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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첫걸음 리봉수
일제와 지주들의 착취와 천대에 못이겨 정든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 살길을 찾아다니던 우리 일가가 동북 훈춘현 동포대 남소성자에 도착한것은 1929년이였다. 그곳에는 훈춘현에서도 소문난 악질지주 한희삼이란 놈이 있었다. 그는 땅을 300경이나 소유하였고 소 열다섯마리, 말 두필을 가지고있었으며 첩을 10여명이나 데리고사는 놈이였다. 맨주먹으로 고향을 떠난 나는 그놈의 땅을 부치며 소작살이를 하게 되였다. 당시 동만일대에서는 조선인혁명가들의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여 일본제국주의와 지주, 군벌들의 죄상을 폭로하는 선전삐라들이 각곳에 나붙었다. 이 삐라들을 보고 조직을 찾아볼 욕망이 일어난 나는 그 당시 한희삼의 소작인들속에서 사업하던 동무들과 자주 접촉하며 혁명적영향을 받게 되였다. 그들은 주로 반제동맹원들이였다. 1930년 11월(음력)어느날 저녁 리경수(나의 8촌형)와 함께 최희백동무의 집에 갔었는데 그곳에는 반제동맹 현위원이 와있었다. 한 동무는 집앞에서 망을 보고있었다. 회의에서는 나를 반제동맹에 가입시킬데 대한 문제를 취급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앞으로 동맹의 비밀을 엄수하며 열성적으로 사업해야 한다는것을 강조했다.
투쟁의 첫걸음
내가 반제동맹에 가입한후 약 3~4개월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리경수동무는 낯선 남녀 두사람을 데리고 우리 집에 와서 《이 두분을 뒤고방에 머물게 하고 잘 보호해야 한다.》고 부탁하였다. 나는 그 부탁을 쾌히 승낙하였다. 당시 공산당원들은 극비밀리에 활동하였으며 조직군중들도 자기 조직에서 누가 당원인가 하는것을 다는 몰랐던것이다. 후에 알고보니 한 동무는 공산당훈춘현위원회 서기로 있는 오빈동무였고 녀동무는 당부위인 김일권동무였는데 그들은 부부간이였었다. 그들은 우리 집이 독립가옥이였으므로 은신하기 좋은 까닭에 온것이였다. 나는 그들을 뒤고방에 정성껏 모셨다. 그날 저녁에 오빈동무는 나를 부르더니 《동무, 우리의 비밀을 잘 보장할수 있겠소?》하고 말하는것이였다. 나는 비밀을 잘 보장할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우리 집은 울타리가 없었다. 아무리 독립가옥이라 하여도 사람들이 찾아오는 일이 자주 있으므로 혹시 그들이 변소에라도 드나들 때 사람들이 볼수도 있는것이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울타리를 만들 재료가 없었고 수수짚이라도 살수 있는 돈도 없는 형편이였다. 나는 그날저녁 여러가지로 대책을 연구하여보았다. 지주 한희삼에게 가서 해결해보려고도 생각했으나 욕심많은 지주놈이 잘 들어줄리 없었다. 그 이튿날아침 나는 어디가서 짚이나 구해볼가하여 집을 나서려고 했다. 그때 오빈동무는 《동무, 어디가오?》하고 물었다. 《집에 울타리가 없어 걱정되기때문에 어디 가서 짚이나 구해볼가 해서요.》하고 나는 대답하였다. 그는 나의 딱한 사정을 알아차리고 돈 10원을 내여주면서 《이것으로 울타리감을 사는데 보태시오.》하였다. 나는 별다른 도리도 없고하여 그 돈을 받았다. 장마당에 가서 울타리감 세바리를 사고 말장도 몇개 사왔다. 이렇게하여 휑하던 집뜨락은 가리여졌다. 그후 오빈동무는 매일저녁 나에게 약 두시간씩 정치사상교양을 주었다. 그리고 소책자들도 가져다주었다. 그는 쏘련에서의 사회주의혁명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세계무산계급의 혁명이 반드시 승리하며 조선인민들도 일제의 식민지기반에서 반드시 해방될수 있다는것을 해설하여주면서 그를 위하여 어떻게 싸워야 한다는것을 말하며 혁명조직의 공작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얼마 지나서 우리 집에는 또 낯모를 동무 세사람이 왔다. 그들은 등사판, 등사용지, 종이묶음을 가지고왔다. 이 사람들은 물북(훈춘강 북쪽지역) 황구를 중심으로 사업하다가 물남에 자리잡기 위하여 우리 집에 온것이였다. 그들은 나에게 등사기, 등사용지, 종이묶음을 맡기면서 그것을 은밀히 보관하여달라고 당부하고는 돌아갔다. 그들은 현당위원회 비서처에서 공작하고있는 동무들이였다. 나는 그 물건들을 소구유밑에 감춰두었다. 다음날밤에 오빈동무는 나에게 《동무가 받은 종이묶음안에는 삐라가 들어있소. 그것은 각구(당구)에 보낼것이요, 그리고 우리는 문건도 여기서 찍어서 발송해야 하겠소, 이제부터 동무네 집에서 삐라문건들을 인쇄하여 각구에 보내는 사업을 하게 된단말이요, 동무는 이런 공작을 할만 하오?》하고 묻는것이였다. 나는 선뜻 《해보지요.》하고 대답하였으나 우선 등사기와 많은 삐라들과 문건들을 어떻게 건사할것인가가 제일 큰 근심이였다. 방에다 두는것은 물론 위험한 일이며 그렇다고하여 땅속에다 묻는다 치더라도 누가 보면 《난데없이 땅밑을 왜 뚜지는가.》고 의심을 살수도 있는것이다. 나는 온밤 궁리하다가 우물을 파고 그것을 리용할 계획을 하였다. 우리 집에는 우물이 없어서 멀리 가서 물을 길어오는 형편이였다. 그러나 이곳 땅은 산이 뻗어내린곳이여서 어지간히 파서는 물이 날것 같지 않았다. 물이 날 때까지 깊이 판다면 우물이 무너질 념려가 많았다. 그것을 방지하자면 돌을 쌓아야 했다. 그 많은 돌을 어떻게 가져와야 할것인가, 이것도 큰일이였다. 나는 지주 한희삼을 리용하여볼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놈은 돈은 있으나 일자무식으로 땅고집이 있는놈이였다. 그러나 우리집 근처에 많은 땅을 가지고있는 그놈은 자기의 소작인들을 이곳에 옮겼으면 하는 의사도 가지고있었다. 그런데 물이 멀어서 누구도 이곳으로 오려고 하지 않았던것이다. 그놈의 집은 우리 집이 있는데서 약 5리 떨어진곳인데 나는 그 지주놈을 찾아갔다. 《령감님 내가 풍수를 뵈우니 우리 집앞에서 물이 날수 있다고 합디다.…》고 하니 그는 《그건 참 좋은 일이네. 그러면 어디 자네가 한번 파보겠나?》하면서 귀가 솔깃해하였다. 《그런데 령감님! 깊이 파들어가야 물이 있답니다.…》 《그러면 힘이 많이 들겠는데.》 《힘이 드는것이 문젠가요. 그보다 판 우물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돌이 들텐데 그게 문제란말이지요.》 소작인을 종부리듯 하는 지주놈은 《여보게 그런 돌쯤이야 문제가 있나. 작인들을 시켜 그 동쪽산에서 얼마든지 가져올수 있지 않는가. 자네 꼭 파보게.》하면서 오히려 나를 부추기는것이였다. 나는 소작인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여하튼 목적을 달성할수 있게 된것이 기뻤다. 그날 점심때부터 집안식구를 총동원하여 우물을 파기 시작하였다. 진흙땅이여서 흙덩이를 한쪼각씩 깎아내다싶이 하면서 두길이나 파들어갔으나 물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물곬이 전혀 없는곳을 판것이나 아닌가? 진흙땅속에서 어떻게 물이 나올수 있겠는가? 동리사람들이 이곳에 집을 짓지 않은것이 리유없는 일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물은 파야 한다. 이것은 나의 중요한 혁명임무가 아닌가, 파야 한다. 물이 나올 때까지 더 깊이 파보자! 땅속에는 물이 있는 법이다.》하고 나는 자기를 고무하였다. 나는 밤낮을 이어가면서 우물을 팠다. 흙은 용드레로 파올렸다. 좁은 땅굴속은 숨이 막히고 운신하기도 힘들었다. 이렇게 근 20여일이나 파들어가니 드디여 물이 터져나왔다. 나는 너무 기뻐서 그속에서 《물이다!》하고 소리쳤다. 이제는 지주놈이 작인들을 시켜서 실어온 돌로 우물벽을 쌓아올려야 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다섯길이 잘되였는데 그것을 쌓는것도 큰일이였다. 나는 지면에서 약 1m가량 들어가서 우물안에 딴 구멍을 파고 오지독을 가로 묻었다. 이것이 나의 목적이였다. 이것을 위해 다섯길이나 되는 우물을 판것이다. 그리하여 그 오지독속에 등사기와 각종 인쇄물을 비밀리에 보관하였다. 나는 자기도 혁명을 위하여 일하였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기쁘고 영예스러운지 몰랐다. 그후 오빈동무는 삐라와 문건들을 작성하고 나는 그것을 인쇄하여 각구에 발송하도록 준비하여놓았다. 밤이 되면 황구, 성구, 금구, 연구, 판구 등 각 조직구에서 통신원들이 우리 집에 와서는 통신도 가져가고 삐라도 가져갔다. 통신은 엷은 반지에다 글을 쓴것인데 잘 접으면 손가락짬에라도 감출수 있었다. 이런 통신을 전달하는 일에는 주로 녀성들, 아동들, 때로는 로인들까지 동원되였다. 녀성들은 함지박에 떡이나 국수를 담은 그릇속에 통신을 넣기도 하고 단지속에 넣어가지고도 다니였으며 머리카락밑에 넣기도 하였다. 아동들은 메뚜기치기를 하다가 한 아이가 메뚜기채를 쥐고달아나면 다른 아이가 그것을 빼앗으려고 따라가는척 하든가 또는 겨울이면 팽이를 돌리다가 쥐고달아나면서 통신련락을 하였다. 로인들은 지팽이속에 넣어가지고 다녔다. 그때는 지팽이를 짚고다니는것이 류행되여 그것을 통신련락에도 리용하였다. 이렇게하여 나는 통신의 비밀을 보장하였는바 이것은 투쟁의 첫걸음이였다.
당의 위임에 충실하여야 한다
오빈동무는 나에게 공산당원이란 어떤 사람이여야 한다는것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나에게 당원은 혁명을 위하여 끝까지 싸우며 당의 위임에 충실하며 필요할 때에는 생명까지도 서슴없이 바칠수 있는 준비가 되여있어야 하며 항상 경각성을 높이며 만약 공작하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여도 비밀을 고수하여야 한다는것을 말하여주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빠질세라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 그는 나를 매일저녁 교양주는 한편 가두삐라공작을 할 과업도 주었다. 하루는 나에게 삐라한장을 주면서 이것을 주먹속에 감출수 있게 접되 어디라도 붙이기만 하면 곧 펴질수 있게 하라는 과제를 주었다. 나는 쉽사리 그 방법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종일토록 이리접고 저리접고하여 겨우 그 방법을 알아냈다. 그러자 오빈동무는 나에게 《래일 이 삐라를 장거리에 나가 잘 보이는곳에 붙여놓고 오시오.》라고 하였다. 당시는 일제가 동북을 강점한 1931년 9.18사변직후였다. 나는 삐라를 받아쥐고는 또 궁리해보았다. 일제군경놈들이 주린 개처럼 눈에 쌍심지를 켜가면서 《불온분자》를 찾아다니는 장거리복판에 삐라를 붙인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내가 소달구지에 나무를 싣고 훈춘시가지에 들어간것은 그날저녁때였다. 시내에 들어가니 여러사람들이 나무를 팔라고 하였다. 나는 《이 나무는 이미 팔렸소.》하고 매번 거절을 하고는 우차를 몰고 려인숙을 찾아갔다. 그날밤을 그곳에서 쉬기로 하였다. 려인숙방에 누운 나는 삐라를 붙일 궁리를 하다나니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에 달구지를 몰고 장거리에 나가보기로 하였다. 장마당에는 한낮이 되면서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경찰놈들이 무시로 싸다녔다. 나는 삐라를 붙일 생각으로 가슴을 조였다. 그런데 마침 긴 칼을 찬 순사한놈이 사냥개처럼 어슬렁어슬렁 내앞을 지나갔다. 나는 달구지에 걸터앉아 그놈의 거동만 살피고있었다. 순간 나의 머리속에는 번뜩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삐라를 저놈의 잔등에 붙인다면 가장 잘 보일것이 아닌가?》 나는 네귀를 몇번이고 접고접어서 납죽하게 된 삐라의 뒤에 풀을 잔뜩 발라가지고 순사놈뒤를 슬그머니 따랐다. 순사놈은 장마당복판에 들어가더니 사람들이 빼곡이 모여 밀치고닥치고 하는 속으로 들어가는것이였다. 나는 그놈의 등뒤에 바싹 다가붙었다. 그자는 사람들속에서 무엇을 찾는지 두리번거리며 정신을 팔고있었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머리를 옆으로 돌려 사람들이 떠드는곳을 보는척하면서 손에 쥐고있던 삐라를 곁사람도 모르게 순사놈의 등에 붙이고는 슬쩍 사람들속으로 피해들어갔다. 다시 나는 달구지에 돌아와앉아서 그놈의 거동을 바라보았다. 순사놈의 등에서 삐라는 차차 쭉 펴지기 시작했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라고 굵직하게 먹으로 쓴 삐라의 내용이 나타났다. 순사놈은 그런줄도 모르고 거들먹거리며 장마당을 돌아다니였다. 사람들은 의아한 눈으로 그놈의 뒤잔등에 붙어있는 삐라를 바라보고는 구석구석에서 수군거리며 웃음을 참느라고 애썼다. 이리하여 순사놈은 온 장마당사람들이 웃음거리로 되였다. 내가 소에 달구지를 메우고 장마당을 떠나려고하는데 순사놈은 사람들이 자기를 보며 웃는 눈치를 보고 그제서야 자기의 잔등에 삐라가 붙어있는것을 알게 되였다. 당황망조한 그놈은 눈을 부라리고 고함을 치며 돌아갔다. 큰일이 났다고 경찰놈들이 모여들었고 성문도 닫겼다. 오고가는 사람들을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놈들은 《범인》을 발견할수 없었다. 놈들은 날이 저물어서야 성문을 열었다. 나는 통쾌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오빈동무는 나를 보고 벙글벙글 웃으며 《동무는 참 용감하오.》하고 치하하는것이였다. 후에 알고보니 그는 집에 앉아서 벌써 내가 돌아오기전에 장마당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통보를 듣고있었던것이다. 나는 그후에도 삐라공작을 계속하였다. 일본령사관 담벽에도 붙였고 령사관마당에 돌멩이를 싼 삐라를 수많이 뿌려넣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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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나는 조직에서 주는 임무를 매번 기어코 수행하였다. 어느날 오빈동무는 《동무를 당에 받아들이기로 했소.》하면서 자기가 직접 나의 입당보증을 서주었다. 나는 당지부회의에서 입당결정을 받게 되였다. 그날은 1931년 11월 23일이였다. 나는 그때 난생 처음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자기자신이 당원이 되였다는것이 꿈같은 일이였었다. 그때 나의 정치적의식은 미약하였으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령도하시는 조선혁명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서슴없이 바칠수 있는 각오만은 튼튼히 간직하고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