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은 비록 오지 못했어도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은 간고하고도 험난하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속에 자신의 운명도 있다는 애국의 리상과 열정을 안고 수많은 사람들이 빨찌산투쟁에 나섰으며 준엄한 싸움마당에서 더운 피를 쏟으며 청춘의 생을 마쳤다. 그러한 사람들중에 위대한 수령님을 따르는 길에 통일이 있고 민족의 살길이 있다는 신념으로 적들과 사생결단하여 싸우다 감옥의 교수대에서, 이름모를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열혈의 통일애국투사들이 있었다. 조국은 죽어서 시신마저 돌아오지 못한 자기의 자랑스런 아들딸들을 한품에 안아 혁명가로, 통일애국렬사로 내세워 그들의 업적을 조국청사에 영원히 아로새겨주었으며 민족과 더불어 영생의 삶을 누리도록 애국렬사릉에 돌사진을 쪼아박은 비석을 세워 안치하였다. 그들가운데는 공화국정권수립을 위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에서 부부대의원으로 선거되여 만사람의 축복을 받았던 제주도태생의 통일애국렬사들인 강규찬, 고진히선생들도 있다. 척박한 땅에서 보리농사도 하고 바다에서 미역도 따면서 근근히 살아가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난 그들은 소학교문앞에도 가보지 못하였다. 특유의 정서가 어디서나 물씬물씬 풍기는 정든 제주도땅이였지만 일제식민지통치는 그들에게 살래야 살수 없는 운명의 모진 세파를 들씌웠다. 살길을 찾아 산지사방으로 흩어져가는 사람들의 비참한 정상은 제주도에서도 련일 빚어졌다. 그 물결에 실려 강규찬선생도 16살의 어린 나이에 살길을 찾아 현해탄을 건너갔었다.
날품팔이신세가 되여 떠돌아다니던 그는 천대받고 억압받는 로동자들의 권리와 리익을 지키기 위해 로동운동에 나서게 되였다. 그 과정에 그는 10여차례나 일제경찰에 검거되였으며 나중에는 추방령을 받고 다시 제주도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였다. 나라잃은 망국노의 신세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사무치게 체험한 강규찬선생이였기에 해방이 되자 외세가 없는 내 나라, 내 강토에 로동자, 농민이 주인된 그런 세상을 세우기 위하여 한몸 바칠것을 결심하고 제주도에 인민위원회를 내오고 보위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 벌려나갔다. 특히 북조선에서 실시되고있는 민주개혁들에 대한 소식에서 자신의 한생을 무엇을 위해 바쳐야 하는가를 스스로 깨달은 강규찬선생은 어느날 안해인 고진히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남조선에도 김일성장군님의 정치가 펼쳐져야 하오. 외세가 그어놓은 38°선을 밀어던지고 장군님의 정치가 온 조선땅에 펼쳐지는것이 조국의 통일이 아니겠소. 우리 통일의 그날을 위해 한생을 욕되지 않게 삽시다.》 이것은 력사가 그들의 가슴에 새겨주고 생활이 가르쳐준 신념이였으며 그들의 한생의 목표였다. 강규찬, 고진히선생들은 자신들의 신념대로 미제가 조작한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을 반대배격하며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제주도인민들의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후 그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에서 더 큰 보람을 찾기 위해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왔을 때 그들에게 안겨진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영광과 행복이였다. 그들부부가 공화국의 력사에서 처음으로 진행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에서 대의원으로 선거된것이다. 이뿐이 아니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1차회의에 참가한 그들부부를 회의장휴계실에서 몸소 만나주시고 그들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시며 제주도에서 잘 싸운 부부대의원이 장하다고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 강규찬선생을 당중앙위원회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도록 해주시였으며 고진히선생을 인민정권기관의 일군으로 내세워주시였다. 또한 고진히선생이 공부를 하지 못하였다는것을 헤아리시고 그를 중앙고급지도간부학교(인민경제대학의 전신)에서 배우도록 해주시였으며 그들부부가 제주도에 두고온 자식들때문에 마음쓰는것을 아시고는 고진히선생을 제주도에 보내여 아이들을 데려오도록 해주시였다. 강규찬, 고진히선생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의 한길을 끝까지 걸어가도록 따뜻이 보살펴주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의 사랑과 은정은 각별하시였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장군님께서 강규찬, 고진히동무들이 제주도에서 잘 싸우던 사람들인데 생활을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늘 말씀하신다고 하시면서 그들의 생활을 구석구석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고진히선생이 제주도에서 데려올 때 몹시 앓던 둘째아들의 병이 다 나았다는것을 아시고는 몸을 추세워주자고 하시면서 인삼과 닭을 보내주시였으며 그들의 일가가 새집들이를 하게 되였을 때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마련해주신 가장집물과 새 이부자리, 쌀과 부식물까지 보내주시였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고진히선생이 애국의 길에서 더 큰일을 하기 바라시여 그에게 조선인민혁명군 녀대원들의 투쟁이야기도 들려주시고 그와 함께 만경대혁명학원에도 나가시였으며 새 조국건설을 위한 사업에 평양시녀성들을 조직동원해야 할 때에는 그에게 책임적인 과업도 맡겨주군 하시였다. 절세의 위인들의 이렇듯 세심하고도 따뜻한 사랑의 손길아래 강직한 혁명가로 성장한 강규찬, 고진히선생들은 나라와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서 헌신할수 있었고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강규찬선생은 어느 한 유격투쟁의 전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며 고진히선생은 감옥에서 신념을 지켜 희생되였다. 준엄하고도 복잡한 전쟁의 나날 이름없는 산중에서, 온통 감옥천지로 화한 남조선의 어느 한 외진 감옥에서 벌어진 이 일은 수십년이 지나도록 세월의 이끼속에 묻혀버려 누구도 알수 없었다. 1990년대초에 와서야 비전향장기수들의 활동에 의해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조국통일위업에 한생을 아낌없이 바친 그들의 투쟁공로를 높이 평가하시여 그들을 공화국영웅으로 내세워주시였으며 조국통일상수상자대렬에 세워주시였다. 그리고 애국렬사릉에 강규찬, 고진히라는 이름을 쪼아박은 묘비를 세워 그들의 고귀한 삶과 넋이 영원히 살아빛나도록 하여주시였다. 이렇듯 애국의 길에서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고 목숨바쳐 지조를 지킨 렬사들을 영생의 언덕에 높이 세워주는 어머니조국의 품이 있어 통일애국렬사 방준표선생의 삶도 빛나고있다.
원래 경상남도 충무태생인 그는 서울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토목로동도 해보고 부산에서 교원생활도 한바 있었다. 이러한 그는 일본과 국내에서 일제를 반대하는 지하투쟁에도 참가하였었다. 해방을 맞아 제 나라, 제 민족을 위해 힘껏 일해보려던 그의 희망과 포부는 일제를 대신하여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의 식민지통치로 하여 물거품처럼 사라지고말았다. 방준표선생은 민족의 위대한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의 령도밑에 조국과 민족을 위해 보람있는 일을 하려는 결심을 품고 통일애국투쟁에 나서게 되였다. 이 나날에 그는 《전평》에서도 활동하였고 남조선로동당 경상남도위원회에서 로동부장으로도 사업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방준표선생의 애국애족의 량심을 굳게 믿으시고 그를 평양으로 불러주시였다. 그리고 남조선에서 통일애국투쟁을 하다가 북반부로 들어온 그를 나라의 훌륭한 일군으로, 유능한 혁명가로 키우기 위하여 해방직후 나라사정이 그처럼 어려웠던 시기에 다른 나라에 류학까지 보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방준표선생이 류학을 떠나기 전에 여러차례에 걸쳐 만나주시고 그가 민족적량심과 애국심을 가지고 해방전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제의 《동조동근》설에 맞장구를 칠 때 반일투쟁에 나섰으며 8. 15후에는 민족적량심과 지조를 지켜 미제와 그 주구들을 반대하는 통일애국투쟁에 떨쳐나서 굴함없이 싸운데 대하여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그가 참된 애국자로서 일생 지침으로 삼아야 할 가르치심도 주시였으며 옷과 모자, 신발, 학용품에 이르기까지 온갖 조건을 최상의 수준에서 마련해주시였다. 이렇게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속에 류학을 떠났던 그는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나자 공부를 중단하고 조국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인민군대에 의하여 남반부의 대부분 지역이 해방되였을 때 조선로동당 전라북도위원장으로 사업하면서 그는 현지에 지체없이 당조직과 인민정권기관들을 내오고 토지개혁을 비롯한 제반 민주개혁을 실시할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하여 있는 힘과 지혜를 다 바쳤다. 또한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당일군들과 도안의 인민들을 불러일으켜 유격대오를 조직하고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려나갔다. 가렬한 전화의 나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방준표선생을 비롯한 적구에서 싸우는 전사들의 활동정형에 대하여 구체적인 보고를 받으시고 그들을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적구에서 고생하며 투쟁한 동무들을 아껴야 한다고 하시며 일군들에게 아무래도 방준표동무를 여기로 데려와야 하겠다고, 그 동무는 적들속에서 활동하기도 곤난할것이고 또 전쟁초기부터 남조선에 나가 수고한 동무인데 데려다가 휴식도 시키고 공부도 더시켜야 하겠다고 뜨겁게 이르시였다. 그러던 그가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희생된 후의 어느날에는 전라북도에서 온 동무들을 만나니 방준표동무의 생각이 난다고, 참 아까운 동무를 잃었다고 하시며 못내 가슴아파하시였다. 그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 방준표선생에 대한 기억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희미해져갔다. 하지만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에게 뜨거운 사랑과 은정을 안겨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오래전에 통일애국의 길에서 희생된 그를 잊지 않으시고 공화국에는 그의 대를 이어줄 단 한명의 후대도 일가친척도 없는것을 못내 가슴아프게 여기시면서 그가 통일애국투쟁사에 남기고간 위훈을 높이 평가하시여 애국렬사릉이 건립되였을 때에는 거기에 그의 묘지도 쓰고 묘비도 세우게 하시였다. 그리고 조국통일상이 제정되였을 때에는 그를 첫 수상자들의 대렬에 세워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처럼 방준표선생에게 거듭되는 은정을 안겨주시고도 부귀와 영달을 버리고 오직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을 위하여 한생을 서슴없이 바친 그의 불굴의 투쟁정신과 위훈을 높이 평가하시여 그에게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하도록 크나큰 믿음을 또다시 안겨주시였다. 어찌 이들뿐이랴. 리현상, 김삼룡, 박영발, 김달삼선생을 비롯하여 유명무명의 통일애국렬사들이 공화국영웅, 조국통일상수상자로 여기 영생의 언덕에 서있다. 애국렬사릉! 정녕 그것은 어머니조국이 이 나라 통일애국투사들의 신념과 지조, 절개 그리고 공적을 금자탑으로 고여올린 영생의 높은 언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