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원한 생의 보금자리                                3) 그 사랑 대를 이어


 

□ 지리산빨찌산대장의 딸이라시며

 

애국렬사!

이것은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 조국과 민족의 리익을 첫자리에 놓고 그것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조국과 민족이 안겨주는 값높은 칭호이다.

애국을 가장 신성한것으로 여기시기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 길에 나선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한품에 안아 믿음을 주시고 그 후대들도 애국의 한길에서 삶을 빛내이도록 따뜻이 보살펴주고계신다. 절세의 위인들의 어버이사랑의 품이 있어 리현상선생과 그 후대들의 삶도 빛나고있다.

 

리현상(1905. 9. 27-1953. 9. 17) 남조선혁명가

해방후 남조선에서 남조선로동당과 인민유격대의 책임적위치에서 사업. 조국해방전쟁시기 지리산인민유격대 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전사. 공화국영웅, 조국통일상수상자.

 

1905년 전라북도 금산(당시)의 한 산골농가에서 태여난 리현상선생은 일찍부터 식민지소년의 설음을 짓씹으며 일제에 대한 울분과 반항심을 키웠다. 가슴속에 끓는 애국의 넋을 안고 6. 10만세시위투쟁과 광주학생시위투쟁에 참가하여 청년학생들의 선두대오에서 싸운 그는 조선공산당재건운동과 로동운동에도 관계하였었다.

그러나 옳바른 령도자의 지도를 받지 못한 이 모든 투쟁은 실패와 좌절을 면치 못하였고 차례진것은 감옥살이의 뼈아픈 고통뿐이였다. 일제의 야수적인 고문에 육신이 부서져나갈 때 육신의 아픔보다 그를 더 괴롭힌것은 옳은 령도자를 찾지 못한 실망과 좌절감이였다.

감옥의 쇠살창을 부여잡고 나를 이끌어줄 위인은 어디에 있느냐고 몸부림치던 그에게 있어서 삼천리를 진감시킨 보천보의 총소리와 몇해후 서대문형무소에서 박달, 권영벽 등 항일투사들로부터 전해들은 김일성장군님의 전민항쟁로선은 그의 인생행로에서 전환점으로 되였다. 그때부터 그의 가슴속에는 우리 민족의 령수는 항일의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이시며 오직 그이를 따라야 도탄에 빠진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고 삼천리강산에 인민의 새 나라를 세울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이 뿌리내리게 되였다.

1943년 서대문형무소에서 들것에 실려 고향에 돌아온 그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민족의 령수는 오직 한분밖에 안계신다. 그분은 백두산의 천출장수 김일성장군님이시다. 너희들은 다른 그 누구도 믿지 말라. 오직 한분 김일성장군님만을 하늘처럼 믿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그의 신념이고 평생의 좌우명이였기에 그는 조국이 해방되자 제일먼저 남조선에서 평양으로 달려와 조국에 개선하신 그이를 만나뵙는 영광을 지닐수 있었다.

주체34(1945)년 9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집무실에서 남조선에서 온 한 통일애국인사를 만나주시였다. 그가 바로 리현상선생이였다.

근 반세기에 걸치는 일제식민지노예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해방을 맞이한 우리 민족에게는 당시 민족분렬이라는 비극적인 운명이 강요되고있었다.

이로 하여 언제나 아픈 가슴을 안고계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나라와 민족이 영영 갈라지느냐 마느냐 하는 때에 서울에서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의 핵심으로 활약하던 리현상선생을 만나시였으니 심중이 얼마나 뜨거우시였으랴.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초면이면서도 구면인듯싶은 그와 조성된 정세를 놓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시였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과묵하면서도 인정깊고 침착하면서도 불같은 성격이여서 《화산》이라는 별호를 가진 리현상선생을 굳게 믿으시고 그와 조성된 정세를 진지하게 론하시며 그에게 누구에게도 주기 힘든 무거운 과업을 맡겨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그를 여러차례 만나주시면서 미제와 그 주구들의 민족분렬책동을 짓부시고 이 땅우에 통일조국을 일떠세우는데 애국의 뜨거운 마음을 다 바치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절세의 위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흠모, 그이의 가르치심을 드놀지 않는 신념의 기둥으로 심장깊이 세워놓았기에 그는 남조선에서 공청을 민청으로 개편하는 사업에서도, 당건설의 어려운 과업을 실현하는데서도 적극적인 활동가로 후세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되였다. 또한 《혁명가》로 자처하는자들이 혁명에 막대한 해독을 끼치며 리현상선생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모해, 제거하려고 책동할 때도 든든한 배심으로 원칙적활동을 할수 있었다.

그리고 미제와 그 주구들이 《단독정부》를 세우려고 할 때에도, 전쟁을 일으켰을 때에도 자신의 신념을 지켜 통일애국의 길에 한생을 다 바칠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떠나간 렬사를 잊지 못하시여 그를 조국과 민족이 다 알도록 높이 내세워주시면서 그가 맡기고간 자식들이 애국의 대를 꿋꿋이 이어가도록 친어버이사랑으로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주체42(1953)년 2월 리현상선생에게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로부터 15년후인 주체57(1968)년 그에게 렬사증을 수여해주시였다. 그리고 애국렬사릉이 준공되였을 때에는 통일애국의 길에 바쳐진 그의 넋을 그곳에 고이 안치하도록 하시였고 조국통일상이 제정되였을 때에는 그를 첫 수상자대렬에 세워주시였다.

통일애국에 바쳐진 그의 삶을 빛내여주시려는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은 이뿐이 아니였다.

언제인가 작가들을 만나신 자리에서 동무들은 지리산빨찌산 대장에 대한 글도 많이 쓰라고, 자신께서 앞으로 그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들을 다 알려주겠다고 말씀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 준공식날에도 어느 한 조각군상앞에서 걸음을 멈추시고 저 군상의 주인공의 원형이 바로 리현상빨찌산대장입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계승본)에서 일제와의 최후결전을 위하여 전민항쟁로선을 제시하시였을 때 서대문형무소에서 박달, 권영벽, 리제순 등 투사들로부터 그 방략을 전달받은 리현상선생이 20여일간의 단식끝에 생긴 병으로 가석방된 후 지리산에 들어가 《징병》, 《징용》을 피해서 숨어있는 청장년들과 학생들로 무장소부대를 편성하고 잘 싸웠으며 백두산에 련락원도 파견한 그의 공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회고해주시였다.

이것은 통일애국의 길에서 삶을 빛내인 렬사의 모습을 우리 민족사의 한 갈피에 깊이 남겨주시려는 위대한 어버이의 숭고한 도덕의리심의 뜨거운 발현이였다.

리현상선생을 위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은 그 후대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주체35(1946)년 초여름 리현상선생이 또다시 38°선을 넘어와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온적이 있었다.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와 헤여지시기에 앞서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마저 다하라고, 부탁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어서 다 말하라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수령님께 자기의 아들딸 4남매의 앞날을 의탁하고저 한다고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는 그의 손을 잡으시고 어서 아이들을 보내라고, 아들도 보내고 나라의 동량이 될 유망한 청년들도 뽑아보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얼마후 평양을 찾아온 그의 아들을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름도 다정히 물어주시였으며 나라사정이 곤난한 조건이였지만 외국류학까지 보내주시였다.

그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주체81(1992)년 10월초 어느날이였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안경을 고쳐끼시며 어느 한 사진을 오래도록 보아주시였다.

중키에 다부진 몸매, 검은테안경에 총이 센 머리카락을 단정히 빗어넘긴 40대의 중년…

마침내 두텁게 덮인 세월의 이끼를 벗겨내시고 사진의 주인공을 회상해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리현상동무가 맞소, 광복직후 나를 만나러 평양에 찾아왔던 때의 모습이요.》라고 하시며 못내 기뻐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의 유가족들의 행처와 안부에 대하여 일일이 물어주시였다.

그로부터 두달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고인민회의에 참석하시기 위하여 만수대의사당에 나오신 기회에 휴계실에서 리현상선생의 딸을 만나주시였다.

인차 동무네 4남매를 다 만나주시겠다는 사랑의 약속을 남기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로부터 얼마후 그들과 한 약속을 지키시여 리현상선생의 자녀들을 몸소 만나주시였다.

4남매를 정겹게 바라보시던 그이께서는 《내가 동무들을 오래전부터 만나려고 한것은 아버지에 대하여 동무들이 잘 모를것 같아 똑똑히 알려주려고 해서입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며 오랜 시간동안 그들을 만나주시였다.

이렇게 되여 자식이 아버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는 옛말과는 반대로 수령이 자식들보다 전사를 더 깊이 알고계신다는 특별한 시대어가 증명되는 력사의 시각이 흐르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자신께서 지리산빨찌산 대장이였던 리현상선생을 만나 보고를 받고 새로운 과업을 주신것이 여러차례나 된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를 마지막으로 만나신것이 1951년 초봄이였다고 감회깊은 추억도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특별히 점심식사까지 마련해주시고 너희들은 빨찌산의 자식들이기에 오늘 점심은 빨찌산식으로 특별히 언감자국수를 마련했으니 많이 들라고, 아버지생각, 국수생각이 나면 아무때나 찾아오라고, 그러면 또 해주겠다고 다정히 말씀하시였다.

리현상선생에게 베풀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에 의하여 끊임없이 이어졌다.

주체50(1961)년 4월 어느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리현상선생의 유가족을 몸소 찾아주시였다.

따뜻한 인사의 말씀을 하여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앞에서 렬사의 안해가 어쩔줄 몰라하며 큰절을 올리자 그이께서는 《어머니, 이러지 마십시오.》라고 하시며 그의 두손을 잡아일으키시여 앞세우시고 방으로 들어서시였다.

이날 그이께서는 가족들이 내여드린 평범한 의자에도 허물없이 앉으시며 막내딸이 어떻게 되여 병을 앓게 되였는가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남편이 늘 나가있어서 삯빨래, 식모살이, 온돌쟁이 노릇까지 하면서 자식들에게 하루 한끼 깡비지밥도 못먹이던 이야기며 그 나날의 고생이 병으로 되여 막내딸이 심한 위탈에 걸린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병을 고칩시다, 꼭 고칩시다라고 하시며 몸도 마음도 강철로 벼려 아버지가 못다한 일을 하게 하자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귀중한 약을 구해가지고 이튿날에도 렬사의 집을 또다시 다녀가시였다. 그이께서 가져오신 약꾸레미에는 귀한 약들과 함께 두장의 종이쪽지가 들어있었다.

한장은 약처방이고 또 한장에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활달한 필체로 쓰신 다음과 같은 글발이 적혀있었다.

《식후에 두알씩 먹을것.》

그이께서 쓰신 아홉자의 글발을 들여다보며, 사랑의 약이 담긴 함을 어루만지고 쓸어보며 유가족들은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애국렬사의 후대를 아버지가 못다한 그 길에 세워주시려는 절세의 위인의 숭고한 의리와 사랑은 그대로 불사약이 되여 리현상선생의 막내딸은 공화국의 어엿한 외교일군으로 자라날수 있었다.

그로부터 몇해가 지난 어느 봄날 리현상선생의 유가족들을 늘 마음속으로 생각해오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들을 집무실로 불러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 당은 동무들의 아버지를 위대한 수령님을 직접 모시고 싸운 항일혁명투사들과 꼭같이 생각하고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리현상선생을 영생의 높은 언덕에 세워주시는 절세의 위인의 웅심깊은 사랑이 깃들어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어리신 시절부터 통일애국의 큰뜻을 품고 위대한 수령님과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앞에 서군 하던 리현상선생의 모습을 깊이 새겨두시였으며 그 순결의 량심과 불변의 신념과 투지를 귀중히 여기시였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리현상선생의 총대정신과 투철한 신념과 강철같은 의지에 대하여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말씀하시면서 당과 수령에 대한 변심없는 충실성, 투철한 신념을 안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손에서 총을 놓지 않고 영웅적으로 싸운 리현상동지는 우리 당과 인민이 두고두고 추억해나갈 혁명투사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렇듯 리현상선생에 대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뜨거운 애착은 바로 그의 총대신념과 총대와 함께 바친 최후에 있다고 볼수 있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공적을 이렇듯 높이 평가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뜨거운 말씀에 그들은 참고참았던 눈물을 쏟고야말았다.

이때뿐이 아니다. 주체66(1977)년 3월 어느날 리현상선생의 막내딸을 몸소 불러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병약하던 그가 어엿한 일군으로 성장한것이 대견하신듯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시고 그가 리현상선생의 딸이라고 하시며 여러 일군들에게 소개해주시였다. 그리고 리현상선생 부인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된 남편의 묘에 합장하도록 해주시였으며 그의 자녀들이 아무런 근심걱정없이 행복한 생활을 누리도록 크나큰 은정을 거듭 안겨주시였다.

이처럼 세기의 언덕을 넘어 더욱 뜨겁게 흐르는 백두산위인들의 고결한 의리는 우리 민족은 물론 온 세상사람들을 끝없이 격동시키고있다.

6. 15공동선언발표이후 평양을 찾아왔던 남조선언론사 대표들은 만수대의사당을 참관하면서 지리산빨찌산 대장의 딸을 만나게 된것이 너무 놀라와 그의 손이라도 잡아보자고 하였으며 그 사실이 남조선출판물들에 크게 보도되였다. 남조선잡지 《말》에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있는 《지리산호랑이》의 유가족들에 대한 감동깊은 이야기가 실려 인기를 끌었고 프랑스의 《몽드》를 비롯한 세계의 수많은 출판물들도 이 사실을 널리 보도하였다.

리현상선생이 세상을 떠난 때로부터 반세기이상이 흘렀다.

그러나 강산은 변하고 또 변하였어도 변하지 않는 하나의 진리가 우리 민족사의 갈피에 깊이 새겨졌다. 그것은 위대한 령도자를 민족의 수위에 높이 모셔야 민족의 운명도 미래도 찬란히 빛나며 그 품에 안길 때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도 빛난다는것이다.

백두산위인들의 숭고하고도 뜨거운 사랑과 은정의 력사는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지리산을 비롯한 남녘의 산야를 뜨겁게 적시며 영원히 흐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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