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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민은 전화하기에 어지간히 지쳤다. 동암린회석광산에서 늦게 돌아와서는 더 나가다니기도 힘들어 이렇게 비료련합기업소 지배인 사무실에 눌러붙어앉아 전화통과 씨름질하는것이였다. 그는 북천강화학공장 기사장의 아첨기와 존경이 뒤섞인 하소연 비슷한 말소리에 증이 나서 전화를 끊어버리고싶었지만 송수화기를 놓지는 못했다. 화학공업부의 지시에 잘 순종하고 일처리를 온건하게 해나가는 기사장이였지만 대가 약하고 상부에 자기의 사업고충을 쏟아놓기 좋아하는 사람이였다. 허상민은 인내성있게 들어주고있다가 기사장이 비게 된 지배인자리를 바라는 속심을 은근히 로출시키는바람에 버럭 화를 내였다. 《지배인자리에 누구 딴사람이 오겠는지 기사장동무가 되겠는지 하는건 도당에서 어련히 알아 할일이요. 동무는 인계나 똑똑히 받소. 어중간히 일할 생각말고 공장의 전반사업을 틀어쥐시오. 지배인이 없으면 기사장이 대리해야 된다는걸 그래 모르오? 인젠 동무가 주인인것만큼 주견을 바로 가지고 그 P촉매니 뭐니 하던걸 밀어치워야 하오. 종전의 촉매기술공정정비를 더 빨리 다그치시오. 지금에 와서까지 촉매를 보장 못해서 비료생산에 지장을 줄 땐 동무한테 책임추궁을 하겠소.》 허상민은 신경질적으로 송수화기를 탕 놓았다. 담배를 붙여 화풀이하듯 태우는데 맞은켠 쏘파에 여직껏 앉아있던 비료련합기업소 기술부기사장의 잔잔한 목소리가 그를 위로하듯 어루만졌다. 《화학공장이… 품종이 많아 작은 기술공정 하나라도 잘못 다쳤다간 수습하기 어렵지요.》 허상민은 그제야 기술부기사장쪽에 몸을 돌리며 고달픈듯 손으로 피로한 눈언저리를 쓸어만졌다. 《부장동지두 이젠 머리가 세기 시작했구만요.》 기술부기사장의 념려와 동정이 넘친 말에 허상민은 머리를 들고 서글피 웃었다. 그는 환갑나이에 이른 로련하고 경험이 풍부한 기술부기사장앞에서 내심의 고충을 숨길수 없는것이 괴롭기도 하고 화도 났다. 허상민이 이 비료공장에서 기사장으로 있을 때부터 기술부기사장은 그의 급한 성미를 나무래고 그로부터 생기는 거친 일본새를 비료공장의 특성과 결부하여 충고주군 하였다. 온화하고 침착한 사람이다. 어느때든지 덤비거나 신경질을 내거나 성급하게 굴지 않는다. 그의 인생바늘은 언제나 안정수치에 머물러있다. 고압계선에 올라가지도 떨어지지도 않고 20년나마 기술부기사장을 해온다. 허상민은 직급상으로 그보다 훨씬 높지만 기술실무적인 구체적인 사업령역에 들어가서는 그의 견해를 신뢰하고 의존성을 느끼는 때가 드문했다. 결단성과 창조성이 결여된 그런 성격의 사람을 싫어하던 허상민이였지만 지금에 와선 기술부기사장을 존대하고 자신도 스스로 그런 원만형의 사람이 돼가는것을 느끼는것이였다. 《화학공업이 인젠 내 머리까지 희게 반응시켜버리는 모양이요. 표면이 퇴색되여간다는건 그 물질이 변화되기 시작했다는 뚜렷한 증거지요.》 허상민은 쓸쓸히 웃으며 자기가 맡은 사업의 어려움을 말했다. 화학공업을 추켜세우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임을 의식한 솔직한 내부반성이였다. 《기술부기사장동무, 내 머리는 사실… 비료때문에 세오. 해마다 비료생산에 볶이우지만 않으면 정말 발편잠을 자겠소.》 《부장동지, 환갑이 된 낡은 설비들을 가지고 이만큼 생산을 안정수치에서 보장하는것만도 큰 성과지요.》 기술부기사장은 허상민의 직책상고충을 리해해주는 말로 자기가 맡은 비료련합기업소의 어찌할수 없는 실태를 은근히 변명하는것이였다. 마당에서 승용차 멎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후에 도당책임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서류가방을 옆에 든 그의 얼굴은 몹시 흥분이 어린, 전에없이 젊어진듯한 사업욕이 넘치는 활기찬 기색이였다. 그러나 쏘파에 앉지 않고 참모회의때 직장장들이 앉군 하는 나무걸상에 말없이 가앉는 모습을 찬찬히 보니 그 환희에 잠긴듯한 밝은 표정밑으로 어딘가 걱정과 번민의 그늘이 비껴있었다. 혹시 검덕광산실태로 하여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로부터 지적을 받았을지 모른다는 짐작이 들자 허상민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지였다. 남의 일같지 않았다. 검덕광산은 그래도 월계획을 해왔고 6개년계획의 광물생산을 앞당길 전망도 가지고있는 기업소이다. 그에 비하면 비료련합기업소의 형편은 어방없이 나쁘다. 기술부기사장이 도당책임비서의 눈치를 보더니 방에서 나갔다. 한만규는 서류가방을 앞상의 전화기옆에 놓더니 실눈을 짓고 잠자코있었다. 그러다가 허상민이 검덕소식을 기다린다는것을 의식했는지 저으기 활기넘친 표정으로 말했다. 《부장동무, 이번에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검덕광산에서 난관에 봉착했던 운광문제를 결정적으로 풀어주시였습니다. 막장에서부터 선광장까지 35리구간에 대형벨트콘베아를 놓도록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광업에선 일대 혁명이 아닙니까. 광물생산이 비약적으로 올라가겠습니다.》 허상민은 저도 모르게 흥분됨을 느꼈다. 그 흥분의 기저에는 자기도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지도를 받아 걸려있는 비료문제를 풀었으면 하는 갈망이 비껴있었다. 그이의 지도를 받고싶은 마음은 비료생산실태로 해서 당하는 시름과 책임감을 멀리 귀전에 밀어놓았다. 한만규는 팔을 뻗쳐 전화기를 앞에 끌어당겼다. 그는 송수화기에 손을 얹고 쪼프린 눈을 허상민에게 돌렸다. 그 눈에는 허상민의 끓는 심정을 리해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부장동무,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래일 함흥에 도착하시오. 흥남비료련합기업소에 꼭 오시겠다고 말씀하시였소.》 《!!…》 그이의 가르치심을 받고싶던 간절한 열망이 성취된다는 충동은 단번에 허상민의 가슴에서 끝없는 기쁨과 동시에 걱정을 안아왔다. 한만규는 허상민의 흥분으로 설레는 심중은 개의치 않고 자기 상념에 휩싸여 흔연히 말을 이었다. 《난 이번에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를 따라 갱막장에 들어가서 정말 많은것을 배웠소. 난 당사업의 철리가 뭔가 하는걸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것 같소.》 한만규는 생각깊은 낯빛으로 앉아있었다. 이마와 볼언저리에 주름살이 깊숙이 잡힌 그는 어쩐지 퍽 진중하고 늙어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는 송수화기를 들었다. 《시당책임비서동무방에 대주시오.》 한만규는 송수화기를 귀에 댄채 허상민이쪽에 걱정스러운 낯을 보였다. 《여기 비료련합기업소랑 흥남화학지구의 일은 부장동무가 잘 맡아주오.》 《…》 허상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한만규는 허상민의 수척한 얼굴을 가늠해보고 그가 안고있는 사업의 고충을 리해한듯 동정을 기울여 물었다. 《저녁식사는 했소?》 《이제 먹지요.》 《또 구내식당에서 하지 말고 려관에 올라가 식사도 하고 푹 쉬오. 내 보니 비료생산이라는게 간부가 이렇게 현장에 와서 지켜앉아있다고 더 올라가는게 아닙디다.》 《책임비서동무가 말을 옳게 한것 같습니다.》 허상민은 허구픈 웃음을 짓고나서 말을 이었다. 《난 좀더 있겠습니다. 비료련합기업소산하 지배인동무들을 9시반에 여기 모이라고 했습니다.》 허상민이 말을 맺기전에 함흥시당책임비서가 나왔는지 한만규의 혈색좋은 얼굴에는 사업에 림한 진지하고 엄격한 표정이 깃들었다. 그는 곧 전화에 열중해버렸다. 《…음, 그새 수고가 많았소. 그렇지만 시내를 꾸리는 문제를 그런 관점으로 대해선 안되오. 우리 함흥시가 공업도시여서 원래 침침한 맛이 돌다니! 그건 말이 되지 않소.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이번에 검덕광산에서 생산문화와 생활문화에 대해서 중요하게 강조하시였소. 로동계급이 많이 사는곳에서 혁명적인 새 문화가 창조되야 한다고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소. 그런 정신에 비춰보면 아직 우리가 할일은 많고도 많소. 앞으로 계획을 크게 세워 로동계급이 많이 사는 함흥시를 외양부터 쭉 개변시킵시다… 옳소. 그렇게 하기요… 시중심도로는 괜찮은데 흥남에 내려오는 사포도로는… 피치포장을 거의 하고있다…》 한만규는 의자등받이에 허리를 쭉 펴고 송수화기를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꿔쥐였다. 《콩크리트바닥이 깨진곳들과 패인데를 너덕너덕 기워붙인것처럼 포장하지 말구 보기 좋게 잘해야겠소. 겸해서 강조하고싶은건 뻐스요. 내가 흥남비료나 룡성기계에 내려가면서 보면 뻐스정류소들에 늘 사람들이 많고 질서가 없는게 탈이요.… 아니, 교양문제가 아니라 우리 일군들탓이요.… 아무러면 함흥사람들이 뻐스줄을 바로서지 못할 정도로 교양이 낮은 사람들이겠소?! 일군들이 뻐스가 제대로 다니게 하지 못했기때문이요.… 아, 거 정무원소리는 더 하지 마오, 뻐스가 있으면야 안주겠소, 목마른 사람 우물판다구 사무실에 앉아 우는소리만 말고 책임비서동무가 려객사업소에 한번 시원히 내려가 방도를 찾아보오.》 한만규는 송수화기를 놓지 않고 이번에는 도당선전비서를 찾았다. 《마침 있구만. 비서동무, 도예술선전대는 지금 검덕에 들어가있지?… 예술단에서 남은 배우들이 좀 없소? 음, 성악보다 기악배우들이 낫지, 래일아침 그 동무들을 여기 흥남비료에 보충해주시오. 비료도 크게 걸렸소.… 그렇소. 비료에서도 검덕에서처럼 경제선동의 북소리가 본때있게 울려나오게 합시다.》 한만규는 전화를 끝내자 손을 뻗쳐 보온병의 물을 고뿌에 따라 들이키고는 허상민에게 고개를 돌렸다. 《거, 차웅섭이 그사람… 요새 뭘하고있소?》 《아직도 무슨 미련이 있는지 인계를 하는게 오래서… 내 좀전에 북천강화학의 기사장한테 침을 놓았습니다.》 허상민은 아까의 화가 되살아나 시답지 않게 대꾸했으나 도당책임비서의 얼굴에서 그가 지나가는 말로 묻지 않았음을 알았다. 한만규는 침묵끝에 입을 열었다. 《내 달래 묻는게 아니라 그 사람을 오래동안 일시키다가 아들한테 그대로 훌쩍 떠나보내는게 좀 알찌근해서 그럽니다.》 한만규의 눈빛은 온화하고 목소리에는 전에는 느낄수 없었던 선의와 부드러움이 배여있었다. 《그 동무는 사실 전시생산때와 공장복구시기에 공훈이 많았는데… 도당위원회가 평가사업을 잘하지 못해선지, 차웅섭이 그사람이 양보를 해서인지 훈장이 얼마 없는게 아니겠소. 그래 그 동무에게 로력훈장을 내신하려는데 어떻소?》 《찬성입니다. 해줄건 해줘서 보내는게 도리지요.》 허상민은 자기가 진작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것이 후회되였다. 차웅섭의 겉늙고 초췌한 모습을 보면서도 달리 도와줄 생각을 못한것이 가책되였다. 《부장동무, 북천강화학의 기사장이 지배인직무를 대신할수 있을가요?》 허상민은 자기가 기대했던 물음을 던지는바람에 대뜸 수긍했다. 《담당할겝니다. 대가 좀 약해 그렇지 그만하면 지배인으로서 원만한 일군이지요.》 허상민은 한만규가 돌아간 다음에도 차웅섭에 대한 뒤늦은 동정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의주에도 화학공업부산하 공장들이 있는데 지배인은 못해도 두루 적당한 직무에서 일하게 해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평안북도당책임비서와 의논하고 관심만 두면 그런 알맞춤한 자리가 나질것이였다. 허상민은 저으기 마음의 위안을 느끼자 송수화기를 들고 알탄직장을 찾았다. 《직장장동무요?… 무연탄이 도착했소?… 아직 안왔다… 래일 빚을것밖에 없단 말이요?!… 차갈이기관차가 고장났다? 그러니 무연탄방통을 공장구내에 못끌어오겠구만… 동문 왜 그런 사정을 제때에 반영하지 않소? 가만히 앉았다가 실어다주는 탄을 빚기나 하자면 누가 못하겠소. 직장장동무, 이제 당장 역에 나가서 실정을 알아보시오. 무연탄방통이 몇개 들어왔는가, 비료련합기업소화물을 맡은 기관차가 왜 고장인가, 다른 기관차들은 뭘하고있는가… 상세히 알아서 오늘밤중으로 내게 보고하시오. 비료생산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했는데 함흥철도관리국이 아직두 끓지 않는구만. 정신이 덜 들었소.》 허상민은 애꿎은 송수화기만 거칠게 다루었다. 지배인방에 틀고앉아 생산을 직접 지휘하지만 사업의 한걸음한걸음이 순탄치 않다. 아침에 열린 성대는 저녁이면 꼭 쉬여버리고야만다. 그래도 성과는 적다. 사무실은 고요했다. 퇴근시간이 지난지 오래서 창문쪽으로 면한 넓은 구내길은 사람들의 왕래가 드물었다. 길건너 고압전류가 흐르는 물전해직장은 작업소음이 없어 조용했으나 청정직장과 합성직장에서는 l,500마력압축기들의 거세찬 동음이 쉬임없이 들려왔다. 허상민이 이 기업소에서 기사장과 지배인으로 있을 때 너무도 귀에 익은 동음이였다. 때로 고통스럽게도 들리고 부드러움과 경쾌함을 자아내기도 하고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하던 압축기들의 소리였다. 종일 가야 한본새로 단조롭게 울리는 압축기소리였지만 바로 그렇게 률동과 음감이 변하지 않는것으로 하여 정상생산이 진행된다는걸 담보하는것이였다. 압축기소리는 지배인사무실의 고요한 안정을 끊임없이 깨뜨리군 했지만 그래도 허상민은 오래전 몸에 밴 그 소리가 좋았다. 그가 이 비료련합기업소에 내려오면 지난날 같이 사업하던 사람들은 부장위치가 높아서인지 차차 멀어졌지만 수십대를 헤아리는 공장의 압축기소리만은 중앙의 간부라고 어려워하지 않고 그렇다고 발라맞추지도 않고 본래 생겨먹은 그 변함없는 음향으로 맞이하는것이였다. 조심스레 문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어느 지배인이 벌써 오는가 하는데 스무예닐곱남짓한 다부진 체격의 청년이 도면말이를 쥐고 들어왔다. 무척 낯익어보이는데 생각은 나지 않는다. 청년은 어줍게 고개를 숙여보이더니 미안한듯 입을 열었다. 《부장동지… 좀 제기할게 있어서…》 목소리도 어딘가 귀에 익은것 같아 눈시울을 쪼프리고 초점을 집중해보았다. 《누구던가?…》 《합성직장의 압축기수리작업반장 강순배입니다.》 그제야 생각났다. 허상민은 안락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동무가 강진회반장의 아들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강순배는 겸손히 대답했다. 허상민은 뚜벅뚜벅 걸어와 강순배의 손을 잡아끌어다 긴 쏘파에 나란히 앉았다. 황철나무아래 봉분에 엎드려 곡성을 터치는 어머니의 곁에 꺾어진 나무처럼 서있던 열여덟살의 애숭이청년이 이렇게 숙성했다. 벌써 9년세월이 흘렀다. 기억을 들추니 금방 어제일같은데… 도검찰소에서 나와 공장에 돌아온후에 허상민은 내내 머리를 떨군채 구내길을 다녔고 303호압축기를 원상복구한 다음에는 합성직장에 거의나 가지 않았다. 303호압축기를 되살릴 때 신입수리공인 강순배가 얼마나 땀흘리며 수고했던가. 《자넨 그사이 어데 갔었나? 왜 한번도 보이지 않아.》 허상민은 얼굴에 여드름이 돋고 아버지를 닮아 벌써 코밑에 수염싹이 거뭇한 강순배를 어리게 취급할수 없었다. 《저는 합성직장에 늘 있었습니다. 부장동지는 공장에 오시면 간부동지들과 사업하시느라 바쁘셔서 저를 볼수 없었을겁니다.》 강순배의 나직한 말이 허상민의 가슴을 아프게 흔들었다. 공장에 있을 때도 관심을 돌리지 못했지만 화학공업부에 소환되여간 다음에는 아주 잊어버린것이였다. 《그래 어머닌 잘 계시나?》 《예…》 《앓지는 않구?》 《일없습니다.》 《제기할거란 뭔가?》 강순배는 말없이 가지고온 도면말이를 무릎에 주르르 펴놓았다. 도면에 눈길을 박던 허상민은 흠칫 놀랬다. 전류와도 같은것이 오래전에 아문 상처를 섬찍하게 건드리며 등곬으로 흘렀다. 중보수에 들어간 303호압축기의 기술개조안이였다. 9년전에 기사장의 방에 가지고왔던 강진회반장의 압축기개조안과 너무도 흡사한데가 있었다. 크랑크축과 시린다계통의 변형 그리고 또 무언가 선들과 동그라미들이 얽혔지만 허상민의 시야는 초점을 잃었다. 귀전에서는 아득하게 사라졌던 도검찰소장의 랭혹한 음성이 살아 붕붕거렸다. 기사장으로서 명예심에 떠 경거망동하면서 직권을 람용하여 파악없는 기술안을 부추기고… 그래서 압축기를 파괴하고 사람을 죽인 책임을 무엇으로 지겠는가! 그때의 수치와 절망, 위험이 드리운 어지럽던 광경이 한꺼번에 눈앞에 닥쳐들었다. 검찰소의 예심석에서 자신을 변명하지도 못하고 곤경을 치뤄야 했던 그런 어두운 과거의 한토막이 자신에게 있었다는것을 사람들이 상기하는것조차 두려웠다. 《도면을 누가 그렸나?》 《제가 그렸습니다.》 《자네가?… 어데서 이런 설계재간을 배웠나?》 《화학공대 기계학과에서…》 《주간을 다녔나?》 《야간으로 졸업했습니다.》 《공부를 착실히 했구만.》 기실 도면은 수준있게 그린것이였다. 그전날 강진회가 때묻은 종이에 연필로 그린것과는 대비도 안되였다. 기사인 새 세대가 설계한것이였다. 기특한 일이였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대견한 생각에 허상민은 한참이나 강순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느덧 눈앞에서는 그 시절의 강진회가 떠오르며 자기를 생각해서라도 아들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는듯 싶었다. 그러나 다른편에서는 리성이 그것을 강잉히 거부하고있었다. 《자넨 l,500마력압축기가 600기압의 정밀설비라는걸 알겠지?…》 《알고있습니다.》 강순배의 조용하고 침착한 대답이였다. 허상민은 이 순박한 청년에게 아버지의 죽음과 교훈을 구태여 상기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강순배의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과 움직이지 않는 눈동자가 너무도 많은것을 말해주고있는것이였다. 자기한테 오기까지는 단순히 아버지의 옛 친구라는 기대와 의존의 감정만은 아닐것이였다. 《어머니는 자네가 압축기개조를 하겠다는걸 알고있나?》 《예.》 《뭐라 하지 않던가?》 《저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하던 일이 옳다고 생각하십니다. 다문 한줌의 비료라도 더 생산하는것이 당에 기쁨을 드리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음…》 허상민은 말문이 막혔다. 강순배의 동요없는 태연한 표정을 지켜보느라니 가슴밑바닥에 앙금으로 가라앉은지 오랬던 아릿한 가책이 스며올랐다. 《자네 도면을 합성직장 기술공정원한테 보였나?》 《예…》 《공장 기술과장한테는?》 《보였습니다.》 《기술부기사장동무도 보았나?》 《예.》 《보일데는 다 보였구만. 그래 어떻던가? 그들의 대답이 다 비슷하겠지?》 강순배는 비웃음을 띤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어딘가 자존심이 센 강진회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착상은 좋은데 뭐 어렵다나요… 룡성기계같은데서 시험삼아 만들어보던가 해야지 직방 도입하는것은 위험하다는겁니다.》 《그래 고집하구 나한테까지 올라왔구만.》 《…》 《내가 부정하문 이젠 도면을 어디로 들구가겠나?》 《화학공업부장동지가 안된다면… 더 갈데가 없습니다. 그저 우리 화학공업의 보수성에 대해 통감해야지요. 남은 이런 압축기를 이미 오래전에 만들었는데 우린 개조하는것조차 두려워하고있으니… 부장동지, 1,500마력압축기는 구조가 복잡하고 불필요한 구석이 많습니다. 시린다와 전동기를 개조하면 2,000마력으로 쑥 올릴수 있습니다.》 《자네 말대로 압축기를 개조하면야 좋지. 내가 그걸 모르는게 아니야. 그렇지만 아직 일러. 우린 다른 나라 기술자들이 발명해놓은것들을 경솔히 대하지 말구 배울것은 배워야 해. 고압압축기만 해도… 20세기초에 가자레아식암모니아합성기술이 나오면서 만들고 완성한것으로 유럽기술자들의 창조물이라고 말할수 있는거요. 그런걸 지난날 자네 아버지말을 듣고 나도 시린다계통은 좀 손을 대는게 좋으리라고 생각했네. 하지만 영 딴판이거든. 고압류체화학기계란게 비밀이 많은 기계야. 자넨 지금도 압축기수리공인가? 기사가 됐는데 수리는 그만두지. 내 기사장한테 말해서 기술부쪽에 보내줄가? 기술부밥을 좀 먹어야 경험지식이 과학성을 띠고 머리속에서 정리가 돼.》 허상민은 자기가 젊은 기사앞에서 마치도 기술신비주의자처럼 요령있게 말하고있는것이 스스로 민망스러웠다. 그러나 다른편으로 그는 기술은 신비한게 아니며 청년이 겸손하게 더 배우도록 그리고 비명으로 간 옛 친구의 아들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그렇게 루루이 력설했다고 마음속으로 위안했다. 강순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 기술부에는 가지 않겠습니다. 로동자기사가 더 좋습니다.》 《그건 자네 좋을대루 하라구.》 허상민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장가는 갔나?》 《아직…》 《색시를 데려다 어머니두 잘 모시라구.》 허상민은 아량있게 옛정을 기울였으나 강순배는 묵묵히 서있는데 무언가 고집스레 다른것을 깊이 생각하는것 같았다. 강순배는 머리를 들었다. 《부장동지, … 우리 아버지가 압축기기술이 부족했다는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나라에서 요구하는 비료를 더 많이 생산하려고 한 아버지의 뜻은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누군 뭐 고인이 된 동무 아버지를 질책하나?》 《제가 그걸 말하자는게 아닙니다. 그때 부장동지는 기사장으로 있으면서 저의 아버지가 내놓은 압축기개조안을 대담하게 지지하지 않았습니까. 모험인줄 알면서 말입니다. 이 도면은 그때걸 발전시킨겁니다. 부장동지, 저를 믿고 한번 밀어주십시오.》 《!…》 허상민은 순간 칼끝으로 가슴을 찔리기라도 한듯 흠칠 떨었으나 이내 당황한 표정을 바로잡았다. 《내 부탁하는데 자네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고집부리지 말라구. 정 해보고싶으면… 아까도 말했지만 좀더 배우구 혈기를 가다듬은 다음에 손을 대는게 어떤가? 그동안 경험이 많은 기술부기사장동무한테서랑 도움을 받으라구.》 강순배는 마치 늙은이처럼 원망이 서린 탄식의 긴숨을 내뿜고나서 문쪽으로 걸어갔다. 허상민은 자기가 옛친구의 아들을 위해주면서도 차겁게 내쫓은것 같은 불쾌감에 휩싸였다. 허상민은 송수화기를 들고 기술부기사장을 찾았다. 《아직 퇴근하지 않았구만… 다른게 아니라 거 합성에 수리공 강순배라구 있지 않소? 그가 가지고다니는 도면을 보았다지요?… 압축기개조안말이요.… 그래 어떻소? 실현해볼수 없겠소?… 기술부기사장동무, 너무 도리머리를 하지 말구 순배를 불러다 다시 잘 연구해보오. 설사 안될거라 해도 그 청년이 실망하게 무안을 주지 말구 기술자로 키운다는 립장에서 타일러주오. 아버지가 하던걸 기어이 해내려는 그 배짱이 참 기특하단 말이요.》 허상민은 전화를 끊었으나 언짢은 마음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불현듯 강진회의 날카로운 얼굴이 떠오르며 자기를 비겁하다고, 친구의 도리를 모른다고 책망하는것 같았다. 허상민은 자신이 민망스럽도록 소심한 인간이 되였음을 깨달았고 의리도 없다고 자책했지만 한편으로 아마 그 누구도 화학공업부장의 자리에 앉으면 이렇게밖에 처신할수 없으리라고 위안했다. 그는 앞으로 순배의 압축기개조안이 기술적담보가 확고해지면 대보수기간에든가 한대쯤 도입해보면서 거기에 순배를 앞장세우리라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