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원한 생의 보금자리

 

2) 세월은 멀리 흘렀어도 

 

□ 계몽기가요와 더불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품에 안아주고 세월이 흐를수록 더더욱 뜨거운 사랑을 안겨주시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은혜로운 품에서 영생하는 사람들중에는 계몽기가요와 더불어 한생을 살아온 음악가들도 있다.

계몽기가요를 민족음악의 귀중한 유산으로 빛내여 주시려고 늘 마음써오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96(2007)년 3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문학예술부문 책임일군들과 하신 담화 《계몽기가요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음악유산이다》를 발표하시여 계몽기가요에 대한 인식을 바로가질데 대한 문제와 계몽기가요의 특징에 대하여, 계몽기가요가 가지는 계몽적의의와 유산적가치, 진보성에 대하여, 계몽기가요의 보급선전사업을 잘할데 대하여 전면적으로 밝혀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담화에서 《계몽기가요의 창작보급에 기여한 창작가, 예술인들에 대해서도 정확히 평가하여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계몽기가요창작가들중에서 조령출, 리면상은 사람들이 다 알고있지만 박영호나 안기영과 같은 창작가들은 잘 모르고있다고, 이들의 창작활동에 대하여 후대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고 지적하시였다.

일군들은 이제는 세상을 떠난지도 오랜 계몽기가요창작가들을 잊지 않으시고 그들에 대하여 추억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말씀을 들으며 음악으로 민족의 슬기와 재능을 빛내인 사람들을 후대들앞에 떳떳이 내세워주시려는 그 웅심깊은 마음과 뜨거운 사랑에 감복하여 격정을 금치 못해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추억해주신 박영호선생과 안기영선생은 해방후 남조선에서 북으로 들어온 창작가들이다.

독학으로 대학과정안을 터득하고 문학창작의 길에 나섰던 박영호선생은 《카프》에 관계하면서 연극 《눈먼 동생》, 《락화》 등을 창작하였다. 그는 《카프》의 해체관계로 1931년부터 연극분야에 관계하면서도 가사창작의 길에 나섰으며 《번지없는 주막》을 비롯하여 수많은 계몽기가요가사들을 창작하였다.

계몽기가요가사창작에서 조령출선생과 함께 두 기둥을 이루었던 박영호선생은 해방을 남조선에서 맞이하였다.

허나 미《군정》이 선포되고 미국식생활양식이 휩쓴 남조선은 참다운 민족문학예술을 지향해온 박영호선생에게 있어서 진정한 내 조국이 아니였다.

내 나라, 내 민족을 위한 참된 문학예술을 창조하려는 박영호선생의 꿈은 1946년 12월 그가 북으로 들어온 다음부터 실현되기 시작하였다.

북으로 들어온 후 박영호선생은 《산아래마을》, 《번지없는 부락》 등 많은 극작품을 창작하였고 1953년 3월 전사할 때까지 인민군종군작가로서 많은 작품을 써서 군대와 인민들을 전쟁승리에로 고무추동하는데 적극 기여하였다.

《그리운 강남》, 《작별》과 같이 사람들속에 널리 알려진 계몽기가요들을 많이 작곡한 안기영선생도 공화국의 품에 안긴 후 평양음악대학(당시)에서 교원으로 활동한 오랜 음악가이다.

 

안기영(1900. 1. 9-1980. 8. 2) 작곡가, 성악가, 음악교육가

주체40(1951)년부터 평양음악대학(당시)에서 교편을 잡고 많은 성악가수들을 키워냈으며 수십편의 가요, 동요, 기악곡들을 창작. 《발성기본련습곡집》, 《성악창법련습곡집》 등을 만들어 교육에 도입.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 및 상무위원, 아동음악분과위원회 위원으로 다년간 활약.

 

해방전 일제의 악정밑에서 련이은 《금곡》처분으로 가슴터져오는 울분을 참으며 눈물겨운 창작생활을 하던 안기영선생은 8. 15해방직후 남조선에서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담은 《금수강산》, 《어깨바람》 등을 작곡하였다. 그리고 음악활동을 본격적으로 벌려나가기 위하여 음악동맹조직에도 적극 나섰다.

그러나 안기영선생이 받아안았던 기쁨과 희망은 순간적인것이였다. 일제를 대신하여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남조선땅에는 또다시 식민지통치의 암흑이 드리워졌던것이다.

바로 이러한 정치풍토에서 1947년 려운형선생이 피살되였다는 비보에 접한 안기영선생은 그에 대한 추도곡을 작곡하고 지휘하여 장례식에서 합창곡이 울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것으로 하여 미《군정》과 남조선당국자들로부터 일체 창작과 음악활동을 금지당하였다.

그의 참된 음악활동은 공화국의 품에 안겨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은정속에서 활짝 꽃펴나게 되였다. 평양음악대학(당시)에서 교편을 잡은 안기영선생은 수많은 성악가수들을 키워냈으며 이 기간 수십편의 가요, 동요, 기악곡도 창작하였다. 또한 《발성기본련습곡집》, 《성악창법련습곡집》, 《시창훈련곡집》을 만들어 교육사업에 도입하였고 《성악에서의 변성에 대하여》를 비롯한 많은 음악론문들을 집필하여 발표하였다.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 및 상무위원, 아동음악분과위원회 위원으로도 활약하면서 후대교육과 창작생활에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오던 안기영선생은 1980년 8월에 세상을 떠났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세상을 떠난지도 오랜 이들에 대하여 추억하시면서 그들의 창작활동에 대해 후대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고 하신 말씀에는 민족앞에 남긴 그들의 예술적공적을 계몽기가요와 더불어 길이 빛내여주시려는 다심하신 사랑과 웅심깊은 은정이 깃들어있는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이날 추억해주신 재능있는 시인이였고 저명한 작가였던 조령출선생도 박영호, 안기영선생들과 마찬가지로 남조선에서 북으로 들어온 계몽기가요창작가였다.

 

조령출(1913. 11. 10-1993. 5. 8) 극작가, 시인

주체37(1948)년 8월 공화국의 품에 안긴 후 국립예술극장과 조선작가동맹 작가, 주체45(1956)년부터 국립영화문학창작사 주필, 국립민족예술극장 총장, 교육문화성 부상, 주체52(1963)~주체71(1982)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그후 조선문학창작사 작가로 활동. 《조령출시선집》(1957년), 《조령출희곡집》(1961년) 등 작품집 있음. 《김일성상》계관인(1982년).

 

1933년 첫 작품인 《서울노래》의 가사가 《동아일보》 현상모집에서 1등으로 당선되면서부터 문단에 알려진 조령출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재능있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진주라 천리길》, 《서귀포 칠십리》, 《락화류수》, 《꼴망태목동》, 《집없는 천사》, 《울며 헤진 부산항》 등 우리 겨레가 널리 부르던 많은 가사들을 써낸 그는 재능은 있어도 불우한 운명의 문인이였다.

일제는 그가 나라잃은 비통함과 울분을 토로하여 쓴 《서울노래》를 《불온사상》이 있다는것을 리유로 《금곡령》을 내리고 레코드판을 모조리 압수하여 깨여버렸으며 나중에는 요시찰인으로 지목하고 여러차례 경찰에 구속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하던 그에게 있어서 백두산에서 울리는 항일전의 총소리는 앞날의 희망을 안겨주는 등대였다.

그는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가슴벅찬 이야기들을 현지에 가서 직접 보고 듣기 위하여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방으로 려행을 가기도 하였다. 그때 그는 가는 곳마다에서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조직령도하시는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수많이 듣고 그이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정을 간직하게 되였다.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을 조국해방의 은인으로 흠모하는 마음을 깊이 간직한 조령출선생은 해방이 되자 서울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조직령도하신 수령님을 형상한 장막희곡 《혁명군》(《독립군》)을 창작하여 공연함으로써 서울시민들속에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흠모의 정이 더욱 차넘치게 하였다. 하지만 장막희곡 《혁명군》은 얼마 공연을 해보지 못한채 미제와 그 주구들의 가혹한 탄압으로 막을 내리게 되였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진정한 예술을 창작하기 위해서도, 인간의 참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도 오래전부터 흠모하여오던 김일성장군님이 계시는 북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을 굳힌 그는 1948년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오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참된 예술을 창작하려는 조령출선생의 마음속소원을 헤아려 그가 애국의 길에서 자기의 희망과 재능을 활짝 꽃피우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주체38(1949)년 12월 어느날 조령출선생이 창작한 가극 《꽃신》을 보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비롯한 창조성원들을 만나주시고 작품이 아주 좋다고 하시면서 동무들이 많이 노력했기때문에 성과가 많았다고, 수고했다고 거듭 치하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앞으로 우리의 가극을 이런 방향으로 민족적향취가 풍기도록 발전시키는것이 좋겠다는 말씀도 주시였다.

그처럼 바쁘신 속에서도 귀중한 시간을 내시여 가극을 보아주시고 과분한 치하를 주시였으며 가극예술이 나아갈 방향까지 환히 밝혀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령출선생이 나라와 인민을 위한 작가가 되도록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그 따뜻한 손길이 있었기에 조령출선생은 조국해방전쟁시기 《조국보위의 노래》, 《압록강 2천리》, 《얼룩소야 어서 가자》 등을 창작하여 군대와 인민을 조국수호의 성전에로 힘있게 불러일으켰고 전후복구건설과 사회주의건설을 위한 벅찬 투쟁이 벌어지고있던 시기에는 《조국산천에 해 둥실 떠온다》, 《모란봉》, 《해당화》와 같은 노래들과 민족가극 《금강산팔선녀》, 음악무용극 《밝은 태양아래》 등 많은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하여 인민들을 부강한 조국건설에로 힘있게 추동하는데 크게 공헌할수 있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믿음속에 자기의 재능을 활짝 꽃피워나가는 조령출선생이 자기의 창작생활에서 다시한번 전성기를 맞이하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주체57(1968)년 6월초 조령출선생을 만나시여 가극예술에 대한 말씀을 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가극혁명이 벌어지던 영광의 나날에 그를 자주 만나주시고 혁명가극창조에서 나서는 리론실천적문제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밝혀주시였다. 그리고 그의 재능을 귀중히 여기시여 혁명가극 《한 자위단원의 운명》, 《밀림아 이야기하라》, 《금강산의 노래》, 《밝은 태양아래에서》 등 여러 가극대본과 노래창작을 맡겨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극진한 관심속에서 그이의 지도를 받으며 작품을 창작해온 조령출선생은 참으로 행복한 작가였다.

재능있는 시인인 그를 사랑하고 아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가 지은 노래들이 어제와 오늘만이 아니라 먼 후날에도 불리워질수 있도록 뜨거운 은정을 안겨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가 오래전에 창작한 음악무용극 《밝은 태양아래》를 주제로 혁명가극 《밝은 태양아래에서》를 만들데 대하여 가르쳐주시면서 《가극 <밝은 태양아래에서>를 창작할 때 <만경대의 노래>를 반드시 넣어야 하겠습니다. 음악무용극 <밝은 태양아래>에 나오는 노래들가운데서 <만경대의 노래>가 제일 인상에 남습니다.》라고 은정깊은 말씀도 주시였다.

《만경대의 노래》로 말하면 조령출선생이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 50돐이 되던 주체51(1962)년에 창작한 노래로서 그후 음악무용극 《밝은 태양아래》의 주제가로 되였었다. 조령출선생이 창작한 음악무용극을 주제로 혁명가극을 만들데 대하여 가르쳐주시면서 《만경대의 노래》를 반드시 넣도록 하신 바로 여기에는 그가 창작한 노래가 먼 후날에도 계속 불리워질것을 바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다심한 사랑이 깃들어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조령출선생의 창작사업을 극진히 보살펴주시고도 주체71(1982)년 4월에는 그에게 《김일성상》을 수여하도록 최대의 영광을 안겨주시였고 그 이듬해에는 몸소 은정어린 생일 70돐상을 보내주시였다.

이렇듯 언제나 로작가를 내세워주시고 보살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대한 믿음의 품, 의리에 넘치는 사랑의 품이 있었기에 조령출선생은 8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왕성한 창작적의욕에 넘쳐 민족가극 《춘향전》, 《심청전》, 노래 《어머니 우리 당이 바란다면》등 여러 작품들을 련이어 창작할수 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사랑과 믿음을 주시며 손잡아 이끌어주시던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조령출동무의 사망에 대한 부고를 《로동신문》을 비롯한 중앙급신문에 다 내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그는 저명한 작가이므로 부고를 잘 내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시며 몹시 애석해하시였다.

그러시고도 장군님께서는 그의 령전에 위대한 수령님과 자신의 명의로 화환도 보내도록 해주시고 《조령출동무의 장례를 최대로 잘해주어야 하겠습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재능있는 작가로서 그가 조국과 민족의 륭성번영을 위한 길에서 세운 공적을 높이 평가하시여 그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크나큰 은정도 베풀어주시였다.

그후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으시고 여러 기회에 그의 창작활동과 재능에 대하여 높이 평가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4(1995)년 6월 그에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자신께서 5대혁명가극을 만들 때 조령출선생을 비롯한 몇명의 작가들이 기본축이 되여 가극대본들을 썼다고 하시며 그의 재능과 공적에 대하여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이처럼 계몽기가요를 우리 민족의 귀중한 음악유산으로 빛내여주시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위대한 사랑의 품이 있어 계몽기가요창작가들은 계몽기가요와 더불어 민족음악사에 자기의 뚜렷한 자욱을 남길수 있었으며 그들이 남긴 노래들은 앞으로도 후세에 길이 전해지며 널리 불리워질것이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辽ICP备15008236号-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