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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피를 흘리며 공부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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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고한 그해 겨울은 가고 봄이 지나 여름이 오고있었다. 7월에 와서는 심한 가뭄에 련이은 혹서! 날씨는 어찌나 무더운지 한증탕 같은 찜통속에서 먹지 못해 여러가지 병에 걸린 환자들, 얼었던 동상자리에서 질질 진물이 나오면서 썩는 사람들, 매맞아 터지고 찢긴 상처마다에는 쉬가 쓸고… 무더위에 닭알이 익을 정도로 끓는 삼복철에 먹는 물마저 주지 않아 물소동이 끝이 없고 같이 갈증을 만났는지 이와 벼룩, 모기, 빈대는 각종 상처마다에 파고들며 물어뜯어 피를 빨아먹는판이다. 물이 없다보니 환경오염냄새, 생피냄새, 시체가 부패되는 냄새들이 온 수용소를 덮고있어 차라리 사람에게 아예 후각감각이 없었으면 좋을 지경이였다. 그런데다가 헌병대, 감찰, 정훈대의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등 송인섭의 졸도놈들이 재판에 넘어가기전 사람들을 어떻게 하던지 사상전향을 시켜보려는 발악이 최절정에 이르러 그 만행과 포악성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김주호, 황갑동 등 여러 사람들의 싸우자는 생각이 모아져 그들이 들어있는 천막을 중심으로 수용소의 첫 세포조직의 하나가 정식 발족되기는 했었다. 그렇지만 일부 사람들이 잘못하다가는 공연히 놈들에게 탄압의 구실을 주게 된다고 반대해나서는통에 활동에서 일정한 장애를 받게 되였다. 그런데다가 놈들이 《전과자》들, 감옥을 제집 드나들듯 하는 인간추물들인 루범들을 천막마다 박아넣어 렴탐질을 일삼게 하는지라 활동에서 제약되는 점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경계가 삼엄한 수용소내에서도 살아 움직이고있는 몇몇 당원들과 그 조직의 존재만으로도 놈들의 《신경전》, 《사상전향전》을 짓부시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나선 사람들에게 무한한 힘을 주었다. 드디여 황갑동이 다른 몇몇 전우들과 함께 그 죽음의 소굴인 광주수용소를 《졸업》하는 날이 왔다. 그는 1952년 9월에 광주경찰국 조사를 걸치고 공판장으로 출두하라는 호출을 받았던것이다. 광주 구덕정이라는 곳으로 끌려갔더니 근 40∼50명의 사람들이 먼저 와있었다. 무슨 놈의 재판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끌어내다가 한꺼번에 하는것인지 난생 보기도 처음이고 듣기도 처음이였다. 그는 놈들이 여기서 재판은 명색뿐이고 집단판결로 모조리 현장에서 총살해버리고 말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구덕정재판장에 끌려온 다른 사람들의 거멓게 사색이 되여버린 얼굴마다에는 벌써 쓸쓸한 생의 마지막황혼빛이 어려있었다. 이 얼마 남지 않은 최후의 마당에 당착한 순간 황갑동은 그간 지리산이 좁다하게 뛰여다니며 일사불란의 나날을 유감없이 보냈으나 종시 통일의 성업을 이루지 못하고 아직 20대의 젊은 청년으로서 그냥 지고마누나 생각하니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사람이 세상에 났다가 속절없이 지고마는 이 마당에 이르러 제일 돌이켜지는것은 입산할적에 어머니와 《가마니댁》인 고숙에게 약속한대로 고생가마니 짜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을 놈들과 싸워이겨서 가져다주지 못하고 마는것이였다. 그 약속을 지켜 승리를 안고 정든 고향집으로 돌아갔더래도 어머니와 고숙이 구태여 자수를 하라말라 하지 않았을것이였다. 그리고 제일 마음에 걸리는것은 뚱보동무가 마지막길을 떠나면서 남긴 편지속의 신신당부대로 종시 어머니와 고숙을 다시 만나 석연하고 시원한 용서의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가는것이였다. 또한 그가 죽으면서도 그냥 등에 지고가게 되는 무거운 행복한 짐은 사랑하는 빨찌산의 미더운 녀동무, 뚱보동무를 끝까지 옆에서 돌봐주지 못하고 떠나는것이였다. (아마 조선에는 물론 세계빨찌산력사에도 제 몸을 제가 이기지 못할 정도로 그런 비둔한 몸을 가진 녀성유격대원은 드물것이다. 오죽하면 덕금이를 체포했던 경찰놈들까지도 놀라와하면서 《혁명에 미친 녀자》라고 했겠는가. 그 몸을 가지고도 안따라다니는데가 없었고 마지막에는 자수자 로영기를 앞세우고 《토벌대》놈들이 기백산근거지로 몰려드는 길앞에서 지뢰로 폭파해죽고저 결심하고 한번 갔다 다시 오지 못할수도 있는 길로 웃으며 떠나던 잊을수 없는 녀동무였다. 지금 그는 어디서 나를 생각하고있는지도 모른다. 아, 마지막으로 그가 좋아하는 노래 《아리랑》이라도 한번 더 들어볼수는 없단 말인가.) 마음 애달프기 그지없는 갑동이였다. 드디여 살인재판이 벌어질 구덕정공판장에 이르니 주위에는 총을 든 괴뢰군들이 받들어 총을 하고 둘러서있었다. 이내 끌어온 사람들을 석줄로 세워놓고 소위 군변호사, 민변호사들이 사람들사이로 다니면서 고향은 어디며 가족은 있느냐? 집은 어떤걸 쓰고살며 논과 밭이 얼마나 있느냐? 짧은 시간에 간단간단히 묻고나서 무슨 타산이 있는지 다시 줄을 고른다. 그런 다음에 지옥의 사자와 같이 험상궂게 생긴자가 나서서 염라대왕에게 보낼 사람들을 호명하기라도 하듯 최종적으로 명단과 사람대조를 하나씩 하는데 갑동은 자기 생각에만 골몰해있다나니 그만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황갑동이- 없나? 벌써 죽어삐렀어?》 《예, 여기 있구만이라.》 《짜석, 이름은 을동도 아니고 갑동인데 염라국으로 가는데꺼정 지각이여? 빨랑빨랑 가운데줄 제1번에 들어서랑께롱.》 (그렇지, 가운데줄 제1번, 거기가 기본사형수대상인 내가 들어설 자리지.) 더 아무 생각없이 황갑동은 제 자리를 찾아서 들어섰다. 군복쟁이로서 검은색안경을 코에 건 판사라는 강도같이 생긴 꺽다리가 간단한 한장짜리 판결문을 읽기도전에 불시에 《사격준비!》구령부터 내린다. 둘러선 군인들로 하여금 절크덕절크덕 총탄들을 재우게하여 하나도 빠져 달아날 궁리도 못하게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해놓자는것이였다. 군판사라는 자는 생명희롱에 대한 그 어떤 쾌감을 맛보며 생각나는대로 즉결판결을 내리는것이였다. 《이제부터 본 야전군사재판의 판사인 이 사람은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앞줄 들어라! 너희들은 죄가 있건없건 관계없이 최근의 장성-갈재 기차전복사건과 전북-갈재 기차전복사건, 수용소탈출사건 등의 공동책임으로 사형을 선고한다! 그다시메 둘째줄은 어- 무기징역이다! 셋째줄은 20년 유기징역을 선고한다! 이상.》 판사의 판결이 끝나자 사형이 선언된 첫줄 사람들은 차라리 일없는데 너무 긴장되였던 둘째줄, 셋째줄 사람들속에서 뜻밖에 사형을 면하게 된 사실앞에 탁 긴장이 풀리면서 한둘이 그 자리에서 뻥- 하고 뒤로 나자빠지고말았다. 물론 황갑동이도 자기가 어떻게 되여 총살이 되지 않고 무기징역형을 받고 살아나게 되였는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꿈을 꾸는것만 같았으며 처음에는 어리뻥해지는것이 제 정신이 아니였다. 그 자리에서 곧 사형수들에 대한 총살이 강행되였다. 금방전에 사형언도를 받은 열네댓명 사람들이 구덕정옆 언덕의 사형장으로 끌리여올라가섰다. 거기에는 서너명의 녀성들도 끼워있었다. 그중에서도 갓난애를 품에 안고 서있는,가느다란 백테안경이 유난한 젊은 녀성의 낯익은 모습에 가서 시선이 박힌 갑동은 하마트면 놀라 앗! 소리를 지를번했다. 그 녀인은 뜻밖에도 언제인가 지리산에서 있었던 군정학습의 날 리현상의 초청을 받고 《민족의 선택》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그렇듯 인상적인 강론에 출현했던 바로 그 전라북도인민위원회 위원장이였던것이다. 그때 저 멋쟁이강사는… 그냥 이렇게만 나가다가는 우리 민족이 서로 피를 흘리며 영영 둘로 찢기여나가지 않겠느냐는 나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이런 대답을 해주었었지. 《…꼭 하나가 되려는 우리 민족의 그 억센 흐름을 막아낼수는 없어요. 그 누구도 절대로 갈라놓을수도 끊어놓을수도 없는 그 민족의 혈맥과 함께 하나인 조선민족은 없애지도 죽이지도 못하며 영원한것이예요.》 이렇게 나의 물음에 친절한 대답을 주고나서 나더러 앞으로 민족의 참된 아들이, 훌륭한 통일의 전사가 되세요! 라고 따뜻한 말로 고무를 주던 고마운 녀성! (아, 저 녀자도 잡혀서 어린애를 껴안은채 사형장에 나섰구나. 포로의 신세가 된 불우한 사나이, 내 저 훌륭한 애국녀성을 대신하여 사형을 받을수는 없단 말인가?) 혼자 이런 생각을 하고있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끌리듯 그 녀인이 서있는 앞으로 몇걸음 걸어나갔다. 《신동지! 저를 알겠습니까?》 《…》 그 녀성은 말없이 머리를 끄덕이며 애써 웃어보였다. 《위원장동지, 우선 그 애를 저에게라도 맡기고 가주십시오. 고향의 저의 어머니더러 키워달라고 해보겠습니다.》 이때 한놈이 뒤로 와서 발길로 갑동이를 걷어차서 넘어뜨렸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놈은 이마가 쭉 벗겨져서 《공산명월》이라고 불리우는 광주교도소 간수부장이라는 자였다. 《임마, 자기도 죽을지 살지 모르는 째비에 뭐 아이를 맡겠다구? 삶은 개대가리를 웃기지 말어. 얼빠진 짜석!》 놈은 도인민위윈회 위원장의 그 품위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고 도고한 자세로 서있는 그 녀인에게로 다가가서 수작을 붙이는것이였다. 《신선생, 우리는 솔직히 말해서 빨갱이라니 그렇지 당신은 여러모로 보아 죽이기 아까운 녀자로 보고있소. 그러니 마지막으로 한번 더 생각해보시오. 더구나 아이가 불쌍하지 않는가? 그 애가 산채로 총에 맞은 엄마와 같이 저 구뎅이속에 떨어져 묻힐 생각을 좀 해보시오. 이제라도 빨갱이사상만 버리겠다면 이미 선고를 내린 사형까지라도 취소하게 할수 있단 말이요. 어떻게 하겠소. 아이와 함께 사는 길을 택하겠는가 아니면 끝까지 고집을 써 아이까지 죽이는 길을 택하겠는가? 어디 대답해보시오.》 그 녀인은 저력있는 어조로 그에 대답했다. 《당신들은 이미 력사가 죽음을 선고한, 살아도 죽은 자들이나 같으니 참된 의미에서의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를거요. 매 인간은 그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력사의 존재로서 력사속에 살며 력사의 편달을 받게 되는거예요. 그렇기때문에 자기 사상과 신념을 버리는 자는 이 자리에서 살아날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후에 력사가 그를 죽이며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자기 신념을 지키는 사람은 비록 이 자리에서 죽을수도 있지만 후에 력사가 그를 다시 살린다는것은 의심할바없이 력사의 진실인것이요. 력사! 력사를 두려워하시오!》 《참 어리석은 슬로간의 포로가 되여 도인민위원회 위원장까지 해먹던 녀자니 할수 없지. 그럼 부디 잘 가시오.》 모든것을 포기해버린 단념의 손짓을 해보이던 공짜를 좋아하는듯한 번대수리 《공산명월》이라는 자가 무슨 생각이 났던지 다시 돌아서는것이였다. 《가만, 거 안고있는것이 아들인가?》 《…》 《사내애면 이 <공산명월>이 박복하여 애가 없어서 그러는데 나한테 맡기고가지 않겠어?》 《…》 《아이라도 살리는것이 낫지 않아? 물론 고통스러울테지. 당신들식으로 말하면 자기들과 맞서 싸우던 계급적원쑤의 품에 제 새끼를 맡긴다는건. 그렇지만 나는 당신의 새끼지만 한번 가져다가 키워보자고 그래. 어떻게 되는가 보게…》 너무나도 기막힌 일을 당하는 그 녀성일군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그래도 여기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는 사람이라고 할수 있는 황갑동에게 묻는듯한 눈길을 돌리는것이였다. 이제 사형을 당해 저세상에로 눈감지 못하고 가게 될 의로운 녀인인 도위원장에게서 그 아들애를 받아줄 처지가 못되는 황갑동은 찢기는듯한 자기 마음의 아픔을 누르며 자기가 살아있기만 하면 언제이든 그 애를 꼭 찾아내리라고 마음다지며 마지막길을 가는 혁명동지에게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그러자 젊은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애와의 생리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몸을 좀 돌리고 돌아서서 애기에게 젖을 물리는것이였다. 그 간고하고 시련에 찬 적후투쟁의 나날에도 여기 광주수용소의 고난많은 나날에도 애지중지 키워오던 아버지마저 없는 하나밖에 없는 제 살붙이를 적들의 손에 넘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막혀오는 녀인이였다. 자기 몸의 피를 아들애의 작은 가슴속에 넣어주는것만으로는 어머니의 의무를 다할수 없으며 뭔가 그 심장속에 자기의 넋을 심어주지 못하고 가는것을 안타까이 여기던 녀인은 무슨 생각이 났던지 양복저고리 호주머니에서 흰 명주손수건을 꺼내는것이였다. 자기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입에 물어 강강하게 깨문 그는 손끝에서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진한 피로 그 손수건에다 대고 《너의 아버지 고향은 평양》이라고만 써서 애기의 품속에 넣어주는것이였다. 《공산명월》이 옆에 와서 재촉해댔다. 《야 시간이 없어. 나오지도 않는 젖 한방울 더 먹이기나새나. 애를 이리 내!》 《…》 마지막으로 영별의 시각을 앞두고 귀여운 어린것을 강의한 웃음을 물고 그윽히 바라보는 젊은 어머니의 두눈가에서 커지던 눈물방울이 뚤렁 애기의 볼에 떨어졌다. 순간 녀인은 온몸을 휩싸는 말못할 격정을 이기지 못하여 불시에 애기를 꼭 가슴에 껴안았다. 《혁남아, 알… 앓지 말고 잘 자라거라!》 《그만해, 그만. 너때문에 사형집행시간이 늦어지는걸 보지 못해. <진빨갱이>같은것. 애를 놓지 못하겠어?》 간수부장놈은 녀인에게 달려들어 아직 피덩어리 같은 애기를 엄마의 젖꼭지에서 억지로 떼냈다. 응아-아, 애기의 자지러진 울음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찢었다. 애어머니는 눈물을 감씹으며 한손을 쳐들었다. 《좀 가만!》 《또 뭐야?》 《…》 녀인은 말없이 자기의 가슴속에 넣어 말리웠던 애기 기저귀를 신성한 어머니의 권리로 《공산명월》에게 내밀어주었다. 《받아줘요!》 그의 말에서는 모성으로서만이 아닌 떳떳한 녀성투사로서의 존엄이 울려나오고있었다. 간수부장은 그것을 받고싶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지켜보는데서 받지 않을수도 없어 하는수 없이 손을 내밀어 그 아이지린내가 물씬 풍기는것만 같은 기저귀를 나꾸채다 싶이하는데 금시 송충이를 씹은 상이 되였다. 이때 《사격준빗-》하는 사형리의 구령소리가 벼락쳤다. 도인민위원회 위원장녀인은 황갑동과 전우들이 서있는쪽에 대고 마지막영별의 말을 남겼다. 《지리산의 전우들! 저는 먼저 갑니다. 안녕히-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끝까지 승리자로 남기를! 동지들! 만세를 부릅시다. 김일성장군님 만세를!》 온 사형장에 《김일성장군 만세》의 함성이 터져올랐다. 애기를 한팔에 안고있던 《공산명월》도 권총을 빼들어 녀성일군을 견주었으나 왜서인지 쏘지는 못했다. 이어 《쐇-》하는 구령과 함께 타당, 탕 하고 총성이 련발되였다. 도인민위원회 위원장도 다른 전우들도 하나하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차마 전우들이 흉탄에 쓰러지는것을 볼수 없어 머리를 외로 돌리고섰는 황갑동은 새 총성이 울릴 때마다 마치 자기가 그 총탄을 가슴에 받기라도 하는듯 몸을 흠칫흠칫 떨군 했다. 이렇게 되여 52년 9월의 어느 평범한 날에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던 전라북도인민위원회의 이름 모를 녀성위원장은 광주 구덕정의 사형장에서 부끄럼 없는 최후를 마쳤었다. …그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 뒤 오늘까지도 황갑동이 그날의 사형장에서 《…전향하는 자는 이 자리에서 살아날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후에 력사가 그를 다시 죽이며 비전향수는 비록 이 자리에서 죽을수도 있지만 후에 력사가 그를 다시 살린다!》는 훌륭한 말을 남김으로써 자기가 비전향장기수로 력사속에 끝까지 살아있을수 있게 도와준 고마운 녀성을 못내 잊지 못해하였다. 왜 그때 그의 이름을 알아보지 못했던지 후회도 막심하였다. 그저 신동지, 신동무라고만 불리우군 했으니 그의 진짜 성조차도 신자인지 아닌지도 딱히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불같은 투쟁의 시절에 대원사 군정학습의 마당에서 도수높은 안경도 번쩍, 우리 《민족의 선택》을 바로하자! 뜨겁게 웨치며 이 민족의 통일을 목이 쉬게 부르다가 간 그 의로운 애국녀성을 오늘도 묵묵부답인 지리산은 그리고 어머니조국은 잊지 않고 가슴속 깊이에 길이 새겨두고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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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없고 어둠이 없다면 밝은 불꽃도 빛을 내지 못할것이다. 그럴진대 캄캄한 어둠속일수록 더욱 밝게 빛나는것이 진짜 불꽃이고 도저히 인간의 순결함을 지켜낼수 없는 곳에서 마음의 선을 나타내는것이 진짜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형무소나 감옥에는 맨 캄캄한 어둠뿐이고 순전히 악만이 들어차있는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맞지 않는것이다. 감옥이야말로 어둠과 광명이 서로 무섭게 다투는 곳, 이 세상 최대의 악과 최대의 선이 목줄을 거머잡고 매일, 매시각 피나는 혈투를 벌리고있는 치렬한 대결장인것이다. 황갑동은 형무소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불악당들이 살고있는 곳도 감옥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아름다운 인간들이 살고있는 곳도 감옥이라는것을 절감하게 되였다. 구덕정공판장에서 무기, 유기형을 받은 사람들과 함께 황갑동이네가 무작정 트럭에 실리여 끌려간곳이 광주 동명동 붉은 벽돌집형무소였다. 수용소에서 형무소로 둔갑한것이다. 수송차에서 내리자마자 검정옷을 입은 수십명 형리들이 몽둥이를 들고 늘어서있다가 정신 돌릴 틈도 없이 끌고가서 또 한바탕 두들겨서 죽여놓는다. 소위 《신입식》이라고 했다. 그날의 그 《신입식》에서 겨우 사형을 면하고 살아나는가 싶었던 십여명 사람들이 또 맞아죽었다. 련일 그렇게 죽은 시체들만도 부지기수인데 그걸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암매장했을것이다. 살아남은 갑동이네들이 갇힌 곳은 광주감옥 2가사, 형무소가 차고넘쳐 공장을 우선 림시사용한 건물이였다. 창고를 둘로 나누어 1방에는 120명, 2방에는 110명인데 그는 1방이였다. 황갑동은 그 1방안의 백여명 사람들가운데 혹시 지리산의 전우들이라도 끼여있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두루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발 옮겨디딜 자리조차 없는데다가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옆사람들과 노끈으로 손발을 얽어매놓은지라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도 찾아볼 형편이 못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나이 많은 옥졸이 그래도 보는 눈이 있었던지 입이 무거워 온종일 옆사람들과 허투로 말을 건네는 일도 없고 어딘가 사람이 진중하고 정직해보이는 황갑동에게 마음이 끌렸던 모양 배식당번을 맡기는것이였다. 감옥에서 밥주걱을 손에 잡을수 있는 배식당번 한자리 따는것만도 아무에게나 차례지는 《벼슬》이 아니였다. 갑동은 남보다 밥 한술이라도 더 떠먹게 되였다는 생각보다도 이 방안에서나마 결박을 풀고 마음대로 일어나다니며 아픈 허리와 다리운동도 하면서 김주호를 비롯하여 남원수용소에 같이 갇혀있던 동지들과 련계를 취할수 있게 된것이 제일로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배식은 둘이서 하였다. 한사람은 늄밥통을, 다른 사람은 늄국통을 콩크리트바닥으로 들들 끌고다니면서 서서 순서를 기다리다가 깨여진 그릇이면 그릇, 빈 통졸임통이면 통졸임통, 밥보자기면 보자기, 지어는 헌 고무신짝이면 고무신짝을 내미는 사람들에게 밥 한주걱 떠놓아주고 뒤이어 거기에 맨 소금국을 부어주거나 적시여주는 식으로 하였다. 첫날 아침 배식시간이였다. 그는 한사람한사람의 굶주려 피기 잃은 죄수들의 얼굴을 여겨보면서 배식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밥이 남아도 안되고 모자라면 더욱 안된다. 그런데 잘 조절하느라고 했지만 처음이다보니 그만 밥장사를 잘못하여 배식당번들이 먹을것은 고사하고 제일 뒤사람이 있는데까지 갈것 같지 못했다. 급해맞은 갑동이 마지막사람이 앉아있는데 가서는 누구인지 쳐다보지도 못하고 나무주걱으로 밥국통밑을 박박 긁어내고있을 때였다. 그것을 보기가 면구했던지 우선우선한 목소리로 점잖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황동무! 이 구호택의 친구에게도 감옥밥 한그릇 주시려는것 같은데 그만하시오. 그러다가 밥국통밑이…》 (구호택의 친구라니?) 그의 입에서 죽은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 깜짝 놀랜 갑동이 밥을 떠주려다말고 쳐다보니 키는 맞춤하고 몸은 실한 편인 유하게 생긴 한사람이 웃음 띤 얼굴로 자기를 내려다보는것이 아닌가. 처음엔 누구나가 다 그랬지만 몰라보게 수척해진데다가 면도질을 한지도 오래 구레나릇이 무성하여 입마저 가리워진 그를 도무지 알아볼수가 없었다. 《내 라근원이요!》 《아니, 그럼 순천 자본가의 아들이라던 저사니한 집안출신인 선전부장동지가?》 《바로 그렇소. 황동무!》 《야아- 이거 라동지!》 그가 체포된것이 가슴아픈속에서도 옛 동지가 그리운 이 감옥에서 전우를 만나게 된 다행스러운 기쁨을 동시에 느끼게되는 그런 심리를 느끼며 갑동은 잡은 손을 놓지 못해하였다. 《정말 뜻밖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요.》 《지금은 여기가 우리 지리산투사들의 상봉지점이기도 하오. 까짓거 저승길도 동무가 있으면 가기 헐하다는데 우리 어디 감옥의 5등밥을 같이 먹어봅시다려. 그러면 이 세월이 끝나던가 일이 나겠지. 헛허허.》 《전쟁시기엔 도군사동원부장으로 공작한다는 소식을 들었댔는데 언제 이리 되였습니까?》 《재입산해서 활동하던중 금년 초에… 큰 자수자 한놈이 나오는 바람에 기백산근거지만이 아니라 우리 도지휘부에서도 큰 손실을 입었댔소.》 《큰 자수자라니요. 정치부에서 일하던 자 아닙니까?》 《옳소. 동무가 어떻게 그걸?》 《남원수용소에 있을 때 <정훈대>대장이 된 그놈에게 걸려들어 한번 당했더랬는데 변절투항하여 총을 거꾸로 돌려댄 자는 원쑤보다 더 무섭다는걸 뼈에 새기게 되였습니다.》 《옳은 말이요. 사실 로영기 그자와 나, 구호택동무는 다 대학 동기동창들이였지. 그런데 극악한 원쑤로 전락된 로영기놈은 지방에 정치공작 내려갔던 나를 밀고하여 적들에게 잡히게 만들지 않았겠소.》 《그렇습니까. 정말 무서운 일이군요. 다 같은 지식인들인 세 동창생들중에 한사람은 전사하고 한사람은 체포되고 하나는 자수 변절하여 적이 되여버리고, 어떻게 그럴수가 있습니까? 글쎄…》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성분투쟁>을 하고있는것이 아니라 명실공히 치렬한 계급투쟁을 하고있는것이 아니겠소. 솔직히 말해서 구호택이 지주의 아들이였지만 한번 힘들게 다져넣은 혁명의 신념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고 고향마을앞의 대나무에 목매달려 죽었소. 그러나 로영기는 중농정도의 농민의 자식이였지만 놈들에게 학살된 아버지까지 배신하고 제 한목숨 살리려고 원쑤들에게 투항하여 악질반동이 되고말지 않았소.》 《그러기에 말입니다.》 그들의 대화는 출입문어구에서 기다리고있던 늙은 옥졸이 《야-이 경상도 문둥아, 배식 다 끝났으면 빨랑빨랑 나오랑께로-》 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더 지속될수가 없었다. 전시 상황에서의 감옥은 무법천지로서 그 《죄수》들의 구성 역시 대단히 복잡했다. 그래서 같은 조선사람들인데도 포과와 외과로 나눈다. 포과는 포로수용소에서 군법을 받고온 죄수들이고 외과는 괴뢰군에서 도적질, 강도질하고서 군법 받고온 죄수들이다. 다시말하여 이곳에서까지도 빨강, 껌정을 구분해가지고 외과에 속한 자들에게 감방장, 소지, 배식당번 등을 다 맡겼는데 그자들은 포과의 사람들을 마구 때려죽여도 상관없는 무법천지 특선을 행사하였다. 한방에서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동작을 할 때에는 각띠를 서로 동여매놓고 감방장의 구령에 의하여 같이 행동해야 한다. 개별동작을 하려고해도 혼자서는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황천길이다. 한사람은 심한 괴혈병환자로서 너무 허리가 아파와서 개별행동으로 허리폄 한번 했다가 옥내의 심부름군에 지나지 않는 소지 장대성이란 자에게 맞아죽었다. 이곳 형무소장으로는 여러명이 바뀌여오군 했는데 그중 제일 악질이 최학봉이라는 자였다. 생긴것은 마치 펭긴새모양, 얼마나 살이쪄서 배가 나왔던지 자기자신이 고개를 못돌려 옆을 잘 돌아보지 못하고 자기에게 달린 아래의 고치도 천상 보지 못했다는 놈, 그저 먹는것과 사람잡이밖에는 모르는 인간추물이다. 최학봉은 형무소에 온 첫 부임사에서 《개자식들, 뭘 동물원의 기린 구경하듯 빤히 쳐다봐? 모두 고개 숙엿! 너희들은 어느 놈이건 내 총 한방이면 다야. 내 명령 일하일시에 움직이지 않는자는 무슨 계호과장이요, 의무과장이요 그 이하 옥졸이고 다 없다는걸 알란 말이야. 알았어?》 하고 호통질부터 친 자였다. 한번은 얼음우로 오리들이 맨발로 다니는걸 보고는 《죄수들도 훈련시키면 저렇게 돼.》라고 떠벌였고 감옥에 속한 공장을 순시하다가 로에서 쇠물이 지글지글 끓고있는것을 보고는 《저기다가 한번 사람을 넣고 끓여봤으면, 아마 그렇게 하는걸 보이면 전향하지 않을 놈이 없을거야. 흐엇헛허.》 하고 너털웃음까지 친 놈, 하여튼 사람으로서 인간다운 점이란 하나도 찾을것이 없고 맨 나쁜것, 악독성, 광포성만 가지고있는 도이췰란드 히틀러파시스트 같은 자였다. 놈은 그 무지막지한 포악에다 교활하기란 참 여우가 와서 울고갈 정도였다. 이 형무소에는 외국사람들과 사회사람들이 끊길 사이없이 드나들며 사진도 많이 찍어가군 했는데 그런 날에는 그래도 밥에다 염칼치며 썩은 동태 등 생선국맛이라도 볼수 있었다. 어떤 땐 최학봉이도 가끔 외국인들과 같이 따라 들어오는데 그 펭긴새같이 뚱기적뚱기적 걷는 주제에 쵤영기렌즈만 앞에 들이대면 제법 연기를 하면서 코물까지 떨구며 노죽을 피우는데는 죄수들도 그 모양을 보고 혀를 찰 정도였다. 《여기에 갇혀서 신고하고계시는분들을 보면서 저는 같은 동포로서 부끄러워지면서 생각되는게 많아요. 여러분들을 다 밖에 출소를 시킬려고 노력은 해보는데 잘 안되여. 정말이지 어떨 때에는 집에서 저 사람들의 처자와 어머니들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들 있을게라 생각하면 가심이 다 씨리고 눈물이 다…》 하면서 훌쩍훌쩍 눈물까지 흘리면서 온갖 노죽을 다 피울 때 같아서는 당장 형무소 소장노릇이라도 그만둘것 같이 굴었다. 그러다가도 《참관》왔던 외국인들이 나가기 바쁘게 언제 울었던가 싶게 철창속의 죄수들을 노려보면서 이렇게 내뱉군 했다. 《엥이, 이놈의 노릇도 덴질러워서… 야, 뭣들 내다 봐? 너희덜 <빨갱이>귀신 같은것들 보기만 해도 이 눈에서 불이 나, 불이…》 연극 한장면을 논 그자는 자기도 그래놓고보니 별스러운지 뚱기적거리면서 퇴장해버리고 마는것이였다. 그 불한당인 최학봉놈의 지시에 의하여 매일 오후 3시부터 4시사이에는 꼭꼭 도살장에서 소나 돼지를 빼가듯 몇명씩 뽑아간다. (이번에는 누구의 차례일가? 혹시는 내가 아닐가? 아, 차라리 사람의 간 말리우지 말고 내다 죽이던지…) 이렇게 노상 속들을 바질바질 태우는지라, 여러사람들이 벌써 고혈압, 정신이상, 실신, 심장마비에 걸려 병신이 되였거나 미쳐 죽어버리는 참사들이 비일비재로 벌어지군 했다. 살아있는 사람들중에도 적탄에 팔, 다리를 잃었거나 포탄파편에 맞아 턱이 떨어지고 나팜탄에 화상을 입어 코와 귀가 다 타서 오그라붙은 비참한 전상자, 장해자, 로약자, 병약자들이 많았다. 그래도 그들을 서로서로 도와 살릴수 있었던것은 이런 죽음의 소굴에서도 상처입지도 죽지도 않고 눈밑의 푸른 잔디처럼 파릇파릇 살아있는 아름다운 인간들의 마음인 순결한 동지애였다. 피바다 광주수용소 그 살벌한 속에서도 꿋꿋이 자기의 리념, 자기의 인간성을 고수한 훌륭한 애국투사들도 많았으니 그중에는 황갑동이 입산투쟁시기부터 잘 알고있는 가명 최동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인술의 의사, 빨찌산의 의사였다. 6.25전쟁시기 재입산한 최동무는 거창군 북상면 월성마을에다 병원을 두고 덕유산 전북 백운산, 기백산을 침식도 제때에 못하고 직접 다니면서 사심없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수많은 환자들을 구원했었다. 그후 그는 경상남도지휘부가 51년 말경 지리산으로 이동해가고 농골마을에 남았을 때, 그 어렵고 험난한 대공세 때에도 많은 부상자, 재귀열병환자들을 식량도 약도 떨어지고 련락도 두절된 환경에서도 혹서혹한을 무릅쓰고 발이 닳도록 찾아다니며 치료하여 살려냈다. 가장 어려운 시절 련락과에 식량과 약품을 보관해달라고 가져온적이 있어서 황갑동은 그때부터 그와 가까이 알게되였던것이다. 함께 지내는 날까지 고락을 같이 하다가 갑동이도 이동이 빈번하였고 더구나 재귀열병으로 환자아지트에 가있다가 체포된후 이번에 광주수용소에서 불행한 상봉이 된것이다. 그가 유격대의 유명한 군의였다는것을 아는 사람은 황갑동이 외에는 별반 없었다. 설사 안다고 하여도 체포될 때 다 빼앗기고 청진기와 체온계, 핀세트와 가위, 수술칼을 비롯한 치료기구는 고사하고 감기약 한알 없는 의사가 감옥안에 갇혀있어가지고 무슨 맥을 추겠는가. 그래서 최의사는 주위에 각종 병으로 앓는 환자들이 많은것을 안타까와 하면서도 속수무책으로 그냥 맥을 놓고있는 판이였다. 어느날 황갑동은 기회를 보아 그를 조용히 만났다. 《…최선생, 지금 2가사는 물론이고 우리 1방에만 해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치료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숨지고있습니까, 선생은 그래도 의사인데 이거 무슨 방도가 없겠습니까?》 《나도 거기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은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총없는 병사처럼 침 한대 가진것 없이 철창속에 꼼짝 못하고 같이 갇혀있는 내가 무슨 의사겠소.》 《그러나 이런 악조건에서 맨 손가락침을 가지고서라도 병으로 앓고있는 동지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애쓰는것이 우리 빨찌산의 군의가 아니겠습니까.》 《글쎄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렇지 않아도 거친 식사로 위가 몹시 상해서 고생하는 동지들도 많은데 통침이나 하다 못해 대침 몇대만 있어도 위병쯤이야 못고쳐주겠습니까.》 의사의 그 이야기틀 듣고 무엇인가 혼자 깊이 생각하고있던 갑동이 신중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러니 침만 있으면 맥 놓지않고 일어나 환자치료에 달라붙을수 있다는거지요?》 《그러문요. 그렇지만 침을 어디서 구해오겠어요.》 《그건 저한테 맡기십시오.》 황갑동의 말에는 그 어떤 결심이 어려있었다. 다음날부터 그는 어디서 구해들여왔는지 굵은 동선과 강쇠줄을 콩크리트바닥에 대고 갈아서 침을 만들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역사질을 하고있는 그를 보고 최의사가 말했다. 《그렇게 해서 송곳도 아닌 맷맷한 침대를 어떻게 만든다고 그럽니까?》 《이런 말을 못들었습니까. 전에 리현상선생이 그러는데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재봉대원들은 군복을 짓다가 재봉침바늘이 그만 부러져나가자 대바늘을 가지고 실을 꿰는 귀가 있어야 하는 세밀한 재봉침바늘까지 만들어썼다고 하는데 아무렴 그저 꼿꼿한 침이야 못만들겠습니까.》 황갑동이 손가락이 에워져 피가 다 나오는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사코 침대를 만드느라고 신고하는것을 본 옆사람들까지도 하나 둘 일손을 잡기 시작했다. 그들은 최의사의 기술지도를 받아가면서 얼마후에는 제법 몇대의 침을 완성해낼수가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침은 화염소독올 거쳐 곧 치료에 리용되였다. 원래 명의인 최의사의 치료효과는 매우 좋았다. 그가 침을 잘 놓는다는 소문은 곧 온 형무소내에 퍼져 전옥들과 그 가족들의 관심사로 되여 불리워다니게끔 되였다. 명의가 났다는 그 소문을 듣고 지어는 형무소장의 병다리녀편네까지도 침 맞으러다니는 판이였다. 형무소내의 인정을 받게된 최의사는 얼마후에는 당국자들이 골치를 앓고있는 문제의 하나인 죄수들에 대한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소내의 작은 병원(병원이래야 빈 창고건물을 하나 내여 꾸린것이지만)을 《개설》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인간의 정신적인 재부중에서 제일 귀중한것이 사람의 가슴속 진정이였으니 최의사가 환자들을 대하는 자세를 보고 그 병원에 갔다오는 사람마다 칭찬이 자자하였다. 매일 곶감꼬챙이에서 곶감 빼가듯 사람들을 하나하나 데려내다가 총살하는 바람에 그 정신적고통과 조바심에서 피가 바짝바짝 마르다못해 심장이 마비되여 최후죽음 직전에 달한 사람이 생겼다는 소리만 들리면 벌써 어디선가 최의사가 달려오군 했다. 이미 식음은 전페하고 식사는 그대로 나가고 숨도 못쉬고 몸이 서늘해지면서 금시 죽게 된 동지들도 그는 인공호흡을 시켜준다. 반드시 눕힌 자세로 팔과 다리를 우로 하고 전신을 주물러 피를 심장으로 모아주는 최종방법을 쓴다. 형무소에는 영양부족과 신체허약으로 결핵환자들이 많았다. 결핵환자들, 특히 개방성인 경우에는 천대가 막심하여 간수들도 마주서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으며 한 감방안 사람들조차도 곁에서 함께 식사하거나 같이 자는것을 꺼려하였다. 그렇지만 최의사만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접근하여 치료해주었으며 지어는 각혈을 하여 피를 토하는 말기 결핵환자들까지도 자기 몸을 적셔가면서 극진한 치료를 주어 환자들을 울리군 하였다. 《최선생님, 욜리로 오지 마십시오. 나는 개방성이라서 그 구멍으로 균이 막… 그러다가 의사선생님꺼정 결핵에 걸리시면 어떡헙니까. 나는 세상에, 조선사람들중에 최선생님 같은 의사가 있다는걸 알고서 죽는것만도 원이 없음더. 쿨럭 쿨러덕…》 《가만히 누워있어요. 자꾸만 그리 말하면 기침이 더 나고 목구멍으로 피가 더 나요… 나는 내 하나가 그 무서운 결핵에 걸리더라도 광주형무소의 페결핵환자들 병만 다 낫게 할수만 있다면 나의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선상니-임-》 그후 최의사는 그날 자기가 말한 그대로 될줄은 몰랐었다. 그는 형무소생활 초기부터 개방성결핵환자들과 가까이 접촉 치료하면서 그 악질 장대균이 자기의 페를 깊이 침습한것을 몰랐었다. 그가 그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자기의 페장에도 공동이 생긴 뒤였다. 그러나 의사인 그는 남의 병들을 다 돌아가면서 치료해주었지만 의사의 병을 낫게해주는 환자는 없었다. 최의사는 자기의 병을 자기가 아는지라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것을 알았다. 그렇건만 환자들앞에서 절대로 자기가 아프고 괴로운 내색을 하지 않았으며 늘 웃음으로 대해주었다. 그는 근간에 이르러 고열이 나면서 쓰러져 식은땀을 쫙 흘리고나면 다시 일어날 기맥조차 없었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자기 생명의 급박성을 느낄수록 자기 의술과 함께 얼마 남지 않은 그 생명까지도 감옥안의 동지들에게 바치고가자는 고운 마음을 품었던 최의사는 마지막 쓰러지는 순간에조차도 손에서 그 다 헐어 빠진 왕진가방을 놓지 않았다. 어느 날 위중환자가 생겼다는 기별을 받고 급히 달려온 최의사는 이전에 중요한 신문사 주필을 하다가 전선에 나와 포로되였다는것밖에는 알지 못하는 김주호라는 사람을 치료하던중 심한 각혈을 하고 그 자리에 쓰러진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 감옥의 의사, 그야말로 자기의 마지막생명까지도 깎아서 통일혁명의 전위들에게 바치고 간 이 철창속의 천사와도 같은 사람, 그를 눈감겨주며 황갑동은 소리없는 사나이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아! 보석은 진흙탕속에서도 빛을 내는가? 아름다운 사람은 머물고 간 자리만도 아름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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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갑동이네 2가사에는 비록 포로의 불우한 운명에 처하기는 했으나 그 캄캄한 철창속에서도 조국이 자기 어깨우의 금빛견장에 무겁게 달아주었던 그 별을 빛내임으로써 아름다운 청춘의 노래를 부르고 간 이전 인민군소좌 한 동무도 있었다. 이름은 심동섭, 전라남도가 고향이다. 그는 전선동부로 나와서 락동강전투에까지 참가한 사람이다. 후퇴하면서 광주에 있는 집에 잠간 들렸다가 그만 갑자기 시내로 달려든 적들때문에 길이 막혀 북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였다. 당분간은 옴짝 않고 집에 숨어있던 그는 드디여 결심하고 광주교대 후배들속에 들어가서 적후투쟁을 준비했었다. 그러다 탄로되여 체포되였는데 그의 영향과 지도하에 벌어졌던 대학생들의 투쟁을 《교대 대학생침투사건》이라 했었다. 심소좌와 그의 동지 대학생들 20명중 무기수가 3명이고 17명이 최고형을 받고 2가사에 갇혀있으면서 황갑동이네와 마지막까지 운명을 같이하게 되였다. 전 인민군군관인 심동섭이의 지도하에 각성된 그 열혈청년들인 교대학생들의 애국열정, 혁명열정은 대단해 하늘을 찌를듯 했다.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 1기생인 젊은 인민군소좌 심동섭! 그는 머리도 좋고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있었다. 황갑동은 어떻게 하면 그에게서 자신도 배우면서 많은 정치, 철학지식과 공화국북반부에서의 깊은 생활체험을 가지고있는 심소좌를 감옥동지들에 대한 교양에 효과적으로 인입할수 없겠는가 하는 생각이 피뜩 떠올랐다. 그래서 혼자 궁리를 굴려보던 끝에 라근원선전부장과 이전 신문사주필이였던 김주호를 만나 조용히 상론해보았다. 《…저의 생각은 이런데 선전부장동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허, 내야 지리산에서나 선전부장이지 여기서야 무슨 선전부장이겠소. 그저 라동무라고 부르시오.》 원래 산에 있을 때부터 말이 많을것 같으면서도 대중들앞에서 필요한 이야기만을 골라하던 《말이 적은 선전부장》이였던 라근원, 그의 어줍어하는 웃음이 어려있는 소탈한 말에는 그 어떤 자곡지심 비슷한것이 비껴있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산에서 선전부장이면 이 감옥에 와서도 선전부장이 되여야제라.》 갑동이의 말이다. 《그건 나에 대한 일종의 비판이기도 한데. 그건 그렇고. 그러니 심동섭소좌동무를 출연시켜 우리 감방에서 철학강의를 조직해보잔 말이지?》 《예, 저승길을 가는 사람에게도 길량식을 물려준다는데 하물며 고난에 찬 먼 감옥행을 떠난 장기수들에게 정신적인 길량식이라도 주어야 할것이 아닙니까.》 《좋은 생각이요.》 김주호도 찬성을 표시했다. 《출판물은 고사하고 신문 한장 들어오지 못하는 이 절벽강산같은 감옥속에서 아무 사상적량식도 넣어주지 않다가는 모두를 정치문맹자로 만들어버릴수도 있거든요.》 《그래서야 안되지요. 우리 선전일군들이 옆에 살아있어가지고서…》 라근원의 두눈엔 열정의 불꽃이 튀였다. 《말하자면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강의실을 그대로 여기다가 옮겨놓아 이 광주감옥을 또 하나의 혁명대학으로 만들자는거겠소?》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 조선혁명의 실천에 가장 부합되는 새로운 혁명학설이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군님의 존함을 지닌 김일성종합대학출신인 조선인민군 심동섭소좌가 평양에서 안고온 장군님의 그 혁명학설, 그 혁명철학을 여기 감옥투쟁의 실천속에서 완성하여 우리 <광주감옥의 철학>을 하나 창조해보자는것입니다.》 《우리 <광주감옥의 철학>을 하나 창조해본다?! 그것 참 멋있구만. 주호동지, 어떻습니까?》 《그거 정말 흥미있습니다.》 라근원의 말에 김주호는 적극 찬동해나섰다. 이렇듯 함께 손잡고 전향을 강요하는 놈들과 견결히 맞서싸우자는 동지들의 뜻이 모여져 그후 새로 이 감방에 옮겨온 당원들로 광주감옥의 당세포가 무어졌다. 당조직책임자로서는 김주호가, 부책임자로서는 황갑동이가 선출되였는데 빨찌산 선요원출신인 그는 여기 들어와서도 동지와 동지들, 1감방, 1가사와 2가사와의 투쟁련계를 지어주는 련락원의 임무를 겸하여 맡았다. 그리고 선동원으로서는 라근원선전부장이, 학습강사로서는 심동섭소좌가 각각 임명되였다. 세포는 조직 초기부터 얼음장밑의 강물처럼 소리없이 그러나 줄기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문보도일군인 김주호는 세포사업을 문건 하나 없이도 출판물에 찍혀나오는 활자와도 같이 정확하고 뚜렷하게 면밀히 조직해나갔다. 자기를 통일의 심부름군으로 자처하고있는 황갑동은 감옥에 들어와서도 부지런한 그 성미대로 조직의 성실한 심부름군으로 한시도 가만 있지를 않았다. 라근원이도 선동원으로서 조직의 첫 분공을 드팀없이 실행하기 위해 학습강사를 도와 말만 들어도 사람들을 격동시키는 감방에서의 철학강의를 면밀히 준비해나갔다. 벌써부터 흥분된 심동섭소좌는 마치 첫 강의에 출연하는 젊은 대학교수와도 같이 긴장되여 마음속으로 훌륭한 교수안을 작성하기에 골몰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는데 그야말로 그의 열성은 대단하였다. 해방후 위대한 장군님의 존함을 지닌 대학에서 그분의 혁명학설로 무장하고 그이의 손길아래 자라난 그의 온넋은 장군님의 사상, 장군님의 숨결로만 타오르고있었다. 미구하여 첫 강의의 날은 다가오고있었다. 강의장소는 광주감옥 2가사, 강의 날자와 시간은 매일이요, 청강생들은 감방의 교대학생들과 옥중투사들이였다. 강의 출연자는 물론 멋쟁이소좌였다. 강의안은 따로 없었다. 순전히 어느 철학교재에서 앵무새처럼 외워가진 교조가 아니라 평화적인 민주건설시기의 자기 실지 생활체험을 통하여 체득한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의 애민, 애족, 애국사상의 위대성과 령도의 현명성 그리고 전쟁의 불길속, 감옥투쟁의 불길속에서 다시 자기의것으로 완전히 새김질하여 다져넣었던 혁명의 진리가 담겨져있는 그의 강의내용들을 대학생들은 마치 해면이 물을 빨아들이듯 했다. 외과에 속한 괴뢰군페물들, 감방장이며 소지따위들도 눈이 퀭해져 옆에서 가만히 들었으며 지어는 옥졸들까지도 감방문 바깥벽쪽에 보이지 않게 붙어서서 귀동냥을 하는 정도였다. 그는 철학강의를 하나해도 일반론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김일성동지의 위대한 혁명사상의 정당성을 립증하는데로 지향시키군 했다. 한번은 심동섭이 철학의 한가지 문제인 《아름다운것과 숭고한것》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그 실례의 하나로 김일성장군님의 인민적인 정치로 민주가 꽃피는 평양의 대동강반에 뜨는 둥근 달은 아름다운것의 범주에 속할수 있고 동해의 아침에 솟는 붉은 태양은 조선혁명의 위대한 수령을 상징하는 숭고한것의 범주에 든다고 말했을 때였다. 간수부장인 《공산명월》이 나타나더니 제가 뭘 쥐뿔이나 안다고 사이비철학 같은걸 들고 나와서 강의를 파탄시켜보려고 가소로운 물음을 던지였다. 《강사! 그러면 내 한가지 물어봅시다려. 달이 아름다운것의 범주에 든다고하였는데 거럼 … 저 하늘의 달이 밝아서 밝으냐? 아니면 사람들이 밝다고 봐서 밝으냐? 이에 대하여 한번 답변주어보시오. 쉽지 않은 문제의 제시인데 이에 대한 명철한 대답을 주며는 앞으로도 말장난인 그 철학강의만은 심심풀이로 하도록 승인을 하겠소.》 심동섭은 순간은 좀 당황한 기색이였다. 처음엔 얼떨떨해지는, 대답하기 말짼 질문이였던것이다. 그러나 《공산명월》의 쭉 벗어진 대머리를 보는 다음 순간 피뜩 떠오르는 한가지 비교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 답변에 앞서 내가 먼저 한가지 물어볼랍니다. 간수부장님 보고 모두 <공산명월, 공산명월>하는데요, 진짜 <공산명월>이여서 <공산명월>이라고 하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공산명월>이라고 봐서 <공산명월>인지 그것을 한번 말해보시지요?》 《뭣이라구?》 《거기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얻으면 아까 당신이 했던 그 묘한 질문에 대한 답이 저절로 나올것인즉 거 자기 이마에 늘 떠이고다니는 그 <공산명월>에 대고나 물어보시지요…》 (아이코, 내사 또 한꼴 먼저 먹었군. 이놈의 《공산명월》때문에…) 하고 그자가 자기도 모르게 오른손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딱- 하고 치는 바람에 수인들은 물론 그것을 듣고있던 옥졸들까지도 소리내여 웃음통을 터뜨렸다. 그날 심소좌에게서 톡톡히 망신당하고 그믐달같이 사라져버렸던 《공산명월》은 다시는 철학강의를 하는데 나타나지 못했다. 소좌 심동섭강사는 총살당하는 날 사형장에 나가는 마지막순간까지도 자기의 철학강의를 끊지 않아 감방안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제가 앞에서 이미 설명한바와 같이 온갖 모순은 온갖 대립물의 호상투쟁의 방법으로만 해결되며 따라서 투쟁은 발전의 동력이며 원천으로 되는것입니다. 이 대립물의 투쟁은 한 대립물이 다른 대립물에 대하여 승리하는것으로써 완결되는데 그것 역시 일자의 부정과 타자의 긍정을 의미하는것입니다. 다시말하여 이 부정의 부정의 변증법적법칙은 발전의 법칙으로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가장 심오하게 작용하는 사회현상이 바로 낡고 반동적인것을 때려부시고 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혁명투쟁인것입니다.》 그는 억양을 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초기혁명활동시기에 벌써 우리 나라의 사회경제적형편과 민족적 및 계급적모순을 과학적으로 통찰하신데 기초하시여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시고 일제와 지주, 자본가계급을 반대하는 반일혁명투쟁을 조직령도하시여 마침내 조국의 해방을 이룩하시고 새 조선건설에 들어설수 있게 하시였던것입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 남조선혁명의 성격에 대하여서는 미제국주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민족해방혁명인 동시에 미제의 앞잡이들인 지주, 매판자본가, 반동관료배들과 그들의 파쑈통치를 반대하는 인민민주주의혁명이라고 규정하시면서 조국의 통일과 남조선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전체 인민들을 총 궐기시켰던것입니다. 동지들! 이 지구가 돌아가고있는 한 투쟁은 계속될것입니다. 애국을 가두고 민주에 몽둥이질을 해대고 자유를 목눌러 질식해죽여버리는 여기 감옥이야말로 언제인가는 이 세상에서 다 완전폭파시켜버려야 할 집중된 모순의 큰 덩어리, 대립물의 투쟁의 총체인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비록 철창속에 들어와있어도 자기의 마음을 좁은 감옥에 가두고살지 않는 자는 투쟁에서 자유로운것입니다. 그 자유를 자기것으로 만들려거든 가만히 앉아서 매만 맞지 말고 일어나 싸워 통일성업을 반드시 이룩해야 합니다.》 감방속에서 심동섭의 철학강의가 계속되고있던 당시 광주시내 정세는 매우 긴장되여있었다. 산에 남아 있던 빨찌산들이 수용소내의 동지들을 생각하며 3일이 멀다하게 기차전복투쟁 등을 끊임없이 벌리고있었다. 이에 겁을 먹은 적들은 《백일헌병대》와 공병대 등 무력을 총동원하여 매일밤 련 45일간을 땅크와 장갑차로 형무소주위와 온 시내를 돌면서 전쟁터를 방불케 만들어 시민들을 공포분위기속에 몰아넣었던것이다. 이러한 최대의 공포와 긴장된 정세속에서 바로 형무소탈출사건이 있었다. 어느날 저녁 배식하는 시간이였다. 1방과 2방문을 동시에 따놓고 한창 배식들을 하는데 1방에서 먼저 평소에 사람들을 괴롭히던 악질감방장 소지 장대성이놈을 크고 투박한 수정으로 머리를 까는 동시에 와- 하는 함성과 함께 1방과 2방이 모두 뛰쳐났는데 그 일부만이 빠져나갈수 있었다. 그나마도 놈들이 경찰대와 광주에 상주시키고있던 《백일헌병대》를 내몰아 일시에 추격, 수색하는 바람에 더러는 잡히여 죽도록 매맞고 도로 형무소로 끌리여들어오게 되였다. 그때 심소좌는 그날 탈출사건의 앞장에 섰던 젊은 대학생들을 데리고 탈옥에 성공했다. 그들이 며칠이 지나도 다시 잡혀들어오지 않는것을 보고 황갑동이를 비롯한 감방내 동지들은 천만다행한 일로 생각했으며 제일처럼 기뻐했다. 그 흥미있던 철학강의를 마저 받지 못하고 헤여지게 된 아쉬운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였다. 남반부출신 대학생으로서 통일의 길에 나섰던 의로운 전사인 그가 이제는 살아서 자기네 인민군대오를 찾아갈수 있게 되였고 전쟁이 승리하면 다시 대학에 돌아가 그리운 어버이장군님의 품에 안겨 공부를 계속할수 있는 행복과 영광을 지닐수 있게 된것이 감방전우들로서는 축복해줄만한 일이였던것이다. 그런데 그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심소좌는 탈출후 자기혼자 어디에 가서 안전한데 숨어서 은신생활을 하며 구차하게 제 목숨이나 부지할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서 대오로, 대학으로 돌아가는 그 길이 아니라 죽어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놈들과 싸우는 투쟁의 길을 택했던것이다. 심동섭은 자기가 데리고 탈출했던 교대학생들과 그의 동무들을 다시 규합하고 경찰과 《백일헌병대》에 줄이 있는 학생들의 가족들과도 긴밀한 련계를 가지고 무장획득공작을 시도했던것이다. 그래서 무장을 갖추어가지고는 그 확대된 력량으로 어느 적당한 기회를 타서 불의에 형무소라도 들이쳐서 감방동지들을 구원해낸다던가 정 그럴 형편이 못된다면 대오를 이끌고 지리산으로 올라가 투쟁을 계속하자는것이였다. 그런데 그의 결심은 제대로 실현될수가 없었다. 무기공작도중에 더러 발각되는 바람에 같이 탈출했던 몇몇 대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심소좌 이하 나머지 성원들은 그만 체포되여 다시 형무소로 끌리워들어오게 되였던것이다. 이 죽음의 감옥에서 천신만고 다 겪다가 겨우 살아나가 자유를 얻는가 싶었던 심동섭이를 비롯한 교대학생들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여 다시 자기네 감방으로 끌려들어오는것을 본 황갑동은 심히 놀라지 않을수 없었으며 분함을 이기지 못해했다. 잠들수 없는 어느 날 밤 갑동은 한쪽 벽에 등을 기대이고앉아서 깊은 상념에 잠겨있는 심동섭에게로 다가앉으며 조용히 물었다. 《심동지, 대관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는 그래도 지금쯤은 함께 탈출한 대학생들을 데리고 어디 산속깊이 들어가 은신할수 있는 안전한 자리를 잡았던가 산에서 싸우고있는 동지들을 찾아서 올라갔을것이라고 생각했더랬습니다.》 《그랬겠지요.》 《살자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살수 있는 길이 있었겠는데 왜 멀리 떠나지 않고 잘못하다가는 다시 잡혀 감옥으로 들어올수도 있는 이 길을 택했습니까?》 심동섭은 그의 물음에 입술이 다 터진 입가에 웃음을 물고 조용히 대답하는것이였다. 《내가 아니라 이 감방에 있는 다른 동지들이 형무소에서 탈출했다고 해도 다 그렇게 했을겁니다.》 《아니 누구나 다 그렇게 행동할수 있는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그에 대한 간답을 드린다면 물론 나는 이 감옥속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 대학생동무들과 같이 사생결단으로 형무소를 뛰쳐나갔던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던지 기어이 살아서 다시 김일성장군님의 존함으로 그 영광 빛나는 종합대학으로 돌아가며 그리운 어버이장군님의 품에 안기고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장군님께서 그처럼 바라시는 조국통일의 성스러운 길에 청춘도 생명도 다 바치며 피 한방울이 남을 때까지 통일을 위해서 싸우는것, 바로 이것이 나라없던 지난 날 식민지청년의 서러움을 안고 서울에서 고학을 하던 가난한 집 자식인 저를 서울법정학교의 다른 학생들과 함께 평양에 부르시여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맘껏 공부할수 있게 해주신 고마운 어버이장군님의 크나큰 은덕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였습니다.》 《아, 그러니 8.15직후까지는 서울법정학교를 다니다가 평양으로?》 《예,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일을 잊을수 없습니다.》 심동섭은 깊은 회억에 잠겼다가 그때를 떠올리며 조용히 말을 시작했다. 《…해방직후 매국역적 리승만은 미제의 지령을 받고 북을 동경하며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앞장에 나섰던 청년학생들의 애국적인 진출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으며 <무허가학교페쇄령>이라는것을 내렸던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법정학교도 강제해산 당했으며 학생들은 배움의 길을 잃고 헤매게 되였습니다. 그때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청년이였던 저는 의분감을 안고 한 량심적인 젊은 교원과 함께 어느 날 밤에 38선을 넘어 그리운 장군님을 찾아 평양으로 가게되였습니다. 새 조선건설의 그 바쁘신 나날에도 저희들을 친히 만나주신 장군님께서는 미군정청이 <무허가학교페쇄령>과 <국립서울대학교안>이라는것을 조작하여 진보적경향이 강한 서울법정학교와 수많은 사립학교들을 강제적으로 페쇄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학원의 자유를 말살하고 식민지노예교육을 강요하고있다는 교원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몹시 안색을 흐리시였습니다. 어버이장군님께서는 남조선청년학생들이 학원의 자유와 사회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하는것은 응당한 일이라고 하시면서 지금 서울법정학교 학생들이 북조선에 들어와 공부할것을 희망하고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좋은 일이라고, 우리는 남조선의 청년학생들이 북조선에 들어와서 공부하는것을 환영한다고 하시였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그날 저희들에게 이런 은정깊은 말씀을 해주시였습니다. <동무들은 빨리 서울에 나가 학생들을 데려와야 하겠습니다. 동무들이 서울에 나가 학생들을 인차 데려올수 있도록 필요한 대책을 세우겠습니다. 우리는 북조선에 들어와 공부하는 학생들이 학습과 생활에서 불편이 없도록 할것입니다.> 당시 렬차가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있다는 사실을 아신 장군님께서는 평양역장에게 전화를 거시여 따로 특별히 기관차를 하나 내서라도 저희들을 태워 보내라고 지시하시였습니다. 그 잊을수 없는 날 장군님께서 내여주신 그 기관차는 배움의 길을 잃고서 서러움에 울고있던 남녘의 모든 학생청년들을 사랑과 믿음으로 민주의 수도 평양에 불러주시는 이 세상에 다시 없는 특별렬차라고 할수 있을것입니다.》 《!》 《우리는 장군님께서 내여주신 그 특별렬차를 타고나가서 법정학교의 남녀학생들을 데리고 38선을 다시 넘어 평양에 오게 되였습니다.》 심소좌는 못내 감동을 금치못해하는 황갑동에게 그후의 가슴 뜨거운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이전 서울법정학교 학생들이 희망에 따라 김일성종합대학에 편입되여 공부하게 되였던 어느 날이였다. 위대한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종합대학을 찾으시여 서울법정학교를 다니다가 와서 대학에서 맘껏 공부하고있는 학생들을 만나시여 뜨거운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어디 앓는 동무들은 없는가, 학습과 생활에서 애로는 없는가고 다정히 물으시였으며 동무들이 남조선에 집이 있으니 방학이 되거나 명절이 되여도 어디 갈데가 없겠는데 우리 집으로 찾아들 오라고, 후에 동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생활하면서 시집, 장가를 가게 될 때에도 나에게 꼭 알리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나는 위대한 어버이수령님께서 배움의 길을 잃고 절망에 빠졌던 우리 서울법정학교 학생들을 부르시여 따뜻한 사랑의 품에 안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훌륭한 민족간부로 자라나도록 세심한 관심과 특별한 배려를 돌려주시던 그 행복한 나날의 일들을 영원히 잊을수가 없습니다.》 《…》 심소좌의 그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아직 공화국북반부에 가본적도 없으며 그 언제한번 자애로운 어버이장군님을 몸 가까이 만나뵈온 일도 없는 황갑동은 심동섭이 한없이 부러웠으며 신음하는 남녘의 인민들과 놈들과 싸우고있는 남조선청년들을 한시도 잊지 않고계신다는 장군님이 끝없이 그립고 그리워 지는것이였다. 《심동지! 저도 희망을 가지고 살며 싸우겠습니다. 어떻게 하던지 굴함없이 놈들과 끝까지 싸워 이긴 승리자의 떳떳한 자랑을 안고 통일되는 날 평양으로 달려가 위대한 어버이장군님을 꼭 만나뵈옵고 우리 남녘형제들과 통일애국투사들의 뜨거운 마음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그때로부터 황갑동은 심동섭소좌의 강의를 받을 때마다 한없이 인자하신 장군님의 영상을 눈앞에 떠올리군 하였다. 그러나 놈들은 남녘땅의 캄캄한 철창속 사람들에게도 위대한 장군님의 밝은 빛발을 가슴마다에 안겨주기 위해 매일 위험을 무릅쓰고 짧으나 내용 깊은 철학강의를 계속하고있는 심동섭소좌를 오래 살려두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감방안 사람들에게 장군님께서 1945년 12월 29일 서울신문 기자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신 의의깊고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주고있었다. 《…그 바쁘신 시간을 내시여 서울신문 기자들을 친히 만나시여 동포애의 정 넘치는 담화를 하시던 장군님께서는 한 기자가 일어나 장군님의 사진을 한장 주실수 없겠는가고 묻자 웃으시며 …사진은 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사진이 정 요구된다면 있는가 알아보고 주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겸손히 대답하시였습니다. 다른 기자가 자리를 일어 장군님께서 남조선인민들에게 전하실 말씀은 없으신가고 물었을 때 그이께서는 한동안 무거이 앉아계시다가 생각깊이 대답하시였습니다. <당신들이 남조선에 돌아가면 인민들에게 나의 열렬한 인사를 전하여주기 바랍니다. 나의 몸은 비록 여기에 있으나 마음은 언제나 남조선인민들과 함께 있습니다. 북조선인민들은 인민주권을 세우고 새 생활을 창조하기 위하여 투쟁하고있으며 남조선겨레들과 굳게 손잡고 단합된 힘으로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할것을 원하고있습니다. 남조선동포형제자매들에게 통일적민주주의정부를 하루빨리 수립하기 위하여 힘차게 싸워달라는것을 전하여주기 바랍니다.> 그이께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장군님께서는 북녘하늘아래 멀리 평양에 계시지만 그이는 어제도 오늘도 언제나 남조선인민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심소좌가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였다. 《가만! 사형수 심동섭, 강의 중지!》 《공산명월》이라는 자가 와서 소리치는 바람에 강의는 중단되였다. 심동섭은 사형장으로 끌려나가면서도 굴함없이, 의젓한 태도로 마지막강의를 계속하는것이였다. 《동지들! 우리의 감옥투쟁은 투쟁을 위한 투쟁인것이 아니라 위대한 장군님의 조국통일방침을 높이 받들고 나라의 통일을 위한 투쟁, 새 력사을 위한 투쟁인것입니다. 제가 없어도 위대한 장군님의 혁명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하기 위한 학습을 지어는 피를 흘리면서라도 계속해주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시간과 공간속에 존재하는 이 세상의 모든 선하고 착하며 바르고 정의로우며 아름답고 숭고한것을 살리기 위한 성스러운 싸움, 통일을 위한 치렬한 격투에서 끝까지 견디여내는 승리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 채 끝맺지 못한 나의 강의를 이로써 마칩니다. 마지막까지 들어주어 감사합니다. 동지들! 안녕히-》 《심동지!》 황갑동은 목메여 불렀다. 심동섭은 황갑동에게로 돌아서며 우정에 넘친 어조로 말했다. 《황동지! 나는 먼저 갑니다. 앞으로 통일이 되면 같이 평양에 가서 모란봉에도 함께 오르고 대동강반도 거닐어보며 우리 김일성종합대학도 한번 참관시켜드리려고 했는데 영별의 시각이 왔구만요.》 《아, 우리가 이렇게 헤여져야 합니까…》 동섭소좌는 무엇인가 그에게 남기고 갈만한것이 없을가 생각하다가 자기의 솜저고리를 벗어서 영문을 몰라하는 황갑동이의 손에 들리여주었다. 《왜 황동지는 고향집의 어머니에게 기별을 하지 않습니까. 그 홑옷을 입고야 어떻게 감방에서 겨울을 나겠습니까. 이걸 입으십시오.》 《나에게 그걸 주고나면 동지는 어떻게 합니까.》 《나야 이제 곧 저승으로 갈 사람인데 거기에 가면 이 락동강소좌에게 덧저고리 하나야 입으라고 주겠지요. 헛허허.》 그는 껄껄 소리내여 웃었다. 심동섭은 다른 감방동지들과도 그 열정에 불타는 눈길로 작별인사를 나누고는 인민군군관답게 정바르고 떳떳한 자세로 사형장으로 걸어나갔다. 원래 사람이 키도 훤칠, 인물도 잘났으며 영민하고 씩씩했던 멋쟁이청년 소좌! 고향은 여기 남녘땅이였지만 마음의 고향을 북녘땅에 두고와 그리도 공화국의 품을 잊지 못해하며 이 어두운 철창속 사람들에게도 장군님의 따사로운 해발을 안겨주려고 강의록이 없는 철학강의를 마지막까지 계속했던 종합대학출신, 조선인민군 군관 심동섭! 그는 황갑동이의 망막속에 또 하나 아름다운 정신의 승리자로 뜨겁게 새겨져 굴함을 모르는 감옥투사, 비전향수로 성장하는 길에서 만났다 잊을수 없는 동지로 되였던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