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장
만주땅엔 봄이 늦게 오는 대신 가을은 일찍 찾아든다. 그런 가운데도 1936년 가을은 여느해보다 별스럽게 일찍 찾아들었다. 8월중순을 넘어서자 《만주국》의 수도 신경(장춘)에도 갑자기 선기가 돌더니 8월말경에 이르러서는 해볕이 쨍쨍한 대낮에도 랭기가 가셔지지 않았다. 찌물쿠는듯 하던 대륙의 무더위는 며칠사이에 자취없이 물러갔다. 만주의 최고통치자 우에다 겡기찌로인을 열병같이 무서운 대륙의 무더위에서 구원해낼 사명을 띠고 여름내 그의 사무실을 지키고있던 두대의 선풍기도 마침내 그 초소에서 철수당하였다. 무더위가 계속된 지난 여름동안 내내 우에다대장이 바람을 요구할적마다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성실하게 바람을 주어왔던 그 물건들은 며칠전에 그만 지나친 성실성때문에 우에다로인의 노염을 사는 사달을 쳤다. 환갑이 지난 나이에 20대의 팔팔한 홍안의 장교와 짝을 무어가지고 정구장에서 신체단련에 열중하고있던 우에다는 2천여명의 공산군이 무송현성을 들이쳤다는 급보를 받자 자기 사무실로 달려들어와서 관동군 헌병대사령관 도죠 히데끼에게 전화를 걸어 그 급보가 사실인가를 확인해보고는 줄땀을 흘리고있는 자기를 뻔히 보면서도 제때에 바람을 주지 않고 멍청해있는 선풍기스위치를 쥐여비틀었다. 그가 바람을 달라고 하더라도 기온이 갑작스럽게 떨어진 사정을 고려하여 바람을 일으키지 말았어야 했을 그 물건들은 그렇게 분별있게 처신할만 한 지각을 못가졌으므로 마침내 우에다각하에게 감기기운을 입히고말았다. 으리으리한 일본륙군대장의 금술제복을 벗겨놓고보면 살붙이라고는 얼마 없는 예순한살의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 우에다는 이튿날부터 한주일동안 그 유명한 《주만 일본대사 관저》 겸 《관동군사령관 관저》라고 이르는 교회당모양의 자기 저택에서 괴뢰 《만주국》의 부의황제가 선물로 바쳐올린 금화로를 끼고 누웠다가 오늘아침 다시 사무실에 나타나자 즉시에 선풍기들을 치워버리라고 명령하였던것이다. 위엄있고도 호화롭게 꾸려져있는 그의 넓은 사무실에는 한창 무르익은 정오의 해볕이 스며들고있었으나 여러날동안 비워둔 사이에 제멋대로 배여든 랭기탓인지 아니면 이 방 주인인 우에다대장의 편치 못한 안색과 갑작스러운 그의 부름을 받고 와 앉아있는 《대륙의 거물》들의 활기롭지 못한 표정탓인지 전에없이 스산해보였다. 지금 우에다(1939년 관동군사령관직에서 철직)의 방에는 관동군 헌병대사령관 도죠 히데끼(제2차 세계대전시기에는 일본군국주의의 최고수뇌인 일본총리), 관동군참모장 이다가끼 세이시로(제2차 세계대전시기에는 관동군사령관) 그리고 《만주국》군정부 최고고문 사사끼소장이 와있었다. 만주를 쥐락펴락하는 수뇌들이 한자리에 모인것이다. 공산군부대가 무송현성을 들이쳤다는 불길한 소식에 접하면서 동시에 바라지 않는 급성감모에 걸려 앓아눕게 되였던 우에다는 새로 등장한 만주의 통치자는 대륙을 어떻게 다스리는가 하고 천하가 다 자기를 지켜보고있는 가운데 눈에서 불이 번쩍 일도록 볼통을 얻어맞은것 같은 모멸감을 묵새길수 없었다. 조선주둔군사령관으로 서울의 룡산일각에 있다가 관동군사령관 겸 《만주국주재 일본특명전권대사》로 된지 불과 다섯달밖에 안되는 우에다였다. 그자신이 언젠가 자랑삼아 말했던바와 같이 저 유명한 명치천황대에 산업진흥으로 번성하기 시작한 오사까에서 태여난 우에다는 사관학교와 륙군대학에서 군사교육을 받던 전세기말부터 40여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군대에 복무해오며 언제나 패배의 쓰라림이라는것을 모르고 살아왔다. 일찍부터 군의 주요한 권력요직을 차지해왔던 우에다는 4년전의 상해사변에서 일본륙군 제9사단장으로 혁혁한 무훈을 세운 다음부터는 (비록 그해 4월 천황의 생일날 상해신공원에서 있은 열병식때에 조선청년이 던진 폭탄에 다리까지 상하긴 했지만) 이름우에 《승전장군》, 《지용겸비의 장군》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달게 되였다. 이러한 그가 대륙의 최고권력자로 틀고앉은지 얼마 안된 때에 수십년간 적공해온 명예를 일순간에 훼손당한 무송사태에 접한것이다. 성급하고 변덕이 심한 우에다는 자기에게 수치스러운 모욕을 가한 공산군을 일시에 깨끗이 없애치울 결심밑에 바람을 쏘이면 병을 덧치게 되리라는 늙은 마누라의 우려를 단호히 일축해버리고 불쑥 자기 사무실에 나타나자 대륙의 수뇌급거물들을 불러들였던것이다. 《…현지주둔 헌병분견대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현성에 대한 공격을 단행한 적련합부대의 병력수는 l,800명내지 2천명정도로 추산됩니다. 이 공격전에는 김일성공산군을 주축으로 하여 반만항일구국을 표방하고있는 만순부대와 점산호부대 그리고 문명군부대들이 참가한것으로 알려지고있습니다. 현성에 대한 공격은 지난 17일 새벽 2시경 성시방위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는 동산포대를 장악하는것으로부터 시작되였다고 합니다. 적들이 감쪽같이 동산포대를 장악하였기때문에 성내의 아군은 적단이 현성에 대한 돌입을 개시하는 시각까지 아무것도 모르고있었습니다.》 《동산포대에는 수비병들이 없었는가?》 아직 채 떨어지지 않은 감기열탓으로 눈에 피발이 져있었지만 아픈 티를 내지 않고 신중하고 위엄있게 앉아 도죠헌병대사령관의 조사보고를 듣고있던 우에다는 평소보다 약간 갈린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목이 갈리고 쉰것 역시 감기기침의 후과였다. 《소대무력이 있었습니다.》 《만주국군들이였는가?》 《유감스럽게도 우리 관동군 수비병들이였습니다.》 우에다는 사납게 생긴 열기띤 눈을 내리깔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름기라군 전혀 없는 눈밑 살가죽이 아래로 축 처져내렸다. 량볼이 훌쭉하게 꺼져들어간 로장군의 좁고 걀죽한 얼굴을 지켜보면서 그가 혹시나 무엇을 더 묻지 않겠는지 하여 일시 기다리던 도죠는 량쪽으로 날카롭게 비껴갈라진 우에다의 새하얀 코밑수염이 전혀 움쭉거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것을 알아차리고는 이번 사건의 진상과 문제의 그 《불손한 모욕자》들에 대한 자기의 보고를 계속했다. 《그렇게 된데는 이번 현성진공작전에서 보여준 공산군의 전술적교묘성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아집니다. 공산군은 현성을 공격하기 몇시간전에, 즉 이달 16일밤 열시경에 300여병력의 일부 적단으로 무송에서 12키로정도 상거해있는 송수진을 속공으로 점령하였습니다. 현성공격을 위한 보조타격의 지점과 날자 그리고 시간선택은 경탄할만큼 면밀하고 정확하게 타산된것입니다. 공산군은 성시내에 있은 아군의 주목이 적시에 그쪽으로 돌려질수 있는 지점, 따라서 현성의 수비력량과 토벌력량이 불가불 분할파견될수밖에 없는 송수진을 보조타격지점으로 택하였습니다. 무송에 대한 공격자들로서 이 이상 더 적절하고 훌륭한 보조타격지점을 선택할수는 없을것입니다.…》 도죠는 16일은 일요일이며 10시는 취침시작시간이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나서 공산군의 전술적교묘성을 구체적으로 례증하였다. 《…사태는 공산군의 의도대로 되였습니다. 현성의 다까바시수비대장은 송수진에 응원부대를 파해놓고는 성시의 방비에 대해서는 방심하였습니다. 공산군이 감히 그 큰 성시에는 범접하지 못하리라고 오산하였던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심의 결과 동산을 지키는 포대의 수비병들은 은밀히 접근해 숨어있다가 불시에 달려든 공산군들에게 총 한방 못쏴보고 몽땅 생포당했으며 성내에 있던자들은 적의 련합부대가 성벽밑에서 일제공격을 개시하며 발포한 총성을 듣고서야 비로소 사태의 엄중성을 깨달았습니다. 성내에는 송수진에 응원대를 파하고도 아군수비대, 만주국군대와 경찰대 그리고 자위단… 등 도합 사오백을 헤아리는 병력이 남아있었고 그들이 박격포까지 포함한 상당한 중무기들을 장비하고있었으므로 견고한 성과 10개의 포대에 의거하여 적의 공격을 견제하면서 각기 증원부대의 도착을 인내성있게 기다렸더면 불명예스러운 대패를 면하였을수도 있었을것입니다. 그러나 아군은 다시금 실책하여 적군의 유인전술에 걸려들었습니다. 적군의 전술적인 철퇴를 패주로 오인하고 성외로 나가 어리석은 추격을 하였습니다. 적군은 아군을 성내에서 끌어내다가 매복포위환속에 몰아넣었습니다. 우리 관동군수뇌부에 무송사태가 보고되였던 시각에는 이미 현성수비대의 참패가 운명지어져있었습니다.》 도죠는 이야기를 계속하려다 그만두고 입술을 감빨았다. 그는17일 오전에 자기가 취한 긴급수습대책에 대하여 더 상세히 언급하기를 피했다. 그것은 자기가 관동군에 일대 치욕을 가져온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이 두려워 변명이나 늘어놓는것 같은 인상을 우에다나 이다가끼, 사사끼에게 티끌만큼도 주고싶지 않았기때문이였다. 도고한 자존심을 가지고있는 야심가이며 능란한 관리형의 군사가인 도죠는 겉으로는 우에다를 존경하고 사사끼나 이다가끼를 무시하지 않는척 하고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그들을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출신과 경력으로써 현재의 관등급과 지위에 오른 무능하고 무력한자들이라고 생각하면서 경멸하고있었다. 도죠는 비행대들과 각지 부대들의 출동정형에 대한 보고가 적힌 몇장의 종이를 넘겨버리고 간단히 출동의 결과만을 찍어 말하였다. 《비행기들과 각지 부대들은 긴급출동명령을 비교적 신속정확히 집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응원부대들은 교전현장에 널린 당지 아군의 시체를 걷어모으는 전장정리임무외에는 출동의 기본사명은 수행할것이 없게 되였습니다. 적의 련합부대는 아군의 송장들만 남겨놓고 유유하게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도죠는 자리에 앉으며 손수건을 꺼내 안경을 닦아끼고 입술을 훔쳤다. 마치 이번 사태의 진상에 대한 기본이야기는 끝났다는듯 한 태도였다. 무슨 일이건 면도칼로 베듯 날카롭게 맺고 끊을줄 아는 이 사나이에게는 《면도칼 도죠》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다. 만주국 최고통치자의 호화로운, 그러나 몹시도 음산해보이는 방안에는 불현듯 불쾌한 송장내가 꽉 들어차기라도 한것처럼 우에다대장도 이다가끼참모장도 사사끼최고고문도 얼굴들을 찡그린채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앉아들있었다. 한동안의 침묵을 남먼저 깨친것은 우에다사령관이였다. 약간 후들거리는 손으로 그자신이 백전로장의 표식처럼 여기며 매우 정하게 거두군 하는 위풍있는 팔자수염끝을 량쪽으로 천천히 비틀어 올려붙이고난 우에다는 자개무늬가 박힌 담배함뚜껑을 열고 그안에서 상아물부리와 함께 《아사히》 한가치를 집어냈다. 그 맞은편에 앉아있던 이다가끼가 자기 호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들고 일어서서 우에다대장앞으로 다가가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담배불을 붙이게 해주었다. 《한가지 첨부해서 말하고싶은것은 금번 무송현성에서의 참패는 만주국군의 비겁하고 배신적인 소행과 관련돼있다는 사실입니다. 다까바시는 비록 현명치 못하게 적을 상대했지만 아군수비대병사들은 최후까지 용맹하게 항전하였습니다. 단 한자도 투항한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성에 있었던 만주국군왕가부대 장병들은 스스로 투항했거나 무기를 버리고 도주하였습니다.》 도죠의 이 령리한 부언은 조야한 분노를 터뜨려 관동군최고통수자의 체면을 깎을번 했던 우에다대장한테 매우 고마운 처사로 되지 않을수 없었다. 약이 올랐던 우에다로인은 불쌍한 괴뢰군쪽에 대고 분노를 터뜨릴수 있었던것이다. 《칙쇼!》 왼손으로 물부리를 뽑아든 우에다는 오른손으로 탁상을 치고 성난 로장군답게 표표한 기상으로 일어섰다. 《대체 그자들은 언제부터 그렇게 비겁해졌단 말인가? 통화일대에서 가장 용감하다던 그자들에 대한 소문은 헛소문이였는가?》 도죠는 머리를 빳빳이 쳐들고 말할 때면 언제나 그런것처럼 심술사납게 입술을 피루며 대답했다. 《각하, 그자들이 용맹했다는것은 헛소문이 아니였습니다. 당지 주둔 만주군대대는 토벌에서 발휘한 집요성과 잔인성으로 하여 무송현내의 군소산림부대도당들에게 포악한 승냥이처럼 무서운 존재로 되여왔습니다. 그자들의 용맹과 공적을 평가하여 우리는 대대장인 왕가에게 각하의 명의로 표창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왕가가 김일성공산군에 의하여 징벌처단된 다음부터는…》 우에다는 슬며시 도로 앉으며 약간 얼이 빠진듯 한 눈으로 도죠를 퀭하니 쳐다보았다. 《그건 어인 일인가?》 턱이 떨어져내린것처럼 로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죠는 독살스럽게 미간을 찌프리며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였다. 분명히 지난달에 우에다에게 왕가가 존재를 마친 사실에 대하여 보고하였음에도 그것을 흘려들었던지 아니면 우심한 건망증탓으로 까맣게 잊어버렸는지 시끄러운 되풀이를 요구했기때문이다. (바지저고리같은 이런따위 령감태기는 집어치우는게 상책이지.) 도죠는 속으로 이렇게 씨벌이고는 귀머거리한테나 말하듯이 한층 목청을 돋구어 대꾸하였다. 《얼마전에 우리 헌병대사령부에 입수된 왕가의 한 비밀서신초안에 의하면 김일성은 금년봄에 무송지구에 나타나자 곧 그자에게 경고장을 발송하여 요지… 산림부대에 대한 토벌을 중지하라, 민간인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그만두라, 너의 관하부락들에서 진행하는 공산군의 제반 활동을 무조건 보장하라는 등의 지령을 하달하고 그 요구조건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가차없이 징벌하겠다는것을 경고하였습니다. 왕가는 용맹한자였으나 신화적인 김일성공산군에 대해서만은 괴이할 정도로 절대적인 공포감을 지니고있었습니다. 그자는 김일성의 요구대로 순종할것을 약속하는 비밀회답편지를 보내고 한동안 그대로 실행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입수된 서신초안이 바로 그것입니다.) 무송의 아군수비대장 다까바시는 6월중순경에 이르러서야 왕가부대의 행동에서 수상한 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배신행위가 우리에게 발각당할 위험을 감수한 왕가는 공산군사령관 김일성에게 다진 약속을 무시하고 다시 산림부대들에 대한 적극적인 토벌을 재개하고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목을 베여 장대에 매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대노한 공산군사령관 김일성은 산림부대로 가장한 징벌대를 파하여 그자를 무송에서 황니하자부근 산곡에 유인해내다가 이미 경고한대로 단호히 징벌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질겁한 서간도일대 만주국군제부대는 김일성공산군이 나타났다는 말만 들어도 투항하거나 도주하기가 일쑤이고 타방 산림부대들은 자진하여 김일성과의 련합을 추구하고있는것입니다.》 도죠의 이야기가 끝나기 바쁘게 사사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사끼는 자기가 《만주국》군정부의 최고고문이라는 자리에 허수아비로 앉아있는것은 아니라는것을 나타낼만 한 기회를 놓칠세라 도죠의 보고를 더 자상하고 설득력있는것으로 강조할수 있는 한두가지 자료를 첨부했다. 《대장각하, 김일성공산군의 위세는 벌써 여러달전부터 무송현내의 만주국군장병들과 경찰대원들로 하여금 황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공산군을 위해 복무하도록 변질시키고있는 형편입니다. 공산군은 지난 4월말경에 만강이라는 오지부락에서도 그곳 경찰대에 위협편지를 보내여 경찰대가 담장밖에 얼씬도 못하게 해놓고 저희들의 세상처럼 지낸바 있으며 6월 시난차에서는 백주에 성시를 점령하고 무력시위까지 벌렸으며 지난달에는 같은 현내의 대영 온천지에서 부근의 만군부대에 지령서를 하달하여 탄환과 피복류, 식량을 비롯한 다량의 군수물자들을 조달하게 하면서 한동안이나 매우 유족한 온천휴양생활까지도 집단적으로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만주국군이 각처에서 조선공산군을 토벌할 대신 도리여 그들의 지령대로 그들에게 봉사하고있는 까닭에 조선공산군은 나날이 강성해가면서 천하의 무적으로 행세하고있습니다. 따라서 민간인들은 김일성공산군을 무적의 강자로 떠받들어 올리고 아군과 만주국군들에 대해서는 야유하고 조소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빼빼마른 오른손의 두손가락으로 울기오른 이마를 받치고 초점없는 시선으로 탁상의 한곳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상아물부리를 빨고있던 우에다는 문득 괴여받쳐든 손가락에서 이마를 떼고 사사끼를 치떠보았다. 《야유를 받아 싸지, 싸단 말이요!》 우에다는 담배물부리를 뽑아들고 이렇게 내뱉듯 말하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빠져나와 여기저기 걸음을 옮겨짚다가 창문가로 다가갔다. 뒤짐진 그의 손은 후들후들 떨려 그 손에 쥐여져있는 담배의 가는 실연기는 밸밸 비탈리며 그의 구부정한 잔등으로 기여올랐다. 한참후에 돌아선 로인의 입에서는 그 무엇엔가 짓눌린듯한 이상하게 변성한 목소리가 가까스로 새여나왔다. 《도대체 나는 리해할수 없네. 내가 지난 3월에 관동군사령관직에 앉을 때 자네들은 나에게 김일성공산군은 전멸되고 그 존재를 이미 마쳐버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자네들보다 늙었지만 내자신이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문제거리들을 몇달어간에 잊어버릴만큼 기억력이 감퇴되진 않았네.》 시종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있던 이다가끼참모장은 우에다의 따져묻는 눈길이 자기에게 박히자 지체없이 일어났다. 《각하께서는 정확하게 기억하고계십니다. 김일성공산군의 괴멸과 동만공산유격구역의 완전소탕에 대한 실태보고를 올린것은 저였습니다. 그 당시 돈화 및 안도 산간오지들에서 김일성일파와 수차 조우교전한바 있는 우리 관동군토벌부대들의 통보자료들은 일치하게 김일성이 겨우 10여명 부하의 호위를 받으면서 우리 토벌부대들을 피해 산중을 떠돌아다니고있다는것을 지적하고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고 우에다는 이다가끼앞으로 몇걸음 다가섰다. 《내가 관동군사령관으로 취임하던 3월 당시에는 수하에 10여명의 부하밖에 없다던 김일성이 불과 다섯달이 지난 오늘에는 그대들이 말하는대로 강성한 대군을 이끌고 무송같이 작지 않은 만주국의 현소재지까지 쳐들어올수 있게 된 사실에 대해서는 대체 어떻게 설명할수 있겠나?》 《각하, 김일성공산군의 급속도의 강세현상은 저자신에게도 역시 잘 풀려지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하고 대답한 이다가끼는 도죠를 흘끔 돌아보았다. 《헌병대사령관, 자네한테도 역시 그것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인가?》 슬며시 제자리에 돌아와 앉은 우에다는 역시 도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제반 문제의 해명은 어차피 자기에게 의거할수밖에 없다는듯 한 배포유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천천히 일어난 도죠는 투실투실 살이 찐 가운데손가락으로 약간 처져내린 안경을 밀어올리고나서 역시 그 누구인가를 비웃듯이 입술을 피루며 침착하고 조리있게 말했다. 《조선공산군이 반년도 못되는 사이에 오늘과 같이 강성해질수 있은 기본요인은 그들의 사령관인 김일성의 무시할수 없는 특출한 포옹력과 인간적매력에 있지 않는가를 생각케 합니다. 조선공산군주력부대에 소속되여있는 공산군 병졸들자신이 여러촌 민간인들에게 자랑삼아 하였다는 말들을 수집해본데 의하면 김일성은 북만에서 무송으로 은밀히 이동해 나올 때 본래 통솔하던 군졸을 거의다 북만공산부대들에 떨궈두고 자기 휘하에 도합 15명정도의 약소한 병력밖에 데리고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송지구에 나오자 공산군대렬내에서 이단자의 락인을 받고 죽을 운명에 처했던자들을 신임하고 포섭하여 구원해주는것으로부터 새로운 주력부대를 편성하는 사업에 착수했습니다. 일찌기 우리 관동군이 이 만주땅을 점령하고 이 대륙에 만주국을 만들어낸 직후에 우리 관동군 첩보부에서는 공산분자들에 대한 정탐과 내부와해를 목적으로 〈민생단〉이라고 명명한 조선인 민간간첩단체를 조직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각방의 불가피한 소인에 의하여 이 단체는 몇달 존속시키지 못하고 형식상 곧 해산해버렸으나 첩보일군들의 목적은 그들이 예상한것보다 비상히 큰 효과성을 나타냈습니다. 우리 첩보일군들의 모략에 속은 대국민족주의분자들은 약간이나마 자기 비위에 거슬리는 조선인이면 례외없이 〈민생단〉으로 몰아 우리의 간첩으로 선포하고 무자비하게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를 기쁘게 한 그와 같은 살륙행위는 동만의 광범한 지역에 파급되였습니다. 많은 조선인핵심공산분자들을 우리는 우리자신의 손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없애치울수 있었습니다. 결국 공산대렬내부에는 불신임이 코레라처럼 만연되고 항시적인 불안이 조성되였습니다. 만약 오늘까지도 그것이 지속되였더면 우리에게는 평온이 도래하고 대륙에는 우리가 바라는 질서가 이미 수립되였을것입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지난해봄 그들자신에게 엄중한 후과를 가져온 그 사태의 진상을 명철하게 규명해나섰고 올해봄 무송지구에 나와서는 요행 살아남은 〈민생단〉혐의자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무조건적인 신임을 베풀면서 그들에 대한 사형론고장으로 되고있었던 〈민생단〉혐의문서들을 손수 그들앞에서 소각해버렸다는것입니다. 버림받고 죽을번 했던자들이 김일성의 품안에서 살아났습니다. 이자들이 김일성의 휘하에 들어서서 새 주력부대의 골간을 이루게 되였으며 이 소문이 사처에 퍼지면서 각지에 분산되여있던 무장조선인들이 김일성의 휘하에 결집되였습니다. 이같이 되여 김일성이 친솔하는 공산군주력부대는 급속도로 세력이 커지고 군력이 강해진것입니다. 김일성은 새로운 주력부대를 편성하고 군사적맹활약을 전개하는 일방 2천3백만 조선인들을 한데 묶어세워 거대한 반일항쟁세력으로 만들 구상밑에 지난 5월초 무송현의 모지점에서 조국광복회라고 명명되는 거족적인 구국민족통일조직을 창립했다고 하는데 그 세력이 또한 놀라울만큼 급속히 확대되여가고있습니다. 그러므로 김일성의 군력은 순전히 그의 부하들의 수자로써만 계산할수 없습니다. 불원간 그는 2천3백만 조선인전부를 제국을 반대하는 항전에 궐기시킬수 있습니다.》 깍지낀 두손으로 턱을 받치고 얼이 빠진듯 한동안이나 멍청해 앉아있던 우에다는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두손을 내려 탁상을 짚으며 허리를 펴서 앉은 키를 늘궜다. 동시에 그의 얼굴에는 위엄스러운 표정이 그려졌다. 《김일성부대는 지금 어디 있는가?》 《오늘 새벽에 보고되여온 정보에 의하면 지금도 여전히 무송현 남부지대의 어느 밀림속에 있는것으로 짐작됩니다. 김일성부대는 어제아침까지 며칠동안 현내의 만강이라는 촌락에서 휴식하였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가무와 연극 공연까지 진행하여 금번 무송현성공격의 전승을 경축했다 합니다.》 갑자기 탕― 하고 책상을 치는 소리가 났다. 우에다가 강마른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친것이다. 《심하군! 이건 너무 심하단 말이야!》 우에다는 이마와 목에 굵다란 피줄이 살아나 풀떡거리며 씩씩거렸다. 두주먹으로 책상을 꽉 눌러짚고 일어선 그의 온몸은 분노로 하여 부들부들 떨렸다. 《우리를 조롱해도 분수가 있지! 어디서 감히 전승경축공연까지?》 우에다가 모진 분노를 터뜨릴 때에는 어떠한 표정을 짓는것이 상책이라는것을 잘 알고있는 세 거물보좌관들은 각기 자기들에게 어울리는 자세와 표정으로써 그의 욕설을 공손히 받아들였다. 《도대체 자네들은 분개심도 없는가? 대륙의 맹주라는 우리 관동군이 이게 무슨 망신인가? 김일성부대가 아무리 많은들 수십만 우리 관동군에 비기겠는가? 김일성이 제아무리 출중하단들 우리 관동군을 당할 군사를 어디서 꾸렸겠는가? 언제부터 자네들은 모두 조선공산군사령관앞에서 시라소니가 돼버렸나?》 《…》 《당장 김일성부대의 행처를 찾아내고 그들을 전멸시키라.》 관동군사령관은 단호히 명령을 내렸다.
한번 노염을 내게 되면 좀처럼 갈앉을줄 모른다는 관동군사령관 우에다 겡기찌대장의 엄명에 따라 대거출동한 관동군과 만주국군 및 경찰수색부대들이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행방을 찾으려고 무송현안의 산과 골짜기들을 샅샅이 뒤지며 피눈이 되여 돌아치고있을 때 사령관 김일성장군님께서 친히 거느리신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봄여름내 지내온 무송땅을 뒤에 남기고 압록강기슭으로 자리를 옮겨가고있었다. 벌써 이해초 북만의 남호두를 떠나실 때부터 조종의 산 백두산에 나가 그곳을 광복성전의 본거지로 삼고 항일대전의 불길을 더 높이 지펴올리실 원대한 뜻을 품고계신 장군님께서는 지난 몇달간의 면밀한 준비끝에 마침내 백두산으로의 최종행군길에 오르신것이다. 동강회의 직후인 지난 5월말에 장군님의 특명을 받고 백두산지구로 떠나갔던 김주현이네 탐색선발대가 근 석달동안 백두의 험산준령을 샅샅이 훑어가며 가장 안전하고도 믿음직스러운 밀영후보적지들을 탐색하고 부대의 이동통로들을 개척한 동시에 국경일대의 적정을 알아보고 각계층 주민들의 동향을 료해장악해가지고 사령부로 돌아온것이 바로 며칠전이다. 그 백두선발대가 도착하자 지체없이 전체 주력부대에 장군님의 출발명령이 내려진것이다. 1936년 8월 27일 때늦은 감자꽃이 한창 피여있는 무송현 동남단의 마지막마을인 만강부락에서 출발한 주력부대는 살찐 산천어들이 급류의 사품속에서 기운차게 뛰여오르군 하는 만강천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가 그날밤을 만강천상류의 개버들숲속에서 숙영하였고 이튿날에는 백두산지맥이 서쪽으로 뻗어내리며 장엄하게 펼쳐놓은 높고 넓은 고원지대의 울울창창한 밀림속에 스며들었다. 이 높은 산지에서는 계절에 민감한 구름나무와 마가목들이 남먼저 울긋불긋한 가을빛 단장을 하고 유격대원들을 맞아들였다. 차거운 밤이슬에 여름군복을 축축히 적시며 선기보다는 오히려 추위속에서 그날밤을 지낸 행군대렬은 사흘째 되는 날 새벽에도 일찌기 떠나 그 가을빛 짙은 깊은 밀림속을 땀나도록 헤쳐나갔다. 갈증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앞에 샘물이 나타난것을 기회로 하여 행군하던 대렬에 짧은 휴식이 선포되였다. 총과 배낭외에도 저저마끔 천막이며 소랭이며 재봉기따위의 자기 직분에 해당하는 덧짐들을 지고 땀김들을 날리며 걷던 유격대원들은 휴식구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여기저기 짐들을 내려놓고 샘물곁으로도 달려가고 담배들도 피워물었다. 《이봅세,〈만강〉동무!》 벗어진 색이 바랜 여름군모로 코수염에 묻은 물방울을 훔치고있던 《대통령감》이 무슨 일로인지 갑작스럽게 자기를 부르며 잠간 기다려달라는듯 손짓하는바람에 저윽 놀란 만강출신의 신입대원은 담배를 말려던 손을 엉거주춤한채 이켠을 돌아다보았다. 《내 딴걸 줄테니 바꿔쓰라구. 이런 종이가 또 있소?》 그제 떠난 만강마을에서 입대한 토스레바지저고리 신입대원은 신문지쪼박지를 내주고 대신 자기한테서 가진 하얀 창호지쪼박을 수첩갈피속에 잘 건사해두는 《대통령감》을 의아스럽게 쳐다보았다. 《그게 다오다. 건 어따 쓰오다?》 《이런 백지엔 글을 써야 해.》 《글이요? 그렇게 쬐꼬만 종이쪼박에다?》 《이사람이 아직 문세를 모르는군. 하여튼 앞으로두 혹시 이런 흰 종이쪼박지가 생기거들랑 망탕 써버리지 말구 나한테 와서 바꿔쓰라구. 알았지?》 옆에서들 유쾌한 웃음소리가 났다. 그러나 입대한지 며칠 안되는 만강내기젊은이한테는 《대통령감》의 말뜻이 리해되지 않는지 더벅머리를 기웃거렸다. 그는 자기앞에 누가 서있는지를 몰랐던것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수많은 사람들가운데서 사령부 비서처의 출판소 책임자인 《대통령감》만큼 종이를 아끼는 사람은 없었다. 글을 쓸수 있는 종이라면 나무잎사귀보다 더 작은 종이쪼박이라도 잘 간수해두었다가 필요한 때 요긴하게 사용하군 했다. 아무리 작은 종이쪼박이라도 글씨를 깨알같이 박아가며 앞뒤면을 다 쓰군 하는 리동백이였다. 그는 종이에 담배를 말아 피우는적이 없었다. 글을 쓸수 있는 종이는 절약하느라고 아꼈고 글을 쓸수 없는 종이는 방금전과 같이 글을 쓸수 있는 종이와 바꿔가지기 위해서 아꼈다. 그대신 담배는 언제나 자기의 몸에서 떼여두거나 잃어버린적 없는 그 멋진 의문부호같이 생긴 파이프로 피우군 했다. 오랜 애연가인 리동백은 자기에게 《대통령감》이라는 칭호까지 붙게 한 그 파이프를 끔찍이 사랑하고 귀중히 여겼다. 그 대통이 적지 않은 종이를 절약하게 하여 그가 사령부 출판소 책임자로서의 사명과 인민혁명군력사저술가로서의 사명을 수행해나가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는 고마운 생각으로 하여 그 사랑이 더구나 강했던지 모른다. 리동백은 그 귀중한 대통과 언제나 윤이 반들반들하게 닦아 건사하는 자기의 권총을 제몸에서 순시도 떼여낼수 없는 혈육마냥 소중히 여겼다. 새로운 사람이 그와 친해진 기회에 가족이 있느냐고 물으면 리동백은 둘이 있다고 대답하군 했다. 《보게, 우리 아들일세.》 리동백은 붉은 가죽갑속에서 자그마한 윤기나는 권총을 자랑스럽게 꺼내보이군 했다.미혼진밀영에서 드디여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기를 결심하고 장군님앞에 입대청원을 드렸을 때 장군님께서 친히 그에게 입대기념으로 특별히 선사해주신 권총이였다. 《부인도 계시는가요?》 《아무렴 있구말구. 좀 늙긴 했네만 오래 정든 안핼세.》 《어디 계시는가요?》 리동백은 걸죽한 롱말을 곧잘하였다. 《자넨 남의 안해를 탐낼 사람이 아닐테지. 나이는 들었어두 상기 꽤 이쁘다네. 자, 보게 어떤가?》 그리고는 입에 물고있던 자기의 애용물을 내보이군 했다. 그 《안해》가 곁에 붙어있지 않으면 그는 순시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일하지 못하였다. 대통을 입에 물고있거나 손에 들고있어야만 사색할수도 있고 글쓸수도 있다는 《대통령감》이였다. 요즘은 그가 즐겨 자기 딸이라고 자랑삼는 식구가 하나 더 늘었다. 동강회의후 전사한 리북철의 후임으로 경위대장책임을 맡고있는 《보따지》 리동학이가 시난차전투에서 로획한 전리품들을 나누어줄 때 장군님께서 친히 고르시여 그에게 주신 새 금촉만년필이였다. 어느 누구보다 글을 많이 쓰는 《대통령감》은 그 만년필이 어디 바위에라도 부딪쳐 깨질가봐 재봉대에 특별주문하여 만든 빨간 비로도주머니에 넣어가지고 품에 건사하군 했다. 《…저 아바이가 실은 제 가족이라군 아무두 없네. 부모도 처자도 다 잃었지. 늘 저렇게 웃으며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지만 저 아바이의 마음속 한구석에는 누구에게도 짝지지 않을 슬픔이 있네.》 만강의 신입대원에게 누가 자기에 대해 무슨 귀속말을 해주고있는지 알지 못하는 《대통령감》은 간단한 선전문초고쯤은 능히 쓸수 있을 꽤 큰 종이쪼박지를 얻은 만족감을 감추지 않으면서 자기 배낭곁으로 돌아가다가 코를 벌름거리며 멈춰섰다. 《왜 그리구 서있습니까?》 샘물을 마시고 돌아서다가 《대통령감》과 맞부딪칠번 했던 김주현이 얼결에 멈춰서며 묻는 말이다. 리동백은 그의 물음엔 대답없이 되물었다. 《군수관동무, 어디 이 어방에 하천같은게 있지 않소?》 선발대책임자로서 장백땅으로 넘어가는 통로도 개척한 사령부군수관 김주현은 어느 누구보다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였다. 그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요. 만강천에서 벗어져서는 이 샘물 하나밖에 없었는데.》 《헌데 이 깊은 산중에서 웬 물고기비린내요?》 역시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아보던 김주현은 손에 벗어든 모자안에 뭣인가를 담아들고 들쭉나무덤불을 헤치며 불쑥 나타난 나이 지숙한 사령부 작식대원 장철구와 젊은 재봉대원 김확실을 보자 알만 하다는듯 싱긋 웃었다. 《장본인이 저기 오는것 같습니다. 그제저녁에 만강천개버들숲속에 숙영지를 정했을 때 〈보따지〉랑 몇몇 경위대동무들이 산천어를 낚지 않았습니까!》 《옳지, 그덕에 어제 아침 우리 사령부성원들이 산천어국을 맛봤지.》 《틀림없이 철구아주머니가 그 산천어를 더러 소금을 쳐서 비상용으로 배낭속에 꿍져넣어뒀을겝니다.》 두사람이 자기네를 두고 수군거리며 수상쩍게 웃는것을 본 장철구와 김확실은 웬 영문인지 몰라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온! 이 거미…》 거미줄들이 붙어있는 김확실의 희벗하게 퇴색한 여름군복 한쪽 어깨자락에서 벌벌 기여다니는 새까만 거미 한마리를 발견한 장철구는 순박한 웃음을 지었다. 《이 거미를 보시구들 웃으신가봐.》 장철구는 손가까이에 뻗어있던 풀대끝을 뽑아들고 그것으로 거미를 떨어주려 했다. 《떨어버리지 말아요. 나좀 보구요!》 샘물을 가득 채워넣은 군용물통을 들고 지나가던 라명희가 그 무슨 굉장한 구경거리를 놓쳐버리기나 할듯이 바쁜 소리를 치며 달려들어 풀대를 쥔 장철구의 손목을 붙잡았다. 달덩이같이 환하고 예쁘게 생긴데다 활달하고 무엇에 대해서나 두려워하지 않는 라명희는 녀성중대지휘관들가운데서 가장 젊은 처녀소대장이였다. 《아니 소대장동무는 생전 거미를 첨 보는 사람같구만.》 라명희에게 팔목을 잡힌 장철구는 어처구니없어 했다. 《이렇게 깊은 밀림속에서 거미를 본다는게 얼마나 희한한 일이예요. 더군다나 거미가 내리는걸 보게 되면 반가운 손님을 맞는댔는데… 그렇지요? 〈대통〉아바이!》 그에게 거들리운 리동백은 혀를 끌끌 찼다. 《원 저런! 녀성중대의 한다 하는 쌩쌩한 소대장도 그런 미신같은 말을 믿우?》 《나라구 왜 그런 말을 믿고싶어질 때가 없겠어요? 이게 2련대 동무들을 맞게 될 징조인지 알겠어요?》 교하방면에 가있는 2련대사람들, 그중에서도 오라비나 다름없는 권영벽의 소식을 몰라 궁금해 하고있는 라명희다. 이 활달하고 씨원씨원한 미모의 녀대원은 권영벽이 동만의 옹구일대에서 지하공작사업을 할 때부터 권영벽을 친오빠처럼 따르며 지내였고 사내자식없는 그의 아버지 역시 권영벽을 아들 맞잡이로 여긴 남다른 사연을 간직하고있었다. 지난해에 량부모를 적들의 《토벌》에 단꺼번에 잃어버린 라명희는 멀리 가있는 권영벽이밖에는 이 세상에 더 가까운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권영벽이가 속해있는 2련대는 이미 지난 봄부터 주력부대에 편입되게 되여있었으나 무송현성전투를 진행할 때까지도 감감무소식이여서 사령부에서는 얼마전에도 다시금 그들에게 주력부대로 어서 오라는 기별을 보냈다. 그런만큼 2련대사람들이 이즈음 불쑥 나타날수도 있는것이다. 자기의 어깨에 거미가 붙어있는것이 징그러워 눈살을 잔뜩 찌프리고 어서 그만하고 제 어깨의 거미를 떨어버려주기를 기다리고있던 김확실이도 라명희의 말이 떨어지자 순간 눈빛이 반짝 빛났다. 하지만 말이 적은 김확실은 자기 마음속에 떠오른 그 순간의 감정을 라명희처럼 입밖에 드러내놓지 않았다. 《정말 모를 일이예요. 집도 없고 인적도 없는 이처럼 높고 깊은 밀림속에 어떻게 요런 거미가 있을가요?》 라명희는 장철구의 손에서 앗아쥔 풀대로 김확실의 어깨에서 잔태미가 줄레줄레 달려있는 거미줄과 함께 거미를 떼여내들었다. 《흠, 소대장동무는 그 미물들이 꼭 집 있는데서만 사는줄 아는군. 그만큼 산속을 다니면서 얼굴에 감겨드는 거미줄성화를 받아 봤으면 거미란 놈이 안사는데가 없다는것쯤은 알았어야지.》 아래로 데룽데룽 드리웠던 녹두알만 한 거미가 제가 뽑아냈던 명주실같이 가는 거미줄로 풀대를 타고 씽 하니 올라와 보동보동한 명희의 손등으로 기여드는바람에 라명희는 질겁하여 황급히 손을 털었다. 그 꼴을 보고 언제나 조용하고 말수 적은 장철구까지도 소리내여 웃었다. 《저게 뭘가?》 웃음들이 가라앉았을 때 귀가 밝은 김확실이 여러 사람의 주의를 멀리서 점점 가까와지고있는 소리에로 이끌었다. 다들 입을 다물고 귀를 강구었다. 《비행기발동소리로구만.》 김주현이 먼저 알아맞혔다. 아닌게아니라 붕붕거리던 그 소리는 더 커지면서 부릉부릉하는 뚜렷한 비행기발동소리를 나타냈다. 《라명희동무가 거밀 보구 반가운 손님이 찾아올거라더니 달갑지 않은 불청객이 날아드는군. 저것 보, 명희동무의 말이 틀리지 않나?》 리동백은 입에 물었던 대통을 뽑아들고 그것으로 소리나는 허공을 가리키며 라명희에게 조롱하듯 한눈을 찡긋했다. 《저놈들이 요즘은 별스럽게 매일 날아도는군요.》 김확실은 하늘을 불안스럽게 쳐다보며 혼자소리로 뇌였다. 《우리를 찾아내자구 지랄질치는거요. 한들 별수 있소? 하늘도 안뵈는 이 밀림속으로 우리가 장백쪽으로 빠져나가고있는걸 봐낼리 없지.》 리동백의 말대로 수색정찰기는 귀가 멍멍하도록 야단스럽게 꽈릉거리며 머리우로 낮추 지나갔지만 비행기의 동체는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태풍이나 만난듯이 태질하며 요동치던 나무숲이 황이 든 잎사귀들을 와실와실 떨어뜨렸다. 《허허,이것 보지!》 자기의 군복 가슴팍에 날아와붙은 새빨간 단풍잎사귀를 본 리동백은 입을 헤벌쭉 벌리며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우리를 잡아내자고 날아온놈이 내 가슴에 붉은별훈장을 달아주고 가는군. 그놈이 나한테도 무송현성전투에서 적병 두놈을 갈겨제낀 공훈이 있다는걸 알았던 모양이야.》 실로 그 단풍잎사귀는 가슴에 달린 붉은별모양의 훈장같았다. 《옳지, 주현동무의 어깨엔 큼직한 누런 왕별 하나가 달렸군. 백두산밀영후보지탐색을 위한 선발대책임자로 큰공을 세웠으니 큼직한 별을 달만 하지. 어허, 사령부작식대를 책임지고 그간 남모르는 공로를 세웠다고 철구동무의 가슴팍에도 누런게 하나 달렸구만. 내것보단 좀 작은걸 보니 공은 내가 더 많았던가보다.》 리동백의 우스개소리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우리를 찾아내라구 저놈을 날려보낸 관동군사령관각하께서 저놈이 우리한테 훈장을 달아주고왔다는걸 알면 복통이 터지겠군. 저 쉬파리같은놈이 철구동무의 배낭에서 나는 물고기비린내를 맡구 비슷하게 방향잡아 날아오긴 했던것 같은데 내 이 담배내에 마취돼서 머리가 어떻게 좀 잘못됐던 모양이여.》 《아이참, 이 아주버니가!》 또다시 터져오르는 폭소속에 장철구는 얼굴이 새빨개서 종주먹으로 《대통령감》의 잔등을 한대 가벼이 쥐여박았다. 그렇게 무참해하는 가운데도 웃음을 참지 못해 그 어질게 생긴 눈에 눈물이 글썽했다. 《흠, 뭣들을 모자안에 담아들고 왔는가 했더니 들쭉이로군. 한대 얻어맞은 봉창을 해야겠소.》 금시 엄살을 피우며 아픈 시늉을 하던 《대통령감》이 장철구와 김확실이가 들고있던 모자안을 보더니 군침을 삼켰다. 《이건 안됩니다. 확실동무가 따온걸 잡숴요.》 장철구는 순간에 정색해지며 두말도 붙여볼수 없게 딱 잘라 말하더니 들쭉이 담긴 모자를 여며쥐고 샘물가로 걸어갔다. 들쭉열매를 샘물에 깨끗이 씻어낸 장철구는 그중 잘 익은 충실한 열매를 골라서 새하얀 가제천으로 만든 깨끗한 손수건에 정성스럽게 싸쥐고는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저쪽 어디로인가 걸어갔다. 무엇이 생기건 또 무슨 일을 하건 먼저 장군님부터 생각하는 저 몸매 자그마한 사령부작식대원이 들쭉열매를 들고 어디로 가는지를 보지 않고도 넉넉히 짐작해낸 리동백은 경건하고 친근한 눈빛으로 그의 뒤모습을 지켜보다가 들쭉을 잡숴보라고 권하는 김확실의 말에 머리를 가로저었다. 《어서들 자시오. 나야 말이 그렇지 담배맛을 잡칠라구 그걸 입에 대겠소?》 《아이, 달콤하기두!》 김확실의 모자안에서 들쭉 한알을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라명희는 그것을 꼴깍 삼키고나더니 눈을 새물거리며 해사하게 웃었다. 가지색 들쭉물이 오른 고운 이발들이 가지런히 드러난다. 《한알만 잡숴보세요. 그 쓰거운 담배맛에 비기겠어요?》 라명희는 김확실의 모자안에서 들쭉열매를 한웅큼 쥐여들고 리동백에게도 쥐여주고 김주현에게도 쥐여준다. 《정말 거기도 이런 들쭉이랑 있어요? 우리가 이제 가서 자리 잡게 되리라는 새 밀영후보지말예요?》 《있구말구. 백두산일대는 그 어디나 들쭉천지요.》 《흐르는 물도 가까이 있어요?》 김확실의 물음이다. 《아무렴, 수정같이 맑은물이 소리치며 흘러내리는 곳이요. 물맛도 좋고 물빛도 좋아서 그 물로 음식을 지으면 기막히게 맛있구 재봉대동무들이 군복천감에 물감을 들이면 색이 곱게 들거요.》 《그건 압록강물인가요?》 《소백수골을 흘러내려 압록강에 합쳐드는 물이니 결국 압록강물로 되는 셈이지. 이제 가보면 알겠지만…》 자기들곁으로 돌아오는 장철구아주머니의 기색이 아까와 달리 좋지 못한것을 본 김주현은 하던 이야기를 중둥무이하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주머니, 무슨 언짢은 일이라두 생긴게 아닙니까?》 장철구는 그를 바로 쳐다보지도 않고 심란해진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째선지 장군님의 안색이 여느때 같지 못하셔요. 몸이 편찮아서 그러신지?…》 뜻하지 않던 이야기를 들은 여러 사람은 잠시 입이 얼어붙었다. 《간밤에 혹시 감기기운을 입으신게 아니요? 동무가 장군님을 모시고 간밤에 그 천막에서 숙영했지?》 리동백이 김주현을 돌아보았다. 《네, 그런데 저는 추운줄 모르구 잤는데…》 여러 사람의 의혹을 자아낸 장군님의 안색의 변화가 무엇때문인지 그 까닭을 해명해내지 못한채 휴식을 그만하고 행군대렬을 정돈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숲속에 길게 늘어선 대렬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리도 쉬우고 갈증도 풀고난 대원들은 마음도 걸음도 가볍게 숲속을 헤쳐나갔다. 그러나 누구보다 더 많이 웃고났던 리동백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어찌하여 장군님의 안색이 여느때 같지 못하신것일가?) 장철구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그렇게 되새겨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자기가 얼핏 장군님을 뵈왔을적에도 그이께서는 심각한 표정이시였던것 같다. 늘 인자하고 맑은 미소가 떠돌고있던 그 비범한 안광에 여느 때와 달리 한줄기 짙은 그늘이 비껴있었던듯한 느낌이다. (모든 사람들이 걸음도 가볍게 마음도 즐겁게, 웃음도 가득안고 행군해가고있는 이 길에서 장군님께서는 어찌하여 안색이 좋지 못하신것일가?) 지나온 모든 일은 장군님께서 예견하셨던대로 다 잘되여왔었다. 주력부대는 억세게 자라났고 사람들은 활기를 띠고 적들은 공포에 질렸다. 무송땅에서의 군사활동을 종결지은 무송현성진공전투에서는 거대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승리를 경축하여 만강에서 벌린 연예공연도 기막히게 잘 되였다. 이 행군도 잘되여가고있다. 아무리 웃고 떠들썩하며 걸어도 적들에게 알려질 념려없는 이 행군길에 무슨 걱정거리가 있을것인가? 장군님과 관련되여있는것이라면 그 어떤 사소한것일지라도 죄다 알고있어야 한다는 의무를 스스로 자기에게 지워놓고있는 리동백은 이 중대한 행군길에서 장군님의 신상에 일어난 변화가 어디에 기인하는지를 모르고있는것이 안타까왔다. 어쩐지 자기가 지금 력사의 황금싸락을 놓치고있는것만 같았다. 그것조차 모르면서 어찌 후날 무송땅에서 장백땅으로 넘어가던 오늘의 이 행군에 대하여, 저 먼 북만의 남호두에서부터 시작하여 국경연안까지 이르는 이 뜻깊은 장구한 원정의 마지막 행군에 대하여 쓸수 있겠는가? 무엄함을 무릅쓰고라도 꼭 알아둬야겠다고 결심한 《대통령감》은 행군종대에서 벗어져나와 경위대원들속에 끼여 행군하시는 장군님께로 찾아갔다. 그 무슨 생각에 골똘히 잠기신채 걸음을 옮기시던 장군님께서는 풀숲을 헤치며 앞으로 다가드는 그를 보시자 뜻밖이시였던듯 약간 놀라와하시는 표정을 지으시며 나이든분이 어디로 이렇게 서둘러 앞질러 가는가고 물으시였다. 《장군님을 뵈옵자고 왔습니다.》 《나를 말입니까?》 장군님께서는 걸음을 주춤하시더니 약간 옆으로 길을 비키시며 그를 옆자리에 들어서게 해주시였다. 《같이 걸으면서 들어봅시다. 갑자기 무슨 긴한 사정이 생겼습니까?》 황송스러운대로 《대통령감》은 그이께서 권하시는대로 장군님곁에서 나란히 걸음을 옮기며 대답을 드렸다. 《고맙습니다. 제가 주책없이 찾아와서 장군님께 방해되지 않겠는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행군중에 찾아온걸 보니 매우 긴요한 일인것 같은데 뭔지 말씀해보십시오.》 《저, 다름이 아니라…》 그렇게 운을 떼는 리동백의 표정 역시 심각하다. 《…장군님께서 신색이 여느 때같지 못하신것때문에 장철구동무랑 김주현동무랑 여러 동무들이 걱정들을 하고있습니다. 어디 편치 못하신지 기탄없이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장군님께서는 가벼운 웃음을 머금으시였다. 《내 기색이 좋지 않다고? 선생눈에도 그렇게 보입니까?》 《네.》 《괜한 걱정들입니다. 나는 아무런 불편한데도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불쾌한 일이나 상서롭지 않은 일이라두 예견되시는지? 제가 알아도 무방할것이면 말씀해주십시오.장군님의 신상에서 일어나는 모든것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저 하는 저의 심정과 립장을 리해해주신다는 믿음때문에 외람된 청을 또 이렇게 드립니다만…》 장군님께서는 언제나와 같이 그의 마음을 너그럽게 헤아려보시고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시였다. 《알만합니다. 내가 아마 오늘 좀 어두운 기분을 감춰내지 못했던 모양같습니다. 선생은 오늘이 며칠인지 알겠습니까?》 《8월 스무아흐레입니다.》 《옳습니다. 8월 29일입니다. 이날이 어떤 날인지는 나보다 퍽 이상되는분인 선생이 더 잘 기억하고계실겁니다.》 리동백은 행군대렬에 끼여있다는것조차 잊어버리고 자기도 모르게 일순간 멈춰서버리고말았다. 8월 29일! 26년전의 이날, 땅에 끌리는 아버지의 지게를 지고 읍거리에 갔던 어린 그의 눈앞에는 하늘땅이 뒤집힌듯 한 환각을 일으키는 기막힌 광경이 펼쳐졌다. 감투를 쓴 할아버지들과 토목수건을 쓴 할머니들, 상투를 튼 아버지들과 낭자를 튼 어머니들, 외태머리를 늘인 형님들과 누나들… 길가던 사람들과 읍거리에 모여들던 사람들, 집안에 있던 사람들모두가 하얗게 거리바닥에 떨쳐나와 퍼더버리고 앉아서 주먹으로 땅을 치고 가슴들을 두드리며 이제는 영영 망하였다고, 이제는 조선이 다 죽었다고 소리치며 대성통곡하였다. 《시일야방성대곡》이 구천에 사무친 그 원통한 망국의 날, 3천리 온 강토는 치욕에 몸부림치고 천수백만 겨레는 슬픔의 눈물로 빼앗긴 강토를 적셨다. 이제는 내 나라가 없고 내 땅이 없는 겨레의 자식이라는, 고아라는 자의식보다 더 무섭고 더 서러운 자감이 가슴속에 밀려든 그날 그 순간부터 푸르던 하늘도 아름답던 강산도 희망찼던 삶도 죄다 빛을 잃었다. 어찌하여 하늘은 그렇게 갑자기 캄캄해져버렸던가… 《장군님, 제 매일같이 일기를 쓰면서도 오늘이 무슨 날인줄을 깜빡 잊어버렸습니다. 철없는 아이들처럼 저희들은 조국땅 가까운데로 간다고 그저 좋아서 웃고 떠들면서 장군님의 깊은 심정도 헤아려보지 못했습니다.》 리동백은 장군님앞에 머리숙였다. 《영원히 잊지 못할 일이라 해서 생활의 매 순간마다 노상 그 한가지 일만을 생각는다면 우리는 언제 한번 웃어보지 못하며 살아야 할겝니다. 사람마다 제나름으로 각이한 시각에 환기된 감정에 따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속상해하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가기 마련인것 같습니다. 나는 그 일을 오늘아침부터 생각했지만 선생은 오늘 일기를 쓸 저녁무렵에 생각할수 있을것입니다.》 그를 위안하듯 이렇게 말씀하신 장군님께서는 잠시 동안을 두셨다가 어조를 바꾸어 말씀을 이으시였다. 《스물여섯해전 오늘 우리 나라에 어떤 수치와 모욕과 처참한 슬픔이 닥쳐왔던가를 돌이켜보면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것 같습니다. 전쟁에 져서 먹히운것도 아닙니다. 눈을 뻔히 뜨고있으면서 생눈을 뺏기고 목을 졸리운 셈입니다. 식민지의 올가미에 죄여 우리 조선이 죽어가고있는 정상을 생각하면 가슴에서 피눈물이 솟구칩니다. 그러나 이제 조선은 살아날것입니다. 조선을 살려내자고 우리가 이렇게 가고있는데 어째서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백두산에 나가 거기에 틀고앉아 놈들을 넋살이 나게 조겨대면서 2천3백만 우리 겨레를 조국광복회의 기치아래 묶어세우고 항일성전에 불러일으키게 되면 조선은 죽지 않고 꼭 다시 살아납니다.》 조용하면서도 확신에 넘친 장군님의 말씀을 가슴에 뜨겁게 받아안고있는 《대통령감》의 눈가에서 맑은 구슬이 반짝였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격랑이 솟구치며 흉벽을 쾅쾅 두드렸다. (조선아, 기다리라. 우리를 기다리라. 그대를 되살리시려 지금 장군님께서 우리를 이끄시고 백두산으로 가고계신다. 스물여섯해전 오늘은 그대의 목에 올가미가 걸렸던 망국의 날이지만 스물여섯해 지난 오늘은 그대의 목에 걸린 올가미를 끊고 겨레를 건져낼 구세제민의 영웅 김일성장군님께서 광복의 대로를 헤쳐나가신다.) 그는 이렇게 웨치고싶었다.
이튿날 행군대렬은 드디여 되골령마루에 올라섰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땀에 젖은 얼굴에 날아들었다. 조국땅의 향기가 실린 바람인지도 모른다. 유격대원들은 군복단추를 열어헤치고 그 바람을 가슴에 담뿍 받아안기도 하고 페부깊이 들이마시기도 했다. 눈아래에는 설레이는 단풍든 숲의 바다, 기복을 이루며 아득히 물결쳐간 산발들과 해빛에 번쩍이며 굽이굽이 흐르는 물줄기들… 그 산발들과 물줄기들이 잇닿은 저 하늘밑에 백두산과 압록강이 있고 그리운 조국땅이 있다. 쌍안경을 드시고 저 하늘가에 물결쳐간 조국의 산발들을 바라보시는 장군님께는 압록강의 여울물소리가 귀전에 금시 들려오는듯싶으시였다.
일천구백십구년 삼월 일일은 이내 몸이 압록강을 건넌 날일세 년년이 이날은 돌아오리니 내 목적을 이루고서야 돌아가리라
압록강의 푸른 물결아 조국산천아 고향땅에 돌아갈 날 과연 언젤가 죽어도 잊지 못할 소원이 있어 내 나라를 찾고서야 돌아가리라
그 누가 지었는지 알수 없는 노래와 함께 조국땅을 하직하시며 다지시였던 11년전의 맹세, 그것은 열네살의 여린 심장과 여린 의지로 감당하시기에는 너무나 아름찬 맹세였다. 그러나 나라의 운명을 스스로 일신에 걸머지신 그 한순간에 장군님의 소년기는 때이르게 끝나버리고말았다. 상식을 벗어난 그 소년기의 남다른 정신적도약과 더불어 모든 희생을 각오하고 혁명의 길에 나서신 장군님의 때이른 청년기가 시작되였다. 그때 장군님께서는 비록 열네살이시였으나 그이의 마음속에는 나라를 다름아닌 자신께서 구원해내지 않으면 그 누구도 구원할수 없다는 사명감을 뚜렷이 자각한 숙성한 열혈청년의 하늘같은 뜻과 기개가 물결쳤다. 그날의 그 맹세를 남긴 저 압록강기슭으로부터 팔도구, 림강, 무송, 화전, 길림, 고유수, 오가자, 카륜, 할빈, 교하, 돈화, 온성, 안도, 왕청, 로야령, 남호두, 마안산, 동강… 드넓은 만주산야를 종횡무진으로 헤가르며 장장 수천만리로 이어진 혁명의 가시덤불길! 열한해동안 이으며 헤쳐오신 그 먼먼길은 저 하늘아래 굽이칠 압록강을 다시 건너 그리웠던 조국산천을 해방하기 위하심이 아니였던가. 십대의 소년기에는 소학생모자에 두루마기차림의 홀몸으로 눈물을 흘리시며 건너오셨던 압록강, 오늘은 휘하에 광복의 대군을 거느리신 20대의 청년사령관으로 압록강기슭으로 다가오신 장군님께서는 감회가 새삼스러우시였다. 열한해전에는 뜻은 컸어도 그 뜻을 이룩하실 앞날이 막막하셨지만 지금은 뜻을 따르는 수많은 용사들이 곁에 있고 부르시면 일떠설수 있는 인민이 있다. 문제는 아직 채 각성되지 못한 그 인민을 장군님의 뜻대로 깨우쳐주고 이끌어줄 보다 능력있고 준비된 사람들이 어떻게 맹활약을 벌리는가 하는데 달려있다. 그러므로 압록강쪽을 쌍안경으로 살펴보시며 지나온 일과 앞날의 일에 대하여 더듬어보시는 장군님께서는 두차례씩이나 통신원을 보냈으나 지금껏 사령부에 와닿지 못하고있는 권영벽이네 2련대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문득 마음속 한구석에서 용솟음쳐오르시였다. 권영벽이, 곽두섭이, 오중흡이… 그 2련대사람들가운데는 한몫 든든히 해줄 믿음직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어서 그들까지 주력부대에 와서 먼저 와있는 리동학이며 김주현이네와 함께 든든한 기둥이 돼준다면 광복의 위업을 성취할 그날은 보다 더 앞당겨질것이다. 《여기서 백두산은 어느 편에 보이오?》 한동안이나 남쪽하늘가를 바라보시던 장군님께서는 쌍안경을 내리시며 지도를 펼쳐들고 서있는 김주현을 돌아보시였다. 《저 왼편 뒤쪽인데 그쪽은 지금 구름이 가리워있어 백두산이 보이지 않습니다.》 김주현의 대답이였다. 《동무네가 봐뒀다는 백두산밀영후보지는 그쪽이요?》 《이 되골령줄기를 타고 동쪽으로 내려서다가 저기 동남쪽 등성이를 타고 넘어가게 됩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마을은?》 《왼편으로 떨어지면 장백현 19도구 지양개 막바지마을이 제일 가깝고 오른편으로 떨어지면 16도구 대덕수마을이 제일 가깝습니다.》 《이 지점에서는 밀영후보지보다 마을들이 더 가깝겠지?》 《그렇습니다.》 바람에 옷자락을 날리시며 다시금 먼 산발들에 시선을 옮기신채 한동안 생각에 잠기시였던 장군님께서는 쌍안경을 《대통령감》의 손에 넘겨주시고 경위대장 리동학을 찾으시였다. 《경위대장동무, 제일 큰 기발을 누가 건사하고있소?》 신발끈을 고쳐매고있던 리동학은 벌떡 튀여일어나 몸을 바로 잡으며 대답을 드렸다. 《제 배낭안에 있습니다.》 총알같이 빠른 대답이다. 《그걸 7련대장동무에게 넘겨주시오.》 그이의 지시가 떨어지기 바쁘게 리동학은 휴식하는동안이나마 말리우느라 바람받이 강대나무가지에 걸어둔 자기의 배낭이 있는데로 뛰여가서 배낭끈을 풀었다. 장군님께서는 모자를 벗어들고 채양으로 부채질을 하고있던 강세호에게로 돌아서시였다. 《련대장동무는 4중대에 과업을 줘서 기대를 준비하게 하시오. 그리고 그 동무들이 기발을 들고 선두에 서게 하시오.》 강세호가 대답하고 리동학의 옆으로 물러나자 장군님께서는 다시 김주현을 부르시였다. 《주현동무, 선발대동무들에게 백두산밀영후보지로 길잡이를 하지 말고 곧추 대덕수로 향하라고 이르오. 밀영에 가기전에 먼저 인민들에게 갑시다. 먼저 인민들에게 우리가 왔다는 인사도 하고 국경지대의 적들을 답새기기도 해서 우리가 백두산밑에 나왔다는것을 조국인민들도 알게 합시다. 기발을 들고 나팔을 불며 위풍당당하게 내려가도록 합시다.》 장군님께서는 한손에 벗어드셨던 여름군모를 쓰시였다. 모자에 붉은 수실로 수놓아진 빨간별이 가을볕아래 이채롭게 진홍색의 선명한 빛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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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압록강연안의 첫 마을인 장백현 16도구 대덕수촌에 들어선것은 9월 초하루, 쨍쨍한 가을볕아래 한창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들이 구수한 낟알향기를 풍기며 낫가락들을 갈 때가 됐다고 재촉이나 하듯 선들바람에 늠실늠실 황금파도를 일으키던 날 해가 중천에 채 못미쳐서였다. 붉은 기발을 앞세우고 기운찬 나팔소리를 울리면서 빨간 오각별모표 달린 모자와 일매지게 미끈한 군복차림에다 신식보총들과 기관총들까지 메고 기운차게 마을로 내려서는 길다란 미지의 군인대렬을 맞은 대덕수사람들은 눈들이 휘둥그래졌다. 왜군놈들과도 위만군놈들과도 전혀 다른 이 초면의 군대가 바로 다름아닌 김장군의 친솔군대라는것을 알게 된 그들이 대뜸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하여 《대학생부대》라는 별칭을 붙인데는 그럴만 한 까닭이 있었다. 지금껏 그네들이 보아온 조선군대라거나 혁명군대란것은 한복바지괴춤이나 덧저고리밑에 개다리같은 륙혈포를 차거나 화승대를 메고 두서너씩 짝지어 나타나 군자금을 얻어가지고 사라지군 했던 몇몇 사냥군무리같은 사람들뿐이였던것이다. 보리감자 혹은 땔나무따위를 팔아서 마련한 몇푼의 돈을 군자금으로 쓰라고 섬겨바치면서도 행색조차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그런 군사들에게 조선독립이라는 대업성취를 기대하기에는 헝겊쪼박 몇오리 걸어놓은 나무가지에 죽어가는 제 식솔을 제발 살려줍시사고 두손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리며 빌 때와 같은 허황함을 금할수 없었던 그네들이였다. 첫눈에도 과시 큰일을 치러낼것 같은 그쯘하고 끌끌한 대군의 행차에 신바람이 난 마을사람들은 금시 래일이라도 광복의 날을 맞을듯 가슴들이 부풀어올라 울며 웃으며 안절부절 못하였다. 마을 집집에 끌려든 인민혁명군 대원들이 밀감자보리밥에 토장국이나마 성의껏 마련하여 대접해주는대로 점심상을 받았다가 거의다 물렸을무렵에 제1망원초가 배치돼있은 앞산에서 적들이 나타났음을 알리는 두방의 신호총소리가 울렸다. 이리하여 조국땅을 지척에 둔 대덕수산촌 보리밭에서 국경대안으로 진출한 인민혁명군과 적들사이의 첫 교전이 벌어졌다. 이도강에서 몰려온 200여 적병을 삼대베듯 쓸어눕힌 이날의 싸움때 장군님께서 지휘처로 삼으셨던 선바위는 그 이후로부터 마을사람들에 의하여 장군바위로 고쳐불려지게 되였다. 감자떡 치고 감분국수를 누르고 씩씩한 혁명가요의 노래소리로 떠들썩한 대덕수의 그날밤은 명절날밤처럼 온 마을이 잠들지를 못하였다. 다음날 소덕수의 마등창에서 또 한차례 기묘한 전법으로 《요씨가 망했다》는 또 하나의 전설을 낳은 무혈전투를 승리적으로 치뤄 적들에게 무리죽음을 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장백현 15도구, 동강 16도구천교구, 20도구 2종점 등 압록강안 도처에서 적들이 미처 정신차릴새없이 련속 답새겨주었다. 이처럼 인민들에게는 승리의 기쁨과 광복의 신심을 안겨주고 적들에게는 패배의 쓴맛과 공포를 안겨주는것으로 조국의 변방으로 나온 조선인민혁명군의 첫 인사를 보내신 장군님께서는 9월 21일 새벽 선발대의 일부 성원들과 경위대 그리고 7련대의 한개 중대성원들만을 거느리시고 간밤을 묵으시였던 황공동부락을 떠나 5호물동 웃쪽의 좁은 여울목으로 은밀히 압록강을 건너 그리웠던 조국땅에 들어서시였다. 김주현이네 선발대가 이미 탐색해둔 도강지점이였다. 선발대성원들은 자기네가 표식해두었던 원시림속의 이동통로를 헤쳐나가며 부대를 소백수골로 깊숙이 안내해들어갔다.
리치를 따져보면 당연히 그렇게 되였어야 할 일이 그렇게 되지 않는 현상은 생활속에 얼마든지 있기마련이다. 한장소에 고착되여 지내지 않고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은밀한 활동을 진행해야만 하는 유격대생활에서는 더구나 그런 일이 많았다. 이미 지난봄에 새로 편성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에 편입되였어야 할 독립 제2련대는 봄은커녕 여름도 지나가고 짧은 가을마저 저물어가고있을무렵에야 사령부를 찾아 백두산쪽을 향해 간고한 행군을 해오고있었다. 그간 사령부에서는 두차례나 통신원들을 2련대에 보냈었다. 그러나 통신을 제대로 받고 마안산에 달려와 주력부대의 편성에 참가한것은 리동학이랑 김주현이랑 속해있은 2련대 1중대뿐이였다. 련대주력과 같이 교하, 액목 방향으로 채 가지 않고 오도양차에서 독립임무를 수행하고있었던 리동학이, 김주현이네 제1중대는 새 사단이 조직되던 바로 그 올봄의 눈석이철에 인차 사령부의 지시를 접수했었다. 그러나 련대의 기본력량을 이루고있는 2,3중대는 액목현의 깊은 수림에 단풍이 들기 시작하던 초가을에야 사령부를 찾아나오라는 통신을 받고 먼 행군길을 떠났던것이다. 액목에서 떠날 때엔 나무잎들이 금시 누릿누릿해지기 시작했지만 서강의 숲속에 이른 지금은 나무들이 벌써 헐벗기 시작하여 락엽은 정갱이까지 파묻군 한다. 두텁게 깔린 락엽밑의 그 어디에서인가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아득한 그 어느 먼곳에서인듯 들려왔다. 세상의 한끝인양 느껴지는 이곳의 수림속에서 2련대사람들은 자그마한 오돌막 한채를 발견했다. 집앞의 좁은 마당은 비질해본지 오랜듯 락엽에 한벌 덮이고 속이 궁근 통나무굴뚝에서는 피여오르는 연기가 없었다. 주인없는 빈집이였다. 한쪽 귀틀벽에는 나무못을 박아놓은 노루가죽 한장이 붙어있었다. 아직도 채 마르지 못해 눅신눅신한 촉감을 주는 가죽이였다. 분명 이 서강막바지의 깊은 숲속에서 짐승잡이를 해가며 홀로 살아가는 사람의 오돌막임에 틀림없었다. 《이 노루가죽이 채 마르지 않은걸 보니 주인이 집을 비운지가 과히 오랜것 같지 않습니다.》 척후로서 맨처음 이 집을 발견해냈던 오중흡소대장이 중대장 곽두섭과 중대정치지도원 권영벽을 돌아보며 말했다. 《글쎄…》 집안에 들어서자 담배부터 말아문 곽두섭중대장이 부시를 치며 어정쩡한 대답을 했다. 담배를 하도 즐겨서 《막담배》라는 별명까지 붙은 곽두섭은 적과 맞불질을 하게 된 싸움판에서도 담배를 붙여물지 않고서는 손이 떨려 총을 바로 겨냥해내지 못한다는 담배질군이였다. 불기운이라군 전혀 없어 썰렁하기 짝없는 집안의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살펴보던 중대정치지도원 권영벽은 바닥에 깔려있는 부스러진 건초깔개짬에서 녹이 쓸고 먼지 묻은 머리빈침을 집어들었다. 《이게 뭐요? 머리빈침이 아니요?》 《네?!》 오중흡소대장은 권영벽이 넘겨주는 녹쓴 머리빈침을 받아들고 유심히 보더니 마치 사령부의 행처를 찾기나 한듯 기뻐 소리쳤다. 《옳습니다. 단발머리에 꽂는 빈침입니다. 주력부대의 녀대원들이 여기 머물렀던게 아닐가요?》 《어디 좀 봅시다.》 곽두섭중대장도 손을 내밀었다.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그 빈침이 사령부의 행처를 찾는 단서로 될수 있다는 점에서 기뻤다. 그러나 곽두섭중대장의 경우에는 그런 의미에서만 기쁜것이 아니였다. 《민생단》혐의자들로 이루어진 2련대 4중대가 이미 지난봄부터 주력부대에 소속되여 활동하고있다는 소문을 들은 다음부터 곽두섭은 사령부휘하로 어서바삐 달려가고싶은 마음의 한구석에 자기 애인 조분옥을 한시바삐 만나보고싶은 심정을 또한 겹쳐 간직하고있었다. 조분옥이도 바로 그 4중대에 속해있었던것이다.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적으로 진행되고 조분옥이가 부당한 혐의를 받고 무서운 시련과 번민을 겪던 시기에 곽두섭은 오래동안 사랑해왔던 조분옥이와 비밀리에 약혼을 하였었다. 그러나 불행한 운명은 그들사이를 갈라놓았다. 장래의 운명에 대하여 락관할수 없는 애인을 뒤에 남겨두고 먼 교하땅으로 원정의 길을 떠나던 그 순간부터 곽두섭이 어느 하루도 잊은적 없는 그리운 사람의 행적을 뜻밖에 이 서강막바지의 작은 오두막에서 찾게 된것이나 아닌지. 번개같이 비껴든 희망에 곽두섭은 담배불을 붙이는것도 잊어버리고 녹쓸고 먼지 묻은 머리빈침을 보고 다시 보았다. 《틀림없소. 이건 단발하는 우리 녀대원들이 쓰던 빈침이 틀림없소. 머리태를 땋는 보통 사민처녀들이나 낭자머리를 트는 아낙네들이야 빈침을 머리에 꽂는 법이 없잖소? 어서 좀더 차근차근 살펴보기요.》 매사에 치밀한 권영벽이와는 반대로 덜퉁스럽기 짝없는 곽두섭이였지만 여느때없이 끈지게 집안을 수색했다. 마침내 그는 권영벽이도 관심을 돌리지 못한 부엌아궁안의 싸늘하게 식은 재더미 한옆에서 이번에는 한쪽끝이 타다 남은 가위밥토막을 발견해냈다. 그것은 물들이지도 않았고 낡지도 않은 누런 광목천가위밥이였다. 《이것 보오! 주력부대 녀성동무들이 여기 들렸다는게 확실하오. 이건 아마 행전이나 덧버선을 만들고 남은게 틀림없소.》 그는 재가 묻은 가위밥을 내흔들며 확신성있게 단언했다. 《만일 주력부대 녀성동무들이 이곳에 들린것이 확실하다면 이 집에 사는 주인은 우리 동무들에게 길을 안내해주기 위해서 집을 비우고 나간것이 아닐가요?》 오중흡이 명민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곽두섭과 권영벽을 번갈아보며 짐작의 말을 했다. 《집안에 마른 짐승가죽이 한장도 안보이는걸 보면 그걸 쌀이나 혹은 소금과 바꿀려구 먼 인촌에 나간게 아닐가? 겨울동안을 지낼 식량이나 소금을 구하자구말이지.》 권영벽의 말이였다. 역시 세심하게 관찰하고 다면적으로 사색하고 정확하게 판단하군 하는 권영벽이 누구보다 폭넓게 생각했다. 《그럴 경우엔 주인이 나타나더라두 그 동무들의 행처는 알지 못하겠구만…》 혼자말처럼 던지는 곽두섭의 어조에는 감출수 없는 서운함이 비껴있었다. 《그렇지만도 않지요. 주인이 인촌으로 나가기전에 주력부대 녀동무들이 들렸다면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갔다는 정도라도 알게 아닙니까?》 곽두섭을 위로하듯 하는 오중흡의 그 이야기에 권영벽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자기 견해를 감춤없이 피력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내 생각에는 주인이 집을 비운 뒤에 재봉대원들이 들렸던것 같구만. 부엌안에서 맨 마지막으로 불탄것이 가위밥인걸 봐서말이요.》 그의 말을 듣고보면 역시 그럴듯싶었다. 언제나 그가 판단하고 예측하는것이 옳군 했다는것을 지난 생활체험을 통하여 잘 알고있는 곽두섭이와 오중흡은 행동방향에 대한 결심을 채택할적마다 권영벽의 견해를 중시하군 하였다. 《그럴바엔 여기서 잠간 다리쉼이나 하고 그냥 가볼가?》 주인이 온다 해도 여기 들린 동무들의 행처는 알지 못할것 같다는 권영벽의 말을 들은 곽두섭중대장은 무작정 떠나고싶어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래도 어쨌든 주인을 만나면 무슨 도움이든 받을수 있을겁니다. 사령부나 재봉대의 행처는 모르더라도 이 일대의 지형이나 백두산쪽으로 나가는 길이라도 알수 있지 않겠소? 소경막대짚기로 눈덮인 원시림속을 마구 헤매며 돌아다닐수야 없지요.》 권영벽은 설득력있게 자기 의견을 내놓았다. 곽두섭중대장은 부시를 쳐서 담배불을 붙여물었다. 맛스럽고 욕심스럽게 몇모금 빨면서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묻듯이 오중흡을 돌아보았다. 《오중흡동무 생각엔 어떻소?》 《길도 지형도 모르는 생소한 원시림속을 향방없이 찾아헤맨다는게 문제는 문제입니다. 먹을것도 다 떨어진 형편인데… 제 생각엔 여기 이런 작은 산막이라도 있는데다 집결처를 정해놓고 몇개의 정찰조를 여러 방향으로 내보내면 좋을것 같습니다.》 무슨 일에나 빈틈이 없는 오중흡이다운 의견이였다. 《그러다 여게서 모두 굶어죽지들 않을가?》 웃음속에 하는 곽두섭의 롱말이였다. 옳다고 생각되면 씨원하게 결심을 채택할줄 아는 곽두섭은 마음속으로는 이미 두사람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그렇게 하기루 하구 어디 쌀이나 둔게 없나 찾아보기요.》 산속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외진곳에 있는 산전막이나 사냥막같은데 머물렀다가 떠나갈 때에는 후에 그곳에 들릴수 있는 굶어죽을 처지의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반드시 거기에 얼마간의 식량은 남겨놓는 법이다. 산사람들 호상간에 철칙으로 되여있는 이 특유한 관습의 혜택을 종종 입게 되는 유격대원들도 역시 그렇게 하군 하였다. 아니나다를가 시렁우에 얹혀있는 석유초롱안에서 서너되박은 잘될 보리쌀이 나졌다. 그 보리쌀속에는 부엌아궁이안에서 얻어낸 가위밥과 색갈이 같은 누르스름한 실 한오리가 끼여있었다. 쌀을 쏟아낼 때 배낭이나 미대에서 묻어나온 실오리같았다. 영낙없이 재봉대원들이 남겨두고간 쌀이였다. 그 보리쌀을 조금 갈라 죽물을 우려먹고 숙영준비를 갖추었다. 앓는 대원들과 제일 헐고 엷은 옷을 입은 대원들만 집안에 들였다.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깥에 우등불을 피워놓고 그옆에서 몸을 덥히며 잘수밖에 없었다. 백두산서북쪽 변방의 원시림속에 숨겨져있는 이 외진 산막주변의 아름드리 이깔나무숲속에서는 장밤 우등불들이 타올랐다. …이튿날 여러 방향으로 나갔던 정찰조들은 어디에서도 사령부의 행처를 찾지 못하였다. 다만 오중흡이 책임지고 탐색을 나갔던 조만이 어느 한군데에서 마른 강대를 찍어낸 도끼자리와 지하족이 들어있었던 빈곽 하나를 발견했을따름이였다. 나머지 조들은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은 고사하고 짐승의 발자국조차 보지 못하였다는것이다. 이틀만에 행여나 하고 기다리던 주인이 굽은 등어리에 너덧말 되는 좁쌀마대를 지고 나타났다. 독신으로 사는 늙은 중국사람이였다. 그 로인한테서 권영벽이네는 사령부가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장백쪽으로 넘어갔다는 소문을 전해들었다. 동정심 많고 인심이 후한 중국로인은 자기가 세해전에 백두산밑에 있는 어느 한곳에서 한 조선사람이 농사짓는것을 본적이 있는데 거기 가보면 바라는 사령부의 확실한 행처를 알게 될수도 있을것이라고 권하면서 자기가 겨울을 나려고 지고 왔던 좁쌀을 길량식으로 내주었다. 고마운 늙은이였다. 이리하여 2련대사람들은 다시 만강 물곬을 따라 백두산쪽으로의 행군길에 올랐다. 그것은 금시 차디찬 비방울 아니면 이해의 첫눈이라도 내릴것 같이 음산하게 흐린 황량한 마가을날이였다.
사철 녹을줄 모르는 만년설이 덮여있다고 전해지고있는 백두산에도 실상 여름의 무더운 한철 두달만은 눈이 없는 때가 있다. 계절이 변덕을 부리지만 않으면 백두산마루우에 두텁게 쌓였던 눈도 해마다 6월이면 녹아버리고 천지를 얼궈붙이고있던 두꺼운 얼음장도 7월초에는 풀리기 시작하는것이다. 그러면 백두산말기에도 짧디짧은 여름이 온다. 봄내 눈속에 묻힌채 자라던 노란 만병초나 백두산따들쭉, 백두산진달래, 두메아편꽃, 고산싱아, 두메국화, 좀참꽃, 담자리참꽃따위들은 화산용암으로 이루어진 이 억센 산악에 류달리 그 색갈이 선명한 아름다운 꽃을 피워주며 용맹한 홍모시범나비들이 꽃향기를 좇아 장군봉마루에까지도 오르는것이다. 용맹한 산매나 고산제비같은 날새들도 무더위를 피하여 여기 구름우의 화구벽 벼랑턱에 있는 저들의 안식처로 찾아들 든다. 하지만 백두산의 여름은 너무나 짧다. 어떤 해에는 7월중순에 마지막 눈이 내렸다가 8월중순도 못넘겨 첫눈이 오기도 하는것이다. 그렇게 첫눈이 내리게 되면 그것은 먼 이듬해의 짧은 여름이 되돌아올 때까지 녹는 법이라군 없다. 곧 겨울이 시작되기때문이다. 이처럼 눈이 녹으면 단꺼번에 여름이 되고 햇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또다시 겨울이 되는 백두산말기에는 아주 짧은 여름과 기나긴 겨울의 두계절밖에 없는듯싶다. 울창한 산림이 수해를 이루며 아득히 펼쳐지는 드넓은 고원지대에 내려서면 새움트고 진달래 피는 봄도, 단풍들고 오미자, 들쭉 열매들이 무르익는 가을도 있고 여름도 또한 그다지는 짧지 않다. 그러나 산림한계선아래의 이 넓은 산림지대에서도 겨울은 역시 일찌기 시작될뿐아니라 또한 무척 길고 춥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를바 없다. 때이르게 겨울이 찾아들고 또 때늦게까지 그 랭혹한 계절이 물러갈줄 모르는것은 반년나마 되는 기나긴 겨울을 타고난 백두산기후대의 천성인것이다. 백두산지구의 겨울은 해마다 일찍 찾아들었지만 1936년의 겨울은 류달리도 이르게 찾아들었다. 이해의 추석날을 아흐레나 앞두고있던 9월 21일, 바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백두산밀영에 들어와 첫 숙영을 하던 그날밤에 소백수골에는 이해의 첫눈이 내렸다. 조국땅의 벌방지대에서는 살찔대로 살찐 개구리들이 초생반달 어린 물가에서 맑은 가을밤을 즐기며 노래부르고 이슬맺힌 풀섶에서는 아직까지 성큼성큼 뛰노는 논메뚜기들이 달빛아래 반짝이는 이슬을 빨고있을 그러한 밤에 소백수골의 태고연한 수림속에서는 미처 겨울맞이차비를 하지 못한 산짐승들이 갑작스레 내리는 때이른 첫눈에 질겁하여 비명들을 질렀다. 이날밤 몹시 피곤했던 대원들은 첫눈이 내리는줄도 알지 못한채 깊이들 잠들었다. 항시 바깥에서 살다싶이하면서 풍찬로숙해왔던 유격대원들에게 있어서 천막이상 더 좋은 잠자리가 어데 있으랴. 큼직하고 아늑한 천막안에 드러누운 대원들은 바깥에서 당황하고 겁에 질린 산짐승들이 지르는 울음소리도 듣지 못하였다. 리동학이네 경위대원들이 따로 마련한 사령부천막에서 나어린 전령병과 자리를 같이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도 역시 이날 밤엔 깊은 잠에 드시였다. 물론 천막안에는 불도 피워놓았고 잠자리에는 마른 풀도 두툼하게 깔아놓았다. 초저녁엔 천막안이 훈훈했고 또 마른 풀을 북신하게 깔아 마련한 잠자리도 따스했다. 하지만 한밤중에 불이 사그러지자 천막안의 공기는 삽시에 식어들고말았으며 땅바닥도 차츰 얼어들었다. 그런데다가 장군님께서는 단 한장의 크지 않은 모포밖에는 덮으신것이 없으시였다. 그랬으면서도 장군님께서는 그날밤을 아주 달게 그리고 실로 깊이 주무시였다. 여러달동안 그 어느 누구보다 또 그 어느때보다 적게 주무시면서 많은 피로를 쌓아오셨던 장군님이시였다. 그이께서 백두산밀영지에 오신 이 첫날밤처럼 그렇게 여러 시간동안 단 한번도 깨심이 없이 내처 주무신적은 몇해만에 처음이였다. 새벽에 엷은 모포장을 꿰뚫고 온몸에 스며드는 가시돋친 랭기로 하여 잠을 깨신 장군님께서는 어둑시근한 가운데서 천막의 출구 안쪽에 무둑히 쌓여있는 두개의 길죽하고 새하얀 더미를 보시였다. 엊저녁엔 없었던 이상스런 흰 무지였다. 무엇일가? 혹시 눈이 아닐가? 그렇다. 그것은 눈무지였다. 밤새 바깥에 내린 눈이 출구자락의 량쪽틈새기로 날아들어와 쌓인것임에 틀림없었다. (추석도 되기전에 눈이 내리다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신 장군님께서는 곁자리에서 새우처럼 몸을 꼬부리고 자고있는 꼬마전령병 주봉길에게 자신께서 덮으시였던 모포를 조심스럽게 덮어주시고 허리를 펴시였다. 머리우에 닿는 뭉클하면서도 묵직한 천막지붕자락의 감각… 차디차고 축축하기도 한 그것의 감각은 무척, 아주 무척 많은 눈이 천막지붕우에 쌓여있다는것을 대뜸 짐작하시게 하였다. 그이께서는 허리를 약간 굽히시고 출구쪽으로 몇발자국 옮기시였다. 바람에 들리지 말라고 출구자락의 아래쪽을 지질러놓았던 가느다란 분비나무토막은 새짬으로 날아들어온 눈속에 거의나 묻혀버리다싶이 되여있었다. 그이께서는 출구자락을 벽자락과 련결시켜놓았던 옭아맨 헝겊오리매듭들을 풀고 눈에 묻힌 분비나무토막을 치워놓으시였다. 그러자 바깥에 쌓였던 눈이 저절로 출구자락을 들치면서 안으로 허물어져들어왔다. 그이의 신발은 밖에서 밀려들어온 눈에 묻혀버렸다. 바깥으로부터 돌발적으로 밀려든 눈의 불의습격에 발을 잡히우신 장군님께서는 눈속에서 발을 뽑지 않으신채 어이없으신듯 그 눈을 잠시 내려다보시다가 출구자락의 한옆을 잡아헤치시였다. 헤쳐진 출구밖에는 하루밤사이에 모든것을 두터운 흰 장막으로 덮어버리고 변모시킨 은빛의 눈세계가 펼쳐져있었다. 천막 바로 앞에 있는 애어린 마가목나무는 허리까지 눈속에 파묻혔고 가느다란 가지들은 눈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그 끝을 눈우에까지 축 드리웠는가 하면 더러는 휘인 가지의 중둥까지 눈속에 파묻히우기도 하였다. 참으로 백두산다운 대접이다. 머리 흰 백두산은 북만땅에서 먼길을 헤치고 예까지 찾아온 자기의 아들들에게 자기 고유의 자랑거리인 때이른 눈세계부터 펼쳐보인것이다. 새 밀영지를 이채롭게 장식한 장엄한 설경을 바라보시던 장군님께서는 한손으로 기막히게 부드러운 햇눈을 한웅큼 떠드시고 눈맛을 보시였다. 백두산의 눈이라는 의식때문인지 북만에서 가끔 속이 달 때 맛보시던 눈과는 달리 무어라 이름지을수 없으나 조국땅의 향기, 조국의 정갈한 물맛이 느껴지는듯싶은 눈맛이였다. 슬며시 갈마드는 향수에 젖어드신채 손바닥에서 녹기 시작하는 햇눈송이들을 이윽히 감상하시던 장군님께서는 출구자락을 내려놓으시고 부지중 시려나는 두손을 맞비비시며 눈가래삼아 쓸만 한것이 없을가 하여 천막안을 둘러보시였다. 그러나 그런것이 있을리 없는 천막이였다. 이런 때엔 소랭이로 눈을 치며 길을 낼수 있겠지만 그것 역시 작식대원들이 든 언덕아래 소백수가의 천막에 내려 가야 있는것이다. 장군님께서는 천막기둥의 나무옹이에 걸려있는 여름군모를 벗겨쓰시고 아무것도 쥐신것이 없으신채 그냥 맨손으로 바깥에 나서시였다. 천막안에서 꽤 높은 담장을 넘겨짚으시듯이 발을 높이 드시고 첫걸음을 내디디시자 깊이 쌓인 눈에 거의 허벅다리께까지 쑥 빠져들어갔다. 가까스로 다른 한발을 옮겨짚으신 장군님께서는 세번째걸음을 쉽사리 내짚지를 못하시였다. 보기에는 더없이 매끄럽고 보드랍고 갑삭한 햇눈이였지만 무릎우까지 깊이 빠져들고보니 진펄속에 빠져든것이나 다름없이 다리를 헐히 뽑아 내실수 없으시였던것이다. 장군님께서는 힘들게 걸음을 옮기시면서 대원들이 잠들고있는 천막으로 내려가는 첫통로를 한발자국 또 한발자국 개척해나가시였다. 깊이 쌓인 첫눈을 거의나 온몸으로 헤치시며 길을 내시는 장군님의 여름군모와 어깨와 잔등에는 나무가지우에 위태롭게 얹혔다가 저절로 떨어지는 눈뭉치들이 하얀 얼룩을 지어놓는다. 눈뭉치들이 후둑후둑 떨어져내릴적마다 은회색의 새뽀얀 눈가루들이 구름을 지어 밝아오는 새벽빛에 반뜩거리며 날아내린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눈뭉치들과 눈가루들은 그이의 여름군복 목깃안으로도 새여들고 나무가지를 잡으시느라 우로 쳐드시는 팔소매안으로도 굴러들었다. 그렇게 새여들고 굴러든 눈은 몸온기에 녹으면서 잔등과 겨드랑이가 섬찍하도록 차거운 눈물줄기를 홀려보낸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군한다. 손끝이 아리고 이마의 살같이 시리고 온몸이 얼어들어도 장군님께서는 백두산밀영지에서의 첫새벽에 해쳐보시는 숫눈길이 어쩐지 즐거우셨다. 새로 자리잡을 밀영지를 아직 눈익히시지도 못하셨지만 그리고 여기서 겨울맞을 차비는 단 한가지도 못하신터지만, 그래서 예상보다 일찌기 이리도 엄청난 눈이 내린것이 어느 모로나 달갑지 않으면서도 웬일인지 기분이 상쾌하고 마음은 가벼우셨다. 티없이 맑고 정갈한 눈이 삼라만상을 깨끗하게 덮어버려 어디를 둘러보나 마음을 밝게 해주었기때문인가? 대낮에도 어둡기만한 밀림속을 날이 채 밝지 않은 이 새벽에 온 천지가 환하게 밝혀주는때문인가? 지저분하던 모든것을 덮어버리는 숫눈처럼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켜주는것은 없다. 그리고 장엄한 밀림의 설경처럼 아름답고 황홀한 자연풍치도 없을것이다. 앞날의 모든 일을 지금 당장 다는 예상할수 없지만 큰 포부와 희망을 품고 북만땅을 떠나 여기 백두산지구까지 일부러 나오신 장군님께서는 백두산밀영지에서 맞게 되신 첫아침에 푸지고 호함지게 내린 첫눈을 보시는 순간부터 한량없이 마음이 밝고 명랑해지시면서 이 새로운 밀영지에서 해나가시기로 작정하셨던 모든 일이 지나온 그 어느 시기보다 잘돼나갈것 같은 느낌이 드시였다. 온 천지가 얼마나 밝은가! 그리고 첫눈에 덮인 백두산밀영의 설경은 얼마나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층만되여있는가! 나무마다 웅장화려한 눈꽃을 피웠다. 밀림의 각가지 수목들이 눈내린 겨울날이면 아름답게 피우군하는 눈꽃을 지난날에도 수없이 보아오셨지만 나무들이 피운 눈꽃의 장엄성과 화려성에 있어서 여기 새로 자리잡은 백두산밀영지에서의 이 아침에 보시는것에 비길만한 눈꽃은 그 어느때 그 어느 밀림에서도 일찍 보신적이 없으시였다. 참말로 희한한 설경이다. (동무들! 어서 깨여나 하루밤사이에 일어난 하늘의 조화를 보라! 눈이다! 조국땅에 내린 눈이다! 이 밝은 천지를 보라! 황홀하게 아름다운 우리의 새 밀영지를 보라!) 장군님께서는 천만자락을 활짝 열어젖히시고 상기도 세상모르게 잠자고있는 모든 지휘성원들과 대원들에게 소리쳐 알려주고싶으시였다. 몸은 얼어드셨지만 마음은 훈훈하게 달아오르시였다. 그이께서는 더 힘차게 숫눈길을 헤치시며 대원들이 든 천막이 자리잡고있는 언덕아래로 내려가시였다. 천막앞에서 누구인가 남빛얼룩법랑소랭이로 눈을 치고있었다. 몸매 자그마한 녀대원이였다. 색갈이 진하기도 하고 연하기도 한 쪼박천으로 기운 자리가 드러나는 헌 여름군복, 군모밑으로 틀어올린 남자머리… 사령부 작식대원 장철구아주머니였다. 나이 서른다섯이나 되는 장철구는 나어린 대원들에게서는 《철구어머니》로 불리우기도 한다. 사령부의 작식을 책임진 그는 항상 남보다 늦게 잠자리에 들면서도 또한 언제나 남보다 먼저 잠을 깨군하였다. 장군님밖에는 아직 어느 한사람도 깨여나지 않은 이 새벽에도 역시 철구만은 오랜 습관대로 남먼저 일어나 남모르게 혼자 슬그머니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눈을 치고있는것이다. 장군님께서는 군복에 묻은 눈을 소리없이 털어버리시고 다시 걸음을 옮겨짚으시였다. 귀밝은 장철구는 어느결에 인적기를 느꼈던지 언덕웃쪽을 올려다보더니 저으기 놀라며 낮으나 황급한 목소리로 가벼이 소리쳤다. 《아, 장군님!》 그는 부지중 새빨갛게 언 자그마한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웠다. 《혼자서 수고합니다. 밤새 춥게 지내지 않았습니까?》 장군님께서도 눈속에 멈춰서신채 역시 조용한 음성으로 인사를 건네시였다. 그이의 군복은 채 떨리지 않은 눈가루로 하여 새하얬다. 《어째 벌써 이 눈속에 나섰습니까? 미처 길도 내드리지 못했는데…》 가슴이 아려하는 장철구의 목소리였다. 여느때보다 늦게 깨여나는 바람에 그이께서 천막밖으로 나오시기전에 사령부로 통하는 눈길을 쳐드리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나무람하며 송구스러움을 금치 못해하는 그 마음이 장군님께는 그지없이 고마우셨다. 그는 바로 사령부천막에서 나오는 길을 내려고 그렇게 서둘러 소랭이 눈가래질을 시작했던것이다. 《이런 푸진 첫눈은 일부러라도 밟아볼만합니다. 참 굉장한 눈입니다.》 장군님께서는 그에게로 마주 다가가시며 말씀을 이으시였다. 《첫눈이 이렇게 일찌기 내리구 또 이렇게 많이 내리는걸 어디서 본적이 있습니까?》 《원 무슨 첫눈이 이리두 모질게 내렸는지… 이런 눈은 저도 처음 봅니다. 추석전에 제 절반키나 되는 눈이 오는데를 어디서 봤겠습니까? 겨울나이차비도 하기전에 이렇게 눈속에 갇혀서 어쩌겠습니까?》 《허허… 〈겨울장군〉앞에서 우리가 한수 지고 승부를 다루게 됐습니다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질 않습니까?》 장군님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자, 그 소랭이를 이리 주고 들어가 동무들을 소리쳐 깨워주시오. 곰처럼 잠들만 자지 말구 조국땅에서 맞은 희한한 첫눈이나 보라구들말입니다. 그리구 아주머니는 조반차비나 하시오.》 그이께서는 철구의 손에서 법랑소랭이를 빼앗다싶이 하시였다. 엉성하게 여며져있던 천막자락이 조심스럽게 들리더니 금방 깨여난듯 눈두덩이 부석부석한 강세호련대장이 여름군복저고리단추를 채우며 나오다가 눈부신 바깥정경에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마침 련대장동무도 일어났구만.》 소랭이로 두세차례 눈을 치시다가 그를 보신 장군님께서는 허리를 펴시며 사뭇 반갑게 말씀을 건네시였다. 《좀 보오. 밤새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이게 눈이 아닙니까?》 천막안으로 들어가려던 장철구에게 길을 내주며 한걸음 나선 강세호는 시뻘건 손으로 햇눈을 퍼들고 자못 신기해했다. 《허허, 눈이란걸 난생처음 보는 사람같군. 보면서도 모르겠소? 우리를 맞이하느라구 밤사이에 백두산이 이 소백수골에 〈겨울장군〉을 내려 보냈소.》 강세호는 입언저리에 눈을 묻히며 햇눈맛을 보았다. 《히야, 이거 눈이 옳군요.》 그는 철부지 어린애마냥 좋아라 웃으며 가벼운 탄성을 올렸다. 《눈맛이 어떻소?》 《아 참, 별로 더 달고 시원한것 같습니다. 한번 맛보십시오. 다른데서 맛보던 눈과는 다릅니다.》 《나도 이미 맛을 봤소. 맛이야 백두산밑이라구 뭐가 다르겠소? 조국땅에 오고보니 우리 생각이 달라져서 눈맛도 다르게 느껴지겠지.》 다시한번 눈맛을 보고난 강세호는 약간 시무룩해지며 눈묻은 손을 털었다. 《아마 그런가봅니다. 그런데 참 세월이 흐르는 물같다더니 아닌게아니라 빨리도 흘러갑니다. 북만에서 나올 때 눈이 강산같이 쌓인걸 봤는데 여기 오자 어느새 또 벌써 겨울입니다.》 《그래… 동무가 〈대통령감〉을 데리구 남호두에서 나오는 사령부를 찾아서 돈화의 어느 마을에 왔을적에도 눈이 이만치나 쌓여있었지.》 장군님의 어조에도 감회가 어려있었다. 《네, 옥수천부근의 작은 산간마을이였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 계신다는 조선사람집앞에 가니 팔뚝같은 고드름이 처마끝에서 번들거리던 생각이 납니다.》 《옳소. 그게 봉길이의 생일날이던 음력 2월 보름날 새벽이였지.》 《녜. 거의 만 여섯달이 지난셈입니다. 눈을 밟으며 북만에서 떠나 여기 백두산밑에 와닿기까지 봄, 여름, 가을 옹근 세계절을 원정길에서 지나보냈습니다. 그것도 주로 무송땅에서 말입니다.》 《그래… 무송땅에서였지.》 무송땅… 이해의 장엄한 눈석이를 맞이하고 첫 봄비를 맞은것도 무송땅에서였고 강세호에게 어머님께서 주셨던 20원돈을 쥐여보내시여 헐벗은 마안산아동단원들의 옷감을 사오게 했던것도 무송땅에서였다. 《민생단》문서보따리를 불태우시고 새 사단을 편성하신것도, 조국광복회의 창립을 선포한것도 무송땅에서였다. 그 무송땅에서 눈없는 계절을 지내는동안 참으로 많은 일을 해놓았다. 헤아릴수 없는 난관을 헤치며 강력한 주력부대를 키워냈고 전체 조선인민을 광복의 성전에 조직동원하기 위한 커다란 기틀도 마련해놓았다. 이제는 남호두를 떠날 때부터의 숙망대로 이 백두산밑에 와서 자리잡게 되였으니 본때있는 싸움판을 벌릴수 있다! 장군님께서는 소랭이에 눈을 듬뿍 퍼서 힘차게 던지시였다. 《주십시오. 제가 치겠습니다.》 딴 생각에 정신이 팔려있던 강세호가 장군님 곁에 바삐 다가들며 소랭이를 잡았다. 《남이 성수나서 하는 일을 방해하지 말구 대원들을 깨워내다가 한바탕 눈쌈이나 시켜보는게 어떻겠소? 백두산 햇눈을 온몸에 뒤집어쓰고나면 기개들이 한층 솟구칠거요. 옳지, 마침 저기 〈보따지〉동무가 나타났구만. 동무네 휘하중대하구 경위대가 붙어보지.》 웃음속에 권하시는 그이의 말씀에는 따뜻한 정이 흘러넘친다. 햇눈덮인 장수봉(오늘날의 정일봉)마루가 불현듯 금백색빛을 뿌린다. 해돋이바위우로 장쾌한 아침해가 솟기 시작한것이다.
소백수협곡에 해가 퍼져들자 대기는 퍼그나 온화해졌다. 밀영지는 바람한점 없이 잠풍하고 아늑했다. 발원지의 그 어디선가 온천이 샘솟는게 아닐가싶게 시린 감촉이 전혀 없는 소백수의 가늘고 기운찬 물줄기에서는 물안개가 그물그물 서려올랐다. 별스럽게 맛스러운 백두산밀영에서의 첫 아침식사를 치르신 다음 장군님께서는 밀영지를 돌아보고 살림터자리들을 확정하여 그밖에 시급히 착수해야 할 몇가지 사업을 포치하실 작정으로 김주현, 리동학, 강세호와 그밖의 몇몇 지휘성원들을 데리시고 사령부천막을 나서시였다. 《여기 어디 옹달샘이 있었는데?…》 《소백수개울우에 바로놓여진 진대나무를 타고넘어 눈에 덮인 풀숲을 헤치며 앞장서 길을 안내해 가던 김주현이 원시림으로 꽉 들어찬 둔덕밑의 약간 평퍼짐한 공지를 두릿두릿 살피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공지에는 눈속에 채 묻히지 않은 풀대들이 사람들의 하반신을 가리울만치 솟아들 있어서 옹달샘터를 찾아내기가 조련치 않을것 같았다. 《그 물맛이 기막히게 좋아서 우리 선발대 동무들이 그 옆에서 점심밥까지 해먹었댔는데 그 자리도 다 눈속에 묻혀버리고 만 모양입니다. 눈만 녹으면 제꺽 나질겝니다.》 약간 실망조가 비낀 김주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뒤에서 걸으시던 장군님께서 그의 어깨를 가볍게 다치시였다. 《그 옹달샘이 저기 있는것 같소.》 김주현은 멈추어서서 장군님께서 가르키시는데로 눈길을 돌렸다. 과연 그쪽 풀숲의 한군데에서 뚜껑이 열린 밥가마에서처럼 뜬김이 무더기로 서려오르고있었다. 김주현의 눈이 번뜻 빛났다. 《옳습니다. 저깁니다.》 김주현은 어린애처럼 기뻐 소리치며 그쪽으로 달음질치려다가 다리에 감겨드는 새초잎들과 깊이 쌓인 눈에 저지당하여 《이크!》 소리를 내며 앞으로 어푸러졌다. 그 꼴을 보고 뒤따르던 지휘관들이 모두 앙천대소했다. 《원 급하기두 그 성미가 정말 샘터에서 숭늉달랠 사람이군.》 그를 들어일궈주시며 나무람하듯하시는 장군님의 말씀에 입을 막고 키득거리던 전령병마저 웃음소리를 감춰내지 못하였다. 샘물우에 덮인 락엽들을 걷어내고보니 대뜸 고향산촌의 옹달샘처럼 정이 가는 샘터였다. 어쩌면 저리도 어여쁘게 생겼는지! 마음들이 저절로 따듯하고 부드러워지는것 같았다. 《샘까지 있고, 참 신통한 고장이요.》 순식간에 맑아지는 샘물을 이윽히 지켜보고계시던 장군님께서는 혼자말씀처럼 외우시며 원시림으로 가리워진 둔덕쪽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김주현은 손에 든 조막도끼로 거치장스럽게 앞을 막는 잔나무가지들을 치면서 백길이 훨씬 넘을 높다란 장수봉바위 절벽밑으로 안내해들어갔다. 바위절벽자체가 뚜렷한 표적으로 되기때문에 김주현이네 선발대가 이 원시림속의 나무들에 위치표식을 따로 해둘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지점이였다. 아름드리 분비, 가문비나무들이 꽉 들어차서 하늘을 가리웠지만 자연도태를 당하여 쓰러진 진대나무들이 서있던 자리들과 잎도 잔가지도 세월의 풍상에 마르고 삭아 떨어져버리고 벌거벗은 줄기만 앙상하게 서있는 강대나무곁자리에서는 아아히 치솟은 수려한 바위절벽이 이따금 자기의 비범한 자태를 엿볼수 있게 해주었다. 《이 근처의 나무들은 베버리고 이 절벽밑에 있는 평퍼짐한 자리에 사령부귀틀집을 앉히자는 생각입니다. 저쪽켠으로 약간 돌아가서 경위대병실을 앉히고.》 김주현이 올리는 말씀이였다. 묵묵히 사위를 둘러보신 장군님께서는 그쪽으로 가보시자시며 다시 걸음을 옮기시였다. 일행은 여러대의 강대나무가 몰켜있어서 푸른 하늘과 주변산발들이 별 거침없이 안겨드는 해밝은 한곳에서 멈춰섰다. 《경위대장동무 생각엔 어떻소? 주현동무네 선발대동무들은 저기에 사령부를 앉히고 여기에 경위대병실을 앉히자고 의합이 된 모양인데 사령부위치 결정권도 나한테 있는게 아니라 경위대장동무한테 있으니 동무의 생각이 어떤지?》 리동학은 벌써 아까부터 기분이 좋아서 벌쭉벌쭉 웃고있었다. 장군님을 모실 사령부귀틀집자리가 더 말할나위없이 마음에 들었던것이다. 《저는 이미 결심을 채택했습니다.》 리동학은 마치 맞은편 산벼랑쪽에 관심이나 있는듯 그쪽에 헛눈을 팔며 흥심없는 어조로 여느때와 달리 늘어지게 대답했다. 사실 그는 말씨가 빨랐다. 《다른 의견이 없다는거겠지?》 《결론자야 나중에 발언해야 위신이 있지 않습니까. 제 결론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침을 뻑 따고 하는 그의 말에 한바탕 유쾌히들 웃고난 일행은 장군님을 따라 장수봉의 뒤산탁으로 올라갔다. 급경사를 이룬 산비탈이 워낙 가파로운데다 눈까지 미끄럽게 굴어서 장수봉과 련결된 산릉선까지 오르는데 좋이 한시간 가까운 품을 들여야 했다. 골안바닥에서는 전혀 바람이 없는 날씨같더니 릉선우에 올라서자 선들바람이 시원스럽게 안겨왔다. 일행은 릉선을 타고 장수봉마루쪽으로 나가며 관망에 맞춤한 자리를 고르다가 전망이 좀 트이는 어느 한곳에 멈춰섰다. 골바닥에서 표고 200메터를 훨씬 넘을 봉우리에 올라섰지만 소백수가 흘러나가 압록강에 합쳐지게 돼있는 서남방향을 내놓고는 어느쪽이나 높은 산발들이 시야를 가로막고있었다. 왼쪽으로는 덩지 큰 소백산이 비대한 어깨로 자기의 산정모습마저 가리워버린채 하늘높이 치솟아있었고 맞은편에는 소백산쪽에서 뻗어내려온 수백길이나 될 높디높은 산벼랑이 거대한 천연방벽을 이루면서 돌멩이를 던지면 능히 가닿을듯싶을만치 눈앞에 바투 다가서있었다. 그 산벼랑우에 기묘하게 생긴 세개의 바위군상들이 (후날에 해돋이바위, 룡마바위, 장검바위로 불려지게 된 바위들) 대자연의 신비로움을 자랑하듯 기개있게 솟아있었다. 뒤쪽인 북쪽도 역시 백두산으로부터 줄기줄기 뻗어내려왔을 산발들이 시야를 가로막고있었다. 그 산발들가운데의 한갈래가 갈증난 목을 추기려고 물을 찾아 외따로 삐여져 달려내려오다가 너무나 희한하고 정갈한 샘물과 그 곁을 사품치며 흘러내리는 소백수의 물줄기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선채 굳어져버린것이 아마 이 장수봉인지도 모른다. 백두산에서 장수봉까지 지도상에서 가늠되는 직선거리는 16키로정도, 겨우 40리가 되나마나하니 소백수골은 명실공히 백두산의 한 골짜기인 셈이였다. 시원한 바람결에 땀을 들이시며 천연요새를 이룬 소백수골주변의 산세를 지도와 대조해가시며 한참동안 살펴보고나신 장군님께서는 저으기 만족한 미소를 지으시며 김주현을 치하하시였다. 《동무네 선발대가 백두산밑에 나와서 참말 묘하게 배겨앉은 천연요새를 찾아냈소. 이런델 찾느라구 석달 가까운 품을 들였댔구만.》 그이의 치하의 말씀앞에서 김주현은 어줍은 미소를 띠우며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이 소백수골이 그전에 우리가 소왕청근거지에서 싸울 때 유격대지휘부를 두었던 리수구골짜기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와 다른 점은 협곡이 더 웅건수려하다는거야. 천만산악을 거느린 백두산이 역시 산도 크고 골도 깊소. 천하명승 백두산이라더니 백두산밑에 이런 멋드러진 보금자리가 숨겨져 있었구만. 얼마나 억세고 아름다운 남성미를 간직한 천연요새요! 백두산이 우리를 도와주려구 지금껏 이 좋은데를 감춰두고있었던것 같소.》 장군님의 호탕하신 말씀에 리동학이도 강세호도 또 다른 지휘관들도 명랑한 웃음소리를 내며 머리들을 끄덕였다. 《참 그랬던것 같습니다. 우리야 이 나라의 아들들이구 백두산의 아들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백두산도 태고적부터 간직해왔던 비밀요새의 문을 우리한테만은 열어줬겠지요.》 여러 사람의 웃음소리를 짓누르며 총알처럼 튀여나온 리동학의 빠른 말씨였다. 그는 말을 어찌나 빨리 하는지 듣는 사람들이 미처 앞의 말을 다 들어내기전에 뒤말을 섬겨대군했다. 행동도 매우 민첩해서 대원들이 약간만 느리게 굴면 뭘 그리 꾸물대는가고 욱박지르며 복닥질을 해댔다. 그때문에 《보따지》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다. 《복닥질》이라는 어원에서 파생된 별명이였다. 《허허… 역시 〈보따지〉동무가 제때에 명언을 발사하누만. 백두산이 우리의 어버이라. 아주 그럴듯한 얘기요.》 그렇게 말씀하신 장군님께서는 또 한바탕 흥겹게 웃으시고나서 다시금 지도를 펼치시였다. 좀 면구스러웠던지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던 리동학은 손가락에 껍진껍진한 송진이 묻어있는것을 알아채고 나무껍질에 손가락들을 문댔다. 《이 백두산일대에는 괜찮은 천연요새들이 많습니다. 저희들이 점찍어둔 밀영후보지들이 대개 다 제식대루 제멋이 있는 경개 좋은데들입니다. 가보시면 알겠지만 선오산도 그렇구 간백산도 그렇구…》 리동학이와 달리 김주현은 성질이 급한데 비해서는 말씨가 느린편인데 성진태생인 그의 말투에는 항상 억세고 투박스러운 함경도억양이 짙었다. 《동무네가 내정한 곰산밀영후보지는 압록강에서 도보로 얼마쯤 걸릴것 같소?》 장군님께서는 백두산지구의 지형도가 그려져있는 지도우에 이미 붉은 동그라미로 표식되여있는 곰산의 한 지점을 가리키시였다. 《압록곡에 면해있지만 도강할수 있는곳이 근처에 있지 않기때문에 좀 에돌아다녀야 합니다. 많이 잡아서 십리나 시오리쯤으로 짐작됩니다.》 《거기에도 샘물이 있소?》 《샘터는 못봤습니다만 도랑물같이 흐르는 물이 있었습니다.》 《사철 흐르는 물이면 되지. 압록강까지 물 길으러 다니게 되지 않겠는가 해서 그러오.》 《그럴 념려는 없습니다. 수량은 적어도 엄청나게 큰 산밑에서 나오는 물인걸 봐서 땅속에서 스며나오는 물이지 일시 나오다 말 비물은 아닌것 같습니다.》 《그 근처에서는 무슨 산나물이 나오?》 언제나 세심하신 장군님께서는 여러개의 붉은 동그라미들을 짚어가시며 그 밀영후보지들의 지형조건, 주민지와의 거리, 밀영후보지들사이의 이동통로와 이동에 소요되는 시간, 동식물상과 기상기후조건, 심지어는 낟알 혹은 남새의 재배가능여부에 대해서까지 깐깐히 알아보시였다. 그가운데는 김주현이자신도 미처 주의를 돌리지 못했던탓으로 알아보지 않았던 문제점들도 있었기때문에 대답이 궁해질 때마다 그는 은근히 속으로 진땀을 뽑기도 했다. 무송땅에서 선발대의 임무수행정형을 보고올릴 때만해도 이다지나 구체적인 캐물음을 받지는 않았던것이다. 김주현이한테서 이것저것 알아보신 다음에도 그냥 혼자서 묵묵히 지도를 들여다보시며 생각에 잠기고계시던 장군님께서는 마침내 그 지도의 한쪽 가생이를 붙잡고있는 전령병 주봉길에게 지도를 건사하라고 이르시고는 지휘관들을 둘러보시였다. 《그래 동무들 어떻소? 그만하면 우리의 새 살림터자리가 어떠한지 실컷 구경들 했겠는데 여기에 둥지를 트는데 반대의견을 가지는 동무들은 없소?》 장군님의 걸걸하고 우선우선한 물으심에 지휘관들은 서로 벙긋벙긋 웃으며 쳐다볼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후 장군님께서는 웃음을 거두시고 정색하시였다. 《그럼 그렇게 락착지읍시다. 이 소백수골을 중심거점으로 삼고 우리의 새 보금자리를 틉시다. 여기는 우리의 의도에 꼭 들어맞게 선택된 밀영지요. 이제부터는 여기 틀고앉아서 우리 혁명을 본때있게 내밀어봅시다.》 장군님께서는 서남쪽으로 련련히 뻗어나간 먼 산발들에 시선을 보내시며 량손을 허리에 얹으시였다. 새하얀 첫눈을 수북히 들쓰고 고요히 서있는 울울창창한 수림은 계곡을 따라 아득히 뻗으며 한낮의 해빛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이따금 수림의 곳곳에서 나무우에 덮인 눈이 쏟아져내리며 뽀얀 눈안개를 일으켰다. 소리없는 그 나무우의 눈사태에 놀라 하늘높이 떠오른 솔개 한마리가 허겁지겁 날아가다가 그만 눈아래 펼쳐진 장엄하고 희한한 백두밀림의 설경에 심취해서인지 향방을 잊고 허공중에 멎어서서 하나의 까만 점을 이룬채 더는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동무들도 잘 알고있지만 우리가 먼 북만에서 이곳 백두산까지 나온 목적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이 백두산에서 혁명의 봉화를 높이 지펴올려 2천3백만 전체 조선인민을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위한 거족적인 항일대전에 떨쳐나서게 하자는것입니다. 우리가 이 백두산에서 조선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또 반드시 살아나게 된다는것을 알리는 광복의 메아리를 힘차게 울리게 되면 그 메아리는 삼천리에 진감하여 잠든 우리 인민의 심장을 울릴것입니다.》 어느결에 두손으로 대공을 걷어안기도 하시고 헤가르기도 하시며 거침없이 말씀하시는 장군님의 안광에서는 열정의 번개불빛이 번쩍번쩍 일군했다. 《반드시 그렇게 돼야만 하고 또 미구에 능히 그렇게 될수 있는 우리의 이 위대한 목적을 하루빨리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남호두회의에서 결정했고 동강회의에서 더욱더 구체적으로 토의하고 준비사업을 해온대로 백두산근거지를 튼튼히 꾸리는데 첫째가는 주목을 돌리고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합니다. 내가 여러번 말했지만 이 소백수골을 중심으로 해서 백두산일대 도처에 밀영들을 설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백두산주변일대의 광범한 대중속에 혁명조직들을 내와서 이 일대를 적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세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겁니다.》 새삼스럽게 가슴부풀게 하는 장군님의 신념에 넘치신 열정적인 말씀은 긴 여운을 끌며 눈덮인 수림속에 메아리쳤다. 하늘중천 높은곳에서 하나의 까만점을 이룬채 까딱 움직이지 않고있던 솔개가 문뜩 쏜살같이 날아내리며 등성이에 가리워 보이지 않는 어느한 골짜기밑으로 사라졌다. 《동무들에게 거듭 강조하지만 밀영건설과 조직건설, 이 두가지 일을 이제부터 본때있게 내밀어야 합니다. 어느 일도 차요시할수 없고 어느 일도 미룰수 없습니다. 두가지 다 대단히 중요한 일들이고 두가지 다 대단히 급한 일들입니다. 그러니 오후부터는 일에 착수합시다.》 지휘관들은 일시에 자세를 바로잡으며 그이께로 시선을 모았다. 《밀영건설사업은 강세호동무, 동무네 련대에서 맡으시오.》 《알았습니다.》 지체없는 강세호의 단마디 대답이였다. 《사령부와 경위대병실은 아까 보고올라온 바위벼랑밑에 앉히고 련대병실들과 비서처, 기타 건물은 이제 내려가서 적당한 자리를 골라봅시다. 여기에 중심밀영을 꾸리는 동시에 여기서 흘러나가는 물줄기와 사자봉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가 합쳐지는 합수목근처에도 밀영을 속히 꾸리시오. 여기가 중심기지라 해서 아무나 다 몰려들어와 장거리처럼 와글와글 끓게 해서는 안됩니다. 중심밀영은 최대한의 안전과 정숙과 비밀이 보장돼야 하는만큼 중심밀영에서 상시적으로 지내지 않는 부대나 개별적사람들을 맞아도 주고 쉬우기도 하고 떠나보내기도 하며 때에 따라서는 강습이나 훈련도 줄수 있는 밀영을 따로 내와야 합니다. 다시말해서 사령부와 주력부대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접수소로도 되고 대기소로도 되고 면담소로도 되고 숙소로도 될수있는 위성밀영을 꾸려놓으라는것이요. 그렇게 해서 우리를 찾아 백두산밀영으로 오는 사람들이 이 소백수골안까지 들어오지 않고서도 그 위성밀영에서 볼일을 다 보고 갈수있게 하자는것입니다.》 그러한 사명을 띤 밀영을 설치할데 대하여서는 강세호나 다른 지휘관들은 물론이고 선발대를 이끌고 나와 밀영후보지탐색을 했던 김주현이도 생각지 못한 일이였다. 그러므로 김주현이네는 사자봉쪽에서 후보지를 탐색할 때에도 골안에 깊이 들어가 자리를 찾았지 합수목근처는 눈여겨 보지들조차 않았던것이다. 장군님께서는 그밖에 선오산과 장백쪽의 곰의골에도 한개 소대가량의 인원을 파견하여 장백과 국내를 련결하는 중간련락소로 쓸 밀영을 꾸리도록 하라고 강세호에게 이르시였다. 김주현이네 선발대에 속했던 김해산을 책임지워보내면 가는 길도 잘알고 후보지위치도 잘 알겠으니 념려없으리라시며 친히 인선까지 해주시였다. 그러신 다음 장군님께서는 경위대장 리동학에게 별동대임무를 주시였다. 제일 끌끌한 대원들을 사오십명쯤 선발해서 그들을 데리고 장백현을 한바퀴 돌아보면서 압록강연안마을 실정들도 료해하고 특히 앞으로 우리와 손잡고 일할수 있는 좋은 사람을 물색해 보라는 특수임무였다. 이를테면 지하혁명조직건설을 위하여 선행시켜야 하는 인재탐색대인것이다. 《별동대가 각별히 명심해야 할건 서뿔리 국내쪽으로 넘어서지 말고 장백쪽에서만 활동하라는거요. 사오십명이 무리지어 몰켜다니느라면 불가불 적들과 맞다들어 총소리를 내야할 때도 생기겠는데 우리의 총소리가 당분간은 압록강건너쪽에서 울려야지 압록강안쪽에서 울려서는 안되겠다는거요. 적들이 우리가 국내의 백두산밑에 들어와 자리잡았다는걸 몰라야 하기때문이요. 적들은 우리가 장백이나 무송쪽의 백두산밑에 있는줄로 알게 해야 하오. 내 그래서 국내를 돌라는게 아니라 장백현을 돌라는거요. 국내 각지에는 동무네 별동대처럼 무리지어 보내지 않고 한두사람씩 따로따로 개별적으로 보내겠소.》 별동대가 명심하고 주의해야 할 점들과 마을들에서 진행해야 할 사업에 대하여, 심지어 그들의 차림새와 갖춤새에 대하여서까지 세세히 일러주신 장군님께서는 마감으로 별동대가 장백으로 넘어가는 길에 곰산밀영후보지에 들려 밀영을 제꺽 꾸려놓고 가도록 하라고 한가지 과업을 덧붙여주시였다. 《밀영후보지의 위치는 곰산현지에 가서 김주현동무한테서 알도록 하시오. 곰산까지는 주현동무가 동행해주게 될거요.》 리동학은 힐끔 곁눈질로 김주현을 건너다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어느새 간파하신듯 장군님께서는 가벼운 웃음속에 뒤말씀을 덧붙이시였다. 《그러나 김주현동무를 구슬려 그 손까지 부려먹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오. 동문 그 듬직한 체통을 가지고서도 남을 곧잘 구슬려 부려먹는다지? 이번에 그랬다간 동무가 백배나 더 손해볼거요.》 김주현은 일부러 깨고소하는듯한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슬쩍 리동학을 쳐다보았다. 《주현동무가 웃는걸 보니 짐작이 가는 모양이구만. 자, 다들 그만큼 구경했으면 만족히 여기구 내려가는게 어떻소? 주현동무한테는 내려가면서 이야기합시다.》 일행은 장군님을 뒤따라 산탁에서 내려서기 시작했다. 그이께서도 그이를 뒤따르는 지휘관들도 모두가 엷은 여름군복차림 그대로였다. 약간만 나무가지가 흔들려도 그 우에 수북히 쌓인 눈더미들이 와실와실 쏟아져내리며 눈벼락을 들씌웠다. 몇번씩이나 그런 눈벼락을 맞은데다 가파로운 산비탈을 내려오면서 또한 몇차례씩 눈속에 딩굴었던 지휘성원들은 눈사람처럼 되고말았다. 그랬어도 다들 마음은 유쾌했다. 《겨울이 일찌감치 들이닥치는 바람에 주현동무가 좀 골탕을 먹게 된것 같은데 어떻소? 어떻게 하면 아직까지 여름군복을 입고있는 모든 동무들에게 뜨뜻한 솜옷을 입혀줄수 있을것 같소? 동무는 이제는 군수관으로서의 본래의 직분으로 돌아왔는데 뭐좀 생각해둔게 없소?》 장군님께서는 골바닥의 숲속에 내려서시자 눈벼락때문에 몇번이나 끊기웠던 이야기를 잇대이시였다. 《념려마십시오. 이미 지난번에 선발대로 나왔을 때 련계를 취해놓은 지방주민들이 더러 준비해놓은것이 있을것입니다. 부족되는것은 인민들의 방조를 받겠습니다.》 김주현은 그이의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대답을 드렸다. 《대답이 시원스럽구만. 그런데 지금 있는 부대동무들만 입힐 궁리를 해서는 안될거요. 새 사람들이 많이 올것까지 예견해서 준비해야 하오.》 《입대를 청원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몫을 말입니까?》 《그런 사람들도 물론이겠지만 우리를 찾아오게 될 2련대동무들의 몫이 있어야겠소. 그 동무들에게 입힐것까지 갖추자면 단꺼번에 상당한 량의 천과 솜이 있어야 하겠는데…》 《이미 련계를 취해놓은 사람들의 방조를 받는 한편 경제모연공작을 벌리면 해결할수 있습니다. 저는 벌써부터 모연공작을 겸할 생각을 하고있습니다.》 《역시 군수관답구만. 그렇게 구상이 뚜렷하다면 곧 해보시오. 오늘중으로 필요되는 인원을 선발해가지고 래일아침에는 공작을 떠나도록 하시오. 리동학동무네 별동대와 같이 떠나 곰산까지 동행하고 거기서 밀영후보지위치를 알려준 다음에는 동무네대로 행동하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디선가 앞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월동용 피복과 신발을 해결하는 기회에 세면도구를 비롯한 생활필수품들도 잊지 마오. 여기 있는 동무들도 그렇지만…》 장군님께서는 하시던 말씀을 마무리지 못하시였다. 눈속 깊은데서 주절거리는것 같던 물소리가 바로 앞에서 시원스럽게 울렸다. 연하게 서린 물안개속에서 한발폭이 되나마나한 소백수가 작은 물방울들을 튕겨올리며 흘러내리고있었다. 소백수개울을 넘어서시려고 한발을 넘겨짚으셨던 장군님께서는 발을 옮기지 못하신채 허리를 굽히시고 때마침 물에 떠내려오는 그 어떤 하얀 천쪼박을 건지시였다. 누구인가 흘려버린 빨래감이였다. 그이께서는 상류쪽으로 눈길을 돌리시였다. 눈꽃이 피여있는 개버들가지사이로 얼핏 보인것은 색이 바랜 군모뿐이였다. 장군님께서는 금방 건져내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새하얀 천쪼박을 쥐여짜시고 펼쳐보시였다. 아무런 수도 놓여있지 않고 가생이만 재봉으로 박은 낡은 광목손수건이였다. 그이께서는 개울가에 난 발자국을 따라 웃쪽으로 올라가시였다. 개버들숲이 가리워주고있는 개울가의 눈속에 한 녀대원이 쪼그리고 앉은채 머리를 수굿하고있었다. 시뻘겋게 된 손으로 비누거품이 묻은 그 무슨 다른 군복색 빨래감을 주무르고있었지만 속생각에 골몰한나머지 그저 멍하니 쥐고있으나 다름없었다. 그는 장군님께서 가까이 다가가시도록 눈밟으시는 소리도 못듣고 인적기도 못느낀듯 그냥 그대로 깊은 상념속에 잠겨있었다. 녀성소대장 라명희였다. 머리를 숙이고 앉아있는 여느때 같지 않은 라명희 모습을 보신 순간 장군님께서는 이상스럽게 가슴이 저려드시였다. 늘 쾌활한 이 녀성소대장이 지금 무슨 생각에 잠겨있다는것을 느끼셨기때문이였다. 적들의 《토벌》에 희생된 사랑하는 량부모 아니면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지금껏 도착하지 않고있는 권영벽에 대한 생각이 이 녀성소대장으로 하여금 지금과 같이 빨래하던 손수건이 물에 떠내려가는줄조차 모르게 하였으리라. 잠시 라명희의 옆모습을 측은하게 지켜보시던 장군님께서는 일부러 밭은 기침소리로 인적기를 내시며 그의 옆으로 다가가시였다. 《이거 명희동무가 흘린 손수건 같구만.》 그이께서는 손에 드신 손수건을 내미시며 말씀하시였다. 라명희는 머리를 들더니 해맑은 얼굴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면서 일어났다. 《물에 떠내려가는걸 건졌소.》 장군님께서는 밝게 웃으시며 어쩔줄을 몰라하는 그의 물묻은 새빨간 손에 젖은 손수건을 쥐여주시였다. 《변변히 입은것도 없는데 바깥에서 오래 지내지 말도록 하오.》 《…》 라명희는 그저 창백한 웃음만 지었다. 장군님께서는 뒤따라온 지휘관들과 함께 사령부천막쪽으로 오르시였다. 《2련대동무들은 지금 고생을 겪으면서 우리를 찾아오고있을거요. 아마 우리보다 훨씬 험하게 해진 여름옷을 입었을거요. 그 동무들이 오면 뜨뜻이 입히게 빨리 그 동무들의 솜군복까지 만들어둬야 하겠소.》 그것은 김주현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였다. 젖은 손수건을 받아든채 그대로 개울가에 서있는 라명희도 그 말씀을 가려듣고 눈섭이 촉촉해졌다. 눈속을 기운차게 흐르고있는 소백수에서는 여전히 엷은 물안개가 그물거렸다. 간밤에 잠자리로 삼았던 천막옆의 한 껍질벗긴 나무옆에서는 《대통령감》이 금방 자기가 써놓은 구호를 감정해보고있었다.
항일승리, 을사년의 국치를 잊지 말자.
사령부를 찾아 행군을 계속해오던 2련대사람들이 만강부락을 거칠 때에는 진눈까비가 내리더니 만강천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는 눈이 무릎을 치게 쌓여있었다. 한겨울마냥 장설이 덮여있는 만강천막바지의 깊은 수림속에서도 권영벽이, 곽두섭이, 오중흡이네들은 서강의 마가을 숲속에서처럼 작은 오돌막 한채를 발견했다. 이 백두산밑의 오돌막에서는 아무리 깐깐히 수색해도 먹을것을 얻어내지 못했고 또 여러날 묵으며 기다려도 돌아오는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어쨌든 이 백두산록을 헤발며 애써 찾느라면 사령부의 처소를 발견해낼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들은 다시금 탐색행군을 이어댔다. 하지만 장백쪽으로 넘어가는 길조차 알지 못한채 거의나 무작정으로 백두원시림속에 깊이 빠져든 그들은 한주일나마 아무 보람없이 해와 별도 안보이는 무시무시한 천고의 밀림속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이러단 여기서 옴짝달싹 못하고 굶으며 얼어죽고말겠소. 어느쪽에 압록강이 있을것 같소?》 담배도 거덜이 나서 눈속에서 마른 가랑잎을 뜯어다 손으로 부스러뜨려 담배대신으로 말아피우며 말없이 서있던 곽두섭은 권영벽에게 불쑥 물었다. 곽두섭은 자기가 전혀 모르지 않는것도 자신없을 때엔 권영벽에게 꼭 물어보군 했다. 이마가 다른 사람의 거의 두배나 넓은 권영벽은 무엇을 물어보건 막히는것 없이 차근차근 대주는 곽두섭의 선생인 동시에 고문이였다. 《그야 물론 남쪽이지.》 《여기서도 변함없이 남쪽이겠구만?》 《동쪽이기두 할거요.》 《남쪽이면 남쪽이구 동쪽이면 동쪽이지 왜 왔다갔다하오? 강도 사람처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우?》 《동쪽켠에서 남쪽켠으로 굽어들며 흐르니까.》 권영벽은 가둑나무가지를 꺾어들고 눈우에 략도를 그려보였다. 《이렇소.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이쯤이라면 백두산은 이쯤에 있겠고 압록강줄기는 백두산에서 이런 방향으로 흐르오. 여기가 북쪽, 여기가 동쪽 그리고 여기가 남쪽켠이요.》 《그래 그렇지, 강이란건 막대기처럼 꼿꼿하게만 흐르는게 아니니까.》 곽두섭은 싱긋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피우던 가랑잎담배를 팽개치며 단호하게 말하였다. 《좋소, 이렇게 합시다. 여기서 보람없이 헤매지 말구 압록강까지 나갑시다. 나가면서 적을 칩시다. 적을 쳐야 사령부를 쉽게 찾고 식량두 해결할것 같소. 적을 때리는 총소리가 울리면 사령부에서 우리가 왔다는걸 알게 될거란 말이요. 어떻소? 이게 꿩먹고 알먹는수가 아니요?》 자기의 기발한 착상에 스스로 만족한듯 곽두섭은 좋아서 벙글거린다. 《아니, 정신있소?》 류달리 크고 정기있는 권영벽의 두눈에 불꽃이 일었다. 《무슨 경을 치자구 그런 미욱한 소릴 하오?》 《미욱하다니? 건 대체 어떻게 하는 소리요?》 《사령부가 당장 지척에 있는지도 모르구 적을 쳤다가 거기서 튀여난 불티가 사령부의 안전을 위협하는 결과를 빚어내면 어떡하겠소?》 《우리가 적을 치면 적의 눈이 우리한테 미치지 사령부에 미치겠소?》 《사령부가까이에서 쌈판이 벌어지면 사령부에서는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있을것 같소? 전사들이 사령부문턱앞에서 피어린 싸움을 하고있는데 장군님께서 그냥 앉아계실것 같소?》 《…》 곽두섭은 대꾸를 못하였다. 그런것에 대해서는 미처 고려를 돌려보지 못했던 곽두섭이였다. 《우리는 사령부의 위치를 로출시켜도 안되구 장군님께서 계시는데서 그 어떤 소란도 일으킬수 없소. 적과 맞다들어 불가피하게 쌈하게 된다면 할수 없겠지만 사령부가 가까운 이 백두산지구에서는 우리 멋대로 할수 없소. 적을 치면 혹시 사령부를 헐히 찾게 될수도 있겠지. 그러나 사령부에서 우리를 찾자고 움직이게 한다면 사령부에서는 그만큼 고생할거요. 우리가 더 배를 곯고 우리가 더 고생하더라도 우리는 사령부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사령부가 고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질 않겠소? 오중흡동무 생각엔 어떻소?》 권영벽은 곁에 서서 조용히 듣기만 하는 오중흡을 돌아보았다. 《나도 전투는 될수록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바르고 담찬 오중흡은 자기 견해를 주저없이 말하였다. 《사령부의 안전을 위해서나 우리의 력량보존을 위해서나 지금 전투를 벌리는것은 유해롭습니다. 우리가 단 한사람도 잃지 말고 모두 고스란히 성한 몸으루 장군님께로 가야지 부담과 걱정을 끼쳐드릴 꼴이 돼가지구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그렇소. 이렇게 생생하구 팔팔한 곽두섭이나 오중흡이나 권영벽이 장군님께로 가야 쓸모있지 다리부러진 노루꼴이 돼가지구 가서야 장군님의 가슴이나 아프게 해드렸지 무슨 쓸모있겠소? 안그렇소, 두섭동무?》 《제길, 내가 또 어리석게 생각했거던.》 곽두섭은 혼자소리처럼 두덜거렸다. 《동무네 말이 백번 옳소. 내가 잘못 생각했소. 그런 생각을 깨끗이 씻어버리겠소.》 그는 좀 무안한김에 두손에 눈을 움켜쥐여가지고 그것으로 얼굴을 비벼댔다. 《자기비판이야 제때에 매일 세수하듯 해야지. 그래야 거뿐한걸.》 세사람은 유쾌하게 웃고난 뒤에 압록강쪽으로 더 나가면서 사령부를 찾아보기로 행동방향을 정했다. 새로운 행군을 시작하기전에 점심대신으로 군용밥통들에 눈을 한창 녹이고들있을 때 보초대에서 뜻밖에도 사냥총과 량식배낭을 멘 두사람의 사냥군을 호송해왔다. 그들도 역시 조선인민혁명군사령부가 어디쯤에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였지만 거기서 20리가량 되는 곳에 있는 목재소나 산림경찰대에 가게 되면 먹을것도 얻고 어찌하면 사령부의 행방도 알도리가 생기리라는 새로운 희망은 안겨주었다. 총소리를 내지 않고서도 능히 제압할수 있는 대상이였으므로 그것을 치는것은 사령부의 안전보장에 저촉될것이 없었다. 그날밤 련대는 사냥군들의 길안내를 받으며 목재소와 그 근처에 있는 산림경찰대를 총 한방 쏘지 않고 불의에 야습했다. 그 대가로 보기드문 입쌀과 밀가루포대들을 얻고 잡아먹기전부터 원기를 돋구어주는 소도 얻었으나 그들이 가장 얻고싶어하는 주력부대의 행처에 대한 소식만은 역시 얻어내지 못하였다. 그래서인지 아무 손실없이 쉽게 얻은 승리도, 만강마을에서 떠난 뒤에 처음으로 배불리 먹어보는 밥도, 참으로 오래간만에 우등불에 구워먹는 소고기도 그들의 마음을 별로 개운하게 해주지 못하였다. 너무 오래동안 고기를 먹지 못하다가 소고기를 먹으니 온몸에 두드러기들이 돋았다. 몸이 가려워 다들 썩썩 긁어대며 행군했다. 령넘어 남쪽으로 압록강이 흐르고있을 국경쪽으로 행군했다. 걸음이 느린 소들과 갈수록 깊이 쌓인 눈때문에 행군속도는 몹시 더디였다. 행군중의 휴식참이면 우등불을 피워놓고 소를 잡아 고기점들을 나무꼬챙이에 꿰여들고 우등불에 굽군했다. 새까맣게 타도록 구워서 가루내여 물에 우려낸 노란물을 마시기도 했다. 산불은 맞불을 놓아서 꺼야 하는것처럼 고기를 먹고 돋아난 두드러기는 자꾸 고기를 먹어야 갈앉는 법이다. 2련대 대원들은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거의나 소고기만으로 에우며 강행군을 계속했다. 귀한 입쌀과 기분을 얼근하게 해주는 빼주는 사령부와 만나게 될 앞날의 감격적인 순간을 위하여 아껴두었다. 광막하고 태고연한 서간도 백두산일대의 밀림… 이 산림이 이토록 풍요하고 이 지대가 이토록 광활한줄은 그들중 아무도 일찌기 알지 못했었다. 헤치고 또 헤쳐도 밀림은 끝이 없고 걷고걸어도 인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드넓은 밀림속 그 어디에 사령부의 밀영이 자리잡고 아득한 천리수해의 그 어느 지점에서 주력부대의 우등불들이 타오를것인가? 이밤도 2련대 대원들은 우등불들을 피워놓고 겨울에도 여름이나 다름없이 여전히 풍성한 푸른 잎들을 달고있는 분비, 가문비, 전나무가지들을 꺾어다 눈우에 깔아놓고 거기 누워 주력부대의 우등불들을 눈앞에 그렸다. 사령부의 뙤창에 흐르고있을 정다운 불빛을 그렸다. 상록수의 날카로운 바늘잎들은 낡고 해지고 얇아질대로 얇아진 여름옷밖에 감싼것이 없는 그들의 온몸을 사정없이 찔러대고 그 바늘잎들보다 더 침투력이 강한 추위는 불기운이 덜 미치는 뒤쪽으로부터 슬그머니 기여들어 몸뿐만아니라 뼈속에까지 스며들었다. 불곁에 면한 몸의 절반은 살점들이 데고 익는듯이 따가왔지만 다른쪽의 절반은 뼈를 깎아내는듯이 시렸다. 돌려대고 누워 잠시만 지나면 다시 반대로 따갑고 시렸다. 이따금 우등불에서 탁탁 소리를 내며 불티가 날려와 얼굴과 손등과 옷에 붙어 깜짝깜짝 놀래운다. 유격대원들은 잠들지들 못하였다. 바늘잎들과 추위와 불티들이 찌르고 스며들고 놀래워서가 아니였다. 오히려 심한 두드러기때문에 가렵기 그지없는 온몸을 바늘잎들이 찔러주고 추위가 얼얼하게 저며주고 불티들이 뜨끔뜨끔하게 뜸을 떠주어 가려운 몸이 시원해지고 긁는 수고도 덜어서 좋다. 잠들수 없도록 자극하며 마음을 찌르는것은 그리움이다. 장군님과 부대와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들가운데서 오중흡소대장을 비롯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군님께서 친히 입혀주시고 단추를 채워주신 군복을 입고 유격대의 대렬에 들어섰으며 그이께서 손수 적어주신 자기들의 이름을 눈에 익히는것으로부터 글을 배웠으며 그이의 자애로운 손길아래서 혁명의 눈을 틔웠으며 혁명의 원리를 깨우치고 혁명적사랑과 증오의 문법을 익혔다. 그러나 장군님을 몸가까이에 모셔볼 기회를 못가졌던 사람들도 장군님을 친어버이마냥 따르며 그이의 품을 그리워했다. 부모를 그리는 아이들처럼… 만강을 떠나 백두산록의 원시림지대에 들어선지도 어언 달반… 벌써 몇백리 눈길을 이리저리 헤매며 찾았고 벌써 몇백개의 나무대를 두드려댔는지도 모른다. 나무를 두드려 접선신호를 보내고 안타까운 나머지 련대모두가 입을 모아 소리쳐불러봤어도 태고연한 밀림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나무 두드리는 소리와 그들의 합친 부름소리만 메아리치며 멀리, 저 멀리 사라져가고 사무치게 갈망하는 마음속에 남는것은 공허뿐… (백두산쪽으로만 나오면 만날줄 알았던 사령부는 과연 그 어느 곳에 있는것인가? 어디에들 있는것인가. 그리웠던 사람들은?) 사령부를 찾아 무릎을 넘게 쌓인 눈길을 헤치며 탐색행군에 행군을 이어온 2련대 대원들은 교하땅에서부터 몰려오는 피곤에 지쳤으나 잠들지들 못하였다. 어딘가 이 밀림속의 아주 가까운 곳에 반드시 장군님께서 계시는 사령부가 있고 부대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끈덕지게 머리속에 남아있지 않았던들 피곤에 몰려 빨리 잠들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아주 가까이 있으리라는것을 알면서 만나지 못하는것이 더 안타깝다. 그래서 더 그립다. 그립던 식구들이 있는 고향집문턱앞에서 잠잘수 없는 사람들처럼… 권영벽의 곁자리에 말없이 누워있던 곽두섭중대장이 긴 한숨끝에 몸을 일으키더니 부시럭거리며 가둑잎담배를 말아 불붙여물고는 다시 드러누웠다. 떡판같이 넓은 그의 잔등밑에서 잔나무가지들이 와삭거리며 부러지는 소리를 내다가 잠잠해졌다. 사위는 고요했다. 후르르 솟구치며 타오르는 불길소리와 이따금 불티가 튀여나는 소리, 생나무가 김을 내뿜으며 실실 거품을 일으키고 진물을 흘리는 소리 그리고 굴러내린 잉걸불덩어리가 눈을 데치며 칙칙 증기를 날리는 소리들만이 숙영지에 깃들고있는 적막을 깨치고있다. 한옆에 드러누운채 마른 새초를 새김질하던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소만은 잠들었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잠들지들 못했다. 그리움에 모대기며 잠못드는 가운데 밤은 점점 깊어졌다. 밤이 깊어갈수록 우등불들은 눈속으로 차츰 더 바닥깊이 꺼져들며 내려앉았다. 우묵히 꺼져드는 우등불곁에서 곽두섭은 곽두섭이대로 분옥이를 그리며 지난날의 가슴아픈 추억을 더듬었다.
…어언 두해전, 그것은 두만강연안일대에 4~5년동안이나 존속해왔던 동만유격구들이 다 해산되고 마지막으로 남아있었던 처창즈유격구가 가장 어려운 시련을 겪고있던 때였다. 눈꼴사나운 원쑤놈들이 살판치는 곳으로 다시 내려가 살기를 원치 않았던 사람들은 그 최후의 유격구를 고수하려고 기아에 시달리면서도 적들의 《토벌》에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싸우는 처창즈에도 봄은 왔으나 그곳의 산과 들에는 봄빛이 피여나지 못했다. 굶주리는 사람들이 돋아나는 풀이란 풀은 모조리 뜯어먹었고 물이 오르는 나무껍질들을 모조리 벗겨먹었다. 처창즈의 산들에 있는 소나무와 잣나무는 몽땅 껍질을 벗기우고 벌거숭이가 되였으며 풀뿌리마저 캐여버린 들에는 푸른 봄빛이 서리지 못했다. 매일같이 굶주린 사람들이 밭머리와 길가에 쓰러졌다. 그랬어도 아동단원들은 무대우에서 숨지는 마지막순간까지 유격구를 사수해줄 유격대원들에게 노래를 불러주었고 늙은이들은 독립군시절에 메던 화승대를 땅속에서 파내들고 유격대원들과 한전호에 엎드렸으며 녀인네들은 치마폭에 돌을 담아들고 산에 올랐다. 턱없이 모자라는 무기와 탄알은 보충받을데가 없었다. 무기수리소로 꾸려놓은 자그마한 야장간에서는 밤에 낮을 이어가며 고장난 무기를 수리하고 작탄을 만들었다. 어느날 처창즈의 무기수리소에서 초가이영까지 들썩거린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요란한 폭발소리와 함께 한 유격대 소대장이 폭연속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곽두섭이였다. 발을 부상당하여 전투장에서 밀려나 상처를 치료받고있던 곽두섭은 아무도 모르게 유격구병원을 탈출하여 무기수리소에 기여갔다. 성한 두손으로 작탄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폭발사고를 내여 불길속에 휩싸인것이다. 어마어마한 폭발소리와 수리소안에 번진 화염에 놀란 나머지 사람들은 미처 사경에 처한 곽두섭소대장이 그안에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그 자리를 피했다. 폭연이 서리고 불길에 휩싸인 수리소안에 뛰여든것은 한 녀대원뿐이였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간호하면서 무기수리소사람들의 작식까지 책임지고있던 조분옥이였다. 녀대원이 불길속에서 업어내온 실신한 곽두섭의 얼굴은 화상을 당하여 낯가죽이 온통 쭈그러붙었다. 녀대원은 끔찍스럽게 된 그 얼굴에 소금물을 붓고 쭈그러붙은 낯가죽을 주저없이 뜯어냈다. 그리고 낯가죽을 벗긴 자리에 와세링을 바르고 붕대를 처맸다. 그 녀대원이 곽두섭의 각별한 관심을 끌기 시작한것은 그때부터였다. 곽두섭은 피난민들속에 끼여 처창즈에까지 흘러들어왔다가 바로 그 처창즈에서 갓 입대한 조분옥을 그때까지는 잘 알지 못하고 지내왔었다. 조분옥은 매력있는 미모를 갖추고있지도 않았던데다가 말도 적고 또 별로 웃지도 않아서 첫눈에 이성의 관심을 끄는 녀대원이 아니였던것이다. 곽두섭에게 있어서 조분옥은 이성의 관심을 끄는 녀성이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유격대원일따름이였다. 그러나 자기 생명이 위험에 처했을 때 조분옥이한테서 사람의 진가를 알기 시작한 곽두섭은 전과는 다른 눈을 가지고 그 녀대원을 보기 시작했다. 지내고보니 조분옥은 아주 녀성답게 조용하고 찬찬했으며 환자들에 대하여 정성이 극진한 녀대원이였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곽두섭을 찾아와 소금물에 세수를 시키고는 밀을 녹여 종이에 발라 상처에 붙여주군했다. 분옥이가 자기를 그처럼 어린애 다루듯 돌봐주는것이 멋적기도 하고 또한 상처를 매일 건드리는것이 귀찮기도 하여 처음 한동안은 곽두섭이 분옥이의 정성스러운 간호를 피하려고도 했지만 나중에는 그의 부드러운 손길을 받고싶어 일부러 제손으로 할수 있는 소금물세수도 하지 않고 또한 제손으로 할수 있는 상처의 약갈이도 하지 않고 기다리군 했다. 마침내 한달이 지나자 얼굴에 받았던 화상은 씻은듯이 아물어버렸다. 부상당했던 발도 이미전에 나았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에 곱게 보이지 않는 애인이란 없는 법이다. 상처들이 다 아물쯤 된 때에 이르러서는 얼굴이 감실감실하고 입도 코도 자그마하고 손발도 자그마한 그 녀대원이 곽두섭의 부리부리한 눈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력있는 사람으로 뵈였을뿐아니라 죽어도 살아도 운명을 같이하고싶은 둘도 없는 사람으로 되였다. 자기의 그런 마음을 조분옥이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남모르게 혼자 가슴을 앓던 곽두섭은 마침내 단번에 아퀴지을 용단을 내리고 조분옥이한테로 찾아갔다. 그것은 래일의 자신의 운명조차 예측할수 없으리만큼 혁명정세가 엄혹해진 시기, 처창즈유격구가 자기 존재를 끝마쳐가던 시기의 어느 한 달밤에 있은 일이다. 달빛이 부서져 물결우에서 뒹굴고있는 고동하강반에 조분옥을 불러내다 마주선 곽두섭은 정작 입을 떼자니 입술이 탈탈 마르면서 떨리기만 할뿐 말이 나가지 않았다. 육박전투에서 단꺼번에 자기한테 달려든 적병을 세놈씩이나 치고 받고 차서 뻐드러지게 한 이 억대우같은 소대장은 자기 체통의 절반도 못될 자그마한 녀대원앞에서 단 한마디의 말도 못하고 쩔쩔매기만 했다. 그를 비웃기나 하듯 옆에서는 달빛을 실은 고동하가 끊임없이 지지벌거리고 달그림자에 가리워진 골짜기의 어두운 숲속에서는 소쩍새가 골려댔다. 불러내다 맞세워놓고도 어쩌지를 못하는 제꼴에 스스로 화가 난 곽두섭은 마른 침만 삼키면서 용맹하다고 자부해온 자기를 말할줄도 모르는 시라소니로 만들어버린 녀대원을 한동안이나 노려보았다. 앞에 떡 버티고 서서 씩씩거리는 미욱한 곰을 맞다든 토끼마냥 공포에 질려있던 조분옥은 참고 기다리다 못해 어째서 찾았느냐고 제편에서 먼저 물어왔다. 곽두섭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추기고나서 래일 자기와 함께 인민혁명정부에 가자고 말하였다. 그쯤하면 무엇때문인지를 짐작할수도 있었겠지만 조분옥은 곽두섭이가 자기를 사랑할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때문에 그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같이 가야 하는가고 물었다. 곽두섭은 손에 들고 공연히 부스러뜨리던 풀대를 홱 집어던지며 성난듯이 말하였다. 《나하구 결혼등록을 합시다.》 이 말이 떨어진 순간의 조분옥은 마치 씩씩거리며 노려보기만 하던 미욱한 곰이 드디여 앞으로 바싹 다가들며 그 육중한 앞다리를 들어 덮치려들 때 질겁한 암사슴이 취할수 있는 몸짓에나 비길만 했다. 그 녀자는 흠칫 놀라 목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바로 그의 뒤에는 커다란 바위돌이 막아서있었다. 조분옥은 등뒤로 바위돌을 더듬으며 비실비실 물러섰다. 《그건… 그건… 안돼요.》 애처롭게 구원을 청하듯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안되다니? 왜 안된단 말이요?》 곽두섭은 다시 한발자국 더 다가서며 따져물었다. 그의 눈에서는 불이 황황 타올랐다. 《그렇게 할수 없어요. 그렇게는… 될수가 없어요.》 바들바들 떨며 겨우 입술을 움직거린 그 녀자의 애원에 찬 눈에는 물기가 핑 돌아서 달빛에 반짝였다. 《그때문에 찾았다면… 전 그만…》 그 녀자는 말을 채 맺지도 못한채 홱 돌아서더니 자기 그림자를 앞세우면서 바삐 걸어갔다. 《아니 분옥동무!》 일시에 산골짜기가 무너져내리며 자기를 묻어버리는것 같은 환각속에 잠시 서있던 곽두섭은 이미 강변의 자갈밭을 지나 풀덮인 언덕을 치달아오르는 녀대원의 등뒤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 그 녀자는 대답하지도 멈춰서지도 않았다. 물소리를 짓누르는 그의 고함소리만 메아리쳐 되돌아왔다. 그 고함소리에 놀란 소쩍새는 골려대던 시쭉새쭉소리를 그쳤다. 달빛어린 풀언덕너머로 녀대원의 거뭇한 륜곽이 점점 더 깊이 줄어들어갔다. 곽두섭은 육중한 발로 자갈밭을 밟아울리고 자갈돌을 튕기면서 녀대원을 뒤쫓아 달려갔다. 포탄파편에 중둥이가 뭉청 잘리워 꺾어진 애어린 물황철나무근처에서 녀대원을 따라잡은 곽두섭은 이슬내린 풀섶의 오솔길을 막아서며 씨근거렸다. 《가더라두 어째서… 어째서 안된다는건지 설명해주어야 할것 아니요?》 《…》 조분옥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더 깊이 머리를 수그린채 잠시 공손히 서있다가 불시에 흐느낌소리를 내며 두손바닥으로 얼굴을 싸쥐더니 앞길을 막아선 곽두섭의 옆을 돌아서 그냥 가던 길로 빠지려들었다. 곽두섭은 그를 붙잡으려고 그 엷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순간 조분옥은 가볍게 어깨를 털어 그의 손을 물리치며 홱 지나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스스로 자기 손으로 곽두섭의 얼굴과 상처받은 발을 살틀히 만져주었던 그 녀자가 이 순간에는 자기 어깨에 곽두섭의 손가락이 약간 대이는것도 허용해주지 않았다. 비누냄새가 밴 한폭의 서늘한 바람을 던져주고는 그를 버리고 가는것이다. 그렇게도 가까왔고 다정했던 그 녀자가 그 한순간에 얼마나 아득히 멀어져버린것인가? 하루저녁사이에 전혀 가까왔던 사람같지 않게 아주 차디차고 매몰스러운 딴 녀자로 변해진데 놀라고 아연해진 곽두섭은 맥없이 서서 망연히 달빛속으로 사라지는 그 녀자를 보고만 있었다. 얄궂은 소쩍새의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곽두섭은 솥뚜껑같은 커다란 두손으로 귀구멍을 막으며 머리를 움켜쥐고 그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러다가 담배를 연거퍼 일곱대나 말아피우고나서 담배연기에 취하여 이슬맺힌 풀밭에 드러누웠다. 담배를 갓 배우기 시작했던 그는 처음으로 단꺼번에 그렇게 많은 담배를 피웠던것이다. 만일 그밤의 고요를 깨뜨린 총소리가 울리지 않았더면 날이 샐 때까지 그 이슬밭에 누운채 잠이 들었을는지도 모른다. 그 일이 있은 뒤부터 곽두섭은 담배를 지독하게 피우는 사람이 되고말았다. 조분옥은 곽두섭의 앞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어쩌다 길에서 마주치게 되였을 때에도 그를 먼빛으로 보기만 하면 피해버리군 했다. 그러던 조분옥이가 그후 얼마 안되여 처창즈유격구의 해산과 함께 부상자들을 데리고 어디로인가 먼저 떠나게 되였을 때 뜻밖에도 곽두섭을 스스로 찾아왔다. 작별인사를 하러 온것이였다. 이제 헤여지면 언제 다시 만날수 있겠는지 알수 없는 그자리에서 조분옥은 일곱식구나 되던 자기네 일가족이 왜놈들의 악착한 《토벌》을 당하여 하루아침에 몰살당했던 사실과 함께 자기는 피맺힌 원한을 품은채 타국땅에서 쓰러진 부모형제들의 원쑤를 갚고 조국의 광복을 이룩할 때까지 오직 투쟁외의 다른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지내기로 결심하고 총을 잡았댔다는것을 처음으로 말했다. 겉보기에는 조용하고 온순하고 연약한것 같이 보이는 처녀의 마음속에 그렇게 서리찬 결심이 깃들어있었다는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였다. 바로 그러한 자기 결심을 스스로 어길것이 두려웠기때문에 조분옥은 청춘이 봄날의 꽃눈처럼 그의 서리찬 마음속 다른 구석에 저절로 움트게 한 야릇한 감정의 싹을 더 돋아나지 못하게 문질러버리려고 필사의 노력을 한 모양이였다. 물론 그 작별마당에서는 녀대원이 이런 마음속 사연까지는 터놓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떠나버린 뒤에 그가 한 이야기들과 지나간 일들을 곰곰히 되새겨본 곽두섭자신이 스스로 추리해낸 분석이였다. 분옥이네가 어디로인가 떠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곽두섭이네도 처창즈를 떠났다. 곽두섭은 분옥의 소식을 모른채 반년가까운 세월을 흘러보냈다. 진창길에 고인 흙탕물로 주린 배도 채우고 사윈 우등불자리가 남아있는 동굴에서 흘러떨어진 생강냉이알도 주어먹고, 진펄의 꼬지개를 뛰여넘다가 애용하던 생당쑥물부리도 잃어버리고, 군견과 함께 추격해오는 적을 떼여놓기 위해 마지막으로 남은 담배마저 자기 발자국에 뿌리기도 하고, 신발 잃은 발에 나무껍질을 돌려감기도 하면서 자욱자욱 피로 얼룩지고 땀으로 적셔진 산과 들을 지나 내도산쪽으로 먼먼 걸음을 걸어가던 행군의 나날에도, 그 한적하고 외진 개척촌에까지 찾아들어온 적 《토벌대》와 피어린 싸움을 벌리던 격전의 나날에도 곽두섭의 눈앞에서는 아침마다 소금물에 세수를 시켜주군하던 녀대원의 모습이 자주 서물거렸다. 그의 마음속에 얼마나 훌륭하고 갸륵한 생각이 깃들어있는가를 알게 된 작별의 순간이후부터 더욱더 정이 가고 더욱더 잊을수 없는 녀대원이였다. 언제나 눈앞에 삼삼하던 조분옥을 다시 만난것은 마안산에서였다. 부대와 함께 마안산에 당도하여 헌 절간에서 지내고있던 어느날 땔나무를 하러 도끼를 차고 산에 올랐던 곽두섭은 자기가 울린 첫번째 도끼소리에 놀라 근처의 숲덤불속에 숨어있던 크지 않은 뿔없는 암사슴 한마리가 뛰여달아나는것을 보았다. 깊이 빠지는 눈때문인지 그 사슴이 잘 뛰지 못하는것을 본 곽두섭은 그놈을 손쉽게 붙잡아낼것 같은 자신이 들어 뒤쫓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깊이 빠져드는 눈은 곽두섭이한테도 동일한 경주조건으로 되였다. 사슴이 배에까지 닿는 눈속에 네다리를 빠뜨리고 서서 헐떡일 때 곽두섭이 역시 허벅다리까지 눈속에 묻은채 헐떡거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다가 숨을 돌려 다리를 뽑고 사슴한테 다가갈 기미만 보이면 사슴 역시 흘끔흘끔 돌아보며 내빼기 시작하는것이였다. 스무걸음남짓한 거리를 두고 둘은 두개의 산등성이와 세개의 골짜기를 지났다. 좀처럼 끝장나지 않는 이 따라잡기경기에서 지칠대로 지친 쌍방은 서로 상대방에게 양보를 간청했다. 《야 이녀석아, 이젠 벌써 열다섯걸음밖에 따라왔는데 그만치 애먹이구 게 섰거라. 널 쫓느라구 나는 나무도 못하구 도끼까지 잃었어. 그냥 돌아가면 영낙없는 비판이 날 기다려. 그렇지만 너를 안고가면 면할수도 있어. 널 잡아먹지 않구 우리 동무들에게 구경시키며 자랑만 하고 놓아줄테니 돌아서 더 가지 말구 기다려. 아, 이 귀여운 사슴아.》 참으로 귀여운 사슴 역시 헐떡거리며 애원에 찬 눈길로 그를 돌아보았다. 공포에 질린 어진 그 눈은 곽두섭이더러 그만큼 자기를 괴롭히고 이제라도 돌아가서 비판받지 않도록 처신하라고 간청하는듯 했다. 곽두섭은 크게 양보해서 이 자리에서 한번만 안아보고 즉시 놓아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사슴은 그런 얼림수에 속지 않겠다는 대답이였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 말없는 대화끝에 쌍방은 결국 다시 실력으로 결판을 볼수밖에 없이 되였다. 그리하여 사슴은 단 한걸음이라도 더 곽두섭을 떨궈놓으려고 애썼고 두섭은 단 한걸음이라도 더 따라잡으려고 애썼다. 정황은 두섭의 편에 유리해졌다. 어찌된셈인지 사슴이 한쪽 뒤다리를 살룩살룩 절기 시작한것이다. 마침내 한걸음한걸음 거리를 좁혀 사슴을 바싹 따라잡은 곽두섭은 바로 자기 눈앞에 김을 물물 날리는 사슴의 엉덩짝에서 흘러떨어지는 땀방울까지도 볼수 있게 되였다. 이젠 그만 앞으로 뻗으면서 뒤다리를 잡아쥐면 결판이 날것 같은 생각이 들자 곽두섭은 그 생각대로 날쌔게 행동했다. 분명 그의 손끝에는 기막히게 반질반질한 사슴의 털과 탄력있는 근육에 에워싸인 다리뼈가 감촉되였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인 느낌이였다. 어찌된셈인지 눈에서 불꽃이 번쩍 일고 뭐가 뭔지 모르게 온통 뒤범벅이 되여버리는 가운데 그는 어디로인가 굴러내렸다. 잠시후 정신을 차리고보니 손에 꽉 틀어잡히운것은 애잣나무 밑둥이였다. 굴러내리기 시작한 첫순간에 이마빡을 나무에 들이박았는지 시큰둥한 이마가 약간 부어있었다. 털모자를 쓰지 않았더면 터졌을것이다. 그는 온몸과 얼굴에 묻은 눈도 털념을 못한채 한참이나 앉아있다가 일어나 두릿두릿 주위를 살펴보았다. 사슴은 어디로 달아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기와 같이 굴러내리지 않고 산벼랑우에서 용케 달아나버린것이다. 그가 미끌며 굴러내린 자리가 나있는 산비탈은 몹시 가파로왔다. 에돌아가야 했다. 곽두섭은 허탈감을 느끼며 경사가 급하지 않은 산등성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휘청거리는 다리를 맥없이 옮겨놓으며 한참 앙상한 관목가지들이 듬성듬성 눈속에 허리를 묻고 서있는 밋밋한 산비탈을 헤쳐나가던 그는 멀지 않은 앞쪽에 있는 한 둔덕너머에서 움직거리는 누런 그림자를 보았다. 처음에는 엎드린 잔등만 보고 자기한테 잡힐번 했던 그 암사슴이 여기와있는줄로 여겼다. 그러나 곧 둔덕우로 얼핏 솟구치는 사람의 상반신을 알아볼수 있었다. 무얼하는지 그 사람은 다시 허리를 숙이고 주저앉았다. 곽두섭은 그리로 다가갔다. 바로 그의 눈아래 둔덕밑에서 어깨죽지와 잔등과 팔굽을 갖가지 천으로 깁고 또 덧기운 그리고 낡고 해진 소매굽과 허리밑 굽도리가 너슬너슬한 여름군복차림의 단발머리 녀대원이 깊은 눈속에서 풀뿌리를 캐고있었다. 그는 시뻘겋게 언 자그마한 맨손으로 깊이 쌓인 눈을 헤집고 그 눈밑에서 마른 풀을 찾아 무슨 풀인지 가늠해보고는 나무꼬챙이로 꽛꽛하게 얼어붙은 땅을 뚜지고있었다. 눈우에 뒤번져놓은 역시 색바랜 여름군모안에는 언흙이 그대로 묻어있는 도라지처럼 생긴 풀뿌리가 겨우 대여섯개밖에 담겨있지 않았다. 그 몇개조차 거의다 중둥이 끊어진 작은것들이였다. 헐벗은 연약한 녀대원의 그 눈물겨운 정상을 내려다본 곽두섭은 그냥 보고 지나칠수가 없어 허리춤에서 자기가 늘 차고나니는 단검집을 끌러냈다. 《그 꼬챙이루야 어떻게 언땅을 뚜져내겠소?》 동정어린 난데없는 말소리를 들은 녀대원은 모아쥐고 입김으로 녹이던 손을 입에서 떼고 얼굴을 돌렸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이 시퍼렇게 언 여윈 뺨을 가리우고 예리해진 턱에 검붉은 흙물이 묻어있는 그 녀대원의 얼굴에서 꿈결에도 잊을수 없었던 분옥의 모습을 발견해냈을 때 이 억대우같은 사나이는 얼마나 놀랐던가! 너무나 뜻밖이여서 곽두섭은 땅에 뿌리박고선 나무처럼 그자리에서 움직이지를 못하였다. 탁 풀어진 그의 손에서 칼집이 떨어져 눈속에 박혔다. 반대로 조분옥은 그를 알아본 순간 소스라쳐 놀라며 일어나더니 관목가지에 치마폭이 걸린줄도 모르고 그에게로 확 내달렸다. 정말 꿈인가싶은 순간이였다. 곽두섭은 뒤늦게야 분옥이에게로 마주 달려내려가 온통 눈투성이가 되여 일어나는 그 녀자를, 아니 일어나며 자기 가슴팍에 쓰러지듯 몸을 실리는 그 녀자를 꽉 그러안았다. 그 녀자는 곽두섭의 가슴에 안기면서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억세게 그러안은 곽두섭의 손밑에서는 그 녀자의 가냘픈 어깨와 연약한 잔등이 물결쳤다. 곽두섭의 가슴자락은 그 녀자의 걷잡을수 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로 축축히 젖어들었다. 이로써 곽두섭의 오랜 숙망이 드디여 이루어지고 두사람의 운명은 비로소 이 한순간에 융합되는듯싶었다. 그러나 곽두섭은 포옹의 그 놀라운 한순간이 지나자 곧 조분옥의 그 행동이 지난날에 있은 청혼에 대한 동의를 의미하는것이 결코 아니였으며 그의 눈물도 또한 그리웠던 애인을 만난 기쁨을 의미하는것이 아니였다는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하소할데 없는 설음과 원한을 안고지내던 외로운 사람이 터뜨린 설음의 폭발이였으며 원한의 분출일따름이였다. 서로 소식을 모르고 갈라져 지내온 그사이에 조분옥은 《민생단》혐의를 들쓴 《죄인》의 처지에 빠져들었던것이다. 《도대체 분옥동무에게 〈민생단〉혐의를 들씌우는 구실로 삼은건 뭐요?》 《병원에서 쓰던 가위가 없어졌는데 그걸 글쎄 제가 환자치료를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어디 가만히 버렸다구…》 《아니 동무가 환자치료를 방해해? 동무가 말이요? 그래 그게〈민생단〉이라는 조건이요?》 《네… 어디서 어떻게 임무를 받았는가구 자꾸 따지구… 고문하구… 그러더니 끝내…》 《개같은놈!》 너무나 결이 난 곽두섭은 죄없는 비단같은 사람에게 당찮은 죄를 뒤집어씌우고 때리고 가두고 저렇게 헌옷바람에 풀뿌리를 캐도록 헐벗고 굶주리게 하며 갖은 박대를 다해오고있는자를 당장 요정내버릴 작정을 했다. 《그 비렬한 악한이 어디 있소?》 눈속에 박힌 단검을 찾아들고 소리치는 곽두섭의 피발이 선 눈에서는 시퍼런 불찌가 일었다. 머리칼 한오리라도 함부로 다쳐서는 안될 이 귀중하고 신성한 녀성을 그 어느놈이 감히 모독하며 발길질을 하고 몽둥이질을 하고 굶주림을 안긴단 말인가? 《그러지 말아요. 제발 그러지 말아요.》 조분옥은 단검을 틀어쥔 곽두섭의 팔뚝에 매달리며 애소했다. 《가지 말아요. 가도 그 사람은 우리 삼포밀영에 있지 않아요. 헛걸음하지 말아요.》 결김에 곽두섭이 그를 뿌리치자 그 녀자는 눈우에 쓰러지면서도 곽두섭의 다리를 부둥켜안고 다시금 울며 가지 말라고 간청했다. 어진 그 녀자는 불행해진 자기 처지에 대해 말한 자신을 탓하면서 그렇게 분별없는 걸음을 정 가겠거든 차라리 자기부터 찔러 목숨을 끊어주고 가달라고 호소했다. 이때 그 비렬한 악한이 삼포밀영에 있지 않고 《민생단》혐의자들을 믿지 못하여 다른 외진곳에 아무도 몰래 따로 숨어지내고있었던것은 그자를 위해서나 분옥이를 위해서나 또한 곽두섭이를 위해서도 퍽 다행스런 일이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던들 어떤 불상사와 복잡하고 시끄러운 련쇄반응이 일어났을는지 알수 없다. 조분옥이와 다시 만났던 그 며칠후 어느 눈오는 날 곽두섭은《민생단》혐의자들이 들어있는 귀틀집으로 찾아가 적당한 구실을 붙여가지고 조분옥을 조용히 불러냈다. 그는 숫눈길을 헤치며 가문비나무숲속에 분옥을 데리고 들어갔다. 딱따구리가 둥지를 틀고사는 구멍난 어느 한 봇나무아래에 멈춰선 곽두섭은 반년전 처창즈의 어느 달밤에 고동하의 물결소리와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조분옥이에게 제기한적 있는 그 말을 다시 꺼냈다. 사람들에게서 억울한 버림을 받는 조분옥이였기에 더더욱 품어주고 마음의 기둥이 돼주고싶은 곽두섭이였던것이다. 그는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 분옥이에게 자기의 변함없는 믿음을 줌으로써 분옥이를 절망속에서 구원해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찾아온것이다. 그의 청혼을 분옥은 전번보다 더 놀라운 공포심을 가지고 맞이했다. 때아닌 하늘에서 내린 벼락을 맞기나 한듯 그 녀자는 불시에 온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그대로 눈우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손등이 터서 갈라진 자그마하고 가냘픈 두손으로 머리를 받쳐들며 눈을 감았다. 이전과는 달리 한방울의 눈물방울조차 슴새여나오지 않는 그 감은 눈시울에서는 짧고 성근 속눈섭이 파들파들 떨었다. 그 녀자는 한동안 그렇게 주저앉아있다가 눈을 뜨고 천천히 일어났다. 곽두섭을 쳐다보는 그 녀자의 눈에서는 그 어떤 차겁고 싸늘한 빛이 번뜩였다. 조분옥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안돼요.》 그 녀자의 귀여운 자그마한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왔다. 《안돼요. 그렇게 할수 없어요.》 그 랭철한 리성의 목소리와 싸늘한 시선밑에 깔린 조분옥의 참된 심정을 즉석에서 당장 가늠해볼만 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있지 못한 곽두섭은 대뜸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째서? 어째서 안된다는거요?》 그의 눈은 앞에 선 조분옥을 단꺼번에 불태워버릴것 같은 불길을 그 녀자를 향해 내뿜었다. 《어째서 그렇게 할수 없다는거요?》 《안돼요. 그러면 안돼요.》 다시금 그 녀자는 싸늘하게 그러면서도 타이르는듯 한 어조로 말했다. 사랑 그자체보다는 분옥이를 구원하려는 일념에 불타고있는 곽두섭은 일부러 세차게 따지고들었다. 《그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요? 반년나마 나를 속태워주고서도 부족해서 그냥 또 괴롭히겠다는거요? 대답해보오. 그래 왜 안된다는거요?》 조분옥은 눈을 내리깔며 또다시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것을 본 곽두섭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주먹을 꽉 틀어쥐였다. 《나를… 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바에는 그때 나를 왜 그냥 불속에서 타죽게 내버려두지 않았소? 어째서 나를 불속에서 끌어내구 살려주었나 말이요? 나를 이렇게 괴롭히자구 그랬소?…》 그는 부르쥔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불같은 말을 뿜었다. 《자기때문에 내가 밤잠두 못자구 가슴을 앓으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꼴을 두고보자고 살려놨소? 그래 이 곽두섭의 진정을 그렇게두 모르겠단 말이요? 말해보오, 씨원히 말해보오. 그래 내가 왜 마음에 들지 않는지 솔직히 툭 털어놓고 시원히 말해보오.》 곽두섭은 외면하며 비스듬히 돌아서는 조분옥의 눈덮인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아 자기쪽으로 돌려세웠다. 낡은 군복밑에서 약간 볼록하게 두드러진 분옥의 젖가슴이 눈에 뜨이게 우로 솟구쳤다가 서서히 꺼져내렸다. 그 녀자는 자기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며 더 깊이 머리를 숙였다. 불현듯 숙인 얼굴밑에서 두방울의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저하구 그러게 되면…》 그 녀자는 머리를 수그린채 울음에 잠긴 목소리로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거기서두 저와 같이… 〈민생단〉협의자루 몰릴거예요.》 겨우 그 말을 번지고난 조분옥은 두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였다. 그 녀자의 가냘픈 손가락짬으로 새여나온 눈물이 손등을 타고 가는 팔로 흘러내리며 너슬너슬해진 군복소매를 적셨다. 《그럼 그때문에? 단지 그때문에 안된다는게였소?》 분옥은 머리를 끄떡였다. 《내가 마음엔 드오?》 분옥은 역시 이번에도 머리를 끄떡였다. 그렇다. 머리를 끄떡였다. 사랑하는것이다. 사랑하면서도 아니 진정으로 사랑하기때문에 자기와는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조분옥이였다. 자기와 운명을 결합시키는것으로 하여 곽두섭이마저 자기와 같은 《민생단》련루자의 운명에 처하게 되는것을 바라지 않는 조분옥이였다. 그의 갸륵하고 진정된 마음에 가슴뜨거워진 곽두섭은 두눈을 슴벅이며 조용하고도 단호하게 언명했다. 《됐소. 그럼 우리 서로 약속합시다. 나에게 약속한다는걸 한마디만 하오.》 《네?!》 분옥은 흠칫 떨며 얼굴을 묻고있던 두손을 내리우고 머리를 들었다. 온통 눈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그의 아연해진 얼굴에서 여윈 애틋한 한쪽 볼이 경련적으로 떨었다. 《약속하오. 보고있지만 말구.》 두섭은 한손을 짚고있는 봇나무에서 터슬터슬한 껍질을 부스러뜨려내리며 대답을 기다리다가 다시 말했다. 《나는 약속한다는 대답을 듣지 못하고서는 돌아가지 못하겠소. 동무를 지금 상태대로 둔채 갈수 없소. 만일 약속해주지 않으면…》 그는 뜯어내던 껍질부스레기를 아무렇게나 활 쥐여던지고 량손 엄지손가락을 솜군복상의의 혁띠에 걸었다. 《나는 그 말을 받고 마음을 갈앉힐수 있게 될 때까지 언제까지든 분옥동무의 곁에 있겠소. 〈민생단〉혐의를 받을만 한 〈죄〉를 일부러 지어서라두 분옥동무와 같이 4중대에서 함께 지내겠소.》 《아 그런 말은… 그런 말은 말아요.》 그 녀자는 자기의 조그만 손으로 곽두섭의 량손을 잡으며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그 말만은 제발…》 《약속하오.》 《우리가… 우리 사이에 약속이 있었다는걸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주시면… 그걸 말씀하면 거기서도 끝이예요… 그걸 말하면 안돼요. 나도 끝이구… 그걸 절대로 말씀하지 않겠다구 제앞에서 맹세해주시면…》 그 녀자는 말을 맺지 못하고 두무릎을 꿇고앉아 곽두섭의 두다리를 걷어쥐며 거기에 자기의 눈물에 젖은 얼굴을 묻었다. 《그럼 약속하겠소?》 분옥은 머리를 끄떡였다. 곽두섭은 조분옥의 겨드랑을 잡아일으켜세우고 시뻘겋게 부어오른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분옥동무가 승인하기전에는 절대로 우리의 비밀을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소. 맹세하오.》 분옥은 곽두섭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속삭였다. 《약속해요.》 이리하여 눈내리는 마안산의 삼포밀영근처 가문비나무숲속의 한 봇나무밑에서 두사람만 아는 비밀약속이 성립되였다.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모르는 이 혼약을 축복해준것은 소리없이 마안산에 내린 함박눈송이들뿐이였다. 세상에 아마 사랑의 약속이 이루어진 기쁜 자리에서 웃을 대신 울어버린 약혼자들은 이들 두사람밖에 없을것이다. 비밀약속을 한 두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오래도록 흐느껴 울고 또 울었다. 서로의 람루한 옷자락을 적셔준 그 눈물이 그들이 바꿔가진 약혼선물이였다. 애인에게 아무것도 줄것이 없어 은근히 마음썩이고 앉았던 조분옥은 무슨 생각이 났던지 자기 군복에서 왼쪽 웃호주머니에 달려있던 작은 놋단추를 뜯어내여 같은 자리에 달려있는 곽두섭의 단추와 바꿔달아주고 자신도 바꿔달아가졌다. 어느것이나 같은 별이 새겨져있는 놋단추였다. 《이 단추를 죽을 때까지 제 가슴에서 떨구지 않겠어요.》 자기의 심장우에 달린 곽두섭의 단추를 만지며 그는 처음으로 눈물어린 얼굴에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비밀약혼을 한 다음 그들 서로는 언제 한번 상대방에게 한순간의 엷은 웃음이나마 더는 보여주지 못했다. 어쩌다 며칠만에 그립던 모습이 눈에 띄워도 서로 가까이 갈수가 없었고 태연을 가장하고 가까이 가는 경우에도 반가움을 표현해서는 안되였다. 한쪽은 응당 멀리하고 박대해야 할 《민생단》혐의자니만치 마주서는것조차 꺼리고 싫어하는 사람처럼 처신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위장을 위해서 남보다 더 그렇게 해야만 하였다. 그런 처지가 곽두섭의 마음을 몹시도 괴롭혔다. 애인과 마주쳐도 반가움을 표현할수 없고 한두마디 말을 건늬는것마저 꺼려야 하는 자신이 가엾고 또 약혼자에게서 정겨운 눈빛도 정다운 말도 받아보지 못하고 지내야 하는 그가 불쌍해서 곽두섭이 남모르게 사나이의 눈물을 흘린적도 한두번만은 아니였다. 심지어 분옥을 《민생단》혐의자들의 중대인 4중대에 남겨두고 교하, 액목 방향으로 원정의 길을 떠나는 작별의 마당에서조차 곽두섭은 그와 단 한마디 잘 있으라는 말도 할수가 없었다. 어찌 하면 영원한 리별로 될수 있는 순간이였다. 실로 살아서 다시 만날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거의 가질수 없는 처지에 있는 약혼자를 두고 떠나는 걸음이였다. 총검의 숲을 헤치며 먼길을 가야 할 이번 걸음에 곽두섭자신 또한 성한 몸으로 마지막까지 살아남게 되리라고 생각할수 없는 출발이였다. 그럼에도 그는 불행한 약혼자와 리별의 악수마저 하지 못하였다. 못쓸 탄알 세알밖에 가진것 없는 애인에게 단 한알의 성한 탄알도 쥐여주지 못하였다. 약혼자와 그렇게 남남처럼 헤여지는것이 너무도 가슴쓰린나머지 그가 뒤를 생각함이 없이 분옥이에게로 다가가려 하였을 때 분옥은 매서운 눈길로 그를 쏘아봄으로써 분별없는 자멸행위를 그만두도록 제때에 일깨워주었다. 그것이 분옥이가 마지막으로 자기에게 보내준 작별인사였다. 그는 뒤에 남은 약혼녀에게서 손저음도 받지 못하였고 자신도 손을 흔들어주지 못하였다. 불쑥 솟구쳐나오는 눈물때문에 뒤돌아볼수도 없었다. 그 눈물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는 이미 지나온 숲이 뒤에 남은 사람들을 죄다 가리워버리고만 때였다. 그렇게 헤여진 다음 매정한 그 겨울이 지나고 무정했던 봄과 답답하던 여름과 한산했던 가을이 지나갔다. 지금은 또다시 겨울… 언제 다시 만나랴? 곽두섭은 또다시 가둑잎담배를 말아물었다. 밤은 고요히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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