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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강화학공장 지배인 차웅섭은 저녁어스름이 깃든 강변에 허리꺾인 나무등걸처럼 서있었다. 그는 도당위원회청사 마당에 바래주러나온 한만규책임비서가 굳이 자기 승용차를 태워주어 이곳 강변에 와서 내렸다. 운전사가 미안해할것이 없다고 하며 집에까지 실어다주겠다는것을 그만두게 했다. 아무데도 가고싶지 않았다. 인제는 공장도 집도 그의 보금자리는 못되였다. 그리고 도당책임비서방에서부터 줄곧 참고있던 담배를 피우고싶었다. 그는 강변 풀밭에 서서 헐렁한 《제비》곽을 꺼내여 한가치 불을 붙이자 게걸스레 들이빨았다. 한오리 연기마저 그대로 날려버리지 않고 탐욕스레 마셔 페장을 기껏 그슬리고서야 슴슴해진 연기를 내뿜었다. 벌써 손끝이 따가와나는걸 보니 담배 한가치가 다 탔다. 차웅섭은 다시 주머니의 《제비》곽에서 한가치 꺼내여 꽁초로 불을 달았다. 연거퍼 두대를 피우고나니 답답하던 가슴이 좀 열리는것 같았다. 그는 풀숲에 가리운 강변길쪽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서늘한 물비린내가 떠도는 강녘에서 사람들 몇이 강바닥의 물때 올라 미끄러운 돌을 들어내여 물길을 내고 담을 쌓고있다. 살을 대는것이다. 황어의 산란기이다. 금년은 절기가 늦어 봄철날씨가 겨울맞잡이로 춥고 변덕스러웠다. 그래서 황어들이 례년보다 달포나 늦게 오르기 시작했다. 낮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벼랑밑의 푸른 소에서 실컷 쉬고난 황어들은 어둡기만 하면 물살을 맞받아 찬물이 내려오는 상류를 바라고 끊임없이 오른다. 새끼고기때의 보금자리인 강상류에 다시금 후대를 남기려고 사품치는 물결도 위험도 아랑곳않고 유전적본능의 요구대로 결사적으로 헤염쳐오른다. 차웅섭은 자라굽이 여울탁쪽을 선망의 쓸쓸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센 물살에 떠밀려내리지 않도록 큰 돌들로 담을 쌓아놓은 그곳은 지금 누구도 《가로채지》 못하고 비여있을것이다. 자라굽이 여울탁이 고기잡이질군인 그의 자리라는것은 북천강의 천렵군들이 다 아는터이다. 이제 좀더 어두워지면 풀덤불위장물뒤에 작살을 쥐고 숨어있다가 버들살우에 떨어져 뒤채는 얼뜬한 황어를 재빨리 찔러낼수 있을것이다. 강녘에서 삭정이불을 피워 고추장을 푼 남비에 끓인 황어탕은 얼마나 구수했던가. 달밤의 황어잡이… 랑만적인데가 있는 그 이채로운 생활도 이제는 한갖 추억으로 되여버렸다. 그의 인생초불은 이미 꺼진것이다. 마지막 꽁다리 초심지의 빨간 불찌에서는 허약한 실연기가 피여오를뿐이다. 기력이 없는 그 생명의 불찌는 더는 사위를 밝히지 못하고 서서히 꺼져간다. 쉰여덟살에 인생이 끝나다니!… 진정 로쇠인가? 과오인가?… 차웅섭의 내부심리는 아직도 의문과 불만을 안고 강렬히 도전하고있었다. 어찌하여 자기는 한만규가 아들이 있는 평북도에 가는게 어떤가고 의향을 물을 때 선선히 동의했던가. 나이도 많고… 지배인사업도 힘에 부치고… 집에는 돌봐줄 사람도 없으니… 인제는 아들이 있는곳에 가서 몸에 맞는 일을 하는게 좋겠다는것이다. 인정이 풍기는 도당책임비서의 권고에 차웅섭은 감동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가슴이 아파났다. 인제는 자신이 그렇게 쓸모없는 인간이 되였다는 무서운 자각이 마음의 금선을 찡하니 울린것이다. 쓰라린 비애의 감정에 잇달아 강한 불만과 반발심이 솟구쳐올랐다. 어째서 화학공업부장과 도당책임비서가 자기를 떼던지는가? 그들의 처사가 가혹한것인가, 아니면 응당 감수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필연적인 조치인가… 차웅섭은 지난일을 곰곰히 되새겨보았다. 달포전 그날, 흥남비료련합기업소 문화회관에서는 도내 화학공업부문 산하 공장, 기업소 일군들의 생산협의회가 열리였다. 오전 9시였다. 간소하게 꾸린 집행석에는 허상민과 도당책임비서 한만규 그리고 금년에 들어와서 그만하면 생산을 높은 수준에서 내밀고있는 비날론련합기업소 지배인이 앉았다. 객석은 화학공업지구의 크고작은 공장, 기업소 지배인, 당비서들과 생산참모일군들, 중요 직장장들까지 참가하고보니 꽉 들어찼다. 시비년도 비료생산과제를 회복할 가망이 보이지 않는 흥남비료련합기업소문제가 중심과녁이였다. 비날론과 기초화학물질들, 중소화학제품 생산문제는 그다음이였다. 인민경제대학 재직반에 간 지배인을 대신하여 연탁에 나간 비료련합기업소 기사장은 변명을 얼마 하지도 못하고 비료생산물계를 손금보듯 알고있는 허상민한테서 사정없이 추궁을 당하느라 등곬이 축축하도록 땀에 젖었다. 다리맥이 빠지게 서있던 기사장은 손수건을 꺼내여 안경을 벗고 혈색이 좋지 않은 길쑴한 얼굴에 내돋은 진땀방울을 닦았다. 동정심을 자아내는 거동이였으나 화학공업부장의 추궁은 끈덕지였다. 《기사장동무, 고장난 3호발생로는 어떻게 됐소? 수리가 돼가오?》 《아직… 못했습니다.》 《못했다. 부에다 보수기일을 언제까지 냈소?》 《2월말까지입니다.》 기사장의 대답은 그닥 주눅이 들어보이지 않는다. 《저런! 대답이 쉽게 나오는구만. 발생로보수가 지연된건 잘못이 없다는거겠소?》 《우리로서는 할것을 다했습니다. 부장동지, 보수용강재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업무부지배인동무가 몇번이나 황철에 갔댔지만 매번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기사장의 대답에는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는 반발심이 섞여있었다. 《들어가시오. 강재문제는 따로 보겠소.》 허상민은 쓰거운듯 이마살을 찡그리고 퉁명스레 한마디 던졌다. 연탁이 비자 객석의 공장, 기업소 일군들은 될수록 집행부쪽과 눈길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였다. 비료를 비롯하여 도내 화학공업부문의 생산이 떨어진 책임을 론하는 이 마당에서 누구든 또 한사람 연탁에 올라서야 하는것이다. 허상민은 벌써 그 비판대상을 찾아내려고 생산수자와 자료들이 적힌 문건을 번져본다. 그리고는 앞탁에 두 팔굽을 짚고서 노기를 띤 초조하고 신경질적인 눈초리로 객석을 뒤지였다. 이곳 화학공업지구에 내려와 동분서주하지만 비료생산이 굼뜨게 전진하는것으로 하여 그는 누구에게라 없이 화가 났고 그래서 제구실을 못해 움츠러드는 공장, 기업소 일군들을 객석에서 집어내여 정신을 차리게 하고싶었다. 이제 와서 그런다고 별로 나을건 없겠지만 조건타발을 하며 요령을 부리는 산하부문 생산지도일군들을 이번 기회에 되게 닥달질을 해야 하는것이다. 노상 내려와 얼굴을 맞대고있으니 무슨 과업을 주어도 그다지 어려워하거나 꿈틀하지도 않는다. 어제 저녁 장진강발전소로 가는 길에 들려 려관의 옆방에서 류숙했던 전력공업부장은 그의 이런 고충을 한마디 해학적인 말로 표현했다. 《덜퉁한 사위 처가집 자주 다닌다.》는 격이라는것이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어쩔 도리가 있는가. 자기가 현장에서 일군들을 들볶고 생산을 지휘하니 지금만큼이라도 해내지 않았는가. 《북천강화학공장 지배인동무!》 허상민의 쩌렁한 목소리가 구석쪽에 앉은 차웅섭의 흉벽을 때렸다. 차웅섭은 땅속에서 빠져나오기라도 하듯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사람들의 측은한 동정과 호기심, 자기들이 불리우지 않은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눈길들의 교차를 받으며 연탁을 향해 걸어갔다. 지배인으로서는 두려움없이 겪어야 하는 생산총화마당이지만 차웅섭은 수치심과도 같은 번뇌에 휩싸여 걸어나갔다. 지난날 이런 회의들에서 칠감이나 기타 중소화학제품생산과제를 조금씩 수행못한것으로 하여 곁불에 얻어맞은 때는 간혹 있었으나 오늘처럼 무대에 오르기는 처음인것이다. 차웅섭이 연탁에서 짤막한 그러면서도 힘겨운 자기비판을 하자 허상민은 손등으로 앞상을 두드리며 어성을 높였다. 《까놓고 말해서 북천강화학공장 지배인동무때문에 비료생산이 더 오르지 못했소. 내가 비료생산을 미달해온 부적인 책임을 지배인동무한테 넘겨씌우는게 아니요. 온 화학공업부가 비료생산회복을 하지 못해 뛰는데 동무는 새로운 P촉매조성이요, 효률제고요 하면서 종래 촉매의 안전한 기술공정을 뜯어고쳤소. 부에서는 지난해에도 동무네 공장에서 새로운 P촉매는 파악이 있을 때까지 따로 연구하게 하고 종전 촉매제를 생산하라고 과업을 주었소. 그런데 동무는 말을 듣지 않았소. 결국 지배인동무의 들뜬 공명심때문에 비료생산이 지장을 받았소. 얼마나 엄중하오. 지배인동무는 응당 법적책임을 져야 하오》 객석은 기침소리 하나없이 고요했다. 정적은 사람들속에 차웅섭에 대한 동정의 감정보다 결함의 엄중성을 한층 더 돋궈주었다. 허상민은 회의장에 서리는 엄엄한 분위기를 눅잦히기라도 하듯 약간 음성을 낮췄다. 《리해되지 않는단 말이요. 지배인동무는 화학공대를 졸업한 사람인데 P촉매에 대해서 확실한 파악도 없이 서두른단 말이요?》 《실험실적파악이 있기때문에 도입한겁니다.》 차웅섭은 웅글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아니, 변명이 아니라 자기 속대를 굽히려 하지 않는 항변이였다. 그것이 허상민의 비위를 다시금 거슬리게 하였다. 《이보시오, 지배인동무, P촉매의 실험실적파악이란게 도대체 어떤거요?! 동무네 공장기사장이랑 반대하는 사람이 태반인데 동무와 그 실험실 녀기사 둘이서만 고집하지 않소. 동무는 연구사요, 지배인이요?》 《나는… 촉매연구사업을 소홀히 할수 없습니다. 부장동지, 시간을 좀 더 주십시오.》 차웅섭은 결연히 주장을 세웠다. 허상민은 주먹으로 앞탁을 탕 쳤다. 《안되오! 북천강화학공장이 뭐 동무의 실험실인줄 아오?!… 난 더 묵과해줄 생각이 없소!… 긴 말을 하지 말기요. 북천강화학공장에서는 비료생산에 쓰는 그 촉매를 종전 원료와 기술공정으로 빨리 생산해야겠소. 며칠내로 기술공정을 복구하시오.》 차웅섭은 속에서 폭풍같은 항변이 뒤설렜으나 입을 다물었다. 화학공업부장의 직분을 가지고 그렇게 말할수는 있을것이다. 아니, 현상태에서는 그의 말이 옳을수도 있다. 그러나 어째서 압축가스합성에서 노는 새로운 P촉매의 효률성을 인정하면서도 반대해나서는가? 국산원료로 조성이 독특한 P촉매는 공장실험실 녀기사 심혜옥이 창안하고 수년간 고심참담하게 연구해왔다는것을 부장도 알지 않는가. 6년만에 실험실적연구제조는 성공했었지만 정작 후처리공정을 뜯어 개조하자고보니 예상치 않았던 난관들이 애를 먹이고있는데 리해해주지 못한단 말인가. 하긴 부장의 말처럼 P촉매를 종전의 기술공정대로 생산보장했더라면 아무 등탈이 없었을것이고 이렇게 연탁에 나서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차웅섭은 일순간 떠오른 그 타협적인 생각을 털어버렸다. 지배인으로서 효률이 낮은 촉매를 협동생산품이라고 계속 한본새로 생산한다는것은 국가적리익의 견지에서 볼 때 허락될수 없는것이다. 량심은 그렇게 호소하는데도 차웅섭은 화학공업부문 사업의 전반을 보는 부장의 준절한 책망을 더 반박할수는 없었다. 허상민은 객석을 둘러보고 자기가 지내 흥분했음을 느꼈는지 목소리가 좀 누그러졌으나 분기는 잦아들지 않았다. 《지배인동무는 촉매니 뭐니 하는 기술적주장을 가지고 책임을 피하려들지 마시오. 오늘 생산총화는 자기 검토가 기본이요. 동무는 어째서 비료생산문제의 초점이 북천강화학에 떨어졌는지 뒤늦게라도 깨달아야 하오. 단단히 정신차리시오. 내 듣건대 지배인동무는 고기잡이질군이라는데… 요즘 북천강에 살을 대러 가진 않소?》 회의장에 모인 머리허연 지배인들, 당비서와 기사장들이 웃음기어린 동정의 눈으로 차웅섭을 바라본다. 《저 친구 든든히 걸렸구나.》 하는 속대사들이 얼굴에 비껴있다. 차웅섭은 좌중이 듣도록 음성을 낮추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금년엔… 바빠서 살을 대지 못했습니다.》 《차웅섭동무는 황어철이 아닌 때도 낚시대를 들고 강에 자주 나간다고 합니다. 이런 지배인이 생산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 얼마나 가지겠소.》 객석에서 아량있는 가벼운 웃음소리가 터져올랐다. 허상민옆에 줄곧 점잖게 앉아있던 한만규가 자료철을 덮어 밀어놓으며 연탁에 선 차웅섭을 향해 너그럽게 실눈을 지었다. 《내 보기엔 지배인동무가 P촉매인가 하는걸 연구하느라 기본선에서 좀 빗나가는것 같습니다.》 차웅섭은 한만규가 무엇을 념두에 두고 그러는지 몰라 집행석쪽에 고개를 돌렸다. 《새 촉매제조가 잘 안돼서 련합기업소의 비료생산에 엄중한 지장을 주게 됐으면 의견이 분분한 실험실사업을 놓고 생각을 다시 해보는게 옳지 않겠소.》 차웅섭은 도당책임비서가 심혜옥을 련관시켜 하는 말같아 어쩐지 게면쩍어졌다. 한만규는 상반신을 내밀고 심각한 눈초리로 객석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남의 결함이라고 마음편하게 앉아있지들 마시오. 우린 단순히 경제실무총화를 짓는게 아닙니다. 부장동무도 말했지만 생산이 당에서 요구하는 높이로 올라가지 못하는 주되는 원인은 여기 모인 공장, 기업소를 책임진 일군들이 정력을 바치고 투신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사상에 달렸습니다. 당중앙위원회 구호의 정신을 받들고 온 나라가 당창건 30돐까지 6개년계획을 끝내려고 끓고있는 때에 우리 일군들이 혁명성이 없이 안일하게 지내서야 되겠습니까. 도당위원회는 공장생산이나 국가일보다 자기 자식의 전도문제, 처자의 직업문제, 개인주택문제… 그러루한 사생활에 더 신경을 쓰고있는 일부 일군들에 대해 단단히 경종을 울립니다.》 그날 도당책임비서는 회의가 끝난 다음 차웅섭을 회관대기실에 따로 남으라고 하였다. 차웅섭은 도당책임비서가 빨리 돌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위해 시간을 내주는것이 고마왔다. 그가 널직한 대기실 한쪽에 엉거주춤 서 기다리고있자 한만규는 뒤따라오는 일군들을 떼버리고 차웅섭이하고만 쏘파에 가앉았다. 《지배인동무, 내 아까 집행석에서 동무네 공장실험실문제를 얼핏 스쳤는데 아마 참고할것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 차웅섭은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을지 딱해서 눈길을 떨구었다. 자기와 실험실 녀기사 심혜옥에 대해 공장에서 돌아간다는 뒤말을 별로 중시하지 않는 그였지만 도당책임비서앞에서는 어쩐지 마음이 씌였다. 하지만 그것은 설마하는 생각에서였고 보다는 지배인으로서 공장실험실사업을 잘 밀고나가지 못한 당적책임감이 더 강하게 머리를 쳐들었고 주눅들게 하였다. 《지배인동무에 대해서 좋지 않은 여론이 제기되고있습니다.》 한만규는 자기도 괴로운듯 이마살을 찌프리며 말을 계속했다. 《그렇지만 난 여론을 그대로 믿지는 않소. 평소에 동무는 공장을 위해 성실히 일해오지 않았소. 성품도 청렴했구.》 차웅섭은 자기가 립장이 딱해할가봐선지 문제의 륜곽이 분명치 않게 어루쓸어 말하는 한만규가 불안스러웠다. 자기를 두둔하려는건지 비판하려는건지 진의를 속시원히 까밝혀주었으면 차라리 마음편할것 같았다. 《나는 지배인동무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환갑을 쇨 나이의 일군한테 듣기 거북한 말들이 뒤따르는것은…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일이 못되는것이고 지배인으로서 공장사람들앞에서 도덕적권위를 잃으면 사업하기도 어렵게 됩니다.》 《…》 차웅섭은 가슴에 무딘 칼이 콱 박히고 심장이 멎는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회관대기실이 어지럽게 빙 돌고 몸은 천길나락으로 굴러내리는것 같았다.… 차웅섭은 지금도 한만규의 말이 귀전에서 맴돌고 수치감이 오물처럼 들씌워짐을 느꼈다. 왜 아무런 항변도 못했는가… 량심에 꺼리는 일이 실지 있었는가? 과연 차웅섭자신은 마흔세살난 독신녀성인 심혜옥기사의 손목이라도 한번 잡아보았던가? 그럴 욕망이라도 있었던가?… 아니, 차웅섭은 한순간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심혜옥은 순결한 녀자였다. 함흥화학공업대학을 졸업한 그 녀자는 사회생활의 첫시절에 애인과 결별한후 여태 로처녀로 지내고있었다. 여러군데 대상자가 나서긴 했었지만 애인과 갈라진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데서 서른살을 넘겼고 랭혹한 자존심, 고집, 실망으로 또 몇해가 흘러갔다. 분망한 연구사업, 이성문제에 대한 망각비슷한 무관심, 사생활에 대한 신심을 잃은데서 오는 고독속에서 또 세월이 흘러 어느덧 마흔고개를 넘어선것이다. 차웅섭이 심혜옥의 사람됨과 성실성을 알게 된것은 수년전부터였다. 그 녀기사는 공장실험실이라는 좁은 그늘밑에서 항구적인 연구쩨마를 잡고 막연하게 세월을 보내는 그런 부류의 기사가 아니였다. 공장생산에 실지 도입해도 리익을 별반 주지 못하는 현실성이 적은 리론적과제를 연구해내여 준박사, 박사 학위를 추구하는 공명심 많은 기사도 아니였다. 심혜옥의 연구과제는 언제나 공장생산품으로써 결과가 뚜렷한 실용적인것이였다. 그는 삼사십가지를 헤아리는 공장의 크고작은 개별적화학제품들 하나하나에 자기의 탐구와 심혼을 바치였다. 종전 칠감보다 수명이 비할바없이 긴 새 칠감의 기술지표를 갱신하기 위해 그 녀자가 허름한 시료배낭을 메고 걸은 길은 수천리가 넘을것이다. 그것의 성공을 위해 심혜옥은 5년세월을 바쳤다. 차웅섭은 눈앞의 생산과제가 바쁘다고 썩 달가와하지 않는 기사장과 생산직장일군들을 설복하고 추궁하기도 하면서 그 녀자의 연구성과들을 대부분 생산에 도입하였다. 그것이 너무도 고맙고 미안해서 찾아온 심혜옥에게 차웅섭은 스스럼없이 말해주었다. 《혜옥동무가 연구한거라고 해서 도입하는게 아니요. 다른 사람의것이라도 가치가 있으면 받아들이는거요. 거기에 대해 기사동무가 고마와할 필요는 조금도 없소. 동무는 기술자로서, 난 공장관리일군으로서 국가의 생산지표인 제품들의 질제고를 위한 일을 하기때문이 아니겠소.》 심혜옥은 어딘가 무안해하며 지배인방을 나갔다. 차웅섭은 그 녀자의 성실성과 헌신성, 기술자로서의 깨끗한 량심을 소중히 여겼고 공장기술부내 기사들의 사업기풍에서 모범이 될만한것이라고 기사장의 방에서 강조도 하였다. 그리하여 심혜옥의 연구사업은 연구로 그친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생산제품들의 순도와 질 개선이라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게 되였다. 그러나 이번의 P촉매는 순조롭게 되지 않았다. 벌써 여섯해가 공으로 지나갔다. 심혜옥은 광석페설물같은 보다 흔한 원료에서 압축가스의 합성효률이 높은 P촉매를 다량 제조할것을 원하고있었다. 새 연구사업은 언제나와 같이 독신인 그 녀자의 사랑이였고 앞날이였으며 자식처럼 소중한것이였다. 고독과 허무감을 잊어버리게 하는 열정의 원천이였다. 그 녀자는 암모니아화학공업을 개척한 세계적인 선배화학자들이 이룩한 열매중의 하나인 P촉매를 개조하는것은 어리석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속단하는 기사장과 일부 기술일군들의 주장, 뒤공론은 아랑곳없이 묵묵히 자기 할일을 하였다. 그 녀자는 류행에 뒤떨어진 수수한 옷을 작업복 겸 외출복으로 입고 무거운 원료를 넣은, 비에 젖은채로 차칸에 끌고다녀 낡고 물바랜 허줄한 배낭을 지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무산의 철광석페설물로부터 시작하여 수십개의 공장, 기업소들을 찾아다니며 시료와 버럭, 자연원료들을 배낭에 져왔다. 평안북도와 황해남북도의 광산들, 간석지의 감탕도 가져왔다. 그러느라니 수십개의 배낭이 꿰졌다. 심혜옥이 P촉매의 새로운 합리적인 조성을 찾아내기 위해 얼마나 먼길을 다녔던가… 그 녀자가 배낭으로 져들인 광석페설물과 시료와 버럭, 자연원료는 화물자동차 몇대에 싣고도 남으리만큼 많다. 고심어린 수백번의 실험이 진행되였다. 차웅섭은 심혜옥의 그 성실성과 헌신성에 가슴이 울렸다. 외화를 주고 사오는 P촉매의 주원료대신 자기 나라에 흔한 쓸모없는 페설물과 버럭으로 질좋은 국산촉매를 만들려는 녀기사의 헌신성이 지배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차웅섭은 일부 사람들이 뒤에서 뭐라고 하든 심혜옥기사의 연구사업을 지배인의 직권을 가지고 행정조직사업을 통해 공개적으로 도와주었다. 현장 기능공과 분석공을 붙여주었고 실험실도 따로 꾸려주었다. 화학공업부에 제기하여 실험 설비와 기구들도 적지 않게 갖추어주었다. 차웅섭은 출장갔다올 때는 그 지방에서 나는 P촉매제조실험에 쓸만한 페설물이나 버럭을 배낭에 져다가는 집에서 쇠절구에 빻아서 다음날 심혜옥의 실험실에 가져다주군 하였다. 그럴 때면 눈물이 글썽해하는 심혜옥이한테 조급해하지 말고 맘을 푹 놓고 연구사업을 하라고 당부하군 하였다. 심혜옥의 P촉매연구사업은 날이 갈수록 차웅섭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어깨를 무겁게 했으나 그것이 조금도 짐이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고독한 생활에 때없이 밀려드는 정신적공간을 메꿔주는것이였다. 그래 자주 실험실에 들려 옛 화학공대졸업생의 지식으로 실험도 같이 해보고 현미경도 들여다보군 하였다. 차웅섭은 심혜옥의 연구사업에 대한 소박하고 사심없는 기대와 희망 외에 그 녀자에 대해 다른것을 생각해본적은 없었다. 밤늦게 실험실에서 그 녀자를 도와주고 함께 퇴근할 때도 피곤을 풀어주는 한담을 하거나 연구사업이야기를 했을뿐이였다. 그러나 인제는 모든 일이 끝나버렸다. 말썽많은 P촉매도 실험도 심혜옥기사의 고심도… 차웅섭의 인생과는 어차피 멀어지게 된것이였다. 중소화학제품생산공장의 지배인이 안아야 할 크고작은 하많은 일들에 더는 관심하지 않아도 되였다. 밤의 공간처럼 텅 비고 어둡고 쓸쓸한 랭기가 가슴에 서려들었다. 강녘에서 황어잡이에 열띤 경쾌한 말소리가 들린다. 밤샘을 하러나온 사람들이 들고있는 가스등불이 강건너쪽에서도 자라굽이 여울탁이 있는 이쪽 기슭에서도 흔들거린다. 차웅섭은 긴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돌렸다. 수염풀과 잔디, 잡초 무성한 이 강변, 하나같이 둥근 돌들이 다정히 누워있는 물살빠른 이 강과도 그는 작별해야 하는것이다. 강은 밤이고 낮이고 계절과 세월에 지치지도 늙지도 않고 자기의 푸른 줄기, 굽이치는 생을 자랑하며 소리쳐흐르고있다. 강이 부럽다. 락엽진 인생, 희망이 진한 운명… 그러나 봄이 오면 푸르러 새 모습을 펼칠수도 있는, 아직도 남아있는 생명원천의 열정을 어데다 하소할데 없는 자기 인생이 서글프다. 차웅섭은 강녘을 벗어나 공장사택들이 있는 산기슭쪽길에 들어섰다. 집으로 가야 했다. 어제도 들어가지 않았으니 구멍탄불은 이미 꺼졌을것이다. 어제저녁도 아침도 건네고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국수 한그릇으로 굼땠으니 무척 배가 고프다. 집에 가서 불도 때고 무언가 끓여먹어야 할것이다. 이런 때 조카딸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동자질을 해주고 빨래도 해주던 조카딸애는 작년에 평양의 경공업대학으로 갔다. 차웅섭은 먼지앉은 랭방, 사람도 없고 불도 켜있지 않을 썰렁한 자기 집을 생각하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집에서 조카딸도 없이 일년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수 없었다. 날은 덧없이 빨리도 흘러갔다. 시간은 무정하고 가차없다. 한만규의 권고가 지극히 온당한것인지도 모른다. 신의주에 가서 아들한테 일찌감치 몸을 의탁하고 알맞는 일을 해야 한다. 어지러운 뒤공론에 인격을 깎이지 말고 낯설은 타지방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것도 나쁘지 않을것이다. 사위는 캄캄하고 공장사택지구에서 불빛이 아이들의 눈동자마냥 반짝거린다. 불쑥 길섶에서 인기척이 났다. 차웅섭은 어둠속의 큰 가로수곁에 서있는 사람을 찬찬히 보았다. 녀성인것 같다. 어둠속에서 모양이 분명치 않은 무늬가 찍힌 달린옷우에 쟈케트를 걸친 그 녀자는 이쪽으로 조용히 다가오더니 머리를 숙였다. 《지배인동지… 인제 오세요……》 《?!…》 분명 심혜옥이였다. 평소의 그 작업복을 대신하는 허름한 양복을 입지 않고 산뜻하게 녀성미가 풍기는 옷을 입어서 미처 알아보지 못한것이다. 가까이 마주서서야 쟈케트의 진자주색갈과 달린옷에 드문히 박힌 흰 바둑알무늬가 선명하게 알린다. 키도 훨씬 커보인다. 아마 뒤축 높은 구두를 신은 모양이다. 조발을 슬쩍 한 탄력있는 중년녀성머리가 무척 어울린다. 차웅섭은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다. 지난날 가꾸지 않은 심혜옥보다는 친근감이 덜했으나 다음순간 심혜옥이 자기를 마중나왔으며 오래 기다렸으리라 생각하니 무엇때문인지 가슴이 뭉클하였다. 《기사동무가 어떻게 나왔소?…》 차웅섭은 인사대신 이렇게 말했으나 웬일인지 목이 꺽 메여 더 말을 하지 못했다. 자기 운명을 두고 이제까지 모질게 가슴을 긁어내리던 고통에 새로운 아픔이 더해졌다. 그것은 이 녀기사를 잘 돌봐주지 못한 후회와 자책감이였다. 그는 심혜옥의 괴로움이 비낀 눈을 마주 쳐다보지 못했다. 며칠전 평안남도의 어느 광산에서 페설물을 지고온 그 녀자는 모름지기 자기가 들은 말보다 더 험한 비난과 수치를 체험했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찢기는것 같았다. 자신은 평북도로 떠나가면 되지만 이 공장에 남아있는 심혜옥이 녀성으로 당한 상처는 지워지지 않고 허물로 남을것이다. 차웅섭은 무엇때문에 회관대기실에서 도당책임비서의 은근한 질책에 도전하여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지 못했던지 알수 없었다. 그랬더라면 심혜옥의 순결을 변호할수도 있잖았을가… 지금 심혜옥을 보는 순간 차웅섭은 그때 자기가 어째서 항변을 못하고 묵묵히 서있었는가를 비로소 깨달았다. 과연 자기가 무엇때문에 공장의 다른 기사, 기술자들보다 심혜옥을 따뜻이 도와주었던가?… 그 어떤 《미련이 있어서》가 아니라 실지로 그 녀자한테 반하였기때문이다. 고독한 생활을 하면서도 오로지 연구사업에만 몰두하는 심혜옥의 그 성실성과 완강성에 은연중 반하였고 심장이 움직였음을 괴롭게 의식하였다. 그러나 그 감정은 재불속의 불찌마냥 깊이 묻혀있을뿐이였고 그자신도 똑바로 깨닫지 못하였던것이다. 허나 이제 와서 느낀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차웅섭은 그냥 침묵만 지킬수 없어 무슨 말인가 해야 하리라고 생각했으나 희미한 달빛이 그 녀자의 물기어린 눈에서 번뜩이는것을 보고는 입을 열지 못했다. 밤바람이 연한 찔레꽃향기 비슷한 화장내를 실어왔다. 차웅섭이 공장실험실에 들어가 분석시료를 들여다볼 때 곁에 가까이 선 심혜옥이한테서 풍기던 익숙한 체취였다. 그 향취는 불현듯 찬서리 내린 늦가을 풀숲에 외로이 핀 들국화와도 같이 심혜옥에게 남아있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가슴아프게 상기시켜주었다. 차웅섭은 심한 도덕적인 가책을 느꼈다. 어찌하여 이 녀자의 연구사업을 그토록 도와주면서도 배우자를 얻어줄 생각은 해보지 못했던가. 평소에 이 녀자가 품고있는 번민과 감정의 안개낀 깊은 바닥을 더듬어보지 못했고 녀성으로서 누려야 할 행복에 대해서는 더구나 관심해주려 하지 않았다. 《지배인동지…》 심혜옥은 두손으로 봉긋한 앞가슴의 쟈케트자락을 여미였다. 그 녀자의 음성은 나지막했으나 튕겨놓은 현악기줄마냥 떨렸다. 《절 용서하세요.… 저의 연구사업이… 제가 지배인동지한테… 화를 미치게 했습니다.》 《원 별소릴…》 차웅섭은 공장에서 벌써 이 녀자에게 자기 운명을 두고 말한 사람이 있구나 하고 아프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듯 딴전을 부렸다. 《사람이 살아가느라면 무슨 일인들 없겠소… 혜옥동무, 출장갔던 일은 잘됐소?… 광석페설물을 져왔겠지?… 내 어제랑 구내에서 얼핏 보면서도 알아보지도 못했구만.》 차웅섭은 그 녀자의 눈길을 피하여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았다. 훌쭉한 《제비》곽에 손을 넣으니 막대도 없다. 아까 다 피운것이다. 그는 빈 담배곽을 구겨서 어둠속에 던졌다. 심혜옥은 쟈케트주머니에서 무엇인가 꺼내더니 두손으로 차웅섭에게 조심스레 내밀었다. 뜻밖에 담배곽이였다. 차웅섭은 놀라와하며 그 녀자의 따스한 체온이 스민 담배곽을 받아들었다. 얇은 불수강으로 만든것이였다. 표면을 잘 가공하여 어둠속에서도 번들거렸다. 꼭지를 누르니 제법 딸각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에는 담배가치가 촘촘히 담겨있었다. 심혜옥은 잠자코 차웅섭의 손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어둠속에서도 여느때 보던 지배인의 니꼬찐이 누렇게 밴 손끝을 느끼자 그 녀자는 무언가 아쉬운듯 무춤거리더니 나직이 말을 건넸다. 《물부리는… 생당쑥으로 만든게 좋다지요?…》 《그렇다고들 하는데… 만들기가 여간 힘들지 않을거요.》 차웅섭은 그저 흡족해서 담배곽을 만지기만 했다. 담배곽에 심혜옥의 너무도 큰 성의가 깃든것만 같아 얼굴을 들어보았으나 그 녀자는 눈길을 피했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어서 피우세요. 안주에 들렸더니 년로한 외삼촌이 저의 연구사업을 도와주는 지배인동지에게 드리라고 해서…》 심혜옥은 자기의 애모쁜 성의와 진심을 감추려는듯 눈시울을 내리깔았다. 차웅섭은 묵묵히 담배 한가치를 꺼내 피워물었다. 그는 여느때없이 구수한 담배맛을 느끼며 심혜옥의 이 지극한 성의에 자기는 무엇으로 보답할가 하고 생각을 굴렸다. 다른것보다도 집에서 보충적으로 하던 P촉매실험연구를 빨리 마무리지어 이 녀자에게 주는것이 가장 큰 기념으로 될것이다. 그런데 그걸 마저 완성할 날자가 있겠는지. 희벗한 연기뭉치는 괴로움에 시달려 구들곬마냥 어두워진 가슴속에서 헤집고나오기 바쁘게 밤바람에 흩어져버렸다. 참기 어려운 침묵끝에 심혜옥이 눈을 들었다. 《지배인동지… 말씀해주세요. 무슨 일인가요?》 그 녀자의 진지한 물음은 차웅섭의 멍이 진 가슴을 파고들었다. 묻지 말았으면 좋으련만… 《도당위원회에 가셨댔다지요?》 《그렇소. 갔댔소… 기업관리를 옳바로 하지 못해 추궁을 받았소.》 《지난번에도 화학공업부장동지랑 참가한 생산총화회의에서 그런 문제를 가지고 비판을 받지 않았나요. 혹시 또 촉매때문이 아닌가요?》 《허, 도당에서 뭘 그런 기술문제에 참견하겠소.》 차웅섭은 벙긋이 웃으려 했으나 사실을 알려는 그 녀자의 타는듯한 눈길을 피할수 없었다. 《말씀해주세요. 전 지배인동지 신상에 어떤 루가 미쳤는지 알고싶어요.》 차웅섭은 심혜옥이 이토록 진심으로 자기의 운명을 걱정했다는것이 가슴이 울렁이도록 고마왔다. 《공장사람들이 뭐라고 합디까?》 《…》 《말하오.》 《저… 기사장동지랑… 지배인동지운명을… 걱정하고있습니다.》 《기사장이… 흠, P촉매를 가지고 든장질이나 말지.》 차웅섭은 쓰겁게 웃고는 입술이 따갑도록 꽁초를 빨고서 손끝으로 짓이겨 불을 껐다. 어차피 알게 될텐데 숨길 필요가 있으랴. 《혜옥동무,… 난 지배인자리를 내놓게 됐소.…》 한순간 심혜옥은 균형을 잃은듯 비칠거렸지만 이내 몸가짐을 바로했다. 차웅섭은 울분이 섞인 한숨을 내뿜었다. 《아무래도 신의주에 있는 아들한테로 가야 할것 같소.》 그는 한순간 정든 공장과 앞에 서있는 심혜옥이… 그리고 친근한 모든 사람들과 헤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기는것 같았다. 그런 무서운 리별이 오래지 않아 현실로 된다는것을 믿을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얼어드는 마음을 다잡으며 애써 누그럽게 말을 이었다. 《며느리가 무던하고 좋다오.》 《…》 심혜옥은 끓어오르는 련민과 동정에 목이 꽉 메였다. 싸늘한 밤바람이 그 녀자의 머리를 흩날려 얼굴을 가리웠다. 그 녀자는 머리를 쓸어넘길념을 못하고 망연히 서있었다. 자책의 긴 한숨이 따랐다. 《저라는… 하잘것 없는 녀자때문에… 지배인동지가 그렇게 됐군요.》 《혜옥이… 그런 말은 하지도 마오. 내가 지배인구실을 못해서지 동무 잘못은 없소. 이렇든저렇든 동무야 인생을 헛되게 살지 않겠다고 무언가 큰걸 해놓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니요.》 《…》 《참 안됐소. 촉매연구사업을 계속 내밀어주어야 하는건데… 하긴 기술과장이랑 도와줄거요. 누가 뭐래도 실망하지 말구 완강히 계속하오. 인젠 결합제의 조성두 기본적으로 되구… 완성단계에 이르지 않았소.》 심혜옥은 끝내 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돌아섰다. 흐느낌소리가 간간히 터져나왔다. 차웅섭은 당황했다.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뭉클하며 솟구쳐오르고 목이 꽉 메였다. 그 녀자를 어떻게 위로하려고 손을 내들었으나 곧 움츠리고말았다. 울음이 그치기를 잠자코 기다리자니 심장이 얼어붙는것만 같았다. 차웅섭은 심혜옥의 흐느낌이 연구사업을 더 방조받을수 없게 된 실망감에서 나온 단순한 감정의 분출이 아님을 온몸으로 느끼고있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오랜 연구사업과 생활과정에 서로가 말할수 없었던 감정의 섬세한 가락들로 짜진 애정의 구슬픈 선률인지도 모른다. 심혜옥은 눈물젖은 얼굴을 차웅섭이쪽에 돌렸다. 그 녀자의 목메인 음성은 가냘피 떨었다. 《전… 이제 어쩌면 좋아요?… 지배인동지가 떠나가시면… 전 어떻게 해요.…》 그 녀자의 절절한 고백은 차웅섭의 가슴을 저미며 피나게 만들었으나 그는 나약성을 보이지 않았다. 《혜옥이, 눈물을 닦소. 주저앉아선 안되오. 동무는 젊구 또 재능있는 기사가 아닌가. 맘을 굳게 먹구 생활을 해나가야 하오. 자, 우리 오래간만에 밤길을 걸어보자구.》 《!…》 밤바람의 싸늘한 랭기가 몸안에 스며들었다. 서로 할말이 가슴속에서 용암처럼 끓고있었으나 얼어든 심장을 녹이지 못한채 지배인과 녀기사는 사택마을어구에까지 묵묵히 걸어갔다. 어딘가 멀리 산쪽에서 밤새 한마리가 외로이 울었다. 달을 품은 개울물이 고요를 깨뜨리며 졸졸 소리내여 흘렀다. 차웅섭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피로한 눈에는 사업에 림했을 때의 그런 신중하면서도 고통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목소리는 꺼진 땅속에서 울려나오는듯 싶었다. 《인젠 헤여지자구.…》 심혜옥은 응답을 못하고 굳어졌다. 밤새의 울음소리는 한층 구슬프게 들렸다. 《어서 합숙으로 가보오.》 심혜옥은 지배인의 재촉이 미웠고 가슴이 아팠다. 오늘밤에는 그와 헤여지기전에 따끈한 식사라도 한끼 지어올리고싶었다. 《제가 집까지… 바래다드리면 안될가요?》 《아니, 밤이 깊었소.… 혜옥이, 잘 가라구.》 차웅섭은 마치 자신을 꾸짖기라도 하듯 손을 내젓고는 사택마을쪽으로 황황히 걸어갔다. 심혜옥은 그자리에 뿌리내린듯 까딱않고서 어둠속에 멀어지는 지배인을 눈물어린 눈으로 바라보고있었다. 마지막으로 지배인을 바래주고싶고 얼마간이라도 더 함께 걷고싶은것이 그 녀자의 소원이였지만 이룰수 없었다. 어쩌다 스무해만에 그 녀자의 가슴에 작은 불길로 지펴진 두번째 사랑은 애인에 대한 환멸과 리성으로 결별한 첫사랑때와는 달리 너무도 소중했건만 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어둠속으로 영영 사라지는것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