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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혜옥은 짐을 다 꾸렸다. 모서리쇠테가 벌겋게 녹쓴 트렁크와 려행용비닐가방, 책궤짝과 보퉁이가 그 녀자의 개인재산 전부였다. 나이찬 합숙생처녀들이 의례히 장만하군 하는 그릇가지들과 살림도구들은 하나도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 십년 처녀의 꿈에 부풀어있을 때는 심혜옥이도 수줍은 마음을 감추며 그런것들을 장만했었다. 그러나 합숙에서 먼저 시집가는 동무들에게 하나, 둘 집어주었고 30대를 썩 벗어나서부터는 아무 미련없이 살림을 갓 시작한 동무들에게 다 주고말았다. 그다음에는 돈이 있으면 책과 실험기구와 시약 같은것들을 구하는데 썼다. 누군가 《시집갈 준비를 하지 않은 녀자를 어떤 사람이 데려가겠는가.》 하고 자기를 빗대고 뒤소리를 한것을 알면서도 심혜옥은 개의치 않았다. 그런 말이 틀린것이 아니고 또 자기는 시집갈 준비를 하고싶지도 않았고 그럴 겨를도 없는것이였다. 화학이 그의 심혼을 아주 그러잡은것이였다. 뒤늦은 생활에서가 아니라 화학에서 인생을 성공하고싶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화학은 그 녀자를 헤여날길 없는 심연으로 떠밀었다. 심혜옥은 불을 끈 방안에 홀로 앉아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폭이 좁은 창문으로 열사흘달이 그 녀자를 동정어린 얼굴로 들여다본다. 낡은 널로 만든 침대는 두손으로 무릎을 감싸쥔 그 녀자의 절망이 깃든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삐거덕소리를 내였다. 심혜옥은 참기 어려운 고통을 조금이라도 위로해줄 동무가 와주었으면 하고 기다렸지만 복도에서 이따금 들리는 발자국소리는 끝내 이 구석진 방에까지 오지 않는다. 아니, 올 사람도 없다. 밤이 깊은데다가 합숙의 처녀들은 심혜옥이와 나이차이가 너무도 많은것으로 하여 그리고 그의 말이 없는 성미로 하여 가까운 사이로 되지 못했다. 심혜옥이와 동갑나이인, 어린 합숙생들한테서 《어머니》라고 불리우는 사감도 이즈음에는 발길을 끊었다. 사감은 방안에 들어서면 우선 코를 찌르는 시약냄새에 이마살을 우습강스레 찌프렸다가는 심혜옥의 고심을 존중해서 표정을 고치고 다다미를 깐 널침대에 앉아 이야기를 늘어놓군 했었다. 합숙 3층의 맨 끝호실인 이 방은 그전에 잡다한 합숙비품들을 넣어두던 창고인데 사감이 독방이 없어하는 그에게 호실삼아, 실험실삼아 쓰라고 내주었다. 북쪽끝방이여서 여름에는 습기 차고 겨울에는 추웠다. 그러나 심혜옥은 이 방을 다시없는 보금자리로 여겼다. 청춘과 삶의 희망이 약동하는 어린 처녀들과 한호실에서 지내기란 로처녀로서 여간 괴롭고 불편하지 않았다. 심혜옥은 이 구석방에서 자유롭게 책도 보고 화학실험도 했으며 때없이 밀려드는 로처녀의 외로움과 번민을 혼자 조용히 묵새길수 있었다. 그러나 인제는 그렇게도 마음의 안정과 고요를 지켜주던 이 보금자리를 떠나야 한다. 창문으로 흘러든 달빛은 실험대로 쓰는 길다란 책상우의 선반에 놓인 유리관들과 배불룩한 실험용기들에 어두운 빛을 던졌다. 버림받은 그것들은 녀주인의 서글픈 심정을 말해주듯 푸름하고 쓸쓸한 빛을 발산했다. 심혜옥은 책상앞에 다가와 너무도 낯익고 정든 유리관과 용기들을 만져보았다. 그의 청춘과 오래동안 함께 지내온것들이다. 청춘은 시들었어도 실험기구들은 시들지도 변색하지도 않고 여전히 한모양대로이다. 분해와 화합반응의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그의 사색과 탐구를 말없이 대변해주고 실패도 아픔도 성공도 벗해주던 실험기구들이였다. 심혜옥은 이 실험기구들을 자기 몸의 한부분처럼 그리고 생명의 계속으로 소중히 여겨왔었고 이속에서 미래가 창조된다고 믿어왔었다. 심혜옥은 눈물을 머금고 보자기를 펴놓았다. 유리관과 용기들을 깨끗이 닦아 보자기에 담았다. 얇은 유리들이 서로 부딪치는 차거운 음향이 방안의 얼어붙은 고요를 깨치였다. 음향은 이내 사라지였으나 맑고 잔잔한 메아리는 그 녀자의 가슴속에서 그냥 울렸다. 지난날의 애틋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그 녀자를 어질하도록 취하게 만들었다. 화학공업대학 실험실에서 가느다란 유리봉으로 선반우에 줄지어있는 유리용기들을 피아노건반마냥 두드려가며 자기 딴의 선률을 고르어내던 순진하고 명랑한 녀학생시절의 모습이 떠오른다. 흰 위생옷을 입은 그 쌍태머리 녀학생 심혜옥은 교내생활에서도, 화학실험속에서도 음악을 찾으려 하였다. 음악을 좋아해서만이 아니라 음악이 없는 생활과 학업은 있을수 없다고 생각했기때문이였다. 화학쟁이들이 한평생을 눈에 보이지도 소리도 나지 않는 원자와 분자들의 운동, 반응과정을 말없는 사색과 관찰속에서 고독하게 다루어오지만 그 일에도 음악은 꼭 있을것이며 필요할것이였다. 강좌의 교수선생들과 대학연구소의 늙은 박사까지도 성격이 온순하면서도 열정적이고 침착하면서도 명랑한 심혜옥을 좋아하였다. 도에서도 권위있는 화학자인 로박사는 대학을 졸업한 심혜옥이 대학연구소에 남아 화학리론을 실험실적연구로 파고들도록 도와주었다. 심혜옥이 음악을 사랑해온 어머니의 유물인 축음기를 대학실험실에 가져다놓아 정숙한 실험실에 은은한 레코드의 선률이 울릴 때에도 로박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실험실의 새로운 환경을 긍정하고 받아들이였다. 심혜옥은 그 로박사의 아들을 사랑하였다. 대학실습공장에서 기사로 일하는 의젓한 청년이였다. 그것은 그 녀자의 온 심혼과 깨끗한 순정을 바친 열렬한 첫 사랑이였다. 그러나 사랑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 사랑의 불길은 오래가지 못하고 꺼져버렸다. 심혜옥은 대학실습공장에서는 물론 화학공업계에서 별로 실용적가치도 없는 론문을 발표하고 버젓이 준박사학위를 탄 그의 위선에 환멸을 느끼였다. 그런 준박사론문을 적극 지지하고 뒤받침해준 로박사의 태연자약한 관용을 리해할수도 용서할수도 없었다. 로박사에 대한 존경심은 모래성처럼 무너지였다. 로박사의 부인이 그 녀자를 애지중지했건만 그는 과학자의 량심을 기만하고 자기 명예와 학위만을 존중하는 가문에 들어가고싶지 않았다. 사랑의 실패는 그 녀자에게 가슴을 저며내는것 같은 아픔과 영원히 아물수 없는 가혹한 상처를 주었다. 대신 그 녀자는 인생의 눈을 떴다. 참답게 숙성한 녀성의 눈이였고 과학과 인생의 진리를 판별한 눈이였다. 심혜옥은 사랑을 잃은 언 심장을 부여안고 결연히 대학연구소 울타리를 벗어나 공장으로, 번성하는 화학공업의 실천장으로 떠나갔다. 축음기는 그 녀자가 없을 때에도 시약내 풍기는 대학실험실의 구석진곳에서 음악과 화학의 어떤 미지의 숭고한 련관을 꾸준히 추구하며 돌아갔으나 어느날 로박사가 치워버리게 하였다. 추억은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그때의 상처를 다시금 아프게 쑤시고 헤집어놓았다. 심혜옥은 망연히 앉아있는 자신을 깨닫고 두서없이 보꾸레미를 쌌다. 뼈마디가 부서지는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방을 나섰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밤에 실험기구들을 공장실험실에 갖다두어야 했다. 만약 낮에 이 소중한것들을 들고간다면 사람들앞에서 실패한 인생을 여실히 보여주게 될것이며 자존심을 사정없이 칼질당할것이였다. 합숙생들은 혼곤히 잠에 들었는지 촉수낮은 전등이 비치는 긴 복도는 고요하였다. 심혜옥은 발자국소리를 애써 죽이며 합숙생들의 발길에 두리뭉실하게 다스려진 오래된 계단을 조용히 내려갔다. 열려있는 바깥현관문을 나선 심혜옥은 어둠속에서 불현듯 들려오는 말소리에 멈칫 섰다. 《애순이, 정말 합숙에 들어가 잘래?》 총각이 속타하는 목소리는 귀에 설었다. 처녀는 준비직장 선별공이다. 《어마, 그럼 밤을 새자요? 남들이 보겠어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요.》 처녀의 말은 단호하지 못하고 총각을 혼자 보내는 아쉬움과 그의 소청을 더 들어주고싶어하는 여린 마음이 엿보인다. 심혜옥은 무엇을 훔치다 들킨 사람처럼 실험기구보따리를 든채 당황해서 오도가도 못하고 서있기만 했다. 그대로 걸어나가면 애순이와 총각의 달콤한 순간을 방해할것이고 그렇다고 불이 있는 현관쪽으로 뒤걸음질할수는 없다. 그는 어떻게 공교로운 순간을 모면할것을 망연히 바라며 그자리에 못박혔다. 《애순이, 난 그대로 돌아가지 않겠어.》 《그럼?》 《오늘은 말해, 우리 결혼을 언제 하잔?》 《어마, 남들이 뭐라겠어요. 처녀가 일찍 시집간다구…》 《스물셋이 어디 어려?》 《아니 안돼요.》 애순이는 현관기둥에 붙어서 자꾸 가까이 다가서는 총각과 거리를 유지하느라 이쪽으로 게걸음해온다. 심혜옥은 잠자코 서있었다. 사뭇 거절하면서도 행복해하는 애순이의 얼굴표정이 어둠속에서 보이는듯 싶다. 그러는 사이에도 몸이 단 총각은 점점 처녀한테 다가들고 처녀는 혜옥이쪽에 바싹 밀려왔다. 심혜옥은 그만 더 서있을수 없어 조용히 인기척을 내고 그들옆을 지나갔다. 놀랜 애순이가 총각의 등뒤에 몸을 숨기는것을 느끼며 도망치듯 빨리 걸어갔다. 조심하는데도 유리관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뒤에서 애순이의 당황해서 속삭이는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공장 실험실 기사언니예요… 나보다 20년이 우인데… 아직 처녀예요.》 《동무도 저런 <고정재산>본을 따를래?》 《어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저 기사언니는 청춘을 과학에 바쳤어요. 얼마나 많은 연구를 했게요. 도일보에 났어요.》 《영화의 주인공같은 로처녀로군, 정말 바쳤대? 시집 못가니 바친걸로 된게 아니야?》 《이제 보니 동문 정말 못되군요. 썩 물러가요!》 애순의 성난 목소리는 어둠속에서 단호하게 울렸다. 《애순이 그러지마. 롱으로 말한거야.》 총각의 빌붙고 사정하는 목소리는 반달음해 쫓기는 심혜옥의 등에서 벌레마냥 기여내린다. 총각의 목소리는 이즈음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의 맵짠 목소리로 바뀌여 귀전을 두드렸고 가슴속 상처를 갈가리 찢어 헤집어놓았다. 《저 녀자가 행실이 곱지 못해 사람좋던 우리 지배인을 못쓰게 만들었다우.》 《신문에까지 난다 했더니 뒤에서 호박씨를 까구있었구만.》 《세월없이 무슨 연구요 하더니 간부홀아비한테 시집가려 했었군.》 심혜옥한테는 그것이 몇몇 사람들의 말소리가 아니라 온 공장사람들이 자기를 두고 술렁대는것 같이 들리였다. 그 녀자는 보자기안의 유리기구들이 부서지는것 같은 아츠러운 소리를 내서야 굵은 가로수곁에 지친듯 기대섰다. 눈물이 샘솟듯 흘러 볼을 적시였다. 꺼실꺼실한 나무줄기에 아프도록 볼을 비비며 세차게 흐느꼈다. 그러나 울음으로는 모욕감에 얼어붙은 가슴을 녹일수도 진정시킬수도 없었다. 사위는 고요하고 인적이 없는 길에 한줄기 서늘한 밤바람이 지나가며 심혜옥의 귀밑에 흩어진 머리오리를 흩날렸다. 길옆의 풀숲에서 귀뚜라미가 애처롭게 울어댔다. 밤하늘의 별들만이 성긴 잎새들사이로 그 녀자에게 푸른 빛을 아낌없이 뿌려주고있었다. 심혜옥은 한동안 지나서야 실험기구보따리를 고쳐 싸매들고 공장쪽으로 힘없이 걸어갔다. 어쩐지 애순이의 심술궂은 총각이나 자기를 시비질하는 사람들보다 6년전에 취재왔던 도일보의 기자가 원망스러웠다. 그때 심혜옥은 오래동안 고심해오던 실험연구사업들이 여러 측면에서 성공하여 공장의 화학제품생산과 질제고에 크게 기여하고있었다. 도일보사에서 그를 취재하러 이마가 벗어진 나이 듬직한 기자가 찾아왔다. 심혜옥은 쑥스러움을 참으며 반나절을 기자의 요구에 응해 자기의 생활경력과 고심어린 탐구과정들을 자상히 이야기해주었다. 그런데 며칠후에 도일보의 4면에 실린 《청춘을 과학탐구에 바친 처녀연구사》라는 제목부터 요란한 기사를 보았을 때 저으기 놀랐다. 부끄럽기도 했다. 자기 생활과 연구과정을 거의나 그대로 썼는데도 심혜옥은 자신이 신문에서 강조한것처럼 그렇게 훌륭한 처녀연구사라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한번도 그런 고상하고 아름다운 녀성으로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소박하고 성실하며 겸손을 미덕으로 아는 그 녀자는 며칠동안 공장사람들의 칭찬과 선망의 눈을 피해 구내실험실과 합숙호실에만 붙박혀지냈다. 심혜옥은 주위사람들이 잠잠해진 다음에도 오래동안 신문기사에서 환기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쩐지 량심을 속인것 같은 괴로움속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자기가 시집을 가지 않고 청춘이 시들도록 연구사업에만 헌신하며 살아온것이 사실인데도 사람들앞에 솔직하지 못하고 진실을 숨기고 때이른 명예를 슬쩍 따낸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해도 그는 마음이 편안치 않고 자책감으로 불안했다. 과연 시집을 가고싶지 않았던가?… 그는 첫 애인과 결별하고 련정의 상처가 아무느라 서른살을 넘겼다. 랭혹한 자존심, 고집, 실망, 이성문제에 대한 무관심, 첫사랑의 상실에서 오는 허무감에 시달리며 세월이 흘러 청춘이 영 지나가버렸다. 화학으로 성공하려고 억척같이 결심을 굳혀왔는데 청춘은 시간과 공간속으로 속절없이 아득히 멀어지면서 고독과 번민에 모대기는 그를 어처구니없어 하고 비웃었다. 푸른 청춘은 락엽지면서도 이성에 대한 동경과 본능적갈망, 녀성적참생활을 바라온 그를 동정하여 단풍의 정열을 불태우는것이였다. 그것은 남들처럼 아늑한 가정을 가지고 안해로, 어머니로 되여 보고싶은 애틋한 소망, 사라져가는 젊음의 마지막 불길이였다. 그러나 단풍잎새의 아름다움마냥 한동안 타오를수 있었던 그 불길은 졸지에 사그러들었다. 심혜옥은 신문기사로 하여 차례진 명예를 무겁게 여기면서 사생활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졌다. 연구사업의 그런 성공이 청춘을 바친 대가로 얻어졌다는 인식에 습관되여갔고 그것을 배신하지 말고 고이 지켜가려는 결심을 굳히였다. 그러한 생활의 나날에도 어째선지 마음속에서는 신문기사에 채 씌여지지 못한 진실의 샘줄기가 흐르고있었다. 그는 사정이 어떠하든 녀성들이 홀로 사는 길을 택하는것을 진심으로 바라지 않았다. 진실하고 우애의 정 넘치는 배우자, 생활의 벗을 만난다면 고무를 받아 연구사업은 더 잘 진척되여나갈것이며 생활에서도 행복을 찾을것이다. 무엇때문에 외롭게 살겠는가. 독신녀성으로 홀로 늙는것이 인간본연의 삶은 아닌것이다. 심혜옥의 내심은 그렇게 주장하고 웨치면서도 생활은 공장사람들앞에 평가되고 인정된 로처녀로서의 울타리에서 리탈하지 않았다.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리성으로 이루어지는 생활이였다. 감정과 행동의 모순, 불일치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끝내 마음속 혼란을 일으켰으며 얼어붙은 안정을 깨뜨리였다. 심혜옥이 마흔고개를 방금 넘어선 그해 봄날, 불현듯 로처녀의 언가슴에 아지랑이가 피여났다. 이제까지 사업상면에서 존중해왔고 어렵게만 대해오던 지배인 차웅섭이 그의 심혼에 비쳐들었다. 심혜옥은 대바르고 원칙이 강하며 연구적인 자세로 기술부와 실험실사업을 파고들어 목표가 없이 사는 기사들을 분발시키고 실질적인 열매를 거두도록 이끌어주는 지배인을 공장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두려워하면서도 무척 존경해왔었다. P촉매의 스물아홉번째 실험이 또다시 실패한 날이였다. 심혜옥은 저녁밥을 먹으러 합숙에 들어갈 생각조차 잊은채 밤늦도록 공장실험실에 붙박혀있었다. 기사장한테서 받은 모욕감에 가까운 뼈아픈 추궁이 속에서 내려가지 않는것이였다. 차웅섭이 P촉매연구를 지지하는것으로 하여 기사장은 공개적인 반대를 못했지만 비료생산의 운명을 놓고 심혜옥기사가 립장을 똑바로 가져야 한다고 은근히 위협적으로 말하였다. 기사장은 P촉매가 실험연구에서 성공한다 해도 도입하자면 안전하게 해오던 지금의 생산기술공정을 해체해야 하고 그러느라면 공장이 볶이우며 또 그랬댔자 부담이나 많아졌지 리득은 별반 차례지지 않는다는것으로 하여 늘쌍 새로운 기술문제에 대해 객관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는것이였다. 심혜옥은 그날 몹시 의기소침해서 실험실의 낮은 의자에 앉아 기술문건을 뒤적이며 실패원인을 찾고있었다. 새 실험재료를 구하러 이번에는 멀리 송림지방에 가야 할것을 생각하니 전에없이 맥이 풀렸다. 그때 실험실 문이 열리며 차웅섭이 들어왔다. 그는 출장길에 들고다니는 띠고리를 채우는 구식가방을 타일을 붙인 실험대우에 올려놓으며 약간 나무래는 투로 말했다. 《기사장이 뭐라구 했다구 또 맥을 놓은게군, 저녁밥을 건넨게 아니요?》 《합숙에 나가 먹고 왔습니다.》 심혜옥은 얼굴을 붉히며 지배인앞에 걸상을 가져다놓았다. 차웅섭은 권하는대로 스스럼없이 앉으며 눈가에 사람좋은 웃음을 띠웠다. 《혜옥동무, 너무 락심마오. 내 기사장동무를 만나봤소. 그 사람두 이젠 관점을 달리 할거요. 기사장은 좀 너그럽지 못해 그렇지 사람은 좋다오.》 차웅섭은 가방을 끌어당겨 무릎우에 놓고서 띠고리를 풀었다. 그는 가방안에서 배불룩한 종이봉투들을 하나하나 꺼내여 실험대에 놓았다. 다섯개나 되였다. 《혜옥동무가 언젠가 말하던 황철에서 나오는 광석페설물이요.》 《?…》 심혜옥은 놀라와서 종이봉투아구리를 헤쳐보았다. 회백색의 보드라운 가루가 가득했다. 봉투마다 그랬다. 《송림쪽에 있는 내 잘 아는 화학공장지배인한테 부탁했더니 저번날 사람을 시켜 보내왔드구만.》 차웅섭이 례사롭게 말했으나 심혜옥은 속에서 뜨거운것이 고여올랐다. 봉투겉면에 써놓은 화학기호는 분명 차웅섭의 필체였다. 어쩐지 그곳 화학공장지배인이 보내온것이 아니라 차웅섭지배인자신이 멀리 송림까지 가서 그 실험재료를 가져온것이라고 생각되였다. 이것을 보드랍게 가루내느라 얼마나 수고했으랴 하는 생각에 가슴이 후더워졌다. 《혜옥동무, 어떻소? 그걸루 P촉매실험을 계속할수 있겠소?》 《예…》 심혜옥은 목이 메여 겨우 대답했다. 차웅섭은 걸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됐소. 난 가겠소. 밤차로 화학공업부에 가야 하오, 회의가 있소.》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문쪽으로 몇걸음 옮기던 차웅섭은 다시 돌아섰다.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큼직한 사과 두알을 꺼내였다. 그는 사과를 어떻게 할지 몰라 얼굴에 게면쩍은 표정을 짓더니 출입문곁의 선반에 올려놓고 나가버렸다. 실험실에는 정적이 깃들었다. 심혜옥은 굳어진듯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지배인이 남기고 간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정적을 깨칠가 두려웠다. 마음을 평온하게 그리고 해뜨는 아침의 바다마냥 조용히 설레이게 하는 그 정적을 영원히 지키고싶었다. 심혜옥은 불그레한 빛이 도는 흠집 하나없는 사과를 한알은 공장실험실에 두고 한알은 합숙호실에 가져다놓았다. 사과는 좀처럼 시들지 않고 오래도록 향기를 풍겼다.… 그때는 생이 얼마나 푸르게 느껴지고 즐거웠던가. 심혜옥은 온몸 혈관속을 흐르는 피의 뜨거움으로 가버린 청춘의 부활을 느끼였다. 외롭게 살던 구석진 호실이였지만 침대에 누우면 까닭모를 달콤한 몽상에 잠기게 되고 몽상은 이어 소녀시절마냥 흰구름피는 봄하늘로 나래저어 가는것이였다. 잠에서 깨면 밝고 청신하고 따뜻한 아침해가 창문으로 그 녀자를 정답게 들여다본다. 그는 삶의 약동과 신심이 가슴속에 팽배히 차오름을 느끼며 공장실험실로 달려갔다. 련속되는 실패에도 용기를 잃거나 절망에 빠지지 않고 다시금 일어섰고 또 다른 실험원료와 자재를 구하러 배낭을 지고 머나먼곳으로 떠나갔다.… 그것이 철늦은 사랑이 주는 강렬한 힘이였음을 심혜옥은 지금에 와서야 깨달았다. 가슴에 타오르던 그 열정은 시든 마음을 젊게 하고 희망과 생기로 충만시키는 인생의 불이였다. 그러나 불은 꺼지고 희끗한 주름살과 쓰라린 교훈의 재만 남았다. 심혜옥은 눈물을 머금고 어둠속을 힘없이 걸어갔다. 유리실험기구들을 싼 보자기가 손에서 점점 무겁게 처져내렸다. 가로수와 맞다들려 하마트면 깨뜨릴번하였다. 눈물과 절망이 앞을 가리워 어방짐작으로 길을 따라가며 밤의 장막을 헤쳐나간다. 멀리서 공장의 불빛이 반짝였건만 절망에 휩싸인 심혜옥은 사과향기가 풍기던 먼 그날을 애끓게 추억하였고 그것이 사라진 젊음과 함께 다시는 돌아올수 없는것임을 슬프게 깨달았다. 외등이 드문히 켜진 공장건물은 밤의 고요속에 묻혀있었다. 심혜옥은 머리를 수굿하고 정문을 지나 실험실이 있는 구내쪽으로 걸어갔다. 문득 그는 멈춰섰다. 농축직장건물 웃층에 있는 지배인사무실에 불이 환히 켜있는것이였다. 아직도 퇴근하지 않은 모양이다. 이 며칠간 인계사업준비를 하느라 밤늦도록 사무실에 있는 차웅섭이였다. 낯익은 사무실창문의 불빛을 보자 그 녀자는 삽시에 온몸의 기운을 잃어버렸다. 이제껏 강잉히 지탱해오던 의지가 허물어지고 애타는 설음에 묻혀버렸다. 그 녀자의 눈물에 젖은 뿌연 망막속으로 사무실창문안의 길쭉한 앞상에 등을 구부정하고 앉아있을 차웅섭의 모습이 비쳐들었다. 애달픈 설음의 파도속에서 지배인이 자기때문에 철직되였다는 죄의식, 뼈아픈 후회와 가책의 차거운 물마루가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그런 죄의식으로 하여 심혜옥은 차웅섭을 도당위원회에서 돌아오는 날 밤에 만난후로는 공장구내에서 자주 보면서도 더 만나볼념을 내지 못했다. 성실하고 도량넓은 지배인은 자기의 해임리유로 감정에 잡혀있거나 편협하게 처신하지 않고 직장들과 부서들을 찾아다니며 인계문제와 관련한 사업을 펴나갔다. 별로 할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세심한 차웅섭에게는 미진된 일거리가 남아있는것이였다. 그러나 지배인은 아직까지 실험실에만은 찾아오지 않았다. 심혜옥은 불빛이 내비치는 지배인사무실 창문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채 망연히 서있었다. 그는 말할수 없는 고통속에서도 사업을 성실하게 마무리하고있는 차웅섭과 자신을 비교해보았다. 그러자 사직서 한장을 남기고 외삼촌 있는데로 훌쩍 떠나가려는 자신의 결심이 너무도 모질다는것을 느꼈다. 지배인사무실에 불이 꺼졌다. 이제야 퇴근하려는 모양이였다. 심혜옥은 농축직장층계로 해서 밖으로 나올 차웅섭의 눈에 띄일가봐 실험실쪽으로 가지 못하고 방향을 돌려 멀찌감치 큰 나무들이 무성한 구내변두리를 에돌아갔다. 그는 얼마동안 지나서야 컴컴한 구내숲에서 나와 실험실이 있는 생산기술부건물의 층계를 조용히 올라갔다. 마지막 걸음이 될 낯익은 인조석층계를 힘겹게 오른 심혜옥은 그만 놀라서 굳어졌다. 아무도 없을 실험실에 불이 켜져있고 차웅섭의 뒤모습이 칸살넓은 창문으로 보이는것이였다. 심혜옥은 황황히 다가가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차웅섭은 바로 심혜옥이 늘 앉군 하는 가운데 실험대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한 팔굽을 실험대에 고이고 서글픈 생각에 잠겨있는 그 모습앞에서 심혜옥은 그만 눈물이 쿡 치솟았다. 순간 그는 자기가 아무리 타지방으로, 먼곳으로 떠나가도 마음속에서는 차웅섭과 영 헤여질수 없음을 통절히 깨달았다. 한순간 심혜옥은 차웅섭을 따라 신의주에 가서 실험을 계속할가 하는 불같은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인츰 그것이 버젓한 출로가 못됨을 알았다. 차웅섭의 아들과 며느리가 있는 그곳에 가면 어쩐단 말인가. 자기들을 두고 공장에서 쫓겨왔다는 풍문이 뒤따라올것이다. 아니, 무슨 렴치로 거기까지 차웅섭을 따라간단 말인가? 이곳에서 《행실》을 바로하지 못해 지배인을 해임당하게 한것이 아직 부족하단 말인가. 참말이지 자기때문에 차웅섭이 저렇게 되였다. P촉매의 실험실적연구를 보다 원만히 했더라면 화학비료생산에 지장을 줄 정도의 불완전한 기술공정개조를 하지 않았을것이였다. 차웅섭이 생산계획을 여러달째 못하고 두루 그래서 지배인자리를 내놓게 되였다고 좋게 말했지만 내적인 원인은 그것이 아니다. 나의 불운한 P촉매때문에 그렇게 되였다. 어째서 P촉매연구에 더 분발해서 결합제조성의 여러 측면을 죄다 고려하고 면밀히 따져보지 못했는가. 성공의 문턱에 와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가뜩이나 긴장한 비료생산에 엄중한 저해를 줄수 있다는걸 생각이나 했던가. 그 어떤 변명으로도 나의 잘못을 가리울수 없다. 나의 불찰이고 지식의 빈곤이며 탐구의 부족이다. 내가 애초에 똑똑히 처신했더라면 지배인이 촉매연구에 말려들지 않고 결백성도 손상되지 않았을것이다. 심혜옥은 실험실로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졌다. 청동으로 주조한듯 움직이지 않고있던 차웅섭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등을 구부정하고 걸어다니며 어수선히 널린 실험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실험관들과 용기들을 선반의 제자리에 질서있게 얹어놓았고 실험일지를 집어서 한동안 들여다보고는 못에 걸어놓았다. 이윽고 차웅섭은 실험실 출입문을 열고 나왔다. 심혜옥은 몸을 피할수가 없었다. 《혜옥동무 아니요?!》 차웅섭은 못내 놀라와하면서도 반가움을 앞세우고 다가왔다. 심혜옥은 눈물젖은 눈을 감추느라 고개를 떨구었다. 《이 밤중에 어떻게 나왔소?》 차웅섭은 전에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고서 손을 뻗쳐 심혜옥이 들고있는 실험기구 보꾸레미를 받아들었다. 《아니?! 이건 합숙호실에 있던게 아니요. 왜 가지고 나왔소?》 《지배인동지… 전… 공장을… 그만두려고 해요…》 《뭐요?!… 그게 정말이요?》 심혜옥은 차웅섭의 무겁게 치뜬 눈길을 피했다. 《용서하세요. 전… 달리할수 없었어요…》 무거운 침묵끝에 차웅섭이 타드는 입술을 움직였다. 《결국 동문… 나약한 녀자였구만… 언젠가 밤길을 가면서 화학에 헌신하는것이 당에 충성하는 길이고 인생보람이라고 하던 말도 진심은 아니였구.》 심혜옥은 랭정하고 침착하려고 했지만 음성은 어찌할수 없는 슬픔과 애정의 항거로 떨렸다. 《지배인동지… 말씀을… 쉽게 하지 마세요.》 《떠나려는 동무의 처사가 사람들앞에서 그걸 증명해주고있소.》 《…》 심혜옥은 차웅섭의 랭혹한 눈길을 마주볼수 없었다. 그 눈에서는 안타까움과 노여움이 정으로 응축되여 이글거리고있었다. 《좀 말해보오. 그래 무엇때문에 공장을 떠나겠다는거요? 무엇을 잘못했기에?… 동무는 이 지배인과 다르단 말이요! 그러지 마오. 혜옥인 순결한 녀성이요. 공장에 그냥 있어야 하오. P촉매를 기어이 성사시켜야 하지 않겠소. 남들의 험구가 무섭다고 하던 일까지 집어던지겠소?!》 차웅섭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지… 사람들의 험구가 무서운게 아니라 혜옥동무의 화학이… 앞날이 죽는게 무섭소. 촉매의 질갱신은 물거품이 될거구. 비료생산은 여전히 변화없는 그 모양일거요.》 심혜옥은 기운이 빠져 현기증이 온 사람처럼 비칠거렸다. 차웅섭은 손으로 그 녀자의 어깨를 부축했다. 심혜옥은 그의 팔에 의지해서 겨우 몸의 균형을 바로잡았다. 메마른 입술에서 신음소리같은 가는 말소리가 새여나왔다. 《지배인동지…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차웅섭은 떠듬떠듬 흥분어린 갈린 목소리로 그 녀자를 위로했다. 《난 아직 공장실험실에… 혜옥동무한테 인계사업을 못했소. 지난기간 내가 집에서 연구해본것들이랑 해서 동무에게 넘겨줄 일거리가 여간 많지 않다오. 그런데 혜옥동무가 떠나면 어떻게 한다는거요.》 《…》 《그러지 말구 기운을 내서 합숙에 가자구. 내 바래다주지.》 심혜옥은 차웅섭의 손에 등을 밀리워 돌아섰다. 고통을 묵새기는 그의 눈을 보니 더 서있을수 없었다. 그 녀자는 자신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만 생각해온것이 면구스러웠다. 자기는 그래도 녀자이지만 홀몸으로 집살림을 하는 이 지배인이 본의아니게 당하는 운명의 쓰라림이야말로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을것이였다. 심혜옥은 가슴이 미여지는듯했다. 그는 차웅섭이 공장을 떠날 때까지 자기때문에 괴로와하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마음편하게 지내도록 하는것이 도리이고 마지막 진정의 바침으로 된다고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