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판

 

풀  판

 

풀판은 느슨히 누워있습니다

늘씬한 등판은 젊고 싱싱합니다

아침이면 안개의 흰옷을 고이 입고

내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밤새 기다린 그 풀판에

나는 염소떼를 가득 놓아줍니다

가벼운 바람이 살랑 불고

실안개 잦아서 이슬에 스밀 때

해가 솟습니다, 쟁글쟁글 웃는 해는

해살을 가득 물었다가 함뿍 뿜어대는것 같지요

이슬구슬이 해살을 엮어 무지개옷을 짭니다

곱습니다, 아니 기운찹니다

풀판은 꿈틀 몸을 뒤채는것 같습니다

그 힘찬 품에서

앞선 염소가 입 가득 푸른 잎을 뭅니다

그러면 줄기에서 하얀 진이 방울방울 솟습니다

뒤따른 염소가 또 한입 가득 뭅니다

때마다 하얀 방울은 다시다시 솟습니다

풀판의 흰 젖이 고여오르는것이지요

한낮이 옵니다

염소들이 배가 불렀습니다

덥습니다 노근해집니다

염소들은 물을 먹고싶어 합니다

저 아래서 좔좔좔 물소리납니다

물기슭에서 들꽃이 웃으며 기다립니다

산나리도 다문다문 섞여서 정취있습니다

차랑차랑 자개돌 맑은 물은

풀판의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샘이랍니다

물 마신 염소들이 한가로이 새김질하고

새끼염소들은 귀엽게 깡충거립니다

나에게는 이때가 한가한 때이지요

풀판에 번듯이 드러눕습니다

개미들이 풀대에 부지런히 오르내리고

민충이가 풀끝에서 한뽐만 한 천하를 굽어봅니다

그옆 앙증한 꽃에서

날개를 접었다폈다하며

노랑나비 파랑나비 꿀을 빱니다

신통히도 아기가 젖먹는것 같아요

어여쁜 나비들이 춤을 춥니다

팔랑팔랑 그 독무, 뱅글뱅글 그 쌍무

나는 박수라도 치고싶어 웃습니다

종다리가 떴습니다, 솟구쳐 솟구쳐

어데 있는지 보이지 않지만

풀판은 느슨히 누워 그 노래를 듣습니다

저 종다리도 풀판의 어느 구석에 깃을 틀고

한낮이면 떠올라 노래를 불러줍니다

갖가지 풀판의 식솔들이 기쁨에 겨울 때

나도 피리를 꺼내 한곡조 넘깁니다

염소들은 귀를 쭝긋거리며 매애매애

나는 그것들을 한무리 늘굴 궁리를 하며

파아란 하늘에 날아가는 구름떼를 쳐다봅니다

낮이 기울어 복수초덤불길을 내릴 때면

불그레어린 석양빛은

잘 가라고 바래는 풀판의 미소같습니다

염소떼를 울안에 몰아넣고

한마리씩 젖을 짤 때가 제일 흐뭇한것 같아요

대줄기같은 젖살에 맞아서

우유통은 거품을 일굽니다

젖내가 납니다, 풀판의 젖내는 향기롭습니다

해종일 준 젖이 철철철 차오릅니다

따뜻한 등불밑에서 훌훌 불며 마시면

속이 훈훈하고 든든해집니다

모두가 벙글써

누군가 한소리 넘길 때도 있습니다

밤새 살쪄오른 염소떼를 몰아

날 밝으면 또다시 풀판에 가지요

나에게는 그 풀판이 어머니같이 생각됩니다

온갖 생명 다 먹여 키우는

싱싱하고 힘찬 그 품

이 어머니가 있는 한

《고난의 행군》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풀판을 내 어찌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주체86(199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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