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5

5. 총포성은 멎었어도

 

《일생 군인으로

살 겠 습 니 다 》

준엄했던 3년간의 조국해방전쟁은 조선인민의 빛나는 승리로 끝났다.

전쟁의 불비속에서도 언제나 싸우는 전사들과 함께 계신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르며 온 나라가 목메여 부른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 전쟁의 포연서린 남진의 길에서도, 적후천리 깊은 밤에도, 일시적인 후퇴와 재진격의 나날에도 인민군용사들과 인민의 심장에 언제나 깊이 간직되여있은것은 수령님에 대한 그리움이였다.

그것이 곧 영웅조선의 정치사상적위력이였으며 이 세상 무엇에도 비길수 없는 최강의 무기였다. 세계《최강》을 자랑하던 미제를 력사상 처음으로 서산락일의 운명에 처박고 전승의 축포가 오르게 한 힘의 원천이였다.

생사를 판가리하는 격전의 총포성이 그칠새 없던 조국의 고지들, 포연자욱하던 전선길들에 고요가 깃들었다.

그러나 이 땅에 완전한 평화가 온것은 결코 아니였다. 일시적인 정화였다.

미제는 영웅적인 조선인민군과 인민의 무적의 힘앞에 무릎을 꿇었으나 《북침》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여전히 총구를 북쪽으로 겨눈채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있었다.

나라의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모든것이 파괴되고 재더미뿐이였다. 미제는 앞으로 100년이 걸려도 조선은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고 떠벌였다. 우리의 벗들도 걱정의 눈빛을 감추지 못하였다. 헤쳐나가야 할 전후복구건설의 길은 전쟁에 못지 않은 어려운 길이였다.

인민들은 전화의 나날처럼 긴장하게 살면서 전후복구건설을 위한 투쟁을 벌려나가야 하였다. 인민군대는 인민들과 함께 복구건설투쟁을 벌리면서 미제의 새로운 전쟁도발책동에 대처한 싸움준비를 빈틈없이 해야 하였다.

이러한 력사적시기에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전쟁승리의 축포가 오른지 며칠후인 주체42(1953)년 8월초에 만경대혁명학원에서 그립고그립던 어버이수령님의 곁으로 돌아오시였다.

그이께서는 주체42(1953)년 9월부터 주체43(1954)년 8월까지 평안남도 승호군 삼석인민학교와 평양제4인민학교에서, 주체43(1954)년 9월부터 주체49(1960)년 8월까지 평양제1중학교[주체48(1959)년 4월부터 남산고급중학교]에서 공부하시였다.

이 나날 장군님께서는 전쟁에서 겹쌓인 피로도 푸실 사이 없이 전후복구건설이라는 새로운 전선을 펼치시고 진두에서 령도하고계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위업을 도와드리시는데 마음쓰시였다. 아버님을 생각하시는 장군님의 마음은 불같으시였다.

정전직후 언제인가 한 학생이 장군님께 아버지원수님을 자주 뵈올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고 하며 부러워한적이 있었다.

그때 장군님께서는 아버지원수님께서는 늘 바쁘시기때문에 자주 뵈옵지 못한다, 현지지도를 나가실 때도 많고 그렇지 않은 날에도 늘 밤늦게 들어오시군 한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전쟁은 방금 끝났지, 모든것이 다 마사졌지, 할일이 얼마나 많으시겠니. 그 모든 일을 돌보시느라고 밤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식사도 제때에 못하시고 애쓰시는 아버님을 생각하면 나는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내가 너무 어려서 아버님께 크게 도움을 드릴수 없는것이 막 안타깝다.…》

정녕 아버님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릴수만 있다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오고싶은것이 장군님의 심정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높이 받들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충성의 한마음은 수령님을 따라 걸으신 동해천리길에서 더욱 세차게 불타올랐다.

주체43(1954)년 6월 어느날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함경북도에 대한 현지지도의 길에 아드님을 데리고 가겠다고 하시였다.

이때 일군들은 아직 복구건설이 끝나지 못해 어딜 가나 온통 페허뿐이여서 보여드릴만 한것도 없고 잠자리와 때식, 교통조건 등 모든것이 불편한데 그 먼길에 어리신 아드님을 동행시키면 공연히 고생이나 시켜드리지 않겠는가 하는 걱정부터 앞세웠다.

그러나 수령님께서는 도처에서 복구건설이 힘차게 벌어지고있는 이런 때에 누구나 직접 현실에 나가면 보는것도 많고 느껴지는것도 많을것이라고, 그속에서 귀중한것을 배울수 있을것이라고 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자신의 경험을 놓고보더라도 어린시절에 조선의 현실을 체험하기 위하여 중국에서 조국으로 나왔던 때와 조국광복의 맹세를 다지며 다시 중국 동북으로 들어갈 때의 일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귀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고, 그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일생의 대를 세우는데서 아주 중요하였다고 하시였다.

그때에야 일군들은 수령님의 뜻을 깨닫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드님께 집 떠날 차비를 해야겠다고 알려주시고나서 이런 말씀을 하시였다.

《나는 어린시절부터 혁명을 하여야 하겠다는 굳은 각오를 가지게 되였다. 내가 이런 각오를 가지게 된데는 물론 부모님들의 영향도 컸지만 일찌기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체험한것이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특히 12살때 아버님께서 팔도구로부터 만경대에 이르는 천리길을 홀몸으로 나가도록 하시였는데 그때 받은 충격이 매우 컸다.

함경북도를 돌아보게 되는 이번 길은 전쟁을 겪은 조국의 현실을 체험하고 혁명적세계관을 세우는데서 좋은 계기로 될것이다.》

장군님께서는 아버님의 큰뜻을 깊이 새기시며 그해 6월 29일부터 7월 14일까지 함경북도일대에 대한 현지지도의 길을 함께 걸으시였다. 우연한 일치인가, 력사의 필연인가, 그때 그이의 나이 12살이였다.

그 나날 장군님께서는 함흥과 청진을 비롯한 조국의 북변 동해안일대를 거의다 돌아보시였다. 부문별로 보면 금속, 광업, 석탄, 화학, 철도, 선박, 수산, 농업, 상업, 보건, 교육 등 인민경제와 인민생활의 각 부문을 포괄하는 수십개 단위였고 청진시 한개 지구에서만 해도 김책제철소, 청진제강소, 청진조선소 등 수많은 대상들이였다.

이처럼 방대한 수령님의 현지지도로정을 따라 걸으시며 장군님께서 목격하신것은 상상조차 할수 없이 참혹하게 상처입은 조국의 모습이였다.

전쟁시기 미제의 야만적인 공습과 포격으로 전국적으로 8,700여개의 공장, 기업소가 완전히 파괴되고 2,800만㎡에 달하는 60만호의 살림집들, 5,000여개의 학교, 1,668개의 병원과 정양소, 260여개의 극장, 영화관, 670여개의 과학연구기관과 도서관, 수천개소의 문화후생시설이 파괴되였다. 피해가 가장 혹심한것은 전력, 연료, 금속, 화학 등 중공업부문이였다. 경공업, 농촌경리, 수공업과 개인상공업의 파괴상도 말이 아니였고 인민들의 생활형편도 극도로 어려웠다.

조국의 참상은 장군님의 가슴을 아프게 허비였다.

이 아픔은 수령님께서 찾아주신 조국, 혁명선렬들이 총대로 지켜온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감정이였다. 사랑이 크면 증오도 커지는 법이다. 장군님의 아픈 가슴속에서는 원쑤 미제에 대한 증오심, 천백배의 복수의 결의가 불타오르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청진시의 여러 공장, 기업소들을 돌아보실 때인 7월 어느날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을 따라 잠시 바다가에 나가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방금 돌아보신 파괴된 공장들의 형편을 생각하시는듯 어두운 안색으로 모래불에 서시여 먼 바다쪽을 바라보고계시였다. 아버님을 우러르는 장군님의 마음은 괴로우시였다. 아버님께서 짊어지신 복구건설의 무거운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지 못하는 안타까움때문이였다.

장군님께서 괴로운 마음을 안고 생각에 잠겨계시는데 갑자기 바다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모래먼지가 일었다. 장군님께서는 급히 아버님앞으로 달려가 모래바람을 온몸으로 막아서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오히려 아드님의 어깨우에 앉은 모래를 털어주시며 말씀하시였다.

《나는 한평생 군인으로 살아왔다. 찬바람 더운 바람 다 가리고서야 어떻게 혁명을 하겠느냐. 나는 이때까지 엄동설한에 몸을 녹일 사이가 없었고 삼복 뙤약볕에 그늘을 찾을 새도 없었다.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살아야 할것 같다.

혁명을 하자니 한평생 군인으로 살수밖에 없구나.》

조국과 인민을 위한 우리 수령님의 위대한 헌신과 로고의 세계가 비껴있는 말씀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의 이 말씀을 항일대전의 승리로 조국해방은 이룩되였지만 총대로 개척한 우리 혁명위업은 끝나지 않았다는것 그리고 비록 총포성은 멎었으나 미제와의 싸움은 계속되고있다는것, 맨손으로 재더미를 헤치고 일떠서야 하는 복구건설도 또 한차례의 준엄한 싸움이라는것, 이 싸움에서 이기자면 마음의 군복을 벗지 말아야 할뿐아니라 한생토록 마음의 군복을 입고 이 땅우에 인민의 락원을 세워야 한다는 삶과 투쟁의 고귀한 가르치심으로 받아들이시였다.

그리하여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앞에서 몸가짐을 바로하시고 《나도 앞으로 일생 군인으로 살겠습니다.》라고 굳은 맹세를 다지시였다.

이것은 백두에서 뿌리내린 총대정신, 빨찌산인생관을 그대로 한몸에 체현하신  백두산의  아들, 영웅남아의 심장의 목소리였다.

혁명적군인이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것을 맞아야 하고 군화를 벗을새없이 한생을 군복을 입고 지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청춘도 생명도 조국과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바칠줄 아는 열렬한 애국자, 혁명가들이다.

어리신 장군님께서는 이러한 군인으로 일생을 사실 맹세를 아버님앞에 굳게 다지신것이였다.

일생 군인으로 살 맹세, 이것은 군인의 세계속에서 성장하신 장군님께서 빛나는 삶의 궤도를 군인으로 사는데서 찾으시였음을 보여준것이였다. 이것은 전쟁시기 최고사령부에서 아버님으로부터 혁명가문의 총대를 받아안으실 때 한평생 총과 혁명을 같이하겠다고 다지신 그 맹세가 숭고한 인생관으로 승화되여 일생을 통하여 지켜가실 철학적신념으로 정립된것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다니시는 그 뜻깊은 길에서 인민의 거대한 힘을 뜨겁게 느끼시였다.

장군님께서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성진제강소를 찾아가시였을 때였다.

성진제강소는 우리 나라 강철공업에서 큰 몫을 맡고있는 주요야금기지였다. 이곳에는 수령님께서 해방후 찾아오시여 일제시기 로동자들의 생명을 앗아가던 원한의 원철로를 폭파해버리게 하신 인간사랑의 뜻깊은 사적이 깃들어있었다. 제강소의 로동계급은 미국놈들이 마사놓은 전기로를 전후 1년도 못되는 사이에 복구하여놓고 그때 벌써 강철을 생산하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전기로에서 쏟아져나오는 쇠물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고계시였다. 그이께서는 쇠물뽑는 장면을 여기 와서 처음 본다고, 정말 볼만 하다고 하시며 전기로앞을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시였다.

그러나 공장복구는 시작에 불과했고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많았다.

장군님께서 단조직장에 들리시였을 때 거기에는 폭격에 못쓰게 된 2000t프레스가 있었다.

숨죽은듯 동음소리없이 멎어있는 육중한 기계를 둘러보시는 장군님의 가슴은 쓰리고 아프시였다.

그이께서는 로동자들에게 이 기계를 빨리 복구해야 다른 공장에 필요한 기계도 만들어내고 복구건설을 잘할수 있을것이 아닌가고 하시며 프레스를 살릴수 있는가고 물으시였다.

로동자들은 얼마든지 할수 있다고 신심에 넘쳐 대답하였다.

사실 그때로 말하면 모든것이 부족한 형편이여서 이 큰 기계를 살려낼수 있겠는가, 외국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고 우려하는 일군도 없지 않았다.

나이 지긋한 한 로동자는 전쟁을 이긴 우리가 이까짓 기계 하나 못 살리겠는가, 로동자들의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주시는 수령님의 그 고마움을 말로 다 표현할수 없다, 우린 죽으나사나 우리 힘으로 기계를 살려내고야말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강철로동계급의 한결같은 결심이였고 의지였다. 비록 반토굴집에서 조밥에 된장을 찍어먹으며 사는 그들이였지만 집이나 쌀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너도나도 공장을 살리기 위해 애쓰고있었다.

로동자들의 충만된 열의에 크게 감동되신 장군님께서는 이런 로동계급과 함께라면 복구건설을 우리의 힘, 우리의 기술로 얼마든지 해낼수 있다는 신심을 더욱 굳게 가지시였다.

그이께서는 이날에 받으신 감동에 대하여 일기장에 이렇게 쓰시였다.

《…아버님께서는 파괴된 공장을 돌아보시면서 그 공장 지배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공장을 복구하려면 우선 로동자들의 생활을 잘 돌봐주어야 하오. 공장은 로동자들이 복구하고 동무는 그들의 생활을 복구하시오.>

정말 뜻깊은 말씀이시였다. 그곳 로동자들은 아버님의 말씀을 전해듣고 모두 울면서 원수님께 굳은 맹세를 다지였다. 나는 인민을 위하시는 아버님의 마음과 원수님을 받드는 우리 인민의 마음을 이번처럼 똑똑히  깨달은 때가 없다.  아버님께서 그처럼 인민을 위하시고 인민들은 원수님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 싸우니 원수님께서 바라시는것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는것이다.》

장군님께서는 동해천리의 긴 현지지도로정에서 용해공, 탄부, 기관사, 농민 등 각이한 사람들을 만나시였으나 그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말하고있었다. 수령님 계시여 우리는 전쟁에서 이겼고 복구건설도 문제없다는 그 한마디였다.

장군님께서는 그것이 고난과 시련속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피와 정을 나눈 절세의 위인에게만 주는 인민의 절대적인 믿음이며 티없이 맑고 깨끗한  충정이라고 생각하시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위대한 수령님을 더 잘 받들어모시고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한생을 군인으로 살며 일제와 미제를 쳐부신 영웅의 땅에 기어이 인민의 지상락원을 일떠세우고야말 불같은 결의를 더욱 굳게 다지군 하시였다.

그때로부터 14년이 지난 주체57(1968)년 6월 어느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또다시 함경북도를 찾으신 기회에 다음과 같은 추억의 말씀을 하시였다.

《실로 수령님을 모시고 함경북도를 돌아본 그 나날은 나에게 혁명적세계관을 세워주고 혁명에 대한 자각을 깊이 가지도록 한 일생을 두고 잊을수 없는 력사의 나날이였습니다.》

참으로 장군님께서 수령님을 따라 걸으신 동해천리길은 총과 함께 한생을 빛내일 장군님의 변함없는 의지를 확인한 성스러운 길이였다.

 

  

어려운 행군

대오의 앞장에

주체45(1956)년은 우리 당 력사에 준엄한 해로 기록되여있다. 이 시기 주체혁명발전에서는 새로운 국면이 열리고있었다. 전후 3개년인민경제계획수행을 위한 투쟁이 마감단계에서 힘있게 벌어져 공업과 농업의 발전수준은 전쟁전수준을 훨씬 넘어서고있었다. 도시와 농촌에서의 사회주의적개조도 힘있게 추진되고있었다.

우리 인민앞에는 전후복구건설의 성과에 기초하여 사회주의기초건설을 완성하며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투쟁을 더욱 강화해야 할 과업이 나서고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 정세는 매우 첨예하고 복잡하였다.

세계도처에서 제국주의자들은 침략과 전쟁책동을 더욱 로골화하였다. 미제와 리승만도당은 남조선에서 파쑈화정책을 강화하면서 《북진》소동에 더욱 열을 올리고있었다.

이때 현대수정주의가 머리를 쳐들고 혁명앞에 커다란 위험을 조성하고있었다. 현대수정주의자들은 그해 2월 14일에 개막된 쏘련공산당 제20차대회를 계기로 그 반혁명적본성을 드러내놓았다. 당 제1비서로 있던 흐루쑈브는 《개인미신》을 반대한다는 궤변으로 수령의 령도를 로골적으로 거부하고 기회주의로선을 류포시켰다. 쏘련공산당 제20차대회이후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에서는 반쓰딸린깜빠니야가 벌어지면서 당과 정부의 고위인물들이 지도적직위에서 련이어 제거되였다.

현대수정주의자들, 대국주의자들은 우리 나라에도 저들의 로선을 내려먹이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그해 4월에 있은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에 참가한 이 나라 당대표단 단장은 주제넘게도 우리 당대회 보고내용을 시비하면서 저들의 《개인미신》론을 주입시키려다가 배격당하였다.

현대수정주의바람이 한창 불고있을 때 정체를 숨기고있던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은 대국주의자들을 등에 업고 양봉음위하면서 쏠라닥거리고있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심상치 않은 사태발전을 예리하게 주시하고계시였다. 그이께서는 놈들의 책동이 혁명의 수뇌부를 노린것이라는것, 수령의 권위를 헐뜯고 수령의 결정적역할을 거부하며 수령의 사상과 업적을 말살하려는 반당적이며 반혁명적인 음모이라는것을 간파하고계시였다.

그해 5월 어느날이였다. 평양제1중학교에서는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에서 제시된 제1차 5개년계획의 전망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종파분자였던 교장은 강연에 출연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자동차나 뜨락또르와 같은 큰 기계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수령님께서 내놓으신 사회주의경제건설의 기본로선을 헐뜯는 반당적궤변을 늘어놓았다. 이때 학생들은 그것을 옳게 식별하지 못한채 듣고만 있었다.

장군님께서는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그이께서는 우리 나라에서 자동차나 뜨락또르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하는것은 아버지원수님의 사상과는 완전히 어긋난다, 원수님께서는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것을 우리 당 경제건설의 기본로선으로 제시하시였다, 그런데 기계들을 생산하지 않고 외국에서 사다 쓴다고 하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정확히 말해주기를 바란다고 들이대시였다.

장군님의 원칙적이고 론리정연한 론박에 말문이 막힌 교장은 몇마디 얼버무리고는 연단에서 꽁무니를 빼고말았다.

장군님께서는 심각한 안색으로 학생들에게 오늘 강연이 아주 잘못되였다, 우리는 누가 말하든지 그것이 아버지원수님의 혁명사상과 맞는가를 따져보고 맞지 않을 때에는 즉시에 반대하여 투쟁해야 한다고 일깨워주시였다.

그이께서 반당종파분자의 궤변에 단호한 반격을 가하신것은 교원, 학생들을 정치적으로 크게 각성시켰다.

그후 장군님께서는 교원, 학생들이 수령님의 위대성과 우리 당의 혁명전통에 대해 실천으로 체득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며 교양사업의 형식과 방법을 여러모로 모색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학생소년들속에서 수령님의 항일혁명투쟁자료를 친히 독보도 하시고 결의모임과 만경대와 칠골혁명사적지 참관도 조직하시였다. 주체43(1954)년 6월 4일 보천보전투승리 17돐기념일을 맞으면서는 학교에서 연극 《보천보의 홰불》을 공연하게 하시였다. 그이께서 몸소 연극대본을 쓰시고 연출도 하시고 수령님의 역형상도 맡아 수행하신 연극이였다. 연극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공연을 본 학생들, 교원들을 비롯한 관중들이 공연성과를 축하하였다. 장군님께서는 그들에게 우리는 앞으로도 이러한 기념일때마다 연극활동 같은것을 벌려 아버지원수님의 영광스러운 투쟁력사를 더 깊이 학습하려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러한 과정에 장군님께서는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 답사와  참관을 통한 교양사업이 그들을 수령님의 위대성과 항일혁명전통으로 튼튼히 무장시키는데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겠다고 생각하게 되시였다.

이로부터 장군님께서는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답사행군을 발기하시였다. 그이께서 백두산지구에 대한 답사를 조직하기로 결심하신것은 참으로 대용단이였다.

주체45(1956)년 5월말의 어느날 장군님께서는 수령님께 학생소년들로 답사단을 조직하여 보천보전투승리기념일을 계기로 량강도안의 혁명전적지들을 답사하였으면 한다고 말씀드리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드님의 제의를 적극 지지해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아드님을 대견스레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참 좋은 생각을 했다. 혁명전적지에 가서 산도 넘어보고 밀림도 헤치면서 항일유격대원들이 걸은 길을 따라 걸어보아라. 지금도 어려운 때지만 그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항일유격대원들은 그 간고한 시기에도 조국으로 진군하여 보천보도 쳤고 무산지구에서도 싸움을 벌렸다. 이번에 혁명전적지에 가면 항일유격대원들이 어떻게 필승의 신념을 안고 싸워왔는가를 똑똑히 배워가지고 오너라.》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의 말씀을 꼭 명심하겠다고 대답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만족해하시며 우리 나라 속담에 《첫 새벽문을 열면 오복이 들어온다.》는 말이 있다, 물론 한가정의 새벽문을 여는것은 그리 힘든것이 없다, 하지만 조국과 인민, 당과 혁명을 위하여 나라의 첫 새벽문을 열고 누구도 걸어보지 못한 초행길을 걷는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그런 일은 가장 영광스럽고 보람찬 일로 되는것이다, 혁명전적지에 대한 첫 답사가 바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초행길인것만큼 굳게 마음을 먹고 한번 걸어보라고 고무해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아버님의 가르치심을 가슴깊이 새기시며 항일의 총성이 높이 울린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에로의 답사길을 개척하실 준비를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학생소년들로 답사단을 무으시고 행군준비를 면밀히 갖추도록 하시였다.

이무렵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은 혁명전적지답사가 학생들에게는 어려운 행군길이라느니, 명승고적을 견학하는것이 좋을것이라느니 하면서 시비해나섰다.

장군님께서는 이자들의 궤변의 부당성을 발가놓으시며 답사준비를 더욱 다그치시였다.

드디여 주체45(1956)년 6월 5일부터 14일까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들에 대한 력사적인 답사행군이 진행되였다.

장군님께서는 보천보와 삼지연을 거쳐 리명수에 이르는 어려운 답사길을 앞장에서 헤쳐나가시였다. 그 과정에 학생들에게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신 항일무장투쟁의 주요내용과 의의, 항일혁명투쟁사에 깃든 수령님의 위대성과 령도의 현명성을 가슴깊이 새겨주시였다. 그리고 항일혁명선렬들이 지녔던 수령결사옹위정신과 영웅적희생정신, 불타는 조국애와 원쑤격멸의 기상을 깊이 체득시키시였다.

장군님께서 이끄시는 행군대오가 붉은기를 휘날리며 밟은 답사로정마다에는 수령님의 총대혁명정신과 항일혈전의 력사가 뚜렷이 새겨져있었다.

답사행군대오가 평양을 떠나 혜산을 거쳐 보천보에 이른것은 6월 8일이였다. 대오는 그곳에 모셔져있는 위대한 수령님의 동상앞에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수령님께서 전투를 지휘하신 장소의 황철나무며 보천보전투에서 녹아난 일제의 경찰관주재소, 소방회관, 면사무소, 우편소, 산림보호구자리 등을 깊은 감동속에 돌아보았다. 력사의 땅 보천보를 찾은 그들의 귀전에는 수령님께서 울리신 그날의 총소리가 들려오는것만 같았다. 그들은 마치도 자기들이 보천보의 적통치기관들을 습격소탕하고 인민들속에 정치선전을 하고있는 항일빨찌산대원들처럼 여겨졌다.

장군님께서는 보천보혁명전적지를 답사하시는 과정에 그곳 일군들에게 항일무장투쟁과 관련한 력사자료들을 더 많이 찾아낼데 대하여 거듭 강조하시였으며 보천제1중학교가 언제나 혁명전적지를 알뜰히 관리하는데서 전국의 앞장에 설데 대하여 가르치시였다. 그이께서는 보천보에서 하루밤 지내시면서 숙소에서 만나신 군책임일군에게 앞으로는 혁명전적지답사로정을 백두산마루까지 련결시켜놓을데 대한 원대한 구상에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수령님께서 지펴올리신 보천보 밤하늘의 그 홰불로 종파의 오물을 청산하고 우리 당의 혁명전통을 굳건히 수호하실 굳은 결의를 마음속으로 다지시며 6월 9일 답사행군대를 이끄시고 보천보를 떠나 삼지연못가에 이르시였다. 그이께서는 수정같이 맑은 물과 떨기떨기 아름답게 피여난 진달래를 보시며 그윽한 정서에 잠기시였고 어머님에 대한 소중한 추억도 하시였다. 호수가너머 멀리에 거연히 솟아있는 백두산을 바라보시면서는 백두산은 나의 고향이라고, 수령님께서 혁명의 홰불을 높이 지펴올리신 백두산은 온갖 시련을 헤쳐온 우리 혁명의 력사를 전하며 길이길이 솟아 빛날것이라고 격정에 넘쳐 말씀하시였다.

답사행군대오는 삼지연못가를 떠나 왜놈들이 닦아놓은 《갑무경비도로》를 따라 행군길을 이어갔다.

장군님께서는 뻐스를 타려는 답사행군대원들에게 수령님께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거느리시고 행군하신 《갑무경비도로》를 우리가 어떻게 자동차를 타고 갈수 있겠는가고 하시며 우리도 항일유격대원들처럼 행군해가자고 호소하시였다.

답사행군대원들은 장군님을 따라 유격대원들처럼 배낭을 메고 《유격대행진곡》을 힘차게 부르며 행군해갔다.

장군님께서는 《갑무경비도로》로 답사대오를 이끌고 행군하시며 적들의 삼엄한 경계진을 뚫고 대낮에 태연자약하게 행군하신 수령님의 무비의 담력과 령활무쌍한 지략, 필승의 신념을 그대로 체득하시였다.

답사행군대원들은 그날 밤 삼지연 림산마을에서 류숙하였다.

다음날인 6월 10일 그이께서는 그곳을 떠나 포태리를 거쳐 리명수에 이르는 60여리의 험한 행군길을 대오의 앞장에서 헤쳐나가시였다.

그이께서는 대오에서 떨어지는 한 학생의 배낭을 몸소 메시고 그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답사행군대원들이 항일유격대식으로 생활하도록 하는데도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잠시 휴식을 하여도 배낭을 벗어 질서있게 정돈하여놓게 하시였으며 포태천기슭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되였을 때에는 항일유격대원들과 함께 생활하여본 자신께서 군수관의 임무를 수행하여야 한다시며 팔소매를 걷어올리시고 손수 밥도 지으시였다.

이날 답사행군대원들은 항일혁명선렬들의 혁명정신을 본받아 분비나무, 종비나무, 봇나무, 물푸레나무들이 얼기설기 얽혀있고 해묵은 나무잎무지들이 수북이 쌓여있는 수림속을 완강한 의지로 헤쳐나가 리명수까지의 행군을 성과적으로 끝마치였다.

장군님께서는 리명수에 머무르신 날 림산마을의 수수한 귀틀집에 허물없이 숙소를 정하시고 집주인에게 자신께서는 이런 귀틀집에서 나서 자랐기때문에 고향집에 돌아온것과 같은 생각이 든다고, 귀틀집을 다시 보게 되니 정말 감회가 깊다고 하시였다.

이날 저녁 그이께서는 림산로동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시고 그들의 수고를 헤아려주시며 혁명선렬들의 발자취가 스며있는 뜻깊은 이곳을 살기 좋은 고장으로 꾸려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깊은 밤에도 그이께서는 리명수폭포소리를 들으시며 답사행군대원들에게 우리 나라의 어려운 형편과 긴장한 정세에 대하여 알려주시였고 이런 때일수록 수령님을 모시고 혁명의 한길을 꿋꿋이 걸어온 항일유격대원들의 그 필승의 신념을 가슴깊이 새기고 조선혁명의 완성을 위하여 끝까지 싸울 각오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답사를 끝마치신 후 장군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였다.

《우리는 이번에 항일유격대원들처럼 행군하면서 보천보와 삼지연을 비롯한 혁명전적지들을 답사하였습니다. 혁명전적지들을 답사하면서 수령님께서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이룩하신 우리 당의 혁명전통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위대한가 하는데 대하여 깊이 느끼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사람은 누구나 다 량강도혁명전적지를 답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혁명전적지를 답사하면 정치대학을 나온것보다 더 많은것을 배우게 됩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개척하신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에로의 답사길은 우리 혁명의 새 세대들이 어버이수령님께서 10대의 어리신 나이에 걸으신 《배움의 천리길》, 《광복의 천리길》, 항일혈전의 나날에 걸으신 고난의 행군길을 백두의 혁명정신, 빨찌산의 붉은기정신으로 이어가는 성스러운 길이였으며 주체의 혁명전통을 옹호고수하는 투쟁의 새로운 전환적국면으로 되는 력사의 초행길이였다.

장군님께서 개척하신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에로의 답사길은 수령의 권위와 업적을 헐뜯고 말살하려는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의 책동을 짓부시고 위대한 수령님을 견결히 옹호보위해나가는 수령결사옹위의 길이였다.

장군님께서는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답사행군을 계기로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과의 투쟁을 힘있게 벌려나갈 결심을 더욱 굳게 가다듬으시였다.

주체45(1956)년 여름 어느날 그이께서 수령님과 나누신 대화에 바로 그러한 결심과 의지가 비껴있었다.

수령님께서는 그날 아드님에게 우리 혁명앞에 조성된 엄혹한 정세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시면서 《정일이가 나라를 책임졌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물으시였다. 이때 장군님께서는 놈들의 도전을 단호히 짓부셔버리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수령을 위하여, 혁명을 위하여 단호하신것은 백두산형의 위인이신 김정일장군님의 성격적특질이다.

놈들의 도전에 가차없이 박멸로 대답하자, 력사의 반동들을 무자비하게 징벌하자!

이것이 주체혁명의 운명을 판가리하는 그 준엄한 시기에 장군님께서 보여주신 철의 신념과 의지였다.

수령님께서는 옳은 생각이라고 하시면서 《이것은 내가 30년동안 혁명투쟁을 해오면서 찾은 피의 교훈이다. 나는 내가 찾은 인생의 준엄한 교훈을 정일에게 유산으로 넘겨주려고 하였는데 벌써 그것을 마음속에 혁명의 진리로 간직하였고 성격과 기질로 굳혔으니 좋은 일이다. 나는 이제 어려운 행군을 하려고 한다.

남패자로부터 북대정자에로 행군하던 <고난의 행군>때보다 퍼그나 힘든 행군이다.》라고 말씀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자신께서도 고난의 행군대오에 서시겠다고 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정일은 이미 고난의 행군대오에 들어섰어.》라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수령님께서 말씀하신것처럼 장군님께서는 준엄하였던 그해에 이미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과의 치렬한 투쟁을 벌리는 고난의 행군을 하고계시였고 그 앞장에서 수령님을 견결히 옹위하고계시였다.

 

  

빨찌산출신 군지휘관

들과 손잡으시고

이 세상이 천만번 뒤바뀌여진대도 만대를 이어 고수해나가야 할것은 주체의 혈통, 백두산의 혈통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백두산혁명정신을 허물어보려고 날뛰는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의 책동을 단호히 짓부시고 한몸이 그대로 수령님을 결사옹위하는 불패의 성벽이 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항일빨찌산출신의 총대혁명동지들을 굳게 믿으시고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과의 투쟁의 앞장에 내세워주시였다.

주체45(1956)년 4월 어느날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인민군대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던 최현, 류경수동지들과 자리를 같이하게 되시였다. 그이께서는 그들에게 쏘련공산당 제20차대회를 계기로 백일하에 드러난 흐루쑈브의 정체와 그에 대처한 우리 당의 단호하고 원칙적인 립장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시였다. 그리고 현대수정주의자들의 장단에 춤추고있는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의 위험한 책동과 그 후과에 대하여 신랄하게 지적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이께서는 이처럼 정세가 복잡한 시기에 우리 신문들과 방송들에서 수령님의 권위와 업적을 칭송하고 수령님을 옹호보위할데 대한 글들이 나오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장군님의 말씀은 투사들을 몹시 흥분시켰다. 그들의 마음을 격동시킨것은 10대의 그이께서 지니고계신 높은 정치적식견과 예리한 통찰력이였다.

그때로 말하면 국제공산주의운동안에 대두한 현대수정주의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옳바른 견해와 립장을 가지고있지 못하였다. 투사들자신도 별로 다를바 없었다.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벌써 그자들의 더러운 정체를 꿰뚫어보고계시였을뿐아니라 그것이 우리 혁명에 미칠 영향과 그에 대처할 문제에 이르기까지 일가견을 세우고계신것이였다. 투사들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높은 정치적식견앞에서 경탄을 금할수 없었다.

장군님의 말씀을 들은 투사들은 당장 기자들을 시켜 글을 써내게 하겠다고 말씀드리였다.

장군님께서는 기자들보다도 항일무장투쟁시기부터 수령님을 모시고 싸운 항일혁명투사들이 신문에 직접 글을 써내면 더 좋겠다는 의향을 말씀하시였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고 글을 많이 써본 경험도 없는 그들에게 이런 부탁을 하신데는 깊은 의도가 있었다.

항일혁명투사들은 항일대전의 불바다, 피바다를 헤쳐오면서 어버이수령님을 우리 민족과 혁명의 위대한 태양으로, 단결의 중심으로 높이 받들어모시고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결사옹위해온 충신들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귀중히 여기신것은 바로 그들이 간직하고있는 백두산빨찌산의 수령결사옹위정신이였다. 빨찌산의 아들이신 장군님께서는 우리 혁명의 1세대, 백두산총대동지들인 항일혁명투사들이 지닌 백두의 혁명정신을 굳게 믿으시고 그들을 어려운 투쟁의 앞장에 내세워주시려는것이였다.

투사들은 흥분된 심정을 억제하지 못해하면서 장군님께 글을 어떻게 써야 하겠는지 그에 대하여 생각되는것을 이야기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장군님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였다가 자신께서 글을 쓴다면 이렇게 써보겠다고 하시면서 빛과 열을 주는 태양이 없으면 세상만물이 존재할수 없듯이 수령이 없이는 혁명의 승리에 대하여 생각할수 없다, 우리 당과 인민은 김일성원수님의 령도를 받아야 혁명과 건설을 승리적으로 전진시켜나갈수 있다, 이것은 우리 혁명의 실천적경험이 가르쳐준 진리이다, 김일성원수님의 권위와 위신은 그 누구도 따를수 없으며 그 누구도 감히 견줄수 없다, 김일성원수님께서 조국과 인민앞에 쌓아올리신 업적은 만백성이 인정하며  그 빛나는 업적은 허물래야 허물수 없다,  우리 당과 인민은 앞으로도 김일성원수님의 령도를 받아야만 승리할수 있으며 행복하게 살수 있다, 김일성원수님의 령도는 우리 인민의 모든 승리의 결정적담보이다, 그러므로 우리 당과 인민군대는 경애하는 김일성원수님을 더 잘 받들어모시고 견결히 옹호보위해야 한다 이런 내용으로 글을 전개해나가면 어떻겠는가고 물으시였다.

글의 정치사상적내용과 전개방법까지 일일이 가르쳐주시는 장군님앞에서 투사들은 용솟음치는 신심을 느끼면서 한번 본때있게 써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이렇게 되여 그해 5월 인민군신문들에는 그들이 쓴 론설 《김일성원수님의 령도는 우리 당과 인민의 모든 승리의 결정적담보》, 《김일성원수님을 정치사상적으로, 목숨으로 옹호보위하는것은 인민군군인들의 숭고한 의무》가 실리게 되였다. 론리정연하고 비수처럼 예리한 그 론설들은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안긴 무서운 철추였으며 인민군군인들의 가슴마다에 수령결사옹위정신이 세차게 나래치게 한 혁명의 북소리였다.

장군님의 믿음속에서 항일혁명투사들은 그해 8월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때 맹호와 같은 기상으로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과 맞서 싸웠다. 그무렵 그자들은 무모하게도 위대한 수령님을 수반으로 하는 혁명의 수뇌부를 정면으로 공격해나섰다. 그들은 지어 당과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무장폭동을 일으킬 음모와 친미적인 부르죠아공화국을 세울 흉계까지 꾸미고있었다.

투사들은 전원회의를 계기로 그자들의 반당적, 반혁명적기도를 단호히 짓부셔버리였다.

8월전원회의를 통하여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인민군대안의 항일혁명투사들이야말로 수령옹위의 제1선에 선 충신들이라는것을 다시금 깊이 느끼시였으며 군대와 인민을 그들처럼 충신의 대오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게 다지시였다.

전원회의직후 항일빨찌산출신의 인민군지휘성원들을 만나신 장군님께서는 이번 전원회의에서 수령님을 모시고 산에서 싸우던 투사들이 투쟁을 잘했다고 하시면서 군대가 앞장에 서니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이 더 날치지 못했을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그이께서는 총대를 잡은 인민군대에서 김일성원수님을 사수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투쟁하여 인민군군인들은 물론 전체 당원들과 인민들이 반종파투쟁에 적극 떨쳐나서게 할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장군님께서 안겨주신 수령결사옹위사상을 신념의  초석으로 하여  인민군대에서는 그후 《김일성원수님을 사수하자!》는 신문 론설을 내고 《김일성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중앙위원회를 목숨으로 사수하자!》라는 구호를 높이 들었다. 인민군대가 추켜든 충성의 구호에는 10대에 벌써 령장의 비범한 품격을 체현하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수령결사옹위의 신념과 의지가 세차게 맥박치고있었다.

인생에서 10대라면 보통사람으로서는 한가정의 운명에 대해서조차 생각하기 어려운 나이이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10대의 나이에 나라와 민족, 혁명의 운명을 결정짓는 초미의 문제를 항일의 백전로장들과 론하시였으며 예리한 정치적안목과 비범한 사상리론적예지로 수령결사옹위의 실천적방도들을 밝혀주신것이였다.

실로 장군님의 숭고한 정신세계, 혁명적수령관은 그 누구도 따를수 없는것이였으며 천연암반과도 같이 드놀지 않는것이였다.

투사들은 수령송가 《김일성원수께 드리는 노래》를 창작완성하던 나날에 이것을 더욱 가슴뜨겁게 절감하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수령님을 칭송하는 송가창작을 발기하신것은 주체45(1956)년 1월 1일이였다.

이날 여러 항일혁명투사들이 수령님을 찾아와 새해인사를 삼가 드렸다. 그들은 어버이수령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노래를 불렀는데 모두 항일혈전의 나날에 부르던 혁명가요였다. 마감에는 다같이 어깨를 겯고 수령님을 결사옹위하는 심정으로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모임이 끝나자 장군님께서는 오늘 항일혁명투사들이 빨찌산시기에 부르던 잊지 못할 노래들과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부르는것을 들으니 정말 생각되는것이 많다고 하시면서 지금처럼 정세가 복잡한 때일수록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같은 원수님에 대한 노래를 많이 지어 부르며 원수님을 높이 우러러모시고 충성다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세상에 나온지 10년이 되도록 아직 원수님에 대한 좋은 노래가 더 나오지 못하고있는것이 정말 안타깝다고 하시면서 내 생각에는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같은 아버지원수님에 대한 좋은 노래를 하나 잘 지어 부르도록 하는것이 좋겠다고 절절하게 말씀하시였다.

항일혁명투사들이 저저마다 찬동해나섰다.

장군님께서는 아버지원수님에 대한 노래창작사업을 인민군대에서 맡아 하는것이 어떤가고 하시며 인민군대에서는 전쟁시기에도 좋은 노래들을 많이 지었으므로 얼마든지 지을수 있을것이라고 크나큰 믿음을 주시였다.

그후에도 장군님께서는 여러차례 송가창작정형을 알아보시고 가사의 내용과 형상에 이르기까지 창작에서 나서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이렇게 되여 혁명송가 《김일성원수께 드리는 노래》가 창작되였다.

시연회에서는 《김일성원수께 드리는 노래》가 인민군협주단 남성중창으로 장중하게 울려나왔다.

 

백두의 밀림에서 밝아온 이 아침

우리는 수령의 노래 자랑으로 부르네

이 노래 억눌렸던자 용사로 키워

언제나 승리에로 고무해주네

이 노래 원쑤에겐 죽음을 주고

승리한 조국땅에 울려퍼지네

아 언제나 친근한 우리 수령 김일성장군

우리들은 심장으로 높이 부르네

그런데 노래가 끝나자 시연회에 참가한 당시 민족보위성의 요직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백두의 밀림에서 밝아온 이 아침》이라는 표현에 대하여 조선의 아침이 동해에서 밝아오지 어떻게 백두산에서 밝아오는가, 자연의 법칙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동서남북도 모르는 무식쟁이들이라고 시비하면서 무슨 노래가 이렇게 빨래줄처럼 긴가, 이것도 노래인가고 트집을 걸었다.

이날 시연회에는 항일혁명투사들도 참가하였다. 투사들은 그자들의 반당적언행에 격분하여 벌떡 일어서며 《돼먹지 않은것들, 너희들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 수작이야.》, 《당신들은 이 노래를 심사할 자격이 없소. 심사할분이 따로 있단 말이요.》라고 추상같이 타격을 가해나섰다.

장군님께서 이 사실을 아신것은 그날 저녁이였다. 그이께서는 시연회과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들으시고 노래악보를 보시며 노래가 아주 좋다고, 나는 의견이 없다고, 이 노래가사에 내가 생각하고있던 내용이 그대로 잘 반영되였다고 매우 만족해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아 언제나 친근한 우리 수령 김일성장군》이라고 한 후렴구에서 《김일성장군》이라는 표현을 《김일성원수》로 고칠데 대하여 지적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우리 인민은 해방후와 전쟁시기에는 수령님을 《장군님》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원수님》으로 우러러 부르고있으며 또 그렇게 고쳐야 노래내용이 제목과 일치될수 있고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명확히 구별될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원수님께 드리는 또 하나의 노래가 창작된것은 기쁜 일이지만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나온지 10년이 지난 오늘에야 나온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하시며 사태의 본질을 예리하게 까밝히시였다.

《노래가 늦게 나온것만 해도 가슴아픈 일인데 이 노래를 듣고 시비하는자들이 있다니 정말 격분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자들이 한 말을 따져보면 결코 세상물정을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음흉한 목적이 있는 소리입니다.

그자들은 혁명전통을 말살하려 하고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이날 그자들이 송가창작을 시비한 현상을 놓고 원래 속에 딴생각을 품고 꿍꿍이를 하는자들은 시비가 많은 법이라고, 그자들은 수령님과 뜻을 같이할수 없는자들이라고 준렬히 단죄하시면서 《김일성원수께 드리는 노래》가 울려퍼지면 그자들의 면상을 답새기는것과 같다고 신심에 넘쳐 말씀하시였다.

수령결사옹위의 화신이신 장군님께서 계시여 현대수정주의자들이 《개인미신》을 떠들며 수령의 령도를 거부할 때 수령숭배의 송가가 군대와 인민의 대합창으로 조선의 하늘가에 힘있게 울려퍼지였으며 우주에로 메아리쳐갔다.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모란봉극장에서 이 노래 첫 공연을 진행한 그날 최현, 류경수 두 투사는 밀물처럼 차오르는 뜨거운 격정을 참을수 없어 자기들의 진정을 이렇게 터치였다.

《그분은 한편의 노래로 종파놈들의 뒤통수를 답새기고 우리 수령님을 받들어올리셨소. 아직은 당과 국가, 군대의 아무런 직무도 없는 중학생의 몸으로 말이요.》

《옳습니다. 언제나 우리 군대를 믿고 군대에 의거하시는 빨찌산의 아들이신 그분이 계시는 한 우리 나라에서 태양이 꺼지는것과 같은 일은 영원히 없을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신합니다.》

이것은 백두산총대로 수령님을 견결히 옹호보위하시는 장군님에 대한 혁명선배들의 진실한 존경의 표시였다.

 

  

어머님의 유산 -

권총, 마음의 기둥

자주위업, 주체혁명위업을 실현하려면 자기를 지켜나갈수 있는 강력한 총대가 있어야 한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중학시절은 학문탐구의 보람찬 나날인 동시에 총대와 혁명에 대한 심오한 진리를 더 깊이 파악하시게 된 나날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 온 나라 전체 인민은 3개년인민경제계획을 기한전에 완수하고 천리마운동으로 보수와 침체를 타파하면서 5개년인민경제계획의 새로운 고지를 향하여 질풍같이 내닫고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준엄한 시련과 난관속에서 남다른 체험을 쌓으시면서 혁명적세계관이 확고히 서고 위대한 풍모와 자질을 갖춘 미래의 령장으로 성장하시였다.

장군님의 이러한 성장을 힘있게 떠밀어준것은 어버이수령님의 손길과 더불어 어머님의 숭고한 뜻이였다. 일찌기 세상을 떠나신 어머님은 아드님의 심장속에 영생하시면서 언제나 아드님을 걸음걸음 이끌어주고계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어머님의 유산인 권총을 소중히 보관하고계시였다.

장군님께는 그 권총이 어머님께서 생명처럼 간직하고계신 친위전사의 투철한 수령결사옹위, 결사관철의 정신, 영웅적희생정신과 불타는 조국애의 결정체였으며 어머님의 숨결과 체취를 느낄수 있게 하는 그리운 어머님의 자애로운 모습이였다. 그 권총에 어머님의 위대한 혁명생애가 비껴있었으며 영웅적기상이 어려있었다. 그 권총에는 수령님께서 개척하신 주체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완성해야 한다는 어머님의 간곡한 당부가 새겨져있었다. 그것은 어머님의 삶과 투쟁, 념원의 전부였다.

하기에 장군님께 있어서 어머님의 권총은 강철의 령장, 위대한 혁명가로 성장해가시는 길에서 늘 곁에 있으면서 말없이 뜨거운 정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한생의 반려였다.

주체45(1956)년 9월 22일이였다.

이날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크나큰 슬픔과 비통함을 안고 어머님과 영결하신 때로부터 일곱해가 되는 날이였다.

장군님께서는 가슴이 미여지도록 그리운 어머님에 대한 생각에 잠기신채 창가에 기대시여 바람에 나무잎들이 한잎두잎 떨어지고있는 정원을 하염없이 내다보고계시였다.

이때 장군님을 찾아 댁으로 왔던 한 학생이 장군님의 숙연하신 모습을 지켜보고 섰다가 어디 편치 않으신가고 물었다.

장군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머리를 가로 저으시며 오늘이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날이라고 하시였다.

이윽고 장군님께서는 천천히 서가로 다가가시여 서랍을 여시더니 정히 간수하시였던 권총 한자루를 꺼내들고 오시였다. 어머님께서 생전에 애용하시던 소형권총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윤기도는 권총을 두손으로 받쳐드시며 조용히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나는 어머님이 생각날 때마다, 어머님이 못견디게 그리워 참을수 없게 될 때마다 이 권총을 꺼내보고 쓰다듬어봅니다.

그러면 어느덧 마음이 진정되고 어머님의 뜻을 이어 굳세게 살아가리라는 각오가 생기군 합니다.》

장군님께서는 권총과 더불어 언제나 어머님과 함께 계시였다. 어머님의 높은 뜻을 전해주는 귀중한 권총, 그 권총을 꺼내보실 때마다 어머님과 심장속대화를 나누시며 수령님을 옹위하고 받드는 친위전사의 성스러운 사명감을 더욱 깊이 새겨안으신 장군님이시였다.

그 사연깊은 권총을 바라보는 학생의 눈가에는 뜨거운 이슬이 맺혔다.

한동안 어머님에 대한 추억에 잠기시였던 장군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이으시였다.

《어머님은 수령님께서 건강하셔야 조국이 부강해지고 인민이 잘살수 있다고 하시면서 수령님을 높이 모시고 수령님의 신변을 철저히 보위하며 꼭 수령님의 뒤를 이으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나는 언제나 어머님의 말씀을 잊지 않습니다. 어머님의 가르치심을 잘 받드는것이 아들의 도리고 효성이 아니겠습니까!》

학생은 장군님의 숭고한 결의에 감동되여 자기도 김정숙어머님의 가르치심대로 위대한 수령님을 목숨으로 옹위해갈 굳은 각오를 다지였다.

그때뿐이 아니였다. 장군님께서는 권총을 자주 꺼내보시며  그 총에 깃든 깊은 뜻을 새기시면서 어머님처럼 한생을 빛내일 새로운 결의를 가다듬군 하시였다.

총은 장군님과 일생을 함께 하는 동지이다. 백두산총대가정에서 빨찌산의 아들로 탄생하신 장군님께서는 항일의 총성을 자장가로 들으시며 전장에서 자라시였고 그 총대에 의지하여 첫 걸음마를 떼시였다.

백두산장군의 남다른 천품을 타고나신 장군님께서는 어린시절부터 빨찌산의 영웅남아다운 기상과 품격, 기질을 하나하나 체득하시고 키워나가시였다.

아버님의 대를 이을 미래의 장군으로 씩씩하게 자라시는 아드님의 모습을 보시며 제일 대견해하신분은 바로 김정숙어머님이시였다.

어머님께서 바라신것은 수령님께서 지니고계시는 모든것을 아드님이 이어받고 어서 빨리 자라서 아버님을 받드는것이였다.

그래서 어머님께서는 아드님에게 《장군복》도 해입히시고 군모에는 붉은 별까지 수놓아 씌워주시였으며 늘 총을 익히고 화약내와 총성에 익숙되도록 관심하시였다.

어머님의 간절한 념원을 헤아리신듯 장군님께서는 자주 권총을 잡고 어머님으로부터 사격법을 배우고 익히시였다.

그이께서는 이 나날 권총을 자신의 육체의 한부분으로 여기시면서 총대로 아버님의 혁명위업을 끝까지 받드실 충성의 마음을 굳게 간직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총대혁명의지는 뜻밖에 어머님을 여읜 후부터 마음속 깊은 곳에 더욱 굳게 자리잡게 되였다.

주체47(1958)년 4월 어느날이였다. 뜻깊은 4월의 명절을 며칠 앞두고 당중앙위원회에서 사업하던 한 일군이 수령님께 만수축원의 인사를 드리려고 댁에 찾아왔다. 그때 그가 장군님께서 계시는 방을 찾아 조용히 문을 두드리고 방안에 들어서니 그이께서 권총을 분해하여놓고 무기청소를 하고계시였다. 권총을 보니 만고풍상을 헤쳐온 총이라는것이 대뜸 알렸다.

그는 깊은 사연이 깃든 권총 같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며 호기심을 감추지 못해하였다.

《이 소형권총은 어머님께서 나에게 남긴 유산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신 장군님께서는 어머님으로부터 권총사격법을 익히시던 일이며 권총에 깃든 사연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갈리신  음성으로 나는 그때 어머니와 영결하면서 어머님의 유언대로 이 권총으로 수령님을 잘 보위하고 높이 받들어모시리라 굳게 맹세를 다졌습니다, 지금도 나는 어머님께서 서거하신 날이나 수령님의 탄생일이 되면 이렇게 무기청소를 하면서 그때 다진 맹세에 자그마한 티라도 앉지 않았나 하여 마음의 혁띠를 조이군 합니다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나는 이 권총을 언제나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있습니다.

이 권총은 수령님을 잘 보위하고 높이 받들어모시려는 나의 마음의 영원한 기둥입니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나는 앞으로 이 권총을 마음의 굳센 기둥으로 삼고 수령님을 잘 받들어모시고 수령님의 위업을 끝까지 완성해나가려고 합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잠시후 장군님께서는 권총을 붉은 천에 싸서 정히 보관하시였다.

그때를 돌이켜보며 그 일군은 회상실기 《김정일위인상》에 이렇게 썼다.

《천금과도 바꿀수 없는 귀중한 혁명유산인 소형권총을 목격하던 잊지 못할 나날을 회고하면서 이 글을 쓰는 나의 눈언저리에서는 지금 눈물이 흘러내려 원고지를 적신다. 눈물로 얼룩지는 원고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나는 지금 로동계급의 수령들가운데 우리의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귀중히 간수하고계시는 소형권총과 같은 유산이 있는가를 돌이켜본다.

이 세상 끝까지 가보아도 그런 위대한 유산은 그 어디에도 없다.》

장군님께서 어머님으로부터 물려받으신 혁명유산, 소형권총에는 수령님을 충성으로 높이 받드는 길에 혁명의 승리가 있다는 혁명의 고귀한 진리가 새겨져있다.

장군님께서는 혁명유산인 권총을 받아안으시며 다지신 맹세대로 중학시절의 학습과 모든 활동을 수령님을 더 잘 모시며 수령님의 위업을 충성으로 받드는데로 확고히 지향시키시였다.

중학시절에 이미 혁명적수령관, 혁명적세계관을 확립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의 신변안전과 건강에 각별한 관심을 돌리시고 하실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어머님의 뒤를 이어 밤마다 저택주변을 돌아보시는것을 어길수 없는 일과로 삼으시였고 보초병들의 마음의 탕개를 조여주기도 하시고 때로는 교대없는 호위전사가 되기도 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불타는 열정으로 수령님의 로작들을 탐독하시였으며 수령님과 자주 뜻깊은 이야기를 나누시는 과정에 정치적안목과 시야를 넓히시면서 주체적인 혁명의 원리와 방법을 높은 경지에서 체득해나가시였다.

그이께서는 항상 국내외의 정치군사정세에 민감하시였고 그에 대한 분석과 판단에서 뛰여난 통찰력을 보여주시였다.

주체47(1958)년 5월 어느날 장군님께서는 수령님과 국제정세에서 주목되는 점들을 놓고 담화하시였다. 그때에도 장군님께서는 수령님께서 물으시는 문제들에 대하여 론리적으로, 자료적으로 심도있게 분석을 가하시며 명철하게 대답하시였다.

이날 장군님께서는 당시 국제정세에서 주목되는 점들에 대해 물으시는 수령님께 쏘련에서 새 내각이 구성되고 일련의 법령, 결정들이 채택된것이라고 말씀드리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물으시였다.

이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개인미신》을 반대한다고 떠들던 흐루쑈브가 수상자리를 타고앉아 자기에 대한 《개인미신》을 조장하면서 당권, 행정권 할것없이 모조리 틀어쥐고 제 마음대로 수정주의를 하겠다는 속심을 드러내놓은것으로 볼수 있다고 하시면서 쏘련에서 지난 3월 하순에 진행된 최고쏘베트회의에서 농기계뜨락또르임경소 개편에 관한 법령과 원자 및 수소무기시험을 중지할데 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완전히 반맑스주의적이며 반혁명적인것이라고 대답을 드리시였다.

장군님의 대답을 다 들으신 수령님께서는 그것을 왜 반맑스주의적이며 반혁명적인것으로 보게 되는가고 다시 물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것이 공산주의건설원칙과 어긋나기때문이라고 하시면서 이번에 쏘련에서 뜨락또르임경소 개편에 관한 법령을 채택한것을 보면 국가적소유, 다시말해서 전인민적소유의 기계들을 협동적소유로 넘긴다는것입니다,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려면 협동적소유를 점차 전인민적소유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흐루쑈브는 협동적소유를 전인민적소유로 만들 대신에 오히려 그 반대로 하고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계속하여 원자 및 수소무기시험을 중지할데 관한 결정 역시 수정주의적이며 반혁명적인 책동이라는데 대하여 분석하시고 그것은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투항이며 결국 미영제국주의자들의 발광적인 원자군비경쟁을 더욱 격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뿐이라고 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담화가 끝난 후 일군들에게 대단하다고, 정말 대단하다고, 그처럼 정세에 밝은 사람은 없을것이라고 하시며 못내 만족해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동무들이 나를 천재라고 하는데 만일 천재가 있다면 김정일동지를 《천재》라고 해야 할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이렇듯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뜻깊은 중학시절은 그이께서 권총에 깃든 어머님의 당부대로 수령님의 주체위업을 받들어나가시는 후계자, 선군령장으로서의 품격을 갖추어나가시는 위대한 나날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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