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새벽하늘

 

  3 

 

판이한 두 세계

 

 

1

  

안성태는 조용순이와 헤여지는것이 가슴아팠다. 웬일인지 조용순이를 다른 감방에 이동시키는것이였다. 전방놀음이 자꾸 있지만 반신불수인 조용순이를 안성태한테서 떼놓는것은 보안과의 작간인것 같았다. 조용순이 침을 맞으니까 팔다리의 운동신경이 나아지는것 같다고 했는데 이제는 그한테 침을 놓을수 없게 되였다. 차라리 송기만이와 바꿔져 그가 나갔으면 했다.

세사람 있게 되니 한사람이 더 들어왔다. 그의 인사는 이러했다.

《정대철입니다. 무기형이다가 4.19 20년으로 감형된 사람입니다.

정대철의 고향은 평북 룡천, 인민군 소대장으로 진도상륙작전에까지 참가, 후퇴명령을 늦게 받아 부득불 지리산에 입산, 전쟁포로로 응당 송환되였어야 할 사람이였다.

정대철과 송기만은 이미 한감방에 같이 있었던것 같다. 하지만 지리산빨찌산시절에는 부대가 달라 서로 알지 못했다.

정대철이도 위병을 앓고있었다. 감방에서는 위병과 고혈압이 가장 많이 생긴다. 또다시 침이 요긴하게 쓰이게 되였다.

그런데 여전히 침을 건사하기가 조련치 않았다. 가지고 올 때도 《힘들게》 가지고 왔다. 간수들 눈에 띄기만 하면 징벌을 받는건 둘째치고 무조건 회수당했다. 침 한개면 남을 죽일수도 있고 자결할수도 있다고 보고 《보안규률》감시에 명줄이 달린 놈들로서는 그럴수밖에.

여기서는 침을 놓을 때 간수들의 눈을 피하기가 더욱 힘들었다. 정대철한테 침을 놓자면 감시를 세울 사람이 없다. 송기만은 아예 누워만 있는 불구자 같은 사람이니까.

그러니 침 한개가 더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간병부 정용식을 만날 기회를 엿보았으나 어째선지 그를 볼수가 없다. 침 한개만 더 있으면 시간이 곱절로 단축된다.

그 말을 듣자 정대철이 자꾸 중얼거리였다.

《그렇단 말이지… 그렇단 말이지요.

그도 침 한대를 더 구할 방도를 궁리해보는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수 없다. 강철사를 구할길이 없다. 요즈음은 《교정》이나 《새길》이라는 잡지도 화학풀을 발라 묶는 판이다.

정대철은 머리를 기웃거리였다.

《만기출옥전에 동지들을 위해 남길게 있어야지. 다 낡은 모포, 양말도 걸레짝… 기념품삼아 침 한개 만들어야겠는데.

당장 만기출옥이라도 할것 같다. 20년을 채우재도 72년까지는 있어야 하는데… 그도 그런 의문과 불신을 가졌던지 《이러다 전방이라두 시키면 안동질 못 만날수 있지.》 하고 앉아 머리를 짜보자는것이였다. 그러던 정대철이 별안간 널마루를 탁 소리나게 치면서 《지금 당장 만들겠소.》 하면서 손을 들어 천정구석을 가리켜보였다.

성태는 거기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감고 기척없이 누웠던 송기만은 정대철이 주먹으로 마루바닥을 치는 바람에 눈을 뜨고 정대철을 다소 언짢게 바라보는것이였다.

성태가 천정구석과 정대철의 얼굴을 의문스레 번갈아보자 정대철은 《저기 못이 있지 않소?》 하면서 히죽이 웃는것이였다. 성태는 그제야 고성기를 달았던 자리를 올려다보았다. 퇴페가요만 줄곧 내보내는 고성기조차 어디선가 무슨 사건이 벌어지면 떼버리군 했다. 그러다가 다시 갖다가 붙여놓고 《나발》을 불어대고… 성태는 그 자리에서 못을 보았다.

《못을 어쩐다는거요?

《못을 콩크리트에 갈면 되지.

《갈다니? 그걸 어떻게?

《갈면 가는거지.

그리고는 움쭉 일어나 천정구석쪽에 가 서더니 《안동지, 내 어깨우에 올라 저걸 좀 보오. 못이 쓸만 한건지.》 하고 재촉하듯 고개를 돌리는것이였다. 성태는 잠시 망설이다가 정대철이 독촉하는 바람에 그의 잔등을 딛고 어깨우에 올라섰다. 못은 꽤 쓸만은 했으나 이것으로 침을 만들다니? 도무지 믿어지질 않았다. 이번에는 정대철이 걸레를 들고 성태의 어깨우에 올라섰다. 걸레로 못을 감아쥐고 한참이나 시역질을 해서야 못을 빼낼수 있었다.

정대철의 이마에 땀이 질펀히 내뱄다. 위병쟁이가 빈속에 한참이나 힘을 쓰니 식은땀이 나고 맥이 없어 못을 성태의 손에 주고는 쓰러질듯이 누워버린다. 그러면서도 눈길은 여전히 못에 가있다.

성태는 못을 손바닥우에 놓고 들여다보았다. 못은 60미리정도여서 기장이 침대길이와 비슷하다. 한데 이것을 어떻게 갈아서 침으로 가늘게 만든단 말인가.… 여전히 성태는 놀라기만 했다.

《그래 이걸… 어디다 간다는거요? 숫돌도 없이.

《저기 콩크리트바닥이 있지 않소?

저쪽 사동에 있을 때와는 변소구조가 좀 달랐다. 일제때 독방이던것을 두개로 쪼개여 3명씩 넣고 변소칸은 중간을 막고 두 방에서 같이 사용하게 했다. 칸을 막을 때 바닥을 콩크리트로 해놓은것이다.

성태는 어데서 강쇠를 구해보자고 하면서 그만두라고 했다. 정대철이도 환자인데 어떻게 하루종일 옹크리고 앉아 그걸 할수 있을텐가. 하루도 아니고 열흘이 될지, 한달이 될지… 정 그러면 내가 하겠다고 성태가 나섰으나 정대철은 웃어보였다.

《침술사의 손이 못쓰게 되면 어떻게 침대를 쥐겠소? 걱정말라구. 내 평양학원 다닐 때 무슨 얘기 들었나 하면 항일빨찌산들이 돗바늘을 갈아서 재봉기바늘을 만들었다고 했소.… 그리구 내 땀과 정성이 있어야 안동지한테 주는 기념품이 아니겠소. 걱정말구 감시나 잘 서주오.

꽁보리밥 한덩이를 씹으면서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운동시간을 내놓고 하루종일 정대철은 변소칸바닥에서 못을 갈았다. 마찰로 뜨거워지면 물에 담구고는 다시 꺼내서 갈았다. 처음 하루동안은 상당한 정도로 갈아졌다. 하지만 차츰 가늘어지면서 점점 더 힘들어졌다. 물에 젖은 손이 불어났고 못이 점점 가늘어지자 손바닥이 못과 함께 콩크리트에 《닳기》 시작했다. 피가 나왔다.

성태는 몇번이나 그와 교대하려고 했으나 정대철은 제 혼자 하겠다고 막무가내였다. 그저 한마디… 《침술사의 손은 아껴야 해.…》

정대철은 오랜 시간 쪼그리고 앉아있다나니 입맛도 더 없어지고 밤에는 신음소리에 헛소리를 쳤다. 그의 손바닥은 엉망이 되였다. 하얀 살이 드러나고 보기에도 끔찍했다. 손가락이나 손끝은 헌 헝겊으로 싸맬수 있으나 손바닥은 어쩔수 없었다.

성태는 안절부절을 못했다. 시찰구에서 감시를 서다가도 정대철한테 다가갔고 그러다가 다시 시찰구에 가서도 그쪽만 바라보았다. 속으로 뜨거운 눈물만 삼켰다.

버릇처럼 노상 눈을 감았던 송기만은 정대철이 일을 시작한 다음부터는 잠자리가 불편한 사람처럼 이리저리 궁싯거리다가 며칠만에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반좌위로 누워 줄곧 변소칸쪽을 바라보는것이였다.

열흘만에 정대철이 가느다랗게 된 《못》을 쳐들어보이며 《자, 이만하면 될것 같지 않소?》 하고 히죽이 웃었다. 그동안 그는 더욱 광대뼈가 솟아 훌쭉해졌다. 그의 손가락은 온통 헝겊으로 동여져있었다. 물에 살가죽이 불어 허옇게 되였다. 벗겨져서 피가 흐르는 손바닥…

성태는 못이였던 그 침대를 얼른 받을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천근무게로 두손바닥우에 그것을 올려놓고는 《됐소… 됐소…》 하는 말만 되뇌이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끓어오르는 오열을 참기에는 고문에서 견디던 그 의지로도 어쩔수가 없다.

송기만이는 눈물이 그렁해졌다. 그렇듯 랭정한 표정으로 좀해서 입을 열지 않던 그가 입을 열었으나 입술을 쭝깃거릴뿐 얼른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창백한 낯에 더욱 두드러지는 구레나룻이 까시시한데 《정동지… 정동지…》 하는 송기만의 음성은 탁 쉬여버려 더 나오지를 못했다.

복도에서 교도관의 높은 목청이 들려왔다. 당장 시찰구가 열리기라도 할것 같았다. 성태는 정대철이 만든 침을 얼른 널마루짬에 넣고 그우에 앉았다. 이제는 침이 2개이니 감추기가 더 힘들게 되였다.

정대철이 조심스레 말했다.

《아무래두 침을 안전하게 감추자면 무슨 수가 있어야겠어.

성태는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그보다 또 하나의 침이 마련된 그 희한하고 기쁜 마음에서 아직 헤여나지 못하고있었다. 동지의 사랑이 결정체로 모아진듯 한 새 침바늘을 자꾸만 들여다보고 매만져보고싶고 빨리 제 몸의 어느 혈에 시침을 하고싶었다.

성태는 미리 준비했던 가느다란 전화선의 구리줄토막으로 손잡이부분을 감기 시작했다.

송기만이 갈린 목청으로 힘들게 띠염띠염 말을 번지였다.

《침을… 안전하게… 그런… 그런 방법… 내… 생각해보겠소.

정대철이 얼른 그 말을 받았다.

《그렇지, 송동진 고등학교 미술교원이였지. 미술가니까 손재간이 있을거요.

의아하게 바라보는 성태에게 송기만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송기만의 얼굴에서 처음 보는 미소였다.

《안동지… 우린… 아… 아는 사이요.

《아는 사이》라는 개념은 감옥안에서 바깥세상보다 다르게 쓰인다. 여기서는 《아는 사이》라는 말이 반미반독재, 조국통일성전에서 뜻을 같이하는 동지로서 피를 함께 흘린적 있는 사이라는 개념이다. 철창속에 갇힌 이 운명의 공통점이 또한 《아는 사이》라는 평범한 말로 쓰이는것이였다.

정대철이 인민군 소대장으로 지리산에 들어갔고 송기만은 전쟁전부터 지리산빨찌산이지만 둘은 부대가 달랐으나 광주에서 함께 한 감방에 있은적이 있었다.

정대철이 말했다.

《송동지, 내 박춘권동지와 함께 있었댔소.… 참 안동진 잘 모르겠구만.

박춘권은 일제때 일본 와세다대학 의학부를 나온 사람인데 광복후 지하투쟁에 참가했고 지리산빨찌산병원 원장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원했다고 한다.

지금 박춘권은 한팔을 잃은 상태에서 다른 한팔도 골절이 되여 건들거린다는것이다. 그런 몸에 그는 감방안에서 얼굴을 닦아도 제 힘으로 한다고 했다. 한손에 수건을 쥐고 그 손을 벽에 붙인채 거기다 얼굴을 문댄다는것이였다.

《훌륭한분이지요.…》

송기만이 조용히 뇌이였다. 낮고 갈린 목소리이지만 자연스럽고 분명해진 음성이였다.

정대철이 송기만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였다.

《박춘권동지가… 나더러 송동지를 만나면 해달라던 말이 있소.

《무슨 말… 말이야… 많겠지.…》

또다시 예전의 송기만으로 되돌아간듯 하였다.

호기심도 없고 재촉도 하지 않는 어조였다. 다 알만 하다는듯 체념에 빠진 지친 목소리…

안성태는 선배투사들의 미지의 세계에 끌려들고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기보다 15년 먼저 철창속에서 싸우는 동지들이였다.

《다른 말이 아니지. 송동지도 짐작하고있겠지만…》

정대철은 송기만의 눈을 곧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송기만이 오히려 눈을 감았다. 허나 말은 들을것이다.

《박춘권동지는 자기도 맨 처음 송동지의 계획을 지지했다고 했소. 하지만 그게 괜한 생각이였다는걸 알게 됐다는게요. 이 남조선감옥에서 전쟁직후 그래도 병보석이라는 법조항이 있으니 거기에 기대를 건게 얼마나 허무한 노릇이였는지… 그건 일종의 적에 대한 환상이라구… 그 말 들으니까 나도 같은 생각이라니까요.… 자, 보오. 4.19때만 해도 지리산출신은 무기형이 20년으로 감형되여도 공화국과 관계된다고 하는 무기수들은 거기에 해당시키지 않았지. 무기형이 20년으로 된것도 이제 어떻게 할지 두고봐야 할 일이요.… 그건 그렇고, 이제 우린 몇년 있으면 출옥된다고 칩시다. 지나온 날에 비하면 그건 짧아보이고 어쨌든 한계가 있다는것으로 당장 출소가 있을것만 같소.… 하지만 그건 두고봐야 하오. 무기형이 다시 살아날수도 있거든.

잠시 말을 끊었던 정대철이 송기만이한테 다가앉았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져 복도에 흘러나갈가봐서였다. 정대철의 푸른 수인복 앞단추가 끌러져있다. 이른봄 감방안은 겨울날처럼 차거운데 더워서가 아니고 가슴이 답답해진 모양이다.

《송동지, 그때는 어떻게 하겠소? 송동지의 육체는 지금 어떻소? 의식적으로 운동도 피해왔으니 아예 불구자가 되고싶소?… 그래 지금도 병보석을 바래서? 이건 적에 대한 환상이 아직 남아있다는거요. 그게 4.19이후에 더 생겨났고… 5.16이후 새 <대통령>에 대해서도 혹시 그렇게 기대를…》

별안간 송기만이 탁한 목소리로 웨치듯이 말하였다.

《아… 아니요.… 그… 그렇지는… 않… 않소.…》

정대철이 송기만의 눈감은 얼굴을 들여다보며 지꿎게 조용히 묻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문득 무겁게 갈앉은 송기만의 대답.

《그걸… 몰라서… 묻소?… 사실 내 육체는… 이미 내 말을… 듣지 않소.… 후… 후회하고… 있을뿐이요.

《그건 옳지 않소. 늦지 않았소. 일어나 움직이는 련습두 하구. 여기 안동지가 침으로 운동신경을 자극하면 빠를수 있지.… 송동지, 내 너무 과하게 말해서 미안하오.

송기만이 숨이 가빠하면서도 실어증에 가까왔던 상태에서 용케도 말을 해냈다. 떠듬거리면서도 발음은 예상외로 정확해서 명료하게 뜻을 나타냈다.

《괜찮소.… 사실… 난… 이제껏 동지들한테… 짐만… 되여왔소… 요즘… 난 그걸… 느끼오.… 저쪽 8사에 있을 때 안동지가… 침혈공부하는걸 보구… 그리고 침을 만들어… 조용순동질… 치료하는걸 보구… 정동지가 못을 갈아… 침을 만드는걸 보구…》

너무나 갑자기 많은 말을 해서인지 가슴속에 묻어버리려고 했던 흥분이 불시에 터져올라서인지 그는 점점 더 숨이 가빠했다. 정대철이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됐소, 됐소. 송동지가 지리산에서 싸우던 때를 잊었소? 그때에다 대면 그게 뭐라구, 침 한개 만드는걸 보구서…》

《정동지, 그 침 한개가… 그게… 그게 큰게 아니라… 그 그게… 그걸 이 세상 침 천만개가 대신 못하오.… 아, 결국 여기서… 내가 놈들한테 지고있는셈이니…》

《됐소, 됐소. 그만 진정하라는데…》

정대철이 송기만의 손을 꼭 쥐여주며 더 말을 못하게 했다. 쓰디쓴 회한에 몸부림치는 그한테 무슨 말을 더 하랴싶은지 정대철자신도 더 말이 없었다.

안성태는 두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명백한것 같으면서도 결국 이상한 의문에 휩싸였다. 무엇때문에 병보석을 그렇게도 바랐던가? 8사에 있을 때 아들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안해나 아들이 면회왔다는 말은 기억에 없었다. 과연 아들때문인가?

 

 

2

 

 

그날 밤 송기만이 먼저 잠들었다.

성태는 정대철이와 나란히 누웠다. 정대철이 성태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였다. 성태는 듣기만 했다.

《안동지, 저 송동지는 참말로 괜찮은 사람이요. 훌륭한 동지요. 지리산에서 잘 싸웠소.… 참 그가 본시 어떤 사람인지 모를게요. 좀해서 누구보구두 그걸 말 안하니까…》

성태는 정대철의 말을 듣고있었다.

송기만은 전남 구례군 사람이였다. 8.15이후 그는 순천사범학교에서 미술교원을 했다. 순천은 당시 전남도의 동쪽지대 6개군중에서 교육중심지나 다름없었다. 순천에는 음악학교도 있었는데 고등학교편제이면서 녀학교였다. 거기서는 송기만의 누이동생이 공부했다. 누이동생은 바이올린연주에서 천부의 재능을 갖고있다는 평을 받았다.

송기만이 굳이 순천에서 교원생활을 하게 된것도 누이동생과 같은 하숙집에서 기숙하며 그의 학비를 대주는것때문이였다.

송기만의 선조는 대대로 량반가문이였다. 아버지는 지방유지로서 반일운동에 나섰다가 감옥에서 옥사했다. 송기만이 공부하게 된것은 외가의 덕분이였다. 때는 1948, 려수군인폭동이 일어났다. 《국군》 14련대가 반미반독재의 항전에 나선것이다. 폭동군은 순천까지 점령했다.

순천음악학교 녀학생들이 폭동군을 지원하여 간호병으로 나섰다.

송기만은 누이동생이 여기에 휩쓸리는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누이동생은 하숙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까지 송기만의 립장은 애매하였다. 일찌기 옥사한 아버지의 운명이 어릴적부터 그를 《정치투쟁》에서 밀어낸것이였다.

《그때 그 지방에서 똑똑한 사람치고 폭동군에 합세 안한 사람이 있나?

하는 말에 비추어보면 확실히 송기만의 초기립장을 리해할수 없는것은 사실이였다.

려수폭동에서 순천은 마지막결전장으로 되였다. 폭동이 진압될 무렵, 순천은 최후의 지탱점이였다고 할수 있다.

순천음악학교는 2층건물이였다. 학생복차림의 녀학생들이 치마자락안에 모두가 권총을 숨기고 창문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며 최후를 각오하고있었다. 《국군》토벌대놈들이 녀학교라고 업수이 보고 휘파람까지 불며 운동장으로 쓸어들었다. 2층의 창문가에 붙어선 녀학생들은 치마밑에서 권총을 꺼내들고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국군》놈들이 무리로 쓰러졌다. 밤까지 학교는 방어요새처럼 끄떡이 없었다. 적들은 야음을 타서 학교로 기여들었다.

2층강당에서 요란한 피아노소리가 울리고 녀학생들의 피맺힌 절규인양 노래소리가 들렸다.

 

민중의 기 붉은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

비겁한자야 갈라면 가라

 

밤새 총격전이 계속되였다. 악에 받친 놈들은 아래층에 불을 놓았다. 화광이 충천했다. 총성이 차츰 멎어갔다. 일부 녀학생들이 탈출하는데 성공했으나 새벽녘에 대부분 학교마당으로 끌려나왔다. 하숙집에 왔던 송기만의 누이동생은 다른데로 빠지려다가 놈들에게 붙잡혀갔다. 그때 송기만은 《국군》토벌대놈한테 대들다가 총탁판에 머리를 맞고 쓰러져 누이동생이 어떻게 끌려갔는지 보지 못했다.

《에이그. 이젠 정신이 드나베.

하숙집아주머니의 말이였다.

《어떻게 됐어요? 우리 동생이…》

《저 백정놈들이 학교마당에서… 글쎄 모아놓고… 사람들앞에서 학살한다누만.

송기만은 비칠거리며 음악학교마당으로 달려갔다. 강제로 끌려온 군중이 정문앞에 몽켜섰다. 사람으로서는 눈뜨고 보지 못할 광경이였다. 녀학생들이 발가벗기운채 바줄로 꽁꽁 묶여있었다. 총살하기 전에 온갖 잔인한짓을 다하려고 토벌대놈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여다녔다. 어떤 놈이 한 녀학생의 유방에 죽창을 찌르면서 야성을 질렀다.

송기만은 눈을 감고 돌아섰다. 뒤에서 들리는 총성이 까마득한 허공에서 떨어져내리는듯 그는 허탈상태에 빠져 하숙집에 왔다.

그날 밤 그는 앉은뱅이책상우에 있는 누이동생의 사진을 꺼내 가슴에 품고 순천을 떠났다. 그후 그는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송기만은 지리산빨찌산에서 싸웠다. 지리산빨찌산의 운명이 결정된 뱀사골과 대성골전투에서 그는 수많은 전우들을 잃었다.

지리산의 어느 동굴 바위벽에는 그가 먹으로 그린 그의 누이동생의 초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한테는 오재룡이라는 잊지 못할 전우가 있었다. 거의 5년동안을 함께 싸운 가장 친한 그 전우의 마지막부탁…

송기만의 전우 오재룡은 50년 여름 ××면소재지에서 토지개혁을 지도했고 그후 안해와 함께 지리산에 입산했다. 임신한 안해가 추운 겨울 해산하려고 은밀히 친정집에 갔다. 그런데 해산한지 얼마후에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그뒤 친정의 부모도 학살되고 갓난애는 마을의 누군가가 기른다고 했다. 오재룡은 이 아들을 송기만한테 부탁하고 숨을 거둔것이다.

송기만은 며칠을 두고 생각다못해 중대장한테 구례쪽으로 가는 《보급투쟁》(후방물자확보투쟁)에 나가겠다고 했다. 물론 전우의 자식을 찾겠다는 말도 하였다.

《찾아서는 어떻게 한다는거요?

《제 약혼녀한테 맡기겠습니다.

송기만은 50 7월에 군인민위원회에서 문화부문을 담당한 부서의 책임자였었다. 그때 소학교 교원인 처녀와 약혼을 했다는것이다.

《동무의 의견대로 약혼녀한테 맡기면 안전은 할것 같은데… 가만, 가만, 안되겠구만.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무슨 명분으로 기른다? 자칫하면 산에 있는 동무와 내통이 되였다는 의심을 받겠는데…》

이것은 오히려 송기만한테 명백한 방도를 대준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그렇게 되여 약혼녀는 그 아이를 찾아 집으로 데려가서는 딴 남자를 보아 임신한 애를 친정에 가서 해산해서 가져왔다고 했다. 처녀로서는 일생의 운명을 건 모험이지만 송기만의 뜻을 주저없이 따랐던것이다.

경찰측에서는 파고들려고 하지 않았다. 입산한 남자를 차버리고 딴 남자와 가다오다 눈이 맞아 아이를 배였다니 《빨찌산가족》에서 빼놓아도 되는것이라고…

반대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남편될 사람을 배신한 불륜의 녀자로 치부되고 아이 역시 개구멍받이나 다름없이 인정되였다. 전쟁이 끝났어도 그 도덕적인 지탄의 화살은 없어지지 않았다.

《국방경비법》으로 체포되여 무기형을 받은 송기만이한테 녀자의 결심이 전달되였다. 약혼녀는 그의 안해로 일생을 살겠다고 했다.

사실 말해서 송기만과 그 녀자사이에 별로 애틋하게 정이 들 시간도 없었다. 또 아이한테 정이 들어서 생긴 결심도 아니였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조국통일성전에 마음을 합쳐왔던 그 량심때문이 아니던가.

그 녀자는 과부 아닌 과부로 살고있다. 그 녀인의 진실을 밝힐수 있는 사람은 오직 송기만이였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오해, 그것때문에 그 녀자는 면회도 오지 못한다. 오씨성을 가진 그 전우의 아들은 자기를 누구의 자식으로 알고있는지… 그 아이한테 부모가 누구였는가를 똑똑히 말해줄수 있는 사람도 송기만이였다.

20년으로 감형되면 1972년경에 감옥을 나서게 된다. 그래서 더욱 지꿎게 본래의 계획에 매달린것이다. 몇년후가 아니라 당장 석달 아니면 사흘후에라도 나가게 될것 같은 《과대망상병》에 걸린것이다. 감옥년한이 15년이나 늦은 성태로서는 도무지 그것을 리해할수 없었으나 정대철은 《동년배》로서 어느 정도 그런 심리상태를 리해하는것 같았다.

정대철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녀인은 36, 아이는 13살… 그쯤 되였을테지…》

얼마후 정대철이 잠이 들었다.

성태는 전등빛만 쳐다보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반쯤 몸을 일으키고 송기만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어째선지 눈귀로 눈물이 가늘게 흐르고있었다. 무엇때문일가. 그의 표정은 평온했다. 아마 꿈속에서 사랑하는 녀인을 만나고있으리라.

성태는 송기만한테 사죄하고싶었다.

(송기만동지, 8사에 있을 때… 처음부터 동지를 오해하고있었소. 용서하오.)

하지만 성태는 그것보다 더 크게 사죄해야 할 일이 자신에게 있다는것에 소스라치듯 놀랐다.

처음에는 딱히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다음순간 그것이 명백해졌다. 성태는 이남땅에서 48, 49, 50, 그때는 자기라는 인간이 《좋은 두뇌》를 《썩인다》는 울분에 차서 그저 향학열에 타오르는것에서만 삶의 의의를 찾았다. 바로 그 시절에 송기만이네는 생사를 판가리하는 싸움에서 청춘을 바치고있었다. 이 지나간 과거를 무엇으로 보상할텐가. 송기만이한테 오해한것을 용서해달라 하는 정도로 보상될만 한 일이 아니다. 오직 민족의 통일을 위한 길에 함께 수난을 겪으며 서있다는것으로 송기만이와 자기를 나란히 세울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순간 동지를 오해하고 의심하고서도 어떻게 그와 나란히 설수 있겠는가 하는 심한 죄책감이 들었다. 동지를 의심하고 오해하다니? 누가 그럴 권리를 너한테 주었나? 너는 무슨 권리로 그를 오해하고 의심했더냐?… 나한테 죄가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통일을 위한 이 길에서 내앞에는 많은 선배들이 서있다. 황태성, 전윤국, 조용순, 정대철 그리고 송기만…

성태는 수인복 앞가슴을 손바닥으로 매만지였다. 거기에는 전윤국동지가 남기고 간 그의 혈조에 물들어진 글발, 붉은 실몽그러미가 있었다. 그의 마지막맹세와 호소가 영원히 살아있을 넋으로 어려있는 그 붉은 글발의 실몽그러미가…

 

며칠이 지나 송기만이 벽에 몸을 기대고 반좌위로 앉았다. 그는 침을 보관할 침통을 마련할 궁리를 해본다는것이다. 그 어떤 창조적희열에 쫓기듯 그의 눈동자에 생기가 어린다. 그의 체내에 잠재했던 미술가의 창작적본능이 내비치는것 같았다. 그는 줄곧 그렇게 앉아서 생각만 하고있었다.

저녁무렵에 시찰구가 벌컥 열리더니 늙수그레한 교도관의 낯판대기가 나타났다.

3220! 뭘해?… 왜 대답이 없어? 앉았는가?… 그게 누운겐가?

교도관의 목청은 정신병자나 머저리한테나 던지는 경멸과 희롱에 가득찬 어조였다.

《오, 그래, 지내 누웠으니 등이 배길테지. 그게 바루 병원에서 말하는 그 반좌위자세라는겐가?

송기만이 우정 손을 흔들며 짜장 벙어리처럼 히죽벌쭉 웃으려고 했다.

교도관이 뇌까렸다.

《정말 이젠 벙어리가 다 됐나보지. 그래도 아직 멀었어. 앉은뱅이나 되면 병보석, 집행유예로 봐주겠는지 정말 가련한 인생이야. , 귀는 멀쩡하니까 내 말 좀 들어. 일제때 박헌영이 똥을 먹고 지랄쳐서 정신병환자로 인정받고 출옥되지 않았나? 그렇게라도 해보지. 뭘 그래?

성태는 곁에서 참다못해 벌떡 일어나 시찰구에 다가섰다. 그러자 시찰구가 철칵 닫기였다. 성태는 송기만을 돌아보았다.

방금전까지 일부러 히죽벌쭉 웃던 송기만의 얼굴이 찡그러지더니 우는상이 되였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푹 떨구고 어깨를 떨며 끅끅 울음을 삼키더니 끝내는 참지 못하겠는지 꺼이꺼이 낮은 소리로 통곡을 터뜨리였다.

송기만은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치며 울음섞인 말을 내뿜는다.

《저놈들의… 이런 모욕두… 나한테는 싸지 싸.… 오호… 내 무슨 놈인고.… 내 무슨 놈이야… 내 인간이 아니지. 인간이… 인간이…》

성태는 그러는 그를 가만히 놔두었다. 그것으로 그의 가슴속에 맺히고 맺힌 응어리가 다 풀어질지 어찌 알랴. 그렇다. 참사람만이 자기를 인간이 아니라고 스스로 타매할 때가 있다.

정대철은 천정구석만 멍하니 쳐다보는데 성태는 송기만이한테 다가앉아 그를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송동지, 개놈새끼들 말을 뭘 타내겠소? 짐승들을 탓할게 있소? , , 그만하오… 송동지가 그치지 않으면 나도 붙들고 울테요. 울테란 말이요.

송기만은 끅끅 갑자르며 울음을 삼키였다.

송기만은 그 이튿날 아침에야 속을 늦추고 제가 해보겠다던 일에 달라붙었다. 치솔대속을 파내서 침대가 두개 들어가게 침통을 만들겠다는것이다.

치솔대 뒤쪽을 자르고 가는 못을 참대저가락에 박아 송곳을 만들어서 구멍을 파는것이 전혀 불가능해보였다. 하지만 송기만은 그 일을 시작했다. 두발사이에 치솔대를 세우고 끝을 송곳처럼 만든 못을 뱅뱅 돌리면 열이 생기고 수지가 부풀기도 한다. 그러면 물에 담그어 식히고… 그의 이마에는 비지땀이 내돋히더니 방울방울 줄지어 흘러내렸다. 교도관놈한테서 받은 모욕이 새로운 반발로 그를 일으켜세운것 같았다. 그는 결사전에 나선 사람처럼 입술을 앙다물었고 눈에는 한번도 본적 없는 그런 불꽃이 튕겼다.

성태는 수건대용으로 쓰는 너슬너슬한 넝마천을 손에 쥐고 송기만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송기만이 미소를 띠운다. 창백한 낯빛에 한가닥 혈조가 어리고 따뜻한 빛이 감돈다.

《고맙소.… 한데 여길 보지 마오. 미술가는 그림 그릴 때 다른 사람이 들여다보면 좋아하질 않소.… 이것두 하나의 창조품이라구 한다면…》

《창조품이지, 당당한 창조품…》

《그럴가?

《송동지, 말을 자꾸 하지 마오. 목이 더 쉬겠소.

《그래… 그렇소.

성태는 생각했다.(이것은 분명 투쟁이다. 송동지는 투쟁에 나섰다. 원쑤를 이기고… 량심을 지키고… 이것이 투쟁이 아니고 무엇인가.)

송기만이 치솔대에 세로 구멍을 뚫는것이 미타해서 《그게 되긴 되겠소? 괜히 고생만 하는게 아니요. 가뜩이나 쇠약한 몸에.》 하고 말했던것을 성태는 후회하였다.

《다 될 때까지 보지 마오.

송기만의 말에 성태는 정대철을 향해 돌아앉았다. 정대철이 올방자를 틀고앉아 머리를 숙이고있다가도 이따금 송기만의 손놀림을 지켜보군 하였다. 침통이 완성된것은 일주일뒤였다. 치솔대 뒤쪽을 짜른것이 뚜껑이 되였다. 참대바늘이 본체와 뚜껑을 련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뚜껑만 닫으면 겉보기에는 그저 치솔대인것이다.

그때로부터 이 《침통》은 언제나 안성태와 함께 있었다. 치솔걸개에 걸어놓으면 그 치솔대안에 침 두개가 있다는것을 누구도 모른다. 몇십년이 지난 후 그 침통이 박물관에 가리라고는 그때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느날 옆감방에서 타전하는 소리가 났다. 안성태가 얼른 벽에 귀를 갖다대였다.

《똑똑… 또독똑… 똑똑똑…》

정대철이는 재빨리 시찰구에 다가가 감시를 섰다.

성태는 손으로 타전을 하며 머리를 끄덕이군 했다. 통방신호가 그치자 정대철을 쳐다볼뿐 성태는 말을 못했다.

송기만이 이상해하며 돌아보았다.

《뭐라오?… 단식투쟁인가?

《아니, 정택수동지가 완전 실명했다오.

성태의 말이였다. 송기만이 손을 멈추고 멍히 이쪽을 보고있었다.

성태와 정대철은 고개만 숙이고있었다. 이미 예견했던 일이나 끝내 불행이 또 한 동지한테 닥쳐왔구나. 실명이니 집행유예? 병보석? 하여튼 감옥밖으로 나가기는 나갈게다. 놈들이 내던지는셈이지. 한데 나가서는 어쩐단 말인가. 의지가지없는 그가 아닌가. 그도 20년으로 감형된 무기수지만 그때 나가나 지금 나가나 마찬가지이다. 원쑤들은 전쟁때 그의 일가식솔을 모조리 참살해버려 갈데도 없는 몸이다. 양로원에서도 소경을 받자 하지 않을게다.

오랜 침묵끝에 정대철이 안성태의 손을 잡았다.

《내가 이제 나가면… 가만, 안동진 의술 좀 알겠지?

《침혈이나 알지 의학은 깜깜이요. 왜 그러우?

《좀 의논해보기요.

《뭔데?

《이것 보오. 이제 나가면 내 눈 하나 빼서 그한테 이식수술하면 안될가.

성태는 눈만 꺼벅거리다가 머리를 숙이였다.

정대철이 성태의 팔을 잡고 흔들며 안타깝게 속삭였다.

《어떻소? 안될가?

성태는 솟구치는 눈물을 보이지 말자고 고개를 쳐들지 않았다. 그는 목이 메여 말을 할수가 없었다. 여기가 암흑속의 지옥이 옳은가? 분명 감옥은 지옥이다. 지옥도 이만저만한 지옥인가? 고통과 죽음이 한데 엉킨 지옥이다. 그럼 천국은 어디란 말인가? 아니다. 사람의 정과 서로의 사랑이 없으면 천국도 지옥이고 사람이 서로 애가 들고 사랑만 나눈다면 지옥속에서도 억세게 삶을 영위해나갈수 있는것이다.

동무사랑, 동지사랑- 아, 이것이 곧 삶이다.

성태는 울대뼈를 삼키듯 하고나서 입을 열었다.

《그런 말… 좀 들었지만…》

저쪽에서 송기만이 우는듯 말하는듯 노래하는듯 웅얼거렸다. 그것은 분명 노래였다. 지리산의 전장에서 부르던 노래…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조국의 원쑤들이 짓밟아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쑤를 막아내여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떨던 날을

이제는 갚으리 그날의 원쑤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쑤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송기만의 노래는 마지막에 탁 쉬여버린 목소리에 실려 그 어떤 원한과 울분에 끓고있었다. 철창속에서는 삭일수도 없고 또 묻힐수도 없는 그것이 노래로 되여 나래를 펴고 자그마한 뙤창가로 흘러나가는것만 같았다.… 아니다. 뙤창도 막혀있으니 노래는 가슴에서 나와 가슴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원한과 분노와 증오가 그래서 심장을 뛰게 하고 피를 끓게 하는것이였다.

 

 

3

 

 

…그무렵 대전교도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부산의 동래에서 있은 일이다.… 그날은 일요일이였다.

삼복지간이라고 해도 바다가 멀지 않은 이곳은 별로 무덥지가 않다.

커다란 기와집이라 집안에는 아직도 봄날의 음랭한 기운이 구석진 곳을 따라 서려있는듯 싶다. 방은 자그만치 여섯칸이나 되였다. 복판 중심에는 남도지방특유의 대청과 마루방이 붙어있다. 무슨 대우를 냈는지 바닥이 유리알처럼 반들거렸다. 다른 방들은 왕골돗자리나 노전을 깔았다.

계순의 방은 남향이였다. 처녀때 쓰던 방이였다. 5살난 딸애의 방도 이제는 따로 꾸려주었다. 어째선지 어린 딸도 혼자 자는데 인차 습관이 되였다.

계순은 방을 조잡하게 꾸리는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방에는 침대와 편수책상, 꽤 큼직한 경대가 놓였다. 붕어자물쇠가 달린 고풍의 큰 장농은 어머니가 물려준것인지 옻칠의 윤기가 어지간히 스르죽어있었다. 이불장은 따로없이 벽장처럼 신식으로 짜넣었고 벽에는 한틀의 족자가 걸려있다. 그 방과 지게문으로 잇달린 뒤골방에는 해볕이 별로 들지 않았는데 량쪽벽에 모두 책들이 빼곡이 차있었다. 그 좁은 방 복판에 허름한 안락의자가 놓여서 빈자리란 거의 없다. 갓을 씌운 전등이 곧추 그 등받이걸상우에 둥둥 매달려있었다. 계순은 늘 이 등받이걸상에 앉아 책을 보군 하였다. 안락의자에 몸을 실으면 등뒤에 있는 키 높은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도 들을수 있었다. 이 집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벌써 몇년전 어머니는 외손녀를 본 후 몇달이 지나 세상을 떠났다. 안성태를 기다리며 일생 결혼을 단념했던 계순은 어머니의 눈물겨운 소망을 외면할수가 없었다.

그때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하루는 오빠가 계순이 있는 자리에서 몸져 누워있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저 애 성미를 알지 않나요. 저 애의 독한 마음을 나로서도 풀수 없군요.… 팔자탓으로 보구 어떤 새 연분이 나질 때까지 기다려…》

《오빠!

계순이 매섭게 오빠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오빠도 불끈해났다.

《얘, 너는 너만 생각하는구나.

오빠의 말은 어머니의 소망을 왜 그리도 위해주지 못하느냐 하는 지청구이기도 하다.

《약혼했던 사이도 아니구 그때 그 친구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를 봐두 어떤 확정적인…》

《오빠!

그러자 오빠는 제풀에 누그러지며 《참, 이상해. 옛날 말에 뢰봉전별이라고 우뢰처럼 만나게 되면 번개처럼 헤여진다고 했지만 너네는 그렇지가 않았는데.

어머니가 그 말에 응수했다.

《그러기 말이다. 갑작사랑 영리별이라는 말도 있지. 한데 너희넨 하루아침에 알게 된 사이두 아니고… 이런데서는 녀자의 마음이 더 굳지. 남자들이란 인차 변할수도 있어. 어쨌든 이게 팔자소관도 아니고 남북이 갈라져 영리별이 되는거지.

그러자 계순의 긴 살눈섭이 꼿꼿이 일어서고 웃입술이 아래입술을 감쳐물더니 불시에 눈물을 쏟으며 부르짖었다.

《어머니, 그게 웬 말인가요? 영리별이라니요? 그럼 통일도 영 되지 못한다는거예요?

계순의 목소리는 비분과 절망에 떨렸다. 어머니가 당황해났다.

《아서라, 그만해. 얘야, 에미가 잘못했구나.

고개를 돌린 어머니 역시 베개를 눈물로 적시였다. 계순은 울면서 밤새 잠들지 못했다.

그 이튿날 아침, 낯빛이 핼쓱해진 계순이 어머니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머니, 어머니와 오빠가 좋다는 남자라면 그 누구한테라두 시집가겠어요. 나한테는 어떤 대상자도 다 매한가지예요.

그 말에 놀란 어머니가 반쯤 일어나 앉아 불시에 통곡을 터뜨리였다. 《아서라. 얘야, 얘야, 내 잘못했다!

계순이도 어머니를 부둥켜안았다.

《아니예요, 어머니. 전 불효자식이예요. 용서하세요. 정말이예요.

계순의 눈에서도 걷잡을수없이 눈물이 흘렀다.

로처녀치고도 당시로서는 퍼그나 과년한 나이인 스물아홉살에 계순은 결혼했다. 나이가 들었어도 미모와 높은 교양으로 하여 괜찮은 총각들이 대상자로 많이 나섰던것이다.

남편은 부산시청의 공무원이였다. 데릴사위처럼 이 집에 들어왔다. 오빠는 목재공장을 그만두고 부산진구에 나가 상점을 차려놓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오빠는 세 아이와 올케를 데리고 부산진구 초량동에 이사를 갔다. 거기에 있는 오빠네 집은 세칸짜리 다다미방에 자그마한 정원이 달린 집이였다. 오빠도 이제는 나이가 40이 넘은지 오래다…

일요일의 한낮… 집에 혼자 남은 계순은 마루방에 돗자리를 내다 펴고 거기에 앉았다. 참대발을 드리운 열려진 바깥미닫이문으로 선선한 바다바람이 흘러들었다.

계순은 자개박이네모상에 아이들의 작문을 올려놓고 거기에 마주앉았다. 한쪽으로 뉘인 두무릎우에 부드럽고 엷은 흰 명주치마자락을 가리웠다. 어깨까지 드러나는 속샤쯔를 입어 밖에 나갈 때면 늘 가리워지군 하던 어깨살이 유독 희게 보였다.

흔히 눈이 큰 30대의 미인들이 그러하듯 그도 웃을 때면 눈꼬리에 실주름이 알릴락말락 잡히게 되였다. 30대 중반에 들어선 그가 몸이 약간 나면서 현숙한 부인의 품위가 잡힌다고들 했다. 하지만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계순은 눈가의 실주름자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쓸쓸히 미소를 짓군 하였다.

남편은 일본에 갔다온 친구를 오래간만에 만났다면서 해운대해수욕장으로 놀러갔다. 같이 가기를 권고했으나 아이들의 작문을 읽자면 시간이 걸린다고 하면서 계순은 영미만 따라보냈다.

고독과 명상을 즐기는것은 처녀때나 마찬가지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이즈음에 와서 더욱 그의 정신생활의 길동무, 안내자로 되는것이였다. 그는 작문들을 빨리 봐치우고 책을 읽으려고 작정했다.

열려진 문으로 참대발을 흔들며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왼손에 든 부채를 버릇처럼 흔들다가 한 아이의 작문에 거침없이 시선이 끌려들었다. 작문제목이 《보리밥》이였다.

 

   

 

벌써 우리는 여러날째 굶고있다. 요즘에는 아버지까지 일터를 잃으시고 산지사방을 돌아다니기만 하신다.

왜 우리 집에선 죽도 못 끓여먹을가? 배가 고파 죽겠는데… 어머니는 쌀이 있을 땐 그릇소리도 잘 내시더니 벌써 얼마전부터 그릇소리도 들을수 없다.

눈이 까칠하게 패인 아버지를 기다려본다.

밤이 퍼그나 깊었을 때였다. 밖에서 《컹》 하는 마른 기침소리가 들려오더니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방안에 들어서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없이 가지고 들어온 보자기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어머니보다 내가 먼저 뛰여가 풀어보았다. 자는줄 알았던 내 동생이 언제 보았던지 《보리쌀이다!》라고 소리쳤다.

둬되 실히 될것 같았다. 동생은 금이 간 꽃사발을 가리키며 《나는 두그릇 먹을래…》 하고 덧붙였다.

《네가 어떻게 두그릇을 먹어? 내가 겨우 두그릇을 먹을것 같은데!

그러니까 동생은 《내 배가 형 배보다 더 크단 말야!》 이렇게 우겨댔다.

아버지는 아무말없이 나와 동생을 지켜보시더니 쓸쓸히 웃고만 계셨다.

샐녘까지 우리는 앉아 보리밥을 기다렸다. 그처럼 기다려지던 보리밥이 들어오자 나는 그냥 《아버지, 진지 잡수세요…》 한마디 말만 건늬고는 상앞에 마주앉았다.

동생은 보리밥에다 된장과 소금을 마구 뿌려놓고 비벼버렸다.

나도 보리밥에다 된장을 비비고나서 한술 떠먹으니 보리밥은 씹히지도 않고 그냥 넘어갔다.

아버지가 밥상에 오시기도 전에 열살잡이 동생은 또 제일 밥이 많이 담긴 밥사발에 소금과 된장을 가득 칠해놓았다. 아버지가 밥상에 마주앉으시자 혼자 말씀처럼 《아이들에게 하루 한끼라도 밥을 먹였다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을텐데.》 라고 하시며 한숨을 내쉬였다. 나는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기찬이네 강아지도 끼니마다 밥을 먹는다구 고새끼가 언제나 날 보고 우쭐대는데 공부도 모르는 고것이 우등은 어떻게 하고 찰밥은 어떻게 먹어요…》

내 말을 듣고계시던 아버지는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실뿐 아무 말도 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두주먹은 여느때없이 틀어쥐여있었다.

 

계순은 꼭 어데서 이런 얘기를 들은것 같았다. 한데 도무지 기억에서 그것을 찾아낼수 없다. 어쨌든 동심이 비낀 가난에 가슴이 짜릿해졌다.

한데 웬일인지 다음순간, 얼굴이 화끈해졌다. 기찬이… 박기찬이… 그 애가 우등이라고 비난하는것은 교사인 자기를 비난하는것과 같다. 강아지한테 끼니마다 밥을 먹인다는 그 박기찬이… 안경쟁이 교무주임이 자꾸 귀가 솔갑게 《기찬이, 박기찬이》 하고 말했지. 그래서 시끄러움을 피하려고 점수를 에누리해준 내탓이 아닌가…

계순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동심을 외면해야 하며 학교당국의 강압에 어쩔수 없는 이 처지가 새삼스레 굴욕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국민학교 교사노릇 못해먹겠구나…)

중학교 교사 하라는것을 조용한 곳을 찾느라고 거절했는데…

이제라도 당장 그만둘 생각이 났다. 하지만 집에 홀로 있다는것도 무서운 일일것이다.

남편은 계순이와 반대로 책도 음악도 좋아 안하고 술을 좋아하나 푹 취하지는 않는다. 공무원의 직분을 다하려고만 애쓰는듯 싶다. 안해한테 성실하려는지 녀자들도 멀리하고 늘 꼿꼿해서 사는데 속으로는 무슨 큰 야심을 품고있는지 쩍하면 실눈을 짓고 잔조름히 쪼프리며 허공을 쏘아보는것이였다.

남편 조민하는 두뇌만은 명석하여 소상인의 쪼들린 살림에도 대학까지 나올수가 있었고 후에는 서울에 가 《고시》에 합격되였으나 돈이 없는탓으로 겨우 부산시청의 하급공무원으로 취직했다. 그러니 울분이 있을것은 당연했다. 계순이 이 점에 동정했던것은 사실이다.

한데 집안에 들어와서 조민하가 안해의 일손을 도와주느라고 설설 기면서 돌아갈 때는 오히려 정이 더 떨어졌다. 술에 취해서 주먹으로 한번 쳐라도 주었으면 차라리 시원할것 같은 때가 있다. 보통때는 곰살갑게 굴다가도 하찮은 일을 새기지 못해 새파랗게 《랭전》을 펴오는것이였다. 그러다가도 무엇때문인지 갑자기 사근사근해지며 음악을 좋아하는 계순이한테 새 레코트판을 사가지고 온다. 그리고 제사 먼저 전축에 레코트판을 끼워넣고 안해를 기쁘게 하려고 허둥대는것이다. 그것은 곧 사랑놀음을 요구하는 전주곡으로 되였다. 그러면 할수없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다. 그가 나이들어서 장가를 든것이 사랑의 곡절때문이 아니라 숱한 녀자들과 관계를 가진데 있다는 사실을 계순은 결혼후에야 알게 되였다. 일종의 《숨은 난봉군》이였다.

남녀간의 관계란 이상한것이다. 완전한 정신적인 융합이 없으면서도 육체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다니… 공동으로 책임져야 할 딸애의 운명이 있지 않는가. 그러니 결혼생활은 의무감으로도 얼마든지 유지되는것이라고 계순은 자신을 납득시키군 했다.

그는 다시 학생의 작문을 내려다보았다. 누런 종이에 좋지 못한 연필로 쓴 글씨… 학생의 눈물겨운 동심을 떠나 왕청같이 제 생각에 잠긴것에 스스로도 의아해졌다. 그런 생활고가 너무나 항다반사로 된 현실에 체념되여서인지 아니, 자신이 의식적으로 주위세계를 외면하려는 소시민적인 자기보신에 빠져서가 아닐가…

그는 이 작문에 최고의 점수를 주려고 했으나 교무주임의 번뜩이는 안경이 생각나 한숨을 지으며 보통점수를 매겼다. 하면서도 이 작문을 꼭 신문에 내고싶었다. 《부산일보》가 아니라 서울의 《동아일보》나 다른 신문에 내려고 하였다. 《남선고녀》동창의 남편이 《경향신문》의 편집국에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러니 거기에 시도해봐야 했다. 낮은 점수를 매긴데 대한 보상으로 이렇게 량심의 가책을 메꾸려는것이였다.

다음은 전영호라는 아이의 작문이였다. 이것은 《반공글짓기》 요구대로 지은것이였다. 북에 있는 사람들은 머리에 뿔이 나고 서로 으르렁대며 싸우다보니 저절로 얼굴이 빨갛게 되였다는따위… 요즘 교육당국에서는 《반공글짓기》를 교육의 기본처럼 내놓고 교원들을 다몰아댄다. 그런데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가. 전영호라는 아이의 작문은 매번 《반공글》인데 항상 《최고점수》로 되게 씌여졌다. 동심은 물론 있을수 없다. 어느 어른이 손을 대주는것이 분명했다. 수업시간에 쓰라고 하면 그 애는 수첩을 몰래 펴고 거기서 한가지씩 써내는것이였다.

계순은 경악과 호기심에 싸여 그 아이의 부모와 집안을 알아보았다. 아이 아버지는 《부산방직》에서 기계수리공으로 일하다가 직공장이 되였다.

그는 본시 지리산이 가까운 고장에서 살았다. 직공장의 형 즉 아이의 큰아버지는 지하투쟁활동가였고 후에 지리산빨찌산 중대장으로 싸우다가 체포되여 인차 옥사했다고 한다. 그를 동생인 직공장이 고발했다는 말이 있었다. 하여튼 그는 《반공사상이 매우 투철한》자였다. 어쩌면 제 형을 고발할수 있는가, 믿을수가 없었다. 아이의 작문을 그런 식으로 늘 간섭하는걸 보면 어떤 피맺힌 사연이 있는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한번은 계순이 본시 동래경찰서에 있다가 시경찰국에 간 6촌오빠를 만나 그런 사연을 물었더니 그가 꿈쩍 놀라는것이였다.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한데 넌 별걸 다 신경쓴다.

그러는 기색이 분명 전영호라는 아이의 집안일을 우연히 인지는 몰라도 잘 알고있음이 분명했다.

계순은 그 작문에 높은 점수를 줄수가 없었다. 교무주임이 노발대발할것이다. 그래도 점수를 적당히 매기고말았다. 그러고보니 이래도 적당한 점수, 저래도 적당한 점수를 매기는 판이다. 이것이 곧 자신의 인생에도 적당한 점수를 매기면서 살고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내부에서 솟구치는 어떤 질책과 항변의 목소리에 변명하듯 《호》 하고 긴 한숨을 내불었다.

이때 마당 저쪽 대문간에서 달랑거리는 방울소리가 났다. 누가 온 모양이다. 계순은 일어나 참대문발을 들치며 마루에 나섰다.

 

 

4

 

 

《아니? 석순이 안야?

쪽대문을 연 계순이 반갑게 소리쳤다. 울적하던 심사에 한줄기 청신한 바람이 흘러든듯 해서 계순은 안석순이 들어서자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거제도에 영 이사를 간다구 해서 무슨 소식있는가 기다렸는데.

두 녀자는 여전히 손을 놓지 못한채 섬돌을 디디며 마루에 같이 올라섰다.

석순은 계순이보다 키가 좀 작은 편이고 얼굴인상도 수수하였다. 소녀시절에 사박스럽던 오목눈이 이제는 때없이 칼끝처럼 예리해질 때가 많았다. 석순의 모진 고생이 그들사이의 일곱살 나이차이를 없애버린듯 싶다.

《가만, 더운데 랭수라도 마셔야지.

계순은 부엌으로 가서 랭수 한사발을 들고 왔다.

《땀을 들여. 마시라니까.

여전히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석순이 랭수를 받아 마시였다.

《역시 여기 물맛이 좋아.

《그런데 어찌된셈이니? 거제도에 영 갔나보다구 생각했는데.

《언니, 제가 가면 간다구 여기부터 오지 어델 가겠어요? 실은 래일쯤 떠나려구, 그래서…》

대학 농학부를 나온 석순의 남편 원시준이 순전히 생계를 위해서 거제도에 가서 버섯농사를 벌려놓으려는것이였다.

안석순과 원시준의 결혼은 계순이 주선했었다.

김계순이와 안석순은 친자매간처럼 지내왔다.

안성태를 서울로 바래우던 부산역두… 잊을수 없는 그날 계순이를 부축해주던 그 순간이 그들의 운명을 자매로 얽히게 하였다.

안석순은 전쟁때 어머니를 여읜 다음 아버지를 모시고 어린 동생과 함께 살았다. 셋째 오빠인 안성필은 《국군》에서 제대된 후 여기저기 일자리를 옮겨가다 다시 군속으로 군수관계에 들어갔다가 장가를 들었다. 올케는 친정의 도움으로 무슨 차집을 차려놓는다고 했다. 석순의 두 언니는 벌써 전쟁전에 각기 전차운전수, 막벌이군한테 시집을 갔고 석순은 아버지, 동생과 함께 고생이란 고생을 다하였다. 아마 계순의 도움과 그한테 의지하는 마음만 없었더라면 석순은 일찌감치 바다에라도 몸을 던졌을것이였다.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뒤 어린 동생은 껌팔이, 구두닦기를 하다가 어디론가 집을 뛰쳐나갔다가 돌아오기도 했었다.

계순이 석순이를 결혼시켜 무너지는 그 가정을 유지시켜보려고 했으나 석순이 말했다.

《나이 순서대로 하자요. 언니가 결혼 안하면 나도 시집 안 가요.

병석에 누운 늙은 어머니의 소망과 함께 석순의 이런 간청도 작용한것은 사실이다.

나이 29살까지 계순이 로처녀로 있자니 별의별 추문이 다 돌았다.

경찰관인 6촌오빠가 을러멨다.

《얘, 네가 <부역자>를 기다려 그냥 있으니 너 역시 <부역자>나 다름없다구들 한다.

그런 정치적딱지는 아무렇든 좋았다.

안성태와 헤여진 근 10년간 사랑의 상처는 아물수가 없었고 그외의것은 모두가 기만이고 허위였으니 어찌 거기에 타협할수 있으랴.

결혼이란 뭐 말라빠진 도깨비장난인가… 그렇게만 생각했으나 어머니의 눈물, 오빠의 적극적인 주선, 석순의 간청으로 끝내는 결혼이라는 실무적인 일에 응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한편 석순이는 떠돌아다니던 동생 성호마저 발진티브스를 만나 집에 와서 숨을 거두자 동래를 떠나 부산 중구에 있는 시가로 옮겨갔다.

돌이켜보면 일찌기 전쟁때 부산에 미군과 《국군》이 와글거리고 온갖 《관공리》들과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모여든 란장판에서 계순이네 집에 자주 와있으면서 석순은 책을 굉장히 많이 읽었다. 어려서 가정적인 불행을 겪은 사람들이 흔히 책과 문학속에서 위안과 앞날을 찾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인지 석순은 동시를 쓰기 시작했고 계순은 그 싹을 키워주었다. 작가로 성장시키려는것이 아니라 혹시 생계를 이어줄수 있는 수단이라도 마련할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비록 학교는 변변히 못 다녔으나 석순한테 천부의 재능이 있어서 동시가 《부산일보》 일요문예란에 몇편 발표되고 그것을 연줄로 어느 작은 아동도서출판사 편수로 입직하게 되였다. 계순은 본인보다 더 기뻐했다. 하지만 그 출판사가 경영난으로 파산되자 다른 출판사로 겨우 옮겨앉게 되였다.

대학졸업생인 남자가 석순이를 배우자로 선택하는데서 그런 직업적인 측면이 상당한 작용을 한것은 사실이다.

두 녀자는 전쟁이 끝난 이후로 약속이나 한듯 더는 안성태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서로 마음속에 깊이 묻어두면 둘수록 자매처럼 더욱 친밀해지는 그들이였다.

계순이 문득 생각이 나서 일어났다.

《참, 내 정신 봐. 움속에 지난해 사과가 몇알 있겠는데.

석순이 급히 말렸다.

《언니, 그만두세요. 내가 무슨 어린애라구. 영미가 둬두고 먹을걸. 제발 앉아서 얘기나…》

계순이 어느새 뒤울안으로 나갔다.

계순이 과일그릇에 사과 몇알을 담아가지고 왔다.

《별맛이야, 묵은 사과 안야? !

《그럼 언니두, 언니 안 먹으면 나두 안 먹을래.

석순은 응석부리듯 하였다. 벌써 두 아이의 어머니건만 계순이 앞에서는 부모앞에서도 별로 있은적이 없었던 그런 어리광이 생겨나는것이였다.

둘은 서로 아이들의 일을 묻다가 한참 웃기도 했다. 같이 점심을 먹었다.

오후차가 동래역에서 몇시인가고 물을 때부터 석순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시무룩해졌다. 계순은 그가 떠나기가 섭섭해한다는걸 안다. 거제도로 이사를 간다니 더 그럴수 있지…

《얘, 거제도에 가 자리를 잡으면 내 영미를 데리고 방학철이면 놀러가마.

부산에서 거제도까지는 륙로로 교통이 불편하지만 차라리 배길이 더 괜찮다는 말도 했다.

실상 그렇게 자주 가낼 여유가 있겠는지는 몰라도 서로 마음을 나누자면 편지로는 너무도 모자라는것이 그들의 관계이고 그들의 정이다.

《너두 자주 오려마.

거제도생활이 어떨는지 그것 역시 확신있는 기대는 못된다.

그래도 석순의 표정은 굳어져있다.

《무슨 근심있는게 안야?

석순은 조용히 대답했다.

《우리 시동생… 동아대학교 다니는… <한일협정> 반대데모에 나갔다가 경찰곤봉에 맞고 부상당해서.

《뭐라구? 중하니?

《아니 뭐 별루.

《일없겠지. 학생회간부라더니. 어쨌든 장하구나.

이렇게 말하면서도 계순은 의문이 실린 눈으로 석순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면서 띠염띠염 말했다.

《너의 랑군처럼… 옛날 고문서를 뒤지지 않구… 그렇게 몸으로 력사를 새겨가니…》

안석순의 남편 원시준은 자기네 조상들의 족보에서 임진왜란때 어느 한 원씨성을 가진 사람이 역적이 아니라는것을 증명해보려고 했다. 어떤 단서와 계기에서인지 쾌재를 올리며 그것이 왜놈들의 작간이라는 사실을 찾아냈다고 하면서 서울로, 통영으로 뻔질나게 다니는 다혈질의 인간이였다. 그것을 확인하는 력사자료들을 찾아냈다는것이다. 거제도에 가 버섯농장을 벌려놓으려는데는 생업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력사자료추적에도 목적이 없지 않을것이다.

한데 계순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석순의 얼굴에 감추지 못하는 그늘은 시동생의 부상때문인것 같지는 않았다.

《얘, 석순아… 이상하구나… 무슨 말 못할 일이 있니?… 내앞에서 네가 이러기는 처음이야.

고개를 숙였던 석순이 머리를 들자 계순은 놀랐다. 그의 눈에 눈물이 가랑가랑 고여있지 않는가!

계순은 자기가 예상할수 없는 일이 석순의 신상에 닥쳤음을 깨달으며 공포에 몸을 떨었다. 그러니 더 재촉해서 물을수가 없었다.

석순이 고개를 외로 틀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했다.

《언니, 이제껏… 용서해… 한데 부산을 떠나 다른 고장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더는… 이대로 떠날수 없구.

그러니 석순의 신상에 한한 일이 아닌것만 같다.

한쪽 무릎을 세워 그우에 한팔을 얹고 앉은 계순은 돌처럼 굳어졌다. 오른손에 들고 부치던 부채도 기력을 잃은듯 돗자리우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늘 부드럽던 계순의 눈빛, 허나 지금은 긴장과 의혹 그리고 불안으로 하여 크고 시원하던 눈의 어느 구석에도 그 따뜻한 빛이 없다.

여전히 방안 한구석을 바라보던 석순이 긴 한숨을 내불며 손수건으로 눈굽을 닦았다.

《…벌써… 이태가 지났어요… 둘째 오빠가…》

《뭐? 둘째 오빠라니?… 그게, 그게 무슨 말이냐?

계순은 가슴이 활랑거렸다. 눈앞이 뿌얘지고 머리가 휘둘리면서 앉아 몸을 가눌수가 없었다. 가슴속에 깊이깊이 가라앉았던 고뇌와 원망이 불시에 솟구쳐올랐다. 그렇다. 그것은 이미 그리움이 아니였다. 그리움이 재가 되면 원망으로 변하는 법이다.

계순은 앉은채로 웃몸을 석순의 품에 안기우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래서… 말을 해라!…》

《언니, 진정해요. 제발… 대전교도소에 있어요.

《아!…》

계순은 외마디소리를 치며 더 말을 못했다. 석순은 그의 머리를 부둥켜안았다. 《언니, 언니. 진정해 제발… 》 몹시 놀란 계순이를 어떻게 진정시켰으면 좋을지 몰랐다. 계순의 거친 숨소리는 여전히 잦아들줄 모른다. 그러면서 들릴락말락 꿈결에서처럼 중얼거린다. 《정말이냐… 정말이냐…》

그러다가 그 어떤 격정에 북받친듯 불시에 목소리를 높이였다.

《그렇게 와선… 뭘한단 말이냐. 그렇게 오면 뭘해?… 그렇게 와선 뭘하나 말이다… 아!…》

석순의 품에 아예 쓰러져누웠던 계순이 별안간 발딱 일어나앉더니 눈에 매서운 빛을 서리발처럼 일군다.

《왜 갔어? 왜… 왜… 왜 갔어?… 통일을 한다구 그래서 갔을테지… 한데 그렇게… 그렇게…》

자기가 바라던 그런 사나이의 뜻과 길이라고 눈물을 삼키면서 체념해버려 그것이 굳어진 응어리로 마음속에 깊이 가라앉았댔는데 이렇게 현실은 아픈 상처를 다시금 헤집어놓는다. 그러니 원한과 분노가 온몸을 떨리게 하는것이다.

《언니! 언니! 이러지 말아요.

석순은 눈물을 흘리였다. 그러자 계순이가 석순이의 두손을 부여잡았다.

《석순아… 미안하다…》

석순이 여전히 울고있었다.

계순의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막혔던 동이 터진듯 거침없이 흐르는 눈물속에서 그는 떠듬거렸다.

《왜… 왜 인제야… 인제야 알려주느냐.

《언니…》

그러자 눈물로 목메이는 계순의 부르짖음.

《아, 보구파!… 단 한번이라도…》

석순이 얼굴에서 두손을 내리우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언니. 제발… 그래서 내가 이때껏 말하지 않았는데…》

그러자 계순이 거의 표독스러울 정도로 석순을 노려보았다.

《석순아, 네가 뭘 안다구 그러니… 무난한 결혼을 한 사람은 사랑이란 뭔지 모른다는 말이 옳아… 얘, 사랑과 결혼은 달라. 네가 뭘 안다구… 흥. 유부녀가 첫사랑을 그리워해선 안된단 말이겠지. 하지만 한가지 묻자. 우리의 사랑이 못 이루어진게 내 잘못이냐, 네 오빠 잘못이냐? 세상에 대고 물어보자. 통곡을 하면서 물어보잔 말이다. 나한테 남편이 있다구 해서 만나서는 안된다는 법이 어디 있어? 설사 우리가 마주서도 우리 사이엔 분단장벽처럼 철창이 막아섰는데. 안 그렇니? 말 좀 해.

거의 히스테리를 일으키는듯 한 넉두리였다.

마침내 계순이 통곡을 터뜨렸다.

《그래… 영영… 그이는… 어둠속에 갇혔으니… 그렇게 가는가?…》

석순은 계순이 실성하지 않았나싶어 더럭 겁이 났다. 그는 계순이의 팔을 잡았다.

《언니!

《아서라. 날 좀 가만 놔다구.

설음과 원한, 고뇌와 원망, 쓰디쓴 상실과 절망… 세월로도 황금으로도 보상할수 없는 지나온 반생…

시간이 흐르자 어느덧 계순이 진정하기 시작했다. 석순이 불어난 젖가슴을 매만지며 두고온 아기생각을 하리라는것을 짐작하게 된 계순은 그제야 정신이 든듯, 그러면서도 한숨을 쉬며 《미안해… 젖먹이를 두고 왔겠는데.》 하고 말했다.

《암죽을 해놓았으니…》

《그래두 빨리 가봐야지. 거제도에 이사가서 주소도 알릴겸 인차 편지해라.

그리고는 힘없이 느릿한 동작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모아 손수건으로 동여맸다. 그가 입에 문 빈침이 바르르 떨리였다. 강심을 먹으며 자제력을 되찾는것 같았다.

《석순아, 내 한번 대전에 가겠다.

《언니, 가족이 아닌 사람 면회 못해요. 요즘 더하대요.

《돈만 내면 되겠지?

《그런 액수의 돈이 어디 있어요?

《어떻게 마련해봐야지… 어떤 절차를 밟는지는 네 셋째 오빠 성필씨 말이다. 그한테 물어보면 그가 알겠지?

《네, 우리 형제중에서 아직은 그 오빠가 면회갔댔어요. 세번인가… 저두 마음이 간절해요. 시집눈치를 보다나니. 게다가 젖먹이가 달리구.

《시집눈치 볼거야 없지 않니?

《아니예요. 시아버진 시동생이 운동에 참가하는걸 꺼리구. 우리 오빠가 무기형을 받고 교도소에 있다는 얘기를 들은 다음부터 심사가 편안치 않아서… 거제도에 가니 시가와 떨어지는게 제일 좋아요.

계순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러니 너는 나보다 또 다르구. 옥중에 있는 사람과 친형제이니 단순할것 같은데 더 복잡하구나.

《언니, 제발 부탁이니 대전걸음은 마세요. ? 그러지요?… 영미 아버지가 아무리 넓게 생각한다 해도 남자들이란 그렇지 않아요.

《걱정말아. 내 알아서 처리하지 않으리. 영미 아버지는 나한테 너무나도 헌신적이다. 내가 늦게 결혼한 마음속 상처도 다 알고있구. 그런걸 리해 못하면 남자가 아니지 뭐. 철창을 가운데 두고 만났다가 오는 그런것두 리해 못하겠니? 이게 다 민족의 비극인데… 그런 동정심도 없다면 무슨 사람이라고 하겠어?… 자, 차시간이 된다. 빨리… 쫓아보내는것 같아 미안해… 저녁까진 조용히 혼자 있고싶어.

언제나 솔직한 계순의 심정을 리해한듯 석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순은 역까지 석순을 바래워주었다.

해가 금정산으로 기울어져가는 오후였다.

계순은 보통때의 탄력있는 걸음걸이를 애써 흐트러뜨리지 않고 천연스런 표정으로 석순의 팔을 가벼이 끼고 걸었다. 석순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채 계순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자매처럼 오손도손 얘기를 나누는것이 아무런 일도 없었던듯…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텅 빈 집에 들어서자 고독감이 사정없이 엄습했다. 거기에 도전하듯 그는 뒤방에 들어가 전축을 틀었다. 쌓아놓은 레코트판무지의 맨 아래쪽에서 하나의 레코트를 찾아냈다.

전쟁때부터 결혼전까지 거의 10년을 매일같이 듣던 노래, 하지만 결혼후에 단 한번도 전축에 올리지 않던 레코트였다.

그것은 영국의 스코틀랜드지방에서 민요처럼 된 노래 《안니 롤리》였다. 축음기에 그 레코트를 바꿔넣고 계순은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바로 머리뒤 가까이에서 녀성가수의 애절한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새벽에 이슬 내려 빛나는 언덕은

그대 함께 언약 맺은 사랑의 내 고향

사랑의 언약을 내 잊지 못하리

사랑하는 안니 롤리 영원히 살리라…

 

계순은 가수의 영국식영어의 발음에서 오는 그 시기의 감정을 새기고있었다.

《안니 롤리》… 스코틀랜드 남부지방의 어느 계곡, 1680년대의 처녀 안니, 그한테도 사랑은 찾아왔건만 처녀와 그 애인의 두 아버지는 서로 정치적인 적수였다. 이 지방의 명사였던 아버지의 반대로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안니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였다.

남자애인의 안니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노래한 이 가요는 19세기까지도 온 영국땅과 유럽대륙에 풍미하였었다. 리상적인 애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의 비가, 어째선지 이 노래의 레코트는 다 녀성가수의 노래로 취입된것들이다. 일본말로 된것은 전혀 감정이 살아나지 않아 그때 계순은 영국식발음으로 된 레코트를 힘들게 구했었다.

물론 지금 그 노래를 들으면서 그런것은 다 생각하지 못했다. 선률에 흐르는 감정에 자신의 심혼을 실어보는것이다.

 

…새별 같은 그 눈동자 아름다운 얼굴

이 세상 그 무엇에도 비길수 없어라

네 어여쁜 모습 내 잊지 못하리

사랑하는 안니 롤리 영원히 살리라

 

후렴구에서 고조되는 선률에 가슴이 찢어지는것만 같았다.

(, 지금으로부터 몇백년전에… 오늘의 나를 위해 지은 노래인가?… 안니 롤리-그도 나처럼 불행했구나!)

눈물을 머금으며 계순이 이렇게 속으로 부르짖는데 선률은 더욱 안타까운 감정에로 치달아오른다.

 

…여름날 바람같이 풀숲 이슬같이

그대 음성 내 귀가에 속삭여주도다

고요한 목소리 내 잊지 못하리

사랑하는 안니 롤리 영원히 살리라…

 

안락의자의 팔걸이에 팔굽을 고이고 거기에 웃몸을 실은 계순의 눈굽에서는 거침없이 눈물이 흐른다. 량쪽에 책이 꽉 차있는 어둡고 좁은 방안, 계순은 전등 켤 생각도 못하고있었다.

석순의 앞에서 유지하려고 애쓰던 마음의 탕개는 이 골방에서 끊어지고 그 잊을수 없는 사랑의 비가로 하여 간신히 버텨내던 정신적균형은 여지없이 허물어졌다.

계순은 노래를 처음부터 다시 틀었다. 한데 지난날에는 비애의 나락으로만 떠밀더니 지금은 이 노래가 이상하게도 자기를 어딘지 모르게 둥둥 떠올리는 유혹의 나래에 실어가는것만 같았다. 물론 그것은 꿈도 희망도 아니다. 무엇때문일가. 알수 없었다. 단순히 위안일가? 이 세상에 자기와 같은 불행이 과거에도 있었다는,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그것때문일가?

아니다. 인류가 흘러온 력사에는 이런 비극이, 이런 류의 불행이 없었다. 안니 롤리의 사랑은 신분과 아버지들의 정쟁으로 못 이루어졌지만 나의 불행은 그것과는 대비조차 할수없이 엄청나게 크고 무서운 민족의 재난으로 하여 생긴것이라는 이 중압감에 숨이 가빠 헤여날수 없는것이다.

거의 실신상태에서 명상의 파도에 휘말려 허우적거리는 계순은 저쪽 방안에 남편과 딸애가 들어선줄도 모르고있었다.

남편 조민하가 노래소리를 듣고 다섯살 난 딸애를 제지시키면서 입가에 손가락을 세웠기에 인기척이 들리지 않은것은 사실이였다.

마침내 아버지의 손에서 벗어난 딸애 영미가 문을 열고 《엄마!》 하고 소리쳐 불렀다.

조민하는 딸애를 놓아주고 방 복판에 서있었다. 두드러진 이마, 갱핏한 얼굴, 총명한 눈빛… 그는 생각을 더듬는듯 두눈을 쪼프리며 해수욕장에 들고갔던 가방도 놓지 못한채 움직이지 않았다. 결혼전에 듣고는 처음 듣는 노래소리… 조민하는 느닷없이 한숨을 짓는다.

계순은 영미의 부름에 깨났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밝고 널직한 방으로 나왔다. 웬일인지 치마자락에 매달리는 딸애도 그리고 의아히 바라보는 남편도 그한테는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몹시도 낯설어보였다.

딸애가 바다가에서 조가비를 주었다고 손에 내들며 연신 뭐라고 종알거렸으나 계순은 《응, , 그래, 그래.》 하고 고개만 끄덕여 보일뿐이다…

 

 

5

 

 

…사흘이 지났다. 계순은 줄곧 흥분과 불안속에서 지냈다.

그날 저녁, 남편한테 꺼내놓은 말, 지금 생각하면 그런 부탁을 어떻게 그렇듯 쉽사리 터쳐놓을수 있었던지 스스로도 믿어지질 않았다. 하지만 쏟아놓은 물을 다시 주어담을수는 없었다. 그런데 남편이 뜻밖에 너그러이 받아줄줄이야.

이날 계순은 바다가에서 놀다가 오자바람 밥도 별로 먹지 않고 잠에 취해 군드러진 영미를 안아 잠재우는 자그마한 침대에로 가져가고나서 방으로 돌아왔다.

함께 잠자리에 들려고 계순은 여느때없이 전등을 켜놓은채 남편앞에서 옷을 벗으며 속옷마저 내리우려고 했다.

그러던 계순이 머밋거리며 말했다.

《한가지… 부탁이 있어요.

(내 정신 나가지 않았어?… 아니야. 기왕 내친김에… 될대로 되라지.)

《부탁? 새삼스레 부탁이라니?

그들사이엔 이제껏 부탁이란 말이 있어본적 없다. 조민하는 일어나 안해한테 다가가 속치마웃단에 가리워진 그 류달리 불룩한 가슴을 어루만지였다. 그러는 남편의 손목을 잡으며 계순은 까딱 않고 서있었다.

《말을 하오. 무슨 부탁인지… 시청 교육국에 누구네 아이문제를 부탁할게라도?…》

계순은 천천히 도리머리를 했다.

《그럼 뭐요? 나한테 말 못할게 뭐가 있어서…》

이런 때면 남편은 곧잘 자기의 헌신성을 증명하려 든다.

《돈이예요…》

(차라리 빚에 몰리는 오빠네 딱한 사정을 두고 말할가… 그럴수 없어. 오빠네 빚돈은 엄청난건데 이 량반이 그걸 어떻게…) 그리고 무엇보다 계순은 거짓말을 하고싶지가 않았다.

《돈이라니? 얼마나 되게?

어디다 쓰겠는가는 묻지 않고 그저 액수만 묻는다. 계순은 용기가 생겼다. 그는 남편의 손을 가슴에서 가볍게 밀어내며 침대에 가 걸터앉아서 《여기 좀 앉아요.》 하고 말했다.

남편이라는 사람은 안해의 심중한 기색에는 숫제 아무렇지 않은듯 히죽이 웃으며 빤쯔바람의 알몸으로 안해한테 다가앉았다. 종일 바다에서 볕을 쪼인 몸이 그대로 벌겋게 달아있어 열기가 확확 풍기였다.

《어서 말하오. 빨리 말하고… 불을 끄겠소.

《불은 아직 끄지 마세요.

계순은 얼굴을 옆으로 돌리였다.

(하느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계순은 《30만원…》 하고 말했다.

《음… 작지는 않구만. 하지만 구해야지. 어데 오빠네 집에 보태주자고?

오빠의 상점에 부도가 생기고 자칫하면 상점이 경매에 붙게 된다는것을 그도 알고있다. 그러니 그렇다고 대답해버릴가. 하지만 그의 입은 솔직히 말을 터놓는다.

《그건 아니예요.

그러자 어째선지 남편이 다 리해하고 수긍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민하가 바싹 다가붙으며 한팔로 안해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볕에 단 남편의 몸이 난로처럼 뜨거웠다. 여느때라면 피할수도 있었으나 그럴수가 없었다.

계순은 재차 용기를 수습하고 천천히 한마디 한마디 입으로 빚어내듯이 힘들게 말을 했다. 안성태라는 이름대신 석순의 둘째 오빠라고만 했다.

그러자 남편의 팔이 점점 계순의 가슴우에서 미끄러져내리려고 했다. 계순은 부지중 그 손을 붙잡고 가슴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 말없는 거동에는 안타까운 청원의 뜻이 있었다. 계순은 말했다. 옛날의 우정을 생각해서, 벗으로서 그 무기수를 동정하지 않을수 없다는것을… 첫사랑이란 어떤건지 당신도 리해하지 않는가고… 여기까지 내처 말하고는 숨이 딱 막히는것만 같았다. 하지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것처럼 가슴이 좀 열리는것도 같았다. 그런데 자기가 쥐고있는 남편의 손이 점점 식어가는것 같아 다시금 긴장으로 숨을 모으게 했다.

잠시 침묵…

《상대방… 저쪽에서 만나자는건 아니겠지?

그 말에 계순은 흠칫 놀라 약간 몸을 솟구치려다가 앉으며 《아, 아니예요. 그건 절대 아니예요.… 믿어줘요.》 하고 말했다.

남편이 안해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내며 천천히 일어섰다.

《알겠소. 그렇다면야… 내가 리해하면 되는거지. 한데 소문이 나지 않게 갔다올수 있소?

《그건 념려말아요. 석순이와 같이(그것은 황급한 순간의 거짓말이다)… 영미 아버지, 날 용서해줘요.

《뭐 용서할게 있소? 그런것쯤 다 초월할만큼 내가 열렬히 당신을 사랑하는데.

계순은 눈물이 가랑가랑해서 《고마워요. 고마워요.》 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였다.

조민하는 《내 잠간…》 하고 마루복도로 나가더니 끌신을 신고 화장실로 가는 모양이였다.

계순은 이상한 예감에 다시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조민하는 돌아와서 두팔을 쳐들고 기지개를 켜며 《아, 오늘은 정말 피곤하구만.》 하더니 히죽이 웃었다. 남편은 다가와 허리를 굽히며 안해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그럼 잘 자오.》 하고 물러가는것이였다. 계순은 웬일인지 온몸에서 스르르 맥이 풀어지는것 같아 인츰 일어날수가 없었다. 이때야 자기가 망녕된짓을 하고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일종의 공포와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그는 억지로 일어나 천천히 딸애가 자는 방에 가서 하불을 덮어주고나서 그리고 자신의 이런 행동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면서 제 방에 돌아와 불을 껐다. 누웠지만 인차 잠들수가 없었다…

며칠동안 줄곧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수업을 하다가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군 하였다. 불안은 집에 오면 더욱 걷잡을수가 없었다.

남편은 련 이틀저녁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그는 술을 마시면 낯이 더 창백해지는 형이였다. 《래일이면 돈이 돼…》 하는 말을 던지고는 제 방에 가서 눕군 하였다.

사흘째 되는 날 계순은 오전수업을 치르고 일찌감치 영미를 맡기는 유모네 집에 들려 애를 찾아 데리고 집에 돌아왔다.

남편은 늘 타고 오는 그 시간의 저녁통근차로 오지 않았다. 다음차로 왔다. 역시 술에 취했다. 그는 들어오자바람 저녁상에 마주앉기 전에 안해한테 돈봉투부터 꺼내놓았다. 《자, 받소. 이거면 되겠지?》 남편의 억지웃음… 술 취한 사람은 절대로 거짓웃음을 웃지 않는데… 그것은 오빠한테서 본 기억이다. 돈봉투를 보는 순간 안도감보다 불안이 곱절로 가슴을 두드린다. 그는 남편의 얼굴과 돈봉투를 번갈아보았다.

《자, 어디다 건사하라구.

거의나 명령조였다. 그 어조가 불쾌했으나 계순은 불룩한 돈봉투를 책상서랍에 갖다넣고 돌아섰다.

그러자 그의 앞에는 남편이 우뚝 서있었다. 술취한 사람 같지 않은 매서운 눈초리… 별안간 계순은 눈앞에서 불이 번쩍 이는것 같았다. 조민하가 계순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던것이다.

계순은 볼에 손을 가져가지 않았고 눈을 뜨지도 않았다. 또다시 다른 뺨에 세찬 타격이 왔다. 두볼이 얼얼했으나 계순은 그 매가 아프지 않았다. 피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손찌검이 아니라 하나의 징벌이라고 누군가가 귀가에다 속삭여주는것만 같았다.

(사나이의 자존심을 손상시켰으니 맞아도 싸지 싸… 자, 더 때려요, 때려…)

이런 대가는 응당하다고 계순은 스스로를 다잡고있었다.

차라리 마음이 후련했다. 남편이 이제야 진짜 사내다운 사람으로 된것 같았다. 이런 자존심, 이런 용기와 용단이 있을줄은… 아니, 이제껏 이런 남자를 몰라본것이리라. 남자란 다 웅심이 있는거지…

계순은 눈을 떴다. 조민하가 계순의 손을 잡으며 머리를 떨구다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눈에 물기가 어려 불빛에 번뜩이더니 급기야 량볼로 주루루 흘러내렸다. 계순은 당황했다.

《용서하오.

남편의 말…

계순은 놀랐다. 무엇을 용서하라는건가. 내가 용서를 빌어야겠는데… 내 뺨을 친것때문에?... 그저 술취한 사람의 객기일수도 있었다.

《저녁밥 드세요…》

《먹었소. 먹구 왔소.

조민하의 눈이 갑자기 열기로 번뜩이였다. 그는 안해의 손목을 틀어쥐며 숨을 씨근거리였다.

계순은 무엇을 바라는지 알았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남편이 불을 끄고 침대에 왔다. 금방 안해를 학대하던 그한테 이런 놀라운 성적충동이 생기다니…

다음날 밤도 또 술을 마신 남편이 침대에 와서 《아들이… 소망인데…》 하고 말했다.

조민하가 맏아들이여서 시부모가 손자를 무척 바랐으나 여직껏 계순은 거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 밤도 술에 취해 들어왔다. 이렇게 련일 술에 취해본적은 없었다. 조민하는 안해의 침대에 왔다. 그는 침대에서 물러나며 《아들이… 소망이였는데…》 하고 말하며 한숨을 짓는것이였다.

계순은 처음에 무심히 들었으나 이내 그 말이 되새겨졌다. 《소망이였는데…》

(왜 과거형인가? 그리고 한숨은?)

그런대로 계순은 잠이 들었다.

새벽 일찍 남편이 깨우는 바람에 계순은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나싶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요.

조민하는 술이 깨였으나 입에서는 여전히 술내가 풍겼다. 눈이 벌갰다. 잠을 자지 못한 눈이다.

조민하는 그냥 선채로 씹어뱉듯이 랭랭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당분간 헤여져삽시다… 난 시내 부모님한테 가있구…》

계순은 가슴이 두방망이질했다. 극력 자제하려고 애썼다. (그예 일이 이렇게 되고 마는구나.)

계순은 반발심이 북받쳤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 옷을 주어입고 부엌에 가서 억지로 손을 움직이며 동자질을 시작했다.

개다리소반에 남편의 밥만 차려놓았다.

부지런히 수저를 놀리는 조민하를 저쯤에서 바라보고섰던 계순이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영영… 갈라지자는… 그런 뜻인가요?

계순은 《아니, 그렇지는 않소.》 하는 대답을 바랐으나 상대방은 침묵을 지키며 밥만 먹는다.

침묵은 《그렇다》는 뜻이 아닌가. 계순의 낯빛은 창백해졌다.

조민하는 차시간이 아직 있는데도 부랴부랴 가방을 들더니 문을 나서다 말고 뒤돌아보았다.

《며칠동안 들어오지 않겠소.

《가만!… 거기 서세요!

계순이 날카롭게 웨쳤다. 그는 급히 책상에 다가가 돈봉투를 꺼내 남편을 향해 던졌다. 봉투에서 빠져나온 지전장들이 방바닥에 널렸다.

조민하가 잠시 계순이를 노려보더니 무릎을 꺾고 앉아 돌아가며 돈을 주었다. 그리고는 가방에 넣었다.

계순은 경멸에 차서 이미 낯선 사람처럼 된 조민하를 바라보았다.

(쓰레기구나. 인간쓰레기…)

밖에서 대문소리가 났다. 그는 영영 가버렸다. 순간은 허전했다. 허나 분노가 치밀었다.

(가라. 기꺼이 보내주마. 이 너절한 놈아… 좋다. 이 집을 팔아서라도 내 기어코 대전으로 갈테다. 가서 석순의 오빠를 만나보고 올테다.)

갑자기 《왕…》 하는 딸애의 울음소리에 놀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결국 불쌍한건 딸애다. 모성애가 가슴을 찢어 발기는것 같았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딸애한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고말았다.

 

×

 

그 이튿날에 계순은 딸애를 봐주는 유모를 오라고 해서 그한테 영미를 맡기여 보냈다. 그리고 유모한테 아파서 못 나간다는 전달을 학교에 해달라고 부탁했다.

계순은 마음을 다잡고 우선 정신적인 안정을 가져야만 했다. 그 어떤 도전과 반발심에서인지 육체적힘은 끓어올랐으나 마음이 혼란된것만은 사실이였다.

계순은 오빠한테 한번 와달라는 부탁을 인편에 보내려고 했다. 이제야 오빠를 생각하게 된것이 죄스럽게 여겨졌다. 누구를 통해 어떻게 련락을 할지 망설이고있던 참에 그날 오빠쪽에서 먼저 불쑥 나타났다.

밖에서는 소낙비가 내렸다. 오빠가 비에 흠뻑 젖었다. 비가 올것을 예견 못했던가보다.

《에그, 오라버니, 역에서 비를 그을것이지.

《괜찮아.

김계호는 젖은 옷을 이내 벗으려고 안했다. 키가 꺽두룩한 그는 나이가 오십이 못되였는데도 등이 구부정했다.

계순은 조민하가 있던 방으로 들어가서 홰보를 들치고 벽에 걸린 남자여름옷들을 아래우 한가지씩 벗겨냈다. 조민하의 체취가 풍기는것 같아 께름했으나 오빠한테 옷을 갈아입히자니 할수 없었다.

김계호는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닦고 뒤방에 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는 앉아서 담배를 찾다가 생각난듯 《그렇지, 그 조가는 담배도 안 피우지.》 하고 말했다.

평소에 늘 《영미 아비》라고 부르던 오빠가 《조가》라고 하니 눈치가 이상하다. 알수 없겠는데? 어떻게 된셈인가?

(그래. 그가 오빠한테 찾아갈수 있지…)

김계호가 누이동생을 눈여겨보았다. 계순은 시선을 떨구었다. 잠시 말이 없던 김계호가 입을 열었다.

《계순아, 한달전인가 내 령남무역회사에 찾아간적 있다. 그 회사 사장을 만나려고. 그 회사에서 일본상품 마구 수입하는 통에 우리 상점에 경영난이 생기지 않았니. 점원 둘만 남기고 모두 내보냈어… 사장한테서 융자해보려고 갔지. 내가 어리석었어. 나를 파산시키는 놈한테 찾아가다니 제정신이 아니였지… 놈은 파이프를 물고 둥글의자에 앉아서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합쳐지는게 시대의 추세라나. 그놈의 낯판대기에 침을 뱉고싶었어. 그놈의 사촌형이 마산에서 대단한 기업가라더구나. 사촌형은 당국이 <한일협정>으로 받아온 돈을 던져준 열세명중의 한사람이래. 그놈은 사촌동생한테 무역회사를 차려주어 지금은 경공업품이지만 장차로는 중공업품을 거래하게 하자는거야… 그건 그거고… 한데 그날 내가 거기서 나오다가 누굴 봤는지 알겠니. 영미 애비… 아, 아니, 그 조가를 봤어. 그는 날 못 보았지. 어떤 젊은 녀자와 얘기하며 들어가더구나. 아무래도 이상해서 수위령감한테 물으니 <사장님의 딸입니다. 청상과부입지.> 하고 대답했어. 더 물을수가 없어 돌아와 좀 알아봤지… 그녀의 남편은 <국군>장교로서 64 9월 윁남파병 1진으로 갔다가 그후 몇달후 남부윁남 <베트공>의 총에 맞아 죽었다누만… 조가가 공무로 거길 갈 일이 없고, 더구나 사장 딸과 같이… 딸이 그를 무슨 일에 소개하려나부다, 난 이렇게 좋게만 생각했어. 더구나 <고시>에 합격되였지만 돈이 없어 더 출세를 못한다고 야심만만해하던 그 조가의 푸념이 생각나고… 어쨌든 머리를 기웃거렸지.

김계호는 한숨을 후 내불었다.

계순은 그 일로 대뜸 《영미 애비》를 《조가》라고 바꿔 부를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빠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며칠전에 술에 취해 우리 집에 뛰여들어 무작정 나를 붙잡고 앉아서 <형님, 이럴수 있어요? 영미 어머니가 나를 배반했어요.> 하는 바람에 나는 펄쩍 놀라 그의 팔소매를 움켜 쥐고 <?> 하고 다그어 물었어. 그러니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하더구나. 그러면서 <그 녀자의 마음속엔 딴 사내가 있어요.> 하고 뇌까린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소리쳤지.

<, 이 용렬한 놈아, 네가 그걸 다 알고도 그냥 따라다니며 청혼하지 않았어? ? 이게 다 분단의 비극인데 그것도 리해 못하니. 네가 과연 같은 민족이 옳긴 옳아?> 하면서 목이 꽉 잠기며 더 말이 나가지 않구 왈칵 설음이 북받치더구나.

계순은 고개를 숙이였다. 오빠의 말에 다시금 눈물이 솟구치였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오열을 참았다. 오빠가 말하고있었다.

《내 그랬어… <, 그래 계순이 딴 사람과 눈이 맞기라도 했어? 정분이라도 났나?… 같이 살겠다는 약속이나 하자고 그래 감옥에 찾아가기라도 하겠다는건가? 내 그 애 얘긴 못 들어봤지만 똑똑히 말할수 있어… 기약할수 없는 옥살이에 든 사람을 위안해주고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해서라구… 그렇게 리해해주면 안된단 말이야? 차라리 잘됐어. 이제라도 자네 사람됨을 알았으니… 난 내 동생이 자네와 헤여지는걸 반대하지 않겠네.>… 그러자 웅얼웅얼 하면서 <우린 서로 헤여지기루 했어유.> 하는거야. <그럼 됐구만. 한데 뭘하러 찾아와? 가라. 당장 나가란 말이야.> 하구 그를 쫓아버렸어. 보내놓고보니 일상시에 나한테 하던 푸념… 사장딸과 다정스레 말하며 들어가던 일. 그리고 이번에 너와의 사이에 있은 일… 이게 다 하나루 합쳐지면서 그놈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는걸 알게 되였어… 이젠 그 얘기 그만하자… 네가 그렇게밖에 달리 행동할수 없다는걸 나는 리해해.

《고마워요. 오빠!

진정 감사에 차서 계순은 부르짖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요. 오빠의 일이 그렇게 되는데… 나까지 근심을 끼쳐서.

《그만해라. 됐어. 이 남<>땅에 마음 편한 사람이 몇이나 되니?

김계호는 손을 홰홰 내저었다. 만사가 귀찮다는건지. 웬만 한 일은 체념하고말아야 한다는건지…

점심을 치른 후 김계호는 베개를 베고 서늘한 마루방 돗자리우에 번듯이 누웠다. 밖에서는 비가 그쳤으나 그물거리며 하늘은 개이지 않는다.

김계호는 천정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린 여기 일로 이렇게 오구작작거리지만 그 사람 성태군은 지금 어쩌구 있는지. 나두 한번 만나고프지만 그럴 경황이 없구나.… 석순의 말을 들으니 너처럼 성태군도 행여나 통일의 문이 열리나 해서 기다리다가 너보다 더 늦게 결혼했더구나. 어린 두 딸이 있다지…》

그러다가 오빠는 잠이 들어 코를 드렁드렁 골았다. 그래도 마음놓고 잠시 쉴수 있는 곳은 오직 누이동생네 집인 여기뿐인듯…

계순은 잠자는 오빠의 얼굴을 바라보며 새삼스레 생각해본다. (성태씨한테는 이미 안해가 있고 두 딸이 있다. 그러니 그를 찾아간다면 어떻게 될가? 북에 있는 안해와 딸한테… 그들이 이것을 알수 없기때문에 더욱 죄스러운 일로 되지 않을가. 하지만 오빠가 말한것처럼 그한테 위안을 주기 위해서라면? 아니아니, 어쨌든 나는 잊을수 없는 나의 첫사랑을 찾아가는것이고… 결국 리기적인 충동이 아닐가?… 그럼 만나고프다는 그런 감정이 과연 리기적인것일수 있겠는가?)

그는 진정할수 없어 이방저방 들락날락 하였다. 자기가 석순한테 한 말, 사랑과 결혼은 다르다고 한 그 말이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초기에 결심한것처럼 이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며 인륜의 견지에서 봐도 어쩐지 허용될수 없을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부에서 솟구치는 항변의 목소리, 그것을 부정하는 목소리 또한 막을수가 없구나.

끊어진 강토에서 사는 나, 불행한 나라는 인간에게만은 이것이 허용되는 권리가 아닌가… 만나지 말아야 하는가? 만나야 하는가?… 만날수 있는가? 만날수 없는 일인가?

그는 저도 모르게 책이 가득한 뒤골방, 그 허름한 안락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뒤로 머리를 얹고 맥없는 시선으로 어둑컴컴한 방안을 둘러보았다.

오른쪽 서가에 있는 두툼한 책, 책등에 영문자로 쉑스피어라고 쓴 거기서 햄리트의 고뇌에 찬 독백이 들리는것 같았다.

《살아야 하느냐, 죽어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로다…》

그러자 문득 그 독백이 자신의 가슴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어째선지 이 순간에 계순은 자기의 번민이 햄리트의 번민에 비하면 더 크고 해결할수 없는것처럼 생각되였다. 온 민족이 달라붙어서 풀어줘야 할 그런 문제, 바로 분렬의 비극을 끝장내지 않고는 우리 매개인 누구나가 다 겪게 되는 불행이라는 이 쓰라린 진실을, 이 력사의 진리를 자그마한 가슴에 새겨안기에는 너무나도 숨이 가빴다.

…날이 가고 달이 지나 한해가 흘렀다.

물밀듯이 밀려드는 일본경제의 교두보에서 살이 찌는 령남무역회사 사장, 그 딸과 화촉지전을 올린 조민하는 돈의 힘으로 일약 《사법부》의 4급공무원으로 승급해서 안해를 데리고 서울로 갔다.

김계순은 집을 팔아 오빠의 빚을 함께 메꿔보려고 했으나 끝내 김계호는 파산해서 어느 상회의 직원으로 겨우 입직을 했다.

계순은 딸 영미를 데리고 밀양고모네 집에 가 살았다. 그는 거기서 국민학교 교사의 일자리를 마련했다.

리혼의 법적수속에서 조민하가 부담하게 된 영미의 양육비는 고모가 찾아서 건사하게 했다. 앞으로 장차 영미의 교육비로 쓰게 하려는것이였다. 계순은 아직은 제 손으로 영미를 키우려고 했다.

고모가 그 돈을 매달 찾아와도 자기의 눈에는 띄우지 않도록 해달라고 당부를 해놓았다. 그 돈만 보면 조민하가 주던 돈봉투, 그리고 흩어진 돈을 줏던 조민하의 손이 눈앞에 얼른거려 혐오감을 금할수 없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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