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묘소에 보내여진 화환
흘러간 옛 세월 사람들은 살아도 죽어도 변치 않는 의리와 정을 찬미하면서 이를 체현한 인물들을 존경해왔다. 그러나 그 의리란 개인적인 친분관계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것이였다. 애국이라는 성스러운 위업과 숭고한 사상감정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숭고하고 참된 의리는 오늘 선군조선에서 훌륭히 발양되고있으니 통일애국의 길에서 자기의 삶을 빛내인 사람들에 대한 령도자의 혁명적의리는 그들의 한생만이 아니라 그 후대들에게 그대로 뜨겁게 이어지고있다. 주체80(1991)년 11월 서울에 있는 려운형선생의 묘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숭엄히 지켜보는 가운데 《아시아의 평화와 녀성의 역할》에 관한 토론회에 참가하기 위해 북측대표단 단장으로 서울에 간 려운형선생의 딸 려연구에 의해 《고 몽양 려운형선생을 추모하여 김일성》이라고 새겨진 댕기를 드리운 이채롭게 큰 화환이 진정되였다. 세월이 흐르면 세상을 떠난 혈육의 정도 멀어지고 슬프거나 기쁘던 느낌도 추억의 지평선너머로 아득히 사라져가기마련이다. 하지만 려운형선생이 통일애국의 길에서 쓰러진 때로부터 40여년, 어떻게 되여 이 기나긴 세월의 언덕을 넘어 그의 묘소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화환이 진정되게 되였는가. 경기도 양평에서 태여난 려운형선생은 일찌기 나라잃은 설음과 민족수난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고 독립의 길을 찾아 떠났다. 그는 독립운동의 물결에 실려 민족주의단체에도 관여해보고 로조운동도 해보았다. 지어 손문과 레닌, 쓰딸린을 비롯하여 당대 동서양의 유명한 사람들도 찾아가 만나보았다. 그러나 그 어디서도 조선독립의 참다운 길을 찾을수 없었다. 그는 여러 나라들을 떠돌며 나라잃은 설음을 류창한 웅변에 담아 토해보기도 하고 단신으로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정부와 군부의 거물들을 상대로 조선독립의 정당성과 민족의 장한 기개를 떨쳐보이기도 하였지만 차례진것은 수년간의 감옥생활뿐이였다. 울분과 비애로 가득찼던 그 시절 려운형선생의 가슴에 조국해방과 삶의 서광을 안겨주신분은 김일성장군님이시였다. 그가 보천보전투가 있은 직후 보천보로 찾아가고 1940년대 전반기 조선인민혁명군과 련계를 취하려고 련락원을 보낸것도, 해방직후의 정치적혼란속에서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발기인의 한사람으로 나섰던것도 그리고 위대한 수령님께 하루속히 서울에 오시여 혼란된 정국을 바로잡아주실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올리고 그이를 만나뵈옵기 위하여 직접 38°선을 넘나든것도 바로 자기가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운명의 태양이 바로 민족재생의 은인이신 김일성장군님이시고 그이를 따르는 길에 참된 애국이 있음을 절감하였기때문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려운형선생이 지닌 애국의 그 마음을 무엇보다 귀중히 여기시고 그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에서 애국의 삶을 빛내여나가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직후 려운형선생을 여러차례 만나주시면서 일제의 박해속에서도 민족적지조를 굽히지 않고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싸운것을 높이 평가해주시였으며 조선민족이 나아갈 길을 명확히 밝혀주시였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독립운동의 선배로, 스승으로 존대를 받고 그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던 려운형선생이였지만 그는 철의 론리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을 환히 밝혀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고 그이이시야말로 백의민족이 믿고 따라야 할 위대한 령수이심을 가슴뜨겁게 절감하였다. 려운형선생이 서울대학교 운동장에서 청년학생들앞에서 한 연설은 그가 위대한 수령님을 얼마나 열렬히 숭배하고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고 서울로 나간 그는 서울대학교 학생들앞에서 자신이 평양에 가서 만나본 김일성장군은 당년 34살의 청년장군이시다라고 하여 강연장에 모였던 수많은 청년들과 대학생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김일성장군님이 내놓으신 건국로선이야말로 자기의 신념이며 오직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길만이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고 조국이 나아갈 진로이라고 하면서 온 민족이 김일성장군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를것을 열렬히 호소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려운형선생이 그후 백주에 서울의 한복판에서 피살되였다는 소식에 접하시고 그토록 애국적열정에 불타던 그를 잃은것은 우리 혁명에 커다란 손실이라고 하시며 애석함을 금치 못해하시였다. 그리고 려운형선생의 장례식에 자신을 대표하여 조의대표를 파견하는 조치까지 취해주시였다. 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제정되였을 때 려운형선생은 그 첫 수상자대렬에 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북과 남 해당 부문의 합의에 따라 서울에서 진행되는 《아시아의 평화와 녀성의 역할》에 관한 토론회를 앞두고 려운형선생의 딸 려연구선생이 북측대표단 단장으로 활동하도록 하여주신데 이어 그가 서울에 있는 아버지묘소를 찾아보도록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그리고 떠나기 며칠전에 려운형선생의 자녀들을 몸소 만나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을 만나주신 자리에서 아버지가 희생된 후에는 한번도 못 가보았지라고 하시면서 자신께서도 려운형선생의 묘소에 한번도 못 가보았다고, 이번에 서울 가면 아버지묘소부터 찾아보라고, 자식이 부모를 먼저 찾는것은 마땅한 도리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자신의 이름으로 화환을 보내줄테니 꼭 가지고가라고 다시금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해방직후 려운형선생과 맺으셨던 깊은 인연에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그의 투쟁공적을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리고 자녀들의 신상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서도 깊이 관심하시며 그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국통일과 나라의 부강발전을 위한 길에서 일을 잘할데 대하여 당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의 뜻을 높이 받드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려운형선생이 살아있으면 나이가 105살이고 그의 부인의 나이가 103살이라는것을 헤아리시여 208개의 아름다운 꽃송이로 화환을 만들도록 하시였으며 그에게 9남매의 자식들이 있었다는것을 뜻하여 9송이의 김일성화와 9송이의 김정일화를 각각 화환중심에 장식하도록 일일이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이렇게 되여 서울에 있는 려운형선생의 묘소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화환이 진정되게 된것이다. 그것은 정녕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친 애국렬사들의 삶을 더욱 빛내여주시려는 절세의 위인들의 영생의 축복이였다. 려운형선생을 위하시는 절세의 위인들의 사랑과 은정은 그의 유가족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려운형선생의 가족들이 다 공화국의 품에 안겼다는 보고를 받으시고는 그들이 안착된 생활을 하도록 모든 성의와 조치를 다 취해주시였다. 언제인가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온 려운형선생은 자기의 두 딸을 북조선에서 공부시키고싶다고, 그래서 그이께서 자기 자식들의 앞길을 열어주셨으면 한다고 청을 드린적이 있었다.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런것을 왜 벌써 이야기하지 않았는가고 하시며 려운형선생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그애들을 보내주십시오. 평양으로, 우리 집으로 보내시오.》 《아니 장군님댁으로 말입니까?!》 《나한테로 보내시오. 내가 우리 집에 함께 데리고있으면서 공부를 시켜주지요.》 《아무렴 장군님께서 어떻게?…》 《일없습니다. 그애들을 우리 집으로 보내시오.》 그후 그의 자매가 평양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을 몸소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가 나를 믿고 너희들을 보내였다. 아버지의 부탁대로 난 너희들을 공부 잘시키겠다. 지금 너희 아버지는 서울에서 잘 싸우고있다.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공부 잘해라. 집떠나면 고생이라고 여기가 제 집 제 부모곁에 있는것만 하겠느냐만 제 집처럼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여라.》라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처럼 바쁘신 가운데서도 밥을 잘 먹는지, 아픈데는 없는지, 학용품은 충분한지, 공부에서 애로되는것은 없는지 등을 친부모의 심정으로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의 자녀들을 잊지 않으시고 여러차례 만나주시면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애국의 한길을 변함없이 걸어가도록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주체68(1979)년 1월 1일이였다. 그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해신년사를 하실 시간도 뒤로 미루시며 려운형선생의 자녀들을 몸소 만나주시였다. 왜 인제야 왔느냐고 하시며 그들을 한품에 안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얘들이 려운형선생의 자녀들이요라고 하시며 몸소 소개해주시였다. 그동안 그들이 지내온 형편에 대하여 하나하나 물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그동안 우리 집에는 놀러 오지 않았니? 정 찾아 못 오겠으면 편지를 해야지. 편지라도 해야 내가 알지. 나야 바빠서 편지를 못할수도 있지만 너희들이야 나한테 얼마든지 편지를 할수 있지 않느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려운형선생에 대한 감회깊은 말씀도 하시고 그들과 함께 영광의 기념사진도 찍으시였으며 신년사를 끝내시고서는 그들에게 사랑의 축배잔까지 안겨주시였다. 이렇듯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한 통일애국인사를 잊지 못해하시며 그 후대들에게 대를 이어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는 절세의 위인의 품이 있어 려운형선생의 자녀들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으로, 아버지가 다하지 못한 조국통일위업실현에 이바지하는 나라의 어엿한 일군들로 자라날수 있었다. 려운형선생의 자녀들에게 돌려주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과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의 사랑은 남달리 각별하였다. 그들이 외국류학을 떠나게 되였을 때였다. 류학을 떠나는 그들의 전공과목까지 토론해주시며 계절에 따라 갈아입을 갖가지 옷들과 신발, 학용품,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몸소 준비해주신 김정숙어머님께서는 부모도 없이 저애들을 멀리로 보내는데 기념으로 사진 한장 못 찍고 그냥 보내자니 마음에 걸린다고 갈리신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그러신 후 자신의 마음으로 알고 어서 받으라고 하시며 흰 종이에 싼 만년필도 안겨주시였다. 그리고 공부를 많이 하고 돌아오면 우리 함께 손잡고 부강한 조국건설을 위해 힘껏 일해보자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그후 그들이 보내여온 편지에 몸소 회답까지 보내주시며 하나라도 더 많이, 더 잘 배우라고 고무도 해주시였고 햇쌀과 고추장도 보내주시며 조국의 향취를 잊지 않도록 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68(1979)년 1월 1일 려운형선생의 자녀들이 한날한시에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옵도록 은정을 돌려주시였으며 오래간만에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여러곳을 견학도 하고 관람도 하면서 즐겁게 휴식하라고 휴식일정표까지 짜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 수령님께서는 려운형선생을 잊지 못하시듯이 그 자녀들에 대해서도 잊지 못하십니다, 더우기 그들중 두 딸은 광복직후에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어머니가 키워주었습니다, 그들이 일찌기 부모를 잃고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이제라도 모두 평양에 모여서 살게 해야겠습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며 그들형제들이 함께 모여살도록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들에게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이 새겨진 귀중한 시계도 채워주시고 국가적명절때마다 귀중한 선물도 안겨주시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국과 민족앞에 지워지지 않는 생의 자욱을 뚜렷이 남기도록 보살펴주시고 떠밀어주시며 사랑을 부어주시였다. 백두산3대장군의 크나큰 사랑과 은정은 그대로 우리 겨레모두에게 안겨주시는 절세의 위인들의 뜨거운 사랑이고 은정이고 축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