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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50분.

김정일동지께서 타신 승용차는 당중앙위원회청사를 떠나 깊이 잠든 수도의 거리를 소리없이 달렸다.

포장길은 밤이슬에 푹 젖어있었다.

가로등이 드문히 켜진 교외를 벗어나자 짙은 어둠에 묻힌 도로가 전조등빛을 받아 넘실거리며 끝없이 흘러오고 길가에 늘어선 백양나무의 굵은 줄기들이 빗살처럼 지나갔다.

벌판이 펼쳐진 어둠속 멀리에서 작은 전등불이 깜박거렸다. 모름지기 어느 작업반이나 분조의 랭상모판에 매단 불빛일것이다. 벼짚 나래를 둘러친 그안에서 모판관리공이 자지 않고 벼모를 돌보고있을것이다. 아직 밤기온은 차다. 이런 때는 비닐박막을 틈사리없이 덮어주어야 벼모들이 지장없이 잘 자랄것이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차창을 반쯤 내리우시였다.

들판의 구수한 흙내와 싱그러운 잎새냄새가 섞인 차거운 밤대기가 불어들었다. 운전수는 차창에서 줄곧 눈길을 떼지 않은채 조향륜을 긴장해서 틀어잡고있었다.

《피곤하지? 내가 좀 몰가?》

그이께서는 따뜻이 말씀을 건네시였다.

《일없습니다. 전 그동안 푹 잤습니다. 포장길일 때 눈을 좀 붙이십시오.》

운전수는 무랍없이 차내조명을 껐다.

《허, 이거 무조건 복종하라는거구만.》

김정일동지께서는 소리내여 웃으시고서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대시였다.

《그럼 좀 잘가.》

그이의 말씀에 운전수는 흥이 나서 속력을 떨구고 차가 들추지 않도록 조심스레 솜씨있게 몰아갔다. 승용차는 고르로운 발동기소리를 내며 어둠속길로 달려갔다.

김정일동지께서 쪽잠에서 깨나시였을 때는 포장길이 끝난지도 퍽 오랜것 같았다.

운전수가 차창을 주시하며 조용히 말씀올렸다.

《방금 평남도지경을 벗어났습니다.》

《벌써 그렇게 왔소?!

김정일동지께서는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눈길을 차창밖에 주시였다.

멀리 새벽빛이 더해져 희푸르스름해진 하늘가를 배경으로 첩첩한 산발들이 고대의 성곽들처럼 어렴풋이 비껴왔다.

아호비령산줄기와 북대봉산줄기가 마주치는곳이다.

해발 800m가 넘는 동해안 중부의 산간지대다. 차불빛에 길섶의 령천군경계패말이 언뜻 지나가는것이 보였다.

승용차는 차츰 속력을 늦추었다. 떠날 때 그저 이 근방의 농촌에 가보자고 말했으니 운전수는 지시를 기다리며 잠자코 차를 몰아갔다.

길옆에까지 큰 바위들이 들어앉은 야산에 소나무들이 우거져 더 어둑해보였다.

령천군… 불현듯 그이께서는 생각나시였다.

《운전수동무, 령천군 구평협동농장에 가봅시다. 아마 한 이십분쯤 더 가면 큰 벼랑이 나지고 거기서 개울을 건너 오른편길로 가야 할거요.》

운전수는 놀라와했다.

《어떻게… 잘 아십니까?》

《구평엔… 아마… 60년도엔가 왔댔지 49년에는 수령님을 따라 이고장 덕평땅에도 가봤더랬소

김정일동지께서는 묵묵히 생각에 잠기시였다. 추억의 물결이 걷잡을수 없이 밀려와 가슴을 적시였다.

어머님을 여윈 49년의 쓸쓸한 마가을 가랑비 내리던 날 수령님께서는 상실의 크나큰 슬픔을 이겨내며 이 지방으로 현지지도를 떠나시였다. 어리신 김정일동지께서는 수령님의 곁에 앉아있었다. 울퉁불퉁한 길, 몹시 들추던 승용차, 슬픔과 사랑에 대한 인생철학을 감성으로 작은 가슴에 받아안으며 가시던 길

비애의 눈물인양 차창으로 흘러내리던 비물…

그이께서는 가슴아픈 추억을 되살리지 않으려고 조용히 머리를 저으시였다.

그러자 추억의 다른 갈피를 헤치고 꽁지머리를 한 조그만 소녀애의 모습이 밝고 따뜻한 감정속에 안겨왔다.

열다섯해전 가을날, 김정일동지께서는 령천군에 머물고계시는 수령님께 보고드릴 문제가 있어 뒤늦게 혼자서 승용차를 몰아가고계시였다.

해는 뉘엿뉘엿 기울더니 산마루에 주저앉아 단풍이 지는 숲을 불태우고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구평마을을 5리쯤 앞둔 산기슭에서 문득 승용차를 세우시였다.

금방 지나친 길옆의 둔덕바위너설우에 분명 웬 아이가 앉은것을 얼핏 보셨기때문이였다. 모름지기 어른들과 같이 숲에 온 애려니 생각했으나 다음순간 혹시나 하는 불안스런 예감이 들고 잇달아 더럭 걱정이 생기여 급히 제동기를 밟으신것이였다.

둔덕의 바위너설은 소나무들과 잡관목에 가리워 잘 보이지 않는데다가 곧바로 올라갈수 없었다. 들국화가 모락모락 피여난 자드락길을 에돌아서야 바위너설쪽으로 갈수 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산당화덤불옆의 바위너설에 쪼그리고앉아 훌쩍훌쩍 울고있는 일곱살가량의 소녀애를 보시였다. 제비꼬리만한 꽁지머리를 하고 복숭아빛볼에는 보조개가 패인 귀엽게 생긴 소녀애였다. 아이는 눈을 감고 우느라 그이께서 가까이 다가섰는데도 모르고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손수건을 꺼내시여 소녀애의 볼에 두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시였다.

그제야 소녀애는 흠칫 눈을 떴다. 쌍까풀진 오목눈속에 설음이 가득찼다.

《너 왜 우느냐?》

《길석이랑… 애들이… 날 팽개치고… 달아났어요. 아버지 없다고 업신여기고

울음을 먹으며 터치는 분김과 슬픔이 뒤섞인 호소였다.

《오, 거 몹쓸녀석이로구나. 이렇게 고운 처녀앨 무슨 돌멩이처럼 숲속에 내버리다니.》

《자기네만… 찔광이랑 오미자랑 따먹었어요.》

소녀애는 흐느꼈다.

그제야 김정일동지께서는 소녀애의 치마폭에 그득 담긴 하얀 차돌을 보시였다.

《넌 왜 오미자랑 같이 따먹지 않았느냐?》

《난 샘을… 가꾸댔어요.》

《샘? 어데 있길래?》

소녀애는 눈물을 닦은 작은 손을 들어 숲쪽을 가리켰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소녀애의 치마폭에서 하얀 차돌을 만져보시였다.

《넌 좋은 일을 하댔구나. 그런데 길석이네들이 달아난줄 알면 집으로 가야지.》

《난 마을에… 안… 갈테예요.》

《어째서?

《날 찾아올 때까지 있을래요. 내가 집에 안가문 길석이가 어머니한테 혼날거예요.》

소녀애는 슬퍼서만 우는게 아니였다. 산골소녀애다운, 연약하지 않은 의지와 분노가 있었다.

《거 대단한 결심이구나. 그런데 너 무섭진 않느냐? 봐라, 해가 넘어가고 숲이 어두워지는걸 그러다 범이라도 훌쩍 뛰여나오면 어쩔려구.》

그제야 소녀애는 겁이 덜컥 났는지 사위를 둘러보고 산당화덤불곁에서 황황히 물러났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소녀애의 거동이 재미있어 지켜보다가 다정히 물으시였다.

《이름이 뭐냐?》

《백리향이예요.》

《꽃이름이구나. 참 좋은데 너 백리향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니?》

《몰라요.》

《너의 고운 입술모양으로 핀 자그마한 연분홍꽃이란다. 줄기는 두뽐정도밖에 안되지만 가지가 바위나 굳은 땅우로 뻗지. 꽃잎에서 나는 향기는 아주 멀리까지 간단다.》

《야! 그래요, 그 꽃이 우리 고장에도 있을가요?》

《있지 않구. 여기 산지대에서 많이 자랄게다. 여름에 꽃필 때는 찾기 쉽단다.》

《꼭 찾아볼래요.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내 이름 뜻을 그렇게 대주지 않았어요. 언젠가 물었더니 리향이니 리향이지 했어요.》

소녀애의 얼굴에서 울분은 자취없이 사라지고 명랑한 빛이 저녁노을과 어울렸다.

《얘, 리향아, 이젠 너의 샘터에 가보자꾸나.》

《정말이예요?!》

《그러지 않구. 샘물도 마시고싶다. 차돌은 다 가지고 가자.》

소녀애는 무등 좋아서 치마폭을 움켜쥔채 앞장섰다.

《아저씨는 어데서 오시나요?》

《평양에서 온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소녀애의 뒤를 따라 산자드락을 올라가시였다. 머리우 나무가지들에서 저녁깃을 찾는 새들이 분주스레 울었다. 이끼오른 거뭇한 바위 두개가 큰 소나무옆에 마주 웅크리고있었다.

《쌍곰바위예요. 아저씨, 곰 비슷하지요?》

《응, 거 신통한데.》

《샘을 이 곰들이 지키고있어요.》

소녀애는 바위밑에 우거진 풀숲을 헤치였다. 그속에 뒤웅박만한 옹달샘이 감추어져있었다. 맑은 샘물이 퐁퐁 솟아서는 샘터를 채우고 풀숲사이를 얼마 흐르지 못해서 바위너설짬으로 스며드는것 같았다.

소녀애는 바위짬에서 봇나무껍질을 오그려 만든 작은 바가지를 꺼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소녀애가 정갈스레 떠드리는 샘물바가지를 받으시였다. 이따금 산새가 울뿐 저녁숲은 고요하고 두어모금의 샘물이 찰랑이는 작은 바가지에서는 향긋한 봇나무냄새가 풍기는게 어딘가 동화적인 기분이 나시였다. 샘물은 이가 시리게 찼다.

《어, 시원하다.》

《아저씨, 우리 고장 물맛이 좋지요?》

《막 달구나. 평양의 사이다보다 썩 낫다.》

김정일동지께서 사뭇 칭찬하시자 소녀애의 얼굴에 순박한 자랑이 한껏 어렸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저 산장밭에 일하러 가면서 이 샘물을 길어가군 해요. 나물이랑 산열매를 따러 오갈 때도 꼭 여기 쌍곰바위샘에서 쉬여가요.》

《네가 그래서 이 샘을 가꾸려 했었구나.》

김정일동지께서는 소녀애가 기특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시였다. 어린 마음속에서 고향산촌에 대한 애착이 샘물처럼 정갈하게 솟아나고있는것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팔소매자락을 걷으시였다. 샘터에 덮인 마른풀을 치우고 잡초들을 뽑아 물곬을 틔워주시였다. 팔굽까지 물에 잠그어 샘터바닥의 묵은 모래와 풀이끼를 깨끗이 걷어내시였다.

잠간사이에 샘터주위가 훤하게 되였다. 흐린 물이 빠지면서 옴폭한 반경이 훨씬 넓어진 바닥에 맑은 샘물이 가득차올랐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소녀애와 같이 차돌을 물에 씻어서 샘바닥에 깔아주시였다.

하얀 차돌과 까뭇한 깨돌들이 어울려 알른거리는 바닥에서 맑은 샘물이 퐁퐁 솟아올랐다.

《야! 멋있구나.》

소녀애는 조그만 두손을 마주잡고 기뻐했다.

《아저씨… 고마와요.》

《고맙긴… 난 그저 리향이가 하려던 일을 도와주었을뿐이다. 넌 아주 착한 애다. 고향을 소중히 아는 애만이 이런 숲에 있는 샘을 가꾸는거란다. 리향인 커서도 꼭 이 마를줄 모르는 샘물처럼 고향산촌을 사랑하거라.》

소녀애는 불시에 잠잠해지더니 천진스런 얼굴에 어른처럼 신중한 표정이 떠올랐다. 소녀애는 고개를 숙이고 샘물을 내려다보았다. 찰랑거리는 샘물안에 보조개 패인 소녀애의 아릿다운 얼굴이 비꼈다.

《아저씨, 제가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될가요?

김정일동지께서는 앞날에 대한 신비로운 희망의 동심세계에 잠겨있는 소녀애의 머리와 어깨를 다시금 따뜻이 쓰다듬어주시였다.

《되지 않구, 봐라. 샘물에 너의 아름다운 마음이 비친걸

《아저씨 얼굴도 비쳤어요. 그러니 아저씨 마음도 비친거지요?

《그럼, 나도 이 산촌을 귀중히 여긴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소녀애를 산협길에 세워둔 승용차에 데리고가서 옆좌석에 앉히시였다.

《리향아, 마을까지 태워다주마. 나하구 함께 가서 널 버리고간 길석이랑 붙잡아 혼쌀내주자. 없으면 그애 부모한테라도 단단히 말해야겠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천천히 차를 모시였다. 승용차를 처음 탈지 모르는 산골처녀애를 되도록 몇분이라도 더 태우고싶으신것이였다.

승용차가 마을어구로 감아흐르는 옥계천다리를 건넜을 때였다. 기분이 흥떠서 앞만 내다보던 리향이가 불쑥 응석기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저… 정말… 길석이를 혼쌀내겠어요?》

김정일동지께서는 소녀애의 걱정어린 심중변화를 알아챘으나 짐짓 엄한 낯색으로 말씀하시였다.

《아무렴, 가만둘수야 없지. 저의 동무를 버리고도 여직껏 나타나지 않는걸 봐라.》

《아저씨, 길석이를 용서해주자요. 사실 그앤 좋은 애예요. 나한테 잠자리도 잡아주구, 오미자랑 찔광이랑 따줘요.》

《음, 리향이가 정 그렇다문 내 좀 고쳐 생각해보겠다.》

그러는 사이에 차는 마을길에 들어섰다. 구평마을사람들이 멈춰서서 천천히 지나가는 낯선 승용차안에 리향이가 앉아있는것을 놀랍게 본다.

탈곡장옆의 넓다란 마당에서 한무리의 아이들이 공을 차며 뛰놀고있었다. 애들은 놀음을 멈추고 자기들한테로 다가오는 승용차를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아이들이 몰켜서있는데서 열두어걸음 못미쳐 차를 멈춰세우고 나직이 물으시였다.

《길석이가 어느 애냐?》

《저기, 가운데 공을 안고있는 애예요.》

소녀애가 속삭이듯 말했다.

《음, 고수머리구나. 의젓하게 생긴 총각앤데 몇살이냐?》

《열살… 나보다 세살 우예요.》

《리향아, 그럼 아저씨가 길석이를 용서해주겠다. 혼자 내리거라. 차문은 주밋거리지 말고 멋지게 팡 닫아라.》

김정일동지께서는 마을애들앞에서 소녀애의 인끔을 한껏 올려주고싶으시였다.

아이들은 불현듯 승용차에서 척 내리는 리향이를 눈이 둥그래서 바라보았다. 너무도 놀랍고 신기해하는 표정들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리향이에게 손을 저어보이고는 차머리를 돌리시였다. 그이께서는 한순간 소녀애의 정채로운 오목눈에 눈물이 그렁히 고인것을 보시였다. 승용차가 멀리 마을길을 벗어날 때까지 리향이는 작은 손을 흔들고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추억에서 깨나시였다. 수령님을 보좌해드릴 때 그리고 현지실무지도를 다니실 때 있었던 밤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평범한 생활과 이야기들중의 한토막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15년전의 그 일이 류달리 따스한 감회를 불러일으켰다.

구평마을에 들리고싶으시였다. 그때의 샘도 있는지 찾아보고 마시고싶으시였다. 마을주변이나 큰길옆의 밭들보다 외진곳에 있는 이런 산장밭에서 실태를 더 잘 료해할수 있을것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푸름히 밝는 차창밖을 주시하며 기억을 더듬으시였다.

산옆의 울창한 소나무숲과 잡관목에 가리운 바위너설을 보자 차를 멈추게 하고 내리시였다.

그이께서는 산자드락길을 찾아 풀숲을 헤치며 걸으시였다. 티없이 정화된 차고 시원한 산골공기가 강물처럼 흘렀다.

사위는 고요하였다.

회색빛으로 밝아오는 하늘을 떠받고선 산봉우리와 골짜기에는 안개가 감돌고있었다. 면사포같은 안개발은 저 앞등성이에 펼쳐진 산장밭에서도 굼실대고있었다.

김정일동지의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쌍곰바위를 찾아내신것이였다. 웅크린 곰같은 바위는 세월의 풍화에 더 퇴색해선지 아주 검은 색갈이였다.

바위밑에는 그전처럼 옹달샘이 있었다.

누가 손질했는지 샘터주변에는 잡초가 없었고 흙이 부스러져내리지 않게 세워놓은 큼직한 돌들에는 푸른 이끼가 두텁게 덮여있었다. 샘터 밑바닥에는 그때처럼 까뭇하고 하얀 돌이 여러겹 촘촘히 깔려 알른거렸다. 그런 돌이 깔린 좁은 물곬으로 수정같은 샘물이 넘쳐나서 졸졸 흘렀다. 바위턱에는 파란 끈이 달린 조롱박이 놓여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무릎을 꺾고앉으시여 조롱박으로 샘물을 떠드시였다.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그이의 눈앞에서 한순간으로 압축되여 생생히 되살아났다. 옹달샘옆에 쪼그리고앉은 꽁지머리소녀애, 보조개 패인 제 얼굴을 거울같은 샘물에 비쳐보던 귀엽고 연약하면서도 산촌의 기개와 의지를 어린 가슴에 품은 소녀애,

어쩐지 백리향꽃이름을 가진 그 소녀애가 옹달샘을 이렇게 알뜰히 가꾼것만 같은 생각이 드시였다.

그애가 구평마을에 아직 있을가? 젠 스물세네살난 숙성한 처녀가 됐을것이다.

샘물은 그때처럼 가슴이 쩡 열리게 물맛이 좋았다. 먼길의 피로와 잠기가 단번에 가셔지는것 같았다.

《자, 운전수동무도 한조롱박 마시오. 우리 아침요기는 이 시원한 샘물로 하자구.》

김정일동지께서는 조롱박에 샘물을 가득 떠서 운전수에게 주시였다.

사위는 바람한점 없이 고요하였다. 나무가지들사이로 흐르는 안개흐름소리마저 들릴듯 싶다. 숲속 어디선가 잠을 깬 산새 몇마리가 조심스런 목청으로 새날의 기쁨을 울어본다.

문득 산아래켠쪽에서 삽질소리같은것이 간간히 들렸다.

이 새벽에 어느 농장원이 벌써 밭에 나왔는가?

김정일동지께서는 이슬이 흠뻑 젖은 풀숲을 헤치고 산길을 내리시였다. 바지가랭이에는 지난해의 도꼬마리씨와 도깨비바늘같은 풀씨들이 잔뜩 달라붙었다.

조금후에 그이께서는 옥계천기슭의 넓다란 묵은 잡초밭에서 삽질을 하고있는 사람을 발견하시였다.

물날은 농립모를 쓴 그는 삽으로 잡초밭의 웅뎅이안에서 시꺼먼 흙을 파서 한쪽에 무져놓고있었다. 삽날을 검은 시루떡같은 흙속에 쿡 박아 듬뿍 떠올리는 솜씨는 여간 아니였다. 더운 김이 피여오르고 비릿하면서도 구수한 개바닥 흙냄새가 물씬 풍겼다.

《수고하십니다.》

김정일동지의 나직한 인사말에 그 사람은 일손을 멈추고 허리를 폈다. 늙수그레한 사람이였다. 팔소매로 얼굴의 땀방울을 훔치며 무랍없는 표정을 짓던 그는 놀라고 당황해서 흙구뎅이에서 나왔다. 이 새벽에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를 만나뵈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것이였다. 그는 농립모를 벗어들고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그의 장알이 박힌 굳은 손을 잡아주시였다.

《구평농장원입니까?》

《예, 제 여기 분조장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 흙은 파서 뭘하려고 합니까?》

《우리 작업반 밭들에 줄 비료를 마련할가 해서 그럽니다. 반장이 강냉이 덧비료때문에 하도 마음을 쓰기에 제가 옛날 늪자리던 이곳을 파봅니다. 이렇게 건 개흙에다 진거름을 좀 섞으면 화학비료 못지 않습니다.》

《작업반에 카리나 류안같은 화학비료가 넉넉치 못한 모양입니다.》

《작업반적으로 많은 량이 모자랍니다.》

《그렇습니까!》

김정일동지께서는 근엄한 낯빛을 지으시였다.

분조장은 농립모 가장자리를 매만지며 걱정스레 말씀드렸다.

《관리위원장은 군에 비료 실으러 갔다가 어제밤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경영위원회에서 화학비료사정이 군적으로 몹시 긴장하니 내려가 기다리라고 하더랍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으시였다.

화학비료사정이 이 구평협동농장과 산골군인 령천군에 국한된것 같지 않다. 군에서 내려보내주지 못하는것을 보면 도에도 화학비료가 부족된다는것이 아닌가. 리장천위원장은 이런 실정을 모르는가? 알고있으면서 나를 안심시키자고 그랬는가?

김정일동지께서는 가슴속에 커다란 바위가 떨어져내린것 같은 충격을 느꼈지만 어두운 낯빛을 가시고 말씀하시였다.

《동무는 참 좋은 거름원천을 찾아냈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무릎을 꺾고앉으시여 농장원이 파놓은 흙을 한웅큼 쥐여 부스러뜨려보시였다. 늪자리의 물풀같은 식물들과 진감탕이 오래 묵어 썩어서 검은 윤택이 도는 알짜 유기질비료였다. 늪자리가 넓어 량도 수백톤은 실히 될것 같았다.

《삽을 이리 주십시오. 내가 좀 파봅시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굳이 말리려드는 농장원의 손에서 삽을 당겨 개흙을 파내시였다. 시루떡같은 흙이였다. 밑층으로 내려갈수록 질이 더 좋은것 같았다. 한동안 땀발이 솟도록 일을 하시던 그이께서는 삽자루에 팔굽을 얹고 물으시였다.

《여기 구평마을에 백리향이라고 나이가 스물두셋쯤 됐을 처녀가 있지 않습니까?》

《있습니다. 늙은 어머니하구 사는 처녀지요. 바로 우리 작업반장입니다.》

《아, 그런가요! 그 처녀를 만나보려면 마을에 가야 되겠지요?》

《아닙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이제 반장이 이곳으로 올겝니다. 어제밤 늦게 작업반실에서 비료걱정을 하다가 의논하기를 새벽에 저는 여기에 나오구 반장은 웃골짜기에 가기로 했습니다. 마침 저기 반장이 옵니다.》

새벽음영이 가시지 않은 컴컴한 잡관목숲사이길로 작업복바지가랭이를 장화목에 밀어넣은 산촌처녀가 걸어오고있었다.

한손에는 삽을 쥐고 다른 손에는 보자기에 무엇인가 싸든 처녀였다.

《덕춘아저씨…》

스스럼없는 명랑한 목소리로 부르던 처녀는 그만 흠칫 놀라 서버렸다. 분조장이 급히 그한테로 다가가며 속삭이듯 말했다.

《반장, 어서 와 인사를 올리라구.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오셨어.》

순간 처녀의 볕에 탄 감실한 얼굴에 기쁨과 환희의 물결이 굽이쳤다. 처녀는 반달음으로 뛰여와 인사를 올렸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사뭇 놀랍고 기쁘시여 눈섭을 치켜올리시였다. 이 숙성한 처녀가 분명 열다섯해전 샘터에서 만났던 소녀애란 말인가?!

새벽빛에 환히 드러난 처녀의 얼굴에서 섧게 울던 꽁지머리소녀애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정채롭던 오목눈과 자존심으로 꽉 다물렸던 작은 입, 볕에 탄 볼에 알릴듯말듯한 보조개 그렇게 추억을 더듬어 뜯어보고서야 어렸을 때 모습을 가늠할수가 있으시였다.

기쁘고 반가웠지만 자신을 그때 승용차를 몰고왔던 아저씨라고 말할수는 없으시였다. 소꿉시절나이때 어느 가을날에 마을애들이 《팽가쳐서》 산자드락의 숲에서 울고있었다고 그래서 승용차에 태워 마을까지 데려다준, 까맣게 잊어버렸을 별치 않은 일을 이제와서 끄집어낼수는 없으시였다.

《어디 보자구. 반장동무가 이 분조장동무보다 더 좋은 개흙을 찾아냈나 이런! 머리수건에 싸가지고 왔구만.》

김정일동지께서는 리향이가 풀어놓은 머리수건에서 꺼멓게 윤기나는 흙을 만져보고 기뻐하시였다.

《여기 늪자리흙 못지 않게 걸구만, 걸어. 이런게 많던가?》

《예, 웃골짜기 습지에 한길 되게 깔려있습니다.》

《그럼 작업반비료문제는 풀수 있겠소. 아니, 그러지 말고 관리위원장동무랑 의논해서 온 구평농장청년들을 동원하라구. 지난 시기 수령님께서는 화학비료에만 매달리지 말고 유기질비료를 널리 리용하라고 교시하시였는데 동무들이 수령님의 뜻을 받들고 부족되는 화학비료를 보충하고있으니 정말 훌륭한 일이요.》

리향이는 수줍어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그이의 숭고한 모습을 우러렀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바지가랭이기슭은 이슬에 푹 젖었고 풀씨들이 묻었다. 구두에는 검은 흙이 달라붙었다. 농촌사람이나 다름없는 그이의 평범한 모습앞에서 처녀는 눈물이 그렁해서 말씀올리였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날이 다 밝았습니다. 마을에 가십시다. 물도 마시고 우리 집에서 아침식사를 하십시오.》

김정일동지께서는 삽자루를 분조장에게 넘겨주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시였다.

《반장동무, 우린 여기 오다가 저 산자드락에서 샘물을 마셨소. 쌍곰바위샘을 말이요.》

삽시에 처녀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짙은 의혹이 어렸다.

《그 샘을 어떻게 아십니까?》

《알지. 그전날 이고장을 다닌적이 있으니까. 샘을 아주 잘 거뒀던데 주인이 누군가? 리향동문가?》

처녀는 겸손으로 하여 얼굴이 발그스레 상기되였다.

《아닙니다, 제가 아니라 우리 농장사람들이 샘물을 마실 때마다 손질하군 합니다.》

《음. 그렇소 반장동무, 나하구 산장밭을 좀 돌아볼가?》

리향이는 행복에 겨워 흥분한 가슴을 진정하지 못한채 강냉이영양단지모를 옮긴 산장밭으로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를 안내해드렸다. 처녀는 그이의 옷이 더는 이슬에 젖지 않도록 자기가 앞에서 풀숲을 헤치고 되도록 편한 오솔길로 모시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는 리향의 머리속에는 아까부터 줄곧 의혹이 떠나지 않았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어떻게 산자드락의 숲에 감추어져있는 쌍곰바위 옹달샘을 아실가? 강렬한 의문에 시달렸지만 또다시 물을수는 없었다. 어쩐지 아득히 흘러간 어린 시절 해저물어가는 가을날 둔덕의 너설바위에 앉아 울고있는 자기한테 왔던 젊은 운전수아저씨가 떠오른다. 쌍곰바위샘물을 마셔보고 달고 시원하다며 웃으시던 모습, 팔을 걷고 샘물에 덮인 흙과 나무잎사귀와 검불을 걷어내고 차돌을 깔아주신 아저씨, 얼룩진 눈물자국을 닦아주고 승용차에 태워주던 아저씨를 어떻게 잊을수 있으랴.

리향이는 자기의 기억과 마음속에 해님처럼 소중히 간직되여있는 그날의 젊은 아저씨가 산장밭으로 함께 가시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모습과 자꾸만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럴수 없을것이라고, 자기의 생각이 너무나 엉뚱한것이라고 단정하면서도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해빛을 안은것 같은 따스한 감정은 분명 그분인것만 같이 여겨지는것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산장밭을 돌아보신 다음 리향이를 마을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승용차에 태우고 떠나시였다.

새벽음영이 가신 동녘산마루에는 장미빛노을이 서서히 퍼져갔다. 안개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이께서는 열다섯해전의 그날처럼 리향이를 곁에 앉히고 마을을 향해 산협길을 달리니 자신도 모르게 감회가 깊어지시였다.

《반장동무, 내 하나 물어볼게 있는데 이 구평마을에 길석이라는 동무가 있지?》

?!

리향의 얼굴에 놀라움과 기쁨, 의혹이 뒤엉킨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동무를… 아십니까?》

《좀 알지… 아버지는 그전날 여기 구평에서 작업반장을 했다는것 같은데.》

《그… 랬습니다.》

《지금은 뭘하나?》

《우리 농장에서 관리위원장으로 오래 일하시다가 심장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이름이 뭔가?》

《리운천입니다. 참 좋은분이였습니다. 우리 구평땅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당정책대로 농사를 더 잘 짓겠다고 아글타글 애쓴 분이였습니다.

우리 집을 돌봐주고 저를 정말 친딸처럼 귀여워해주었습니다.

백리향은 눈에 물기가 가랑히 맺혀 말을 이었다.

《림종시에 유언으로 자기를 마을 뒤산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이 농사짓는것을 보겠다고 농장살림이 꽃피는걸 죽어서도 보고싶다고 했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가슴이 아프시였다.

《반장동무, 생각나는구만 내 언젠가 당보에서 리운천관리위원장에 대한 기사를 읽었소. 생각나. 그래, 그러니까 리운천이가 농업위원회 리장천위원장의 동생이지?》

《예.

김정일동지께서는 길석이가 지난날 이고장 덕평과 구평 일대에서 실농군가문으로 꼽히던 리씨일가의 후손이라는것이 진정 반가우시였다.

《그래, 길석이가 농장에서 뭘하오?》

리향이는 입술을 깨물며 잠자코있더니 겨우 대답을 올렸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그 동무는… 우리 구평에 없습니다.》

처녀의 목메인듯한 힘겨운 목소리가 김정일동지의 가슴에 젖어드시였다. 길석이가 고향농촌에 왜 없는지? 혹시 어렸을 때처럼 리향이를 《버리지》나 않았는지?

소꿉시절의 우정이 꼭 애정으로 자라는것은 아니지만 그이께서는 소녀애를 숲에 떨궈두고 달아난 길석이의 심술궂은 행동을 장난이 아니라 순박하고 철없는 우정의 한 갈래로 보시였다. 그래서 이 한적한 산촌에 사랑의 꽃으로 피여나기를 자신도 모르게 희망하시였던것이다.

《길석이가 어디로 갔소?》

《그 동무는… 농업대학을 졸업하고… 도행정위원회에서 지도원으로 일하고있습니다.》

《그러니 구평을 아주 떠났구만…》

김정일동지께서는 섭섭하시였다. 인제는 의젓한 청년으로 성장했을 길석이를 리향이랑 함께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을가. 어린 시절의 일도 회고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수도 있을터인데.

《리향이, 말해보오. 길석이가 구평을 왜 떠나갔소? 배치를 그렇게 받았나? 리향이하구는 사이가 어떤가?》

《…》

처녀의 아름다운 오목눈에 눈물이 가랑히 맺혔다.

《어서 말하오. 죄다 들어보자구.》

친애하는 그이의 따뜻한 말씀에 리향이는 힘을 얻었다. 처녀는 어찌할수 없는 괴로움, 번민, 울분을 조그만 심장에 품고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했었다. 이제 그 모든 사연을 말씀드리자니 어쩐지 수줍음도 부끄러움도 들지 않았다. 봄날의 해빛과도 같은 그이한테 죄다 말씀드리면 얼어붙었던 가슴이 풀릴것 같았다.

…리향이는 소꿉시절부터 길석이한테 정들었다. 때없이 자기를 울리고 심술궂게 수림속 골짜기에 버리기도 하고 다툼질도 자주 하는 소년이였지만 왜 그런지 싫지 않아 늘 그한테 붙어다녔다.

풋철이 들어가던 소년기의 변덕이 심한 천진한 우정은 학창시절의 변화많은 성장속에서도 고유한 순진미를 잃지 않았다.

송아지우정은 감추어진 수줍고 은근한 정으로 자라났다. 미구에 그것은 골짜기를 흐르는 시내물줄기마냥 두 청춘의 열정적인 가슴을 적시였다.

몇해전 농업대학의 마지막 여름방학때 길석이는 마을에 왔다. 그의 집은 령천읍에 있었다. 군철제일용품공장 부지배인을 하는 맏형을 따라 온 일가가 구평을 떠나간것이였다. 길석이네 옛집은 농산작업반 탁아소로 되였다.

길석이는 군으로 가던 길에 들린것이였다. 자기가 나서자란 고향산천과 친근한 마을사람들을 찾아보고싶었고 아름다운 처녀로 숙성한 리향이를 만나고싶은 충동에서였다.

그날밤, 리향이와 길석은 마을길을 걸었다. 앞날에 대한 행복하면서도 두려운 언약은 서로 피하며 뒤로 미루고 한고향 물을 먹으며 앞뒤집에서 자란 구김살없이 다정한 벗의 감정을 앞세우고 걸었다.

무더웠으나 골짜기와 수림속에서 서늘한 대기가 흘러오는 8월의 밤이였다. 재빛구름뭉치가 드문히 낀 검푸른 창공에는 열사흘달이 떴다. 은회색의 아름다운 실마냥 오리오리 짜진 달빛은 전등불이 반짝이는 집들을 살풋이 감싸고 동구밖에 소소리높이 솟은 백양나무의 길다란 그림자를 마을에 던졌다. 멀리 옥계천의 물소리를 타고 면사포은 밤안개가 흘러온다.

군으로, 도시로, 대학으로 간 학창시절 벗들의 이야기도 동이 나고 산촌의 정적속에 두 젊은이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리향의 가슴속에는 어째선지 앞날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스며들었다. 멋진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향수내를 풍기는 지식청년인 길석이앞에서 표현력도 없고 농사일밖에 아는것이 없는 처녀는 스스로 위축되고 소외감을 느꼈다. 대학졸업생과 농장처녀 아득한 송아지시절 산으로, 개울로 뛰여다니던 철부지인생으로 시작된 길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리향이는 주저하면서도 솔직한 심정을 터놓았다.

《길석동문… 날 농장원이라고 낮추보지 않지요?

《어떻게 그런 말을 다해. 리향이, 난 대학생이지만 농촌에서 자랐거든.》

길석의 소탈한 말은 리향이에게서 울적한 기분을 깨치고 자신심과 본래의 활달한 성격을 돋궈주었다.

《배치담화를 했어요?》

《아니… 래달쯤에 할거야.》

《길석동무… 이제 대학을 졸업하문… 우리 농장에 오지요?》

《그야… 오지 않구… 와야지…》

《정말이예요?

리향은 아름다운 살눈섭을 치켜뜨며 다짐하는 눈길로 길석을 쳐다보았다. 길석은 눈에 웃음을 지었다. 어딘가 자신없는, 옹색한 순간을 피하려는것 같은 기색이다.

《그건… 그때 봐야 알거야, 대학을 졸업하문 중학생들처럼 가고픈데로 가는게 아니잖아. 하지만 리향이, 내 올게. 구평농장 기사로 오겠어.》

《꼭 와요. 그래야 길석동무가 아버지산소랑 돌보지.》

《온다는데…》

《말룬 안돼. 살구나무집 할아버지는 말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붓은 자욱을 남긴다고 했어.》

《종이에 쓰란?》

《아니…》

《그럴것없이 그네를 타자. 리향이는 그네를 잘 타지 않아. 쌍그네를 타자.》

처녀는 본능적인 수줍음에 어깨를 옴츠린다.

《남들이 보면 어쩔라고?!》

《밤에 누가 보겠어. 보면 뭐래?》

《그럼 어서 타.》

리향이는 활짝 웃으며 길석의 손을 잡고 잔디깔린 공지의 느티나무로 달려갔다.

미구하여 아름드리 느티나무에 굵은 삼바로 드리운 그네가 두 청춘의 중량과 률동에 부자연스레 휘청거리더니 푸른 달빛이 가득찬 물속같은 창공으로 서서히 날아올랐다.

밤바람이 길석이의 옷섶과 리향이의 치마자락을 뒤섞어놓았다.

무언가 작은 곤충이 얼굴에 맞았다. 발밑에서 검은 땅과 숲과 산발이 고패치며 뒤설렌다.

길석의 손이 삼바줄을 더듬어 슬그머니 리향이의 손을 꽉 그러쥔다. 산촌처녀의 손보다 부드러운 대학생총각의 손이다.

리향은 길석의 눈에서 동요의 빛을 보았다.

《무서워?》

《아니…》

대답은 자신이 없다.

아무리 총각이라도 처녀들처럼 익숙치 않은 그네의 사정없는 흔들이에 겁이 난다. 자존심을 낮추고 조심스레 묻는다.

《그네줄이 끊어지지 않을가?》

《삼바줄이야. 단오날에도 일없었어. 겁나문 하늘을 봐.별이 참 많지?》

리향이의 아름다운 눈, 길석의 당황하면서도 열정이 어린 눈이 밤하늘을 더듬는다.

수만의 별을 품은 둥근 하늘은 그네의 률동에 따라 머리우에서 끊임없이 반원을 그린다.

벌써 밤이 깊어가는지 《큰곰》이 꼬리를 드리우고 뚱기적 누울 차비를 하며 《새끼곰》을 자기 곁으로 부른다. 백조별무리는 엷은 비단띠같은 은하수를 따라 기운차게 난다. 소담한 직녀별은 은하수건너편의 의젓한 견우별을 애타게 바라보며 사랑에 단 몸을 깡그리 불태운다. 순간이라도 빛이 식어지면 견우별이 실망하고 낯을 돌릴가 두려운듯 싶다.

《별이 참 많지?》

리향이가 다시금 속삭이듯 묻는다. 처녀는 자기의 탄력있는 봉긋한 가슴이 길석의 넥타이맨 앞가슴에 대이지 않도록 애써 조심한다. 그네의 률동, 바람결따라 풍기는 찔레꽃냄새 비슷한 향수내는 싫지 않고 총각의 살뜰한 체취로 느껴진다.

《리향이 어렸을 때 다투던 일이 생각나?》

《너무 많이 다퉈서…》

《별이 6천개라던거 말이야.》

《생각나요.》

《리향이 말이 맞아. 별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아. 수억수만개야. 우리 눈에 보이는것, 세일수 있는게 6천개정도지

률동이 숙어든 쌍그네는 별무리가 보석처럼 흩어진 검푸른 하늘 천정밑에서 고요히 흔들거린다. 세월의 흐름에도 변함없는 별무리속에서 천진한 동심에 놀던 아름다운 시절을 찾아보고싶은 그들이다.

《길석동문 저 하늘에 자기 별이 있어요?》

《나의 별?!》

《그래요. 하늘에 별 하나 땅우에 나 하나 동요에도 있잖아요.》

《난 어느 별이 내 별이라고 점찍어두지 못했어… 리향이 별은 있어?》

《응.》

《어느 별이야? 북두칠성? 아니면 삼태성중에

《아니, 내 별은 그렇게 밝지 못해요. 천문학자들이 이름도 붙이지 않은 무명별이예요.》

리향은 손을 들어 하늘복판을 흐르는 은하의 물결속에서 겨우 깜박이는 작은 별을 하나 가리켜보였다. 그러자 길석이는 불만스러워 한다.

《왜 그런 보잘것 없는 별이야?!》

《난 여기 북대봉산줄기밑의 이름없는 농장처녀가 아니예요. 외로운 작은 별이지만 내겐 소중해요. 넓은 하늘구석에서도 변함없이 빛을 뿜고있으면 되지요.》

《아니, 그러지 마. 리향인 저 밝고 아름다운 직녀성이야. 그리고 난 견우성이고

홀어머니도 마을사람들도 그들의 사랑을 알았다.

그러나 《소몰이총각》은 《베짜는 처녀》와의 약속을 어겼다. 농업대학을 졸업한 길석은 구평농장이 아니라 도행정위원회 지도원으로 된것이였다.

길석이한테서는 배치가 그렇게 되여 할수 없었다고 량해를 구하는 편지가 왔다.

흰눈이 수북이 내린 그해 겨울날 아침,

탈곡장옆의 정류소에는 군으로 떠날 차비를 하는 뻐스가 발동소리를 부릉거리며 기관을 덥히고있었다. 사람들은 벌써 반나마 뻐스에 올랐다.

벼낟가리뒤에는 아까부터 리향이와 길석이가 마주서있었다. 가방끈을 반외투를 입은 한쪽어깨에 걸친 길석은 초조 서성거렸다. 윤기도는 밤색가죽단화밑에서 눈밟히는 소리가 괴롭게 울렸다.

풍덩한 솜신을 신고 작업솜옷을 껴입은 리향의 차림새는 처녀라기보다 농장일과 생활에 드바쁜 텁텁한 농촌아낙네와도 비슷하였다. 탈곡장에서 일하는 리향이를 불러낸 길석은 처녀의 먼지오른 얼굴과 짚검불이 묻은 머리수건을 보며 동정과 련민의 정을 강하게 느꼈다.

《리향이, 밤새 생각한게 그게 다요?》

리향은 축축히 젖어드는 살눈섭을 내리깔며 차거운 아침공기속에 풍기는 향수내를 서글프게 맡았다. 그것은 사랑하는 총각의 체취이지만 고향산촌의 정든 땅과 숲의 신선한 대자연냄새와는 비교할수 없는 가공된것이였다.

《그럼 내가 리향이한테 시집을 와야 하나? 내 그만큼 설복했으면 말을 들어. 땅이구 숲이구 샘이구 개울이구 소녀시절에나 알맞춤한 생각이지. 사회가, 시대가 변천하지 않아. 농촌도 도시를 닮아가는걸 봐.》

《그렇지만… 저절로 닮아가는건 아니지요. 영철동무와 재숙이도 가고 길석동무와 나도 가고 저마끔 구평을 떠나면 우리 구평은 누가 작은 도시로 만들가.》

《리향이 맘을 내 모르는게 아니야. 그렇지만 정작 생활은 그렇지 않아. 솔직히 말해봐. 리향인 그래 번화한 도소재지에 가 살고싶지 않아?》

《…》

《보라구. 대답을 못하는거. 고집부리지 말구 승낙해. 응?》

리향은 고개를 숙이고 솜신의 뭉툭한 코숭이로 언눈을 비비였다. 녹아서 물기진 눈은 얼음이 져 반들거렸다. 그 다져진 눈얼음우에 처녀의 눈물방울이 뚤렁 떨어졌다. 리향은 길석이를 잃게 될가봐, 그와 영 헤여질것 같아 겁이 나고 슬펐다. 어쩌면 자기의 사랑을 그리도 몰라주는지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고향 구평마을을 떠나 도시로 간단 말인가. 마을사람들과 정든 모든것을 버리고 갈수 있을가? 살구나무집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들, 딸, 손자, 손녀들까지 구평땅에서 농사지으면서도 리향이 보고는 길석이를 따라 도시에 가 살게 됐다고 기뻐했었다. 리향이는 자기의 앞날을 축복해주는 고향마을사람들앞에서 부끄러움과 심한 가책을 느꼈다. 자기들의 사랑과 결혼이 나서자란 이 땅의 귀중함과 래일을 떠난 너무도 리기적인것이라는 생각이 무섭게 들었다. 리향이는 처음으로 자기 마음이 고향의 숲과 옥계천처 맑지도 푸르고 아름답지도 못하다는것을 고통스럽게 느끼였다.

종시 리향이의 대답을 듣지 못한 길석은 불만을 삭이지 못해 푸 하고 거친 한숨을 내쏟았다.

뻐스가 재촉하는 경적소리를 냈다.

《좋아. 그럼 난 도에 가서 리향이를 기다리겠소. 다시 잘 생각해보오.》

길석이를 태운 뻐스는 탈곡장의 하얀 눈우에 바퀴자국을 찍으며 멀어져갔다.

리향은 뻐스가 산굽이를 돌아 사라진 다음에야 샘처럼 솟구치는 눈물을 닦았다.

이야기를 마친 리향의 눈에서는 그때처럼 맑은 이슬이 가랑히 맺혔다.

승용차는 옥계천다리목어구에 멈춰서 있은지도 퍼그나 되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리향이가 수줍음과 겸손으로 사연을 다 터놓지 못하고 두간두간 이야기했지만 말하지 못한 모든것까지도 짐작하시였고 감성으로 받아들이시였다. 길석이를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고향땅에 대한 사랑과는 바꾸지 않는 강직한 처녀… 그래서 여태 길석이를 원망하면서도 못잊어하고 애닲게 그리워하는 처녀였다.

송아지시절의 천진한 우정, 순결한 쌍그네 약속이 끝내 현실로 되지 못하다니 하얀 차돌을 치마폭에 싸들고 고향샘을 가꾸던 눈매고운 꽁지머리소녀애 자신은 이 백리향꽃이 비바람에 시들지 않고 아름답게 피도록 빛을 줄수 없단 말인가.

《리향이 일이 참 안되였구만… 안되였어…》

그이께서는 이렇게밖에 말할수 없는것이 괴로워 한동안 앉아계시다가 승용차에서 내리시였다.

《그러니 지금 구평에는 리운천이네 일가가 한사람도 없단 말이지…》

김정일동지께서는 한손을 허리에 얹고 젖빛안개 걷히는 구평마을쪽을 바라보시였다. 이고장 점토로 구운 붉은 기와지붕을 떠인 하얀 벽체의 집들이 소담스레 들어앉았다. 연기가 곧추 피여오르는 굴뚝들 너머로 하늘높이 솟은 두그루의 뽀뿌라나무에 새무리가 날아든다. 게으른 수탉들이 뒤늦게 승벽내기로 목청을 돋군다. 뜨직하면서도 구성진 소영각소리, 먹이를 재촉하는 돼지들의 울음소리는 옥계천 여울목의 은은한 소리와 화음을 이루어 특색있는 자연의 산촌기악곡이 그대로 울리는것 같다.

서느러운 바람결을 타고 나무타는 구수한 연기내와 산나물 볶는 내가 엇섞여 풍겨온다.

수도의 거리에서는 느낄수 없는 류다른 산촌정서이다.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산촌이다. 그러나 어쩐지 산골자연이 주는 아름다움, 오랜 농촌세습으로 형성된 목가적인 아름다움이 더 짙게 안겨온다. 지붕마다 그전날의 벼짚이영들은 말끔히 없어지고 구운 점토기와와 검은 재색빛갈의 세멘트기와를 이여 마을이 한결 환해보이지만 크게 달라진것 같지는 않다. 육안으로 보건대도 큼직큼직 할일이 여간 많지 않다. 산기슭의 납작한 작은 회관대신 마을복판에 문화회관을 덩실히 지었으면 좋겠고 그 앞에는 못을 파고 구름다리도 놓아야 한다. 구평마을사람들이 저녁에 회관에서 영화를 보고나와 못주위를 즐겁게 거닐기도 하고 못가의 의자에 앉아 속삭일수도 있고 한담을 나눌수도 있을것이다. 마을 뒤산의 잡관목숲은 베여버리고 과수원을 일구자. 그아래 산기슭에는 농장 돼지우리와 닭우리를 규모있게 짓고 축산반을 크게 변모시켜야 할게다. 리운천관리위원장은 농사에만 전력하다나니 이런 일에 머리를 돌리지 못했고 구평마을을 도시 못지 않게 꾸리지 못한채 애석하게 뒤산에 묻혔다.

그의 령혼이 훌륭히 변모된 마을을 보고 고이 잠들수 있게 해야 한다.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이고장에 태를 묻고 자랐고 대학을 졸업한 길석이와 그를 사랑하는 처녀 백리향이 그리고 고향땅을 귀중히 여기는 구평마을청년들이 해야 할것이다. 그런데 마땅히 선봉에 서야 할 길석이는 지금 어데 있는가? 이것이 어찌 구평마을에 한한 일이겠는가.

시간이 퍼그나 흘렀으나 김정일동지께서는 차에 오르지 못하시였다.

아호비령산줄기밑의 외진곳에서 무명별로 조용히 반짝이고있는 처녀의 불행한 사랑에 밝은 빛을 안겨주지 못하고 떠나자니 발걸음이 천근같이 무거우시였다. 처녀의 운명은 산촌의 앞날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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