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원한 생의 보금자리                             2) 세월은 멀리 흘렀어도


 

□ 애국렬사릉에 옮겨진 영웅의 묘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조국통일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생을 마친 사람들을 언제나 잊지 않고 세월의 이끼속에 묻혀버린 그들의 자그마한 위훈까지 다 찾아내여 빛내여주시는 절세의 위인들의 품속에서 영생하는 삶을 누리고있는 사람들가운데는 안영애영웅도 있다.

주체60(1971)년 12월의 어느날 저녁 평양에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혁명가극 《한 간호원에 대한 이야기》 초대공연이 진행되였다.

이 혁명가극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몸소 지도하여 완성시켜주신 작품으로서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간고하고 엄혹한 시련을 뚫고 당과 조국이 맡겨준 어려운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였으며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직하였던 나어린 인민군녀전사에 대한 이야기를 화폭에 담고있었다. 그 나어린 녀전사의 원형이 바로 안영애선생이였다.

 

안영애(1929. 12. 9-1951. 5. 1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주체40(1951)년 5월 적기의 폭격속에서 30여명의 중환자를 업어내여 안전한 곳에 대피시켰으며 자기 몸으로 환자의 몸을 덮어 부상병을 구원하고 장렬하게 전사. 주체62(1973)년 10월 공화국영웅칭호 수여됨. 그를 원형으로 하여 혁명가극 《한 간호원에 대한 이야기》 창작됨.

 

1920년대말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여난 그는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난 부모들을 따라 중국 동북지방의 여러곳을 떠돌아다니며 자라났다. 그후 서울로 돌아와 어느 한 녀학교에서 공부하던중 해방을 맞이한 그는 미제와 그 주구들의 민족분렬책동을 반대하고 학원의 민주화를 요구하여 투쟁의 거리에 분연히 떨쳐나섰다. 그 길에서 여러차례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던 그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남먼저 의용군으로 탄원입대하였으며 그 길에서 자기의 청춘을 서슴없이 바쳤다.

가렬한 전쟁의 포성이 울부짖던 1951년 어느날 최고사령부에는 전선동부의 한 부대 간호원들의 투쟁자료가 보고되였는데 그가운데는 온몸의 여러곳에 부상을 당하고서도 숨이 지는 마지막순간까지 30여명의 환자들을 구원한 간호원 안영애선생의 장렬한 최후에 대한 자료도 있었다.

1951년 5월 어느날 강원도 회양군의 어느 한 곳에 부대군의소가 주둔하고있을 때 갑자기 날아든 적기들이 환자병동에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하자 안영애선생은 동무들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적탄이 비발치는 속에서 불붙는 병실에 뛰여들어 부상자들을 업어날랐다. 그 과정에 왼팔과 복부에 부상을 입었으나 자기 몸은 돌보지 않은채 그는 불과 몇십분사이에 34명의 중환자들을 업어다 안전한 곳에 대피시켰다. 이때 아직도 한 부상병이 불붙는 병실에 있다는 간호원의 다급한 웨침소리를 듣고 그가 불길에 휩싸인 병실에 뛰여들어 환자를 업고나올 때 적기 한대가 내리꽂으며 기총사격을 가했다. 그는 비호같이 자기의 몸으로 환자의 몸을 덮었다. 총탄은 그의 몸에 사정없이 박혔고 부상병은 구원되였다.

심한 출혈로 자기 생명이 위험하다는것을 알게 된 그는 가슴에 품은 당원증과 모아두었던 돈을 내놓으며 당원증을 당비와 함께 당중앙위원회에 전하여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최후의 순간에 안영애선생이 남긴 이 말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한 우리는 전쟁에서 반드시 이긴다는 확고한 신념과 함께 당원으로서 당조직에 대한 높은 자각이 담겨져있었다.

자기의 수령, 자기의 당을 절대적으로 믿는 마음의 기둥이 있었기에 그는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태백산줄기를 타고 적후천리길을 걸어 최고사령부를 찾아올수 있었고 위급한 순간에 동지들을 위하여 자기의 한몸을 서슴없이 바칠수 있었던것이다.

한 녀전사의 마지막보고에서 바로 이러한 신념의 정신력을 읽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마지막말을 영원히 기억해두시려는듯 일군들에게 그가 보내온 당원증을 잘 보관하게 하시였으며 높은 국가표창으로 그의 공로를 평가하게 하시였다. 그리고 그의 투쟁공로를 신문을 비롯한 여러 출판물들에 널리 소개선전하도록 하시였다.

그리하여 22살의 꽃나이청춘을 조국에 바친 안영애선생의 위훈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영원히 남게 되였으며 그의 당원증은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전시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그를 또다시 추억하시며 그는 어린 처녀의 몸으로 환자를 데리고 적후에서 적들과 싸우면서 사령부를 찾아왔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또한 주체59(1970)년 5월초의 어느날에는 조국의 자유독립과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영웅적투쟁에 일떠섰던 인민군용사들과 후방인민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다가 간호원 안영애에 대해서도 좋은 자료가 있는데 그러한 투쟁내용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 근로자들과 후대들을 교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리하여 그를 원형으로 하는 예술영화 《한 간호원에 대한 이야기》가 창작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영화가 나왔을 때에는 제일먼저 보아주시고 그의 영웅적투쟁모습과 높은 정신세계를 진실하게 형상하도록 수정방향과 방도에 대하여서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예술영화 《한 간호원에 대한 이야기》를 훌륭하게 완성시켜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후 안영애선생을 형상한 혁명가극을 또다시 만들도록 하시여 그를 온 나라가 따라배워야 할 전형으로 높이 내세워주시였다.

준엄한 전쟁의 불길속에서 연약한 처녀의 몸으로 당원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훌륭히 보여준 간호원 안영애선생의 모습을 형상한 혁명가극을 창작하는 사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때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처럼 잊지 못해하시는 녀전사의 모습을 원형인물의 품격에 맞게 가극으로 잘 형상하도록 세심히 지도하여주시였다.

주체60(1971)년 11월 초순 어느날 가극창작가들을 몸소 만나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인공의 최후장면을 완전무결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주인공의 원형인 안영애는 소박하고 훌륭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당중앙에 당원증과 당비를 바쳐달라고 한것은 기특한 일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안영애를 원형으로 하는 영화도 만들고 가극도 만들라고 교시하시였습니다.》

예술영화 《한 간호원에 대한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최후장면을 그처럼 훌륭하게 형상하도록 이끌어주시고도 원형인물의 최후장면에 비하면 미흡한것 같으시여 또다시 가극에서 최후장면을 잘 해결할데 대하여 밝혀주신 말씀을 받아안고 창작가들은 사색을 거듭하여 그이께서 바라시는대로 혁명가극을 최상의 수준에서 창작완성할수 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렇듯 예술영화에 뒤이어 혁명가극 《한 간호원에 대한 이야기》를 훌륭히 완성시켜주시고도 안영애선생에게 못다 주신 사랑이 있으신듯 그가 희생된 때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를 공화국영웅으로 높이 내세워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거듭 안겨주시였다.

혁명가극 《한 간호원에 대한 이야기》초대공연이 진행된 날이였다.

이날 공연이 끝난 후 경애하는 장군님과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안영애선생이 속한 부대의 군단장이였던 최현항일투사사이에는 이런 이야기가 오갔다.

《저절로 나오는 눈물이야 어쩌겠습니까. 나도 울었습니다.

그런데 최현동지, 가극이 어떻습니까?》

《가극이 대단히 훌륭합니다. 전쟁물도 가극으로 만들어놓으니 정말 감동이 큽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자기 군단의 한 병사에게 기울이시는 그 은정이 고마와 눈굽을 적시는 로투사에게서 시선을 떼시며 추연한 낯빛으로 모진 곤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수령님께서 주신 혁명임무를 끝까지 수행하는 그의 투쟁정신과 숨지는 마지막순간에 자기의 당원증과 당비를 당중앙위원회에 전달해달라고 부탁하는 숭고한 정신세계는 모든 당원들과 근로자들, 인민군군인들이 따라배워야 할 모범이라는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무엇인가를 생각하시다가 의미있는 눈길로 로투사를 바라보시며 이렇게 물어보시였다.

《최현동지, 그런데 왜 그에게 영웅칭호를 수여하지 않았습니까?》

갑작스러운 물으심에 그는 선뜻 대답을 올리지 못하였다.

안영애선생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도 애통하여 권총의 탄창이 비도록 추모의 조총을 쏜 로투사였지만 그의 사후표창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돌리지 못하였던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옛 상관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자책의 충동으로 고개를 숙이고있는 로투사와 일군들을 보시며 절절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전쟁시기 안영애에게 영웅칭호를 수여하지 못하였는데 그는 영웅자격이 있습니다.

이제라도 안영애에게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하여야 합니다. 그는 응당 수령님의 품속에서 영생하는 공화국영웅으로 되여야 합니다.》

이렇게 되여 안영애선생은 희생된지 20여년의 세월이 지난 1973년 10월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게 되였다.

그후에도 선군령도의 길에서 그에 대하여 여러차례에 걸쳐 뜻깊은 추억을 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옮겨 안치하고 묘비에 돌사진을 붙이도록 크나큰 은정을 거듭 안겨주시였다. 그리하여 안영애선생의 유해는 그가 전사한 때로부터 수십년세월이 지나 애국렬사릉에 옮겨지게 되였으며 그는 절세의 선군령장의 크나큰 사랑의 손길에 떠받들려 영생의 언덕에 높이 올라설수 있게 되였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인 1995년 9월 어느날이였다.

산과 들에 오곡백과 무르익던 그 계절에 이 땅에서는 또 하나의 감동적인 사랑의 전설이 펼쳐졌다. 44년전에 세상을 떠나간 고찬보선생에게 수여하는 공화국영웅칭호가 그의 외동딸에게 수여된것이다.

나이 50고개를 바라보는 때에야 자기 아버지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조국통일을 위하여 어떻게 한생을 빛내였는가를 알게 되고 40여년전에 전사한 아버지에게 영웅의 금별메달을 안겨주는 어머니조국의 고마움에 그의 딸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세월은 저 멀리 흘렀어도 어머니조국이 잊지 않고 붉은 기폭에 감싸안아 공화국영웅으로, 조국통일상수상자로 영생의 언덕에 높이 세워준 고찬보선생, 그는 어떤 사람인가.

나라없던 그 시절 고찬보선생은 운명의 쪽배에 몸을 싣고 위인의 품을 찾아 이역땅을 방황해온 불우한 식민지청년이였다.

품팔이목공의 가정에서 태여난 그는 삯빨래, 삯바느질로 푼전을 모으는 어머니의 극성스러운 뒤받침과 친척들의 도움으로 소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후 향학의 푸른 꿈에 실려 20살 잡히던 때에 일본으로 건너갔었다.

애국지사들의 주선으로 한 대학에 입학한 그는 한때 조선청년대학생축구팀의 날개로 경기장들에서 인기를 독차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늘 학비난에 쪼들리며 신문배달도 하고 인력거를 끌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 나날 그는 나라없는 민족의 설음을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날이 갈수록 그의 가슴속에서는 반일애국의 불길이 타올랐다.

축지법으로 백두광야를 주름잡으시며 일제를 벌벌 떨게 하시는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소식에 접한 그는 해방될 조국의 앞날을 그리며 반일학생운동의 앞장에 섰다. 선진사상을 탐독하는 비밀독서회에도 들었고 시위투쟁과 삐라살포에도 참가하였다. 그 과정에 그는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여러해나 감옥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감옥생활은 한때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비폭력투쟁에 의한 조선독립을 부르짖는데 귀를 기울였던 그를 깊은 잠에서 깨여나게 하였다.

감옥생활은 고찬보선생의 인생행로에서 조국애가 더욱 불타오르게 한 귀중한 분기점으로 되였다.

1941년 봄 어머니의 등에 업혀 감옥문을 나선 그는 향학의 펜대를 꺾어버리고 눈물을 뿌리며 현해탄을 다시 건넜다. 고국이라고 찾아왔건만 그를 안아주는 품은 없었다. 그의 마음은 자나깨나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백두산에 가있었다.

그해 여름 몸이 추서자 그는 백두산을 향해 길을 떠나 조선인민혁명군을 찾아 동북만주땅을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현해탄을 넘나들고 두만강, 압록강도 넘으면서 청춘의 심장을 애국의 열정으로 불태우던 나날 고찬보선생은 하나의 진리, 위대한 령도자를 모시지 못하면 조국도 없고 조국을 사랑할 권리마저 빼앗긴다는 인생의 진리를 가슴깊이 새겨안았다.

하기에 그는 해방은 되였지만 또다시 식민지민족의 불우한 운명을 강요당하게 된 그 시각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높이 받들고 미제의 남조선강점을 반대하여 조국통일을 위한 통일애국의 길에 분연히 떨쳐나섰다.

해방직후 남조선에서는 애국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정당, 사회단체들이 수많이 조직되였다. 각 지방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였던 청년운동도 1946년 봄 서울에서 남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이 결성됨으로써 통일적인 지도밑에 활발히 전개되게 되였다. 그러나 민청은 미제와 그 주구들의 책동으로 하여 창립된지 두달도 안되여 강제로 해산되지 않으면 안되였다.

남조선의 애국적민주정당지도자들과 청년대표들은 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전권대표를 위대한 수령님께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 전권대표가 당시 남조선청년운동에서 핵심적역할을 하고있던 고찬보선생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38°선을 넘어온 고찬보선생을 처음으로 만나주신것은 주체35(1946)년 9월말의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온몸이 비에 푹 젖어 찾아온 그를 뜨겁게 포옹하시였다. 남조선의 청년대표로부터 구체적인 형편을 보고받으신 그이께서는 미제와 그 주구들의 민청해산책동을 반대하는 투쟁을 통하여 애국적인 청년들을 더욱 튼튼히 묶어세울데 대한 구체적인 방도에 대하여 가르쳐주시면서 《난관이 앞을 막아설 때일수록 신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그를 뜨겁게 고무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동무가 청년부장인데 청년운동을 책임진다는 립장에 튼튼히 서면 방도가 생길것이라고 하시며 그 방도를 하나하나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은 남녘청년들이 나아갈 길을 환히 밝혀주었다. 고찬보선생은 너무 기뻐 벌떡 일어서며 《장군님, 눈앞이 환합니다. 이제는 문제없습니다. 오늘 밤으로 당장 서울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눈에서 청춘의 열정이 넘쳐나는 고찬보선생을 기대에 넘친 눈길로 바라보시였다.

잊지 못할 그 뜻깊은 자리에서 고찬보선생이 후세에 길이 전해갈 다심한 사랑을 또 받아안을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애국의 열정이 온몸에 끓어넘치는 그의 손을 꼭 잡고계시다가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을 찾으시여 속내의 한벌을 가져오도록 하시고 그것을 그에게 안겨주시였다.

조국의 귀중함을 새겨주는 생명수로 그의 가슴에 흘러드는 위대한 수령님의 그 사랑에 그는 감사의 인사말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였다.

그밤으로 길을 떠나 서울에 달려간 그는 청년들에게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전달하고 애국투쟁에로 그들을 힘있게 불러일으켰다.

남조선도처에서 청년들은 물론 대학가와 학부모들 그리고 각 정당, 사회단체들이 들고일어나 미제와 그 주구들의 민청해산책동을 반대하는 투쟁을 세차게 벌렸다. 북반부의 청년들과 정당, 사회단체들도 이 투쟁에 합세하였으며 세계민청에서도 남조선괴뢰들에게 항의문을 보내였다. 미제와 그 주구들은 하는수없이 민청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1947년 6월 서울에서는 민주애국인사들의 축복속에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출범식이 성대하게 열리게 되였으며 고찬보선생이 그 위원장으로 선거되였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뜻대로 남조선청년운동을 통일애국의 길로 힘차게 이끌었다. 시도 잘 읊고 노래도 잘 부른 그는 극장과 시위마당에 청년들을 불러내여 민족의 령수 김일성장군님을 서울에 모셔오자고 격정을 터치기도 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이러한 고찬보선생을 여러차례 만나주시면서 애국애족의 길에서 더 보람찬 일을 하도록 사랑과 은정을 안겨주시였다.

언제인가 려운형선생의 일행과 함께 평양에 온 그를 또다시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홍길동이 왔구만.》라고 하시며 그의 등을 다정히 두드려주시였다.

이미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조선사회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애국의 뜨거운 마음을 바쳐가고있는 그의 투쟁에 대하여 잘 알고계시였다.

당시 《서울신문》에는 《전선줄에 걸린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고찬보선생이 미제와 그 주구들의 테로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2층에서 뛰여내리다가 전선줄에 걸렸던 기사를 실은적도 있었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받드는 일이라면 다도해의 끝까지 하루밤에라도 달려가군 한 열혈의 통일애국렬사였다. 남조선의 여러 작가, 예술인들이 북행길에 오르게 된데도 그의 노력이 깃들어있었다.

홍길동, 진정 이것은 그를 위하시는 절세의 위인의 크나큰 믿음과 은정이 그대로 담겨져있는 사랑의 부름이였다.

그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고찬보선생의 가슴에 애국의 넋과 죽어서도 변치 않을 신념과 지조를 깊이 심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 미제와 그 주구들이 수십만원의 현상금을 걸고 고찬보선생에 대한 지명수배령을 내렸을 때에는 그를 당장 데려오도록 하시였으며 가족들까지 찾아오도록 대책까지 취해주시였다.

고찬보선생과 그의 가족들은 이런 사랑속에 1947년 가을 공화국으로 들어오게 되였다.

정녕 위대한 수령님은 고찬보선생에게 있어서 친어버이이시였고 사랑하는 조국이였다. 그 품은 죽어서도 영원히 안길 위대한 사랑의 품이였다.

이처럼 자기의 생활체험을 통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품은 곧 우리 겨레모두가 안겨살 참다운 조국의 품이라는것을 절감하고 애국으로 생을 빛내여온 고찬보선생이였기에 준엄하였던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미제의 야수적폭격만행으로 무고한 주민의 집에 떨어진 시한탄을 자진하여 해체하고 자기의 생명을 서슴없이 바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일군들에게 조국통일을 위해 투쟁하다가 희생된 애국렬사들의 투쟁자료를 발굴하고 그 유가족들을 찾아낼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었다.

그리하여 고찬보선생의 활동사적도 발굴되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애국에 살고 애국의 길에서 한목숨바친 고찬보선생의 투쟁자료를 보고받으시고 그가 세상을 떠난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에게 공화국영웅칭호와 조국통일상을 수여해주시고 그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묘지에 화환도 보내주시였으며 그의 외동딸에게 자신의 명의로 옥류관에서 위로식사까지 차려주도록 은정을 안겨주시였다. 그러시고도 고찬보선생을 온 세상이 다 알게 널리 소개하도록 해주시였으며 그의 딸이 고마움에 목메여 감사의 편지를 올렸을 때에는 그것을 몸소 보아주시였다.

정녕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잊지 않고 붉은 기폭에 휩싸안아 영생의 언덕에 내세워주시는 절세의 위인의 숭고한 믿음과 사랑의 세계가 있어 이 땅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영웅으로 자라나고 그들의 삶이 영생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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