하직하시며 조국을 광복하시기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맹세다지시던 일도, 아버님께서 남겨주신 두자루의 권총을 받아드시며 가슴속에 거듭 그 맹세를 굳히시던 일도, 자욱자욱 피로 얼룩지고 눈물로 얼룩지은 지나온 륙칠년동안 조선이 독립되는 날 고국땅에 데려가달라고 당부하던 이 나라의 끌끌한 아들딸들을 이역의 거치른 산야에 묻군 하시던 그 가슴아프던 나날들도 일시에 단꺼번에 떠오르시였다.

조국땅에서 울리게 되는 이 밤의 총성을 위하여 그 얼마나 간고하고 시련에 찬, 그러나 또 그 얼마나 성스럽고 거룩한 항일대전의 먼먼 싸움길을 헤쳐오셨던것이랴.

장군님께서는 그 싸움길을 헤치며 예까지 오는동안 중도에서 희생당하여 이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하는 부모님들과 동지들을 마음속으로 부르시며 그 뭇사람들의 이룩못한 뜻을 합쳐 조국땅에서 울리는 총소리를 들어달라고 엄숙히 청하시였다.

그리고 어둠속에 잠긴 조국의 하늘과 땅을 향해 새삼스러운 눈길을 보내시며 사랑하는 조국과 잠자는 조국의 인민들을 마음속으로 부르시였다.

이 거룩하고 위대한 땅, 이 정든 땅의 주인들이면서도 이역의 만리길을 에돌아 세상의 눈을 피하여 야음을 타고 예까지 오지 않을수 없었던 조선의 젊은 아들딸들…

(조선아, 우리들이 왔다. 그대의 아들딸들이 왔다!

잠을 깨치라, 살아 일어나라! 조선아, 나의 조선아!)

심장의 절규를 타고 어느결에 높이 쳐들렸던 그이의 권총부리에서 튕겨져나온 하나의 붉은 별찌가 캄캄한 어둠을 헤가르며 공중높이 날아올랐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땅을 일시에 들부시는듯 한 장엄한 뢰성이 울렸다. 이 암담한 세상에 죽지 않은 조선, 살아있는 조선의 존재를 만천하에 고하는 백두산뢰성이였다.

좁은 골짜기에 길게 메아리치며 야단스럽게 울린 그 뢰성과 더불어 와지끈 퉁탕거리며 벽력이 쳤다.

곳곳에서 유리창들이 부서지고 돌담들이 무너지고 들보가 꺾어지고 단말마의 비명들이 터졌다.

노호한 기관총들이 사납게 울부짖고 어지러이 날아가는 불줄기들이 어둠을 발기발기 찢어냈다.

가차없이 들부어지는 총탄들의 뢰성벽력, 돌담 넘어 창문 넘어 비호같이 날아드는 무서운 그림자들의 돌입… 함성과 비명이 불협화음을 울리고 환성과 아우성이 혼탕을 이루었다.

남포등불빛이 환한 경찰관주재소취조실에서 포태리 가와시마현장사무소습격사건의 관계혐의자인 보천내기 처서군을 마루바닥에 꿇어앉혀놓고 그의 등어리에 뭇매를 안기고있던 안경쟁이수사관 가네하라는 창유리를 뚫으며 날아든 첫 기총탄환에 어깨우로 쳐들었던 참나무몽둥이를 미처 내리우지도 못한채 대가리로 책상모서리를 짓찧으며 밑둥잘린 통나무마냥 넘어졌다. 마루바닥에 떨어진 안경이 다리가 부러지고 안경알이 박산났다.

련이어 날아든 탄환이 책상우에 얹혀있던 남포등을 부시며 불을 꺼버렸다. 가네하라의 몽둥이에 어깨박죽을 얻어맞으며 뒤문으로 내뺀 하시지마순사는 가까스로 돌담장우에 기여올라 가시철망을 타고넘다가 가시쇠줄에 바지가 걸려 거꾸로 매달린채 다음날 아침까지 기절해버리고말았다. 바지가 쇠줄가시에 걸린 순간 유격대의 억센 손아귀에 붙잡혔다는 환각을 일으키고 실신한것이다.

다행히도 가시철망을 넘는데 성공할수 있었던 나이또순경은 인분구뎅이에 빠져들었다가 다시 빈 돼지우리안에 뛰여들어 돼지분비물에 쩔어든 질척질척한 북데기속에서 겨우 목숨을 건질 자리를 찾았으나 어디선가 날아온 탄알이 그의 허벅다리를 꿰뚫었다.

산림보호구 모리나까주사의 영전을 축하하는 송별연이 벌어진 일본료정 《영락정》에서 불벼락을 당한 보천거리의 《세력가》들은 혼비백산하여 수라장이 된 료정안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미닫이문을 박차며 뛰여든 습격대원들앞에서 두팔을 버쩍 쳐들고 《고상》(항복한다는 뜻)을 외웠다.

《영락정》에서 요행 빠져나왔던 보천면장은 어느집 감자굴속에 숨어들어간채 다시는 제발로 걸어나오지 못했다. 기절초풍한채 영영 깨여나지 못한것이다.

보천거리에서 영원히 복락할것을 꿈꾸어 《영락정》이라 이름붙였던 이 료정은 영원히 씻지 못할 치욕과 패배를 그들의 가슴속에 남긴 《항복정》으로 되고말았다. 후날 보천사람들은 《영락정》을 《항복정》으로 고쳐불렀다.

상전의 영전턱에 만취되여 저들의 소굴로 먼저 돌아왔던 산림 주사보, 산림간수들과 맞은편에 있는 농사시험장의 재향군인패거리들은 멋모르고 흥떡거리다가 공들여 쌓은 포대구멍으로 총 한방 갈겨볼 경황도 못가진채 영원한 복락을 누릴줄 알았던 이 백두산 가까운 조선의 두메거리에서 무주고혼들이 되고말았다.

보천보경찰관주재소 수석 히라야마는 방금 《영락정》에서 돌아와 주재소 뒤울안에 있는 자기 숙사의 침실에 드러누웠다가 언제나 베개밑에 깔고자는 권총조차 찾아쥐지 못한채 넋없이 뛰쳐나왔다.

그는 자기가 처자를 버려두고 혼자 뛰쳐나왔다는것도 자기가 속옷바람이며 맨발바람이라는것도 알지 못했다. 어디로 어떻게 집에서 빠져나왔고 주재소담장안에서 밖으로 빠져나왔는지도 몰랐다. 엎어지고 넘어지고 뒹굴었다간 다시 일어나 정신없이 내달렸다.

《서라! 이놈!》

벽력같이 질러대는 고함소리와 무섭게 뒤쫓아오는 육중한 달음박질소리가 금시 뒤덜미를 덮치는듯 했다.

《이놈! 서라!》

곽두섭은 속옷바람으로 정신없이 들고뛰는 허연놈을 뒤쫓으며 또다시 고함질렀다.

불없는 캄캄한 면사무소에 대고 불질하다가 거기에는 눈에 보이는 원쑤놈의 몰골이 없었으므로 주재소습격에 옮겨온 곽두섭은 남보다 약간 늦어 주재소의 칸칸을 다 들췄지만 아직 한놈도 요정내지 못했다. 칸칸을 들추다가 도끼등으로 구류장의 자물쇠를 마사버리고 그안에 갇혔던 여러 사람들을 구원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분옥을 잃은 아픔을 덜어낼수 없었다. 원쑤 백놈을 쓸어뜨리고 수백의 인민을 구원한다 해도 그 상실의 원한이 풀릴것 같지 않은 곽두섭이였다.

두눈에 황황히 불을 켜달고 주재소안의 땅굴속에까지 들어갔다가 헛물을 켜고 바깥에 나왔던 곽두섭은 담장바깥의 채마밭을 꿰질러 강변쪽으로 들고뛰고있는 허연 그림자를 발견하자 가시철망이 둘린 주재소의 돌담장을 날쌔게 에돌아 그놈을 뒤쫓아왔다. 이 밤에 겨우 자기에게 차례진 첫놈, 이것은 분옥의 몫이였다.

곽두섭은 뒤쫓으며 총을 갈겼다. 또 한번 불질했다. 그러나 빗맞았는지 그놈은 꺼꾸러지지 않고 그냥 뛰였다. 돌부리에 발을 걷어차고 비칠했다가 다시 절뚝거리면서도 다리긴 곽두섭이 미처 따를수 없이 강변자갈판을 내달렸다.

(악착한놈!)

그놈은 첨벙 물소리를 내며 시꺼먼 가림천물속으로 뛰여들었다. 어디선가 뒤켠에서 비쳐온 희미한 빛이 물속에 엎어지며 밀려내려가는 그놈을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분옥을 위해서도 절대로 놓쳐서는 안될놈이다.

곽두섭은 주저없이 물속에 들어섰다.

《두섭동무 아니요?》

누군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어쩐지 장군님의 음성이신것만 같아 그는 머리를 돌렸다. 어둠속에서 자기에게 비쳐오는 하나의 전지불빛이 눈을 부시게 했다.

《이쪽으로 달려오며 소리치는걸 듣고 두섭동무라고 생각했는데 옳구만.》

재차 들려오는 그 음성은 분명 장군님의 음성이시였다. 총소리가 퍼그나 성글어져서 곽두섭은 똑똑히 가려들었다.

《괜히 입성을 젖히지 말구 그놈은 내버려두고 이제는 불을 지를 때가 된것 같은데 저기 가서 면사무소에랑 소방회관에랑 불이나 지르시오. 한두놈쯤은 살아 도망가서 보천보에서 무슨 변이 났는지 알리게 하는것도 나쁘지 않소.》

장군님께서는 전지불을 돌려 곽두섭이가 가야 할 쪽을 비쳐주시며 걸걸하게 타일러주시였다.

곽두섭은 자기가 면사무소에 불을 지를데 대한 분공을 망각하고있었음을 깨달았지만 선뜻 발길이 돌려지지 않았다. 잔뜩 열이 올라있은 그는 한두놈쯤 도망치게 놔주는것도 나쁘지 않다는 장군님의 말씀의 깊은 속내를 당장은 알아맞힐수 없었다. 구시산에서 적들이 뒤쫓아오기를 기다렸다가 통쾌하게 전멸시킨 다음날의 구시산전투를 겪게 된 때에 가서야 그 까닭을 알아맞힐수 있었다.

하지만 래일 그런 일이 생길줄 알리없는 지금은 한놈의 적이라도 놓치고싶지 않은 곽두섭이였다.

《사령관동지, 저는 아직… 한놈도 잡질 못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해진 곽두섭은 장군님앞에 자기의 분한 심정을 하소했다.

《조국땅에서 원쑤놈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조국을 해방할 때까지는 동무가 잡을 원쑤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테니 상심할것 없소. 지금은 원쑤 한두놈 더 잡는것보다 불을 지르는것이 더 보람있는 싸움을 한것으로 되오. 원쑤들의 머리우에 불을 지르시오.》

가까이 다가오신 장군님께서는 그의 잔등을 가벼이 떠밀어주시며 다정하게 말씀하시였다.

곽두섭은 장군님곁을 떠나 거리쪽으로 달려갔다. 문들을 활짝 열어젖힌 빈 면사무소안에서는 어느새 등사기를 얻어낸 마동희와 몇몇 대원들이 서류장들을 짓부시고 그속에서 끄집어낸 호적등본들과 세금고지서들과 그밖의 각종 문서 잡동사니들을 마루바닥에 쌓아놓고 불을 지를 차비를 해놓고있었다.

아직 온 거리는 어둠속에 잠겨있었다.

삽시간 세차게 들붓다가 갑자기 그친 뢰우마냥 어둠속을 날던 불줄기들이 사라진 거리는 한결 더 짙은 어둠속에 잠겨있는듯 했다.

그러나 구멍이 펑 뚫린 면사무소의 유리창안에서 벙끗 살아난 한줄기 가는 불길이 너울거리며 현관문밖으로 옮겨지더니 현관의 동기와지붕 한끝에서부터 그 불길은 넓게 번지기 시작하였다. 뒤이어 그 옆에 길을 하나 사이두고 앉은 소방회관에도 불이 달렸다. 거의 때를 같이하여 거리 안쪽에 자리잡은 우편국과 거리 아래쪽에 자리잡은 농사시험장쪽에서도 물씬물씬 구름같은 연기뭉치들을 날리면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먼 우뢰소리와 같은 우루루 소리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하던 그 불길들은 바람을 타고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소리를 지르며 거리우에 덮씌웠던 어둠을 활활 불태웠다.

 온 거리, 온 하늘에 차고넘치는 장엄한 불길!

불타는 보천보의 온 거리가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홰불이였다.

이 세상의 모든 어둠을 죄다 불태워버리는것 같은 장엄하고 거세찬 불바다속에서 사람들의 홍수가 났다. 집집에서 남정네들과 아낙네들이, 늙은이들과 어린것들이 문들을 박차고 화광이 이글거리는 거리바닥으로, 어둡던 하늘을 환히 밝히고있는 거대한 홰불밑으로들 달려나왔다.

면사무소 앞거리에서 방금 자기 손으로 질러놓은 불길이 거세차게 번지며 타오르는것을 지켜보며 그 장쾌한 광경을 지금 함께 보지 못하는 조분옥의 생각으로 눈물이 그렁그렁해 서있는 곽두섭의 앞으로 늙은이 한분이 다가들며 반가이 소리친다.

《어허― 이게 뉘기요? 전년 초겨울에 우리 집엘 왔던 중대장 젊은이 아니요?》

눈물에 앞이 가리워있은 곽두섭은 총쥔 자기 손을 부여잡는 풍채좋은 반백늙은이를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날 모르시겠소? 왜 지난해 초겨울에 장군님께서 내리신 령이시라면서 유격대에 보냈던 검정황소를 되돌려가지구 와서 우리 집 외양간에 들여매준 일을 잊으셨소?》

눈을 슴벅이며 늙은이를 새삼스럽게 살펴보던 곽두섭이도 뒤늦게나마 이슬맺힌 눈가에 반가운 웃음을 담았다. 장백현 18도구 약수동의 박로인이였다.

《아, 로인님이시군요. 그새 안녕하셨습니까? 보천거리에서 이렇게 뵙게 될줄 몰랐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제어미없이 사는, 내게 하나밖에 없는 조카가 이 읍내에 있는데 뭐 왜놈들의 비위를 거슬리는 말 한마디를 했다구 저 주재소란데 붙들려가서 뭇매를 얻어맞구 골병이 들질 않았겠소? 그 기별을 받구 조카 보러 압록강을 건너왔다가 세상이 뒤집히는 이 희한한 일을 당해보게 됐구려. 내 나라 땅에 둥지를 틀고앉아 주인처럼 행세하며 조선사람이 기를 못펴게 온갖 악한짓을 다하던 저 악독한 원쑤놈들의 머리우에 불벼락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니 막혔던 숨구멍이 열리는것 같소.》

박로인은 가슴에 손을 얹고 큰숨을 들이쉬며 불타는 놈들의 관공서들을 의기양양하게 둘러본다.

《장관이로다! 잘도 탄다! 불공대천의 원쑤놈들… 말끔히 불타없어지거라! 네놈들이 이 조선땅에 세세만년 틀구앉아 우리 조선백성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배불릴줄 알았더냐! 조선사람들은 다 죽은줄만 알았더냐? 우리 장군님이 백두산에 계시구 장군님께서 거느리신 조선군사가 이렇게 네놈들의 머리우에 벼락을 떨구구 불을 지르는데 그래 네놈들이 물러 안가구 견데배겨? 이제 온 조선사람들이 모두 장군님의 군사가 돼서 네놈들을 조선땅에서 모조리 쫓아내는 날이 있을게다!》

격정에 사무친 늙은이는 저 혼자말로 부르짖으며 두주먹을 들어 흔들었다. 그의 두눈에는 열광적인 기쁨의 눈물이 번쩍인다.

불타는 거리에는 시간이 갈수록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홍수처럼 밀려나온다.

열광으로 끓어번지는 사람들의 물결우에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이 찍힌 삐라장들이 날리고 선전물들이 뿌려진다. 거리의 담벽들과 울바자들에 포고문들이 나붙는다.

감격의 웨침, 격정적인 포옹, 독립만세의 환호… 원정대원들과 인민들이 서로 얼싸안고 비비고 만져보고 울며 웃고 웃으며 울고 하는 가운데 거리의 북쪽변두리, 가림천가의 큰길옆에 쌓여있는 통나무무지우에 은회색코트자락을 가벼이 날리시며 장군님께서 올라서시였다.

김일성장군 만세!》

열광적인 만세의 환호성이 온 거리에 진감하였다.

《만세!》

《만세!》

사람들은 두손을 높이 들어 휘저으며 꿈결에도 그리웠던 전설적영웅 김일성장군님을 뵈옵고저 사태지어 밀려들었다.

삽시간에 불타는 거리는 사람의 바다를 이루었다.

그 열광의 바다우에 높이 떠받들려 올라서신 장군님께서는 환호성을 올리며 손을 흔들며 울며 웃으며 그이를 맞이한 조국의 인사, 온 겨레의 인사를 올리는 인민들앞에 군모를 벗어드시였다. 환호로 들끓는 인민의 물결을 굽어보시는 그이의 안광에도 감격에 찬 눈물이 어리시였다.

얼마나 그리웠던 조국인민이였던가!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 인민이였던가!

장군님께는 이들보다 더 소중하고 이들보다 위대하고 이들보다 더 믿음이 가는 존재가 없으시였다. 아버님도 어머님도 동생들도 다 잃으신 장군님께는 이들이 바로 가족이였으며 이들이 바로 삶의 원천이였으며 이들이 바로 힘이였다. 이들이 있었기에 그리고 바로 이들을 위하여서만 전인미답의 헤아릴길 없이 간고하고 시련에 찬 장장 수천수만리 투쟁의 길을 헤쳐 여기까지 오신 장군님이시였다.

《동포형제들!》

그이께서는 마침내 격정에 넘친 목소리로 그들을 부르시였다.

《우리들은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일제와 싸우는 조선인민혁명군입니다.

우리는 일제침략자들을 때려눕힌 승리의 결전장에서 그립던 조국동포들과 이처럼 뜻깊은 상봉을 하게 된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는 조선인민혁명군을 대표하여 우리 혁명군을 물심량면으로 적극 지지성원하여준 여러분과 국내 애국적인사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장군님께서는 잠시 말씀을 끊으시며 인민들에게 가벼이 머리숙여 인사를 보내시였다.

일시에 조용히 가라앉아 장군님의 연설에 귀기울이던 군중은 다시금 열광의 환호성을 올리며 들끓었다. 사람들은 손바닥이 터지도록 박수를 올리며 만세를 불렀다. 하늘은 있어도 해가 없던 세상에서 먹물같은 가슴을 안고살아왔던 사람들이 빛없던 이 강산에 홰불들고 찾아오신 장군님을 우러르며 감격의 눈물들을 휘뿌렸다.

질식당해가던 가슴가슴들에 소생의 젖줄기가 되여 구절구절 흘러드는 장군님의 말씀!

인민의 심장은 소생의 활기를 받아 세차게 뛰였다.

《…여러분! 저 불길을 보십시오. 거세차게 타번지는 저 불길은 놈들의 최후를 보여주고있습니다. 저 불길은 우리 민족이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날강도 일제놈들과 싸우면 승리할수 있다는것을 온 세상에 보여주고있습니다. 저 불길은 학대와 주림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희망의 서광으로 빛날것이며 투쟁의 불씨로 되여 온 삼천리강토에 퍼지게 될것입니다…》

힘있고 류창한 어조로 연설을 이어가시던 장군님께서는 군모를 틀어잡으신 손을 들어 활화산마냥 타오르는 거리의 불길을 가리키시였다. 불기운에 확확 달아오른 후더운 바람이 은회색봄외투자락을 기폭마냥 허공에 날렸다.

《아저씨도 혁명군이오다?》

적후공작을 계속해야 할 자신의 처지때문에 장군님께서 연설하실 자리를 마련해놓고서도 장군님을 옹위하여 리동학이처럼 그이의 곁에 가있지 못하고 멀리 군중의 뒤켠에 서서 그이의 연설에 귀기울이고있던 권영벽의 턱밑에서 문득 어린 총각아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눈을 돌려 턱밑을 굽어보니 볼따구니와 입언저리에 검댕이가 묻은 더벅머리 조무래기 둘이 눈이 올롱해서 그를 쳐다보고있었다.

《그래, 나도 혁명군이다.》

권영벽은 역시 조용한 귀속말로 대답을 주었다.

《그런데 왜 아저씨는 왜놈군복을 입었나?》

《음, 이것말이지? 그놈들 모르게 슬그머니 들어와서 그놈들을 족치자구 입었단다.》

저들끼리 마주보며 방싯 웃는 두 아이의 새까만 흑진주같은 두쌍의 눈에 별들이 빛난다.

《아저씨네가 아까 우리 마을 뒤덕으루 내려왔지? 우린 다 알아》

문득 한 아이가 자랑스럽게 종알거렸다. 잔뜩 뻐기는 의기양양한 얼굴이다. 웃보천마을을 지나올 때 감자를 나눠먹다가 비실비실 피해 달아났던 바로 그 조무래기들이였다. 아까 어슬녘에 만났을 때에는 마치 아들 봉룡이를 뜻밖에 보는듯 하여 말없이 머리만이라도 만져주고싶었어도 피해달아나서 만져줄수 없던 애들… 지금은 저리도 환히 밝아진 얼굴로 마치 제아버지의 품에 기여들듯 권영벽의 턱밑에 기여들었다.

권영벽은 두 어린 총각아이를 량팔에 끼여 자기의 품에 꽉 그러안았다. 언제인가는 자기의 아들을 이렇게 그러안고 해방된 조국땅에서 장군님의 앞에 서게 될 그날을 생각하자 그는 어쩐지 코허리가 시큰하게 저려들었다.

《동포형제들!

최후승리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의것입니다.

우리모두 광복된 조국땅에서 다시 만나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부르고 행복하게 살아갈 그날을 위하여 총매진합시다.

조선독립 만세!

조선혁명 만세!》

격앙된 장군님의 목소리를 따라 화광이 충천한 거리에 운집한 사람들은 폭풍같은 만세의 환호성을 올린다. 그 뭇사람들과 함께 권영벽이도, 그의 품에 안겨있던 아이들도 두손을 높이 들며 만세를 웨쳤다.

연설을 마치시고 벗어드셨던 군모를 쓰시려던 장군님께서는 더더욱 높이 환호성을 올리는 군중에게 군모를 거듭거듭 흔들어 답례의 인사를 보내시며 천천히 통나무무지에서 내려서시였다.

통나무무지 바로 밑에 바투 다가서있던 사람들이 황황히 길을 내여 비켜서며 장군님의 발길앞에 머리들을 수그리고 땅바닥에 꿇어엎디였다. 늙은이들도 젊은이들도 장군님앞에 큰절들을 올리는것이다.

《로인님, 젊은 사람앞에 이러지를 말아주십시오.》

장군님께서는 맨 첫머리에서 큰절을 드리며 땅바닥에 엎드려있는 늙은이의 팔을 잡아일으키며 사정하듯 말씀하시였다.

《장군님의 대해같은 은혜를 거듭 받아오면서도 제 여적 기회를 얻지 못해 감사의 인사 한번 올리지 못했습니다. 장군님, 미천한 이 늙은이의 인사를 받아주십시오.》

늙은이는 머리도 들지 않은채 그냥 땅바닥에 꿇어엎드리였다.

《우리에게 소를 희사했다가 되돌려받은 일이 있는 약수동의 박로인입니다.》

늙은이의 바로 뒤에 서있던 곽두섭이 장군님께 아뢰여올렸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소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로인님께 우리가 먼저 인사를 차려야겠는데 어서 일어나십시오.》

장군님께서 거듭 로인을 일으키시려 하시였으나 박로인은 황감하여 다시금 머리를 수그렸다.

《장군님, 제가 되돌려받은 소때문에만 큰절을 올리는게 아니올시다. 죽어살던 우리 조선 만백성에게 숨길을 열어주신 장군님의 고마움에 조선사람치고 그 뉜들 감사의 인사를 올리지 않을 백성이 있겠사옵니까. 장군님, 천만번 고맙습니다.》

박로인은 두손으로 부여잡은 장군님의 손등과 손목에 눈물젖은 반백의 수염투성이 얼굴을 묻었다.

《저도 여러분들과 꼭같이 나라를 빼앗긴 조선사람이며 수난을 당하는 인민의 아들입니다. 나라를 빼앗긴 우리들이 제 나라를 되찾자고 싸우는거야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젊은 우리들에게 감사의 인사까지 주시면 되려 송구스럽습니다. 저희들에 대한 크나큰 기대로 알고 앞으로 더 잘 싸우겠습니다.》

겸허하신 장군님의 진정어린 말씀에 다시금 깊이 감격한 군중은 또다시 격정의 파도를 일으키며 설레였다.

사람들은 박수를 울리고 만세를 부르며 뒤설레면서도 장군님께 지체없이 걸어나가실 길을 틔여드렸다.

이따금 그이의 은회색코트자락을 만져보고싶어 슬며시 옆으로 다가들군 하는 조무래기들의 머리도 쓸어주시고 코도 닦아주시며 몇걸음 발길을 옮겨놓으시던 장군님께서는 사람들이 틔여준 신작로길한복판에 엎어진채 잔등판을 흐득흐득 떨며 서럽게 흐느껴울고있는 한사람이 눈에 띄우자 다급히 그 사람에게로 다가가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입성에 흙먼지가 묻으실것을 개의치 않으시고 그 사람곁에 꿇어앉으시여 그를 일으켜 안으시였다.

《어째서 길바닥에 엎드려있습니까?》

그이께서는 손수건으로 그 사람의 얼굴과 더부룩한 검은 수염에 묻어있는, 눈물범벅이 된 흙을 닦아주시며 근심스럽게 물으시였다. 피기라군 전혀 없어보이는 창백한 중년의 사나이였다.

《고마운 혁명군어른, 나를 제발 불쌍히 여겨주시오.》

그 사람은 대뜸 갈퀴같은 손으로 그이의 손수건을 쥔 손을 거머잡으며 애원하였다.

《나는 두다리를 못쓰는 사람이외다. 처서판에서 일하다가 굴러내리는 통나무에 찢겨 병신된 사람이외다.》

우묵하게 꺼져들어간 눈확속에서 질벅하게 젖어있는 두눈은 동정을 호소했다.

《다리를 못쓰는분이 왜 이렇게 길바닥에 나왔습니까? 집이랑 식구들이랑 없습니까?》

《집은 있는데 식구들이 모두 나를 잊어버리구 저들만 장군님을 뵙겠다구 뛰여나가버렸소. 그래 나절루 기여나왔는데 사람들이 모두 저들만 장군님께 정신이 팔려 장군님을 뵙지 못하는 내 생각을 못하구 꽉 막아섰소. 여보시오. 나를 안아올려 장군님을 먼빛으로라두 한번만 뵙게 해주시오. 나도 우리 장군님을 한번 보게 해주오. 장군님께서 어디 계신지 장군님가까운데루 업어다주시오.》

목소리도 수염도 손가락들도 후들후들 떨린다.

《장군을 봐선 뭘하겠습니까?》

그이의 물으심이였다.

《장군님을 뵈여선 뭘하다니?!》

갑자기 그는 격하게 소리쳤다.

《온 보천사람이 다 밝은 해를 봤는데 어찌 나만 그 밝은 해를 보지 못해야 하겠소? 장군님을 한번만 뵙고나면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날것 같소. 제발 부탁이니 나에게 장군님을 뵈여주오. 내가 살아나게 해주오. 나를 살려주오.》

그의 말마디들은 울음속에 젖어들었다.

《장군님께서는 바로 당신을 안고계십니다.》

곁에 서있던 권영벽이 조심스럽고도 침착하게 한마디 귀띔해주었다.

《예?!》

다리 못쓰는 사람은 온 육신을 흠칫 떨었다. 몹시 놀란 그는 쓰지 못하는 다리까지 떨었다. 갑자기 동자가 커진 두눈에 의혹이 번개쳤다.

인민이 장군님을 곧 자기들의 삶으로, 어두운 강산을 밝히는 태양으로 여기며 우러러 받들고있는 그 심정을 새삼스럽게 절감하시는 이 순간 장군님께서는 이 인민을 위하여 조국해방의 성스러운 위업을 더 한층 다그쳐 완성하실 결심을 다시한번 굳게 다지시였다.

하늘높이 치솟으며 점점 더 세차게 타오르는 불길은 어둡던 보천보의 밤하늘과 산천을 더욱더 붉게 물들여갔다.

 

3

 

서울에서는 6월초면 이미 초여름이다.

거리에는 벌써 에스키모와 부채와 잠자리날개같은 달린옷들이 나타났다. 계절에 민감한 장사치들은 차일덮인 매대들을 펼치고 수영복이나 양산 따위의 여름 인기상품들을 펼쳐놓았고 구실이 없어 알몸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아하는 로출증에 걸린 계집들은 류월이 접어들기 바쁘게 무어라 이름할수 없이 괴상망측한 옷들을 걸쳤다.

장사치들이나 로출증에 걸린 유한계집년들한테 못지 않게 계절에 민감한 미나미총독각하도 요즘은 마사무네보다 비루를 더 즐기고 온몸을 답답하게 가리는 일본륙군대장의 으리으리한 금술제복보다는 절반 알몸으로 지낼수 있는 하르르한 유까다를 더 좋아하였다. 병태생리학적견지에서 보면 로출증보다 비만증이 더위에 대해 훨씬 더 민감하니만큼 목이 없어졌다 할 정도로 비만한 미나미대장이 벌써부터 피서책을 택했다는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소위일것이다.

1937년 6월 5일, 류월에 접어들어 첫번째로 맞이한 이 토요일 저녁에도 미나미총독은 서울 한복판에 광화문을 굽어보며 우뚝 솟아있는 조선총독부의 바로 뒤에 자리잡은 호화로운 총독관저에서 유까다바람으로 시원한 등의자에 기대앉아 이따금 거품이는 그 역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땀을 들이고있었다.

토요일이라 여느날보다 일찌감치 관저로 들어온 총독은 방금 목욕을 하고 나온 참이였다. 그는 헤벌어진 유까다자락사이로 드러난 유들유들하게 살찌고 기름진 배를 슬슬 만지면서 닷새전부터 운행이 개시된 일본―조선―만주간의 초특급려객기 《에이티》가 오늘 날라왔다는 류월호신간잡지와 신문들을 뒤적거리다가 반년나마 세계적인 물의를 일으켜오던 전 영국황제 에드워드 8세의 충격적인 사랑의 결과에 대한 소식이 눈에 띄우자 소일거리로 그것을 읽고있었다.

대영제국의 황제였던 에드워드 8세는 나이든 총각이였는데 평범한 아메리카녀성이라는 심프손부인과의 정분이 두터워진 나머지 지난해에 그와 결혼할것을 결심하였었다. 이것은 대영제국의 황실과 원로원을 아연실색케 했을뿐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문제는 심프손부인이 다른 나라 황실의 공주라거나 명문귀족가문태생의 순결한 처녀인것이 아니라 평민출신의 녀성일뿐더러 이미 두차례나 결혼한적 있는 부인이라는데 있었다. 대영제국의 황제가 그런 천한 녀성과 배필을 뭇는것을 대영제국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한 원로원에서는 황제 에드워드 8세에게 심프손부인과의 결혼을 포기해줄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에드워드 8세는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앉는 한이 있어도 심프손 부인과의 결혼을 변경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대영제국의 원로원은 에드워드 8세의 황제퇴위를 결정지었다. 에드워드 8세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황제의 옥좌를 자기의 아우에게 넘겨주고 심프손부인과 결혼할수 있는 평범한 사람으로 되는 편을 택하였다.

그로 하여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켰던 윈저공이 자기가 황제로 있었던 영국본토를 떠나 프랑스의 칸데성에 와서 그곳에서 며칠전에 마침내 심프손부인 윌리스 워필드와의 간소한 결혼식을 했노라는 소식이였다.

《흥!》

미나미총독의 코구멍에서 내불린 맥주기운이 풍기는 코바람이 전영국황제의 결혼소식이 실려있는 잡지장을 가볍게 전률시켰다.

《계집한테 넋을 잃고나면 황제도 바보로 된단 말이여.》

혼자소리로 중얼거린 미나미는 마시다 만 맥주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자네같은 바보가 어딨나? 철없어두 분수가 있지.》

미나미가 내려놓은 빈 맥주고뿌는 신통히도 심프손부인의 사진과 나란히 실린 전 영국황제 에드워드 8세 (윈저공)의 사진우에 놓였다. 굽으로 흘러내린 거품방울이 윈저공의 얼굴을 적셨다.

(허허, 윈저공이 이걸 보면 내가 전 영국황제도 몰라보고 얼굴에 침을 뱉은줄 알고 노염을 내겠군.)

미나미는 너그러운 웃음속에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굳이 맥주 잔을 치워놓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대로 병을 기울여 새로 맥주를 채워놓고 담배를 붙여물 었다.

약간 맥주취기가 오른데다 참대문발을 쳐놓은 창문밖에서 풍겨드는 라이락향기와 또한 그보다도 더 향기로운 담배향기까지 겁쳐맡고 더더욱 기분이 좋아진 미나미는 약간 알딸딸해진 눈으로 맥주거품에 젖어 후줄근해진 윈저공의 황제복장을 일편 부럽게, 일편 측은하게 내려다보았다.

자기라면 세상의 미인을 다 걷어모아준대도 황제의 자리를 내놓지 않을 미나미였다. 대영제국의 황제, 그것이 어떤 자리인가? 세계의 만방 어디에나 식민지가 없는데가 없어 대영제국에는 해가 지는 법이 없다고 하는판이다. 그런 대영제국의 절반만큼이라도 되고싶어 렬강국들이 가슴앓이를 하고 서로 으르렁거린다. 히틀러는 대영제국이 세계에서 저들만 식민지들을 독차지하다싶이 하고있는데 대해 로골적인 불만을 토로하면서 식민지들을 빼앗아내기 위한 새 세계대전의 불집을 터치려 하고있다. 대일본제국도 그래서 조선과 만주를 삼켰고 지금은 온 중국땅을 먹어치울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있는것이다.

대영제국의 황제자리를 스스로 내놓다니?! 현세계의 모든 권력가운데서 최고의 권력을 일개의 평범한, 아니 미천한 녀인과 바꿔 버린 윈저공이야말로 미나미한테는 바보중의 바보였다. 그는 자기가 윈저공처럼 황제 또는 천황으로 될수 있는 행운을 지닌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여나지 못한것을 늘 한스럽게 여겨왔다. 그는 자기가 어느 모로나 쇼와천황보다 월등하게 낫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러면서도 대일본제국천황으로 되지 못하고 식민지조선의 최고권력자의 지위밖에 차지하지 못하고있는것은 자기가 세상에 태여나기전부터, 아니 아득한 조상때부터 그 이상의것을 바랄수 없게 운명지어져있었기때문인것이다. 하긴 천황될 신분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의 처지에서는 조선총독의 자리이상 바랄것이 없을것이다. 조선황제를 밀어내고 만들어진 자리가 아닌가? 하고보면 식민지조선의 천황이 된셈이다. 본토에서 천황의 시중이나 드는 총리대신자리에 앉기보다 일본의 제일의 식민지에서 천황행세를 하는것이 비할수 없이 낫다는것을 여기에 앉아보지 못한 사람은 모르고있을것이다. 이야말로 소꼬리보다 닭의 대가리가 되는것이 훨씬 낫다는 격이다. 그러기에 미나미는 총리대신직을 조금도 부러워하거나 탐내지 않았다. 제국에서는 중일전쟁을 담당할 마땅한 내각을 만들기 위하여 올해에 들어와서만도 벌써 두차례나 내각총리를 갈아치우고 내각을 해산시켰다. 지난 1월에는 히로다총리를 떼버리고 하야시를 앉히더니 며칠전인 5월 31일에는 하야시내각을 총사직시켰다. 6월 1일 쇼와천황은 고노에에게 새로운 내각을 꾸리라는 대령을 봉하하였다.

미나미는 천황이 유력하고 유망한 총리후보로 지목되고있는 자기에게 새 내각을 책임지우지 않는것을 조금도 유감스럽게 생각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총독자리를 고스란히 타고앉도록 가만둬둔데 대하여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미나미는 조선총독자리를 영원히 차지하는것 이외에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자리이름을 총독이라 부를뿐 실제적으로는 조선에서는 천황인셈이 아닌가.

(이봐, 윈저공, 아무튼 자네는 바볼세. 틀림없는 멍텅구리란 말일세. 절세의 미인들이 대영제국의 황제권력밑에 수천수만이나 되고 그들모두라도 자기것으로 맘껏 차지할수 있는 그 자리를 스스로 내놓다니? 내 자네한테만 말하네만 나로서는 이 조선총독의 자리를 내 죽기전엔 절대로 스스로 내놀 생각이 꼬물만치도 없네…)

유들유들하게 살찐 자기 배를 만족스럽게 슬슬 쓸어만지며 맥주거품에 후줄근하게 젖은, 전 영국황제에게 현명한 년장자다운 훈시를 하고있던 미나미는 귀따갑게 울리는 전화종소리를 들었다.

특별한 중대용건 아니고서는 총독관저의 정숙을 전화종소리로 깨뜨리지 못하기로 질서가 서있었다. 미나미는 중일전쟁을 목전에 둔 중대시국이니만큼 본토에서 지체없이 알려올 중대한 소식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전화기앞에 놓여있는 등의자에 옮겨앉았다.

《무슨 일이냐?》

미나미는 송수화기를 들며 맥주취기에 약간 굳어진 혀로 살틀히 물었다. 교환수는 금시 겨드랑이밑에 기여드는것 같은 목소리로 총독부 미쯔바시경무국장이 총독님에게 급히 알려올릴 사연이 있어 전화를 부탁했노라고 대답했다. 이어 미쯔바시의 석쉼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총독각하, 포고가… 선전포고가 들어왔습니다.》

무척 흥분한 목소리였다. 드디여 중국대륙점령을 위한 전쟁이 개시되였다는 희소식이 들어온것이라고 해석한 미나미는 희색이 만면해서 소리쳤다.

《대륙소식인가? 관동군에서 시작했다는가?》

《아닙니다. 총독각하! 그런것이 아닙니다. 압록강쪽에서 들어온 포고입니다.》

경무국장은 당황해서 두서없이 대꾸했다.

《미쯔바시, 자넨 대체 무슨 말을 하고있나? 나는 자네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수 없네. 침착히 말해보게.》

《총독각하, 김일성장군이 자기의 원정대를 이끌고 어제밤 압록강을 건너 보천보거리에 나타났습니다.》

《뭣이?》

오래전부터 우려해왔던 그 일이 끝내 일어난 모양이였다. 언제든 김일성장군이 조선안에 들어오게 될것을 우려하여 각방으로 온갖 노력을 다해온 미나미였고 미쯔바시였다.

《그래서?!》

미나미는 마침내 등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며 다우쳐물었다.

김일성군은 경찰관주재소를 비롯한 여러개의 우리 관공서들을 습격하고 보천보거리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보천보를 불바다로?》

《네, 각하, 김일성사령관은 조선총독부와의 선전포고를 전세계앞에 선언했습니다. 그는 2천3백만 조선인들에게 항일대전궐기를 호소하면서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의 명의로 그 선전포고를 살포했습니다.》

미나미는 갑자기 가슴이 결려 숨쉬기가 어려웠다. 과로하거나 불시에 흥분할 때면 가끔 병적으로 나타나군 하는 신경통발작이 도진것이다. 날카로운 칼끝으로 가슴을 쿡쿡 찔러대는것 같은 아픔때문에 일순간에 혈색좋던 주기오른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그는 한손으로 가슴을 누른채 책상모서리에 온몸을 눌러붙였다.

갑자기 그의 대답이 들리지 않는데 이상스러움을 느꼈는지 미쯔바시는 연거퍼 수화기안에서 불러댔다.

《각하, 각하… 총독각하… 대장각하… 여보시오… 아, 여보시오…》

《여보시오가 뭐냐?… 듣는다… 보고를 계속해라.》

미나미는 가쁜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토막토막 끊기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실례했습니다. 각하, 방금 김일성사령관의 포고전문이 혜산진에서 전신으로 발송되여 총독부경무국에 날아들어왔습니다. 사태의 엄중성으로 보아 더는 각하에게 보고를 미룰수 없어…》

들으나마나 그래서 전화를 걸었노라는 이야기였다. 미나미는 그의 뒤말을 뭉텅 잘라버렸다.

《그 포고를 즉시 여기 내게로 가져오라.》

수화기를 던져버린 미나미는 초인종을 눌러 관저안에 있는 의사를 불러오게 했다. 곧 바삐 달려들어온 의사가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채고 나갔다가 아무때나 분별없이 도지군 하는 이 발작증상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항시적으로 달궈두고있던 돌멩이 하나를 가제천에 싸들고 다시 들어왔다. 미나미는 그냥 가슴을 움켜쥔대로 의사의 부축을 받아 겨우 침대에까지 옮겨가 그우에 드러누웠다. 의사는 미나미가 발작을 일으킨 가슴을 헤치고 가제천에 싼 뜨끈뜨끈한 돌을 얹었다. 그리고는 그의 싸늘해진 팔과 다리들을 부지런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미쯔바시경무국장이 보안과 이소사끼사무관을 대동하고 나타난것은 미나미총독이 약간 숨을 돌릴만큼 발작증을 가라앉히기 시작한 때였다. 총독이 신경통발작을 일으킨줄 모르고 들어섰던 미쯔바시와 이소사끼는 그 신경통발작증으로 하여 미나미총독으로부터 완전히 파멸적인 징벌을 받게 되리라는것을 직감했던지 아주 사색이 되여버렸다. 베개우에서 머리를 돌려 문쪽을 돌아보는 미나미의 눈길은 마주볼수 없을만치 살기를 띠고있었다. 피발이 진 그 험악한 눈길은 미쯔바시와 이소사끼에게 총독자신이 가끔 자랑삼아 말하군 하던 도살향락적인 기질, 즉 어릴 때 자주 개를 산채로 세워놓고 그 모가지를 단칼에 베군 했다는 기질을 이제 당장이라도 나타내일것처럼 보였다.

미나미는 괴로움을 못이겨 얼굴을 찡그리고있으면서도 말없이 한손을 내밀어 포고를 내놓을것을 요구했다.

미쯔바시는 한시각이라도 지체할세라 이소사끼사무관이 후들거리는 손으로 가방속에서 꺼내준 종이장을 받아들고 미나미의 침상곁으로 다가갔다.

《각하, 이소사끼사무관이 금방 받아적은대로 미처 정서하지 못한것입니다.》

미쯔바시가 조심스럽게 아뢰는 말을 들은 미나미는 의사더러 다시 부를 때까지 방에서 나가라고 분부했다. 그는 미쯔바시더러 자기의 다리를 주무르게 하고 이소사끼사무관으로 하여금 포고를 읽게 했다.

이소사끼는 이 포고의 랑독이 곧 자기에 대한 사형선고장을 스스로 읽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리라는 지레짐작때문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채 떠듬거리며 포고를 읽어주었다.

 

포 고

 

간악무쌍한 강도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을 강점하고 20여년동안 총독정치라는 식민지통치로써 조선동포들을 유린학살하고있다. 그러므로 우리 조선동포들은 놈들에게 피와 땀으로 된 재산을 모조리 략탈당하고 비참한 식민지노예의 생활을 하게 되였다. 뿐만아니라 놈들은 우리 민족을 제2차대전의《선봉대》로 하여 중국을 침략하는 전쟁의 도구로 내몰고있다.

 우리 조선민족은 생사존망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우리들은 자기 민족의 출로를 개척하고 자기 살길을 타개하며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국을 광복하기 위하여 싸우는 조선인민혁명군이다. 우리들이 6~7년간 만주광야에서 필사적투쟁으로 일본제국주의략탈자들에게 치명적타격을 준것은 세인이 다 인정하는바이다.

본군은 조선에 있는 애국지사와 열혈적인 본군용사들의 강력한 단결에 기초하여 조선민족의 피를 빨아 배를 불리는 흡혈귀 조선총독부와 직접 싸울 목적으로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함남북일대에 원정하게 되였다.

가련한 조선동포형제들! 속히 출동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단결하여 각종 투쟁으로써 본군의 유격전쟁에 호응하라!

하루속히 일제통치를 분쇄하고 진정한 조선인민의 정부를 수립하는데 매진하자!

1937년 6월 1일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 김 일 성  

 

랑독을 마친 이소사끼의 창백해진 온 얼굴에는 식은 땀방울들이 송글송글 내돋쳐있었다.

《…》

다시금 쑤셔대는 심한 발작때문에 한동안 입술을 앙다물고 침대우에서 용을 쓰고있던 미나미는 그 발작이 약간 가라앉은 기회에 총독부에 선전을 포고한 부분을 다시한번 읽으라고 분부했다.

《〈본군은… 조선민족의 피를 빨아 배를 불리는 흡혈귀 조선총독부와 직접 싸울 목적으로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함남북일대에 원정하게 되였다.〉 포고대로 우리 총독부와 싸울 목적으로 그들은 보천보경찰관주재소만 아니라 우리 총독부 직속기관인 농사시험장과 산림보호구, 면사무소, 우편소같은 관공서들도 습격하고 불을 질렀다고…》

이소사끼가 미처 말을 맺기도전에 미나미는 불시에 숨막힐듯 한 중압감을 견딜수 없어 자기 가슴우에서 커다란 바위돌처럼 느껴진 찜질돌을 발작적으로 활 던지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제천에 싸인 찜질돌은 요행 미나미의 발치에서 그의 다리를 주물러 주고있던 미쯔바시경무국장의 머리우를 날아넘어 원탁우에 가 떨어지면서 그우에 세워져있던 맥주병들과 맥주잔을 들부셨다.

원탁에서 날린 유리파편쪼각들이 방안에 널리고 걸죽한 흑맥주가 주단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미쯔바시는 미나미총독에게 달려들어 그의 몸을 부축하였다.

《각하, 의사를 부르랍니까?》

부를 필요없이 의사자신이 맥주병들과 맥주고뿌의 폭발소리에 놀라 달려들어왔다.

미나미는 미쯔바시와 의사가 눕혀주는대로 다시 베개에 머리를 얹으며 자기가 결코 《조선민족의 피를 빨아 배를 불리는 흡혈귀 조선총독부와 직접 싸울》것을 선언한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의 포고때문에 찜질돌을 던진것이 아니였다는것을 명백히 밝혔다.

《찜질돌이 너무 무겁다. 좀 가벼운 다른것을 가져와.》

그 분부대로 의사가 새 돌맹이를 가져다 얹어주고난뒤 미나미는 다시금 그를 나가라고 턱질했다.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해온 조선사령관 김일성은 지금 어디있는가?》

의사가 나가면서 문을 닫아버리자 미나미는 될수록 노기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전에 혜산에서 보내온 통보에 의하면 오늘새벽 장백현 23도구의 한 산중에서 혜산경찰서 오가와부서장이 인솔한 경관 토벌대가 김일성군원정대와 조우 교전하여 전패당한뒤에는 어느 토벌부대도 감히 추격할 결심을 못하고 퇴각하여 그 행처는 오리무중에 있습니다.》

미쯔바시의 대답이였다.

《시라소니같은것들! 거기에는 대체 어떤 위인들이 있는건가? 함남경찰 두목들과 19사단의 떨거지들은 뭣들 한다는거야? 현지에 전화는 통하는가?》

김일성군이 전화선을 절단하여 아직까지도 현지통화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혜산까지만 통합니다.》

《혜산에 어느놈이 있냐? 형편을 알만 한 놈을 전화로 찾아라.》

전화는 단 1분도 못되여 나왔다. 미쯔바시와 이소사끼는 전화선이 침대까지 올수 없었으므로 미나미를 침대에 눕힌대로 전화기가 놓인 탁상가까이로 밀었다.

《너는 누구냐?》

총독각하가 친히 건 전화를 받는 영광을 지닌 상대는 아주 황송하고 당황해난 목소리로 함경남도 경찰부장 기라라는것을 아뢰였다.

《너는 거기서 뭘하구있어?》

미나미의 얼굴을 보지 못한 탓인지 2천리밖에서 전화를 받고있는 기라는 그 물음의 참뜻을 알아먹지 못하고 지금 고등과장 기라무라, 19사단 참모장 마쯔다, 74련대혜산수비대 대대장과 헌병대장 그리고 혜산경찰서장 시오다니 등과 함깨 토벌책을 신중협의중에 있었다고 대답했다.

《빌어먹을놈, 너희들은 사건현장에 무서워 가보지도 못하고 거기 않아 말공부질만 하는거냐?》

《총독각하, 방금전에 사건현장에 갔다돌아온 걸음입니다. 참말입니다.》

《헌장에 가봤다? 그래 현장은 어떻더냐? 네가 현장에서 보고 느낀바를 내앞에 사실대로 정확히 말해줄수 있는가?》

《각하께서 요구하신다면…》

《말하라, 깎지도 보태지도 맡고 솔직히 말해보라. 나를 위안하겠다고 속이지 말고 또 솔직한 말이 화를 얻을가봐 겁내지도 말고 말해보라. 나는 현지를 본 너의 정직한 말을 듣고싶다.》

잠시 망설이는듯 수화기에서는 먼 전류소리만 지릉지릉 나더니 잠시후 흐느끼는듯 한 가는 목소리가 가까스로 들려왔다.

《총독각하, 보천보는 하루밤새에 재더미로 변했습니다. 우리가 여러해동안 국경경비를 철통으로 다지려고 구축한 중대한 제2선 요충지가 하늘로 날아나버렸습니다. 그것을 본 저는 천날에 걸쳐 베여낸 건초를 한순간에 재더미로 만든것과도 같은 감정입니다. 장래의 경비대책상 중대한 교훈을 받았지만 너무도 과대한 희생을 내여 총독각하앞에 저는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저는 면목이 없습니다. 각하, 오늘은… 6월 5일! 오늘은 일생 잊지 못할 슬픈 기념일로 되였습니다. 제가 일생에 처음으로 총독각하를 전화로 만나뵈올 이런 영광의 기회에 이런 슬픈 보고를 올리게 된것을 저는 일생 잊지 못하겠습니다…》

《…》

미나미에게도 오늘 6월 5일은 일생 잊지 못할 슬픈 기념일로 되였다는 느낌이 스며들었다. 웬일인지 그는 그 이상 기라경찰부장의 슬픔에 잠긴 목소리를 듣고싶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송수화기를 전화기우에 던져버린 미나미는 한동안 멍청히 앉아있다가 아직까지 물러가지 않고 자기옆에 남아있는 미쯔바시와 이소사끼를 이상스러운듯이 돌아다보았다.

《돌아들가게, 돌아가도 좋네.》

그는 피곤한듯이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미나미가 아무런 욕설도 추궁도 또 아무런 대책지령도 없이 돌아가도 좋다고 하는데 놀란 미쯔바시와 이소사끼는 잠시 어리둥절해서 어찌할줄 몰랐다. 앞으로 어떠한 징벌을 내려줄지 알아가지고 나가는 편이 오히려 마음 편할 그들이였다. 수라장이 된 방에 미나미총독을 그대로 혼자 둬두고 가는것이 옳은지 혹은 그의 분부대로 소리없이 물러가는것이 현명한지 판단할수 없었던 미쯔바시와 이소사끼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어느 누구도 상대방의 눈에서 도움될 눈짓을 받지 못했다. 이런 딱한 처지에서 그들을 구원해준것은 역시 미나미였다.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바삐 눈을 뜬 미나미는 아직까지 미쯔바시와 이소사끼가 그냥 자기옆에 남아있는것을 보자 미쯔바시더러 관동군사령부에 이 중대사건을 알렸는가고 물었다. 아직 알리지 못했다는 그의 대답을 듣자 미나미는 전화로 관동군사령관을 찾으라고 분부하였다.

미쯔바시는 지체없이 분부대로 교환대에 관동군 우에다사령관을 찾을것을 지시했다.

혜산을 호출했을 때보다는 1분 늦었지만 머나먼 《만주국》의 수도 신경도 역시 꽤 빨리 전화가 통했다.

《우에다대장각하의 저택이 나왔습니다.》

미쯔바시는 얼른 송수화기를 미나미에게 넘겨주었다.

미나미는 그것을 받자 살집좋은 볼타구니에 붙이며 자기를 부축해 일으켜달라고 말하였다. 미쯔바시경무국장과 이소사끼사무관은 그 말이 떨어질세라 량쪽에서 그의 육중한 잔등을 받들어 일으키고는 뒤로 넘어지지 않게 자기들의 손으로 그냥 정중히 잔등을 버텨주었다.

《대체 이 밤중에 전화종소리로 소란스럽게 구는게 누구냐?》

거리가 먼 탓인지 좀 코맹맹이같은 소리를 내긴 했으나 분명 귀에 설지 않은 우에다의 목소리가 똑똑하게 울려왔다.

《도문회담에서 한 약속에 따라 급히 알려야 할 일이 있어 찾았소.》

미나미는 자기 소개나 인사말따위 절차는 집어던지고 아예 하자는 이야기부터 들어갔다.

《아, 미나미대장각하이시오? 이 밤중에 웬일로…?》

《도문회담결정에 따라 긴히 알려야 할 일이요.》

우에다가 자기의 첫말을 알아듣지 못한것 같아서 미나미는 짤막하게 되풀이해주었다.

《긴급히 알려주실 일이?… 무슨 불행한 사태가 생겼소이까?》

우에다는 미나미의 어조와 어투에서 뭣인가를 눈치챘는지 불안해하는 목소리였다.

《행복하다고는 할수 없는 사태요…》

미나미는 방금전에 미쯔바시와 이소사끼가 자기에게 알려주었고 혜산에서 확인해온 사태의 진상을 구태여 늘어놓으려 하지 않고 몇마디로 찍어 알려주었다.

우에다는 네, 네 하고 듣기만 하다가 그 역시 숨이 막히는지 한동안 아무 응답도 없었다. 얼마간 지나서 자기의 놀라움을 숨기지 않는, 그러면서도 미나미를 동정하고 위로하는 몇마디 말을 보내왔다.

《아, 그거 정말… 지난해 내가 겪은 무송사태에 비길바없이 엄청난 변이 일어났군! 총독각하께서 얼마나 놀라셨겠소? 무송사태를 겪어본 나는 지금 각하가 받았을 충격을 리해할만합니다.》

미나미는 자기를 동정해주는 우에다의 그 가식없는 말에 오히려 화가 났다. 어쩐지 자기를 불쌍하게 여길뿐아니라 자기가 이미 한해전에 당했던것을 지금 당하는 미나미에 대하여 그것도 훨씬 세차게 당한데 대하여 고소하게 여기는 불순하고 모욕적인 색채가 비껴있었기때문이였다.

《우에다대장, 나는 당신에게 지금의 나의 처지를 동정받자고 이 사태를 알리지 않았소. 도문회담의 협의에 따라 당신이 이 사태앞에서 강건너 불보듯 할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것을 알리기 위해서 전화를 걸었소. 당신은 김일성이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제국을 반대하는 싸움을 조선판도에까지 확대하고있는 새로운 정황하에서도 당신들의 대륙진출계획을 실행할수 있겠다고 생각하오?》

미나미의 말이 거칠어진데 대해 우에다 역시 곰살궂게만 받쳐주자고 하지 않았다.

《그 계획실행은 이미 멈출수 없습니다. 그것을 멈춰세우기는 때가 늦었습니다. 천황페하께서 이미…》

미나미는 그 뒤말을 들으려 안했다.

《우에다대장, 만일 관동군이 대륙에 불을 지르기전에 김일성공산군을 결정적으로 소탕하지 않는다면 결국 당신은 김일성군때문에 어떠한 랑패를 당할지 모른다는것을 좀 생각해봤소?》

《그에 대해서는 이미 한해전부터 나도 느낀바가 없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 우려를 가실 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김일성공산군소멸에 전력을 기울이도록…》

《총독각하, 도문회담협의에 따라 우리는 지난 겨울동안 그들의 소멸에 관동군과 조선주둔군을 적게 동원시켰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소멸당한것이 아니라 강해졌습니다. 나는 이제 당장 관동군을 압록강으로 출동시키겠습니다만 우리의 새 협동기도의 전망에 대해서는 락관할수 없다는것을 솔직하게 말해두고싶습니다.》

《어쨌든 대거출동시켜보시오. 나도 북부조선에 널려있는 조선주둔군과 모든 경찰대를 다 동원시키겠소.》

미나미는 역시 인사말도 없이 송수화기를 덜컥 내려놓았다.

《고이소대장에게 내가 우에다에게 한 마감말을 전하게.》

그는 미쯔바시에게 말하였다.

《이소사끼, 자네는 이밤으루 사건현장에 내려가보게. 물러들 가도 좋네.》

미쯔바시와 이소사끼는 물러갔다. 미나미는 방안에 홀로 남았다. 우에다의 불쾌한 응답으로 하여 아픔을 잊었는지 발작을 일으켰던 가슴은 별로 답답하게 찌르지 않았다.

어수선해진 방을 휘둘러보던 미나미의 눈길은 이소사끼가 원탁우를 대강 치우면서 한옆에 내놓았던 잡지장우에서 멎었다. 아까 그가 보던대로 내려놓았던 잡지장에는 여전히 그 윈저공과 심프손부인의 사진이 가지런히 보였다. 상기도 윈저공은 채 마르지 못한 젖은 영국황제복을 입고있었다. 그러나 전과 다름없는 황제복을 입은 그 윈저공은 어쩐지 아까보다 더 행복스러운 웃음을 머금고있는듯싶었다.

(저 사람이 사실 나보다 더 행복하지 않을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패배자로 밀려나기보다 스스로 옥좌를 버리고 선량한 평민으로, 성실한 남편으로 살기를 결심한 저 사람이 더 현명하지 않을가? 나는 벌써 세상앞에서 웃음거리가 됐는지도 모른다. 우에다부터가 벌써 태도가 달라졌다. 나는 지난해 조선총독으로 앉자마자 김일성빨찌산을 단기간에 전멸시키고 조선을 영영 죽여버리겠다는것을 천황앞에서 맹세하였다. 그러나 불과 반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어찌되였는가? 우에다가 말한대로 되지 않았는가?

김일성공산군의 전멸과 조선의 영원한 사멸을 세상의 어느 누가 믿을것인가? 오늘은 내자신까지도 그것을 의심치 않지 않는가?)

오늘은 일생 영원히 잊지 못할 슬픈 기념일로 되였다는 기라의 먼먼 목소리가 미나미 귀가에 삼삼히 들렸다.

 미나미는 젖은 잡지책을 들고 대영제국의 황제자리를 스스로 내던진 윈저공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입술을 약간 벌리고 벙글써 웃고있는 윈저공은 어딘지 모르게 조소어린듯 한 눈길로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이보시오, 총독령감, 당신은 바보로 치부한 나를 뭣때문에 그렇게 보시는거요? 각자에게는 자기 나름의 인생관이 있고 자기 나름의 생존방식이 있다는것을 총독령감은 예순살을 자시고도 알지 못하시오? 나는 당신이야말로 어리석은 늙은이라는걸 이깨워주고싶소. 당신은 자신의 환상속에서 살고있소. 당신은 당신의 고국보다 더 오랜 력사와 문화와 슬기를 가진 민족을 동화시켜버릴수 없을거요. 자기 넋을 가진 인민은 사멸당하지 않소. 자기 넋을 가진 인민은 죽이지 못하오. 그 인민은 지금 당신이 아니라 당신에게 선전포고를 해온 조선의 젊은 영웅을 따르고있소. 나는 그들의 부활을 예감하오… 아니, 나는 당신이 불안하게 예감하는바를 말했을뿐이요. 천만에, 그렇지 않소. 이제 당신과 나, 두사람중에 누가 더 어리석었는가는 력사가 판단해줄것이외다.)

미나미는 손에 들었던 잡지를 꽉 움켜쥐고 비틀다가 그만 맥이 진한듯 떨어뜨리고말았다.

귀전에서는 앵― 하는 모기소리가 감돌았다.

 

4

 

어느 민족에게 있어서나 그들속에서 력사적으로 형성되고 전통적으로 계승되면서 준수되여온 생활상의 사회적풍속은 그 민족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한 그 민족의 생존과 더불어 긴긴 생명을 이어가기마련이다. 온갖 관습과 마찬가지로 민족적인 풍속도 역시 놀라울만치 목숨이 질긴것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의 그 암담한 시기에도 조선사람들은 그 모진 식민지적압제와 가난속에서나마 해마다 음력설이나 한가위와 같은 전통적으로 관습화된 민속명절을 무심히 흘려보내지 않고 어김없이 지키며 명절쇠기를 즐겨왔다. 그것은 횡포한 권력의 힘으로도 말살해버릴수 없는 민족적관습의 꿈틀거림이였으며 쉽게 죽어버리고싶지 않았고 죽어버릴수도 없었던 민족의 가냘픈 숨결이였다.

조선인민혁명군사령부에서는 보천보전투를 진행한지 아흐레만에 국내진공작전의 승리를 경축하는 성대한 군민련환대회를 가지기로 결정하였다. 보천보전투승리를 유격대와 함께 경축하자는것은 인민들의 한결같은 청원이기도 하였다.

마침 일요일이기도 하였던 1937년 6월 13일 조선반도 삼천리 방방곡곡에서는 조국광복회조직이 뿌리박혀 들어간 곳이건 아직 들어가지 않은 고장이건 가림없이 그 어느 마을 그 어느 고을에서나 사람들은 명절옷차림을 하고 산천경개 아름다운 곳에 모여들어 신문들과 방송 그리고 발없이도 천리를 가는 소문을 통하여 세상 널리 알려진 보천보전투소식을 나누며 민족의 영웅 김일성장군님의 국내진공작전의 장쾌하고 빛나는 승리를 경축하여 즐겼다. 죽지 않은 조선, 살아있는 온 조선이 자기의 부활될 앞날을 예감하고 기쁨에 겨워 흥성거렸다.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경축대회를 가지게 된 지양개의 덕삼촌 뒤산 수림속공지의 넓은 로천대회장은 이른새벽부터 경축일색으로 단장되였다.

어뜩새벽에 이슬을 걷어차며 대회장으로 나온 오중흡이네 중대원들은 해가 떠오르기전에 구호들이며 기발들이며 그밖에 대회장식을 위해 마련해가지고 나온 준비품들로 대회장을 화려하게 꾸려놓았다.

《그거 정말 희한하다!!》

해뜰무렵에 그 어느 누구보다 먼저 대회장에 나타난 리동백은 대회장어구로 들어서면서 감탄해마지 않았다.

경축대회장의 장식에 대하여 직접 도안한 사람이였지만 정작 도안대로 꾸려진 현장을 보니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아니 저 〈령감〉이 메고오는게 무시게요?》

수고들 한다고 인사하며 주석단쪽을 향해 대회장을 가로질러 오고있던 리동백의 어깨우에서 흔히 보지 못하던 괴이한 물건을 남먼저 발견한 최성필이 뒤거둠질을 하고있던 여러 대원들의 주의를 그의 어깨우에 끌어갔다.

그의 한쪽 어깨에는 새까만 보자기로 웃머리를 감싼 세개의 다리대를 가진 길다란 물건이 메워져있었다. 앞으로 쑥 내뻗친 세개의 모아붙인 다리대끝에서는 새하얀 금속광이 번쩍거렸다.

《가만있자, 저게 사진관에서 잘칵할 때 쓰는 기계 아니요?!》

누구인가 먼저 알아맞혔다.

《옳소, 삼발이 사진기요.》

유격대생활에서 사진을 찍는다는것은 드문 행운이다. 유격대원들은 희귀한 구경거리를 보러 와― 모여갔다. 그리고 함부로 다치면 못쓰게 만든다고 엄살을 피우는 《대통령감》에게서 사진기를 빼앗아 대회장 한복판에 버티여놓고 보자기를 벗겨냈다. 다리대에 긁힌 자리라곤 별로 없는 아주 새것이나 다름없는것이였다.

《히야! 그거 꽤 멋들어진게구만! 어디서 이렇게 희한한게 생겼소다?》

《동무들이 사진기를 구해 안주면 뭐 내가 사진기를 구할데 없었겠소? 동무들보다 훨씬 더 내 심정을 깊이 헤아려주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요. 뭐 이것뿐이 아니요. 최현부대동무들도 가와시마집을 치구 휴대용을 하나 얻어다 내게 선사했소. 자, 자 그만들하구 어서 가서 대회장뒤거둠이나 마저하오.》

리동백은 시침을 뻑따고 그들을 슬슬 떠밀었다. 사진찍을 생각은 고사하고 사진기곁에 다가들 생각도 마는것이 좋겠다는듯한 태도다.

《아, 이 아바이가 일부러 생트집을 거는구만. 우리보구 언제 사진기를 구해달란적이라도 있은척하누만. 뭐 좀 생긴것 같으니까 벌써부터 되우 세도를 쓴다? 헛참, 그럴 사이가 아닌것 같은데 우리보구 이상하게 노시는데?》

능글거리며 익살을 부리는 최성필을 휘끈 돌아보던 리동백은 그의 군모채양을 잡아당겨 눈을 가리우고 코끝을 튕겨주었다.

《에끼, 버르장머리없는 녀석.》

김정보가 최성필에게 소리친 흉내를 낸 리동백은 제먼저 허허 웃었다.

《19도구지회의 조국광복회원들이 오늘 련환대회에서 보천보를 친 용사들과 같이 기념사진을 찍구싶어서 다이나마이트전술을 써서 구해온걸세.》

그는 정색을 하며 사진기가 어디서 생겨났는지를 알려주었다. 아직 별로 덞어지지 않은 새 군복에 하얀 목달개를 달아 다려입고 깨끗하게 면도질을 하여 잘 다스린 코수염에 오늘따라 반질반질한 머리기름칠까지 한 리동백은 여느때보다 한결 더 젊어보였다.

《다이나마이트전술이요? 그건 대체 무슨 전술이요?》

뒤전에 서있던 오중흡이 호기심이 나서 물었다.

《그 왜 보천보거리에서 있었다는 다이나마이트사건 있잖소? 바루 그 얘길 듣구 19도구지회 광복회조직들이 꾀를 썼다는군…》

《다이나마이트사건? 그건 또 뭡니까?》

리동백은 마동희와 여러 중대원들을 이상스럽다는듯이 돌아보았다.

《아니 동무네는 다이나마이트얘기두 상기 모루?》

《듣느니 금시 초문인데요.》

마동희가 안경밑에서 눈을 뚜부럭거리는것을 본 《대통령감》은 허거픈 웃음소리를 냈다.

《허허… 보천보에 가서 다이나마이트사건을 야기시킨 당사자들이 그걸 모르다니. 이거 시간이 아깝더라두 계몽사업을 좀 해야겠군.》

리동백은 이야기를 시작하기전에 코수염을 점잖게 좌우로 비껴쓰다듬고 두어번 헛기침을 했다.

《우리가 보천보를 치고 적기관에 불을 질러놓은 그 이튿날 아침에 벌어진 일인데 전날밤에는 어디들 숨었던지 그림자도 안뵈던 숱한 경찰놈들이 인민들을 강제로 내몰아서 그때까지도 그냥 타고있는 소방회관이요, 산림보호구요, 우편국이요 하는 저들 기관에서 붙는 불을 끄라고 들볶고있는참에 어디선가 요란한 폭음이 터져오르고 〈공산군이다!〉하는 고함소리가 났다질 않겠소? 그러자 금시 인민들을 들볶으며 미친개처럼 호통치던놈들이 혼비백산해서 산지사방으루 들구뛰는데 그게 정말 볼만하더라는거요. 실은 그 폭음이 불타고있는 산림보호구창고에 있던 다이나마이트가 터지는 소리였다는데 어느놈이 그전날밤 우리의 습격에 어찌나 혼이 났던지 〈공산군이다!〉 하구 비명을 올리는바람에 그런 추태를 부렸다는거요. 여하튼 경찰놈들이 대가리에 썼던 경찰모를 개들이 얻어물고 보천보바닥을 돌아다니게쯤 되였다니 무던히도 급하긴 했던 모양이요. 그 일이 있은 담부터 요즘 보천보일대 인민들은 아이들까지두 순사놈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다이나마이트〉가 온다고 하면서 그놈들을 골려주는 판이라우.》

리동백의 구수한 언변에 다들 배를 그러안고 웃어댔다.

《바로 이 다이나마이트얘기를 들은 19도구지회 조직원들이 유격대라면 벌벌 떠는 적들의 약점을 리용해서 사진기를 얻어낼 꾀를 썼지. 그들은 구장을 경찰에 보내여 주민증에 붙일 사진을 찍겠는데 사진사를 보내달라 하고 요구하니 저놈들은 그런줄만 알고 저들의 경찰 지정사진사를 보내질 않았겠소. 그래서 사진사라는 작자가 이 사진기를 메고 19도구 어귀부락에 오게 됐는데 그놈 역시 왜놈족속인데다 경찰서의 지정사진사인지라 사진찍을 차비를 하면서 꽤나 떡떡거리며 잔소리가 많더라나. 조직원들은 눈꼴 사나운대루 꾹 참고 속으로 이제 두고보자 벼르면서 고분고분하게 사진들을 찍는척했지. 그러다가 갑자기 〈공산군이다!〉 하구 소리를 지르며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루 들구뛰는 시늉을 했다는거요. 그 소리가 나자 사진사놈은 어느새 달아빼서 어디 가 숨어버렸는지 그림자도 볼수 없더라질 않겠소.》

《그런 사이에 슬쩍 쥔 없는 사진기를 건사했겠구만요?》

《그래 그렇지, 바로 그렇게 얻어진거요.》

《하하… 그놈이 다이나마이트전술에 걸려 생뚱같이 사진기를 떼웠군. 그러니 그놈은 다이나마이트 터지는 소리도 못듣고 사진기만 떼웠겠군요?》

《그놈이야 우리 유격대의 방귀소리도 못들었지.》

이슬맺힌 공지의 풀밭에는 웃음들이 데굴데굴 굴렀다.

곽두섭만은 한쪽에 외따로 선채 그 이야기에 끼이지도 않고 웃지도 않았다. 생전 사진이라는걸 한번도 찍어보지 못했다고 하던 조분옥의 말이 문득 떠올랐던것이다. 조국진군때 함께 기념사진을 찍자던 분옥이가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있었더면… 하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아직 아물지 않는 가슴속의 상처를 쿡 쑤시고 든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 깊은 마음의 상처는 그 언제 가면 아물어버릴것인가.

십년, 이십년… 아마 곽두섭이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는 영영 아물지 못할것 같았다.

사진기를 둘러싸고 대회장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한바탕 떠들썩하고있을 때 이깔나무숲속의 오솔길 풀섶을 헤치며 리창선(그는 지금은 중대청년간사였다)과 함께 흰 맥고모에 모시두루마기차림의 김정보가 공지에 들어섰다. 그뒤로는 역시 모시두루마기에 연회색 여름중절모를 쓴 박인진도정이 단장을 짚으며 따라왔고 다시 그뒤에는 농립모를 쓴 마로인이 따라왔는데 그의 한손에는 무슨 네모진 물건을 싼 보자기 하나가 들려있었다. 맨뒤에서 나타난 어리무던하게 생긴 청년은 둘둘 만 굵은 돗자리말이를 질바로 지고있었다.

《어허 이게 뉜고? 홍두산을 지키던 곽중대장이 아닌가?》

자기들을 향해 거수경례를 붙이는 곽두섭을 알아본 김정보와 마로인은 남먼저 그의 두팔을 반갑게 잡았다.

《그때 상했던 몸이 이제는 다 나았나? 이렇게 만나니 정말 반갑네.》

그와 인사를 나누고있던 김정보는 뒤따라 자기앞에 다가간 최성필이와 다른 낯익은 유격대원들을 보자 다시한번 떠들썩하게 소리질렀다.

《아니?! 홍두산용사들이 예 다 있군!》

로인은 그들과 신식으로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나더니 최성필을 꾸짖었다.

《이 사람, 자네가 이 사람들하구 같이 여기 와있으면서 우리 집에 얼씬두 안했단 말인가? 여기까지 내려왔으면 중대장이랑 다 모시구 우리 집에 찾아내려올 일이지, 자네 나하구 무슨 원쑤진 일이 있다구 그러나말일세.》

《리창선동무한테서 들었겠지만 보시다싶이 대회장준비에 좀 바빠서요.…》

최성필은 싫지 않은 로인의 꾸짖음에 싱글벙글하며 변명조로 말했다.

《아무리 바빴기로 예서 우리 집이 홍두산만치나 멀기나 한가? 엎디면 코닿을데다 내 집을 두고 원 사람들두…》

그가 진심으로 유감스러워하는것을 본 곽두섭은 호걸스레 웃으며 대꾸했다.

《군률에 따라 움직이다나니 로인님댁까지 내려가질 못했는데 오늘은 경축대회끝에 갈 짬이 생길겝니다. 그때 홍두산서 음력설을 쇠다 만 봉창을 오늘은 단단히 해볼 잡도린데 우리가 다 가면 거덜이 나지 않겠는지 좀 걱정입니다.》

《그건 념려말구 전체 부대를 다 데리구라도 우리 집에들 오라구. 나두 그때의 그 봉창을 단단히 해보자는 생각이여.》

김정보는 호방하게 웃으며 풍채좋은 반백의 수염을 내리쓸었다. 그리고는 리동백과 오래간만에 만난 인사를 나누고있는 박인진을 돌아보며 이 사람들이 바로 홍두산에서 장군님의 전법대로 적을 외나무다리 건너오듯하게 하고 족쳐댄 용사들이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어떻게 벌써들 나왔습니까? 천천히들 나와도 자리가 갖춰질텐데…》

오중흡의 말에 김정보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허허… 우리 자리야 뭐 그닥 급하겠소. 이 마형네 사위한테서 회의장을 희한하게 꾸린다는 말을 듣구 구경삼아 나왔지. 그거 큼직큼직하게 잘도 써붙였군.》

김정보는 주석단 량옆에 높이 세운 두대의 장대에 각각 길게 내리드리운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독립 만세!》의 구호가 씌여져있는 천필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저 〈3.1월간〉 주필아바이가 쓴 글씹니다.》

리창선의 말에 박인진도 김정보도 마로인도 머리를 끄덕였다.

《주필선생이 문장가라더니 글씨 또한 명필이시로군. 과시 청천 하늘에 걸어올릴만한 글씨요.》

《아무렴, 장군님을 하늘높이 모셔올리는 글씨사 저쯤은 돼야지.》

늙은이들은 바람결에 옷자락과 반백의 수염발을 가벼이 날리며 마냥 밝은 웃음들을 지었다.

키가 가지런한 여러개의 기발대에서는 아침해빛에 선명하게 드러난 오색기들이 펄럭거렸다. 울긋불긋한 그 오색기들은 경축대회장의 운치를 한껏 돋구어주고있다.

《〈김일성장군 만세!〉와 〈조선독립 만세!〉의 글발을 백주에 허공중천높이 날리며 승전고를 울리는 경축회합이라! 정말 꿈같은 일이요.》

김정보는 연단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감개무량해서 말했다.

 《엊저녁에 이리 오면서 듣자니 오늘 장백에서 저놈들이 제를 지내는가봅디다.》

박인진의 이야기였다.

《무슨 제를 말이오다.》

마로인이 물었다.

《그제 23도구 3종점에서 보천보를 친 유격대를 찾는답시구 개처럼 싸다니던 놈들이 또 유격대에 걸려 숱한 주검을 냈다면서요?》

《네, 아마 여라문놈나마 썩어졌을겝니다.》

오중흡이가 중대원들을 의미있게 돌아보며 말참녜를 했다.

《그럼 그게 바로 그놈들이였던게로군.》

《세상에 이렇게 고소한 일도 있나? 저놈들은 오늘 제를 지내고 우리는 예서 잔치를 벌리구… 그놈들은 울구 우리는 웃으렸다! 그래야지.》

김정보의 그 말에 다들 소리내여 웃었다.

《장군님을 모신덕에 우리 조선사람들이 꿈만같이 경사스런 날을 맞소이다.》

《옳은 말씀이요.》

마로인의 말을 김정보가 받았다.

《오늘을 당하고보니 홍두산에서 하시던 장군님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생각나오. 항간에서는 장군님께서 석달천기를 내다보신다고 얘기를 하고있소만 그게 아직 우리 장군님을 채 알지 못하고 하는 얘기들이요. 장군님께서는 음력설때 벌써 오늘 일을 환히 내다보질 않으셨겠소? 내 상기도 그때 하신 말씀을 똑똑히 기억하고있는데 장군님께서는 홍두산에서 음력설 축배사를 하시면서… 비록 지금은 조국광복이 가망없는 일처럼 보일지 모르나 올해 봄날쯤 가게 되면 조선이 살아있을뿐아니라 왜놈들과 싸워서 능히 이길수 있다는것과 조국광복이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는것을 반드시 온 세상이 다 알게 되리라… 하고 말씀하시질 않았겠소? 그때는 그 말씀이 하도 꿈만 같아서 내 사실 채 믿지를 못했는데 바로 오늘을 당해보니 어떻게 되였소? 장군님 말씀이 그대로 꼭 맞아떨어지질 않았소?》

《정말 신통하오!》

감동된 박인진은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선견지명두 이렇게 신통히 맞아떨어지는 선견지명이 어디 있겠소? 헌즉 조국광복이 우리 대에 못볼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는 장군님의 말씀도 어김없이 맞아떨어지리라는걸 나는 믿어의심치 않소. 장군님이야 석달천기가 아니라 수삼백년 앞일을 내다보고 알아맞히는 선견지명을 지닌분이시지.》

《지당하신 말씀이외다.》

박인진이 공감을 표했다.

《제가 당한 일을 두고봐도 참말 한울님같은 선견지명을 지니신분이외다. 제가 지난 겨울에 장군님을 뵈온 자리에서 서울 올라가 최린이랑 광복성전에 끌어들여볼 의향을 말씀드렸을 때에도 장군님께서는 그렇게 명철하신 예언을 하시더니 그대로 꼭 맞아떨어지질 않았겠소이까? 나하구 서울걸음을 같이한 창선군도 여기 있소만 결국은 그이의 말씀대로 그 구린내나는 최린따위들의 천도교 반역지도배놈들에게 등돌리고 내려왔소이다. 실로 장군님을 믿고 따르면 만사 그르게 되는 일이 없을것 같소이다. 그이야말로 세상 천만인이 믿고 따를 한울님같은분이시외다.》

《옳은 말씀이요. 조선의 한울님이시구 조선의 나라님이시지!》

장군님을 칭송하는 두 늙은이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유격대원들은 서로 마주보며 입들을 다물지 못했다. 장군님을 항상 측근에서 모시고 지내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성원이라는 긍지를 지금 이 시각처럼 강하게 느껴본적이 언제 있었던가.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살며 싸운다는 자각과 긍지, 이것이 그들이 체험하는 최대의 행복이였다.

《아, 여기에들 와계시는걸 헛딴데서 헤발며 땀만 흘렸네.》

어느결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사령부전령병 주봉길이 그들곁에 와 멈춰서며 숨을 할싹거렸다.

《저하구 좀 같이들 가십시다. 사령관동지께서 세 로인분들을 찾고계십니다.》

봉길은 후렁후렁한 모자밑으로 흐르는 땀을 씻을 경황도 없이 박인진과 김정보와 마로인에게 무작정 재촉했다.

《장군님께서요?!》

《네, 도정님이 련환대회에 참석하시기 위해 간밤에 지양개에 오셨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선덕로인댁이나 〈김빠이〉동무의 장인댁에 가서 세분을 함께 모셔오라시질 않겠습니까? 그런데 두 댁엘 가니 세분 다 어디 계셔야지요?》

《가만… 잠간만!》

봉길에게 량해를 구한 김정보는 돗자리퉁구리를 진채 저쪽에 따로 떨어져 유격대원들을 부럽게 훔쳐보며 서있던 총각을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그리고는 오중흡에게 부탁했다.

《저 사람이 지고 오는걸 장군님을 모실 자리길에 깔아들 달라구.》

《돗자리말입니까?》

《아니, 저게 베필일세. 그 베필을 깔아주게. 우리가 손수 깔아놓자고 했는데 장군님께서 찾으신다니 가봐야겠구만. 그리구 저건 창선이, 자네가 맡아주게.》

마령감이 들고있던 보자기에 싼것을 사위인 리창선에게 주었다.

《이건 뭡니까?》

《저 도정어른이 장군님께 놋식기를 드리려구 성의스럽게 마련해온것일세.》

한편 박인진도정은 그나름의 중요한 부탁의 말을 《대통령감》에게 붙였다.

《내 이리 오기전부터 이번에 주필선생을 만나 기어이 부탁하려던것인데…》

박인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정중하게 말했다.

《그전에 주필선생이 나를 만난 자리에서 선생이 유격대에 들어선것은 장군님의 투쟁행적을 글로 남겨두려는 뜻에서였다고 말씀하신적이 있지 않습니까?》

《3.1월간》창간호에 《천도교 상급수령 모씨 우리 광복회대표를 친히 방문》이라고 제목한 기사를 싣기 위해 리동백이 사자봉밀영에 왔던 박인진을 만나 취재할 때 그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었다.

《네, 그래서요?》

《그러니만큼 이 일은 꼭 선생이 풀어주셔야 하겠소이다.》

《무엇인지 말씀하십시오. 제 할수 있는껏 해올리겠습니다.》

《그렇게 선선히 응해주시니 고맙소이다. 다름이 아니라 간단한 장군님의 략사를 이번에 하나 써서 제게 주었으면 합니다.》

리동백은 저윽 놀랐다

《장군님의 략전을 말인가요?!》

필생의 위업으로 삼아야 할 이런 엄청난 부탁을 지금 박인진도정에게서 받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리동백이였다.

《지금 수많은 천도교인들은 장군님을 우리 한울님으로 여기며 따르고들 있소이다. 그리고 풍산, 갑산, 삼수, 장백… 령북일대 도처의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장군님에 대하여 다들 몹시 알고싶어들 합니다. 이런 때 장군님에 대해 잘 알수 있게 하는 책이나 글같은것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믿고 따르는 새 조선의 한울님은 바로 이런분이시다 하고 내돌려볼수 있도록말입지요.》

그 말을 들은 리동백은 잠시 아무 대답도 못하고 가슴만 들먹였다. 저쪽에서 박인진을 기다리고있던 진령병이 어서 가자고 재촉했다.

《급해서 마음에 들게 될지 모르겠지만 써드릴터이니 어서 가보십시오.》

리동백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 박인진은 단장을 든채 그의 손을 꼭 그러잡아 흔들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소이다.》

그리고는 그에게 거듭 머리를 숙여 사의를 표하며 주봉길이와 김정보, 마로인네를 뒤따라갔다. 숲 저편에서는 대회장으로 다가오는 유격대원들의 발구름소리와 씩씩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

1910년 8월 29일 《국치일》이라는 쓰디쓴 이름으로 온 조선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 저주스럽고 원통스러운 날이 있었던 때로부터 조선사람들에게는 온 겨레가 경사스럽게 맞고 즐길 축전행사같은것은 그 언제 한번 있어보지 못했고 또 있을수도 없었다.

그렇다.

김일성장군님을 직접 한자리에 모시고 지양개의 덕삼촌 수림속에서 가진 군민련환대회는 조선땅우에 망국의 비운이 덮씌운이래 스물일곱해가 지나도록 조선사람들에게 그 언제 한번 있어보지 못하였던 대민족축전이였으며 지난 여러해동안의 항일혁명전쟁력사에서도 전례가 없은 크나큰 승리자들의 잔치였다.

비록 그곳이 대도회지의 광장이 아니였고 거기에는 번쩍번쩍하는 군악대와 으리으리한 금술이 달린 제복들과 화려한 례복들, 호화로운 행사차나 눈부신 축포들은 없었지만 이 심산벽지 풀밭에 벌려놓은 축전장에서는 기쁨에 넘친 소박하고 진실한 우리 군대와 우리 인민의 성의가 마련해놓을수 있은 최대한의 장엄하고도 성대한 의식이 진행되였다.

민족의 영웅 김일성장군님께서 조선인민혁명군 지휘성원들과 축기들을 가지고 온 박달, 리제순을 비롯한 국내외 조국광복회 조직대표들 그리고 여러 애국인사, 유지들과 함께 대회장에 들어서시자 소가죽으로 만든 커다란 북이 둥둥둥 승전고를 울리는 가운데 대회장앞에 높이 솟아있는 긴 게양대우로 커다란 한폭의 붉은기가 서서히 떠오르며 찬연한 아침해빛을 받아 금시 타오르는 봉화마냥 너울거렸다.

《저게 바루 무송현 동강이란데서 조국광복회를 뭇구 천하에 선포할 때 띄워올렸던 기발이라누만.》

대회장둘레의 숲가에 명절옷차림을 하고 하얗게 늘어선 사람들속에서 귀속말들이 떠돌았다.

《혁명군이 백두산속에서 지낼 때두 내내 저 기발을 날린다는데…》

《이번에 혁명군이 보천보를 치러 조선땅에 나갈적에두 저 기발을 들고 나갔다질 않소.》

응당 그랬으리라고 믿고싶어진 인민의 심정들이 저마끔 제나름으로 그 기발에도 크나큰 의의들을 부여했다.

가슴마다 붉은 꽃송이들을 달고 대회장복판에 부대별로 그쯘히 늘어선 조선인민혁명군 제6사, 제4사, 제2사 대렬들은 번쩍거리는 총창의 숲을 이룬채 엄숙한 영접자세를 취했고 망건을 쓰고 가슴에 허연 수염발들을 드리운 늙은이들은 두손을 앞에 모으고 허리를 깊숙이 굽혀 대회장 어귀에 들어서신 장군님께 큰절을 드렸다.

장군님께서 지나가실 통로로 틔여있는, 듬성듬성 잡꽃이 피여있는 푸른 풀밭에는 주름살이 잡힐세라 빳빳하게 풀을 먹여 다림질해 펴놓은 베필이 곧게 뻗어있었다.

늙은이들과 다정한 인사를 나누신 장군님께서 통로에 펼쳐져있는 베필을 밟으시기를 사양하시고 개암나무덤불과 꽃핀 진달래포기들과 생당쑥들이 무릎을 치는 수풀속을 헤치시며 지나려 하시자 뒤따르던 박인진이 바삐 앞으로 나와 수풀길을 막아서며 장군님께 아뢰였다.

《온 조선이 나라의 일대경사로 맞이하는 오늘같은 날에 어찌 장군님께서 흙을 밟으시며 백성들과 군대들의 앞을 지나가시겠습니까. 장군님께서 흙을 밟으시게 하는것은 나라님을 섬기는 백성의 도리가 아니온즉 여기 모인 백성들이 장군님께 깔아올린 베필을 어서 밟으시기를 청하나이다.》

민의를 대변하여 간절하게 아뢴 그는 장군님을 부축하듯 하여 베필우로 모셔올렸다. 어찌하실수 없이 된 장군님께서는 더는 사양치 못하시고 풀판에 깔린 베필을 밟으시며 대회 주석단과 연단이 마련되여있는 넓은 공지의 앞쪽으로 향하시였다.

그이께서 대렬앞으로 접어드시자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 나팔수가 울리는 랑랑한 나팔소리가 푸른 숲속에 메아리쳤다. 뒤이어

《차렷!》

《우로 봣!》

정신이 버쩍 들게 하는듯한 청청하고 기운찬 최현의 목소리가 군인대렬사이를 뻗으며 수백의 얼굴들을 삽시에 대회장 한모퉁이로 돌려놓았다.

《사령관동지! 조선인민혁명군 제6사, 제4사, 제2사 련합부대는 군민련환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정렬하였습니다.》

최현의 힘찬 목소리가 다시금 청청하게 울렸다.

뭇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잠간 베필우에 멈춰서시여 군모채양옆에 오른손을 올려붙이시고 격식대로 보고를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천천히 손을 내리우시며 기쁨에 넘친 밝고 환한 웃음속에 름름한 군인대렬을 휘둘러보시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대규모국내진공작전을 승리적으로 진행한 각 부대 동무들의 거대한 전투성과를 열렬히 축하합니다!》

활달하신 그이의 찌렁찌렁한 음성이 대회장을 꽉 메우고 들어선 군중의 가슴속까지 울렸다.

《조국광복을 위하여 복무함!》

수백의 우렁차고 활기찬 목소리들이 하나로 합쳐져 대답하였다. 땅을 울리고 청림이 화답하였다.

《사령관동지의 건강을 축원함!》

또다시 하늘땅을 들썩거리게 하는 련합부대 성원들의 대렬인사말씀을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거기에 답례하시여 군모를 벗어드시였다.

그러자 먼저 인민혁명군대렬에서부터 만세의 환성이 터져올랐다.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독립 만세!》

만세의 환성은 삽시에 주위에 운집한 인민들에게도 번져갔다.

《만세!》

《만세!》

망국의 설음속에 한숨만 짓던 가슴들이 기쁨을 뿜고 희열을 내뿜었다. 나라 잃은 슬픔으로 가슴을 두드리고 빼앗긴 향토를 치며 시일야방성대곡에 눈물적시던 그 주먹들이 지금은 환희로 하여 솟구치는 눈물을 빗씻으며 만세의 함성과 함께 하늘높이 솟구쳤다. 해빛도 눈부신 푸른 하늘… 농립들과 군모들이 날아오르고 총대들이 설레이며 우줄우줄 춤추었다.

둥둥둥… 승전고는 원쑤를 족치고 개선하신 장군님을 영광의 단상에 모셔올리고 숲에서 날아오른 새떼들은 승전의 경축장을 떠돌며 환희의 원무를 벌렸다.

통나무들을 무어만든 연단우에 올라서신 장군님께서는 열광에 들끓으며 파도치는 군중의 바다를 향하여 여러번 손을 들어 답례를 보내시였다.

연단은 잠간사이에 꽃무더기로 뒤덮였다. 지팽이를 짚은 늙은이들과 치렁치렁 땋아늘인 머리태끝에 붉은 댕기들을 맨 처녀들과 베잠뱅이를 다려입은 청년들과 배꼽을 드러내놓은줄 모르고 히히덕거리는 아이들이 줄레줄레 달려나와 그이께서 서계시는 연단우에 야생꽃묶음들을 던져올렸다. 늦게 핀 진달래꽃, 때이르게 핀 철쭉꽃, 한창 피여난 솔나리, 동자, 분홍바늘꽃과 산딸기꽃들…

 인민이 올린 축하의 꽃다발과 환호속에서 장군님께서는 선언하시였다.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을 해방하는것은 오늘 우리 민족의 지상의 념원입니다. 우리는 이 념원을 실현하기 위하여 손에 무장을 들었으며 고된 전투속에서도 조국을 생각하고 거기서 힘과 용기를 얻고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매불망 그리던 조국을 향하여 원정의 길에 오른 우리는 가는곳마다에서 원쑤를 족치고 승전고를 울리며 개선하였으며 오늘은 승리한 무한한 기쁨을 안고 한자리에 모이게 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임이야말로 승리자들의 기쁨을 나누는 모임이며 앞으로 더 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결의를 다지는 모임으로 됩니다.》

장군님께서는 조선이 죽지 않았다는것을 과시한 거대한 승리를 위하여 헌신해온 군대들과 인민들의 업적을 일일이 드시고 높이 치하하시였다.

(일제와 싸워 능히 이길수 있는 오늘과 같은 강대한 혁명무력, 거족적인 조국광복회, 각성하고 분발해일떠선 인민의 대군! 이 모든것을 마련하신분은 누구이십니까? 바로 지금 저 연단우에서 군대와 인민을 치하해주고계시는 장군님께서가 아니였습니까?)

열광의 바다 한복판에 사진기를 버티여놓고 그이의 모습을 사진기렌즈속에 모시며 지나온 나날을 감회깊이 돌이켜보고있던 리동백은 마음속으로 아뢰였다.

(장군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어찌 우리에게 강력한 광복혁명의 거군이 있겠으며 조국광복회가 있겠으며 자기 힘의 위대성을 자각한 대중이 있겠습니까! 장군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어찌 우리가 죽지 않은 조선을 볼수 있겠습니까?)

리동백은 오늘의 승리를 이룩하기까지 수많은 심혈과 로고를 기울여오신 장군님의 거룩한 투쟁의 행적을 다시금 더듬었다.

열네살되시던 어리신 나이에 압록강을 건느시며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신 때로부터 어언 열두해, 항일혁명전쟁은 바야흐로 가장 찬란한 전성기를 맞고있었다.

그의 머리속에서는 장군님의 략전으로 될 자기의 첫 책에 써넣을 구절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장군님께서 계시는 한 조선은 반드시 살아나게 된다는것을 명백히 론증할 그 책의 마감은 여기 모인 뭇사람들과 2천3백만 온 겨레의 심정을 쪼아박은 이러한 구절로 끝맺을수 있을것이다.

《민족재생의 위대한 구성 김일성장군이시여, 부디 만수무강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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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전투승리경축 군민련환대회가 있은지 열이레가 지난 다음 압록강변의 간삼봉에서는 항일혁명전쟁사상 최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다.

미나미와 우에다가 파견한 적의 련합부대들을 여지없이 무찔러 조선인민혁명군의 무적강대한 위용을 만천하에 과시한 이 전투를 승리적으로 지휘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주력부대를 이끄시고 다시금 새로운 투쟁의 길에 오르시였다.

항일혁명전쟁의 최후승리까지는 아직도 8년세월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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