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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동지께서는 일군들과 뒤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침실로 가시였다. 서류가방을 탁자에 놓고는 긴 쏘파에 편히 몸을 묻으시였다. 온 하루 거치른 바다와 땅에서 쉬지 못하고 다녀서인지 산을 짊어진듯 몸이 무거우시였다. 독서라도 하면서 피로를 풀고싶으시였다.

그이께서는 가방에서 《화학의 세계》란 책을 꺼내 펼쳐드시였다. 통속적으로 흥미있게 서술한 책이여서 짬짬이 보았는데 벌써 거의다 읽으시였다. 책을 보느라니 고중시절에 간직했던 화학, 물리 학자들에 대한 선망과 존경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나시였다.

천문학자들이 관찰과 망원경, 수학적계산으로 천체운동설을 밝히고 우주, 거시세계를 설명했다면 물리학자들과 화학자들은 현미경과 실험으로 분자와 원자, 핵과 전자, 양성자와 중성자를 발견하여 물질의 복잡한 구조와 속성, 미시세계를 펼쳐놓았다. 화학자들은 행성과 우주세계의 헤아릴수 없이 방대한 사물현상을 도무지 l00개 남짓한 원소들의 활동으로 설명하며 그것들의 결합과 분해로써 인간의 복리에 필요한 새로운 물질을 창조해나간다.

정치가들은 화학자들이 들여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의식구조, 사상과 심리현상들을 파악하고 사람들을 이끌어 시대와 력사를 창조해야 한다.… 물질세계가 원소들과 그것들의 강력한 끌힘으로 이루어졌다면 인간사회를 이루는 끌힘은 무엇이겠는가? 지도일군이라는 《원소》와 인민이라는 《원소》는 무엇으로 굳건히 결합될수 있는가? 인간세계와 화학세계사이에는 어떤 류사성이 있는가? 유럽의 어느 한 학자는 인간도 포함한 생물체를 원소로 분석했다. 그 화학자의 눈에는 인간유기체도 산소와 수소, 질소 등 원소들의 기묘한 화합물로 보인다. 그러나 정신심리현상들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어느덧 책의 세계로부터 현실로 돌아오시였다.

눈앞에는 비료련합기업소 생산협의회 광경이 선히 떠올랐다. 여기 흥남의 로동계급도 검덕이나 룡양의 로동계급 못지 않게 정치적열의가 높다. 당에서 하자고 하면 무조건 호응해나서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방도를 세우고 앞장에서 이끌어야 할 일군들은 어딘가 실무적이고 소심한데가 있으며 차거운것이 느껴진다. 일군들과 로동자, 기술자들의 호흡이 잘 맞지 않는것 같다. 토론하던 사람들이 도당책임비서나 화학공업부장의 눈치를 보며 할 말을 다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가셔지지 않는다.

혹시 그들 두 일군이 당권과 경제지도권을 가지고 로동자, 기술자들의 견해를 묵살하거나 창발성을 억누르지는 않았는가? 북천강화학공장에서 연구한 P촉매도입문제를 못마땅스레 대하며 론의할 가치가 없다고 일소해버리는 허상민의 태도를 평시의 그런 사업관점의 연장으로 봐야 하지 않겠는가? 기존설비로 생산을 늘이는 방안은 오직 기술혁신에 있다. P촉매제의 질에 따라 비료생산이 내려가고 올라간다는것은 십분 있을수 있는 전제이며 촉매제의 갱질에서 증산예비를 찾는다는것은 리치에 맞는 일이다. 그런데 왜 허상민은 도리머리를 젓는가? 전혀 승산이 없는 일에 차웅섭이란 지배인이 발벗고 나섰겠는가.

김정일동지께서는 종시 잠을 이룰수 없어 혼방직웃옷을 어깨에 걸치고 소풍삼아 밖으로 나오시였다.

서늘한 밤공기가 물결마냥 밀려든다. 소나무밭의 둔덕진곳에 자리잡은 숙소여서 어둠속에 잠긴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였다. 큰 거리의 아빠트들과 단층사택마을의 창문들은 거의 불이 꺼져있었으나 멀리 비료련합기업소구역은 불빛이 명멸하고있었다. 장방형건물들의 창문과 지붕의 채광창들로 쏟아져나오는 불빛에 질안탑들과 가스저장탕크들이 어둠속에서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숙소마당을 천천히 거니시며 이 도시에 살고있을 생당쑥물부리의 주인을 생각하시였다. 아까 부관은 비료공장에서 물부리의 임자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평남도쪽에 출장을 갔던 사람은 여러명이였는데 다 남자들이였다.

그이께서는 수십만 인구의 로동자도시에서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찾아보려는 자신의 생각이 너무 허망스런 느낌이 드시였다. 하건만 녀인을 찾으려는 생각을 좀처럼 버릴수 없으시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향긋한 쑥내풍기는 생당쑥물부리를 따스한 손에 감싸쥐시였다.

숙소마당가에 그이의 무거운 발자국소리만이 들린다.

고요한 밤이였다.

잠든 로동자도시우로 별이 가득찬 검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반원형의 하늘 한끝 공장숲너머 아득히 멀리 심연같은 어둠이 덮인 수평선에 뿌리박고있었다. 은하수에 실려 흘러간 별들은 그 검은 수평선우에 쏟아져내릴듯 싶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별들의 흐름을 따라 머리우 광활한 우주를 가리운 휘장과도 같은 둥근 하늘천정에 눈길을 돌리시였다.

별가족들이 하늘폭 여기저기 살기 맞춤한곳에 오붓이 둘러앉아 빛을 뿌리고있다. 큰개와 작은개 별자리들, 오리온별자리는 들꽃마냥 피여있다. 남쪽에 있는 처녀별자리의 1등성인 스피카는 밀이삭처럼 아름답게 빛나고있다.

불현듯 유년시절의 어느밤에 어머님이 조용히 불러주시던 《형제별》동요가 떠오르시였다.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지내더니

웬일인지 별하나 보이지 않고

남은 별이 둘이서 눈물흘리네

 

어머님의 서정깊은 노래를 들으며 은하수를 타고 광막한 저 하늘 멀리에 아직 있을것만 같은 유년시절로 가고싶으시였다. 어머님의 따스한 무릎에 앉아 신비한 별들의 전설을 듣던 밤이 그리우시였다.

《…아득한 옛날 처녀별자리의 녀신은 처음으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하늘에서 내려왔단다. 그는 땅에서 인간과 더불어 사랑하며 참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였지. 그러나 사람들이 서로 거짓말을 하고 욕심을 앞세우며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것을 보고는 슬프게 생각하던 나머지 밀이삭을 가지고 다시 하늘에 돌아가서 처녀별자리로 되였단다.

자연현상에 아름다움과 정의를 부여하고 그것을 인간의 감정세계에 깊이 끌어들이시는 다감한 어머님… 유년시절의 밤, 그이는 잠도 잊고 정채도는 눈으로 밤하늘의 뭇별들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신다.

어린 그이께서는 별이 되고싶으시였다. 해님처럼 큰 별이 되면 온 세상이 따스하도록 밝고 환하게 빛을 뿌릴수 있을것이였다. 그래서 밀이삭을 가진 별이 소원하는대로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싶으시였다. 너무도 일찌기 어머님의 사랑을 잃고 소년시절에 들어선 그이께 있어 별들에 대한 애착은 더 각별하시였다. 쓸쓸한 정원의 의자에 앉아 어머님생각을 하며 잠못이루던 밤 자신의 크나큰 슬픔과 고독을 말없이 푸른빛으로 벗해주던 별들이다.

지식의 광활한 우주, 인류의 지성세계에 파고들던 긴긴 밤들에도 별들은 권태를 모르는 빛으로 앞날을 축복하여 미소를 짓는것만 같으시였다. 그래서 소년시절에 별에 관한 책들을 많이 읽으시였고 태고시기에 창조된 별자리의 신화적유래를 연구하시였다. 인류의 환상과 과학적학설을 더듬으며 밤하늘의 별들을 쳐다보느라면 가슴속에 천성적으로 품고계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그 신화들에 깔려있는 소박한 사상과 더불어 불길마냥 타오르는것이였다. 꿈많은 시절이였다.

인간은 별세계진화의 창조물이다. 광막한 우주에 떠돌던 알갱이립자들이 모여 태양계를 형성했으며 불덩어리 지구가 생겨났다. 알갱이립자에 시원을 둔 행성 지구는 수십억년의 진화를 거처 마침내 위대한 의식구조를 가진 인간을 창조하였다. 인간은 산 생명체의 별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추억의 명상속에 잠겨 숙소마당가를 거니시였다.

검푸른 밤하늘의 별들을 보느라니 현지지도의 길에서 만났던 정다운 사람들이 하나하나 떠오르시였다.

물날은 양복을 입고 실험원료를 배낭에 진, 고뇌의 흔적속에 젊음이 사라져가던 평범한 녀인, 그 녀인의 별도 어덴가 저 하늘의 수억만개 별들중에 있을것이다.

 

하늘에 별 하나

땅우에 나 하나

 

그 녀인에게도 꿈많은 유년시절이 있었을것이고 인간에게서 다시없는 그 귀중한 어린시절에 사랑하는 어머니나 할머니가 별의 동요를 자장가마냥 다정히 불러주었을것이다. 그 녀인의 별은 어느것일가? 구평땅의 산촌처녀 리향이처럼 무명별일가?

김정일동지께서는 아호비령산줄기가 뻗어갔을 멀리 서남쪽하늘가를 바라보시였다.

은하의 물결이 굽이쳐간 기슭 한끝에서 작은 별 하나가 외로이 깜박이고있었다. 희미한 그 별이 리향이의 별인지도 모른다. 그다지 빛나지도 못하고 전설도 없는 무명별 순박한 농촌처녀는 그런 별을 자기 별이라고 했다.

8월의 밤, 구평마을 땅의 력사를 안고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푸른 달빛이 가득찬 물속같은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삼바줄그네 심술궂은 《소몰이총각》이 은하의 건너편기슭으로 달아났어도 순진한 《베짜는 처녀》는 가슴태우며 언젠가 만날 그날을 고요히 기다린다. 순결한 생명의 빛을 잃지 않고 소리없이 반짝인다.

소년시절에는 밤하늘에서 별찌가 떨어질 때면 이름없는 작은 별의 몸에서 한부분이 떨어져나가고 영원히 빛을 잃는다는 가슴아픈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신적도 있었다.

 

하늘에 별 하나

땅우에 나 하나

 

아호비령산줄기밑의 농촌처녀도, 흥남의 녀인에게도, 검덕막장과 백금산의 광부들에게도 아니, 이 나라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그지없이 소중한 유년시절과 소년시절이 있었을것이며 땅우의 자신들을 하늘의 별에 비기고 그 푸른별의 존재마냥 살고 빛나기를 갈망하는 꿈과 소원이 있을것이였다. 별의 동요에는 인간, 인민의 마음이, 기원이 실려있다.

은하의 물결속에서 희미하게 깜박이는 작은 별이라도 그것은 우주의 한부분이고 빛의 생명이다.

거기에는 우주의 음향이 깃들어있다. 천문학자들과 인류가 지금껏 이름을 붙인 별이 얼마나 되는가? 하늘에는 이름조차 없는 별이 수억만개이다. 그러나 그 별들은 빛을 뿌린다. 땅우에는 이름을 못가진 인간이 없다. 마땅히 이름과 생명의 존엄을 가진 그 하나하나의 인간들모두의 운명은 그늘지지 말아야 하며 별처럼 자기 빛을 발산해야 하는것이다.

그런데 오늘 진정 우리 인민들모두가 하늘의 저 별들처럼 빛나고있다고 말할수 있는가? 인민들과 언제나 가깝게 살면서 일하는 일군들이 인민모두를 저 별들처럼 빛을 뿌리도록 참답게 위해주고 이끌어주는가? 아니, 어찌하여 그 별들의 빛에 그늘을 던지는 일이 있는가. 로동자들, 농민들, 지식인들의 생각과 감정을 깊이 모르고있으며 알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랭담히 스쳐지내보내고있다. 구평산촌처녀의 그늘진 장래도 그렇고, 진가를 홀시당한 검덕막장의 광부와 고속발동기를 연구한 늙은 기술자에 대한 태도, 주민들의 구미는 별로 고려하지 않은 옥쌀공급문제 일군들은 아래에 내려가 현실에 몸을 잠그고 수다한 문제들을 풀기 위해 뛰고있지만 그들의 사업과 언행, 문건들에서는 평범한 사람들, 인민에 대한 참다운 신뢰와 애정, 믿음이 흘러넘치지 못한다. 광부들과 로동자들의 혁명적열정과 헌신적각오는 높은데 운광문제와 비료증산문제가 걸린것은 바로 일군들이 그들을 옳게 지도해나가지 못하는데 원인이 있는것이다. 훌륭한 사상, 앙양된 열의도 옳은 지도를 통해서만 거대한 창조력을 낳을수 있지 않겠는가. 지도일군들이 참다운 사랑의 빛과 열을 안고 대중속에 들어가 결합되고 그들의 사상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별처럼 빛내주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검덕과 흥남은 물론 경제건설 전반에서 일대 혁신을 이룩할수 있을것이다.

숙소의 바깥층계로 허상민이 조용히 걸어내려왔다. 그는 방해될가봐선지 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저만치에 큰 나무등걸마냥 굳어져있다.

《왜 자지 않고 나왔습니까?》

김정일동지께서는 부드럽게 물으시였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허상민의 구부정한 체구는 뿌리박힌듯 움직이지 못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비료문제때문에… 면목이 없습니다.》

허상민의 목소리는 자책으로 꺼져들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몇걸음 다가가 그의 침울한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시였다. 허상민은 앓고나서 쇠약해진 사람같았다.

그이께서는 마음이 좋지 않으시였다. 려관과 도당청사에서, 그리고 비료공장을 돌아볼 때와 협의회에서 관찰해보신 허상민은 통털어 사업과 생활지향이 없는, 두리뭉실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일군으로 보였다. 지난날 허상민이라는 인간의 골자를 이루던 실무성이 강하면서도 구상과 열정이 있고 담대하던 성격측면은 느낄수 없으시였다. 비료생산을 회복하지 못하는 가책은 크고 책임감에 모대길뿐 부장으로서의 사업수완, 지도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있다. 현실에 오래동안 내려와있으면서 차라리 무언가 큼직하고 대담한 사업조직을 하다가 과오를 범하기라도 했다면 그를 대하기 이토록 괴롭지 않을것 같았다. 공부도 많이 하고 현장경험도 충분히 쌓은 경제지도일군인데 어찌하여 도당위원회가 하는 정치사업의 그늘에서 점잖게 현상유지나 하고있는가? 화학공업부산하 기술진도 그쯘한데 비료생산의 난관을 타개할 실천적인 대책을 강구할수 없겠는가.

호수처럼 고여있는 안타까움과 책임감이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은 줄기차게 흘러야 변하지 않고 발전기타빈도 돌리고 논벌도 적시면서 자기의 사명을 다할수 있는것이다.

김정일동지께서는 허상민의 사상정신적면모를 파고들수록 생각되는것이 많으시였다. 그러나 허상민의 옛 고향에서 맞는 이 밤을 그렇게 어둡게 보내고싶지는 않으시였다.

《비료문제는… 래일 더 의논해봅시다. 상민동무 우리가 이런 조용한 시간에 함께 있어본지도 오래된것 같구만.》

김정일동지께서는 겸허한 어조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내가 이미전에 시간을 냈어야 하는건데… 일에만 묻혀있다나니… 옛정도 멀어지는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실은 제가

허상민은 변명이 되는것 같아 말끝을 잇지 못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가슴에 두팔을 얹고 불빛이 널려있는 도시를 한동안 바라보시였다.

《상민동무, 전쟁시기 정의빈선생의 집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저기 비료련합기업소 뒤쪽의 운봉산기슭에 있었습니다.》

《그럼 북천강이 멀지 않겠습니다.》

《예, 채마밭을 지나 좀 내려가면 강입니다.》

《정의빈선생의 집이 두칸짜리라고 했던가?》

《두칸반이라 해야 할지… 작은 방은 수술실로 썼습니다.》

《상민동무는 수술을 받고 석달동안 정의빈선생네 집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다지요?》

《예…》

허상민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어찌하여 옛일을 자상히 끄집어내시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이의 범상한 물으심에 대답을 드리느라니 자기도 모르게 까마득히 잊어졌던 일들이,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그날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평양을 떠나오기전에 상민동무네 집에 갔댔습니다. 정의빈선생은 만나보았는데 부인은 기다리다가 못만나고 그냥 왔습니다.》

허상민의 얼굴에 놀라움과 당황함이 비끼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조용히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정의빈선생은 집을 떠나있는 상민동무 걱정을 몹시 합니다. 모름지기 순희동무도 무척 그리워할것입니다. 마음씨가 어질고 순박한 녀성이니 겉으로 표현을 못하고 그러고 지낼겁니다.》

!

허상민은 가슴이 쿵 울렸다. 떠날 때 고추장단지를 안고 달려나왔던 안해의 모습이 떠오르며 낯이 확 붉어졌다. 오래동안 속에 감추어둔 일이 어쩔수 없이 드러난것 같은 면구스러움과 죄스러움의 복잡한 감정이 그를 휩쌌다. 낯이 뜨겁고 숨이 가빠왔다.

《난 상민동무네 집에 갔다가 뜻밖에 아주 귀한걸 찾아냈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넌지시 말머리를 돌리시였다.

《정의빈선생이 쓴 <수술일기>책입니다.》

허상민은 코마루가 찡하였다. 그는 집안의 서가뒤에서 세월에 묻혀 누렇게 퇴색하고 곰팡내가 풍기던 장인의 책을 생각했다. 칼로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는 어딘가 감상적인 의미를 자아내던 그 일기책을 허상민은 눈여겨본적이 없었다.

《의학협회의 한 박사선생한테 읽혀봤는데 <수술일기>를 학술적으로나 림상실천상에서 대단히 가치있는 자료로 간주했습니다. 그렇게 귀한걸 하마트면 파지로 수매할번했으니

김정일동지께서는 두팔을 가슴에 겯고서 말씀을 이으시였다.

《내가 <수술일기>를 보느라니 거기에 상민동무를 치료하던 일들도 적혀있었습니다. 수술과 후치료, 상처회복과정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관심을 기울인것이 알립니다.》

김정일동지의 음성은 나직하고 따뜻한 정에 넘치시였다.

허상민은 어쩐지 알싸한 소독약냄새가 풍기던 하얀 회벽칠을 한 아담한 방이 눈앞에 그려지였다. 순희의 방이였다. 하얀 백포를 편 침대에 누워 생의 희열을 느끼며 열린 방문으로 해빛이 어룽지는 뜨락을 내다보기란 얼마나 좋았던가… 순희는 다리아와 채송화, 봉선화가 핀 꽃밭을 가꾸다가 몸을 돌려 방안의 침대에 누운 그에게 생긋이 웃어보인다. 곱지도 밉지도 않은 처녀의 둥실한 얼굴이였지만 입가와 눈가에 담긴 미소는 순진과 성심으로 빛났다.

그 뜨락으로 발꿈치가 닳은 허름한 라사직양복을 입고, 잔주름으로 얼굴이 겉늙어보이는 체소한 정의빈의사가 왜정때의 육중한 왕진가방을 들고 걸어온다. 정의빈은 허상민이 의식을 회복하고 기분이 좋아진것을 기뻐하며 옆구리와 허벅다리의 수술부위를 외과의다운 길다란 손가락으로 눌러본다.

멀리 강쪽에서 물소리가 정답게 들려오고 마당의 빨래줄에서 강남갈 차비를 하는 제비들이 분주히 재잘거린다.

허상민은 스물두해전, 사랑과 인정에 받들려 생명의 환희가 푸른 하늘처럼 열리던 그 목가적풍경이 이밤에 어찌하여 이리도 삼삼히 떠오르는지 알수 없었다. 옛정을 잃어버린채 순탄치 않은 화학공업부사업으로 지치고 허탈이 엄습하는 자기한테 이렇듯 따스한 추억이 찾아온다는것이 놀라왔다.

《려관숙식조건이 좋다 해도 집에서 순희동무가 보살펴주는것만은 못할겁니다. 짬을 내여서라도 집에 가끔 다녀오시오.》

《…》

허상민은 량심의 가책을 느꼈다. 오래전 질안직장의 현장지도원으로 일하던 그 시절부터 시작된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사랑과 믿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시였다. 그러나 집안의 가장이고 남편이며 사위인 자신은 어떤가? 그들 부녀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하고 랭정한가 허상민은 고결한 천품과 미덕을 지니신 그이의 곁에 서있기가 죄스러웠다.

《부장동무는 동암광산에 갔댔다는데 거기 형편은 어떻습니까? 다른 나라에서 린회석을 사들여오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김정일동지께서는 말머리를 돌리시였다. 화제가 사업이야기로 번지니 허상민은 한결 속이 편하였다.

《동암광산은 아직 생산이 정상화되지 못하고있지만 전망은 확고합니다.

린회석생산능력확장공사에 온 광산이 떨쳐나섰습니다. 도건설과 40리구간의 길닦기를 한 절반나마 했습니다.》

《화학비료생산을 높이는데서 동암광산의 위치가 중요합니다. 광산을 주체적인 린비료생산원료기지로 튼튼히 꾸려야 린회석을 수입하지 않고 안전하게 비료생산을 밀고나갈수 있습니다. 그래 뭐 애로되는건 없습니까?》

《있습니다. 삭도건설에 쓸 대상설비와 운영설비들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아서

《어떤것들인지 제기하시오. 동암광산에서 걸리고있는 문제들은 다 풀어주겠습니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소나무우듬지에서 연신 솨-아 소리를 내였다.

바람은 그이의 혼방직옷자락을 가벼이 들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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