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원한 생의 보금자리                                3) 그 사랑 대를 이어


 

□ 《우리 당에서 믿고 아끼던 사람입니다》

 

애국의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조국통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어디에 있든 언제나 잊지 않고 영생의 언덕에 높이 내세워줄뿐아니라 그 후대들의 행복까지도 꽃피워주는 어머니조국의 품!

이런 어머니조국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에 떠받들려 통일애국렬사 김삼룡선생과 그 후대들의 삶이 오늘도 빛나고있다.

주체79(1990)년 2월 어느날 김삼룡선생의 유가족들은 눈물없이는 받아안을수 없는 감격적인 소식에 접하게 되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 한생을 바친 김삼룡선생의 80돐생일상을 보내주시였던것이다.

정말 뜻밖의 일이였다. 김삼룡선생이 희생된 때로부터 40년세월이 흐른 뒤였기때문이였다.

  

김삼룡(1910. 2. 9-1950. 6. 26) 남조선혁명가

주체38(1949)년 당중앙위원회 위원 및 정치위원으로 선거. 주체39(1950)년 3월 적들에게 체포되여 6월 26일 학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공화국영웅, 조국통일상수상자.

  

충청북도 충주의 극빈한 농가에서 태여나 일찍부터 반일감정이 높았던 김삼룡선생은 학생시절에 좌익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사회주의사상에 공감하게 되였다. 그는 졸업후 반일독립운동에도 나섰고 로동운동에 젊은 혈기를 바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차례진것은 감옥으로 가는 길뿐이였다.

그때마다 그는 가슴치며 통탄하였다.

(이 나라에 진정 나를 이끌어줄 지도자는 없단 말인가!)

바로 이러한 때 백두산청년장군께서 일제의 머리우에 불을 지른 보천보의 총소리가 북부조선일대는 물론 서울을 비롯한 남조선의 전지역을 들었다놓았다.

보천보전투의 충격으로 심장을 끓이던 김삼룡선생은 어느날 뜻밖에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 보내주신 주병포, 리인모선생들과 손을 잡게 되였다. 그들로부터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끄시는 항일유격대소식과 그이의 반일민족통일전선로선에 대하여 알게 된 그는 이제야 조선에 대통운이 텄다는 기쁨으로 무릎을 쳤다.

(아, 민족의 영웅 김일성장군님을 한생 믿고 따르리라!)

이때부터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밝혀주신 옳은 투쟁방향과 방도를 가지고 반일민족통일전선로선실현에 나서게 되였다. 그는 광범한 군중속에 위대한 수령님의 주체적인 혁명로선과 항일유격대에 대한 선전을 적극 벌리는 한편 민족적차별을 반대하는 파업투쟁을 조직지휘하였다.

1939년 10월에 1 200여명의 태창직물공장 로동자들의 총파업과 각 로조들에서 일어난 파업을 비롯한 대중적투쟁에는 그의 적극적인 노력이 깃들어있었다.

이처럼 위대한 수령님만을 굳게 믿고 따르려는 억척의 신념을 간직하고 그이의 사상과 로선을 받들어 투쟁해온 김삼룡선생이였기에 해방과 함께 감옥문을 나서자 위대한 수령님께 하루빨리 서울에 오시여 남조선인민들의 간절한 소원을 풀어주실것을 바라는 청원이 담긴 편지를 올릴수 있었다. 그리고 수령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미제와 그 주구들의 반통일책동을 짓부셔버리기 위한 투쟁에로 광범한 애국적력량을 힘있게 불러일으키는 한편 지리산, 태백산일대에서 나라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싸우고있던 유격대를 물심량면으로 지원하기 위한 사업을 희생적으로 벌려나갈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그를 굳게 믿으시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 서거하시였을 때에는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으로 내세워주시였다.

절세의 위인의 그 사랑, 그 믿음은 그대로 힘이 되고 용기가 되여 김삼룡선생은 조국통일위업실현을 위한 투쟁을 더욱 힘있게 전개해나갔다.

오늘도 원쑤들에게 체포되여 최후의 순간에 남긴 그의 유언은 김삼룡선생이 위대한 수령님을 민족의 태양으로, 만고절세의 위인으로 얼마나 숭배하였는가를 잘 보여주고있다.

《나는 최후를 앞두고 크게 세가지 일을 기쁘게 생각한다.

첫째는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전사된 기쁨이며 둘째로는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를 받으며 혁명사업을 해온 기쁨이고 셋째는 수령님의 믿음과 사랑속에 살아온 기쁨이다.

나는 최후를 앞두고 크게 세가지 일이 마음에 걸린다.

첫째는 통일의 광장에서 위대한 수령님께 감사의 큰절을 올리려 하였는데 이를 실현하지 못한것이고 둘째는 위대한 수령님을 내 인생이 다할 때까지 높이 받들어모시려 하였는데 너무도 일찍 가는것이며 셋째는 이날이때까지 수령님의 신임과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고 걱정만을 끼쳐드린것이다.》

이것은 살아도 죽어도 오직 자신의 신념이 가리키는 길, 위대한 수령님만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겠다는 그의 불변의 신조였고 심장의 웨침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9(1950)년 3월 통일애국투쟁을 힘차게 벌려나가던 그가 뜻하지 않게 원쑤들에게 체포되였다는 소식에 접하시였을 때에는 침식을 잊다싶이 하시며 그를 비롯한 통일애국렬사들을 구원하기 위한 긴급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끝내 그가 희생되였다는 비보를 받으시고는 그것이 확실한가고 거듭거듭 알아보시였으며 일군들에게 그의 시신을 꼭 찾아내여 장례를 잘해주자고 간곡히 당부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가렬한 전화의 불길속에서 김삼룡선생의 시신을 찾기 위한 어려운 전투가 벌어지게 되였고 당보에 그의 희생에 대한 부고와 함께 장의위원회구성에 대한 소식이 발표되게 되였으며 당시 해방된 서울에서 장례식이 엄숙히 거행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 어느날에도 김삼룡선생을 잊지 못하시여 일군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고생도 많이 하고 서울에 끝까지 남아 잘 싸우다 희생되였습니다.

김삼룡은 우리 당에서 믿고 아끼던 사람입니다.》

믿고 아끼던 사람!

이것은 그대로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애국의 길에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친 통일애국렬사들을 조국과 민족앞에 높이 내세워주시는 절세의 위인의 최상의 은정이고 최대의 믿음이였다.

이때뿐이 아니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력사적인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의 높은 연단에서 조국과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하여, 나라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에서 희생된 여러 당 및 국가활동가들의 이름과 함께 그의 이름도 불러주시였다.

그러시고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삼룡은 강의한 신념과 능숙한 조직력을 가진 당활동가였으며 나라와 민족과 혁명위업을 위해 한생을 바친 애국자였다고 감회깊이 회고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듯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삼룡선생을 온 나라가 다 알도록 영광의 절정에 높이 내세워주시고도 친어버이심정으로 그의 유가족들의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인민군대에 의한 서울해방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나온 렬사의 안해가 자식들을 데리고 평양으로 들어오고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평양에 도착하면 감옥에서 생긴 병을 잘 치료해줄데 대한 문제, 그의 가족에게 대우를 잘해줄데 대한 문제 등 각별한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는 그들의 안전을 위해 차까지 보내주시였으며 그후 평양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소망대로 최고사령부가까이에서 살도록 해주시였다.

그후 전후복구건설시기를 비롯하여 년대에 년대를 이어오는 기나긴 나날 언제나 변함없이 김삼룡선생의 유가족들을 보살펴주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82(1993)년 1월 어느날 그들을 몸소 만나주시였다.

오매에도 그리던 위대한 수령님앞에 서게 된 김삼룡선생의 안해가 눈굽을 적시며 삼가 인사를 올리자 그이께서는 더없이 기뻐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고맙소. 오래전부터 동무들을 만나보려고 하였지만 시간이 없어 미루어왔소. 오늘에야 이렇게 만나게 되니 내 마음이 풀리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정중히 자기소개를 하는 렬사의 딸들의 모습을 대견스럽게 바라보시다가 그들이 다 대학을 나오고 시집을 가서 행복한 살림을 폈으면 됐다고 하시며 마음을 놓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렬사의 안해와 세 딸을 각각 부르시여 뜻깊은 기념사진을 찍으신 후 그들을 식탁앞에 앉혀주시고 언감자국수를 별식으로 준비했으니 많이 들라고 권하기도 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삼룡선생을 또다시 뜨겁게 추억하시며 동무들의 남편과 부모들은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우리 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 싸웠다고, 김삼룡의 가족들은 이미 만나자고 생각은 하였지만 시간을 내지 못하여 만나지 못하였다가 오늘에야 만나게 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뜨거운 감회에 젖은 위대한 수령님의 음성에서 렬사의 유가족들은 그이의 숭고한 동지애와 고결한 의리의 세계를 다시금 깊이 느낄수 있었다.

잊지 못할 뜻깊은 그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80고령에 거의 이른 렬사의 안해가 읊어드리는 즉흥시도 허물없이 들어주시고 좋은 시를 읊었다고 하시며 먼저 박수도 쳐주시였고 대를 이어 김정일동지를 잘 받들라고, 그 길에 동무들의 행복도 있고 미래도 있다고 간곡히 말씀하기도 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조국통일의 길에서 한생을 빛내이고 떠나간 김삼룡선생을 잊지 못하시여 그와 그의 유가족들에게 크나큰 사랑과 은정을 거듭 안겨주시였다.

이미전에 김삼룡선생을 온 나라가 다 아는 공화국영웅으로, 조국통일상수상자로 높이 내세워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7(1998)년 9월 어느날 애국렬사릉을 찾으신 기회에도 그의 묘비앞에 이르시여 돌사진에 새겨진 그의 모습에 깊은 주의를 돌리시였다.

김삼룡선생을 성시백, 박정호, 리현상과 같은 통일애국렬사들의 전렬에 내세워주신분도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75(1986)년 5월 렬사의 안해가 생일 70돐을 맞을 때에는 사랑의 생일상도 보내주시였으며 그로부터 10년후에는 80돐생일상을 안겨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안겨주시였다.

세월을 넘어 대를 이어지는 어머니조국의 은혜로운 품이 있어 박우천선생과 그 자녀들의 삶도 빛나고있다.

박일파라고도 불리운 박우천선생으로 말하면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한 투쟁의 길에 나섰던 사람도, 외세에 의해 분렬된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투쟁에 한몸바친 사람도 아니였다.

20세기초 민족주의자가정에서 태여난 그는 서울 보성중학교를 마치고 한때 연해주에 가서 조선인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을 하면서 대학을 다닌바 있는 지식청년이였다. 시와 희곡도 쓰고 바이올린도 켜며 풍금도 칠줄 아는 다재다능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이였던 그의 인생행로에서 긍지로운 시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1920년대 후반기 길림에서 혁명활동을 벌리시던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의 지도밑에 활동한것이였다.

그가 위대한 수령님을 알게 되고 그이의 지도밑에 활동한것은 비록 몇해밖에 안되였지만 그 기간은 그에게 있어서 말그대로 혁명대학을 나온것과 같았으며 가슴속에 흔들리지 않는 신념의 기둥을 세운 뜻깊고 격동적인 나날이였다.

그러나 결사의 각오를 안고 나라찾는 투쟁의 길에 나서기까지 아직 거리가 멀었던 그는 일제가 《9. 18사변》을 일으키자 만주지방의 이곳저곳을 향방없이 헤매이기도 하였다.

그는 민족적량심을 지켜 자기 힘이 닿는껏 일제에게 침해당하는 인민들의 리익을 옹호하여 활동할 생각에서 변호사로도 나서보았지만 차례지는것은 일제의 모략의 희생물이 된 자기자신에 대한 환멸뿐이였다. 하여 그는 조용히 법조계를 떠나 조선으로 나오게 되였으며 서울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기대와는 달리 일제를 대신하여 기여든 미제가 주인행세를 하는 남조선의 어지러운 현실에서 또다시 환멸과 고민에 모대기지 않으면 안되였다. 마음 같아서는 평양에 개선하신 위대한 수령님을 당장 찾아가 뵙고싶었지만 무슨 면목으로 그이앞에 나서랴 하는 위구심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있었다.

그러다가 미제에 의하여 괴뢰정부가 조작되자 그는 더이상 망국의 현실을 체념하며 살수 없다고 생각하고 민주의 락원이 펼쳐진 북반부를 찾아 북행길에 오를수 있었다.

평양에 도착한 그가 위대한 수령님을 다시 만나뵙게 된것은 주체37(1948)년 여름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안경을 낀 그의 낯익은 모습을 보시는 순간 《박일파선생, 이게 얼마만입니까.》라고 하시며 마주 걸어나오시여 그의 두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박우천선생은 너무도 충격이 크고 감격하여 마음을 다잡지 못한채 흐느꼈다.

얼마나 바라왔던 이날이며 이 순간인가.

복잡하고 간고한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은인의 손길과 인간의 참된 정을 갈망하여 언제나 마음속으로 그리던 태양의 위대한 품에 그는 근 20년세월을 거쳐서야 안기게 된것이다.

이날 그가 걸어온 경력에 대하여 하나하나 들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너그럽게 웃으시며 박일파선생은 자기의 경력때문에 걱정하는것 같은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선생은 지난날 길림에서 우리의 활동을 도와주며 우리를 지지하였다고, 선생이 그후 할빈에 가서 변호사를 한것은 그때의 환경에서 할수 없어 한것이지 일제에게 복무하고싶어서 한것이 아니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우리는 사람을 평가하는데서 경력보다 먼저 사상을 보고 량심을 본다고,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적량심이 중요한것이지 경력이 중요한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선생이 변호사업을 하다가 그만두고 조선으로 나온것도 그리고 남조선에서 오늘 이렇게 우리를 찾아온것도 선생의 민족적량심의 발현으로 본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선생을 믿는다고,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민주조국건설과 새 민족문화발전을 위하여 선생이 우리와 함께 손잡고 일할것을 바라고있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박우천선생의 안경밑으로 뜨거운것이 흘러내리였다.

자신이 걸었던 갈지자의 인생행로를 두고 오랜 세월 얼마나 참기 어려운 고민과 번뇌속에 모대겨왔던가.

그런데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렇듯 뜨거운 인정과 크나큰 믿음으로 새 삶의 앞길을 환히 열어주시니 오랜 세월 자책과 번민으로 응어리졌던 마음이 봄빛을 받은듯 일시에 녹아내리는것이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선생은 길림에 있을 때 문학을 좋아했고 또 외국어도 잘 아니까 소설번역을 하는것이 좋을것이라고 하시며 앞으로 그가 할 일까지 몸소 의논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그의 창작사업에 편리하도록 여러칸짜리 기와집도 마련해주시였으며 나라일의 그처럼 바쁘신 가운데서도 그를 잊지 않으시고 좋은 외국소설이 나오면 몸소 번역할 과업을 맡겨주기도 하시였다.

절세의 위인의 이렇듯 크나큰 믿음과 은정깊은 보살피심이 있었기에 박우천선생은 새 삶의 길에서 자기의 희망과 재능을 마음껏 꽃피울수 있었고 인민의 사랑을 받는 번역작가로 삶을 빛내일수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때로부터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주체71(1982)년 3월초의 어느날이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우천선생이 한때 당안에 기여들었던 나쁜 놈들에 의해 억울하게 모해를 당한 사실을 알게 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비록 지나간 일이기는 하지만 그가 터무니없는 모해를 받아 고충을 겪었던 사실이 종시 마음에 걸리신듯 내가 기억력이 있을 때 그들에 대하여 다 해명해놓는것이 좋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들의 자녀들에 대하여 알아보고 자그마한것이라도 마음에 걸려하는 문제가 있으면 다 풀어주도록 하라고 강조하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높이 받드시여 박우천선생과 그의 자녀들을 온 세상이 다 알도록 높이 내세워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 박우천선생에 대하여 보고드린분이 바로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세상을 떠난지 오랜 박우천선생의 자녀들에게 반일애국렬사증을 수여하도록 해주시고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헤아려 자식들모두에게 조선로동당원의 값높은 영예를 안겨주시였다. 그리고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 70돐 중앙경축행사에 박우천선생을 대신하여 그의 큰아들을 대표로 참석하도록 해주시는 은정도 안겨주시였으며 박우천선생이 미완성으로 남긴 소설 《지새는 동녘하늘》을 완성하여 길림시절에 불리우던 그의 이름으로 출판물에 싣도록 뜨거운 사랑을 거듭 안겨주시였다.

이렇듯 절세의 위인들의 뜨거운 사랑과 숭고한 의리의 세계가 세월의 언덕을 넘어 대를 이어 줄기차게 흐르고있기에 이 땅에서는 떠나간 전사도 살아있는 전사들도 복된 삶을 누리고있다.

어머니조국의 위대한 품에 운명과 미래를 다 맡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그 어떤 천지풍파가 닥쳐온대도 혁명선렬들처럼 애국의 마음과 혁명적지조를 목숨으로 끝까지 지켜나갈것이며 절세의 선군령장을 높이 모시고 이 땅우에, 이 하늘아래 기어이 부강번영하는 통일강성대국을 일떠세울것이다.

 

-> 이 도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법적보호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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