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서 우리와 함께 손잡고 일합시다》
미제는 남조선을 강점한 첫날부터 《군정》을 실시하고 주인행세를 하면서 사회의 민주주의적발전을 억제하였으며 전체 조선인민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의 감시하에 남조선에서 기어이 반동적인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괴뢰정부를 조작하려 획책하고있었다. 그로 하여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해방을 맞은 조국땅은 북과 남으로 갈라질수 있는 위기에 처하게 되였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사상과 정견이 서로 다른 북과 남의 애국적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구원할 방도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론의하고 일치한 견해로 통일방책을 세웠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진행된 이 남북련석회의에 남조선에서는 리승만, 김성수와 같은 민족반역자들을 내놓고는 모든 애국적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다 참가하였다. 지난날 북을 반대하였던 우익정당, 사회단체 대표들까지 참가하였다. 남북련석회의는 정견을 달리하는 각 당, 각 파, 각계각층이라 할지라도 민족의 공동위업을 위하여서는 얼마든지 단결할수 있고 미제의 책동을 짓부시고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조선사람의 힘으로 개척해나갈수 있다는것을 보여주었다. 아울러 남북련석회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행로에 새로운 리정표를 세웠다. 애국을 찾아 방황하던 사람들이 비로소 자기들의 소망을 성취하였다.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에 들어왔던 당대의 한다하는 남조선의 정계인사들이 서울에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평양에 남을 의향을 표시하였던것이다. 당시 민주독립당 당수의 신분으로 회의에 참가하였던 홍명희선생도 서울에 돌아가지 않고 평양에 삶의 닻을 내릴 결심을 하였다.
홍명희선생은 해방전 애국계몽사업에도 나서보았고 민족주의운동에 동조하여 상해와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고달픈 먼길도 걸어보았다. 또한 새로운 시대사상에 기대를 걸고 《신간회》의 발족에도 참여하였으나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고초를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가 일제의 탄압과 박해에도 굴함없이 민족적량심과 애국적지조를 지켜낼수 있은것이나 해방직후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그리고 서울의 혼잡된 정국에서 민주독립당을 결성하고 그 당수로 나서기도 했던것은 해방의 은인이신 김일성장군님 한분만을 민족의 령도자로 신뢰하였기때문이였다. 주체37(1948)년 5월 6일은 홍명희선생이 자기 운명의 새로운 리정표를 세운 뜻깊은 날이다. 남북련석회의초청장을 받고 회의에 참가한 그를 회의장 휴계실에서 잠간 만나주시였던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날 시간을 내여 그를 만나주신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난날 그가 일제의 학정밑에서도 민족적량심과 지조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지켜낸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산에서 일제와 싸울 때부터 국내에서 선생처럼 민족적량심과 지조를 지켜 일제에게 굴복하지 않고 싸워온분들에 대하여 깊은 존경심을 품고있습니다. 왜정세월에 민족적량심과 지조를 지켜낸다는것은 누구나 다할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산에서 일제와 직접 싸워온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하는것을 잘 알고있습니다.》 그러시고는 그가 해방후에도 미국놈들의 회유와 기만책동을 물리치고 애국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각계 인사들과 함께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으로 활약한 애국적소행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으며 고무적인 힘을 얻으셨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홍명희선생은 당시 남조선에서 민심의 폭발이였던 그 일을 두고 자신의 공적으로 평가받는것만 같아 몸둘바를 몰라하며 북조선에 들어와 여러곳을 돌아보며 느낀 소감을 말씀드리였다. 사실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평양에 왔던 많은 남조선대표들은 북조선이 발전하였으리라고 생각은 하였지만 그렇게까지 발전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였었다. 제반 민주개혁들이 실시되여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일제의 악독한 식민지통치의 후과가 청산되고 진정한 민주주의제도가 세워져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인민들이 사회정치생활에 자유롭게 참가하고있었다. 일제에 의해 파괴된 공장, 기업소들이 복구확장되여 민족경제가 계획적으로 발전하고있었으며 농업생산도 해마다 장성되고 곳곳에 학교들이 세워져 랑랑한 글소리 높았다. 한마디로 말하여 북조선은 민주주의길로 힘차게 나아가고있었다. 하기에 북반부의 이러한 약동하는 현실을 본 남조선대표들은 누구나 북조선이야말로 민주주의길로 확신성있게 나아가는 민주국가라고 찬탄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였던 남조선대표들이 돌아가고있다고, 오래지 않은 기간이지만 한자리에 모여앉아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대하여 론의하고 같이 손잡고 싸울것을 결의다진분들과 헤여지자니 섭섭한감을 금할수 없다고, 미제와 반동들이 활개치는 남조선으로 대표들이 돌아가는것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홍명희선생은 어떻게 할 의향인가고 물으시였다. 조선사람을 위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게 정치를 펴나가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의 산물인 북반부의 약동하는 현실을 대하면서 오직 그이께서 이끄시는 길만이 우리 민족이 나아갈 참다운 길이라는것을 확신하고있던 홍명희선생이였다. 그래서 그는 주저없이 이렇게 말씀드리였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좋은 세상을 동경하여 태평성대라고 하였는데 바로 그런 세상이 북조선에 펼쳐지고있습니다. 한마디로 말씀올려 북조선은 흥하는 집안 같고 남조선은 망하는 집안 같습니다. 장군님! 장군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전 남으로 나가지 않고 북조선에 남아 일하고싶습니다.》 그의 소망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기뻐하시면서 선생께서 북조선에 남아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잘 생각하였다고, 김구나 김규식 같은분들은 여기에 남아있고싶어도 적들이 악선전을 할가봐 부득이 남조선으로 돌아갔지만 선생의 경우는 그분들의 경우와 다르다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이제는 년세도 많으시고 또 여기에 계셔도 할 일이 많다고 하시면서 《여기서 우리와 함께 손잡고 일합시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렇듯 홍명희선생을 한품에 안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조국과 민족의 부강번영과 통일을 위한 길에서 애국의 열정을 다 바치도록 사업과 생활을 일일이 보살펴주시였다. 홍명희선생이 공화국의 품에 안겨 생을 마치기까지의 20년동안에는 건국의 기초를 다져나가던 시기가 있었는가 하면 조국의 운명을 수호하는 준엄한 전쟁도 있었으며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의 벅찬 년대들도 있었다. 이 모든 시기에 투쟁속에서 단련된 혁명가도 아니며 풍상고초속에서 세련된 정치인도 아닌 홍명희선생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성스러운 길을 드팀없고 보람있게 걸어올수 있었던것은 애국의 길에서 한번 손을 잡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변함없이 믿고 끝까지 책임지고 이끌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의리로 빛나는 사랑이 있었기때문이였다. 공화국이 창건되여 새 정부를 구성할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홍명희선생에게 내각부수상의 책임적인 직책을 서슴없이 맡겨주시였으며 자신의 집무실곁에 그의 사무실을 정해주시였다. 내각부수상, 이것은 나이가 적지 않은 홍명희선생에게 있어서 결코 감당하기 쉬운 직책이 아니였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홍명희선생에게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 투쟁하겠다는 애국적각오와 견결한 투지만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해낼수 있다는 고귀한 진리를 깨우쳐주시고 신심과 용기도 안겨주시며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화국의 정책으로부터 민족문화건설에서 나서는 크고작은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세세히 알려주시고 현지지도를 떠나시는 승용차안에서도, 외국방문의 길에 오르시는 비행기안에서도 사업에 필요한 모든것을 가르쳐주시였으며 멀리 떨어져 계실 때에는 친필로 편지를 보내여 큰 과업을 맡겨주기도 하시였다. 그리고 일부 편협한자들이 홍명희선생이 수령님의 집무실에 너무 자주 출입한다고 시비할 때에도 부수상이 수상을 만나는데 잘못된것이 무엇이 있는가, 앞으로도 일이 있으면 자주 찾아오라고, 그것이 자신의 사업을 돕는 일이라고 하시며 그를 고무격려해주기도 하시였다. 홍명희선생을 위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은 남달리 뜨거우시였다. 그의 생일 60돐상에 깃든 이야기는 오늘도 위대한 사랑의 전설로 전해져오고있다. 주체37(1948)년 7월 어느날 홍명희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이의 저택으로 가게 되였다. 자기를 왜 부르셨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부드러운 어조로 오늘이 바로 선생님의 생일 60돐날이라고, 그래서 이렇게 찾았다고 말씀하시였다. 순간 홍명희선생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생일에 대한 생각을 감감 잊고있었기때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따라 방으로 들어서던 그는 다시한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방에는 훌륭한 생일상과 함께 항일투사들을 비롯한 여러 일군들이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더우기 생일상에 깃든 사연을 알고 그는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에 대한 고마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하였다. 홍명희선생의 생일 60돐을 앞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저녁식사를 하시다가 김정숙어머님께 남조선에 가족을 둔 홍명희선생의 생일 60돐상을 차려주어야 하겠다고, 그런데 그곳 음식법을 잘 모르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고 하시며 저으기 걱정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듣고계시던 김정숙어머님께서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시였다가 그 일은 자신께서 맡아하겠다고 말씀올리시였다. 김정숙어머님의 말씀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럼 우리가 생일상을 잘 차려 혼자 생활하는 선생을 기쁘게 해드리자고 하시였다. 그후 김정숙어머님께서는 홍명희선생이 사는 남쪽고장의 음식을 만드는 법을 료해하시고 비타민류의 음식을 좋아하는 선생의 식성까지 헤아려 생일상을 손수 준비하시였다. 홍명희선생에게 감격을 준 생일상은 이렇듯 김정숙어머님의 은정어린 손길에 의하여 마련되였던것이다. 격정에 목이 메인 홍명희선생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 일도 없는 자기를 이처럼 환대해주시니 무슨 말로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서울에서 아무리 자식들과 친척들이 차려주는 큰상을 받고 큰절을 받은들 어찌 오늘의 이 영광에 비길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위대한 수령님과 김정숙어머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였다. 홍명희선생이 받아안은 60돐생일상, 그것은 민족적량심과 지조를 지켜온 한 애국인사에게 베푸신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믿음의 정화였고 수령님의 높은 뜻을 받드는데 온갖 심혈을 다 기울이신 김정숙어머님의 뜨거운 지성이 낳은 사랑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그때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돌려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믿음의 전부가 아니라는것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와 관련하여 홍명희선생이 후방으로 떠나게 되였을 때였다. 그를 몸가까이 불러주시고 로정에서 주의해야 할 점들에 대해서까지 세세히 일러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떠나려고 할 때 무엇인가 생각하시다가 서랍을 여시고 한자루의 권총을 꺼내시였다. 그러시고는 이 권총은 김정숙동무가 쓰던것인데 기념으로 드리겠다고 하시였다. 윤기가 흐르고 손때가 오른 한주먹안에 들 자그마한 권총이였다. 녀사께서 애용하시던 권총을 감히 어떻게 받겠는가고 말씀올리는 홍명희선생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김정숙동무는 산에서 싸울 때에는 물론 조국에 돌아와서도 아직 나라가 통일되지 못하고 남조선에 미국놈들이 있는데 손에서 총을 놓을수 없다고 하면서 항상 이 권총을 가지고다니며 나를 보호해주었습니다. 선생은 이 권총을 가지고다니면서 준엄한 시련을 이겨내고 미제를 때려부시며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을 성취하는데 힘써주리라고 믿습니다. 총대처럼 변심없이 애국애족의 한길을 끝까지 걸어가라는 위대한 수령님의 당부가 담겨져있는 권총을 받아안은 홍명희선생은 어제는 여기서 우리와 함께 손잡고 일하자고 하시며 한품에 안아주시고 전쟁의 운명을 판가리하는 준엄한 시기인 오늘에는 한대오에 선 동지로 믿어주시고 아껴주시는 그이의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것인가 하는것을 더욱 심장깊이 느끼였다. 전후에 일부 편협한자들이 공화국정권은 로농정권인데 량반출신의 인테리이며 당적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회주의를 위해서 함께 일할수 있는가고 하면서 홍명희선생을 시비해나선적이 있었다.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홍명희선생의 성분이 어떻단 말인가, 과거 《림꺽정》을 썼으면 또 어떻단말인가, 오랜 인테리인것은 사실이나 왜정세월에 일본놈들과 타협하지 않았으니 애국자가 아닌가, 그리고 홍선생은 해방후 제국주의편으로 따라간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와 조국과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길에 들어섰다, 당과 국가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재능과 정력을 바쳐 일하고있는데 중요간부로 되지 못할 리유가 무엇인가고 되게 꾸짖으시였다. 그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홍명희선생을 만나신 기회에 당은 선생님을 믿으니 마음놓고 일하라고,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마음을 놓으라고, 당이 있는 한 누구도 선생님을 다치지 못한다고 결연히 말씀하시면서 다시금 그에게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이뿐이 아니다. 주체47(1958)년 5월 1일 김일성광장에서 성대하게 진행된 5. 1절경축행사가 끝났을 때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석단에서 내리시는 길로 홍명희선생을 자신의 차에 태우시고 함께 교외의 한 호수가로 나가시였다. 만발한 봄의 정서와 그림같은 풍치를 담고 펼쳐진 호수의 기슭에는 자그마한 배 한척이 매여져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홍명희선생의 팔을 다정히 이끄시여 배의 고물쪽에 앉히시였다. 그러시고는 선생이 젊었을 때는 배를 탔겠는데 이젠 나이가 많으니 언제 타보았겠는가고, 그래서 여기 호수로 왔다고 하시며 몸소 노를 잡으시는것이였다. 이날 내각수상과 부수상이라는 관직의 차이를 초월하여 노를 저으시며 배를 호심깊이 몰아가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인자하신 모습과 수령님께 모든것을 다 맡기고 청춘이 되살아난듯 환하게 웃고있는 홍명희선생의 모습은 그날의 뜻깊은 사연을 전해주는 력사의 화폭으로 우리 민족사의 갈피에 새겨지게 되였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에 나선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건 굳게 믿어주시는 한없이 숭고한 사랑의 화폭앞에서 사람들은 위대한 수령이시기에 앞서 절세의 애국자, 위대한 인간으로서의 어버이수령님의 고결한 풍모를 다시한번 새겨안게 된다. 정녕 홍명희선생은 절세의 위인들의 품에 안기였기에 재생의 삶을 지닌 그날로부터 한생을 추호의 드팀도 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을 꿋꿋이 걸어올수 있었고 민족사에 애국자의 이름을 떳떳이 새길수 있었다. 복잡다난한 해방직후의 남조선정국에서 사회민주당을 결성하고 그 당수로 활약해온 민주인사이며 정치인인 장권선생도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였다가 평양에 남은 사람들중의 한사람이다. 1948년 4월 어느날, 장권선생은 뜻밖에도 남북련석회의초청장을 받아안게 되였다. 흰 명주천에 붓글씨로 쓴 그 초청장을 받아든 장권선생은 솟구치는 마음속의 흥분을 누를수 없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나를 불러주시다니?! 그분께서 나를 어떻게 아시고 초청장까지 보내주시였을가?!…) 몇번이고 초청장에 새겨진 글발을 더듬는 그의 눈앞에는 애국의 길을 찾아 헤매이던 지나온 나날들이 떠올랐다. 19세기 말엽 서울의 한 로동자가정에서 태여난 장권선생은 일제의 조선침략에 항거하여 아버지와 함께 의병운동에도 참가하고 문화계몽운동도 해보았으며 중국 상해와 만주 등 해외로 다니며 독립의 길을 찾아 헤매였다. 그는 한때 서울의 《조선그리스도교청년회관》에서 체육간사로 있으면서 유술, 권투, 축구선수단을 무어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팀을 타승하여 청년들속에 민족적자부심과 반일애국사상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망국의 비운을 가실 참된 애국의 길은 찾지 못하였다. 오히려 청년들속에 반일애국사상을 심어주고 그들을 반일반전투쟁에 불러일으켰다고 하여 일제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기만 하였다. 암흑의 그 시기 애국의 량심을 지닌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하였던것처럼 그도 백두산에서 높이 울리는 항일전의 총소리에서 해방의 희망과 신심을 가다듬군 하였으며 그때부터 김일성장군님을 흠모하는 마음을 간직하게 되였다. 하기에 그는 일제가 패망하자 수천명의 청년들로 치안대를 조직하여 혼란된 사회질서를 바로잡고 나라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사업을 하기도 하였으며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치안부를 책임지고 치안 및 보안사업을 담당하여 뛰여다녔는가 하면 위대한 수령님의 서울개선소문을 듣고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의 발기성원이 되여 그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더우기 그는 려운형선생으로부터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고 돌아온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이에 대한 존경심을 더욱 깊이 간직하였다. 바로 이러한 그였기에 애국의 길로 불러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초청장을 받아안은 순간 감격과 기쁨을 억제할수 없었고 앓는 몸이였지만 용약 북행길에 오를수 있었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양에 도착한 그를 몸소 만나주시고 편치않은 몸에 먼길을 오시느라 수고했다고 하시면서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장권선생이 빼앗긴 나라를 찾아주시기 위해 이국산야에서 싸우시느라 고생인들 얼마나 많으셨는가고 인사의 말씀을 올리자 수령님께서는 아니라고, 조국에 있던분들이 더 고생했다고 하시면서 그의 건강과 서울에 두고온 가족들의 형편에 대해서도 친절히 물으시였다. 그러시고는 북반부의 정치정세와 국제정세에 대하여 그리고 미제의 《단선단정》음모책동을 파탄시키고 통일적민주주의중앙정부를 세우기 위한 투쟁방향과 방도에 대하여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가면서 말씀하시였다. 그후 남북련석회의의 높은 연단에서 미제의 민족분렬책동을 단호히 저지파탄시키고 통일적중앙정부를 수립할데 대한 통일방책을 천명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보고를 들으며 장권선생은 난생처음 민족의 심금을 세차게 울려주는 구원의 종소리를 듣는상싶어 온몸에 새 힘이 용솟음치는것을 느끼였다. 그는 남북련석회의가 있은 후 회의성과를 축하하는 여러 행사들과 새 삶이 약동하는 북조선의 여러곳을 돌아보는 과정에 북에 남는것이 진정한 애국의 길이라는 확신을 더욱 굳히였다. 그럴수록 그는 위대한 수령님을 가까이 모시고 일하고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그는 수령님을 또다시 만나뵈웠을 때 여기에 남아서 그이를 받들어 일을 했으면 하는 소망을 말씀드릴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소망을 들으시고 잘 생각했다고, 여기서도 나라를 건설해야지, 조국을 통일해야지 할 일이 많다고 하시면서 우리 함께 일해보자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처럼 애국의 길을 찾아 오랜 세월 방황하던 장권선생을 한품에 안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애국의 한마음을 다 바쳐나가도록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화국이 창건되였을 때 그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내세워주시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의 중요직책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사업에 헌신할수 있도록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그리고 그가 평양에서 처음으로 생일을 맞을 때에는 생일상도 차려주시였으며 그길로 료양소에서 치료도 받게 해주시였다. 또한 일제식민지통치시기에 당한 고문의 후과로 입원치료를 받고있을 때에는 몸소 병문안도 해주시였고 병원에 자주 전화를 거시여 그의 병상태도 알아보시며 귀한 보약들과 고급약들을 보내주시였다. 이뿐이 아니였다. 일부 편협한자들이 그에 대해 시비해나설 때에는 장권선생이 어떻단 말인가, 그래 민족주의자이면 또 어떻단 말인가, 왜정세월에 민족적량심을 버리지 않고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일본놈과 타협하지 않았으면 애국자이지 무엇이겠는가, 또 장선생은 해방후에도 미국놈을 따라간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들어와서 조국과 인민을 위해 힘껏 일하고있는데 간부로 되지 못할 리유야 없지 않는가라고 하시면서 우리는 장권선생과 같이 우리를 따라오는 사람이라면 성분이 어떻건 과거에 무엇을 했건 관계없이 기꺼이 손잡고 나아갈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며 그의 운명을 지켜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전쟁이 승리할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고생만 하다가 간것이 가슴아프다고, 장권선생은 왜정때에도 민족적량심을 가지고 깨끗이 살아왔고 해방후 우리한테로 들어와서도 나라의 통일을 위한 사업에 헌신한 견결한 애국자였다고 하시면서 그의 한생을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이렇듯 애국의 한길을 변함없이 걸어가도록 사랑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는 절세의 위인의 품에 안겼기에 장권선생은 오늘도 조국통일상수상자로 조국의 력사속에, 민족의 기억속에 남아있는것이다. 남북련석회의가 끝난 후 평양에 남은 사람들중에는 당시 남조선기독교민주동맹 위원장이였던 김창준목사도 있다.
김창준목사로 말하면 조선에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현실화된 《지상천국》을 세워보려는 기원을 간직하고 일찌기 국내와 해외에서 신학을 공부한 오랜 종교인이였다. 하지만 그는 일제식민지통치밑에서 자기의 념원을 이루기는 고사하고 우선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마땅히 향유해야 할 초보적인 권리와 존엄마저 무참히 짓밟혔다. 그는 3. 1인민봉기때 독립선언서를 발기한 33인중의 한사람이라는 《죄》로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고 일제침략을 《찬양》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고, 《학병권유》와 《조선기독교황도화》(당시)운동에 나서지 않는다고 하여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실로 그리스도교로 무엇을 이루어보려던 그의 해방전 생활은 뼈아픈 상실감과 공허감, 끝없는 실망과 울분에 찬것이였다. 이 고난의 로정을 피와 눈물로 새겨가며 그는 조선사람이 예수를 믿든 석가모니를 믿든 종교가 있기 전에 먼저 제 나라, 제 주권이 있어야 한다는것, 민족의 운명이자 종교인의 운명이라는 진리를 뼈에 사무치게 새기였다. 하기에 그는 나라가 해방되자 서울장안의 종교인들로 국제교화협회를 조직하고 민주세력을 묶어세우는 운동에 나섰으며 1947년 2월에는 민족적량심을 가진 수백여명의 교인들과 함께 남조선기독교민주동맹(당시)을 결성하고 국토량단과 민족분렬의 위기를 막기 위한 애국투쟁을 벌리였다. 그러나 당시 남조선을 저들의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미제의 책동으로 하여 남조선에서의 민주세력의 단합사업은 좌절을 면치 못하였고 민족분렬의 어두운 구름은 더욱 짙어가고있었다. 반만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이 둘로 갈라지느냐, 아니면 통일독립된 자주적인 국가로 되느냐 하는 엄숙한 시기에 난관극복의 타개책을 알수 없어 통탄하던 그에게도 따사로운 해빛은 비쳐왔다. 미제의 《단독선거》음모를 파탄시키고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북남조선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의 련석회의소집을 앞두고 김창준목사에게도 특별초청장이 보내여왔던것이다. 특별초청장, 거기에는 정당이나 신앙, 정치적리념의 차이에 관계없이 나라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굳게 단결하여 투쟁할것을 바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민족대단결사상이 응축되여있었다. 김창준목사는 한달음에 38°선을 넘어 평양에 도착하였고 그 이튿날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는 영광을 지니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7(1948)년 4월 20일 그를 비롯한 남조선기독교민주동맹 대표들을 만나주시고 여러분이 38°선을 넘어오느라고 고생이 많았겠다고, 앓는분은 없는가고, 여러분이 구국의 일념을 안고 남북련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평양에 온것은 참으로 의로운 거사라고 생각한다고 따뜻이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자신께서는 이미 김창준위원장선생을 비롯한 남조선의 애국적기독교인들이 반동들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잘 싸우고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사실 남조선에서 교인들이 반동들을 반대하여 싸운다는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나는 위원장선생을 비롯한 남조선기독교인들의 애국투쟁을 높이 평가합니다.》 김창준목사는 자기의 과거나 신앙에 대하여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넓으신 포옹력으로 따뜻이 품어주시고 자그마한 성과도 높이 치하해주시는 절세의 위인의 위대한 풍모에 감격을 금치 못해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늘 우리 민족은 미제국주의자들의 《단선단정》조작책동으로 인하여 국토량단과 민족분렬의 엄중한 위기에 직면하고있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고나서 목전의 현실은 전민족이 굳게 단결하여 미제와 그 주구들의 《단선단정》조작책동을 분쇄하고 나라와 민족의 영구분렬의 위기를 막기 위한 구국투쟁에 떨쳐나설것을 요구하고있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진정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의 운명을 우려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구국투쟁에 떨쳐나서야 한다고 하신 수령님께서는 교인들도 민족의 분렬을 막고 민주주의적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투쟁에 적극 참가하여야 할것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종교인들의 운명은 나라와 민족의 운명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습니다. 나라가 없이는 신앙의 자유도 있을수 없습니다. 나라없는 백성은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고 과거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 종교인들이 얼마나 박해를 받았습니까. 오늘 남조선에서 애국적종교인들이 탄압의 대상으로 되고있는것도 바로 미군정통치가 실시되고있기때문입니다. 우리 나라가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로 되여야 남조선의 신자들도 신앙의 자유를 실제로 보장받을수 있으며 행복한 생활을 누릴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기도를 하여도 우리 나라의 자주독립과 우리 민족의 륭성번영을 위하여 하여야 할것입니다.》 그후 남북련석회의의 높은 연단에서 미제의 분렬책동을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뚫고나갈 방도를 환히 밝혀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세계를 대하면서 그의 가슴속에는 김일성장군님이시야말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진정한 애국자이시며 그이를 따라야 자신은 물론 민족의 운명도 참답게 꽃펴날수 있다는 생각이 석연히 자리잡게 되였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새 생활창조로 들끓는 북반부의 여러곳을 참관하는 과정에 더욱 확고한 신념으로 굳어졌다. (여기가 바로 지상천국이구나. 내가 한생에 리상으로 그려온 지상천국이 바로 여기에 펼쳐졌구나. 내 김일성장군님의 품에 삶의 닻을 내리고 그이의 뜻을 따라나서리라!) 이렇게 되여 김창준목사는 자신의 신념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북조선에 삶의 닻을 내리게 되였다. 이때부터 그는 종교활동을 해도 나라의 통일독립과 민족의 륭성번영을 위하여 하는 애국적인 종교인으로서의 참된 삶을 마음껏 누리게 되였으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그후에는 남조선 제 정당사회단체협의회 부서기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초대서기국장으로 사업할수 있었다. 또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의 중책을 지니고 나라의 통일과 민족의 번영을 위한 길에 적은 힘이나마 바칠수 있었다. 진정 위대한 수령님의 품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민족주의자이건 종교인이건 모두를 한품에 안아 애국의 한길로 이끌어주시고 보람있는 삶을 누려가도록 해주시는 민족의 위대한 태양의 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