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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세월은 헛되지 않다
1
《3530!》 문따는 소리와 함께 들리는 교도관의 웨침소리. 33년세월 수천수백번 들으면서도 결코 습관될수가 없는 철문 열리는 소리. 교도관의 목소리… 때로는 징벌을 예고하는 악청, 때로는 운동시간 알리는 웨침… 어쨌든 조건반사를 일으키듯 긴장과 반발심, 증오와 반항의식으로 온 육신이 굳어지는 순간이다. 무엇때문에 부르겠는가를 가늠하는것은 다음순간의 일이다. 성태가 복도를 따라나가는데 뒤에서 교도관이 일러주는 말소리가 났다. 교무과장 리상규의 부름이라는것이다. 리상규가 전주에서 여기 교무과장으로 온지는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는 와서 며칠안에 인차 안성태를 불렀었다.… 성태는 교도관의 호송으로 방에 들어갔다. 리상규는 교도관더러 나가서 부를 때 오라고 했다. 성태와 마주앉은 리상규의 미소어린 눈빛이 안경알뒤에서 의미 있게 잔잔히 물결쳤다. 리상규는 몸집이 좋고 두리두리한 얼굴에 이제는 쉰다섯살이 넘었건만 별로 나이가 들어보이지 않는다. 성태는 이 인간의 인생에 다시금 의혹이 갔다. 크게 증오하고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마음이 끌리는것도 아니다. 그 역시 남조선사회가 만들어낸 하나의 류행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그리고 또 천천히… 제가 언젠가 보낸 년하장이 생각나시는지요?》 성태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면서 안스러운감이 들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를 위해주느라고 쓴것이였다. 받을 때는 고마운 생각도 들었으나 그것이 타협과 절충과 중용지도를 설교하며 마침내는 세상만사를 체념하고 굴종해버리라는 소리같이 여겨지던적이 있었다. 언젠가 부산으로 떠나기 직전의 긴장된 때였었다. 그 년하장이 마치 뒤다리를 잡아당기는것 같아 화가 나서 그것을 쪼각쪼각 찢어 《침술학》책갈피속에 넣었던것이다. 그런 기억이 떠올랐다. 상대방을 지그시 바라보던 리상규가 말했다. 《천천히 그리고 또 천천히… 그때 그렇게 쓴걸… 량해를 바랍니다.》 성태는 다소 놀랐으나 그런 내색은 않고 덤덤히 앉아있을뿐이였다. 헤여진지 8년나마 지났으니 그새 이 사람한테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수가 없었다. 《안선생으로서는 그렇게 하는것이 좋겠다고 해서 그랬고… 저는 반대로 그렇게 살고싶었기때문에 그리 썼댔지요. 한가지 말이지만 나자신과 안선생한테는 각기 다른 의미로… 리해하시겠습니까?》 이때도 성태는 고개만 약간 움직였다. 《제가 그렇게 살고싶다는건… 교도소밖의 사회생활을 외면하지 말자는 의미였죠. 왜냐하면 난 인생을 이제껏… 뭐라고 할가. 쾌락에 빠졌다고 할가. 미친듯이 향락주의에 … 그래서 그걸 늦추자고 또 거기서 물러나자고 <천천히, 천천히> 하고 자기한테 말했지요.》 리상규가 눈길을 책상우에 떨궜다. 성태는 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의 생활에서는 무슨 변화라도 생겼는가? 그가 《공무원》의 허울을 쓰고있는 한 달라질수 없다는 굳어진 생각, 이중생활이면서 보다 허위에 가까운듯 한 그의 생활관이 모멸감과 혐오를 자아냈다. 꽃다운 청춘들이 민주와 통일을 위해 목숨도 서슴없이 바치고 사선을 넘어 북쪽길에 오르고 할 때 오히려 그들을 《보안법》에 걸어 투옥하는 권력의 하수인으로 남아있을진대 그를 어찌 다르게 볼수 있으랴. 물론 그가 갑오농민전쟁때 자결한 자기의 증조부의 고결한 뜻을 잊지 않고 더구나 광주사태이후 미국을 달리 보면서 《백년간의 교훈》을 어쩔수 없다고 통탄한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도 그는 신문 한장 보지 않고 몸까기운동을 하느라고 짬만 있으면 수영장에 가있었고 가족은 멀리 광주에 둔채 교도소밖에서 녀성들과의 교제를 즐기는 그런 생활을 계속해왔었다. 리상규가 다시 시선을 들었다. 《안선생은 날 현실도피라고 했지요? 서울대 철학과 졸업생으로서, 더구나 4.19세대로서…》 안성태는 말했다. 《현실도피라… 그렇소. 그때만 해도 권력이 란무하는 속에서 그래도 그건 별로 위험치 않다고 생각했소. 말하자면 일종의 정치적인 기권이라 보구서 말이지. … 그런데 찬성도 아니고 반대도 아닌것이 때로는 더 무섭다는것을 이젠 똑똑히 알게 되는구만.》 성태는 그 특유한 빠른 말씨로 준절히 내뿜었다. 《통일운동자인 내 시점으로 볼 때 좀 가혹한 말인지는 몰라도 당신은 반통일… 분렬주의자라고밖에 달리는 말할수 없지 않소?》 《네?》 리상규는 도수높은 근시안경을 황급히 벗어들었다. 상대방을 더 똑똑히 보려는것인지 아니면 성태의 찌르는듯 한 시선을 일부러 근시의 분명치 않은 시야속에 얼버무려보려는것인지… 근시안경을 벗은 이 순간에 그는 자신을 청맹과니로 위장해보려는지 모른다. 안성태는 한결 음성을 낮췄다. 《물론 내 말이 과할수 있지만 달리는 말할수가 없구려… 물론 난 당신을 인간이하로 사는 그 수많은 반공광신자들과는 달리 보는건 사실이요. 그래도 조금이나마 민족의 얼이라도 있는 사람으로… 량심을 가진…》 그러자 리상규가 다시 근시안경을 쓰고는 시선을 딴쪽으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량심은 무슨 량심이겠어요. 가해자한테 량심이 있으면 몇푼어치나.》 그날은 이것으로 끝났었다. 이틀후에 리상규가 안성태를 다시 불렀다. 성태는 어떤 정신적우위를 느끼며 리상규한테 물어보았다. 《한데 어떻게 이렇게 과장으로 승진돼 왔소? 꽤 사업실적이 있었던 모양이구만.》 《아니 그 반대지요.》 《그렇다면?》 《승진의 방법으로 밀어던지는 수가 있지 않아요? 교도소안이라고 정쟁이 없는줄 아세요?… 더이상은 여기서 말할순 없구. 난 아마 여기에 오래 있지 못할거라구요.》 《믿어지지 않소. 여긴 비전향장기수들이 제일 많이 집중된 곳 아니요? 일반좌익수들도 그렇고.》 《바로 그래서 말이죠. 날 이런데다 내세우는거죠. 그렇게 해놓고는 실력이 없다, 안되겠다, 얼마나 많은 감투를 씌울수 있겠어요?》 《당신네 일은 정말 알다도 모르겠어.》 《안선생은 여기 대전에도 교정청이 나온걸 아시죠?》 《왜 모르겠소. 그게 90년이던가, 91년이던가.》 《바로 그래요. 당국에서 <흡수통일> 운운하면서 <좌익수>들 특히는 비전향수들문제를 또 한번 떠올린거죠. 하지만 지금은 옛날 같지 않으니…》 《법무부》는 교정국직속으로 서울, 대전, 광주, 대구에 각기 지역별로 4개의 교정청을 내왔다. 《좌익수》들이 점점 늘어나고 비전향장기수들의 문제가 이제는 언론에조차 공개되는 형편에서 기구를 확대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했던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뜻대로 일은 진행되지 않았다. 력사의 흐름을 막을수 없다는것을 폭압자들이 어찌 알수 있으랴… 리상규가 말했다. 《여기 있던 라구표씨가 전주의 교무과장으로 갔지요. 얼마 안 있다가 반장인 내가 여기로 승진이 되여 오더군요. 무슨 감투끈인지 알게 뭡니까. 라구표씨가 거기 간건 림시일겁니다.》 《라구표… 그 살인자!…》 《안선생, 어성 낮춰서 좀 조용조용…》 리상규로서도 그 살인자라는 말이 무서웠던 모양이다. 《난 내놓고 그놈한테 그렇게 말하군 했는데… 그래서 그 절름발이는 날 피하던가 무슨 건덕지가 있으면 보안과에 말해서 나한테 징벌을 가하고…》 《성미는 고약하더군요. 심통이 삐뚤어졌어요. 자기밑에서 나 같은게 거칫거렸던거죠. <법무부> 교정국이나 아래 <교정청>에 쭈욱 통해있더군요.》 《안기부 첩자일게요.》 《아, 선생. 과도한 말씀 자꾸자꾸… 그래서 내가 <천천히 그리고 또 천천히> 했던거죠.》 리상규는 히뭇이 웃기까지 했다. 《안선생, 한가지 부탁이 있어요. 이제부터 잡지를 보게 되는데 말이죠.》 《뭐라구? … 무슨 잡지?…》 어쩌다 일반수들한테서 비밀리에 다 지나간 신문을 얻어보았고 고작 스포츠신문이나 생기는 정도였는데 무슨 잡지를 본다는건가. 《이번에 <천주교장기수가족후원회>에서 큰일을 성사시켰지요. 사회의 물론을 걷어안고 감옥담장에 파렬구를 낸셈이죠.》 그 말에 놀란 안성태는 걸상에서 엉거주춤 일어서기까지 했다. 리상규가 간단간단 설명을 했다. 《천주교장기수가족후원회》가 처음으로 단체명의로 된 령치금을 개별적대상한테 넣을수 있게 하는 길을 틔워놓았다는것이다. 그때까지 편지거래도 가족외에는 극히 제한되였다. 검열에서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깔아뭉개고 장기수한테 주지조차 않았다. 그런데 편지거래가 가족외에 개인 한사람정도 그리고 단체의 경우에 한개 단체로 허용되기까지 얼마나 힘겨운 투쟁이 있었겠는가.… 그렇게 되자니 사회적인 분위기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겠는가 하는것을 성태는 상상해보았다. 《정말 고마운분들이요.》 리상규가 말했다. 《물론 교회가 인권과 인도주의견지에서 성취한거지만… 그건 장기수 여러분네가 쟁취한거나 같애요. 여러분들이 그만큼 오랜 세월 변함없이 버티고있으니 민심이 여러분들한테 안 쏠릴수가 있어요. 리인모장기수의 이북송환이 사회계에 힘을 주었구요.》 《그래서… 난 무슨 잡지를 보게 되오?》 《<시사져널>과 <한겨레21>… <한백교회>에서 안선생앞으로 계약이 되게 했더군요. 대금은 거기서 물지요.》 《고맙소. 거기다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주시오. 그런데 <한백교회>란 무슨…》 《한나에서 백두까지란 뜻이구요. 말하자면 통일신앙을 내세우는 교회이죠. 나도 깊이는 그 교회를 모르겠어요. 그 중심지가 경기도 과천시에 있다는데…》 (통일신앙…) 성태는 처음 듣는 말이나 통일이라는 그 말때문에 대번에 그 신앙에 어떤 신뢰감이 가는것을 느끼였다. 성태는 어쨌든 기뻤다. 그리고 리상규의 말처럼 이것이 우리자신들이 달성한 승리라는 말도 옳다고 여겼다. 종교단체나 민주단체가 단순히 자선사업으로 시작한것은 아닐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통일일군이라고 부른다고 하지 않는가. 통일, 통일이라는 이 숭고하고도 절박한 과제를 생사존망으로 여길 때 누가 가만히 있을수 있겠는가. 성태는 눈굽이 뜨거웠고 세월이 무심하지 않다는 말이 가슴을 쳤다. 리상규가 말했다. 《그래서 말이죠. 제 아까 하자던 부탁인데…》 《오, 참 무슨 부탁이라고 했지.…》 《잡지를 보고 분석종합해서 한주에 한번씩 만나서 그때마다 저한테 좀 얘기해주었으면 해서요.》 《아니 과장님, 과장님도 좀 이제는 신문, 잡지랑 봐야죠. 아직두 술을 마시겠소?》 《하, 이것 참 술은 이젠 나이탓인지 좀… 한데 말이죠, 내가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고 봐야 할건 보지 않고 그런것만 본다고 남들이 이상히 여길가봐 두려워 그런것도 아니라구요. 믿어주시오. 난 안선생의 시각에서 선생의 견해로 분석된걸 듣고싶다는거죠.》 《그런데 마주앉아 그런 정세얘기만 해서야 남이 뭐라구 하겠소?》 《하, 건 걱정마시오. 다른 사람 들어오면 전향공작으로 내가 철학강의나 하는걸로 알게 하면 되는거죠. 선생도 철학 많이 공부하셨겠죠. 하지만 제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사만 전공하다나니 개별철학자들 얘기 재미나는것이 좀 있을거라구요.》 《하긴 그게 좋겠소.》 《그럼 그렇게… 정세에서는 미조관계에 대해 특별히, 그것을 기본으로 해서 요즈음 미조관계가 날카로와지고 그것이 한반도통일문제와 직결되여있으니까.》 《미조관계가 아니라 조미관계…》 《하, 그렇지요. 조미관계…》 리상규는 사과하듯 미소를 지으며 《이남현실이 이렇습니다. 그렇게 말들 하니.》 하고 말했었다. 이렇게 되여 거의 1년 가까이 일주일에 한번 또 두주일에 한번 리상규와 마주앉게 되였다. 누가 들어오면 리상규는 미리 준비해둔듯 일반적인 철학론의를 펴놓는척 하였다. 이 1년사이 리상규의 말대로 한다면 그의 《현실참여》가 어지간히 깊어졌다고도 볼수 있겠다. 하지만 청년시절부터 형성된 그의 고질적인 악습인 《인생은 즐겨야 한다.》는 버릇이 뒤생활로 그냥 남아있음직해서 그의 이 2중3중의 정신생활에 성태는 때로 혐오감을 금할수 없었다.
2
그런데 오늘은 만나기로 약속하지 않은 날이다. 바로 엊그제 만났는데… (무슨 일일가. 어데로 옮겨가는가. 그런 기미가 없었지.… 어느 일반수교도소일가.…) 그러나 성태가 들어서서 걸상에 앉기 바쁘게 제편에 앉아있던 리상규가 도리여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앞으로 기울여 성태를 눈여겨보며 급히 속삭이듯 말했다. 《안선생, 소식 알죠?》 리상규가 출입문쪽을 흘끔 바라본다. 《무슨 소식?》 《<최고령도자 김정일각하께>라고 하면서 미국 클린톤대통령이 담보서한 보낸 토픽뉴스말이죠. 감방안의 통방통신이 가만있을라구요.》 《들었소. 어제 밤에.》 《빠르군. <전대협>친구들이겠지. 어찌나 날쌔게 정보를 나르는지… 어쨌든 놀라운 소식 아닌가요?》 《놀라울 정도가 아니라 경탄할만 한… 나로서는 이런 날을 보게 된게 정말… 헛되이 살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구 눈물이 나왔소. 이 지옥같은 감옥, 기한없는 옥살이에도 끝장이 있다는 희망에 잠을 이루지 못했소.… 나라의 통일을 위해 한몸 바친다고 나섰건만 한 일도 없이 이렇게 33년간 나이 예순다섯이 되도록 갇혀있으면서도 그저 남쪽땅에 군림한 독재<정권>과 맞서있다는 생각만 했거든. 한데 통일문제에 잠재해있는건 조미관계가 근본문제의 하나라는걸 새삼스레 깨닫게 되였소.》 성태는 걸상등받이에 몸을 한껏 제치였다. 오랜 세월의 옥살이, 이런 자리에서 이처럼 가슴이 펴지고 호흡이 커지는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맞은편의 리상규가 책상우에 두손을 올렸다가는 다시 내리우고 그러다간 상우에 흩어진 신문지들을 모아놓느라고 한다. 헛되이 반복되는 그의 손동작, 그의 생각은 딴데 가있는것이 분명하다. 침착한 그가 오늘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있다. 그러다가 몸을 바싹 책상에 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선생, 이북의 김정일최고사령관은 어떤분인지 내가 너무 모르고있다는 자책이 드네요. 몹시 알고싶어요. 선생네는 책들을 몰래 보시는것 같은데.》 《책들이라니?》 성태는 일부러 놀란척 하였다. 《시치미를 떼지 마시라구요. 교도소안에서 20여년을 살아온 나한테 그만한 눈치도 없겠어요? 전주에 있을 때도 재미교포들이 쓴 <분단을 뛰여넘어>라는 책이 은밀히 돌아가는걸 내 모른줄 아세요?》 《분단을 뛰여넘어》는 북에서 월남했다가 《도미》하여 두뇌덕분에 겨우 생활터전을 마련한 이제는 재미교포가 된 사람들이 공화국에 갔다와서 쓴 수기들을 묶은것이였다. 안성태가 전주에서 은밀히 그 책을 읽은것은 사실이다. 안성태가 입을 꾹 다물고있자 리상규가 안경을 벗어 한손에 들고 더욱 앞으로 몸을 숙이며 조바심을 쳤다. 《여기 와서도 내 다 알아요. 미국에 있는 홍동근목사와 그의 부인 홍정자씨가 쓴 책도 지하에서 돌아간다는걸.》 《지하》라는 말에 성태는 미소를 지었다. 그럴사한 말이라고 생각되였다. 그러니 리상규는 저네의 눈길과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그 량심수들의 은밀한 련계를 《지하》라는 말로 인정하고있는것이다. 성태는 주객이 전도되는듯 한 현실앞에서 기쁘고 흥분되였으나 몇십년세월 습관되여온 경계심을 늦추지는 않았다. 상대방이 애타하는것이 재미난다고 하면 어페이고 일종의 가학성음란증과도 같은 조야한 쾌감이라 하겠지만 아무튼 그러는 리상규앞에서 자신의 존엄과 우월감을 느끼게 되는것은 속일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최고령도자 김정일각하》라는 존칭으로 시작된, 전대미문의 정치적폭풍을 휘몰아온 그 담보서한때문이라는것을 너무도 똑똑히 알게 되는것이였다. 리상규는 마침내 한수 더 앞질러 단도직입으로 나온다. 《안선생, 재카나다교포 유작촌씨가 쓴 <전통과 계승>이라는 책 보셨을테죠?》 성태는 그 말에 놀라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한테 이 책의 내용을 얘기해주리라 벼르던 참이였으니까. 《안선생은 안 보실수 없지요. 그러지 않아도 보안과장은 안선생의 방에 일반수는 물론 교도관들까지 침맞으러 다닐수 있게 허용한걸 후회하는것 같애요. 밖에 나가면 치료비가 비싸서 교도관들까지 거기 가니까 이제야 별수 없지요. 일반수들중에서 1급수들, 소지들 그리고 <좌익수>들은 어떻구요. 지금 창원에 간 오도엽, 전대협의장 송갑석 등등 문제이지요. <도서담당>의 뒤를 캐보자고 보안과장이 말하는걸 내가 좀더 두고보자, 보다가 큰일을 들춰낼수 있다 하구 말렸지요.》 그러다가 제풀에 리상규가 웃었다. 《이건 뭐 내가 위협공갈하는게 아니라구요. …다른 의미로 바꿔서 생각해보세요. 옛날 우리 어머니의 말이 우물집 말과 의원집 말은 붙어있지 못한다고 했지요. 우물집이나 의원집은 비밀이 없다는거죠. 그러니 선생은 좀 조심하라는 말이지요.… 말하자면 <천천히 그리고 또 천천히>죠.》 《그럼 다음날부터… 여러날 걸리겠는데 일주일에 한번정도로는.》 《그럼 일주일에 두번.》 《두번씩이나? 그러다가 의심이라도.》 리상규는 머리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내 걱정말라구요. 그러지 않아도 누가 나더러 두번이나 권고를 해서 잡지를 봤지요. <말>지라구 처음 보는 잡지였어요. 그게 며칠전인데 몇년전거였지요. 89년 2월호… 거기에 실린 <교도관이 수인으로>라는 글을 읽었어요. 제목부터 호기심나더군요.… 전병용이라고 12년동안 교도관에 복무한 사람 있어요. 그 전씨가 어떻게 되여 교도관에서 수인으로 되지 않으면 안되였는가. 참말 리해가 가고 동정이 가더군요.》 성태가 말했다. 《량심을 지키자니 그럴수밖에 없었겠지…》 그 말을 못 들은척 리상규가 입을 열었다. 《일주일에 두번… 이례적이라는거죠? 그래서 담당교회사를 바꾸자구 해요.》 《박석기를 또 담당시키는거 아니요?》 《아닙니다. 안선생두 잘 아시는… 녀교회사죠.》 《누군데?》 《전주에 있던 방소희라구.》 《방소희?》 성태는 놀랐다. 전주에 있다가 교회사를 그만두고 여기 대전의 대학교수와 결혼한줄로 아는데 어떻게 그가 다시 교회사로 될수 있는가? 《수녀원에 들어가려는걸 우리 집사람부탁도 있고 내가 붙잡았지요. 몇년전 같아도 수녀원에 가는걸 말리지 않았을거죠. 하지만… 그럴수 없는것이 내 심정이라구요.》 그러면서 리상규가 간단히 설명했다. 독실한 카톨릭교신자인 방소희는 한마디로 남편이라는 사람한테서 배신을 당한것이다. 남편은 미국의 어느 대학 대학원에 가있더니 미국녀자와 눈이 맞아 거기에 영주하게 되였다. 방소희는 사랑과 결혼과 가정, 인생전체를 저주하면서 수녀원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자신은 고아나 다름없었다. 전남대학교에서 지금도 교수로 있는 리상규의 안해도 방소희를 동정해서 그의 일을 조처하려고 일부러 대전에까지 왔었다. 리상규의 말에 의하면 자기 부부가 이 문제에서처럼 그렇게 일심동체가 되여 의견이 같아보기는 처음이였다는것이다. 방소희한테는 아이도 없었다. 첫 아이가 태여나서 일년도 못되여 갑자기 병으로 죽은 다음은 더 생기지도 않았다. 수녀원에 들어 안간다고 해도 당장 일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약간이라도 교회사경력이 있고 독신이라는 조건이 크게 작용해서 다시 교회사로 입직시킬수 있었다고 한다. 《방소희교회사를 이제 불러오겠어요.… 아 참, 오늘 <교정청>에서 불러서 갔지.… 그도 안선생을 담당하는걸 기뻐하더라구요.… 한데 좀 말해둘게 있어요.》 리상규는 약간 줌저리는 기색이였다.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안경알을 닦아 다시 끼였다. 《우리 <편지담당>이 해임된걸 아시죠?》 성태는 의아했다. 그 해임이 자기한테 무슨 상관인지 그리고 편지를 검열하던 교회사가 왜 갑자기? 《사실은 그 <편지담당>이 방양과 외사촌간이죠.》 리상규는 방소희를 여전히 처녀때처럼 부른다. 《안선생한테 들어오는 편지… 방양이 어디선가 직접 가져다주기도 했고… 그 조영미씨가 보내오는 편지를 도장은 찍었지만 등록은 안하고 전달해주었지요. 별로 문제될 내용은 없어서 그랬다고… 우에서 누가 물으면 가족외에 편지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다른 건도 있고 해서 그것까지 책임지고 물러났어요. <교정청>에서 혹독한 징벌이 있었지요. 그런 경우 흔히 공무원의 직급을 낮춰 어디 다른 자리에 옮겨놓는데 이 경우는 다르더라구요.》 성태는 얼떠름해졌다. 교도소밖에서부터 방소희가 자기한테 왼심을 써준것은 고맙다. 한데 조영미의 편지를 검열도장까지 찍었는데 왜 《편지담당》이 책임지고 정도이상의 벌을 받아야 하는가. 하긴 등록을 안했다는것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하다면 왜 《편지담당》이 등록을 안했는지. 규정때문에 그랬을가. 방소희는 어떻게 여기서 빠질수 있었는지. 그 외사촌오빠라는 《편지담당》이 다 뒤집어썼는가.… 리상규가 말을 이었다. 《난 교도소장한테 그 벌이 너무 지나치다고 정식 제의를 했지요. 멋도 모르는 교도소장은 <교정청>을 거치지 않고 <법무부> 교정국에 직접 말했구요. 그러자 벼락은 <교정청>에서 떨어졌어요. 아차, 소장이 실수했구나. <교정청>에서 내린 벌책인데 거기를 뛰여 넘어 <법무부>에 하다니… 하지만 그것두 아니였어요. 의문은 방소희한테서 풀렸어요.》 성태는 갈피를 잡을수 없는 속에서 어떤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숙이며 리상규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리상규는 안성태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안선생, 혹시 조민하라는 이름을 들은적 없어요?》 잠시 성태는 기억을 더듬었다. 《없소.》 성태는 머리까지 흔들어 부정했다. 《대전<교정청>에 있는 조민하차장이 바로… 조영미양의 아버지, 아니 아버지였댔습니다. 호적에서 지워버리기 전까지는.》 《뭐? 뭐라구?》 가뜩이나 의문에 찼던 성태의 머리는 온통 혼란에 빠졌다. 그럴수 없다는, 여기에 무슨 오해가 있을수 있다는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것은 이 몇년간 조영미와의 편지를 통해서 이루어진 뉴대가 혈육의 정처럼 이어지고 조영미를 자기가 바라던 사람으로 키우는것에서 커다란 대견함이 매일, 매 시각 커가고있어 세월이 헛되지 않음을 새삼스레 느끼는 그러한 지금이였기때문이다. 《알겠소. 알겠소.》 사실은 아무것도 알수 없는 혼돈상태에서, 아니 구태여 더 알고 싶지 않는 거부의식으로 안성태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출입문을 향했다. 뒤에서 리상규가 무슨 말인지 했으나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복도로 걸어나와 교도관의 뒤를 따라 사동으로 향하면서 침착하게 사리를 따져보려고 애썼다. 그제야 안성태한테는 이상한 의문이 떠올랐다. 그것은 왜 자기가 조영미에게는 아버지가 없다고 생각했는가 하는 그것이였다. 조영미라고 아버지가 없을수 있는가. 앓아서 죽었다고 생각했던가? 그래서 김계순이 홀몸으로 되였다고 여겼는가? 아니, 그런 추측도 해본적 없다. 안성태가 김계순이 살아있다는것을 눈으로 보고 알게 된것은 8년전 부산 영도의 해망동 도래굽이에서였다. 훨씬 이전에 간병부 정용식이 김계순의 존재를 실날같이 이어준것은 너무도 기억에 삭막해진것이다. 부산행 이전까지는 누이동생 석순이가 김계순이라는 이름을 단 한번도 비친적 없었다. 그 이듬해 12월에 왔을 때 석순이 김계순의 죽음을 눈물로 알려주었었다. 그뒤에 있은 조영미와의 편지거래에서 조영미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말은 물론 한마디도 비치지 않았다. 어쨌든 성태는 마음이 혼란되였다. 영미한테서 받은 그 편지들을 다시금 눈여겨보면서 거기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여러가지 의문을 풀수 있을것 같아 그는 발걸음을 빨리 하였다. 뒤에서 교도관이 투덜거렸다. 《이건 왜 불맞은 놈처럼 바빠하능기? 뒤가 마려워서 그러능기?》 독감방안에 들어서고 뒤에서 문닫기는 요란한 소리가 나서야 성태는 펀뜩 정신이 들었다. 《교정청》 차장 조민하가 조영미의 친아버지라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호적을 지웠다고 했지? 만약 그랬다면 그렇게 할수 있는 힘은 오직 권력과 돈에 의해서만 생겼을것이다. 조영미가 제 아버지였던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것은 명백하다. 그 아버지한테서 떨어져나와 그와 결별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장기수인 나한테 편지를 쓰겠는가. 편지는 정신적인 교감이지 심심풀이는 아니다. 안성태는 생각했다. 조민하라는 인간이 딸을 이미 호적에서 지웠다고는 하나 그 딸이 장기수한테 편지를 낸다는것을 알면 속이 뒤틀리고 울화가 치받칠것이 아닌가. 이건 정치적인 문제이면서 인간의 본능과 관련되는 문제이니 말이다. 다음순간, 안성태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살인자 라구표의 뒤에 막후조종자로 앉아있는 인물이 조민하였으리라는것, 지금도 여기 가까이 대전《교정청》에서 그가 자기를 향해 총을 겨누고 칼을 벼리고있다는것이였다. 《교정청》에 불리워갔다는 방소희가 지금쯤은 조민하라는 인간앞에서 분명히 영미가 나한테 보낸 편지건때문에 서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하여 이때껏 직접 맞서보지 못한 크고 무서운 적수가 눈앞에 다가오고있다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 성태는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헌 보자기에 싸인 사품보퉁이를 내려다보았다. 조영미의 편지들을 다시 읽고싶었다. 수인의 생활에서 전부라고 할수 있는 편지, 편지는 받으면 두번세번 곱씹어 읽고 후에도 다시 읽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리유로 하여 편지들을 읽고싶다. 우선 이 편지묶음들을 압수당할수 있고 그렇게 되면 다시 읽어보지 못할수도 있다는것이다. 그리고 편지구절들의 어딘가에 저의 친아버지로 인한 영미의 고민이 없었는가, 편지를 읽으면서 그런것들을 알아 못보지 않았는가, 그것을 명백히 하면 조영미를 더 새로이 파악할수 있을것 같았다. 지나간 편지들을 다시 읽으면 그때는 미처 느끼지 못한것들을 새삼스레 느끼는 경우가 있는것이다.
3
안성태는 몇장의 편지들을 꺼내놓았다. 형제들한테서 받은 편지와 조카들이 보내온 편지가 있었다. 200자로 제한된 엽서 그리고 그뒤에 생긴 봉합엽서들, 몇십년세월에 받은것이 전부였다. 최근년간에 받은 조영미의 편지들은 꺼내 따로 놓았다. 그중에서 훨씬 전에 받은 두 편지, 그것은 조영미가 오순희라는 리화녀대 제적생과 련명으로 보내온 편지와 그후 영미 혼자서 보낸 편지였다. 발신인의 이름은 있고 주소가 없는 두 편지는 몇십번 읽은것이여서 따로 내놓았다. 나머지가 몇통이였다. 방금전에 받은 의문과 충격에 대한 해답이 이 편지들에 있을것 같았다. 받은 날자 순서대로 겉봉에 연필로 제1신, 제2신, …이라고 써놓은대로였다. 석순이 차입해준 허름한 돋보기안경을 끼고 성태는 마음을 눅잦히며 편지를 보기 시작했다.
…선생님, 뭐라고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주소를 쓰지 않은 편지를 인편을 통해 보낸 사실부터 돌이켜 보았습니다. 그때는 그럴만 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때부터 몇년간은 대학졸업하고나서 제가 한참 방황하고 힘들어하던 시기였습니다. 5년 넘게 학생운동을 하면서 많이 지치기도 했고 앞날에 대한 확신이 안서 패배주의에 깊이 빠져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조직을 떠나 나름대로의 삶을 찾아보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5년동안 운동을 하면서도 낡은 사상과 치렬하게 싸우지 않고 사상을 바탕으로 한 신념을 확고히 세우지 못한데서 온 후과였지요. 그러면서도 량심만은 지키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장기수선생님들을 찾게 되였습니다. 그러다가 저와 기이한 인연으로 맺어지는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를 썼지만… 마침 전달할 길이 틔여서 그때 편지를 보낸겁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가까이에서도 굴하지 않고 몇십년의 고초를 마다하지 않으신분들을 가까이 하며 제 삶의 기준을 찾고저 했습니다. 선생님께 편지를 보낸것도 이렇게 나를 무엇으로도 지켜보려는 순수하지 못한 리기심이였습니다. …선생님이 저를 찾으신다는 석순아지미의 편지를 받은 날 저는 감격하고 흥분했습니다. 몇번 시도하다 안돼서 포기하려고까지 했던 제자신을 부끄러워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그동안 어떻게 지냈고 지금 어떻게 살고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구몽학습》이라고 하여 가가호호의 방문으로 아이들 공부를 가르치는 《방문교사》의 일입니다. 그리고 직장일이 끝난 후에는 《야학교사》를 하고있습니다. 야학에서는 주로 빈한한탓에 정규교육과정을 밟지 못하여 늦게라도 공부를 하고싶어 모인 사람들에게 짧은 지식이지만 공부를 가르치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얘기도 함께 나누고있습니다. 저에게는 가장 소중한 활동공간이고 여기까지 온 리유이며 삶의 기쁨과 희망이기도 합니다.… …이후 선생님과의 만남은 절대로 중단되지 않을것임을 약속드립니다. 그리고 먼저 저를 찾아주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도 함께 드립니다.… 다음편지에서 제 생활에 대해 더욱 자세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급한 마음에 제 근황에 대해서만 간단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제 생활이 야학까지 하다보니 하루하루가 참 바쁩니다. 아침 7시정도부터 하루가 시작되여 직장일, 야학까지 모두 끝나면 밤 11시, 학생들이나 교사들과 얘기 좀 하다보면 보통 12시 넘어 서야 집에 들어오게 됩니다.… …날씨가 아직도 많이 춥습니다. 건강을 잃지 마시라는 인사말도 어울리지 않을 그 옥중생활, 하지만 아무튼 몸 조심하세요. 편지를 보내기도 전에 선생님의 답장이 너무도 기다려집니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조영미 올림.
안성태는 영미의 편지를 계속 읽어나갔다. 불안하던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앞의 편지만 봐도 영미의 마음에 자기가 우려하던 그 어떤 의문도 생기지 않았다. 성태는 보다 안정된 심정으로 편지를 읽으면서 자기가 답장에서 써보낸 말들이 곁따라 상기되였다. 그리움과 고독속에서 받는 영미의 편지가 더없이 귀중한 길동무가 된다는데 대하여 구태여 말한다면 자신의 선택은 이 시대의 상황에서 달리는 될수 없는 당연한것이라는데 대하여 그리고 이것을 포기할수 없는 마지막선택으로 믿어주는것이 고맙다는데 대하여 썼다. 영미의 야학사업과 생활은 물론 애로나 고민도 다 알고싶다는것, 특히는 그 나이에 반드시 있게 되는 그리고 또 있어야 하는 련애관을 두고도 꼭 적어보내라고 하였다. 이러면서 성태는 북에서 이미 영미와 같은 또래의 처녀들로 자라났을 딸들에게 기울이지 못한 사랑을 영미한테 통채로 기울이는것 같은 생각이 들어 가슴이 더욱 뜨거워올랐다. 영미의 편지는 계속되여왔다.
선생님… 사실은 제가 요즘 고민이 좀 많아 선듯 털어놓기가 주저되였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선생님한테 숨길수 있겠습니까. 별로 유쾌하지 못한 고민을 하고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아시는바와 같이 저는 야학에서 교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잘할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제자신에 대해 한계를 많이 느낍니다. 그때는 자신심이 아니라 자만이였나봅니다. 겉으로 보기에 큰 문제는 없지만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제각기 다른 생각을 갖고있는것 같이 개별화되여있는 모습,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품성도 좋고 능력이나 재주가 뛰여난데 하나의 힘으로 모아지고있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를 탓하기 전에 집단을 책임지고있는 저의 모습에 실망하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다 똑같이 야학에 모든것을 바치게 할수는 없겠지만 한발은 빼고있는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는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또 한가지 고민은 말씀드리기 쑥스럽지만 련애문제입니다. 제 나이에 누군가를 좋아하고 련애를 하는것은 당연하지만 상황이 당연하게만 받아들여지지는 않습니다. 지금 련애를 하고있는것은 아닙니다. 마음속으로 좋아할뿐이지요. 함께 교사생활을 하고있는 친구인데 만난지는 5개월정도 되였고 품성이 참 좋습니다. 나이는 저보다 한살 적지만 남을 배려하고 포옹하는 마음가짐이 오히려 저보다 더 넓습니다. 하지만 련애라는것이 철없던 시절처럼 좋아하는 감정만으로는 이루어질수 없는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저도 바쁘고 그 친구 또한 아직 4학년으로 학업을 마치지 않은터라 정신적으로 여유가 생기지 않을것입니다. 특히 미술을 전공하고있어 다른 과에 비해 할것이 배로 많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련애는 두사람모두에게 부담스럽고 힘들어질것이라는것은 뻔한 리치입니다. 감정때문에 중요한 일을 그르치는것은 옳지 않겠지요? 나름대로 그렇게 정리하고있습니다. …선생님께 그 무엇도 숨기고싶지 않은 마음은 갈수록 더해갑니다. 이렇게 쓰다보니 어느새 제 생각도 정리되고 마음이 좀 가벼워 지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편지를 읽으면서 부끄러운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저를 너무 큰사람으로 보시는것 같아서요. 제가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은 실수투성이에 앞에서도 쓴것처럼 단점도 많고 그렇습니다.… 끝까지 저로 하여금 자기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도록 좋은 말씀해주세요. 그럼 이만 편지 맺겠습니다. 안녕히 계셔요.… 성태는 무엇보다 자기한테 영미가 의지하며 솔직하게 모든것을 터놓는다는것이 기뻤고 그것이 그지없이 대견스러웠었다. 그는 지금 영미의 편지구절을 입속으로 되뇌여본다. 《선생님께 그 무엇도 숨기고싶지 않은 마음은 갈수록 더해갑니다.》… 이보다 귀중한것이 또 무엇이랴! … 그뒤의 편지에서 영미는 써보냈다.
안성태선생님께. …새해도 석달이 벌써 훌쩍 지나버리고 4월을 맞이했습니다. 요즘 부쩍 하루하루 한달 지나는것에 민감해지고 조급해지는것 같습니다. 지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4월을 맞이하게 됩니다. 3월 마지막날, 한달을 어떻게 살았을가 하고 일기를 들춰보았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것은 아니지만 그야말로 고민의 련속인 시간들이였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고민과 갈등, 자신에 대한 고민, 야학사업에 대한 걱정, 련애문제 등 전번 편지에 썼던 그러한 내용들이였습니다. 어느것 하나 말끔히 해결된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편지를 잘 해보고 새로운 달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시 시작하게 합니다. 선생님의 격려와 충고, 시시각각으로 도움이 많습니다. 선생님은 저의 곁에 늘 계십니다. 일기를 쓸 때에는 더 말할것도 없구요. 밤 늦게 돌아와도 저는 꼭꼭 일기를 쓰는데 그때마다 선생님께 하루 있었던 일과 저의 속마음을 낱낱이 통털어놓는 심정입니다. 직장에 나가서도 걸음걸음 선생님께 묻고 행동합니다. 이럴 때 선생님은 뭐라구 할가? 아니야. 이렇게 하면 선생님께서 나무람하셔… 전번 선생님 하신 말씀대로 친구들한테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하고 개별적으로 여러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단순한것 같지만 그것이 얼마나 좋은것인지… 선생님께서 지니신 사람에 대한 사랑이 그대로 저한테 옮겨지는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련애관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바깥세상과 단절되여 사시면서도 어떻게 이런 적극적인 진취적인 생각을 하실수 있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사람들과 매일 부대끼며 살면서도 과거 학생시절에 가졌던 관념적의식과 교조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경직된 사고방식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특히 련애문제에서 더 그런것 같습니다. 정말 열심히 활동하는 모범적인 사람도 련애문제를 잘 풀지 못하여 힘들어하거나 결국 운동을 떠나가는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생기고부터는 사실 많이 두려워하고 경계도 했습니다. 련애문제풀기가 가장 힘듭니다. 아직도 어떤것이 옳은 판단인지 결론을 못내리겠습니다. 최근에 의도적인것은 아니였는데 의연찮게 둘만의 시간을 몇번 갖게 되여 얘기를 많이 나눌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과정과 가치관, 인생관 등 진솔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선생님도 아실테지요? 프랑스작가 아나똘 프랑스는 말예요. 그는 말하기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많이 사랑해야 한다고 했지요. 사실 질이라는것도 량이 있고야 질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와 많은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 상당한 교감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많이 친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또 그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결정적으로 요섭이라 부르는 그 친구와 저는 앞으로 인생의 계획이 다릅니다. 그 친구는 지금 하는 학업을 더욱 깊이 하기 위해 래후년쯤 외국류학을 계획중입니다. 저는 당분간 야학생활을 계속하면서 사회활동과 단체활동을 할것이구요. 여기서 막히니까 관계를 더이상 전진시키기가 어렵습니다. 감정만 깊어지다가는 나중에 서로에게 상처만 줄것이 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해야 할 일도 많고 고민할것도 많은데 련애문제로 고민하는 제모습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정을 끊어야 할것 같은데 앞으로 또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날수 있을가싶어 과감하게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있습니다. 다시한번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완연한 봄기운이 느껴집니다. 봄이라는 계절에 맞게 희망찬 생활을 꾸려나가겠습니다.… 영미 올립니다.
이 편지를 받고 성태는 련애문제를 잘 풀지 못하여 힘들어하거나 결국 운동을 떠나가는것을 많이 보았다는 영미의 말을 긍정하면서 일종의 불안을 느끼며 다시 편지를 보냈었다. 사랑은 운동에 나선 사람들한테는 특별히 중요한 의의를 가지며 진정한 사랑이야말로 생활과 운동을 추동하는 커다란 힘으로 될것이라는데 대해 썼다. 그러자면 뜻과 지향이 같아야 하는데 그 뜻과 지향의 공통성을 찾기가 어려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진실을 속이지 못하는 감정이니 조급히 걱정은 말라고 당부를 하였다. 얼마후에 영미한테서 편지가 왔다.
선생님! …4월, 봄날씨답지 않은 추덥지근한 날씨에 적응을 못해 저로서도 고생한 하루였습니다. 제 문제에 대해 저보다 오히려 선생님께서 고민을 많이 하시는것 같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고민끝에 어느 정도 결론을 내렸습니다. 일단 그 친구와의 련애는 접어두어야 하겠다는것입니다. 그렇게 결심하고나니 저는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하고 그 친구 대하기도 편합니다. 고민의 과정도 이렇습니다. 선생님이 편지에 쓰신것처럼 우선 이것이 진실한 사랑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좋은 감정은 분명한데… 결혼을 한다는것은 서로에 대해 책임진다는것인데 그러자면 좋은 감정외에도 가치관, 인생관 등이 맞아야 완벽한 결합이 될수 있는데 그리 잘 맞아떨어지지는 않는것 같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지향점은 같으니 서로 노력하면 되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럴수 있는 여유가 없으니까요. 어쨌든 인생을 좌우하는 문제이니 심중하게 생각을 할것입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좋은 감정을 갖게 된 과정을 보면 제가 지치고 힘들어할 때 함께 많이 감정을 나누었습니다. 힘들 때 함께 했으니 누구라도 좋은 감정이 생길수밖에요. 좀더 리성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친구와 잘 지내고있습니다. 동료교사로서, 친구로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지낼수 있다는것이 오히려 사랑으로 승화될수 없는 시기가 되였다는것을 의미하지 않을가요? … 선생님, 제가 야학이외에 청년단체 일한다는것도 말씀드리지 않은것 같습니다. 야학하기 전부터 《룡인청년일군들》이라는 청년단체활동을 해왔습니다. 사회에 나온 후 저의 가치관을 정립해준 곳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학에 올수 있었구요. 그런데 이《일군들》가운데서(줄여서 말합니다.) 무슨 선거에 후보를 낸다는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이런 정치운동이 무슨 일로 되겠는지 예상할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다보면 정치적무관심때문에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정치인에 대한 불신과 정치적허무주의가 극에 달한것 같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나 자신과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면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 대학생임에도 불구하고 4.19와 5.18광주민중항쟁이 언제 왜 일어났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장기수얘기를 했더니 장기수가 사람이름인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여태까지 장기수문제가 사회와 언론에 빛을 못보다가 최근에야 흘러나오게 된 리유와도 관계되니 그들자신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보지만 처음으로 사회에 공개된지는 벌써 몇년이 됩니까? 기존정치인이나 기성세대들이 이렇게 만들었다고 할수 있겠죠. 그러니 선거놀음에서 승리하는것보다 사람들의 의식을 바로잡아나가는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를 받고나서 성태는 얼른 회답을 쓰지 못했었다. 영미가 하는 룡인지구의 야학사업은 궤도에 올라섰다고 볼수 있으나 선거운동이요, 청년단체운동이요 하는데서는 그가 분명 고민하고 모대기는것이 분명했다. 한마디로 룡인이라는 그곳의 《그릇》이 영미한테는 작아보이고 그나마 몹시 불만스러워보이는것이 아닌가. 내성적인 성미와는 달리 영미가 활동형, 사회형을 지향한다는것은 명백하다. 그러니 어떻게 조언을 줘야 하는가? 이무렵 교도소에는 창원, 마산, 울산지역의 로동운동권에서 들어오는 《좌익수》들이 많았다. 그들 매 사람과 만나 깊이 의사를 나눌 기회는 없어도 운동권의 전체적인 모습은 충분히 안겨왔다. 성태는 민주화운동, 특히는 통일운동이 로동운동이라는 터전에 발을 붙이도록 하려는 희망을 바로 영미한테 의탁하고싶은 어쩔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성태는 편지에 썼다.
…영미, 선거놀음에서 승리하는것보다 사람들의 의식을 바로잡아나가는것이 중요한 과제라는 영미의 말은 참말로 옳아요. 이것이 그곳 룡인에서 영미가 벌리는 단체활동, 사회활동이 더는 어쩔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는것을 말해주는거요. 물론 룡인에서의 야학사업이나 기타 청년단체활동은 대체로 성공적이고 그자체로는 나무랄바가 못되거든. 하지만 새로운 활로를 열어나가야 할 때가 온것 같소. 영미, 지금 《전대협》출신 《좌익수》들은 감옥안에서 우리를 통일일군이라고 존대하며 련대투쟁을 벌리고있어요. 그들은 나가면 창원, 마산, 울산지역으로 가겠다고 하오. 감옥에 들어온 로동운동자들이란 대개 서울대, 고려대 등 여러 대학 제적생들이 위장취업으로 로동현장에 들어간 청년들이요. 그들은 민주와 통일을 위한 새 세대이지. 그들을 볼 때마다 기쁘고 대견하오. 영미도 그들속에 서있는것을 보고싶구만. 어떻소? 내가 너무 주관주의를 부리는것이 아닌지? 나의 믿음으로 모든것을 너그러이 리해해주오.…
성태가 보낸지 한달이 넘도록 답장이 없더니 어느날 갑자기 조영미한테서 편지가 왔다. 성태는 편지를 읽었다.
안성태선생님. 답장이 늦었습니다. 늦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그새 많은 생각을 하다가 선생님의 권고를 실천해보기로 했습니다. 과연 어느 정도의 전망이 있을지 가늠하고싶어 울산에 다녀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타산을 앞세운다고 욕하지 마세요. 그만큼 이곳 룡인에서 이뤄놓은 나의 《창조물》에 애착이 가기때문이였습니다. 선생님의 편지를 놓고 깊이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울산에 가겠습니다. 거긴 저의 작은할머님이 계시고 저한테 당숙벌되는이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때 어머니를 모시고 살려고 제가 가려고 작정했던 곳이기도 하구요. 작은할머니 김양순은 이제 칠순이 넘었는데 울산지역 《민가협》에서 중진으로 활동하고있습니다. 당숙되는 윤씨분은 로동운동에는 관심이 없고 기술검정고시를 치는데만 열심히 달라붙는 인상입니다. 자기 아버지는 일찌기 민주화운동과 통일성전에 목숨을 바쳤는데도 말입니다. 작은할머니는 따로 손자를 데리고 삽니다. 작은할머니는 덮어놓고 오라고, 너와 같이 있는게 네 엄마와 같이 있는것처럼 마음이 편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가려고 합니다. 울산지역 로동운동에 대해서는 더 설명드리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의 회답을 급히 기다립니다.
하여 그때 안성태는 서둘러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서 성태의 머리에는 하나의 번개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황영호라는 이름이 불쑥 뇌리를 친것이다. 성태는 옥살이에서 흔히 볼수 없는 그런 흥분을 느끼여 가슴이 두근거리였다. 그래서 한참 편지를 쓰던 손을 멈추기까지 하였다. 내 왜 미처 황영호를 생각지 못했을가. 그의 도움이면 영미가 울산의 운동권에서 새로운 터전을 닦을수 있지 않는가.… 조영미한테 황영호를 소개하는 구절을 쓸 때 성태의 마음은 뜨거워올랐고 새 세대앞에 지닌 의무와 도리를 다하는듯 한 만족감에 휩싸였다. 뒤이어 영미한테서는 이내 회답이 왔다. 울산으로 떠난다는 기쁘고 희망에 찬 편지였다. 그로부터 두달이 지난 뒤에 편지는 울산에서 왔다. 그 편지에는 황영호를 만나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정도로만 밝혀져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안성태는 기뻤다. 영미를 두고 마음을 놓게 되는 자신을 의식하면서 이제는 감옥안에서라도 그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것인가를 생각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거의 반년 가까이 소식이 없어서 안타까이 기다리는중에 반갑게도 울산에서 편지가 왔다. 겉봉에는 조영미라는 이름 하나뿐인데 속지의 마감에는 황영호, 조영미라는 두 이름이 나란히 적혀있었다. 놀랍게도 결혼식초대장이나 다름없는 그런 편지일줄이야! 그들은 편지에서 자기들의 사랑과 결혼이 이처럼 빨리 이루어 지게 된것은 선생님의 덕분이라고 썼다. 선생님께서 주선해주었기에 서로 알게 된것은 물론 바로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그 마음때문에 한부모의 자식들처럼 친밀해졌고 그것이 사랑으로, 결혼으로 되였다고 썼다. 너무나도 응당하다고 썼다. 자기들은 선생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선생님의 뜻을 이어 열심히 일하면서 서로 뜨겁게 사랑하겠다는것 그것을 부모한테 보내는 서약처럼 썼다. 그 편지를 읽고나서 안성태는 감방벽에 머리를 붙인채 눈을 감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내리였다. 옥중생활에서 처음으로 흘리는 감격의 눈물이였다. 전주에서 헤여지던 때의 황영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는 마흔 가까운 나이, 여직껏 총각으로 있다가 그렇게 연분이 맺어졌구나. 물론 성태는 황영호를 가까이에서 늘 보살피며 정신적으로 키웠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뜻과 사상이란 서로 가까이에서만 옮겨지는것이 아니며 일생 단 한번의 접촉으로서도 넘겨지고 이어지는것이 사람의 뜻이고 사상이 아니겠는가. 그들 황영호와 조영미가 친자식이상으로 생각되는 순간 안성태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것이 이렇게 생겨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을 멈출수가 없었다. 싸늘한 독감방안이 갑자기 사랑의 열기로 후더워지고 황영호와 조영미의 시선이 자기를 지켜본다는 생각에 고뇌에 찬 외로움도 다 사라져버리는것 같았다. 풍랑사나운 바다우에서 가랑잎같은 쪽배로 각기 떠다니던 그들이였다. 언제 파도가 덮칠지 모를 아슬아슬한 순간순간이였다. 이제는 그들이 하나의 큰 배를 무어 위태롭지 않게 자기의 항로를 따라나가는것만 같아서 안심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영미를 황영호한테 맡겼다는 안도감, 황영호가 조영미한테 의지한다는 대견함… 어느것이 더 큰 감정인지는 몰랐다. 어쨌든 기뻤다. 그래서 뜨거운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던것이다. 1년후에 생남소식이 왔다. …조영미와의 편지거래는 당분간 끊을수밖에 없었다. 한명의 비전향장기수를 대상으로 여러명이 편지를 보내오려고 했던것이다. 장기수는 가족외 한사람과만 편지거래를 할수 있었다. 그래서 다음으로 편지거래가 시작된것이 부산의 배은숙이였다. 동아대학교 총학생회에서 국장으로 있던 활동가, 3천명의 대학생들을 휘여잡던 처녀였다. 대전에 갇혔던 서재호의 애인이다. 서재호가 나가서 소개해준것이다. 교무과에서는 요즈음 편지거래를 다떼고 배은숙의것만 받게 했다. 배은숙은 내성적이고 리지적인 조영미와는 대조되는 기질이였다. 자기의 량심은 항상 장기수선생님들을 향해 있다고 하면서도 아버지한테 어리광부리는 소녀처럼 편지를 썼다. 편지의 내용절반은 우스운 말이였다. 몇십년간 생활과 격페되여 옥중에서 고초를 겪는 안성태 자기를 잠시나마 즐겁게 해주려는 그 마음을 보게 되여 눈굽이 뜨거웠다. 그렇다. 새로 하나의 큰 세대가 자라났다. 안성태는 그들을 《통일세대》라고 명명하고싶었다. 그들은 개인생활에서는 이런저런 곡절이 있으나 민주와 통일을 위한 하나의 지향선에서는 공통된 운명을 지니였다. 이런 의미에서 황영호나 조영미도 제나름으로 얼마나 많은 곡절과 시련을 겪어왔던가. 그래서 안성태는 이 세대를 《통일세대》라고 부르는것이 백번 옳다고 생각했다. 안성태는 지금 그들에게서 자기의 미래와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확신이 없다면 이제 와서 이렇듯 지켜온 옥중고초를 어떻게 이겨 내겠는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도 놀라게 되는것이였다. …이렇게 안성태는 영미의 편지들에 이어 다른 편지도 보면서 지난 몇년동안의 일들을 함께 되새겨보았다. 그는 편지들을 정리해서 사품보퉁이속에 넣었다. 문득 아까 리상규의 방에서 나오면서 떠올랐던 하나의 의문 즉 대전《교정청》에 불리워간 방소희교회사가 거기서 누구를 만나겠는가 하는 그것이였다. 조민하라는 그 인간앞에 서있을것만 같았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방소희를 불렀을가. 사촌오빠로 하여 그도 무슨 닥달을 받는게 아닐가. 임명되기 전이라면 인사문제에 직접 관여해서 아예 방소희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을 조민하일것이다. 그런데 그 조민하자신은 아직도 조영미를 잊지 못할가? 아니다. 그자는 인간으로서 영미를 딸이라고 할 권리를 상실했다. 제 딸을 호적에서 지워버린 그 비인간적인 처사가 곧 권력과 출세와 영달을 꿈꾸었던 그의 진면모를 보여주는것이 아닌가.… 어쨌든 성태는 지금 방소희가 무사하기를 바랐다. 그가 경위는 어떻든 조영미를 위하여 그리고 나를 위해 성의를 기울였는데 그것으로 해서 그가 또다시 파란곡절을 가져오지 말았으면 싶었던것이다. 안성태의 눈앞에는 전주에서 헤여진 그때의 방소희의 갸름한 얼굴이 떠올랐다. 심리학전문가라면 생긴것부터가 달리되였으면 좋으련만 어쩐지 가냘프고 서글픈 인상을 자아내던 그 녀자의 인상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가?
4
충남북도산하 교도소들을 관할하는 대전《교정청》이 대전시 서구 월평동에 자리잡았다. 그 3층청사의 2층에 조민하의 방이 있었다. 그는 지금 창가림을 반쯤 올리고 밖을 내다본다. 창밖에서 비가 내렸다. 한 이틀 하늘귀가 약간 들리는것 같더니 다시금 지겨운 장마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당 저쪽에 한그루의 수양버들이 비바람속에서 태질을 하듯 뒤채기는데 그 수많은 실가지들이 산발한 녀인의 머리칼처럼 한쪽으로 흩날리였다. 그는 우울한 심정에 싸였다. 비오는 날이면 흔히 체험하게 되는 그 울적한 심사때문만은 아니였다. 조민하는 지금 대전교도소의 방소희교회사를 기다리는 참이였다. 각지에 《교정청》이 새로 생겼을 때 조민하는 일하기가 제일 시끄러운 곳이라는 여기 대전으로 오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로 오기를 결심하였다. 첫째는 서울에서 가까와 주말에 집으로 다니기 좋았고 다음은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는데서 여기가 피할수 없는 곳이라는 판단이 들었기때문이다. 조민하의 아버지는 림종때 아들한테 말했었다. 《난 경찰청장까지 꿈꾸던 사람이야. 그런데 지리산비적들의 총에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그 꿈을 이루지 못했어. 너는 나의 뜻을 이어야 한다.》 자식들한테 물려줄 큰 재산도 없이 이런 말로 유언이나 하는 아버지가 측은하고 고깝고 지어 혐오스럽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날을 따라 아버지의 유언이 자기의 신념과 일치하다는것을 깨달은 조민하였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고수하고 반공리념을 실현하는데서 《법무부》적으로 제일선이라고 하는 대전교도소 가까이의 이 《교정청》에 온것이다. 한데 바로 대전교도소에서 발생한 《편지건》이 더욱 명백해지고 다름아닌 편지거래가 이미전부터 자기의 딸인 영미와 그 악독한 무기수 안성태사이에 계속되였다는것에 그만 경악을 하였고 따라서 복수의 피가 다시금 끓기 시작한것이다. 이미 영미년을 호적에서나 마음속에서 지워버렸으나 안성태와의 인연이 이루어졌다는 이 사실앞에서 리성을 잃었다. 그의 심장속에서 어찌 딸에 대한 미련을 깡그리 없앨수 있으랴. 따라서 자기가 필생의 목표로 정한 그 리념과 반대되는 곳으로 쏠리는 딸을 더욱 용서할수가 없었다. 그 상대가 무기수가 아니라면 그래도 어지간히 참을수가 있을것 같았다. 그것이 딸이 아닌(비록 호적에서 영영 지워버렸지만) 어떤 다른 년이 그랬다면 또 그것대로 묵인할수가 있을것 같았다. 녀편네와 아들놈때문에 가뜩이나 울화가 치밀던 때라 더욱 참을수가 없었던것이다. 조민하는 창가림을 내리고 돌아섰다. 랭풍이 흐르는 방안의 공기이건만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다. 그는 사무용의자에 와앉아 푸르끼레한 비닐벽지를 바른 맞은편벽을 바라보았다. 나이에 비해 그리 늙었다고는 할수 없었으나 머리칼만은 하얗게 세였다. 한때는 머리물감을 들이느라 했지만 여러해째 그런 놀음을 그만두었다. 하관이 밭은 창백한 얼굴, 그렇다고 병색이 도는 낯은 아니다. 그는 원래 몸이 나지도 않고 쫄지도 않는 그런 육체를 타고났다. 젊은 시절에는 무도수안경을, 그후에는 색안경을 즐겨썼지만 지금은 그것도 다 그만두었다. 타자수 겸 서기인 처녀가 들어와 《방소희주임이 오셨습니다.》 하고 말하자 그는 《들여보내.》 하고 응대를 했다. 방소희가 들어왔다. 조민하는 그를 쳐다도 안 보고 《거기 앉으시오.》 하고 턱짓으로 응접탁 가까이 걸상을 가리켰다. 30대 중반의 방소희 역시 하관이 갸름한 얼굴이여서 얼핏 보면 조민하와 골상학적으로 비슷해보인다. 하지만 독실한 카톨릭교신자의 근엄하고 지어낸듯 한 엄숙성을 지닌 그 녀자의 얼굴은 내면의 흥분이나 일체 희로애락의 감정을 깊이 묻어두는 튼튼한 철갑처럼 보인다. 최근에 그의 인생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태가 더욱 그를 이렇게 만들었음을 조민하는 알리 없다. 조민하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한가지 물읍시다.… 대전교도소에 있던 그 <편지담당> 망나니와는 어떤 인척관계요?》 《그는 망나니가 아니예요.》 《같구 같소. 물음에 대답하오.》 조민하의 랭랭한 말투에 얼핏 방소희는 곁눈으로 상대방을 스쳐 보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속눈섭이 바르르 떨리였다. 최근의 세파속에서 인생을 체험할대로 체험한 그였지만 뱀처럼 섬찍한 조민하의 인상에는 다소 가슴이 떨리는것 같다. 조민하가 갑자기 돌변하면서 차거운 웃음을 띠웠다. 《방주임, 별치 않은 물음에도 얼른 대답을 안하니 어찌된 영문이요?》 그러자 방소희는 정신을 차린듯 그리고 제가 받은 첫 인상을 털어버리듯 머리를 한번 흔들었다. 《외사촌오빠예요.》 《그렇구만. 그랬댔어. 외사촌오빠란 가까운 사이지… 중국사람들은 예전에 외사촌간에 결혼하는 일이 많았다더군.》 《…》 《한데 그 사람 해임된데는 방주임의 책임도 있어…》 하지만 방소희는 아무 응대도 없이 머리를 도고히 쳐들었다. 그는 무슨 추상파미술의 문양이 어지럽게 그려진 창가림을 쏘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엇을 념두에 두시는지는 알만 합니다.… 그럼 지금이라도 저를 해임시켜주십시오.》 《아, 아 그런게 아니라…》 조민하는 뒤말을 잇지 못했다. 방소희와는 결코 이런 식으로 담화를 시작하려는것은 아니였다. 영미의 행처를 알고 필요하다면 담당교회사인 그와 함께 안성태를 기어이 꺼꾸러뜨릴 의논을 펴보자던것인데 방소희의 태도가 뜻밖이여서 어지간히 당황해진것이다. 다만 방소희의 잘못을 꺼들어 그를 기가 죽게 만들자고 했을뿐이였다. 《방주임, 흥분하지 마시오. 금방 임명됐으니 설사 해임를 요구해도 받아주지 않겠소. 또 그 잘못이란게 임명받기 훨씬 전에 있은 일이구요.》 그쪽에 머리를 돌린 방소희가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전 잘못이 없어요!》 《잘못이… 없다?》 조민하는 천천히 뇌까렸다. 그의 눈빛이 새파래지는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억지로 어설핀 웃음을 띠우며 그는 말했다. 《너무 신경이 예민해져 그러지 마시오.》 그제야 조민하는 방소희가 인생에서 풍파를 겪고났다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만사를 불신하는것이 아닐가. 이런 경우의 녀성들은 남자일반을 증오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남성증오감정을 효과있게 쓸수도 있다는 엉뚱한 궁냥까지 떠올라 저도 모르게 비죽이 웃었다. 하지만 남성을 증오하는 녀성교회사가 어떻게 남성《좌익수》들을 다루겠는가. 차라리 녀성담당으로 돌리고말가. 아니 아니, 심리학전문가인 이 녀자를 계속 눌러놔야 한다. 뜻밖에도 방소희가 조민하를 마주 향해 앉으려고 의자를 약간 돌려놓았다. 《제가 여기 불리워온건 그 문제인것만큼 말이 난김에 좀 말을…》 《아, 아 그러지 마오. 필요없소, 필요없어. 내가 괜한 소릴 했구만.》 하지만 방소희는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예요. 들어보세요. 이런건 묻어두는게 아니라구요. 단체는 한개 단체, 개인은 가족외에 한명으로 제한하며 편지거래할수 있게 된게 언제부터입니까?》 그러자 조민하의 낯빛이 댕댕해졌다. 《그래, 몰라서 묻소? 그거야 최근이 아니요?》 《아니예요. 정치적색갈만 없으면 그리고 돈만 있으면 교도관들이 배달부노릇을 한것은 언제부터예요?》 《난 그런걸 몰라. 얼마전까지 서울에 있던 사람이 교정국에 있으면서 그런것까지 알겠어? 밑의 놈들이… 그 송사리떼들이 하는짓 내가 알게 뭐야… 그러니 사업실적이 낮을수밖에, 너절한 놈들.》 방소희가 랭소를 띠웠다. 《그러니 저희도 너절한 놈이겠군요.》 《비웃지 마오. 난 당신의 상급이요. 상급을 모욕하는건 공무원의 도리에 어긋나오.》 《그렇다면 끝까지 들어주세요… 나는 다만 불행하게 된 어떤 동무의 소개로 외사촌오빠한테 부탁했어요. 외사촌오빠는 다른 편지를 검열하는 질서대로 가위로 봉투 웃머리를 자르고 내용을 보고 검열도장까지 치군 했어요. 정치적색갈은 없다고 해서 저도 마음을 놓았어요.》 《그런데 왜 등록대장에는 쓰지 않았는가 말이요?》 조민하는 이 《편지건》에 실무적으로는 말려들지 않으려 했으나 끝내 어쩔수없이 끌려드는 자신을 느끼면서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묻는것이였다. 보다 중요한 문제가 버그러져나가는것 같은감이 들었으나 자제할수가 없었으니 스스로도 불만스러웠다. 방소희가 의자를 끌어 바투 다가와 앉는다. 응접탁우에 꽉 부르쥔 두손에서 손가락매듭이 하얗게 피가 가셔지고있었다. 조민하는 부지중 몸을 뒤로 가져가며 책상너머로 그를 쏘아보다가 그 녀자의 눈길이 얼마나 매서웠던지 시선을 떨구며 책상우의 문서장들을 괜히 들었다놓았다 하였다. 《차장님, 한가지 묻겠어요. 왜 그 편지에 그리도 신경을 쓰세요? 정치적색갈이 없다는데두요.》 《보안규률위반이 아닌가?》 《아니예요. 그게 아니란 말예요.》 《그럼 뭐란 말인가?》 《그 편지를 쓴 사람한테 신경을 쓰는거예요.》 《그게 누군지 알게 뭐야?》 《그 편지를 쓴 조영미… 그는 차장님의 따님이 아닌가요?》 《뭐라구?》 조민하는 벌떡 일어나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다. 《나한텐 그런 딸이 없어! 없단 말이야…》 방소희가 조용히 말했다. 《같은 조씨인데두요?》 《같은 조씨이면 다 딸인가? 법적으로 호적에서 지운지 오래단말이야!》 방소희는 깍지낀 두손을 탁우에 올려놓은채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그러나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차장님, 흥분하지 말고 앉으세요… 저도 차장님의 심정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숨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던 조민하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투덜거리듯 뇌까렸다. 《나한테는 딸이 없어… 호적에서 지운지 언제라구. 끊어버린지 오래.》 《딸때문에 화를 입으실가봐 그러십니까?》 《뭐야? 위협인가?》 여전히 방소희는 고개를 숙이고 굳어진듯 한 자세였다. 《아니예요. 피줄이야 끊을수 없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데.》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아.》 그 말에 방소희는 홱 머리를 쳐들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길이 다시금 매서워졌다. 《하느님까지 모욕하시는군요.》 그 말에 몹시 찔리운듯 조민하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게 아니요, 아니요.》 《차장님, 제 차장님의 심정 리해한다지 않아요?》 방소희의 목소리는 어째선지 부드러워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깥에서 세차게 불어닥치는 비바람소리가 들렸다. 조민하가 저쪽 벽 어딘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 조영미를 어떻게 알게 되였소?》 《아직 얼굴은 본적도 없어요. 내 친구를 통해서… 오순희라고. 광주에서 고녀시절 같은 책상에서… 광주사태때 오빠가 싸우다 죽고… 동생은 참살당했고… 리화녀대를 중퇴하고… 지금은 서울에서 전태일렬사가 일하던 피복공장에서 녀성운동을 하고… 그의 대학시절 가장 가까운 친구가 바로… 조영미씨였어요.》 조민하는 아무 대답도 못했다. 다 타버린 재속에 묻어버린듯 하던 원한과 울분이 다시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간신히 이렇게 물었다. 《그래 그 조영미가… 그 애가 지금 어디에 있소?》 방소희가 천천히 대답하였다. 《조영미씨의 행처를 아는이는 오직 한사람, 수인번호 3530번…》 조민하는 머리가 휘- 돌아가는듯 해서 가까스로 의자에 앉아 몸의 균형을 유지했다. (그러니 그자가… 그자가 내 딸을 영영 빼앗아갔는가?…) 그러지 말자고 해도 안성태에 대한 복수의 피가 끓어올랐다. 야수가 먹이를 갈망하듯 입을 벌린채 헉헉 숨을 들이켜서 혀끝이 마르고 목안이 타들었다. 그것을 눈치챈 방소희가 일어나 고뿌에 물을 따라 갖다주었다. 《고맙소.》 조민하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고뿌를 손에 든채 눈을 번쩍이였다. 《방주임, 내 혼자 있고싶소… 그리고 이 얘기는 누구도 모르니…》 《걱정마세요. 전 누구한테도 말한적 없어요.》 《고맙소… 인차 부를테니 그때 사업토의도 하고…》 《알겠어요.》 방소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민하는 방소희가 나가는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기자 조민하는 벌떡 일어서며 그때까지 여전히 손에 꽉 움켜쥐고있던 유리고뿌를 사정없이 방바닥에 내리쳤다. 유리고뿌는 산산쪼각이 나 흩어졌다. 조민하는 의자에 다시 주저앉았다. 그는 백발의 머리칼을 두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러다가 두손을 내리웠다. 흰머리카락들이 수없이 손에 묻어나 종이장우에 떨어졌다. 그는 도무지 진정할수가 없었다. 와락 의자를 밀고 일어나 창문에 다가가 창문가림을 걷어올렸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오고 바람질이 세차다. 녀인의 머리채처럼 풀어헤쳐진 그 수양버들이 아까보다 더 거세게 몸부림치며 뒤채기고있었다. 조민하는 예순다섯나이의 피할수 없는 퇴직을 얼마 앞두고 점점 깊이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자신을 통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대전에 내려온지도 몇년, 하지만 남들처럼 가족은 서울에 그냥 있고 주말에 가군 한다. 가족이라야 아들놈은 마약중독자수용소에 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 가시집쪽 돈이 아니면 공직에서 밀려난지도 오랬을것이다. 또다시 눈앞에 보이는 저앞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수양버들가지… 문득 산발한 녀편네의 머리칼이 떠오른다. 녀편네는 오십이 넘도록 환락에 빠져있다가 근자에 와서야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잃은 그 허무감때문인지 집에서 거의 두문분출이다. 우리에 갇힌 암여우처럼 집안에 붙박여있었는데 먼저 일요일에 갔을 때 이상한 기미를 눈치챘다. 그 아들을 따라 그 에미도 마약에 손을 대는것 같았다. 일요일 오후차로 빨리 남편이 대전에 내려가기를 바라는 눈치가 헨둥했다. 아직은 초기인지 확실한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리옥자는 조민하를 되도록 빨리 보내기 위해 제 방으로 그를 데리고 가 대낮에 벌거벗고 광기를 부리며 남편한테 애욕을 퍼붓는척 한다. 그보다 더한 쾌락을 그가 안타까이 기다린다는것이 명백했다. 가정부한테 묻고싶었으나 미리 침을 맞은 그가 겁나서 아무말도 하지 않으리라는건 뻔하였다. 그래서 먼저 일요일에도 저녁차로 내려오면서 조민하는 될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에 빠졌다. 그러던 조민하는 오늘 또다시 이를 사려물고 일어났다. (아니야. 이놈의 세상에서 내가 패배자가 될순 없어. 모든것의 시작은 그 안성태놈의탓이야. 그자를 꺼꾸러뜨려야 한다.… 당국의 의지가 있는 한 나의 의지도 변할수 없다. 당국과 나는 일심동체가 되여 그놈을… 그놈들을 모조리…) 조민하는 벌떡 일어났다. 두눈은 광적인 열기로 번뜩이였다. (안성태, 그놈을 죽여버려야 한다.) 그놈한테서 건덕지를 잡아서 벌방에 데려다가 깡패들의 손을 빌어 죽여버려야 한다. 교도소에 박아넣은 《첩자》들의 정보에 의하면 그놈이 쩍하면 지금도 단식투쟁이요, 련대투쟁이요 하면서 앞장에 서는건 물론이고 《금서목록》이외의 책자도 돌린다고 한다. 《안기부》 대전지부에서도 그렇게 말하고있다. 서울의 《안기부》에 있던 《마과장》이 몇해전에 국장이 되였다. 말하자면 《마국장》이다. 리병창이라는 그의 이름을 안지 오래나 여전히 속으로 그렇게 부른다. 그한테 보고해서 아예 죽여버리겠다는 말은 못해도 그놈을 전향시킬 무슨 방책이라도 내라고 하자. 겸해서 다른 장기수놈들의 문제도 건당으로 방도를 찾아야 한다… 요즘에 와서 너무 풀어놓은것 같고 전향공작열의도 식어진것 같았다. 다시금 《전향고조기》를 마련해야 할게 아닌가… 조민하는 자기가 품은 야심이 시대착오 내지는 과대망상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당국조차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해 물렁팥죽이 된것 같아 내심 불만이 많던 참이라 오늘 이렇게 환장이된 자신이 오히려 가장 정당하고 확고한 사람으로 생각되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조민하는 대전교도소의 교무과장으로 라구표를 다시 데려와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게 되였다. (아무래도 그가 그래도 나아… 지금 있는 리상규란자는 교정국의 의도로 밀어내뜨리자고 림시 갖다놓은것이니까. 그런데 림시란게 벌써 얼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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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태는 방소희와의 상면이 이런 식으로 다시 이루어지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 무엇보다도 놀라운것은 전주교도소에 있을 때의 그 상냥한 녀자가 아니라는 그것이였다. 물론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에 겪은 세파로 하여 거칠어지거나 아니면 주눅이 들었을수는 있었다. 한데 방소희의 표정에 그런 빛은 없고 지금은 그저 엄해보이거나 랭랭해보였다. 문가에 서있는 교도관이 지켜보기때문이 아닌것 같았다. 《오래간만이군요.》 이것이 인사로는 다였다. 안성태는 그의 인생비극을 들었던것만큼 꼭 찍어서는 말할수 없지만 비슷한 동정의 말이라도 하려 했는데 그게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소희는 회색바지의 주머니에 한손을 찌르고 서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괜히 한번 시선을 돌려보는것 같았다. 예전에는 방소희의 갸름한 턱이 아주 총명할것이라는 인상을 주었건만 지금은 그것이 도리여 매우 날카롭고 모가 난 성미를 말해주는듯 싶었다. 방소희가 물었다. 《안선생… 저 조영미씨한테서 온 편지들이 있겠지요?》 《있습니다.》 안성태는 얼떠름한채 대답했다. 《그 편지를 저한테 주세요.》 《압수하는건가요?》 《당분간… 태워버릴수도 있구요.》 그는 뒤말을 매우 빠르게 번지였다. 그것은 그가 태워버리지는 않을것 같은 기미를 보여준다. 방소희가 문가에 서있는 교도관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제 방에 돌아가 저 교도관님한테 줘보내세요.》 그러면서 한손을 바지주머니속에 지른채 말했다. 《래일 면회가 있어요. 특별면회… 려세진… 전주교도소에 있었던것 같은데… 재일교포가 아니던가요?》 《그렇소.》 《거의 10년전 같은데요.》 《출옥한지는 6∼7년밖에 안될거요.》 《그동안 련계가 계속 있었던가요?》 《매달 많은 령치금을 보내주고있소. 그것으로 감방안에서 우리 동지들의 구매물도 보장하고 또…》 《됐어요. 큰 재산가라도 되는 모양이지요. 면회도 특별면회인걸보니… 면회날자도 오늘이라더니 갑자기 변경되고…》 성태는 얼떠름했다. 면회날자를 변경시키고 그것도 미리 알려주는것은 있어본적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성태는 려세진이 돈을 무척 많이 썼겠구나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방소희가 여전히 쌀쌀한 태도로 《하여튼 래일 아침 준비하고 기다리세요.》 하고는 교무과소속 교도관더러 3530번이 주는 편지묶음을 곧바로 자기한테 가져다달라고 부탁하는것이였다. 감방에 돌아와서 사품보퉁이속에서 조영미의 편지묶음을 꺼낸 안성태는 잠간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서슴없이 교도관한테 내밀었다. 교도관이 나간 뒤 안성태는 감방벽에 몸을 기대여앉았다. 불시에 가슴이 뜨거워올랐다. 려세진이 면회까지 와주다니, 물론 그로서는 이쯤한 면회를 성사시키는데 필요할 돈쯤은 아무것도 아닐것이다. 맏아들은 오사까에서 대단한 부자로 금은세공업을 경영하고 둘째아들은 홍콩에서 큰 식당을 운영하고있었다. 하지만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런 일에서 물러나는 법인데 매달 령치금을 엄청나게 넣어주면서도 찾아까지 와주다니? 하지만 려세진으로서는 이렇듯 들이미는 돈으로도 대신 못할 값진 의리를 지키려 함인데 성태는 또 성태대로 그것을 고맙게 받아들이는것이였다. 실상 려세진한테는 안성태가 은인이였다. 하지만 안성태는 그때 있은 일을 다 자기가 해야만 하는 응당한것으로 여기였다. 전주교도소에서 려세진을 처음 만난 때로부터도 이제는 10년세월이 지났다. …려세진이 전주교도소에 들어올 때 벌써 나이가 륙십이 넘었다. 《민단》계인 그가 대구에 있는 누이동생한테 왔다가 터무니없이 《간첩》혐의에 걸렸다. 그의 누이동생 려옥주는 지리산빨찌산출신으로 병이 들어 누워있으면서 죽기 전에 오빠를 보고싶다고 했다는것이다. 누이동생의 나이는 쉰다섯살이라고 했었다. 려세진은 어찌된 영문인지 《륙군방첩대》에서 직접 교도소로 넘어왔다. 려세진은 오리걸음으로 뒤뚝거리며 겨우 걸어들어왔다. 예심기간에 본래 가졌던 당뇨병이 도지고 허리병까지 생겨 본인자신이 육체적으로 완전히 포기상태였다. 그런데 그의 발등에 뜸을 뜨느라고(당뇨병에 좋다는 뜸자리였다.) 소지들이 잘못한탓에 그 부위가 화농해서 말이 아니였다. 그를 구원하기 위해 치료조건을 마련해줄것을 요구하여 단식투쟁이 벌어졌다. 소장면담때 안성태는 자기가 운동료법과 침구료법으로 치료해주겠다고 했다. 교도소측에서는 차라리 잘됐다고 안성태한테 려세진을 맡기였다. 《난 이미 나이가 륙십이 넘었소. 로친네와 자식들속에서 죽지못하고 다만 죄없이 감옥안에서 죽는것이 원통할뿐이지.》 《선생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선생님을 침이나 가지고 치료하면 그게 된다고 장담할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정신력을 잃지 않는것입니다. 이안에는 철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싸우는것이요. 둘째는 어떻게 하나 자기의 육체를 유지해나가는것입니다. 몇십년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 추운 감방에서 랭수마찰을 하고 물이 얼면 건포마찰을 하는 동지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원쑤들과 싸우는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는것입니다.》 려세진은 누워있었다. 안성태의 말에 대한 반응은 거의나 없었다. 성태는 단단히 잡도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뇨병에 좋다는 약은 많건만 의무과에 기대를 걸수는 없었다. 그의 아들들이 좋은 약을 차입해올수 있는 길도 막힌것 같았다. 안성태는 뜸만 허락받았기때문에 뜸을 놓는 사이에 간수 몰래 침을 놓았다. 우선 허리병을 일정하게 고쳐 운동을 할수 있게 하였다. 침술학을 들여다보면서 침혈을 찾기도 했다. 려세진은 차츰 안성태의 지성에 감동되여서인지 치료에 응해나섰다. 극히 제한된 운동시간에 그것도 독거운동장에서 혼자 걷고 팔다리를 놀려야 하기에 안성태는 미리 나가기 전에 그한테 운동순서와 방법을 일러주었고 좁은 감방안에서도 팔다리움직임을 시키였다. 거기다 침을 놓고 뜸을 떠주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감옥안에서 꼭맞는 말이다. 성태는 려세진과 3년동안 같이 있으면서 그의 건강을 회복시키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그러는 사이에 일본에서 부인이 면회를 오고 령치금도 들어오게 되였다. 려세진은 눈물이 글썽해서 안성태의 손을 잡았다. 《고맙소, 안선생. 나는 여직껏 은혜라는 말의 진뜻을 몰랐소. 인생에서 그런게 있다는걸 믿지도 않았소. 내 무엇으로 이 은혜를…》 그는 말끝을 흐리였다. 《선생님, 여기서는 서로 그렇게 하는게 응당한것으로 되여있습니다.》 《안선생, 당신들은 참 무서운 사람들이요.》 교도소에 갇힌지 6년만에 그는 출옥해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재일교포출신이고 또 막대한 돈이 어디론가 흘러들었기때문에 가능했을것이다. 최근에 와서 려세진이 한달에 한번씩 어김없이 안성태앞으로 령치금을 넣어주군 했다. 그 돈으로 많은 동지들이 도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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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두시경, 옆방에서 통방신호가 울려왔다. 내용은 이러했다. 《7월 8일. 2시다. 김일성주석 추모.》 이미 한주일전부터 이번 서거일에 어떻게 《추모행사》를 할것인가를 운동시간때 얼핏얼핏 의논하였다. 각기 단독으로 추모의식을 하되 그 시간을 밤 두시로 정하고 통방으로 시간을 알려주기로 하였던것이다. 성태는 천천히 일어나 북쪽으로 향해진 감방벽을 마주하고 머리를 숙인채 5분인지 10분인지 대중할수없이 오래도록 서있었다. 눈물이 걷잡을수없이 흘러내렸다. 자애로운 그이의 음성이 들려오는듯 싶었다. 《성태동무, 내가 동무에게 줄수 있는 가장 큰 표창이나 선물은 조국통일이요.》 (아, 우리 통일전사들은 당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있습니다. 그 뜻을 유훈으로 받아안게 되다니 정말 죄송스럽습니다.) 성태는 목이 꺽 막히고 가슴이 활랑거렸다. 끓어오르는 슬픔을 강잉히 누르며 그는 《침술학》책 257페지를 펼치였다. 257!- 사랑하는 안해와 딸들에 대한 그리움의 결정체가 간직된 페지이다. 거기에는 하얀 백로지에 《김일성》이라는 친필존함이 모사되여있었다. 그는 책갈피에서 작은 백로지에 씌여진 친필존함을 꺼내들고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수인복 앞섶을 헤치고 가슴에 품었다. 그것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표지에 새겨진 그 존함이 필치 그대로, 크기도 그대로 모사된것이였다. 이무렵 운동권을 통하여 비전향장기수들한테 은밀히 회고록이 들어왔다. 1, 2, 3권까지는 표지에 《봄을 기다리며》라고 씌여져있었다. 4권이 비로소 원표지 그대로 들어왔다. 성태는 존함필치를 처음으로 보았다. 이즈음 그는 서예를 배우던 참이라 밤에 일어나서 정성을 다해 존함을 그대로 복사해내였던것이다. 성태는 아침까지도 잠들지 못했다. 경애하는 그이를 만나뵙던 일을 두번, 세번, 네번… 끝없이 눈앞에 그려보았다. 아침에 그는 낮에 있은 운동시간에 어떻게 동지들과 만나고 그들과 어떻게 추모의 심정을 나눌가 그것을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오늘 문득 려세진의 면회가 있다는 말이 떠오르고 뒤미처 이상한 생각이 번개치듯 하였다. (그렇구나! 그러니… 그러니 려세진선생이 오늘로… 시간을 맞추느라… 그래서? 그래서 날자를 오늘로 변경시켰구나!) 어디선가 려세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듯… 《그렇소. 안선생, 우리 함께, 우리 함께…》 려세진의 음성은 떨리고 눈물에 젖어있을것이다. 면회는 낮 10시경에 있었다. 얼핏 보면 려세진은 세상을 초탈한 백발도사나 성인처럼 이런저런 감정을 함부로 나타내지 않는 무표정의 얼굴이다. 하지만 그는 안성태의 손을 붙잡자마자 눈물을 좔좔 흘리였다. 그 눈물에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움이 아니라 다른 뜻이 있다는것을 성태가 왜 모르랴. 면회는 특별면회실에서 있었다. 꽤 넓다란 방이였다. 방소희가 들어왔다. 이미 안성태와 려세진이 긴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앉았을 때였다. 려세진은 흰 샤쯔에 넥타이만 매였다. 방소희는 한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났다. 그리고는 곧장 려세진한테 가서 그가 앉을 의자의 등받이를 잡더니 말없이 한손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손짓을 하였다. 려세진이 의아해서 쳐다보다가 일어나 한쪽으로 물러났다. 그런데 방소희가 그 의자를 들어서 안성태쪽으로 가져와 바로 그의 의자옆에 나란히 놓아주는것이였다. 그런 다음 손짓으로 저쪽에 서있는 려세진한테 안성태의 옆에 놓인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그리고는 머리를 들어 천정과 벽을 한번 휘둘러보는것이였다. 도청장치가 있다는 암시 같았다. 《그럼 앉아서 말씀하세요. 제 잠간 나가 차를 끓여올게요.》 려세진이 방소희를 향해 말했다. 《미안합니다. 교회사님, 홍차를 진하게 끓여줄수 없을가요? 손수 끓여주시면 더욱 고맙구요.》 방소희가 돌아서다말고 려세진의 부탁을 듣더니 《참말 특별면회치고도 대단한 면회군요. 우에서 차를 끓여 대접하라더니 또 본인되시는분이…》라고 말끝을 얼버무리는것이였다. 상급에 대한 비난인지, 아니면 려세진한테 일부러 쌀쌀한 태도를 보이는것인지 알수 없었다. 방소희가 나갔다. 안성태는 방소희의 성의가 그자신의 의사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려세진더러 제곁에 오라고 손짓하였다. 그제야 려세진도 정신을 차린듯 탁자를 에돌아 안성태곁으로 왔다. 둘은 다시 손을 맞잡았다. 한참 그렇게 서있다가 손을 놓지 못한채 각기 의자에 앉았다. 안성태는 아까 방소희가 하던것처럼 고개를 돌리며 천정과 벽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도청장치가 있다는 말없는 신호였다. 고개를 끄덕이던 려세진이 배허벅의 와이샤쯔단추를 끄르더니 무엇인가 끄집어내였다. 검은천 같은것이였다. 아, 그것은 검은 공단으로 지은 두개의 완장이였다! 려세진은 시간이 없어도 별로 서두르지 않고 제가 먼저 왼팔에 완장을 끼였다. 성태도 검은 완장을 수인복팔소매에 올리끼였다. 두사람은 동시에 일어나 북쪽방향의 벽을 향해 추모의 마음을 담아 묵도를 하였다. 오래 할수가 없었다. 2분간이였다. 려세진이 손목시계로 시간을 맞춘것이였다. 두사람은 팔에서 추모완장을 벗고는 잠시 말없이 앉아있었다. 려세진이 손수건으로 눈굽을 찍어내고는 안성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실은 이 대전에 며칠전에 왔네.… 함께 이날을 추모하자고… 면회날자 하루 변경시키는데도 많은 돈이 들었지.》 그러면서 그는 미소를 지었다. 자기의 성의와 노력이 《성공》하게 된것을 기뻐하는것이였다. 성태는 그것이 고마왔다. 그는 자꾸자꾸 고개를 끄덕이는것으로 자기의 끓어오르는 감정을 보여주었다. 눈물이 차츰 잦아드는것 같았다. 《건강이 어떻습니까?》 성태는 일부러 큰소리로 물었다. 《괜찮소. 요즘 감옥생활조건이 어떻소? 좀 나아졌다면서?》 려세진도 귀먹은 사람한테 말하듯 목청을 높였다. 《그렇습니다.》 성태 역시 목청을 크게 냈다. 려세진이 안성태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고생이 많겠소. 얼굴도 더 축이 간것 같소.》 하고 말하자 반대로 성태가 미소를 그리며 그의 귀에 대고 《나이가 있지 않습니까. 저두 이젠 예순다섯입니다.》 하고 속삭이였다. 《그렇던가?》 려세진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안성태가 목소리를 크게 내여 물었다. 《부인이랑 아드님들의 건강은 어떻습니까? 기업이 잘되겠지요?》 《잘되구말구. 우리 기업은 잘된다니까.》 려세진은 한눈을 찡긋해보였다. 그들은 큰소리로 혹은 귀속말로 얘기를 나누었다. 려세진은 누구누구 하면서 제가 아는 장기수들의 안부를 묻고 기회가 있으면 인사를 전해달라고 했다. 령치금을 제대로 받았는지 확인도 해보았다. 도중에서(교도소측을 념두에 둔것이다.) 떼먹지 못하게 매달 똑같은 액수를 보낸다는것이였다. 두사람은 묻고 대답하면서 얘기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생각나서 려세진이 《아, 참 저기에 책이 있지.》 하고 일어서더니 출입문 가까이에 놓인 탁자우에서 포장지에 싼것을 들고 왔다. 《책이군요. 무슨 책입니까?》 《일문으로 된 침구학일세.》 책은 큰 판형으로 되였다. 목침만큼 두툼했다. 나란히 앉은 두사람은 같이 책을 번지며 들여다보았다. 안성태가 말했다. 《정말 좋은 책이군요. 고맙습니다.》 려세진이 성태의 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사실은 북에서 출판한 <침구학>책을 가지고 오다가 세관은 돈을 찔러주고 통과했는데 여기 와서 그 <도서담당>이란 작자가 딱 잡아떼는 바람에 못 가지구 들어왔소구려.》 그 말을 듣고 안성태는 퍽 아쉬워했다. 려세진은 다시 속삭였다. 《북에서 민족정통의학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참말 놀랍소.》 성태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려세진한테 고개를 돌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려세진은 안성태의 눈을 곧바로 들여다보다가 다시 상대방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내 얼마전에 북에 갔다왔소. 상공인대표단으로…》 그러다가 입을 거의나 성태의 귀바퀴에 대고 속삭이였다. 《우리가 어느분을 만나뵈웠는지 아오?… 김정일장군님을 만나 뵈웠단 말이요.》 《네?!》 하고 안성태는 감탄을 터치다가 제사 와락 두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급히 려세진의 입가에 귀를 가져갔다. 려세진이 급히 속삭였다. 《듣던바 그대로였소. 얼마나 정력이 넘치시는지. 듣자니 김일성주석님께서 급서하실 때는 얼굴이 몹시 축가셨다던데. 우리도 일본에서 텔레비를 보면서 정말 가슴이 아팠댔소.》 성태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려세진이 그를 손잡아 앉히였다. 《걱정마오. 지금은 퍼그나 신색이 좋아지셨소.》 성태는 눈물이 글썽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불현듯 김일성주석께서 서거하셨다는 비보를 들었을 때의 그 크나큰 슬픔이 가슴에 밀려들었다. 쏘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북《한》은 시간문제라고 적들이 떠드는 때에 너무나도 뜻밖에 김일성주석께서 가실줄이야.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것 같았다. 마음의 기둥이 흔들리여 육체적인 힘마저 가눌수가 없었던 그때, 김정일장군님께서 계시여 일어설수 있다는 희망은 기대와 믿음일뿐 현실적인 체험으로는 오지 않았던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려세진을 만나 그가 직접 장군님을 뵈웠다는 얘기를 들으니 심장이 뛰고 온 육신에 힘이 솟구치면서 희망이 아니라 실감으로 안겨오지 않는가. 안성태는 가슴이 뜨거워 자꾸 고개만 끄덕인다. 려세진의 손을 끄당겨 감싸쥔채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안성태의 눈에는 눈물이 어린다. 또다시 려세진이 속삭이는 뜨거운 목소리… 《장군님께서는 비전향장기수들을 낮이나 밤이나 잊지 않으시오. 통일애국투사들을 한사람도 빠짐없이 꼭 데려와야 한다고 하시였소.》 성태는 눈에서 솟구치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그러면서 려세진의 손을 그냥 만지고 또 만져본다. 장군님께서 따뜻이 잡아주셨다는 그 손… 그 손으로 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이 그대로 온몸에 흘러드는것 같아 성태는 목이 꺽 메이였다. 그는 머리를 쳐들었다. 눈앞에서는 《전통과 계승》이라는 책에서 본 그이의 풍모, 일화, 그 장면들이 이어지면서 그 모든것이 하나로 뭉쳐 장군님의 환한 영상으로 어려오는것이였다. 이제껏 사진으로조차 볼수 없었던 그 영상… 하지만 김일성주석 그대로이신분, 얼마나 마음이 든든한가. 최근년간 때없이 허전함이 찾아들던 이 가슴에 믿음과 경모의 정이 가슴뿌듯하게 꽉 차오르는것이였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기둥이 아닌가! 안성태는 그 순간 자신과 주위를 완전히 잊고있었다. 이 순간 여기가 지옥같은 교도소안이 아닌것 같았다. 려세진이 안고온 소식은 눈부신 해빛과도 같이 주위를 온통 밝게 비치고 자신의 몸을 둥둥 뜨게 만드는것이였다. 눈물이 뜨겁게 볼을 지지였다. 려세진이 손수건을 꺼내 안성태의 볼에서 눈물을 닦아주었다. 려세진의 눈에도 이슬이 맺히고있었다. 잠시 눈물어린 침묵이 흘렀다. 려세진이 안성태의 귀에 대고 말을 했다. 《난 안선생을 고맙게 생각했소. 안선생을 알게 되여 난 북으로 갈 용단을 내렸던거요. 이제라도 내가 북에 갔다온걸 알면 여기서는 날 또 당장 가둘거요.》 그 말에 안성태는 정신이 펄쩍 들어 려세진의 귀가에 속삭였다. 《그러니 선생님, 더는 오지 마십시오.》 《걱정마오, 난 무섭지 않아. 내가 늙은 몸이여서 이제는 죽어도 된다구 해서 하는 말이 아니요. 난 더 살고싶어. 그래서 조국통일을 위해 무엇인가 더 하고싶소. 내가 안선생을 후원하는건 안선생의 은혜 하나만 갚자는게 아니지. 내가 보낸 령치금이 여러 장기수들한테 다 도움이 되였다고 안선생도 말했지… 그래서 그것도 통일을 위한 일이 아니겠소. 통일을 위한 일이라면야 무엇을 가리겠소.》 안성태는 려세진의 손을 다시 잡고 놓지를 못했다. 그들은 뜨거운 눈길을 부딪치고있었다. 안성태는 다반을 두손에 받쳐든 방소희가 면회실에 들어선줄을 미처 모르다가 유심히 바라보는 방소희의 눈길을 느끼고서야 자신으로 돌아왔다. 방소희가 각기 두사람앞에 차고뿌를 놓아주었다. 려세진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표했다. 안성태는 방소희로 하여 꿈에서 깨여난듯 했고 따라서 방소희가 더 나가있어주었으면 좋겠건만 그걸 요구 못하는게 안타까왔다. 방소희는 제가 앉았던 의자에 가앉았다. 왼쪽다리우에 다른쪽다리를 올려놓고나서 그는 《얘기들을 더 나누시죠.》 하더니 제가 먼저 말했다. 《려선생은 전주에 계실 때보다 출옥이후 생활이 좋으신지 지금은요 퍽 신색도 밝아지시구 나이보다는 젊어보이고요.》 《고맙소.》 하던 려세진이 웃으면서 뒤를 이었다. 《여기 와서 <대한민국>의 <법>으로 한벌 쭈욱 다스려졌으니 그럴수밖에요.》 방소희는 손가락을 입술우에 세워보였다. 지나치게 비꼬지 말라는것이였다. 그것이 누구한테 어떻게 해로운지 알지 않느냐는 뜻이기도 하였다. 분명히 도청장치에 들어가면 자기한테도 좋을리 없을것이였다. 그 순간 안성태는 의문에 싸였다. 조영미의 편지묶음을 압수해갈 때의 방소희의 매정스러운 언동과 지금 려세진이와의 면회에서 베푸는 관용을 어떻게 리해할지 알수 없었다. 어쨌든 모순된 여기에는 무슨 곡절이 있는것 같았다. 그러자 리상규가 하던 말, 방소희가 대전《교정청》의 조민하한테 불리워갔다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니 무슨 꿍꿍이가 또 벌어지는게 아닌가. 조영미의 편지묶음이 조민하의 손에 들어간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든, 혹여 조영미한테와 그의 남편인 황영호의 신상에 무슨 일이 닥칠지 알수 없는것이다. 편지내용은 어떻든 그만한 건덕지만 있으면 무슨 일인들 조작 못하겠는가… 방소희가 앉은 자리에서는 더이상 자유로운 분위기로 돌아서지 않는다. 시간도 많이 지나고 또 몇십년만에 몸과 넋의 자유로움을 맛본 그 감격이 있어서 아무런 여한도 없는 순간이였다. 려세진이 먼저 일어났다. 《그럼 난 가겠소.》 안성태도 따라일어나며 그의 두손을 다시 꼭 부여잡았다. 《고맙습니다.》 《또 오겠소. 령치금도 더 보내고.》 《아니, 원로에 어떻게 자꾸 이런 걸음을.》 《괜찮소, 우리 아들애들이 더 극성이요. 내가 늘 그 애들이 어릴적에 사람이 의리를 지킬줄 아는게 근본이라구 귀에 못이 박히게 말했더니… 그 애들은 안선생을 직접 찾아보지는 못해도 마음만은 꼭 전해달라구 했소. 그러니 내 다시 안 올수가 있소?》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다른 말로 더 인사를 못하는것이 안타까왔다. 고맙다는 말로는 미처 다 표현할수 없는 이 심정… 죽음을 가장 가까이 두고있는 여기, 온갖 학대와 잔인성, 고문과 타살, 지옥을 통채로 안고있는 이 감옥안에 해빛을 안고온 려세진, 그는 이 가슴속에 마음의 기둥을 튼튼히 세워주고 간다. 방소희가 그들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떨구었다. 그는 안성태가 하는 고맙다는 말을 다시 찾아오겠다는 그 의리와 정에 대한 답례로만 생각할것이였다. 안성태와 려세진은 서로 부둥켜안고 떨어질줄 몰랐다. 감방에 돌아온 성태는 흥분을 눅잦힐수가 없어 그 좁은 0.75평을 널다란 대지를 거닐듯 끝없이 돌았다. 5리인지 10리인지 온종일 돌기만 하였다.
6
그 이튿날, 밖에서는 비가 내리였다. 감방안에서는 비가 내리는지 어쩌는지 얼른 알수가 없다. 웬간한 비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 바깥을 내다보기도 힘들다. 밖으로 면한 변소벽에 가로세로 반메터정도의 유리창이 있지만 말이 창문이지 유리에 먼지와 때가 두텁게 끼여 뿌옇다못해 흐림유리처럼 돼버렸다. 게다가 쇠창살에 쇠그물까지 씌우고 가림판까지 세워놓았으니 해나는 날에도 그저 희멀겋게 되고만다. 오늘따라 감방안이 숨막히게 답답해났다. 문을 박차고 향방없이 뛰여다니고싶었다. 하지만 눈앞에는 쇠창살과 쇠그물이 얽힌 희멀건 창문… 오후 3시경, 성태는 교무과로 불리워갔다. 처음 들어가보는 방이였다. 교회사의 사무실이 그러하듯 별다른 점은 없었다. 의자 몇개, 번번한 벽에는 아무것도 없다. 탁자 저편에 리상규와 방소희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어째선지 밤사이 이 사람들은 훨씬 낯설어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눈아래로 굽어보이는것은 무엇때문일가. 자신은 흡사 어제와 오늘에 걸쳐 그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올라서게 된것만 같았다. 어쩐지 마음속에는 여유가 생기면서 그들을 동정하게 되는 놀라운 심정을 체험하게 된다. 리상규의 두눈이 안경뒤에서 쪼프려지였다. 유심히 지켜보는 눈길이다. 방소희는 탁우에 올려놓은 두손을 함께 주무르며 시선을 떨구고 앉았다. 리상규가 몸을 앞으로 수그리며 탁자우에 두팔굽을 세웠다. 《오늘은 방주임이 계획한 담화가 있지만 저와 먼저 좀 얘기를 나눕시다. 내 방은 너무나 번잡해놔서… 이 방은 방주임의것으로 정한 곳입니다.》 그러자 방소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리상규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방소희가 나가고 둘만이 남았다. 분위기가 저으기 자연스러워졌다. 리상규는 상대방이 수인복을 입은 사람이 아니고 자기와 똑같이 남방샤쯔차림으로 앉은 사람을 대하듯 한다. 탁자에 몸을 수그린 리상규를 바라보며 안성태는 뒤로 몸을 제치였다. 《과장님, 두주일째나 번지였소. 어떻게 된셈인지.》 잡지 《시사져널》과 《한겨레21》을 읽고 그것을 종합하고 요약해서 안성태가 말해주는 일종의 《정세통보》라고 할가, 그것을 념두에 두는것이다. 리상규가 사과하듯 머리를 끄덕거리였다. 《그렇게 됐습니다.》 성태는 의문이 실린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별다른 리유는 없구요… 저도 요즘은 신문잡지를 좀 봅니다. 보지 않을수가 없게 되였습니다. 하지만 안선생의 견해를 들어봐야 저도 견해를 명백히 세울것 같습니다.》 그렇게 된 계기는 결정적으로 클린톤의 그 《담보서한》이후부터였던가싶다. 리상규가 말을 이었다. 《담보서한이후 최근 미조관계에서, 아니 조미관계에서 일어난 변화가 어떤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안성태는 열백번도 더 생각한 문제여서 거침없이 말하였다. 《클린톤이 경수로제공이요 뭐요 하면서 조미기본합의문리행을 약속했지만 그게 어떻게 될는지는 두고봐야 할가보오. 그걸 의심하게 되는 징후들이 나타나거든… 한데 명백해진건 한가지 있소. 동유럽과 쏘련의 붕괴로 극히 오만무례하게 나오던 미국이 이북의 강경한 자세에 꿇리여 저들로서는 적어도 동격으로나마 나오지 않을수 없는거요. 본질에서는 무릎을 꿇은거지.》 《그건 그렇습니다.》 리상규는 팔굽을 탁우에 세우고 두손을 맞잡아 턱을 고이고 앉아 이렇게 수긍했다. 안성태의 창백한 얼굴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짙은 두눈섭이 한데 맞붙고있었다. 그가 말했다. 《요즘 나는… 조미관계를 생각해보면서 이거야말로 통일문제에서 관건적고리라는 확신이 더욱 굳어지오.》 《그건 어째서요?》 리상규는 놀래기나 한듯 자기도 그런 생각을 하고있다가 그것이 일치되여 기뻐하는듯 팔굽을 탁자에서 떼면서 잔등을 걸상등받이에 기대였다. 안성태가 말했다. 《조국통일에서 미국이 주되는 장애물이라는건 이미전부터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그러하오. 그것을 설명해보자면 끝이 없지… 이북을 <흡수통일>한다, 고립시키고 압살해치워야 한다고 하는 주되는 세력이 미국이 아니요?》 《그건 그렇지요. 한데 미국은 그렇다치고 당국자들은 왜 통일문제에서조차 미국만 쳐다보는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모를게 뭐가 있겠소. 미국만 손을 떼면 저들 신세가 한지에 방아격인데… 미군이 물러가는 날이면 끈 떨어진 뒤웅박신세라고 생각하니까 그렇지요. 보시오, 클린톤이 담보서한을 보내니 이남당국자들은 원자탄이나 떨어진것만치나 갈팡질팡인데, 그러니 조국통일문제해결의 근본방도중 하나가 조미관계가 아니겠소. <시사져널>이나 <한겨레21>도 이건 매우 조심스레 다루지만…》 리상규는 탁자우에 시선을 박은채 아무말도 못했다. 그러다가 탁자를 밀기나 하듯 두손으로 그 모서리를 거머쥐였다. 《안선생, 그 문제 오늘 그만하고… 요전까지 해온 그 얘기 참말로 흥미있고 충격이 컸어요. …이제까지 정말 많은 얘기 들었어요.》 성태는 여러번에 걸쳐 《전통과 계승》의 내용들을 말해주었었다. 한번은 리상규가 감탄하며 말했다. 《안선생은 기억력이 비상하구만요. 지금 그 책을 앞에 놓고 줄줄 읽는것 같으니.》 《내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니요. 위인이신 그분의 풍모가 너무나 경탄스러워 한번 읽으면 내용이 그대로 머리속에 다 들어온다는거요.》 리상규가 《그렇지요.》 하고는 한손으로 안경다리를 쥐였다. 그는 두눈을 슴벅이며 말했다. 《안선생, 하긴 나도 그 책을 다 읽은것처럼 내용이 머리에 생생하니까요. 진실 그대로이니까 의문스러운 점도 없구요.》 리상규는 지금 그 충격을 다시 펴내려는듯 말했다. 《요즘… 제 크게 생각하는게 하나 있어요. 뭐니뭐니 해도 그분의 정치실력이 뛰여나다는 그거예요. 그 책에도 있다지만… 보세요. 클린톤한테서 담보서한 받아내는 그 담력, 그 배짱, 이거야 웬간한 정치가로서는 안될 일이지요. 적어도 이 20세기에는 기적이예요. 미국이라는 그 악마의 제국이 한창 번성하는 이 세기에 말입니다.》 리상규의 눈빛이 안경뒤에서 번쩍이고있다. 손세를 써가며 말하는 이런 일은 그한테서 처음 보는것 같다. 철학과졸업생이라는 체면을 가지고 세상을 적당히 살아가면서 향락에나 빠져있던 사나이, 그한테는 일찌기 자그마한 《련공》의 기미조차 없었었다. 조국통일도 강건너 불보듯 하던 사람이다. 격변하는 시대가 그로 하여금 어쩔수없이 이런 흥분과 열정을 가지게 만든다고 안성태는 생각했다. 물론 그가 당장 투사로 나선다는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인간의 움직임을 통하여 이런 계층속에서 커다란 균렬이 생기는것을 볼수 있지 않느냐. 리상규가 여전히 흥분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니 그 책에 있는것처럼 그분이 한번에 세가지 일을 하신다든가, 음악에 천재적인 감각을 가지셨다든가, 소탈하면서도 담력이 크다든가 하는것이… 그런 인품이 정치실력을 뒤받침해주니까 위인의 풍모가 더 크고 더 높다 그거예요. 그러니 그분은 자신의 실력으로 김일성주석님의 후계자로 되신게 아니겠어요.》 그러던 리상규가 불시에 어조를 낮추며 이기죽거리듯 말했다. 《이남<대통령>이라는 김영삼씨 보라구요. 얼마나 고약한가. 대비나 하겠어요. 김일성주석과 회담을 하려던 참에 그분께서 급서하셨는데 어쩌면 글쎄, 저는 못 간다고 치고 남들이 조문단을 무어가겠다는데두 못가게 했으니 참말로 악독하지요… 그 너절한짓을 보지 못하겠어요.》 문이 열리고 방소희가 들어와 리상규한테로 갔다. 《전화예요.》 《어디서?》 《<교정청>에서죠.》 리상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 열띤 흥분이 가시지 않았지만 무엇을 예감한탓인지 방소희를 보는 그의 눈길에는 어지간히 당황한 빛이 어렸다. 리상규가 나가자 방소희는 아까 제가 앉았던 걸상에 왔다. 그 역시 불안한 기색이였다. 기도를 드리듯 두손바닥을 모아 탁자우에 세우다가는 몸을 뒤로 제치면서 반소매를 입은 두팔을 엇결어 가슴우에 얹었다. 그러면서 한사코 안성태의 시선을 피하는 눈치였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허둥거리는것만 같다. 그를 찬찬히 보지 말자고 안성태는 무릎우에 놓인 수인복옷자락에 너실너실하게 드리운 실밥인지 뭔지를 손으로 쥐여뜯는척 하며 거기를 들여다보았다. 《저… 그 있지 않아요? 조영미의 편지묶음…》 방소희의 목소리에 성태는 고개를 쳐들었다. 방소희는 그 엄하고도 랭랭한 표정으로 《그네는 오직 하느님앞에서만이 겸양과 온화함을 나타내는 얼굴표정이 되는것인지》 실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혹시 이제 누가 찾게 되면 제가 압수해서 가져갔다구 하세요. 가져가서 불태워버린것 같다구… 당분간 제가 건사했다가… 돌려드릴 때면 돌려드리지요.》 성태는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 그는 자기가 대결하고있는 이 《팀》에서 어떤 변화가 있다는것을 오랜 옥중생활에서 얻은 륙감으로 알아챘다. 그들의 뒤에 앉아있는 《밀실의 주인들》이 안절부절 못하면서 몹시 불안해하는것이 분명하다. 당국과 련결되는 고리들이 건들거리며 끊어지는것같이 느껴졌다. 방소희의 리해할수 없는 태도… 전화를 받으러 나가는 리상규의 당황한 표정… 리상규가 들어왔다. 그러자 방소희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이 자리를 피하게 되는것이 다행인듯 황황히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는 방소희의 거동에는 아랑곳없이 리상규는 천천히 의자에 와앉았다. 겉으로 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천연스러웠다. 그러나 마음의 여유를 얻으려는듯 안경을 벗어들고 손수건을 꺼내 그것을 닦는 거동은 어딘가 순조롭지 못하다. 안경을 다시 쓴 그는 평상시의 자기로 되돌아오려고 애쓰듯 미소를 그려보였다. 그는 손바닥으로 안경우의 약간 벗어진 이마를 문지르다가 무중 이렇게 입을 열었다. 《안선생, 도이췰란드철학자 니체라고 들은 기억 있으시죠?》 《있구말구. 히틀러나 무쏠리니가 나치즘사상의 선각자로 내세웠다는 그 철학자…》 《그래요. 그리스도를 비판하고 음악과 시에도 상당히 재능이 있었고 일생의 마지막 10년은 정신분렬증으로… 그렇게 생애를 마쳤지요.》 《<권력의 의지>라든가 <초인론>이라는 저작으로 악명을 떨친것 같은데.》 《맞아요. 그런데 <권력의 의지>나 <초인론>을 나치즘의 사상원류로 만든건 그의 누이동생인 엘리자베트이구요.》 《그건 어떻게?》 안성태는 오늘 이 이야기가 무엇에 필요한지 알수 없었으나 듣지 않을수가 없었다. 《엘리자베트는 인종주의광신자인 제 남편이 죽자 오빠인 니체가 미쳐있는 사이에 글쎄 니체의 문서고를 만들어놓고 미발표원고에서… 여기저기서 따내여 <권력의 의지>나 <초인론>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비밀이 밝혀진건 썩 후의 일이구요.》 《니체가 그래서 더 나쁜 사람이 된셈이구만.》 안성태는 흥심없이 대꾸했다. 허나 리상규는 니체를 옹호하는 심정에서 그 누이동생을 되게 욕을 했다. 그리고 히틀러나 무쏠리니가 그 문서고를 참배하고 기부금을 낸다 어쩐다 한것을 독재자들의 권력유지제스츄어 내지는 희극적인 처사로 묘사하였다. 리상규는 계속해서 말했다. 《물론 나는 철학사를 전공하다나니 개별적인 철학가들을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고… 어쨌든 난 그의 철학적주장들에 별로 큰 리해가 가는것은 없었구요. 하지만 한가지 말만은 깊이 공감했었지요. 특히 이 교회사직업에 들어서면서 저자신에게 다짐하듯 그 말을 마음속으로 외웠지요… 무슨 말인가 하니 들어보세요. 이렇습니다… 참말로 인간은 탁류이다. 마땅히 바다가 되여 이 탁류를 받아 그것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오, 내 그대들에게 말하노라. 인간을 초월하라고. 그것은 바로 바다이다. 여기서는 그대들의 큰 <모욕>도 받아들일수 있다.… 이걸 명언으로 여기고 좌우명처럼… 인간을 초월하라. 이 말에 크게 공감한거죠.》 이 말을 받아 성태는 뇌이였다. 《인간을 초월하라…》 그러다가 성태는 머리를 저었다. 《어떻게 인간을 초월한다는건지 리해가 되질 않소. 관용, 대범, 이런 도덕적범주를 념두에 둔것도 아니구… 인간이 자기를 완전히 부정한다는 허무주의적립장… 그러니 철학적개념보다 정치적인 주장 같기두 하구.》 말을 멈추고 리상규를 바라보던 성태는 뒤말을 이었다. 《도대체 난 리해가 안 가오. 인간을 초월하라니.》 《그건 그렇습니다. 인간을 초월하라는 의미를 저한테 유리하게 해석했던거죠. 첫째는 철학이나 정치리념을 다루면서 복잡한 사회생활의 와중에 휩쓸리기가 싫었다는 의미에서고… 둘째로는 교도소안의 직업을 자기한테 유리하게 합리화했던거죠… 큰 바다가 되면 인간이라는 탁류를 받아들일수 있다고 말이죠… 어리석었지요. 오히려 교도소안이 아주 예리한 정치투쟁의 한복판이라는걸 몰랐거든요. 그리고 오늘에 와서 결코 인간은 자기자신을 초월할수 없다는것을 알게 되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외면할수 없다는 극히 초보적인 진실을 깨닫게 된거죠.》 《깨달았다? 난 당신이 뭘 깨달았는지 모르겠소. 이제껏 당신은 인간을 초월하라고 했다지만 내 생각엔 그저 인간을 피했거나 인간의 발부리에서 헤매이고있었다고 보오.》 《인간의 발부리에서요?》 《그렇소. 발부리에서 헤매여 일어서지도 못했소. 한가지 물어봅시다. 당신의 동료인 서울대교수는 <주사파>라던데?… 그한테 알아볼걸 그랬소. 난 운동권학생들이 여기에 들어오는 극히 제한된 경로를 통해 듣다나니 주체사상의 근본원리와 체계를 다는 모르오. 그것이 안타깝소. 하지만 한가지만은 명백히 알고있소. 주체사상이란 사람중심, 인간중심의 사상이라는 그것말이요.》 리상규가 고개를 숙이고있었다. 성태는 그의 약간 벗어진 이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언젠가 말했지요? 통일운동자의 시점에서 볼 때 당신의 현실도피는 곧 반통일과 분렬주의에 가깝다고… 그렇소. 민중중심의 주체사상만이 자주와 민주를 가져다줄것이고 따라서 자주적평화통일을 가져올것이요… 인간을 초월하지 말고 인간들속으로, 민중속으로, 그들과 같이 호흡을 할 때만이, 그때만이…》 안성태는 흥분에 못이겨 말을 이을수가 없었다. 리상규가 벌떡 일어났다. 《그만하시오.》 그러더니 다시 털썩 자리에 앉았다. 《안선생, 난 래일 아침 해임장을 받으러 갑니다.》 안성태는 놀랐고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안됐소. 내 말이 지나쳤다면 량해하오. 가는 사람한테…》 《아닙니다. 안선생의 말은 다 옳습니다. 그런데 <정년퇴직>에 들어갈 나이에 이른 저한테는 이미 행동의 의지가… 용서하세요. 안선생의 말은 다 긍정하지만.》 안성태는 더 말을 못했다. 그러다가 물었다. 《왜서 해임이요?》 《사업에서 성과가 없다는거죠… 아마 일반수들만 있는 교도소에 갈것 같습니다. 그래서 상급에 있는 그네들이 예견보다 상당히 오래 나를 여기에 두었지요. 1년쯤 될걸로 알았는데 3년이 넘었으니까요… 공안수들을 대상하지 않으니 차라리 마음이 편할것 같아요… 안선생, 저는 량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한지는 오랩니다. 선생님들이 이 옥중에서… 몇십년세월 고문과 협박, 전향테로의 갖은 악형에 시달리고… 한편으로는 옥사하고… 굶주리고 추위에 어는데… 난, 난… 술과 계집과 향락에… 그렇다고 당장 <정년퇴직>이 눈앞에 왔는데… 여기서 물러날수 없고…》 리상규는 고개를 떨구고 앉았다. 안성태가 또 한번 명백히 느꼈으니 바로 자기와 마주선 이 《팀》에서 모순과 혼란이 일어난다는 그 사실이였다. 《그럼 누가 교무과장이 되는건지.》 《교무과장으로는 아마 라구표가 다시 올것 같습니다.》 《라구표?…》 안성태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원쑤들이 새로운 싸움을 걸어온다는 느낌만은 강했다. 혼란에는 발악이 따르기마련이다. 라구표라는 살인자보다 그뒤에 서있는 조민하라는 살인자, 또 그뒤에 있는 《안기부》와 《반공》반통일의 살인무리들이 마침내 새로운 공격으로 나올것이다. 과연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죽음을 이미 각오한 사람들인 우리를 죽음으로는 놀래울수 없다는것을 적들도 알고있다. 하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아무튼 팔짱을 끼고있을 조민하가 아닌것이다. 라구표, 그 살인자를 어떻게 써먹자고 하는것일가… 안성태는 감방에 돌아와서도 마음을 다잡느라고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았다. 며칠후에 방소희도 해임되였다. 떠나기 전에 방소희가 조영미의 편지묶음을 안성태한테 주려고 그를 자기 방으로 불러갔다. 호송교도관이 나가자 방소희가 거의나 실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누가 묻게 되면 편지묶음은 내가 가져갔는데 소각한것 같다구 하세요.》 안성태는 그 편지묶음을 받아 수인복의 바지괴춤에 넣었다. 배가 훌쭉하니 겉으로 봐도 잘 알리지 않았다. 방소희가 물었다. 《거기 마감편지에 써있는 주소에… 지금도 그가 거기에 그냥 무사히 있다고 생각해요?》 이상한 질문이였다. 《그럼?…》 성태는 입이 굳어지며 더 묻지 못했다. 방소희는 시선을 딴데로 돌리며 말했다. 《조영미는 남편과 함께… 어떤 사건에 관계되여 체포되였어요.》 《뭐라구요?》 《<령남위원회>사건… <조선로동당 령남위원회>라는거죠.》 성태는 멍하니 서있었다. 황영호와 조영미의 체포 그리고 사실이든 아니든 《조선로동당》이란 말을 오랜만에 공개장소에서 듣는것만 같아 그것이 놀라왔다. 어쨌든 방소희와 헤여져야 할 순간이 오자 안성태는 자기의 혼돈된 머리를 가까스로 수습하면서 그한테 물었다. 《이젠 어디로?…》 방소희는 의지가지없는 녀자가 아닌가. 《전 하느님을 찾아가겠어요. 수녀원으로.》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것처럼 하느님과 《결혼》한다는 뜻이다. 《세상을 영영 등지는건 아니겠지.》 《아니, 그럴지도 모르죠.》 방소희의 어조는 더욱 랭랭해졌다. 그는 말했다. 《세상은 너무도 가혹해요. 현실은 혼돈천지예요. 무서워요. 노아의 홍수가 닥치던 그때처럼.》 성태는 너무 놀라와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 어떤 경우에도 말이 막힌적 없는 그였다. 한데 지금은… 방소희는 성태를 외면한채 날카롭게 부르짖는다. 《사람들도 너무 혹독해요. 내가 알고있는 모든 사람들… 대립과 반목과 질시, 타협없는 이 끝날줄 모르는 싸움…》 《그러니 그러니… 교도소를 떠난다는 뜻이겠지요.》 《세상을 떠난다지 않아요?》 《그럼, 그럼…》 《그래요. 사악한 무리들은 더 말할것두 없구요. 오순희는 물론 아직 한번 만난적 없는 그 조영미씨도… 그리고 선생님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한테서 말예요.》 성태는 난생처음 이상한 공포에 휩싸였다. 허무의 나락속에 굴러떨어지려는 한 녀성을 보고있다. 자살직전의 순간이 아닌가. 의지가지없는 그가 십분 그럴지도 모른다. 성태는 저도 모르게 그 무엇을 붙잡으려는듯 한팔을 쳐들기까지 했다. 방소희가 갑자기 침울하게 뇌인다. 《리상규씨와도 처음으로 큰 언쟁이 있었죠. 그는… 이 울타리를 떠나지는 못하는군요. 그에게는 판단의 의지는 있어도 행동의 의지는 없어요… 자, 헤여집시다. 전 모든 사람들과 작별합니다.》 《아니,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으시오.》 《됐어요, 됐어요. 부디 건강만은 잃지 마세요.》 방소희는 교도관을 부르려고 출입문에 다가서다 말고 뒤돌아보았다. 《참, 조영미씨의 소식은 이제 아는것만큼 누구를 통해서든지 알려드리겠어요.》 안성태는 그 자리에 서있었다. 교도관이 들어온줄도, 그를 따라 발걸음을 내짚은것도 의식하지 못한채 어쨌든 감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괴춤에서 꺼낸 조영미의 편지묶음을 들고 멍하니 서있었다.(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 어쨌든 견디라. 영호, 영미, 나는 너희들을 믿는다.) 이런 생각이 떠오른것도 편지묶음을 사품보퉁이에 넣고난 뒤였다.
7
8월의 무더위가 계속되는 어느날. 승용차에서 내린 조민하는 곧추 2층의 자기 방으로 가서 사무탁을 마주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대전교도소에서 돌아오는 길이였다. (젠장, 되지도 않을 <준법서약서>놀음을 벌리더니.) 새 《대통령》이 《준법서약서》를 모든 비전향장기수들한테 씌우려고 검찰청의 검사들을 각 교도소로 내려보냈다. 수인들의 일체 감형, 집행유예, 병보석 등은 다 검찰청에서 최종승인이 있어야 했다. 교도소에서는 담당교회사들이 립회인으로 나섰다. 조민하는 대전교도소에 나갔었다. 안성태의 담당교회사와 함께 그 방에 들어갔다. 홍검사라고 부르는 젊은 검사와 마주앉은 안성태란자를 난생처음 바라보며 조민하는 복수의 피를 끓이였으나 만사는 헛탕이였다. 지금 책상에 마주앉은 조민하는 별안간 안성태가 절규하는 그 목소리가 들리는듯 하여 저도 모르게 량손으로 귀를 막았다. 《<준법서약서>란 무언가? 당신네 법을 지키겠다는 서약인데 내가 당신네 법을 지키겠다고 서약할것 같은가? 어리석소. 나를 40년가까이 이 감옥에 집어넣은 악법중의 악법인 <국가보안법>이 있는데 그래 그것을 지키겠다고 도장을 찍으란 말이요? 나는 지금도 무죄를 주장하는데 나더러 죄를 인정하라? 참으로 어처구니 없구려. 준법서약서가 사상전향서와 본질적으로 다른것이 무엇이요? 똑같지 않소? 그런 헛된 수작은 걷어치우시오. 이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사상의 자유, 량심의 자유인가?… 나는 당신들의 이 놀음을 준렬히 규탄하오!》 조민하는 전률을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짐승처럼 방안을 정신없이 오락가락하였다. 그러다가 책상우에 아직도 그대로 놓여있는 한장의 서류장을 보았다. 홍검사가 준비했으나 교도소에는 가지고 가지 않은 서류장이였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졌다.
황영호에 대한 자료
이름 황영호 성별 남자 년령 44세 학력 경북 ××고등학교 졸업 재소경력 -1972년부터 4년간 대구교도소 일반범 수감 -1979년부터 7년간 《남민전》관계로 수감 -현재 《령남위원회사건》으로 예심중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예견, 그러나 형사소송법 제257조, 제258조에 의한 고소인에 대한 통지는 없음. 다시 공소해도 무방함. 처 조영미, 년령 39살 아들 황일민 5세 경남검찰청에서 온 자료였다. 조민하는 안성태의 감방을 뒤져 조영미의 편지묶음을 가져오게 하였다. 안성태와 《령남위원회》의 관계를 만들어 안성태한테 사면조치가 앞으로 영영 해당되지 않도록 하려는 어리석은 망상에까지 사로잡힌 조민하였다. 하지만 젊고 랭철한 홍검사는 그따위놀음을 일축하였다. 그가 속으로 조민하를 얼빠진 놈이라고 욕을 한것을 조민하가 어찌 알수 있으랴… 어쨌든 조민하는 모든것이 실패한 지금 그 종이장을 책상우에서 보자 눈에서 불이 이는것 같았다. 그는 종이장을 와락 걷어쥐고 좍좍 찢어서 휴지통에 처넣었다. 만사는 끝장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는 자기가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지 못했다는것을 통절히 깨달았다. 자신이 떨어지는 암흑에 싸인 나락을 굽어보며 공포와 전률에 몸을 떨었다. 며칠후 조민하는 정년퇴직으로 들어가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서울로 가는 승용차에 많지 않은 사품을 싣고 떠난 조민하는 한강다리를 지나자 곧장 집으로 향하였다. 마당에서는 가정부가 눈물을 흘리며 그를 맞아들였다. 가정부는 황급히 조민하를 리옥자가 마지막숨을 거두는 방으로 데리고 갔다. 방안에서는 중년의 의사가 서두르지 않고 가방안에 무엇인가를 챙겨넣고있었다. 조민하는 공포에 질려 안해의 침대로 다가갔다. 백랍처럼 새하얀 안해의 얼굴에서는 어제날의 모든 향락의 광란은 물론 마약에 취한 그 조는듯 하던 안색마저 간곳없이 사라졌다. 조민하는 마지막지탱점마저 발밑에서 부셔진 사람처럼 두다리를 꺾고 풀썩 주저앉았다. 침대모서리에 박았던 이마를 서서히 쳐드는 그의 눈에는 공허와 죽음의 빛이 가득차있었다. (오, 하느님 아버지이시여…) 안해의 령혼을 데려가 달라는 고별의 인사가 아니였다. 그는 이 순간에 오직 자기만을 생각하며 구원을 바랐던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구원해줄것을 바라는 이 인간의 목소리가 과연 하느님에게 가닿을수 있을는지… …이틀후 창원에서 처남이 올라와 리옥자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처남은 집과 재산을 모두 자기의것으로 하였다. 실상 그것이 다 처가편의 재산이였으니 조민하는 할말이 없었다.
그는 자기의 인생이 이 지경에 이른것이 마치 안성태의탓이기나 한듯이 생각했으니 이런 류의 인간들의 종말은 어차피 미치광이처럼 되고마는것이다. 자기는 죽어도 안성태를 죽이고나서 죽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조민하는 도리여 안성태가 제발 출옥되였으면, 그래서 복수의 칼을 박을 그날이 빨리 왔으면 하고 바랐다. 이제는 안성태를 복수하여 죽이는것이 나머지삶의 목적이라고 그는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 (원쑤는 꼭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다. 그날은 반드시 올것이다…) 조민하는 양로원의 하루하루를 이런 기다림속에서 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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