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리마운동선구자
주체73(1984)년 1월 어느날 력사의 땅 강선은 기쁨으로 하여 설레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천리마제강련합기업소 직장장인 로력영웅 진응원선생에게 60돐생일상을 보내주신것이였다. 만사람의 축복속에 사랑의 생일상을 마주한 그의 눈가에서는 뜨거운것이 흘러내리였다. 받아안은 믿음과 사랑만도 큰것인데 이렇게 60돐생일상까지 보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은정에 자신을 걷잡을수 없었던것이다.
그의 눈앞에는 남조선에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서부터 갖은 고역에 끌려다니면서 채찍밑에서 울던 자기가 공화국의 품에 안겨 온 나라가 다 아는 천리마작업반운동의 선구자로, 로력영웅으로 자라나던 나날들이 어제일이런듯 되새겨졌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진응원선생을 처음으로 만나주신것은 주체45(1956)년 12월말이였다. 당시 공화국은 3개년인민경제계획을 2년 8개월동안에 완수하고 인민경제발전 5개년(1957-1961)계획수행에 들어서고있었다. 5개년계획은 그 목표와 내용에 있어서 3개년계획에 비할바없이 방대하고 어려운 과업이였다. 그런데 자금도 자재도 로력도 모자랐고 아직 인민들의 생활도 펴이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도움받을데도 없었다. 게다가 국내외정세도 매우 복잡하였다. 미제를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은 1956년 10월 제2차 중동전쟁을 일으켰으며 동유럽의 일부 나라들에서 저들의 앞잡이들을 내세워 반정부폭동을 일으켰다. 이와 함께 미제와 리승만괴뢰도당은 남조선강점 미제침략군과 남조선괴뢰군을 대대적으로 증강하면서 군사시설을 급속히 신설확장하였다. 지어 그해 12월말까지 전쟁준비를 끝낼데 대한 명령을 내리고 미태평양함대까지 조선반도가까이에 끌어들이며 전쟁준비를 서둘렀다. 조성된 안팎의 정세는 참으로 엄혹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때 전체 인민들을 굳게 믿으시고 그들을 묶어세워 안팎의 원쑤들에게 결정적반격을 가하면서 주되는 힘을 사회주의경제건설에 돌리실 확고한 결심을 안으시고 주체45(1956)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에서 우리가 인민대중의 혁명적열의를 옳게 조직동원한다면 높이 세운 인민경제계획을 얼마든지 수행할수 있다고 하시면서 사회주의경제건설에서 새로운 앙양을 일으킬데 대한 과업을 제시하시였다. 그러시고 나라의 긴장한 강재문제를 풀기 위하여 몸소 강선제강소(당시)의 로동계급을 찾아주시였다. 전쟁으로 혹심하게 파괴되였던 공장을 아직 완전히 복구하지 못한 때여서 변변한 회의장 하나 없었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선의 로동계급과 허물없이 자리를 같이하시고 《내부예비를 최대한으로 동원하여 더 많은 강재를 생산하자》라는 력사적인 연설을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연설에서 당중앙위원회 12월전원회의 기본정신과 5개년계획의 방대한 과업 그리고 복잡한 국내외정세와 다음해 인민경제계획수행에서 제기되는 애로와 난관에 대하여 알려주시고 오늘 우리 형편이 어렵다고 하여 우리가 맥을 놓고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에 가로놓인 엄중한 난관앞에서 주저앉아서는 안된다, 우리 당은 혁명의 주력부대인 로동계급을 믿고있으며 동무들에게 기대를 걸고있다, 우리는 모든 난관을 이겨내고 사회주의건설에서 일대 앙양을 일으켜야 한다, 우리는 지난날 어렵게 살아왔고 지금도 부족한것이 많은 조건에서 남이 한발자국을 걸으면 열발자국을 걷고 남이 열발자국을 뛰면 백발자국을 뛰여야 한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당중앙위원회 12월전원회의에서는 강선의 로동계급에게 다음해에 강재를 계획보다 1만t 더 생산할것을 호소하였는데 동무들이 다음해에 강재를 1만t만 더 생산하면 나라가 허리를 펼수 있다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그자리에 당시 작업반장으로 참가하였던 진응원선생은 어려운 시기 자기들을 그처럼 내세워주시는 이런 믿음에 추호라도, 순간이라도 어김이 있다면 어찌 의리를 아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하는 생각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하기에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강철직장의 내부예비탐구정형과 증산결의에 대해 물으시였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로의 중보수시간을 절반으로 줄이고 용해시간을 훨씬 단축하는것과 같은 새로운 기술과 앞선 작업방법들을 적극 받아들여 그이께서 바라시는 높은 생산목표를 기어이 점령할 불같은 결의를 다지였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무는 고향이 남이구만. 부모님들은 다 계시오?》라고 물으시였다. 뜻밖의 물으심에 그는 고향은 서울이고 70이 가까운 늙은 어머니 한분이 계신다고 말씀드리였다.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시며 그의 말을 듣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생활에서 애로는 없는가, 공부는 어떻게 하고있는가를 하나하나 물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동무들에 대한 당의 기대는 매우 크오. 동무들은 아주 귀중한 사람들이요. 앞으로 일도 잘하고 공부도 더 잘하시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그 말씀이 자기가 의용군에 입대할 때 멀리까지 따라나와 좋은 세상을 만났으니 내 걱정은 말고 부디 잘 싸우라고 당부하던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느껴져 목이 메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믿음과 사랑에 높은 강철증산으로 보답할 일념을 안고 그의 작업반은 난관을 물리치고 5개년계획의 첫 출강에서 용해시간을 종전보다 훨씬 더 단축하는 기록을 창조하였다. 그의 작업반뿐아니라 제강소의 로동계급은 그후 집단적혁신의 불길을 더욱 세차게 지펴올려 5개년계획의 첫해에 6만t이상은 생산할수 없다던 분괴압연기에서 그 2배인 12만t의 강편을 밀어내는 기적을 창조하였다. 그리하여 혁명적대고조의 불길이 강선에서 타오르게 되였으며 강선은 천리마대진군운동의 첫 봉화를 추켜든 력사의 고장으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 천리마운동을 더욱 심화시킬 원대한 구상을 안으시고 주체48(1959)년 2월 어느날 강선제강소를 찾아오시여 이곳 로동계급의 심장속에 천리마작업반운동의 불씨를 심어주시였다. 위대한 발기는 훌륭한 결실을 맺는 법이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구호밑에 이 운동의 첫 봉화를 높이 든 진응원선생과 그의 작업반은 온갖 낡은 잔재들을 타파하면서 다같이 혁신하고 다같이 전진하였다. 그들의 모범을 따라 직장안의 모든 작업반들도 다음 교대를 위하여, 로전체의 생산을 위하여 애쓰는 작업반으로 자라나게 되였으며 그 나날에 생산량도 부쩍 오르게 되였다. 이 운동의 불길은 삽시에 제강소를 벗어나 온 나라로 타번져 기적과 혁신이 나래치게 하였다. 이때부터 세상사람들은 조선을 《천리마조선》이라고 부르며 경탄을 금치 못해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그후에도 진응원선생을 여러차례 만나주시면서 그가 어머니조국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서 계속 혁신을 이룩해나가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강선의 로동계급이 5개년계획을 2년 반 남짓한 기간에 앞당겨 끝내고 새로운 과업수행에 들어섰던 주체49(1960)년 10월 어느날이였다. 강선땅을 또다시 찾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천리마작업반운동의 선구자인 그가 보고싶으시여 강철직장에 이르시자 먼저 그부터 찾으시였다. 그가 자진하여 뒤떨어진 작업반에 옮겨앉았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더없이 기뻐하시며 달려와 안기는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그러시고는 뒤떨어진 로에 가서 일한다는데 힘들지 않는가고 하시며 그의 어깨를 쓰다듬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뒤떨어진 로에서 일이 잘 안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도 허물없이 물어주시고나서 천리마작업반운동은 사람과의 사업이 기본입니다, 그러므로 계속 사람과의 사업을 잘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거듭 강조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현장을 떠나시기에 앞서 그의 손을 또다시 잡아주시며 7개년계획수행에서도 혁신의 봉화를 들라고 고무해주시였다. 이때뿐이 아니였다. 주체58(1969)년 가을 어느날이였다. 사회주의공업국가의 령마루에 올라서기 위한 마지막돌격전을 앞두고있던 시기에 새로운 천리마속도창조에 대한 구상을 무르익히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진군의 앞장에 또다시 강선의 로동계급을 내세워주기 위하여 제강소의 몇몇 일군들을 불러주시였다. 이때에도 진응원선생을 잊지 않고 불러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가 시작되자 누구보다 먼저 그를 연단에 내세우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올리는 강철생산정형에 대한 보고를 주의깊게 들으시며 수첩에 무엇인가 적기도 하시고 물어도 보시였다. 그러시고는 사회주의공업화의 완성을 위한 마지막돌격전을 벌려야 할 1970년의 강철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있어보지 못한 새로운 천리마속도를 창조하는 행군을 하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새로운 천리마속도를 기어이 창조하여 전국에 혁신의 불바람을 다시한번 일으키는것으로 위대한 수령님의 믿음에 보답할 결의에 충만된 그와 강선의 로동계급은 강철생산에서 2배의 속도를 창조하여 훨씬 높아진 계획을 빛나게 완수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못내 기뻐하시면서 그들이 창조한 속도를 새로운 천리마속도, 강선속도라고 이름지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처럼 그가 조국과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서 자기의 힘과 지혜를 다바치도록 이끌어주시면서 그를 온 나라가 다 알도록 높이 내세워주시였다. 주체57(1968)년 5월 평양에서 열리였던 제2차 전국천리마작업반운동선구자대회장에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석단에 앉아있던 그를 불러주시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를 미더웁게 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가리키시며 전체 대회참가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이 동무가 진응원동무입니다. 내가 천리마운동을 발기하자 이 동무가 첫 천리마작업반운동의 봉화를 든 동무입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런 믿음과 사랑, 현명한 령도가 있어 그는 천리마작업반운동선구자의 영예를 더욱 빛내일수 있었고 그 나날에 2중천리마작업반장으로, 직장장으로, 《김일성훈장》수훈자로, 로력영웅으로 자라날수 있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부강조국건설구상을 강철증산으로 높이 받들어온 그가 《70일전투》와 《100일전투》를 비롯하여 경제건설전투마다에서 계속 앞장에서 나가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또한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진행하는 국가적인 행사들에도 여러차례 불러주시고 귀중한 선물들도 안겨주시면서 아껴주고 보살펴주시였다. 그뿐이 아니다. 조국과 민족의 번영을 위한 길에서 자기의 삶을 빛내인 전사들을 언제나 잊지 않으시고 영원한 사랑과 믿음을 베풀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를 20세기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로동계급편)의 원형의 한사람으로까지 내세워주시였다. 그리고 그를 애국렬사릉에 안장하도록 크나큰 사랑을 돌려주시였다. 진응원, 그는 지난날 길가의 조약돌처럼 천대받던 사람이였다. 그러나 영원한 믿음과 사랑을 안겨주시는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대한 품, 은혜로운 조국의 품에 안겼기에 그는 오늘도 천리마작업반운동선구자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는것이다. 세상사람들에게 조선사람의 정신력의 위력을 뚜렷이 보여준 천리마운동선구자들속에는 《평양속도》창조의 나날 처녀미장공으로 이름떨친 리명원선생도 있다.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여나 뼈도 채 굳지 않았던 12살 어린 나이때부터 서울의 어느 한 방직공장에서 갖은 고역에 시달리다나니 그는 삶의 보람이 어디에 있고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이에 대하여 절감하게 된것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의용군으로 인민군대에 입대한 때부터였다. 그는 전쟁이 끝나자 자기와 같이 못사는 사람들을 위해주는 밝은 세상에서 마음껏 고운 천을 짜보려던 자기의 소원을 풀기 위해 평양방직공장으로 향하였었다. 평양에 도착하여 거리에 나선 그는 선뜻 걸음을 옮길수가 없었다. 너무도 무참히 파괴된 평양의 모습이 발걸음을 내짚을수 없게 하였던것이다. 아픈 마음으로 거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앞에는 《모든것을 전후인민경제복구건설에로!》라고 씌여진 프랑카드가 힘차게 펄럭이고있었다. (그렇다. 지금 당장 급한것은 건설이다. 내가 서야 할 초소는 방직공장이 아니라 바로 건설장이다.) 이렇게 되여 리명원선생은 평양방직공장으로가 아니라 건설장으로 발길을 돌리게 되였다. 그가 찾아온 사연을 들은 건설사업소의 일군들은 건설장이 나어린 처녀들이 일할만 한 곳이 못된다고 하면서 보다 쉬운 곳으로 갈것을 진심으로 권고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하루빨리 새 집들을 일떠세우는 보람찬 일에 청춘을 바치는것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사람다운 삶을 누리게 해준 공화국의 고마움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그의 결심을 누구도 꺾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여 그는 건설장에서 자기의 새 삶을 시작하게 되였다. 자진하여 미장공이 된 그는 이악하게 노력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당당한 미장공이 되였고 새로운 미장방법을 도입하여 매일 계획을 200∼300%로 넘쳐수행했다. 처녀미장공인 그의 이름은 곧 사람들속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그는 2만세대의 살림집건설로 온 평양시가 들끓고 14분에 1세대 조립이라는 세인을 경탄시키는 기적이 창조되던 《평양속도》창조의 나날 미장작업을 한세대 한공수로 해결할 대담한 목표를 세우고 선진작업방법들을 도입하여 자기의 결의를 훌륭히 실천해나갔다. 그의 발기는 급속히 평양시내 모든 건설장들에 일반화되였다. 이 나날에 그는 미장작업반 반장으로 자라났고 그의 작업반은 2중천리마작업반칭호를 쟁취하게 되였다. 그는 평양대극장을 일떠세울 때에도 여러차례나 몸소 현지에 나오시여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짓는 대규모의 조선식지붕건물을 훌륭히 건설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높은 뜻을 받들고 기계미장방법을 받아들여 남들이 몇달이 걸려도 힘들다고 하던 미장작업을 20일만에 끝내는 기적을 또다시 창조할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리명원선생이 녀성의 몸으로 나라와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보람찬 투쟁에서 빛나는 위훈을 세울 때마다 그를 높이 평가해주시면서 크나큰 은정을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9(1960)년 8월 전국천리마작업반운동선구자대회에서 그를 몸소 만나주시고 이 동무가 건설에서 보수주의, 소극성을 마슨 동무라고, 이런 동무가 애국자이라고 하시며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리명원선생은 그후 자신을 천리마운동선구자로 높이 내세워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을 언제나 가슴에 간직하고 수십년세월 조선혁명박물관, 만수대의사당, 인민문화궁전, 평양체육관, 평양대극장을 비롯한 기념비적건축물들을 일떠세우는데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쳤으며 그 길에서 로력영웅으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자라날수 있었다. 이처럼 참된 삶을 안겨주고 행복을 마련해주시는 절세의 위인들의 품에 안겼기에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의용군으로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어머니조국의 품에 안긴 수많은 사람들이 조국과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서 영웅으로, 공로자로 자라나 자기의 한생을 참답게 빛내일수 있은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