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시집을 내면서
나는 첫 시집 《인생과 조국》을 내놓은 뒤 10여년을 미미하게 있다가 이번에 두번째 시집 《나의 집》을 내놓는 과분한 영광을 지녔습니다. 시인으로 자부하며 젊은 날부터 딴으로는 피덥게 사느라 했지만 수확이 변변치 못함을 이번에도 절감함이 컸습니다. 고마운것은 그저 나라의 은정입니다. 시집을 또 내면서 나는 내가 살아온 인생길모두에 그 손길이 지극히 따뜻했음을 가슴젖어 돌이켜보았습니다. 나는 주체28(1939)년에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 다호리(당시)의 산높은 평덕에서 누이의 버금으로 태여났습니다. 그때 거기에는 일여덟가호의 초가마리가 있었는데 해방직전에 페촌이 되여 지금은 새초만 설렁이는 초원이 돼버렸습니다. 살길을 찾아 자리뜨는 부모를 따라 산밑 동네로 내려앉은 나는 이름이 버덩이지 돌밭이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제멋대로 흐르는 성깔사나운 화대천을 건너다니며 소학교를 마쳤고 전쟁통에 중학교는 근 20리나 되는 산골가교사로 다녔으며 그후 30리 먼 읍에 있는 고중을 졸업한 다음 천리마가 나래칠 때 농촌으로 부르는 당의 부름따라 고향에 진출하였습니다. 향촌에서 보낸 5년세월 나는 농사도 짓고 축산반에서 소도 방목하고 계절부업인 가둑누에도 치고 때로는 축산통계원, 나중에는 농산작업반장 등 별별 일을 다하며 가장 다감한 시절인 청춘기를 바쳤습니다. 그후 나라의 은덕으로 주체과학의 최고전당인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와 줄곧 시단에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대학에 오기까지 작가라고는 얼굴도 못 보았고 도에 작가동맹 지부가 있고 문학신인을 체계적으로 키우는 양성체계가 있다는것도 몰랐습니다. 도서관도 영화관도 산과 령을 넘어 수십리 먼곳에 있는 깊은 산골에서 살았기때문에 부끄럽지만 나는 책도 영화도 얼마 못 보았습니다. 다만 중학마감때 동급반 사춘기처녀들이 돌려읽는 소설책 몇권을 얻어본것이 기폭제가 되여 문학에 유혹된 미거한 이런 싹을 보듬어 키워준 나라의 더운 손길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를 생각할수 없기에 별로 자랑할것도 없는 인생자취를 루루이 적었습니다. 나의 고향은 칠보산의 마지막자락이여서 산천경개만은 명산의 기슭답게 아름답기 그지없다고 자부하고싶습니다. 아마 제 태묻은 곳이라서 그리고 청춘기를 그 흙속에 바쳐서 그럴는지도 모릅니다. 조국의 고마움에 눈굽이 젖으며 나를 키워주고 내세워준 어머니산천을 애바르게 안고 정을 퍼냈지만 못다한 노래는 가슴에 그냥 있습니다. 나는 분렬된 조국을 안고 피눈물나는 시도 적잖게 썼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발현도 향토애처럼 애국의 쌍극이기때문이였을것입니다. 시는 시인의 생각과 정서, 심리, 성격을 반영하기때문에 세상에 같은 사람이 없는것처럼 같은 체질의 시란 없는줄로 압니다. 나는 더이상 나를 설명하지 않으렵니다. 시속에 나의 모든것이 다 있습니다. 나는 내 노래의 편편들이 훌륭하지는 못해도 가식없는 진정을 읊었기에 독자들도 나와 함께 정서의 푸른 들을 이슬차며 걸어주길 바랍니다. 평가는 그들에게 맡기며…
저 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