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시며
공화국의 품에 안겨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위대한 사랑속에 영생의 높은 언덕에 오른 사람들중에는 남조선에서 북으로 들어온 영화연극예술인들도 있다. 주체59(1970)년 11월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조선로동당 제5차대회 개회사를 하시면서 조국과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서 오래동안 헌신하다가 세상을 떠난 공로있는 혁명가들의 이름을 한사람한사람 지적하시였다. 이 높은 연단에서 수령님께서는 몸소 《태을민동지》라고 인민배우 태을민선생의 이름도 불러주시였다.
어려서부터 신문배달과 포장공, 시계수리공으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태을민선생은 젊었을적에 연극에 뜻을 두고 서울 동양극장에 들어갔으나 일제놈들의 박해로 참된 예술에 대한 갈망을 풀수 없었고 해방후에도 내 나라에서 마음껏 연극을 해보겠다는 그의 꿈은 미국놈들의 탄압으로 여지없이 깨여지고말았다. 울분에 몸부림치던 그는 북반부의 극장무대들에서 《백두산》, 《춘향전》과 같은 연극들이 련이어 창작공연된다는 소식을 듣고 1948년 결연히 북반부로 들어왔다. 그때로부터 그는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존엄과 영예를 지니게 되였으며 인생의 새 출발을 하게 되였다. 조국해방전쟁의 준엄한 나날은 그로 하여금 절세의 위인을 수령으로 모셔야 조국이 있고 조국이 있어야 예술가의 생명도 있다는것을 더욱 확고한 신념으로 체득한 나날이였다. 그러기에 전쟁이 일어나자 전선으로 달려나갔던 그는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의 준엄한 시련앞에서 추호의 흔들림없이 고향인 서울로가 아니라 10여명의 예술인들과 함께 사선을 헤치며 끝내 위대한 수령님의 품을 찾아올수 있었다. 태을민선생이 위대한 수령님을 얼마나 흠모하였는가 하는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언제인가 평양극장(당시)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장막극 《리순신장군》을 공연할 때에 있은 일이다. 그때 리순신장군역은 황철선생이 하였다. 연극이 고조에 이르고 한창 극이 상승되여가고있던 그때 무대우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큰 실수가 있었다. 연극배우였던 태을민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을 처음 뵙게 된 흥분속에서 그만 자기가 등장할 차례가 되는것도 모르고있었다. 《태을민동무, 뭘하고있소? 빨리 무대로!》 옆사람들의 재촉을 받고서야 정신이 번쩍 든 태을민선생은 덤비며 한손에 반달칼을 들고 무대로 달려나가 꿇어앉으며 극대본에 씌여있는대로 《리순신장군께 아뢰오-》라고 말해야겠으나 그만 흥분하여 《김일성장군님께 아뢰오-》라고 크게 소리쳤다.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당자인 태을민선생은 더 말할것도 없거니와 리순신장군역을 한 황철선생도 당황하여 어쩔줄 몰라했으며 모든 창조자들의 눈앞은 아뜩해졌다. 극이 도중에서 파탄되여 이것으로 막을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초긴장의 순간이였다. 뜻밖의 정황이 생겨 관객들마저도 숨막힐듯 한 무거운 적막에 휩싸여있을 때 갑자기 객석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호탕한 웃음을 터치시며 저 배우동무가 흥분했구만, 일없소, 계속하라고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대범하신 그 말씀에는 무대와 객석의 무거운 긴장을 일시에 풀어주는 그런 비상한 힘이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을 모신 그날의 잊을수 없는 공연은 태을민선생을 비롯한 배우들의 끓어오르는 충정의 열정과 관중들과의 뜨거운 호흡으로 하여 매우 인상깊은 형상들을 보여주었다. 지난날 나라없는탓으로 예술적재능마저 무참히 짓밟혔던 태을민선생은 수령님의 사랑속에 자기의 희망을 마음껏 꽃피우며 《조국산천에 안개 개인다》를 비롯하여 수십편의 연극들과 《내 고향》, 《흥부전》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창작에 참가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출연한 연극들을 몸소 여러차례 보아주시고 그를 가까이 부르시여 분에 넘치는 치하도 해주시였으며 그가 나오는 영화를 보시고는 연극배우가 영화연기도 아주 잘한다고 못내 기뻐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태을민선생을 인민의 사랑을 받는 배우로 키워주시고도 그 공로를 전적으로 그에게 돌려주시며 공훈배우, 인민배우의 영예까지 안겨주시였다. 배우로서의 태을민선생의 예술적재능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과 믿음에 의하여 더욱 활짝 꽃펴났다. 한때 태을민선생은 낡은 사회에서 고질화된 연기생활의 틀과 습관을 극복하지 못하여 심한 진통을 겪었다. 일부 사람들은 그를 무대에 더는 세울수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이 사실을 아시게 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한 일군을 부르시여 왜 그를 무대에서 떼여내려고 하는가고 물으시였다. 일군은 그가 육체적조건이 특이하고 목소리가 류다르기때문에 옛날 신파극이 판을 칠 때에는 인기를 끌수 있었지만 정극이 기본인 오늘의 시대적요구는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말씀올렸다. 일군의 말을 듣고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 동무는 육체적조건과 연기와 화술에서 누구도 대신할수 없는 특이한 기질을 가지고있기때문에 우리에게 더 필요한것이지 그가 평범한 보통배우라면 결코 그처럼 귀중한 존재로 되지 않을것이다, 세상을 다 뒤져도 그런 특기를 가진 훌륭한 배우를 어데서 찾아내겠는가, 그 동무야말로 우리가 아껴야 할 둘도 없는 보배라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를 연극배우가 아니라 영화배우로 마음껏 재능을 꽃피우게 하라고 이르시였다. 어린시절부터 예술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무대우에서 성장해온 태을민선생에게 있어서 예술을 버린다는것은 생각조차 할수 없는 일이였다. 무대에서 물러나라는 권고를 받고 모대기던 그에게 보다 광활한 영화예술의 활무대를 안겨주셨으니 이보다 더 큰 은덕이 어데 있겠는가! 그 감격적인 소식에 접했을 때 태을민선생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나는 두번다시 세상에 태여났다, 나에게 소생의 기쁨, 희망과 용기를 안겨주신분은 오로지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김정일동지밖에 없다, 내 어찌 재생의 은인, 자애로운 스승을 잊을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 한몸을 바쳐 깨끗이 살겠다는 필생의 결의를 다지였다. 그 결의를 안고 태을민선생은 주체문학예술의 대화원을 마련하는 보람찬 창조의 나날에 무대행동과 대사에서 력점을 정확히 설정하고 심리세계의 미묘한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하는 다양한 소리색갈을 창조하였으며 인물의 행동과제를 정확히 틀어쥐고나가는 개성적인 동작과 연기행동의 전과정에 민족적정서를 일관하게 보장한 개성적인 연기형상으로 역형상들을 특색있게 형상하였다. 공화국의 품에 안겨 마음껏 예술활동의 나래를 펴나가던 태을민선생이 순직하였을 때 누구보다도 가슴아파하신분은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다. 태을민선생이 순직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너무도 가슴이 아프시여 한동안 아무 말씀도 못하시였다. 이윽하여 그이께서는 아까운 동무를 잃었다고, 태을민동무는 일생동안 무대생활을 하다가 무대우에서 마지막숨을 거두었다고 하시며 그의 희생을 못내 애석해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여러차례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책임일군을 전화로 찾으시여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해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우선 화환을 만들어 그의 령구앞에 놓을데 대하여서까지 일일이 가르쳐주시였다. 다음날 또다시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책임일군을 찾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장례준비가 어떻게 되였는가 알아보시며 자신께서도 곧 그곳으로 나가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 일군은 촬영소로 들어오는 길을 수리하기때문에 자동차가 다니지 못한다고 급히 말씀올리였다. 그러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자신께서도 그것을 알고있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차길이 험하다고 우리곁을 떠나가는 혁명동지를 찾아보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몇천리를 걷는다고 해도 찾아가보아야 합니다.》 그러시고는 곧 고인의 령구가 안치되여있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로 떠나시였다. 그이를 모신 승용차는 한동안 달리다가 그만 멎어서게 되였다. 길이 막혔던것이다. 길을 수리하던중이여서 여기저기에 자갈무지, 흙무지들이 쌓여있었다. 차에서 내리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걸어가자고 하시며 앞장서 걸음을 옮기시였다. 가뜩이나 길이 험한데다 전날 밤에 비까지 내려 땅이 질쩍거리고 군데군데 흙탕물까지 고여있었다. 이런 험한 길로는 가실수 없다고 앞을 막아나서는 일군들에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내 걱정은 말고 어서 가자고 하시며 그 진창길을 앞장서 걸으시였다. 그이께서는 튀여오르는 흙탕물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예술을 사랑할줄 알며 창조할줄 알며 향유할줄 아는 그런 아까운 동지를 잃었다고 절통해하시였다. 일군들은 뜨거운것을 삼키며 그이의 발자욱을 따라 걸었다. 진창길에 새겨가신 그 자욱자욱, 그것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길에서 한번 뜻을 나눈 사람은 그의 운명을 끝까지 보살펴주시는 그이의 사랑과 믿음이 숭엄하게 펼쳐지는 불멸의 자욱이였다. 마중나왔던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일군들은 흙탕물에 덞어진 경애하는 장군님의 신발이며 옷을 보고는 커다란 격정에 휩싸여 입술을 이그러뜨리며 눈물만 흘리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태을민선생의 령구를 찾으시여 잠시 잠든듯 눈을 감고 누워있는 그를 한동안 바라보시였다. 며칠전만 하여도 맡은 배역을 더 잘해보겠다고 열정에 넘쳐있던 그가 심장의 고동을 멈추었다는것을 도무지 믿고싶지 않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가까이 다가가시여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부르시였다. 그러시고는 그처럼 사랑하던 예술을 버리고 왜 기척없이 누워있는가고 갈리신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비통한 심정을 금치 못하시며 손수건을 꺼내시여 눈가로 가져가시였다. 그이의 어깨가 조용히 떨리시였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모두가 눈물을 삼키며 세차게 흐느끼였다. 숭고한 인간애, 위대한 사랑과 믿음이 그들의 가슴을 뜨겁게 울려주었던것이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태을민선생에 대하여 이런 가슴뜨거운 말씀을 하시였다. 《태을민동무는 당에 충실한 동무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특기와 예술적재능으로 우리 예술의 대전성기를 이룩하는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후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도 그를 잊지 못하시여 여러 기회에 추억해주시며 영생하는 삶을 안겨주시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근 10년이 되여오던 어느해 4월 그가 출연하였던 어느 한 작품의 록화를 보아주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태을민은 정말 아까운 인재였다고 하시면서 그를 잃은 애석함을 금치 못해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가 출연한 영화들을 다시 돌려 그의 연기를 배우들이 배우도록 해야겠다고 뜨거운 은정을 부어주시였다. 그뿐이 아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때로부터 17년이 되여오던 주체75(1986)년 2월 어느날 또다시 그를 추억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로부터 몇달후 새로 건립된 애국렬사릉에 그의 유해를 안치하도록 하시는 은정을 거듭 안겨주시였다. 사랑도 헤여지면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차츰 식어지기마련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뜨거워만지는것이 바로 조국과 민족의 번영을 위한 길에서 자기의 삶을 빛내이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 돌려주시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사랑과 믿음의 위대한 세계이다. 절세의 위인의 이렇듯 위대한 사랑의 세계가 있어 김세영선생 역시 《웃음배우》로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영생하고있다.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여나 어려서 부모를 다 잃은 그는 고아의 설음을 안고 웃음이란 모르고 살았다. 여기저기를 방랑하던 나날 그 누군가가 쓰다버린 낡은 기타를 얻은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서러운 마음을 달래보려고 정성껏 고쳐서 연주법을 익혀나갔다. 불우한 시절 그는 자기의 마음속생각을 담은것과도 같은 《봉선화》, 《눈물젖은 두만강》, 《아리랑》 등의 노래들을 행인들앞에서 불러주고 먹을것과 돈을 구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술로 나라없는 울분과 부모잃은 설음을 달래고 인생의 소박한 웃음이라도 피워보려던 그의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말았다. 해방이 되여서야 그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그는 서울예술극장 배우로 활동하면서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그리는 마음에서 연극 《장백산》을 비롯한 많은 연극작품들에 출연하였었다. 그런데 이것이 《죄》로 되여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였다. 이때 그의 손에 채워졌던 수갑에 의해 그의 손목에는 상처자리가 영원한 허물로 남게 되였다. 그는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신에게 가슴아픈 상처만을 남기고 생활에서 웃음마저 앗아갔던 지난날을 되풀이할수 없다는 생각에서 남먼저 의용군으로 인민군대에 입대하였고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는 위대한 수령님의 품을 찾아 만포까지 후퇴해들어왔었다. 이때부터 그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로 활동하면서 남조선에서는 이룰수 없었던 진정한 예술활동의 꿈을 이루게 되였다. 특히 그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따뜻한 보살피심속에 잃었던 웃음을 다시 찾게 되였고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웃음배우》로 자라날수 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58(1969)년 1월 그가 주역으로 출연한 풍자극 《보충병》을 지도해주시면서 역형상에서 웃기려는 생각이 너무 앞서기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지 못한다고 하시며 연기형상에서 나타나고있던 결함들을 하나하나 일깨워주시였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가 영화배우들에게 무대훈련을 시키려고 결심한것은 영화창조사업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는데 대하여 말씀하시고나서 영화는 거짓을 싫어하며 허용하지도 않는다는 참으로 뜻깊은 말씀을 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후에도 여러차례에 걸쳐 그의 연기형상을 몸소 지도해주시면서 역형상창조사업에서 나서는 문제들을 일일이 가르쳐주시였다. 이처럼 한 배우의 연기형상수준을 높여주기 위해 깊은 관심을 돌려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극진한 보살피심이 있어 김세영선생은 예술영화들인 《자랑끝에 있은 일》, 《사과딸 때》, 《공중무대》, 《북은 내가 치겠소》, 《두 선장》, 《정다운 불빛》 등 100여편의 작품들에서 희극적웃음의 색채가 짙은 특색있는 연기형상을 창조할수 있었고 이 나날에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인민배우, 《웃음배우》로 자라날수 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김세영선생이 한생을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웃음배우》로 삶을 빛내여나가도록 그의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주체59(1970)년 어느날이였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불후의 고전적명작 《한 자위단원의 운명》을 예술영화로 옮기는 사업을 지도해주시기 위하여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 나오시였다. 그날 영화창조사업을 지도하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문득 김세영선생의 손목에 눈길을 멈추시였다. 얼핏 봐서는 잘 알리지 않는 허물자리, 손목에 생긴 상처자리가 그이의 안광에 비껴들었던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하시던 이야기를 멈추시고 손목에 난 허물자리가 어떻게 생긴것인가고 김세영선생에게 다정히 물으시였다. 허물자리에 깃든 사연을 마지막까지 다 들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가슴이 아프시여 한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가 자신께서 차고계시던 손목시계를 벗어드시였다. 그러시고는 김세영선생의 손목에 손수 시계를 채워주시며 이 시계로 상처자욱을 영원히 덮어버리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후 그가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진 시계를 수여받도록 해주시였으며 어느해 4월에는 명예칭호를 수여받은 그를 축복해주시면서 앞으로도 계속 일을 잘해나가도록 고무해주시였다. 이뿐이 아니였다. 주체78(1989)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김세영선생이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것을 아시고는 못내 걱정하시며 아까운 인민배우가 불치의 병에 걸렸는데 꼭 회복시키라고, 김세영동무와 같은 희극배우는 나오기 힘들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유능한 의사들을 붙여 적극적인 치료를 받도록 해주시였으며 병에 특효가 있다는 귀중한 약재들도 몸소 보내주시였다. 그가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재능있는 동무가 잘못됐다니 정말 가슴이 아프다고 하시면서 신문과 방송에 부고도 내고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도 보내주도록 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후에도 김세영동무는 자신의 사업을 많이 도와준 애국자였다고 하시면서 그의 시신을 애국렬사릉에 옮기도록 해주시였으며 애국렬사릉으로 그의 유해를 옮긴 날 저녁에는 그의 유가족들을 위한 위로연까지 몸소 마련해주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이렇듯 뜨거운 사랑과 믿음의 품이 있어 태을민, 김세영선생들만이 아니라 《김일성훈장》수훈자이며 로력영웅, 인민배우였던 유경애선생, 《김일성상》계관인이며 로력영웅, 인민배우였던 박학선생, 《김일성상》계관인이며 인민배우였던 박섭선생을 비롯한 오랜 영화연극예술인들도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조국과 민족의 기억속에 영생하는 애국렬사로서의 값높은 삶을 누리고있는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