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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아동단원 금순이
김 옥 순
해마다 어린이들은 6월이 돌아오면 자기들의 명절인 6.6절을 뜻깊게 기념한다. 나는 미래의 혁명가를 키우는 아동들의 조직인 조선소년단이 창립된 6.6절을 맞을 때마다 지난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오직 혁명을 위하여 서슴없이 목숨을 바쳐 싸운 수많은 아동단원들을 회상하게 된다. 나는 그중에서도 참된 아동단원이였으며 죽음으로 혁명의 비밀을 고수한 김금순이를 영원히 잊을수 없다. 내가 금순이를 처음 만난것은 1932년 12월이였다. 적의 《토벌》에 의하여 부모를 잃고 의지할곳 없는 고아로 된 나는 왕우구 송림촌에 있는 금순이의 집에서 살면서 그와 함께 북동에 있는 아동단학교에 다녔다. 그의 집에는 부모와 어린 동생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반일회에서, 어머니는 부녀회에서 사업하고있었다. 금순이는 아동단원으로서 항상 조직에서 주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으며 아동유희대의 활동에서도 모범적이였다. 1933년 5.1절을 앞둔 어느날 금순이와 나는 소왕청에 가서 아동단생활을 하면서 유격구인민들에게 노래와 춤을 보급하라는 과업을 조직으로부터 받았다. 그때 금순이의 나이는 8살이였고 나는 13살이였다. 보통 8살이라면 어머니치마자락을 잡고 어리광을 부릴 때다. 그러나 금순이는 나이가 어렸지만 여무지고 똑똑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부모의 슬하를 떠나 머나먼 소왕청으로 가는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며칠후에 금순이와 나는 길떠날 차비를 하고 사랑하는 그의 부모와 작별하였다. 북동아동단 관리원을 따라 여러날 행군하여 소왕청 마촌에 도착한 우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만나뵈러 곧장 군부로 찾아갔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우리들을 반가이 맞아주시고 살아온 경위와 앞으로의 결의도 들으신 후 현과 구의 공청지도일군들에게 우리들의 생활을 잘 돌봐줄데 대하여 당부하시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금순이가 너무도 어리고 귀엽게 생겼으므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먼길을 걸어오느라고 얼마나 고생하였는가, 나이는 몇살인가, 부모들은 무슨 일을 하는가를 자세히 물으시였다. 그리고 그이께서는 우리들이 아동단생활에 충실하고 자기의 임무수행에서 모든 아동들의 모범이 되며 노래와 춤도 가르쳐줄데 대하여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이때로부터 금순이와 나는 사령관동지의 슬하에서 육친적인 사랑과 보살피심을 받으며 자라났다. 우리는 그이의 가르치심을 가슴에 아로새기고 노래와 춤을 보급하며 아동단원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우리 아동들을 극진히 사랑해주시고 늘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던 그이께서는 어느날 해질무렵에 전령병을 시켜서 우리 아동단원들을 부르시였다. 우리들 30여명의 아동단원들은 모두 환성을 올리며 등에 배낭을 지고 그이께서 계시는 리수구골짜기 귀틀집으로 갔다. 마당에 서있는 나무그늘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계시던 그이께서는 만면에 웃음을 띠우시며 대렬 맨앞에서 달랑달랑 걸어오는 금순이의 손목을 잡으시고 그동안 무엇을 하였으며 어떻게 지냈는가를 차근차근 물어보시였다. 금순이는 공청조직에서 주는 통신련락과 보초근무 그리고 유희대활동을 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그이께서는 금순이의 넥타이를 만지시며 배고프지 않느냐고 물으시였다. 금순이는 배고프지 않다고 기운차게 대답하였다. 그이께서는 겨울날 차비에 대하여 더 물어보시고나서 우리의 배낭을 일일이 보아주시였다. 그때 우리는 반드시 배낭에 준비해두어야 할 미시가루와 성냥, 고뿌 등을 완전히 구비하지 못하고있었다. 우리의 배낭을 하나하나 살펴보신 그이께서는 미시가루 3kg과 성냥 등을 넣어주신 다음 손수 배낭을 메워주시였다. 이날저녁 우리는 그이께서 미리 마련해주신 식사를 하고 유쾌한 기분으로 마을로 돌아왔다. 이처럼 우리는 그이의 따뜻한 사랑과 세심한 보살피심속에서 그 어려운 나날에도 불편을 모르고 자랐던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금순이는 뜻밖에도 그가 집을 떠난후 적들의 《토벌》에 부모와 동생들이 모두 비참하게 학살되였다는 비보를 받게 되였다. 그날밤 금순이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도 이미 적들의 《토벌》에 부모를 잃은 고아인지라 그의 슬픔을 진심으로 동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 세상에 태여나 부모없는 고아로 된다는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일생의 불행이 아닐수 없으며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다는 그것처럼 더 가슴아픈 설음은 없는것이다. 《금순아, 울지 말아. 원쑤들앞에서 눈물을 흘려서는 안돼. 꼭 아버지, 어머니와 동생들의 원쑤를 갚아야 한다.》 나는 치미는 분노를 누르며 흐느껴우는 금순이를 달래였다. 그후 우리는 고아의 설음을 이겨내며 항상 락천적으로 생활하였으며 아동단사업에도 더욱 열성적으로 참가하였다. 한편 금순이와 나는 아동유희대원으로서 늘 한조에서 춤을 추며 유격구인민들과 유격대원들을 고무하군 하였다. 그와 쌍무를 할 때면 내가 밖에서 돌고 금순이는 안에서 돌아갔다. 나보다 키가 퍽 작은 그가 안에서 뱅글뱅글 재롱스럽게 돌아가는것을 보면 사람들은 모두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내주군 하였다. 어느날 사령관동지의 지휘하에 유격대가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그 승리를 축하하기 위하여 우리는 군대실에서 유희대공연을 하였다. 금순이는 이날따라 더 신이 나서 춤을 추었다. 그가 발을 재게 놀리며 다리와 다리사이로 수건을 뽑는 동작을 계속하자 구경하던 유격대원들은 발을 구르며 환성을 올렸다. 이날 우리 유희대공연이 끝나자 사령관동지께서는 유희대전원을 군대실에 앉혀놓고 금순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 금순아!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인 원쑤들을 잊지 말고 꼭 복수해야 한다. … 금순이외에도 여기는 고아들이 많다. 부모들이 있는 아이들이라 해도 적들에게 쫓겨다니며 고생스럽게 살고있다. 너의 부모들이 조선땅에서 못살고 간도에 와서 이 고생을 하는것이 누구때문인가? 그것은 일제강도놈들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총을 잡고 일제를 때려부시며 우리 조선을 해방하기 위하여 싸우고있는것이다. 너희들에게 다시는 나라없는 망국노의 수치와 설음을 주지 않기 위해서 피흘려 싸우고있는것이다. 너희들은 앞으로 조선혁명을 걸머지고 나아갈 꽃봉오리들이다. 그렇기때문에 학습도 잘하고 일도 잘하고 아동단생활과 유희대공작도 다 잘해야 한다. 그래야 너희들이 하루빨리 조선에 가서 잘살수 있는 날이 온다. 그이께서는 잠시 말씀을 끊으시더니 깊은 생각에 잠기시는것이였다. 《장군님 말씀대로 훌륭한 아동단원이 되여 꼭 아버지, 어머니의 원쑤를 갚겠습니다.》 자기때문에 가슴아파하신다는것을 눈치챈 금순이는 이렇게 말씀드렸다. 《그래! 그래야지! 금순이가 참 용하다!》 그이께서는 이렇게 칭찬하신 다음 우리 아동단원들이 낮에는 적《토벌》에 파괴된 집을 다시 세우거나 인민들의 농사일을 도와주고 밤에는 유희대공연을 하여 유격구인민들의 사기를 고무해주어야 한다고 하시였다. 그리고 아동단생활에서 규률을 잘 지키며 적의 침입으로부터 유격구를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보초근무, 통신련락 등의 사업에 아동단원들이 열성적으로 참가하며 한시도 해이함이 없이 항상 동원된 태세에서 생활하라고 간곡히 가르치시였다. 우리는 그이의 말씀을 가슴깊이 새기고 아동단생활과 유희대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우리 유희대는 모든 반일혁명력량을 튼튼히 묶어세울데 대한 사령관동지의 가르치심에 따라 왕청현일대에 있는 반일부대들에도 찾아다니며 공연하였다. 우리는 유격구에서뿐아니라 적들이 둥지를 틀고있는 적통치구역인 석현, 팔인구와 두만강대안인 도문일대의 농촌부락에 나가서도 활동하였다. 우리는 이곳 지하조직들과의 긴밀한 련계하에서 인민들을 혁명에로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혁명가요도 불렀으며 유격구인민들의 락천적생활모습을 보여주는 춤도 추었다. 공연이 끝나면 부락의 아동들을 모여놓고 유격구아동단원들의 혁명적생활을 소개하면서 이 땅에서 일제를 쳐물리치지 않고는 우리 아동들이 행복한 사회에서 생활할수 없다는것을 설득시켰으며 군중들앞에서도 일제는 멸망하고 혁명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연설을 하였다. 특히 금순이의 노래와 춤을 보고 그의 연설을 듣는 인민들은 《저 아이를 봐서도 혁명을 해야겠다.》고 하였고 청년들은 저마다 유격대에 입대하겠다고 다짐하여나섰다. 나는 이미 1934년 여름에 사령관동지의 지시에 따라 우리 유희대가 북만에 있는 반일부대에 파견돼서 연예공연한 사실에 대하여 회상한바 있지만 이때의 금순이의 모습을 잊을수 없다. 높고 험한 로야령을 넘으면서도 지친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며 큰애들이 그의 배낭을 메려고 해도 끝내 뿌리치면서 앞서서 달싹달싹 걸어가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채사령부대가 주둔하고있는 마창에 도착하여 첫 공연을 하는 순간부터 금순이는 대인기를 끌었다. 공연의 막을 열자 금순이가 무대에 올라가 반일부대병사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그는 빈궁과 기아속에서 허덕이는 인민들을 구원하며 착취와 압박이 없는 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조중인민은 굳게 손을 잡고 일제를 반대하여 싸워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그의 말이 끝나자 반일부대병사들은 《밤알같은 처녀애가 어쩌면 저렇게도 말을 잘할가. 저 애를 봐서라도 우리가 항일을 잘해야겠다.》고 하면서 못내 감탄하는것이였다. 다채로운 공연이 끝난 그날밤 채사령은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금순이를 자기 방에 데려다가 무릎우에 앉히고 그에게 귀걸이와 손목걸이를 걸어주었고 맛있는 음식도 권하면서 쓰다듬어주었다. 이와 같이 금순이는 유격구에서는 물론 가는곳마다에서 유희대활동만 잘한것이 아니라 아동단원으로서 해야 할 임무수행에서 항상 모범적이였고 충실하였다. 비록 나이는 어렸어도 자기의 임무수행에서 용감하고 대담하였다. 1933년 겨울에 소왕청어귀에서 적의 《토벌》을 격퇴할 때의 일이다. 이때 금순이는 동무들과 함께 유격대원들이 차지하고있는 고지에 올라갔다. 그는 동무들과 함께 고지뒤면에 싸리나무를 꺾어다가 불을 피워놓고 눈에 푹 젖은 유격대원들의 신발을 말리워주기도 하고 그들에게 더운물을 공급하기도 하면서 대원들의 전투사기를 고무하였다. 특히 그는 적탄이 날아오는 속에서도 소리높이 구호를 웨치며 혁명가요를 목청껏 불렀다. 그가 부른 혁명가요는 유격대원들에게는 커다란 힘과 용기를 안겨주었으며 적들에게는 폭탄과도 같이 되였다. 금순이는 또한 통신련락임무수행에서도 민첩하였으며 용감하였다. 혁명조직의 지시라면 그는 캄캄한 밤에도 먼길과 험한 산을 넘나들며 통신련락을 수없이 하였고 유격구를 보위하기 위하여 고지에서 보초근무도 매일처럼 섰었다. 그가 9살 나던 1934년 여름 어느날 밤이였다. 유격구인민들은 피곤한 몸으로 모두 깊은 잠에 들어있었다. 이때 《토벌대》놈들은 야밤에 인민들이 흔히 피신하는 유격구뒤쪽으로 은밀히 기여들어왔다. 놈들은 총성을 내면 마을사람들이 모두 피신할가봐 총창으로 인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이 위급한 순간에도 금순이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마을로 뛰여다니며 적들이 왔다는것을 마을사람들에게 알려주어 피신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금순이는 사령관동지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피심속에서 참된 아동단원으로 자라났고 오직 그이께서 가르치시는대로 아동단사업과 생활에서 항상 모범적이였으며 자기 희생적인 투쟁으로 유격구인민들을 보위하군 하였다. 1934년 늦가을 유격구에서 자랑찬 투쟁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이였다. 금순이는 뜻밖에도 돌아간줄만 알았던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였다. 때마침 요영구혁명조직에서 적구에 보내는 극비문건을 전달할 련락원을 물색하던 참이였는데 그 적임자로 금순이가 선발되였다. 그후 얼마 지나서 우리는 뜻하지 않게도 비통한 소식을 듣게 되였다. 금순이는 조직이 준 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한 다음 어머니를 만나러 가다가 불행하게도 그만 백초구에 주둔하고있는 일제헌병대놈들에게 체포되고말았다. 적들은 금순이가 유격구에서 내려왔다는것을 알고 유격대와 유격구내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갖은 발악을 다하였다. 놈들은 금순이가 나어린 소녀임을 얕보고 살살 얼리면서 《나어린것이 누구한테 속았지. 바른대로 말만 하면 놔준다.》고 회유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당돌하게 뻗치기만 하였다. 회유의 방법으로는 비밀을 알아낼수 없다고 타산한 적들은 금순이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그러나 그는 조직의 비밀을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고문의 방법으로도 비밀을 알아내지 못한 놈들은 그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만약 네가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너를 죽일것이다.》 그러자 금순이는 《더럽다! 너같은 강도놈들과는 말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가증스러운 장교놈의 상판에 침을 탁 뱉아버렸다. 갖은 회유와 고문, 위협의 방법으로도 나어린 소녀를 굴복시킬수 없다고 인정한 적들은 그를 사형장으로 끌고갔다. 금순이가 포승에 결박되여 사형장으로 나가는 날 백초구시가에는 수천명의 군중들이 끌려나왔었다. 9살밖에 안된 어린 금순이가 울지도 겁먹지도 않고 고문에 피투성이된 얼굴을 떳떳이 쳐들고 사형장으로 나가는것을 본 모든 사람들은 애처로움과 분노에 가슴이 터지는듯 하였다. 《그저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아무 조건없이 너를 살리겠으니 말해라.》하고 적들은 말했다. 그러나 금순이는 《내가 잘못한것이 무엇인가?》고 오히려 반문하며 《나는 잘못한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 광경을 본 군중들은 눈물을 삼키며 이를 갈았다. 그렇지만 금순이는 울지도 않고 오히려 눈물을 흘리는 수많은 군중들과 정다운 아버지, 어머니들을 바라보며 소리높이 웨쳤다. 《아버지, 어머니들, 왜 우십니까. 울지들 마세요. 혁명군아저씨들이 꼭 원쑤를 쳐없앱니다. 조국이 해방되는 날까지 굳세게 싸워주십시오.》 악에 받친 원쑤들은 그의 가슴에 총을 겨누었다. 금순이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적들을 쏘아보며 《일제놈들을 타도하라!》고 웨쳤고 《조선혁명 만세!》를 소리높이 부르고 숨을 거두었다. 슬기롭고 용감한 아동단원이였던 금순이는 이렇게 자기의 최후를 영웅적으로 끝마치였다. 비록 9살의 어린 나이였으나 이 얼마나 빛나는 생애였으며 장렬한 최후였던가! 금순이가 애석하게 희생되였다는 비보가 유격구에 알려지자 모든 사람들은 비분에 떠는 가슴을 안고 그의 복수를 결의하여나섰다. 요영구골안에서는 금순이를 추모하는 추도식이 거행되였다. 추도가를 부르며 복수의 시위행진이 오래 계속되였다. 금순이의 장렬한 최후에 대한 소식은 당시 중국신문인 《구국신보》에도 보도되였고 국제당 잡지에까지 게재되였다. 김금순소녀의 영웅적희생은 백초구일대에서 혁명의 불길이 더욱 세차게 일어나게 하였을뿐아니라 왕청일대의 청년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동만각지의 수많은 남녀청년들은 손에 무장을 잡고 일제와 싸울것을 굳게 다짐하면서 항일유격대에 입대하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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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순이는 비록 우리의 곁을 떠났으나 지난날 그가 그렇게 열렬히 바라고 꿈꾸던 조국해방의 념원은 실현되였다. 오늘 공화국북반부에 수립된 사회주의제도하에서 우리의 어린이들은 당과 수령의 따뜻한 품속에서 부럼없이 행복하게 자라고있다. 나는 우리의 모든 아동들이 금순이를 비롯한 참된 아동단원들이 혁명에 충실하였던것처럼 당과 수령께 충직한 아들딸로, 혁명의 후비대로 더욱 충실하게 자랄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