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마를줄 모르는 행복의 샘
□ 최상의 표창-《보배과학자》
흔히 사람들은 조상의 무덤이 있고 종달새가 우짖는 나서자란 나라나 고향을 조국이라고 일러왔다. 그러나 조국은 단순히 나서자란 나라나 고향이 아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조국은 단순히 나서자란 나라나 고향이 아니라 사람들의 참된 삶이 있고 후손만대의 행복이 담보되는 곳이라야 한다.》 우리는 이 명언의 참뜻을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의용군으로 공화국의 품에 안겨 삶과 행복을 꽃피운 사람들의 운명을 통하여서도 깊이 새겨안을수 있다. 그들에게도 나서자란 고향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운명을 지켜주고 꽃피워줄 진정한 삶의 보금자리는 태를 묻은 남조선이 아니라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서 정치를 펴가시는 공화국이라는 스스로의 자각과 결심에서 그 품을 지키기 위한 정의의 싸움길에 떨쳐나섰던것이고 은혜로운 조국의 품에서 자신들의 삶과 행복을 참답게 꽃피울수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가운데는 의학생물학연구소 실장이였던 유숙근선생도 있다.
1920년대 초엽 서울에서 태여난 그는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갖은 고생과 수난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되였다. 가난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망만은 버릴수 없었던 그는 1942년 경성녀자의학전문학교(해방후 서울녀자의과대학)를 졸업하고 이곳에서 교편을 잡았다. 나라의 뒤떨어진 의학미생물학을 추켜세워 사람들의 생명을 수없이 앗아가는 전염병균을 모조리 박멸할 소중한 꿈을 안고있은 그였지만 해방전 그에게 차례진것은 조국이 없는 식민지지식인의 설음뿐이였다. 해방후에도 그는 남녘의 어두운 하늘아래에서 학문연구에 대한 자기의 푸른 꿈을 돈에 의하여 무참히 유린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렇듯 자신의 생활체험을 통하여 조국의 귀중함을 잘 알고있은 그였기에 인민군대에 의하여 서울이 해방되자 가정부인의 몸으로 용약 의용군에 입대하였고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시작되자 집으로가 아니라 공화국의 품을 찾아 주저없이 북행길에 올랐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런 유숙근선생을 굳게 믿으시고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야수적으로 감행된 미제의 세균전만행으로부터 인민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투쟁에서 그가 애국의 정열을 다 바쳐나가도록 하시였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미제는 저들의 참패를 만회하기 위하여 전선과 후방에서 세균전을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대표적으로 1952년 1월말부터 3월말까지의 두달사이에만도 공화국북반부 400개소이상의 지점에 700회이상에 걸쳐 세균탄과 여러가지 살인용미생물을 함유한 물체들을 투하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시의 어려운 형편이였지만 미제의 세균무기와의 투쟁, 전염병예방을 위한 투쟁과 같은 긴절한 문제들에 대한 연구조건을 보장해주는데 모든것을 아끼지 않으시면서 유숙근선생을 비롯한 의학자들에게 전염병예방약들을 만들어낼데 대한 과업을 맡겨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을 받아안은 그는 짧은 기간에 효능높은 전염병예방약을 만들어내여 미제의 세균전만행을 짓부셔버리기 위한 투쟁에서 특출한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그후 수십여년간의 과학연구사업을 통하여 발진티브스, 장티브스, 일본뇌염, 천연두, 미친개병, 홍역예방주사약 등 인민들의 생명을 보호할수 있는 수많은 전염병예방약들을 만들어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그는 수많은 과학자후비들을 키워냈으며 《방역전서》, 《방역편람》, 《미생물검사법》을 비롯한 수많은 저서들도 집필하였다. 그가 이룩해놓은 이 모든것은 믿음을 주고 희망과 재능을 꽃피워준 어머니조국의 고마움에 대한 보답이였고 의학자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였다. 그렇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께서 한생에 품어온 소원은 우리 인민들모두가 앓지 않고 오래오래 살면서 락을 보도록 하는것이였다고, 온갖 전염병으로부터 우리 인민을 해방시키는것은 하나의 혁명이라고 생각하고 이날이때까지 애써왔는데 녀성의학자가 자신의 소원을 풀어주었다고 못내 기뻐하시면서 그를 《진짜애국자》, 《우리 나라의 보배과학자》라고 불러주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처럼 아끼고 내세워주시는 유숙근선생이 《보배과학자》의 영예를 계속 빛내여나가도록 사업과 생활을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가 더 좋은 예방약들을 만들어내도록 훌륭한 실험설비들을 보내주시였으며 국가적인 행사들에 그를 여러차례 불러주시고 기념사진도 찍으시였다. 그리고 생일 70돐을 맞는 그에게 은정어린 생일상도 보내주시였다. 이런 사랑과 믿음속에 그는 로력영웅으로, 인민과학자, 후보원사, 교수, 박사로, 나라의 정사를 론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자라날수 있었다. 공화국의 품에 안겨 만복을 받아안은 사람들가운데는 《김일성상》계관인이며 인민과학자, 후보원사, 교수인 김용호선생도 있다.
빈곤한 가정에서 태여난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뛰여난 두뇌와 향학열을 지니고있었다. 기어이 이름난 학자가 되여 조선민족의 존엄과 긍지를 내외에 과시하려는 청운의 뜻을 품고 그는 고학으로 공부하였으며 20대의 젊은 나이에 일본의 일류급교수들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 이름난 물리화학자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일본인으로 귀화하면 부귀영화를 누릴수도 있었지만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조국이 해방되자 그는 민족을 위해 자기의 지식을 다 바칠 일념을 안고 서울의 어느 한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미제의 이른바 《국립서울대학교안》을 반대하는 투쟁에 나섰다고 하여 대학교단에서 쫓겨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는 인간을 짓밟고 재능을 천시하는 어지러운 세상을 끝없이 저주하였지만 그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품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기에 그는 애국과 매국, 정의와 불의사이의 치렬한 투쟁이 벌어졌던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일제의 대학을 나오고 일제를 위해 지식을 바친 자기를 공화국정권이 용납하지 않을것이라는 주변의 온갖 회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의용군으로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군의부문에서 일하였다. 그는 조국해방전쟁시기 야수적으로 감행된 미제의 세균탄과 독가스탄공격으로부터 인민군군인들과 인민들을 구원하는것을 조국앞에 지닌 자기의 의무로, 량심으로 받아들이고 이 사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1(1952)년 4월 어느날 김용호선생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는 민족성이 강한 물리화학자라고, 일본놈들이 그가 일본에서 《전기화학편람》과 같은 유명한 과학저서를 집필하는데 참가하여 두각을 나타내자 일본사람으로 귀화시키자고 별의별 수작을 다했다고, 그러나 그는 일본놈들의 강요와 회유를 단호히 거절했다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내가 정준택동무로부터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해방직후에 데려오자고 서울에 사람을 보냈는데 놈들의 책동으로 데려오지 못했다고, 그런데 그가 자진하여 의용군에 입대하여 우리를 따라온것은 정말 장한 일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 김용호선생의 민족적량심과 재능을 귀중히 여기시여 그를 전화의 불길속에서 소환하여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원, 연구사로 사업하도록 하시는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조선의 지식인의 한사람으로서 량심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왔을뿐인데 자기를 한품에 안아 믿어주고 내세워주시는 그 은정이 너무도 고마와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지식과 기술로써 보답하리라 굳게 결심하였다. 김용호선생은 여러 화학공업을 창설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을뿐아니라 여러개의 교수과목을 새로 개척하고 《무기화학》, 《화학의 기초》 등 수십여종에 수만여페지의 새로운 교재들과 과학리론도서들, 참고서들을 집필하였고 여러명의 박사를 키워냄으로써 민족간부양성사업에서도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그는 70고령에 이른 나이에도 왕성한 정열로 사색과 탐구의 낮과 밤을 이어가며 조국과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서 제기되는 수많은 과학기술적문제들을 훌륭히 해결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가 재능을 계속 꽃피워나가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면서 그의 사업과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주체44(1955)년 몸소 대학을 찾으시여 그에게 교육사업의 앞길도 환히 밝혀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65(1976)년 11월 어느날 여러 대학의 학장들과 오랜 지식인들앞에서 민족간부양성사업에서 나서는 가르치심을 주시는 자리에도 그를 불러주시였으며 과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인민과학자의 칭호도 안겨주시였다. 지식인들을 영원한 동행자로 굳게 믿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를 공로자로 높이 내세워주시였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귀중한 선물도 안겨주시고 중요한 국가적인 대회들에도 몸소 불러주시였다. 절세의 위인의 품, 공화국의 품속에서 참된 삶을 누린 사람들속에는 《김일성상》계관인이며 로력영웅, 교수, 박사, 인민의사 신성우선생도 있다. 1955년 2월 어느날 배낭을 걸머지고 함흥의학대학 정문으로 들어서는 한 젊은 제대군관이 있었다. 그가 바로 남조선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녀자의과대학병원 조수로 일하였을뿐아니라 서울해방과 함께 조선인민군 군의로 복무하다가 오늘은 이 대학의 교원으로 배치되여오는 신성우선생이였다. 그가 메고온 배낭에는 수백여명의 환자들의 명단과 그들의 상처를 촬영한 필림이 들어있었다. 그가 이것들을 자신의 배낭에 소중히 간직하게 된데는 깊은 사연이 있었다. 미제의 야수적폭격과 포격으로 이 땅의 바위마저 불타버리던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의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선과 후방을 돌보시는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몸소 어느 한 인민군후방병원을 찾아주시였다. 입원실에 들리시여 부상을 당하고 침대에 누워있으니 그이를 뵈올 면목이 없다고 말씀드리는 한 전사의 어깨를 다정히 쓸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무는 아주 용감하게 잘 싸웠다고, 동무들은 모두가 나라의 참된 아들딸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의료일군들에게 부상당한 동무들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수 없다고 하시면서 동무들은 환자의 어머니가 되여야 한다고, 이 동무들은 얼마나 좋은 동무들인가고, 당이 귀중히 여기는 동무들이니 의사들은 이 동무들을 더 잘 치료해주어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 말씀은 지난날 황금만능의 남조선사회에서 의학자의 량심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쳐왔던 신성우선생의 가슴속에 고상한 인간애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을 안아주고 의학자로서의 삶을 빛내이도록 손잡아 이끌어주는 공화국의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하여 환자들의 친형제가 되고 친어머니가 되여 치료전투를 긴장하게 벌려나갔으며 완쾌되지 못한 몸으로 병원문을 나서는 전우들을 보면서 이렇게 결심하였다. (내 앞으로 기어이 정형외과학을 연구하여 그들을 다시 찾아서 꼭 고쳐주리라!) 이렇게 되여 그의 배낭에는 환자들의 명단과 고향주소, 그들의 상처를 촬영한 필림들이 들어있게 되였다. 그의 이러한 결심을 알게 된 대학의 교원들은 그를 적극 도와나섰다. 당시 의학과학이 발전했다고 자랑하던 나라들에서는 그가 연구하려고 하는 방법이 이미 불가능한것으로 공인되여있었다. 그러나 그는 남들이 못했다고 하여 우리도 못한다는 법은 없으며 전우들을 한시바삐 완쾌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연구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결사의 각오를 가지고 이악하게 달라붙어 끝내 자기의 연구를 성공시켰다. 그리고 전쟁시기 완쾌되지 못한 몸으로 퇴원하였던 전우들뿐아니라 심한 화상으로 현대의학이 죽음을 선고했던 방하수소년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대지를 자유로이 활보할수 있게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연구사업과 환자치료에서 성과를 거둘 때마다 높이 평가해주시면서 더 큰 성과를 거두도록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시였다. 특히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위급한 정황에 놓인 환자들이 생겼을 때에는 신성우동무네는 능히 고칠수 있을것이라고 하시며 그가 있는 병원에 보내여 치료하도록 해주시는 더없는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그 믿음, 그 사랑이 있어 신성우선생은 가치있는 수많은 과학연구론문들을 내놓을수 있었으며 처음으로 어깨뼈까지 포함하여 완전히 끊어진 환자의 팔을 다시 이어붙이는데 성공한것을 비롯하여 외상정형외과질병의 치료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크게 기여할수 있었다. 또한 《외과각론》, 《정형외과학》, 《외과전서》 등 수많은 의학부문의 책들을 집필하고 많은 의사, 전문가들과 수십명의 학위학직소유자들을 양성하였다. 노력과 정열만으로 과학자가 성공하는것이 아니라 보살펴주고 내세워주는 진정한 삶의 품, 참된 조국의 품에 안길 때 과학자로서의 삶과 영예도 빛내일수 있다는것을 자기의 한생을 통해 보여준 조주경선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경상북도 영양의 산골마을에서 태여나 2살때 아버지를 잃은 그는 오직 아들 하나만을 위해 정성을 바쳐온 어머니의 눈물겨운 모성애가 있어 공부할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공부시키기 위해 군소재지로, 대구로, 서울로 여러번 이사짐을 싸며 별의별 고생을 다하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날 책방에 들렸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조주경선생은 혈액은행앞에 쓰러져있는 어머니를 발견하게 되였다. 급히 어머니를 업고 집으로 달려온 그는 꽉 부르쥔 손을 가까스로 펴며 그안에 있던 몇푼 안되는 돈을 내놓는 어머니의 정상이 너무나도 처절하게 안겨와 그만 눈물을 쏟았다. 《어머니, 난 공부를 그만두겠어요.》 《아서라, 무슨 나약한 소릴… 네가 사고싶어 하는 책값이 될거다.》 어머니가 말하는 책이란 그 당시 수학을 지망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욕심나 하는 어느 한 전공도서였다. 아들의 학비를 대기 위해 낮에는 떡장사와 삯빨래를 하고 저녁에는 물지게장사를 하는 어머니가 그 책을 마련하기 위해 피까지 팔았던것이다. 조주경선생은 돈이 있어야 공부도 할수 있고 꿈도 성취할수 있는 무정한 그 세상을 통탄하며 온밤 잠들수 없었다. 하기에 그는 인민군대에 의해 서울이 해방되자 지난날 착취와 억압만을 강요당하던 자기와 같은 사람들에게 삶의 참된 행복을 안겨준 공화국정권을 지키기 위한 정의의 싸움길에 용약 떨쳐나섰고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주저없이 공화국의 품을 찾아왔다. 공화국에서는 준엄한 전시환경이였지만 한팔을 잃은 전상자인 그를 김일성종합대학에 불러주었고 모든 학습조건과 생활조건을 무상으로 보장해주었다. 장학금도 다른 학생들보다 더 많이 안겨주었으며 어머니가 피까지 팔아서도 마련해주지 못했던 책을 비롯하여 귀중한 참고서들을 가슴가득 마련해주었다. 그는 어머니조국의 고마움을 가슴뜨겁게 느끼며 지식의 탑을 더 높이 쌓아갔다. 그리하여 그는 1966년 8월 어느 한 국제수학자대회에서 당시 세계적으로 미개척분야였던 《확률적분방정식》에 관한 론문을 발표해 수학계의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킨것을 비롯하여 가치있는 과학연구성과들을 이룩할수 있었다. 또한 《수학사전》, 《확률적분방정식》, 《확률조종론》, 《확률과정론》, 《실변수함수론》 등 60여종의 교과서, 참고서들을 집필하고 80여건의 연구론문을 발표하여 자기를 키워준 어머니조국의 륭성번영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나날에 그는 인민과학자, 원사, 교수, 박사로 자라났고 수십명의 학위학직소유자들을 키워냈다. 하기에 2000년 8월 력사적인 6. 15공동선언이 마련해준 길을 따라 조주경선생을 만난 남쪽에 사는 그의 어머니는 친어머니도 이루어주지 못했던 자식의 희망을 꽃피워준 공화국의 은덕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6. 25전쟁때 네가 죽은줄로만 알고 극락세계에서 함께 살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하루와 같이 빌었었다. 그런데 네가 북의 최고과학자가 되여 이 에미앞에 나타나다니, 정말 꿈만 같구나. 이제는 부처님에게가 아니라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주신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의 안녕을 빌겠다.》 그의 이 말은 고생속에 흘러온 자신의 한생에 대한 총화였고 아들을 과학자로 키워주고 과학자로서의 참된 삶과 행복을 꽃피워주신 절세의 위인과 은혜로운 조국에 드리는 감사의 인사였다. 유숙근, 김용호, 신성우, 조주경선생들만이 아니라 조선적십자종합병원 내과고문이였던 리정복선생, 교수, 박사, 공훈의사였던 리종두선생을 비롯하여 의용군으로 공화국의 품에 안겨 행복의 절정에 오른 사람들의 한생은 자신들의 운명을 책임지고 따뜻이 보살펴주는 진정한 조국의 품에서만 희망과 재능의 나래를 활짝 펴고 성공한 삶을 누릴수 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