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삶을 꽃피워준 은혜로운 품         2) 희망과 재능을 꽃피워준 다심한 손길

 

 

□ 애국적기업가로 명성떨치며

 

공화국의 품에 안겨 나라와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 자기의 재능과 열정을 다 바친 사람들속에는 어제날의 개인기업가, 민족자본가들도 있다.

해방된 조국땅우에 펼쳐진 현실은 로동자, 농민, 지식인뿐아니라 애국적인 개인기업가, 상인, 민족자본가들도 자주독립국가건설에 적극 떨쳐나설것을 요구하고있었다.

그런데 일부 편협한 사람들은 지난날 기업활동을 하던 그들을 무턱대고 배척하였다.

간판이나 복장을 보고 사람의 사상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진보적인 사상이란 다른것이 아니라 인민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 조국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의 량심도 결국은 이런 사상속에서 표현된다.

일찌기 백두산에서 항일전의 총성을 높이 울리시던 나날에 재산정도가 서로 다른 각계각층을 반일투쟁대오에 세워주시였던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해방직후 개인기업가, 상인들에 대한 독창적인 정책을 내놓으시였다.

개인기업가, 상인들은 우리 나라가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발전의 길을 거치지 못한것으로 하여 그 세력이 매우 미약하였다. 또한 그들은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의하여 발전의 길을 억제당함으로써 불철저하게나마 일정한 반제적혁명성을 가지였다. 그리하여 개인기업가, 상인들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에 리해관계를 가지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로부터 해방직후 개인기업가, 상인들이 새 조국건설에서 한몫할수 있도록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주체35(1946)년 2월초 어느날이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 개인기업가가 경영하는 자그마한 연필공장을 몸소 찾아주시고 그 기업가를 만나주시였다. 그가 바로 해방전부터 여러가지 개인기업을 운영해오던 송대관선생이였다.

  

송대관(1912. 8. 29-1994. 1. 11) 경제지도일군

해방후 우리 나라에서 첫 연필 《삼천리》를 생산. 조국해방전쟁시기 신발, 주사기, 전등알 등을 생산보장, 수백만원의 전선원호금 헌납. 주체48(1959)년부터 평양공업품 생산협동조합 관리위원장, 주체73(1984)년부터 고문관리위원장, 주체75(1986)년부터 생의 마지막까지 이 협동조합의 관리위원장으로 다시 사업. 오래동안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동안 연필문제때문에 은근히 걱정을 하였는데 동무들이 연필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와서 이렇게 찾아왔다고 하시면서 참으로 훌륭한 일을 시작했다고 못내 기뻐하시였다.

공장을 돌아보시면서 로동자들의 작업모습을 지켜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을 숨은 애국자들이라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뜻밖에도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옵고 숨은 애국자라는 과분한 치하의 말씀을 받아안은 송대관선생은 돈밖에 모르고 살아온 부끄러운 지난날이 돌이켜졌다.

일찌기 몇그루의 사과나무를 밑천으로 하여 기업을 시작한 그는 이에 열중하면서 점차 기업가로서의 명성도 얻게 되였다. 그러나 일제의 악랄한 민족자본말살정책과 략탈책동에 의하여 그의 기업은 날로 령락되여갔으며 이로 하여 그는 절망상태에 빠지게 되였다.

이러하던 그에게 있어서 조국해방은 커다란 환희와 기쁨을 안겨주었다. 이제는 제 나라, 제땅에서 마음껏 기업을 하게 되였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공산당이 온갖 자본을 청산하고 네것내것이 없이 《공유》한다는 무서운 소문이 돌더니 《혁명가》로 둔갑한 나쁜 놈들이 자산가들을 위협, 공갈하고 지어 체포하기 시작한것이였다.

그는 남으로 나가서 기업활동을 해볼 생각으로 두척의 기계배에 세멘트와 황금태(물엿), 감추어두었던 금덩이를 싣고 서울로 나갔었다. 하지만 그는 미《군정청》에서 《적산》물자들을 빼돌렸다는 죄명을 날조하여 체포령을 내리는 바람에 가지고갔던 물건들은 다 압수당하고 숨어지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북에서도 《도망》쳐온 그였기에 갈 곳이 더는 없었다.

바로 이러한 때 그는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력사적인 개선연설을 방송으로 청취하면서, 특히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적극 이바지해야 한다는 그이의 민족단합의 호소에서 큰 감동을 받고 결연히 북행길에 올랐다.

이렇게 평양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자그마한 연필공장을 차려놓고 생산된 연필에 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삼천리》라는 자호를 찍었다.

그런데 그 소박한 《삼천리》연필이 그의 한생을 빛나게 기록하게 될것이라는것을 아직 그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연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어느날 이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님께 보고드리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매우 기뻐하시며 래일 아침 당장 그 연필공장에 나가보겠다고 말씀하시자 어머님께서는 자신이 먼저 공장에 나가보았으면 한다고 말씀드리였다.

그리하여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어리신 백두산장군과 함께 송대관선생이 운영하는 작은 연필공장을 찾아주시였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로동자는 몇이고 원료와 자재는 어떻게 구하며 하루 연필생산량은 얼마인가 등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시고나서 여러분들이 더 수고를 많이 하여 좋은 연필을 많이 생산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송대관선생의 공장을 찾아주신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아직 부족점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조선사람이 제힘으로 처음 만든 연필인데 이만하면 성공한것이라고 그들을 고무해주시였다. 그리고 공장을 떠나실 때에는 송대관선생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으시고 속담에도 있는것처럼 첫술에 배부르겠는가, 이제 나라에서 큰 건물도 해결해주고 수송문제도 풀어주며 채벌림도 떼주겠으니 좋은 연필을 많이 만들며 다른 기업도 마음껏 해보라고 다시금 고무해주시였다.

《삼천리》표 연필 한자루가 이처럼 아름찬 기쁨과 영광, 끝없는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는것을 그가 어찌 상상이나 할수 있었으랴.

그로부터 얼마후인 주체35(1946)년 2월 20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력사적인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제1차회의를 소집하시고 회의 첫 의정으로 연필생산문제를 상정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 조국건설을 위하여 문맹퇴치사업과 후대교육사업이 지체할수 없는 절박한 문제로 제기되는데 여기서 걸린 문제의 하나가 연필문제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자체의 힘과 자체의 기술, 자체의 원료에 의거하여 연필을 생산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근로자들과 어린이들에게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북돋아주기 위하여서도 필요한것입니다.》

계속하여 수령님께서는 지금 당장 국영연필공장을 건설할수 없는 조건에서 민간기업체들에서 연필을 생산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국가에서는 연필을 생산하는 민간기업체들에 적극적인 방조를 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 대책까지 몸소 취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듯 연필생산문제를 사람들의 가슴속에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북돋아주기 위한 하나의 애국사업으로 보시고 송대관선생이 애국의 마음을 안고 마음껏 기업활동을 하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주체35(1946)년 3월 중순 그를 또다시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요즘도 연필을 많이 생산하는가고 물으시였다.

연필을 많이 생산한다는 대답을 들으신 수령님께서는 기뻐하시며 동무는 정말 인민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있다고, 새 조선건설에서 동무가 만드는 연필이 얼마나 큰일을 하는지 아는가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일본놈들은 우리 인민들이 글도 배울수 없게 하고 기술도 배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나라의 주인이 된 우리 인민들에게 하루빨리 우리 글을 배워주고 기술도 배워주려면 연필을 많이 생산하여야 합니다. 나는 동무가 이런것을 깨닫고 돈벌이가 잘되는 다른 기업도 마다하고 연필공장을 운영하는것이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그와 헤여지실 때에는 또다시 나는 동무와 같이 민족적량심이 있고 애국열의가 높은 상공업자들이 앞으로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기 바란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공장을 위하여 채벌림지도 떼주시였으며 흑연을 보장해줄 대책까지 세워주시였다. 또한 건국위업에 이바지하고있는 기업가에게 어떻게 낡은 자동차를 보내주겠는가고 하시면서 새 화물자동차까지 몸소 구해보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송대관선생만이 아니라 더 많은 개인기업가들이 새 조국건설에 적극 떨쳐나서도록 하기 위하여 주체35(1946)년 4월 평양시안의 기업가, 상인, 수공업자들과의 협의회를 마련하시고 우리는 기업가와 상인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며 중소기업을 장려할것이라고 하시면서 우리 손잡고 기업을 해도 나라를 위한 기업을 하고 한가지 물품을 만들어도 인민들을 위한 물품을 만들자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옳바른 정책에 의하여 개인상공업자들의 기업활동은 날로 활발해졌다.

돈을 떠난 기업가란 있을수 없다. 송대관선생이 처음 연필공장을 세웠던것도 돈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찾아주시고 믿어주시며 내세워주시는 위대한 태양의 품이 있었기에 그는 돈만 아는 기업가로부터 민족적량심을 지닌 애국적기업가로 다시 태여날수 있었다. 또한 준엄한 전쟁시기에는 전쟁의 승리를 위한 길에 자기의 애국지성을 다 바칠수 있었다.

그는 조국해방전쟁시기 전선에 필요한 각종 주사기, 주사약병들은 물론 수백만개의 전구알들을 생산보장하였으며 폭격속을 뚫고 수시로 식량을 사들여 로동자들과 전재민들을 지원하였다. 또한 거액의 자금을 들여 식량과 피복 등을 전선에 지원하고도 수백만원에 달하는 많은 돈을 전선원호금으로 헌납하였다.

그의 이런 애국적소행을 두고 그 누구보다 기뻐하신분은 바로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주체42(1953)년 8월 어느날 그를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쟁기간에 고생이 많았겠다고 하시며 이렇게 계속하시였다.

《전쟁의 어려운 조건에서도 송대관동무가 수백만원이 넘는 금액을 전선원호금으로 헌납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참으로 장한 일을 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시의 매우 곤난한 조건에서 어떻게 해마다 그처럼 많은 금액의 전선원호금을 헌납할수 있었는가고 물으시였다.

그는 준엄한 전쟁의 나날 언제나 마음속깊이 새겨온 자신의 굳은 신념을 이렇게 말씀올렸다.

《장군님! 저는 조국이 있고서야 개인의 재산도 빛이 나는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망국노가 된 다음에야 억만금이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의 이 대답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못내 만족해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아주 장한 생각입니다. 송대관동무와 같은 애국적인 기업가들과 온 나라 인민들이 물심량면으로 전선을 적극 원호하였기때문에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할수 있었습니다.》

순간 그는 온 세계를 얻은 심정이였다. 억만금으로도 살수 없는 위대한 사랑과 믿음의 세계를 애국의 마음바쳐 얻었다는 생각에 눈굽이 쩌릿이 젖어들었다.

그는 운명의 갈림길에서 자신이 선택한 그 길이 얼마나 정당했는가를 절감하였다. 그리고 가장 엄혹한 시련의 나날에 자신이 찾은 고귀한 삶의 진리를 만리창공에 금은보화를 뿌려 새겨놓고싶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그가 조국과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서 계속 일을 잘해나가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8(1959)년 10월에 진행된 전국지방산업 및 생산협동조합열성자대회에서 토론하는 그를 높이 평가하시면서 나는 송대관동무를 잘 알고있으며 그후 그가 발휘한 애국적소행도 잘 알고있기때문에 그를 믿고 공산주의사회까지 데리고가겠다고 하였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뿐이 아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58(1969)년 3월 어느날에는 인민들속에서 돋보기를 비롯한 안경에 대한 수요가 높다는것을 아시고 좋은 안경을 대대적으로 생산할 과업을 그가 일하는 광학유리생산협동조합에 맡기도록 하시면서 어제날 개인상공업의 좁은 울타리안에서 값없이 지내던 그 동무들이 사회주의건설에서 귀중한 몫을 맡아안고 보람있게 살도록 해야 한다고 하시였다. 또한 어느해 봄에는 모내는기계 운전공들에게 보호안경을 공급할데 대하여 교시하시면서 보호안경생산과제도 그에게 맡기도록 하시였다. 그러시고도 그가 60살이 되였을 때에는 해방후부터 많은 일을 하였는데 앞으로도 좋은 일을 많이 할 동무라고 하시면서 귀중한 선물도 보내주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가 한생을 보람있게 빛내여나가도록 사랑과 믿음으로 보살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언제인가 어느 한 중요한 건축물의 내부장식에 필요한 유리구슬생산문제가 제기되였을 때에는 수령님의 품에 안겨 애국적인 기업가로 자라난 송대관선생의 깨끗하고 대바른 마음을 굳게 믿으시고 그에게 그 과업을 맡겨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후 벽화미술에 쓰일 색유리와 쪽무이를 만들 과업도 주시고 주체사상탑 봉화의 투명강질유리생산과업도 맡겨주시며 그로 하여금 언제나 긍지에 넘쳐 보람있게 살도록 이끌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주체75(1986)년 5월 그가 이제는 나이가 많아 고문이 되였다는것을 아시고는 늙기는 하였지만 관리위원장사업을 아직 몇해동안은 잘할수 있다고 하시면서 종전의 직무대로 일하도록 두터운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이렇듯 크나큰 믿음과 사랑이 있어 송대관선생은 사회주의애국자로 삶을 빛내일수 있었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위원으로서 조국통일을 위한 사업에 헌신할수 있었다.

조국과 민족의 번영을 위한 길에서 운명을 보람있게 빛내이도록 이끌어주고 보살펴주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 자기의 희망을 꽃피운 사람들속에는 지난날의 민족자본가였던 리종만선생도 있다.

 

리종만(1885. 1. 14-1977. 1. 17) 사회활동가

주체38(1949)년 6월부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및 상무위원으로 사업. 주체43(1954)년 초봄 북부지구의 여러 지역을 현지답사하여 나라의 자원개발사업에 기여. 그후 광업부 고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사업. 조국통일상수상자.

 

리종만선생은 일찍부터 조선을 강점한 일제에 대한 치솟는 증오심과 함께 기업활동에서도 일제에게 뒤져서는 안된다는 높은 애국심을 지니고 기업활동을 벌려왔었다.

그는 일제가 1912년 《토지조사령》을 공포한 직후에는 《농림주식회사》라는것을 세웠고 그후에는 《대동광업주식회사》를 만들어 광석채굴에 몸을 적시기도 하였다. 3. 1운동에도 참가하였던 그는 《대동공업전문학교》를 비롯한 몇개의 교육기관도 경영하였으며 출판사도 차려놓고 여러가지 사업을 벌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족산업의 발전을 가로막아나서는 일제의 집요한 방해책동으로 하여 그는 모든것을 다 포기하고 나중에는 깊은 산속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해방이 되자 그는 남조선의 《조선산업건설협의회》 위원장으로 사업하면서 마음껏 기업활동을 해보리라 결심하였다. 하지만 민족산업의 발전을 가로막는 미제의 책동은 일제식민지통치때와 조금도 다를바 없었다.

인천에 상륙하는 길로 제철소를 비롯한 공장과 경제시설들을 파괴하는것으로부터 남조선에 대한 식민지략탈을 시작한 미제는 학생들을 쫓아내고 대학을 저들의 병영으로 만들었다. 더우기 미제와 그 주구들의 더러운 정치적내막을 폭로하였다 하여 그가 운영하던 《독립신보》는 강제페간당하고말았다.

(아! 언제면 내 평생의 소원인 조국의 부강을 위한 민족산업의 발전과 지하자원탐색에 나의 땀을 바쳐볼것인가…)

이러한 생각으로 울분에 찬 나날을 보내고있던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미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리종만선생의 애국의 마음을 헤아려보시고 그를 평양으로 불러주시였던것이다.

자기가 한생의 리념으로 간직해온 민족적량심과 애국적지조를 지키며 보람속에서 사느냐 아니면 미제와 그 주구들에게 굴종하여 재산과 사회적지위를 보존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있던 그는 일생 기업활동을 벌려온 자기와 같은 사람도 한품에 안아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도량과 넓으신 포옹력에 이끌려 평양으로 향하였다.

주체38(1949)년 6월 25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양에 도착한 리종만선생을 몸소 만나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조선산업계에서 명망이 있는 리종만선생을 오늘 이렇게 만나니 대단히 반갑다고, 선생이 년로한 몸으로 38°선을 넘어 먼길을 오시느라고 수고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수령님께서는 나는 오늘 선생을 처음 만나지만 허헌선생을 통하여 이미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하시며 그가 지난날 많은 재산을 가진 기업가였지만 일제와 담을 쌓고 민족적량심과 애국적지조를 지켜온데 대하여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 책임적인 임무를 맡아줄데 대하여서와 민족경제를 부흥발전시키는 사업에 적극 기여할데 대한 믿음을 표시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선생이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훌륭한 일을 많이 해줄것을 기대합니다.》

이 순간은 평양으로 향하면서도 자본가이며 일제식민지통치밑에서 큰 기업을 운영하였던 자기를 위대한 수령님께서 어떻게 대해주실것인가고 갈마들던 마음속 걱정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순간이였다. 또한 민족산업을 부흥시켜 민족의 존엄을 떨치자고 하여도 진정한 제 나라가 없고 애국의 그 마음을 지켜주는 품이 없어 방황하던 리종만선생이 그 마음을 헤아려주고 꽃피워주는 위대한 품에 삶의 닻을 내리는 력사적인 순간이였다.

이렇게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긴 리종만선생은 그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위원 및 상무위원으로서 나라와 민족의 부강번영과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사업에 자기의 모든 정열을 다 바쳤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자기의 희망대로 귀중한 지하자원들을 찾아내여 조국과 민족의 부강번영에 이바지할수 있도록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주체43(1954)년 2월 어느날이였다.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났을 때 리종만선생을 외국에서 안전하게 생활하도록 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귀국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가까이 불러주시였다.

그를 반갑게 맞아주신 수령님께서는 선생이 몸성히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래도 외국땅이 자기 집만 하겠는가고 하시며 몸소 자리도 권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건강과 생활에 대하여 세세히 물으시고나서 선생을 급하게 만나자고 한것은 다름이 아니라고, 전후복구건설을 하자니 동이 많이 요구된다고, 동을 1t도 좋고 2t도 좋으니 있는것을 다 파내자는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자기를 굳게 믿고 나라의 중요한 사업을 의논해주시는 절세의 위인을 우러르며 리종만선생은 지난날 북반부의 여러 지대를 돌아다니며 탐사한 내용과 어느 한 곳에 많은 동광석이 매장되여있다는데 대하여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대단히 좋은 자료를 선생이 알려주었다고 하시면서 한 일군을 부르시여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오늘부터 리종만선생을 동무네 고문으로 임명합니다. 앞으로 동무들은 리종만선생을 도와서 일을 잘하여야 하겠습니다. 리종만선생은 해방전에 일제의 박해속에서도 민족적지조를 굽히지 않고 살아온분입니다. 이제는 년세가 많으신데 동무들이 저 선생을 잘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그 일군에게 리종만선생이 아직 외국에서 입고온 옷을 벗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며칠안으로 그에게 나이에 맞는 좋은 양복과 외투를 해드리라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도 그가 생활하는데 아무런 불편도 없도록 여러가지 대책들도 취해주시였다.

이뿐이 아니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자기가 말한 곳에서 동광석을 발견하지 못한것으로 하여 번민속에 나날을 보낼 때에는 재삼 말하지만 내가 믿은것은 리종만선생의 애국심이였고 민족적량심이였다고 하시며 그가 더 많은 지하자원들을 찾아내도록 힘을 주시고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그러시고도 그가 사업에서 성과를 거둘 때에는 리종만선생의 노력이 정말 크다고 하시며 리종만선생은 애국심이 높은분이라고, 우리는 이런분들을 존경하고 내세워주어야 한다고 높은 치하의 말씀도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과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서 자기의 열정을 다 바친 리종만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몹시 애석해하시며 리종만선생은 참 좋은분이였다고, 그는 애국적지조가 매우 높았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돈이냐 조국이냐!

이 물음앞에 송대관, 리종만선생들이 자기들의 한생을 통하여 새겨안은 고귀한 삶의 진리, 조국이 있고서야 개인의 재산도 빛이 나며 나라와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 애국의 마음을 다 바칠 때 억만금으로도 살수 없는 위대한 사랑과 믿음의 세계를 얻게 된다는 진리는 어제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온 겨레의 심장을 뜨겁게 울려주며 그들을 조국통일위업실현을 위한 투쟁에로 힘있게 고무추동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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