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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적의 동태를 알아야 한다
윤 태 홍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전투의 승리를 보장하는데서 언제나 적정정찰에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시였다. 하기에 사령관동지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모든 지휘관들이 전투를 조직하기에 앞서 반드시 적의 동태를 장악하기 위한 정찰을 선행시키도록 하시였다. 묘령전투가 있은 후 우리 부대가 휘남현 유수차부락 가까이에 다달은것은 1937년 8월 초순이였다. 우리는 휘남현과 몽강현 접경지대인 유수차부락 동남쪽 깊은 수림속에서 며칠간 휴식하게 되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휴식하는 한편 유수차일대를 통과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유수차부락은 산등판에 자리잡고있는 자그마한 산간부락으로서 이곳에는 위만경찰대가 있을뿐이였다. 그러나 수림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으며 몽강, 휘남, 통화, 림강지대로 통하는 도로들이 교차되여있는 이곳에는 하루에도 몇차례씩 적《토벌대》들이 들리군 했다. 게다가 유수차일대의 산들은 산세가 험하고 나무마저 드물어 유격대들이 행동하기에는 여러가지로 불리한 곳이였다. 적들은 유격대가 지나다니는 이 길목을 막아보려고 산간오지에까지 감시망을 늘여놓으며 기동로를 수리하는 등 온갖 발악을 다하고있었다. 도로를 따라 촘촘히 세워진 감시막도 이때에 생겨난것이다. 인민들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놈들의 행패와 위협에 못이겨 밤낮없이 감시막으로 끌려나가지 않을수 없었다. 이런 조건에서 우리 부대가 이 지대를 통과하자면 일정한 준비와 구체적인 대책이 있어야 했다. 이때 지휘부에서는 유수차부락에 있는 적을 소탕하고 대도로로 행군할것을 계획하였다. 당시 적《토벌대》의 대부분은 산간 수림지대를 싸다니고 대도로주변 개활지대는 사실상 비여있다싶이 하였다. 게다가 우리의 력량이 강하고 대오를 위만군으로 가장할수도 있었으므로 이 계획은 십분 가능한것이였다. 이 계획을 실현하자면 유수차부락을 중심으로 한 적정을 파악하는것이 우선 중요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장복동무가 인솔하는 정찰조에 속하여 부대를 떠나게 되였다. 그때 우리 정찰조는 모두 4명이였다. 유수차부락가까이에 도착한 우리들은 휘남과 몽강을 련결하는 큰 도로가 눈앞에 보이는 언덕우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림강과 통화로 나가는 길도 멀리 바라볼수 있는 유리한 매복지점이였다. 우리는 이곳에 매복하여 긴장하게 정찰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매복정찰만으로는 적의 행동계획을 알아낼수 없었다. 우리는 이미 지휘부에서 입수한 자료에 의하여 적《토벌대》가 유수차를 지날 때에는 이곳 경찰대에 사전에 전화로 통보한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우리는 도로옆에 있는 전주대밑에 전화기를 설치하고 거기에다 적의 전화선을 련결시켰다. 그리하여 적의 경비전화내용을 감쪽같이 도청할수 있었다. 적의 행동계획을 알아내기 위하여 우리는 밤낮 쉬임없이 정찰공작을 계속하였다. 밝은 낮은 물론이고 깊은 밤에도 도로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여겨 감시하였다. 어느때에 적들의 눈에 띄울지 모를 대도로주변에서 적의 전화선에 우리의 전화기를 련결해놓고 놈들의 통화를 듣는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하물며 며칠을 두고 이렇게 정찰을 계속해야 하였으니 여간만 피로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부대의 눈이 되고 귀가 되여야 하며 부대의 행군로를 개척하는 열쇠를 찾아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위험도 곤난도 무릅쓰고 계속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우리는 만일의 경우를 고려하여 위만군복장을 입고있었으며 웃옷안주머니에 있는 암호까지도 위만군과 똑같이 적어넣었다. 그리고 《만주국기》까지 가지고다니면서 갑자기 주민들을 만나게 될 때에는 《일본군가》도 불렀다. 이와 같이 적정을 정찰하던 우리는 적의 《토벌대》가 다음날 유수차를 통과한다는 적의 전화를 도청하였다. 이 정보를 받은 지휘부에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시를 보내여왔다. 그것은 적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그곳에 우리의 전화기를 련결하고 우리를 유수차경찰대로 가장하여 행동하라는것이였다. 이와 함께 몽강에서 다시 전화가 오면 휘남지방에 《공산군》대부대가 나타났다는 허위《보고》를 하라는것이였다. 이것은 《토벌대》를 휘남쪽으로 유인한 후에 유수차부락을 치자는것이였다. 그날밤 12시경 내가 전화기를 지키고있을 때였다. 갑자기 전화종이 울리더니 몽강에서 유수차경찰대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른 응답암호를 댔다. 내가 하는 대답을 듣자 그놈은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고 이어 말을 계속하는것이였다. 이때 나는 지휘부에서 받은 명령을 다시 생각하면서 그 말이 끝나기만 기다리고있었다. 그런데 그놈은 《…래일 유수차로 가려던 〈토벌대〉가 계획을 바꾸어 가지 않게 되였다. 알겠는가.》라고 다급히 뇌까리고는 제멋대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그바람에 나는 한마디도 말을 못했다. 호출암호를 모르니 그놈을 다시 찾을수도 없고 하여 잠시 망설이던 나는 마음을 다잡고 동무들과 함께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적을 휘남쪽으로 유인하지는 못했지만 다음날 유수차부락으로 적《토벌대》가 오지 않을것이 틀림없으니 그곳 경찰대를 치는데는 어차피 유리할것이였다. 그리고 우리가 전화선을 끊었으므로 경찰대놈들은 적《토벌대》가 올것으로만 알고 다음날 아침부터 바삐 돌아갈것이였으므로 이때를 리용하여 들이치면 더욱 좋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을 지휘부에 보고하였다. 이를 접수한 지휘부에서는 다음날 대낮에 유수차경찰대를 습격하고 무장을 해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유수차경찰대를 소탕하기 위한 습격조가 조직되였다. 경찰대습격은 적《토벌대》가 온다던 오전 10시경에 진행되였다. 1중대장이하 약 50명으로 구성된 우리 습격대오는 위만군으로 변장하고 《만주국기》를 선두에 날리면서 대도로로 행진해나갔다. 우리는 유수차부락근처에 이르자 대렬을 다시 정돈하고 왜놈《군가》까지 부르면서 경찰대앞으로 접근해갔다. 우리가 이렇게 위만군행세를 하면서 경찰대문전에 다달았을 때였다. 35명가량 되는 위만경찰대놈들은 정문앞으로 황황히 달려나와 대렬을 지으면서 우리를 《영접》하느라고 바삐 돌아치고있었다. 우리는 더욱 기세를 돋구어 걸어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았다. 이때 중대장동무는 우리를 《영접》하러 나온 경찰대놈들을 아래우로 훑어보면서 왜 그렇게 동작이 굼뜬가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그놈들을 향해 큰소리로 구령을 치는것이였다. 《좌로 돌앗!》 《우로 돌앗!》 《뒤로 돌앗!》 눈이 둥그래진 놈들은 연방 내리는 구령대로 인형처럼 움직이였다. 이렇게 놈들을 들볶아 세운 후 중대장동무는 우리에게 눈신호를 했다. 우리는 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그놈들에게 일제히 달려들어 무장을 해제했다. 불의에 일어난 일에 경찰대놈들은 영문을 몰라 입을 헤벌리고 서로 마주볼뿐이였다. 우리가 무장을 다 해제한 다음에도 경찰대놈들은 경우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리둥절하여 그냥 서있었다. 이때 중대장동무가 그들의 앞으로 한발자국 나서면서 웨치듯이 말하였다. 《우리는 〈토벌대〉가 아니라 인민혁명군이다.》 경찰대놈들은 그 소리를 듣자 기겁해서 어쩔바를 몰라했으며 그중 몇놈은 땅에 풀썩 주저앉고말았다. 그야말로 생벼락을 맞은 놈들은 금시에 얼굴색이 변해지면서 푸들푸들 떨고있었다. 인민들에게 눈알을 굴리면서 호통을 치던 놈들이 넋을 잃고 떨고있는 그 모양은 참으로 가증스러웠다. 중대장동무는 그들에게 일제의 죄상을 낱낱이 폭로한 다음 계속해서 다시는 일제기관에 복무하지 말고 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도와 생업에 종사하라고 하면서 중국청년으로서 지켜야 할바가 무엇인가를 설명해주었다. 머리를 푹 숙인채 묵묵히 듣고만있던 위만경찰대놈들은 잠시후 울먹이는 소리로 자기들의 죄과를 시인하며 용서를 비는것이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로비를 주어 집으로 떠내보내면서 부락인민들앞에서 지난날 자기들이 저지른 죄를 사과하고 다시는 일제의 앞잡이노릇을 안하겠다고 맹세를 하게 했다. 이때 우리는 모여든 인민들앞에서 경찰대에 보관되여있던 일체 문건들을 불태워버렸다. 부락주민들은 타오르는 그 불길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소매를 부여잡고 《당신들이 정말 인민의 군대요. 참 고맙소.》라고 감격어린 어조로 눈물겨워 말하는것이였다. 이런 광경을 보고있던 몇명의 경찰대원은 받았던 로비를 도로 내놓으면서 우리를 따라 항일전에 나설것을 탄원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유수차경찰대를 대낮에 감쪽같이 소탕하고 수많은 무기와 물자들을 로획하였으며 부대의 행군로를 개척하였다. 그후 우리 부대는 유수차등판을 지나 통화, 휘남, 류하일대에서 활동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