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정속에 꽃피운 예술적재능
문학예술분야에서 새로운 전성기가 펼쳐지고있던 1970년대의 어느날이였다. 그날 평양대극장에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을 모시고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공연이 성황리에 진행되였다. 항일무장투쟁시기 피흘리며 싸운 혁명동지들을 생각하시는듯 깊은 감회에 잠기시여 공연을 보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작품을 잘 만들었다고 평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구장》역을 하는 동무가 노래를 아주 잘한다고, 체격도 좋고 연기도 《구장》같이 하고 특히 민요조의 노래를 더 잘 부른다고 치하해주시였다. 그 배우가 바로 김의용선생이였다. 해방전 서울의 빈민가에서 자라난 그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무척 사랑하였다. 그러나 집안의 기둥이였던 아버지가 중병으로 앓아눕자 그는 어린 나이에 삯짐운반과 남의 집 심부름군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철이 들면서부터는 철공로동을 하여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였다. 그는 고된 로동에 시달리면서도 축음기에서 울려나오는 노래소리를 들을 때면 나도 저렇게 노래를 부를수 없을가 하는 생각도 가져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실현될수 없는 하나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하였던 그의 생활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것은 그가 조국해방전쟁시기 남조선괴뢰군에 강제징집되였다가 그곳을 탈출하여 조선인민군에 입대한 때부터였다. 그가 안긴 공화국의 품은 진정 어머니의 품이였고 그에게 보람찬 새 삶을 안겨준 자애로운 사랑의 품이였다. 공화국에서는 그의 자그마한 재능의 싹도 귀중히 여겨 성악공부를 하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전문가들을 붙여 음악에 대한 기초지식도 배워주도록 하였고 발성법과 화성법도 체계적으로 배워주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여 지난날 이룰수 없는 꿈으로만 여겨오던 그의 희망은 현실로 꽃피여나 그는 화려한 극장무대에서 어머니조국의 고마움을 마음껏 노래하는 성악가수로 자라날수 있었다. 그러던 주체50(1961)년 5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2. 8비날론공장(당시)의 준공식에 이어 공장준공을 축하하는 연회에 몸소 참석하시였다. 바로 이 연회에 여러 배우들과 함께 김의용선생도 참가하여 위대한 수령님앞에서 축하공연을 하게 되였다. 자기의 희망과 재능을 꽃피워주신 절세의 위인을 모시고 그이앞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하니 그의 가슴은 한없는 감격으로 설레였다. 이날 그의 노래를 세번씩이나 들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축하공연이 끝났을 때에는 여러 배우들과 함께 그를 가까이 불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모두들 수고했다고, 노래를 아주 잘 불렀다고 하시면서 독창부르던 동무가 어데 있는가고 물으시였다. 그가 울렁이는 마음을 다잡으며 다가와 정중히 인사를 드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무는 아주 노래를 잘 불렀소. 모든 사람들이 다 동무의 노래를 듣고 감동하였소.》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의 공연이 비날론공장준공을 더 빛나게 장식해주었다고 하고나시여 김의용선생을 뜨겁게 포옹해주시였다. 이어 수령님께서는 그를 연회탁앞으로 데리고가시여 손수 잔에 술도 따라주시며 어서 같이 축배를 들자고 하시면서 동무는 앞으로 노래를 더 잘 불러야 한다고, 그리고 동무는 무대에서만 혁명가가 될것이 아니라 생활에서도 철저한 혁명가가 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자신의 미숙한 노래를 들어주시고 무대에서뿐아니라 생활에서도 철저한 혁명가가 되라고 하시며 사랑의 축배잔까지 부어주시는 절세의 위인의 사랑과 믿음앞에 그는 어떻게 고마움의 인사를 올려야 할지 알수 없었다. 그때부터 그는 예술창조에 더욱 지혜와 정열을 바쳤다. 성악가로서 음악기량을 높이기 위하여 노력하는 한편 가극창조에서 민족적특성과 기호를 살리는 역형상을 위해 낮과 밤이 따로없이 애를 썼다. 그리하여 위대한 수령님을 모신 공연에 여러차례나 출연하여 수령님으로부터 주인공역을 맡은 배우가 역형상을 잘한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의용선생의 재능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믿음과 사랑속에 더 활짝 꽃펴났다. 주체61(1972)년 3월 어느날이였다. 그는 뜻밖에도 경애하는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이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게 되였다. 그를 반갑게 맞아주시며 사업과 생활에 대하여 그리고 가족들에 대하여서까지 따뜻이 물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동무에게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의 주역을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순간 그는 자기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지방극장의 이름없는 한 평범한 배우를 혁명가극의 주인공으로 내세워주시다니?!…) 그러나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는 참고참았던 마음속의 격정을 끝내 터치고야말았다.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로 말하면 종래의 낡은 가극예술에 종지부를 찍고 시대발전과 인민들의 지향에 맞는 새로운 형식의 가극예술을 창조하실 웅지를 지니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정력적인 령도에 의하여 창작되고있던 혁명가극들중의 하나로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신 항일무장투쟁시기 한 지하공작원의 투쟁내용을 형상한 작품이였다. 그는 과연 자기가 이처럼 중요한 작품의 주인공역형상을 담당해낼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망설이기도 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이런 마음속생각까지 헤아려보시고 그가 주인공의 높은 사상정신세계를 잘 그려낼수 있도록 작품의 주제사상으로부터 역형상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주시고 이끌어주시였다. 그는 자신에게 베풀어주시는 절세의 위인들의 사랑과 믿음의 서사시를 온 세상에 대고 격조높이 노래할 결심을 안고 예술창조사업에 자기의 재능과 열정을 다 쏟아부었다. 그리하여 그는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또다시 높은 치하의 말씀을 받아안을수 있었던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를 위대한 수령님과 세상사람들앞에 높이 내세워주시고도 친어버이심정으로 사업과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주체62(1973)년 3월초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혁명가극 《금강산의 노래》창조사업을 지도해주시던 때였다. 그처럼 바쁘신 가운데서도 몸소 현지에 나오시여 배우들의 생활문제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료해하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김의용선생이 소화기계통이 나쁘다는것을 아시고 안색을 흐리시였다. 그의 병은 지난날 먹고살기 위해 하루 15시간씩 고된 로동을 강요당하던 과정에 얻은 소화기질환이였다. 공화국의 품에 안긴 후 무상치료제의 혜택을 받아 그간 자기의 병에 대해 거의 느끼지 못하고있던 그는 별치않은 문제로 하여 그이께 걱정을 끼쳐드렸다는 생각에 송구스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날 련습중에 있는 노래를 들어보겠다고 하시면서 김의용선생의 이름을 불러주시며 동무가 먼저 한곡 불러보라고 하시였다. 그가 노래를 부르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노래가 괜찮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김의용동무는 확실히 노래를 잘 부릅니다. 이런 동무들이 독창무대에 서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고나시여 그의 노래가 처음보다 몰라보게 수준이 높아졌다고 다시금 치하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그의 병을 빨리 고쳐주어야 하겠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며칠후 유능한 의사를 보내주시여 종합검진을 받게 해주시고 치료대책까지 세워주시였으며 병이 완치된 다음에는 몸을 빨리 회복하라고 귀중한 보약까지 보내주시였다. 사랑의 보약, 이것은 단순한 약재가 아니라 한번 믿음을 준 사람은 그의 재능만이 아니라 건강까지도 책임지고 보살펴주시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사랑의 정화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렇듯 뜨거운 사랑이 있어 그는 한달도 채 안되는 기간에 건강을 완전히 회복할수 있었으며 혁명가극 《금강산의 노래》창조사업에 적극 기여하여 위대한 수령님께 또다시 기쁨을 드릴수 있었다. 이처럼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속에 그는 자기의 재능을 활짝 꽃피울수 있었으며 중앙예술단의 연출가로, 공훈배우로 자라날수 있었다. 이것을 어찌 김의용선생 혼자만이 받아안은 믿음이고 사랑이라 하겠는가. 국립연극단 연출가였던 리단선생도 은혜로운 조국의 품에 안겨 자기의 예술적재능을 활짝 꽃피운 문예인중의 한사람이다. 일찌기 연극에 뜻을 두었던 리단선생은 나라없던 그 세월 일제의 총칼앞에 연극으로 항거도 해보고 무대에서 목이 터지도록 침략자들을 절규도 해보았다. 하지만 차례지는것은 식민지연극인의 뼈아픈 설음뿐이였다. 해방을 맞이했으나 해방만세의 함성이 채 멎기도 전에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에 의하여 새 조선에서 마음껏 연극을 해보려던 그의 꿈은 또다시 짓밟히고말았다. 이러한 때 남녘의 문예인들을 불러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의 해발은 갈길 몰라 방황하고있던 그에게도 비쳐들었다. 하여 20대의 열혈청년이였던 리단선생은 1946년 3월 어머니와 형제들과 작별하고 북조선으로 들어오게 되였다. 그 인생전환의 날에 그는 일편단심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만을 충직하게 받들어갈 맹세를 담아 부모들이 지어준 리정훈이라는 이름을 《붉을 단》자를 써서 리단으로 고쳤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또 한사람의 민족연극건설의 재사를 얻으신것을 못내 기뻐하시며 리단선생이 중앙예술공작단(당시)에서 재능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도록 하여주시였다. 건국의 첫 시기 우리 나라 연극발전에 깊은 관심을 돌려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5(1946)년 8월 새 조선 연극인들이 창조한 혁명전통주제의 연극 《뢰성》을 몸소 보아주시였다. 그후 리단선생이 출연하는 연극 《리순신장군》도 보아주시고 배우들이 연기를 정말 잘한다는 값높은 사랑과 믿음을 안겨주시였으며 연극 《불사조》를 보아주시였을 때에는 리단선생이 주인공역을 정말 잘한다고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그가 연출하고 직접 출연하는 여러편의 연극을 몸소 보아주시며 그의 특색있는 성격연기와 우수한 연출능력에 대하여 과분한 치하도 해주시고 그의 소원을 헤아려 뜻깊은 기념사진도 함께 찍으시였다. 언제인가 위대한 수령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많은 일군들과 문예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큰 국가연회가 진행되였는데 그때 수령님께서는 몸소 리단선생을 자신의 곁으로 부르시여 사랑의 축배까지 부어주시였다. 이때뿐이 아니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를 방문한 어느 한 나라 국가수반과 함께 혁명연극을 보아주시고는 리단선생을 가까이 부르시여 외국의 국가수반에게 소개해주시며 이 동무는 자신과 해방직후부터 같이 일해온 건국일군이라고 분에 넘치는 평가도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안겨주신 크나큰 사랑과 믿음, 뜨거운 고무와 격려는 남조선땅에서 풍각쟁이로 불우한 인생을 마칠번 했던 리단선생을 온 나라가 다 아는 유명한 예술가로 되게 하여준 고마운 스승의 손길이였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을 가까이 모시고 연극혁명의 력사적위업수행의 첫 담당자로 되게 하여준 성장의 비옥한 토양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한없는 사랑과 믿음을 그대로 이어가시며 리단선생을 연극계의 재사로 인생의 최절정에 올려세워주신분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이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예술적재능을 귀중히 여기시며 키워주신 리단선생을 훌륭한 예술인재로 더욱 품을 들여 이끌어주시였다. 주체61(1972)년 11월 우리 나라 연극예술의 실태를 과학적으로 통찰하신데 기초하여 낡은 연극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혁명연극을 창조할데 대한 구상을 펼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 연극의 혁명전통을 불후의 고전적명작 《성황당》으로 보아야 한다는 독창적인 해명을 주시고 이 작품을 무대에 옮기는 사업으로부터 연극혁명을 시작할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러시고는 혁명연극 《성황당》을 창조할데 대한 과업을 국립연극단에 맡겨주시고 주체67(1978)년 2월 귀중히 보관하시였던 혁명연극 《성황당》의 대본을 보내주시며 리단선생을 총연출가로 임명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리단선생을 비롯한 창조집단이 작품의 형상에서 제기되는 문제들로 하여 고심하고있을 때의 어느날 몸소 현지에 나오시여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새롭게 잘 살리는 문제, 극조직과 대사조직을 잘할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작품수정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날 리단선생을 비롯한 일군들에게 《연극배우는 화술이 좋아야 합니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면 가수가 될수 없는것과 마찬가지로 화술이 좋지 못하면 연극배우가 될수 없습니다.》라고 하시며 연극배우는 말을 잘하는 재사가 되여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연극배우의 본질과 특성을 단 한마디의 말씀으로 정립하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비범한 천품앞에서 리단선생은 다시한번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아! 이분이시야말로 예술의 천재이시다! 이 세상 모든 인재들도 다 비기지 못할 위대한 창조의 거장이시다!) 이렇듯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따뜻한 손길이 있어 리단선생은 혁명연극 《성황당》을 훌륭히 창작완성할수 있었고 그후 《성황당》식혁명연극들을 걸작들로 창작완성하기 위한 사업을 책임적으로 해낼수 있었다. 또한 혁명연극뿐아니라 50여편에 달하는 연극과 영화작품의 주요배역, 20여편에 달하는 연극, 혁명연극의 연출, 수백편에 이르는 시와 소설의 랑독으로 예술가로서의 한생을 굵직하게 장식할수 있었다. 절세의 위인의 이처럼 뜨거운 사랑과 믿음이 있어 리단선생은 《김일성훈장》수훈자, 《김일성상》계관인, 인민배우의 값높은 영예를 지닐수 있었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연극인동맹 위원장으로 사업할수 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러한 리단선생을 유능한 예술인재로 사랑하시며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사업과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언제인가 국립연극극장을 찾으시였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격정을 금치 못하며 달려온 리단선생과 다정히 인사를 나누시다가 그의 손을 꼭 잡으신채 한동안 그를 정겹게 바라보시였다. 이윽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제는 백발이 다 되였다고, 흰머리는 공로의 표시로 되니 절대로 물을 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그래야 어디 가나 관록이 있어보인다고 하시며 그의 공로의 표적을 영원히 력사에 남겨주시려는 웅심깊은 사랑으로 뜻깊은 기념사진도 찍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후 일군들에게 유명한 배우인데 리단선생을 잘 돌봐줄데 대하여 간곡히 당부하군 하시였으며 그가 자그마한 가정적애로라도 느낄세라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리단선생이 년로한 관계로 사업과 생활에서 적지 않은 애로를 겪는다는것을 아시고는 그의 출퇴근문제도 해결해주시였으며 그의 사업시간을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몸소 특별히 정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여 그를 위해 《연출고문》이라는 새로운 직제도 내오게 하시고 그의 건강을 전적으로 돌보는 담당의사까지 보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언제인가는 그에게 표창휴가를 주어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돌면서 그 나라들의 연극실태를 살펴보도록 사랑의 조치도 취해주시고 그의 나이를 고려하여 될수록 더운 여름안으로 다녀오도록 해주시였다. 그리고 그가 고령에 심한 중병을 앓고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는 즉시에 강력한 의료진을 동원시켜주시고 여러차례에 걸쳐 값비싼 의약품들과 보약재들을 아낌없이 보내주시였다. 그리고 그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였을 때에는 《몸건강을 바랍니다. 앞으로 시간내여 만나겠습니다.》라는 사랑의 친필까지 보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처럼 아껴주시던 리단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못내 애석해하시며 당보에 그의 부고를 내도록 하시고 그의 령전에 화환을 보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자신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던 예술재사가 곁을 떠난것을 몹시 가슴아파하시며 그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이렇듯 절세의 위인들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속에 지난날 남조선에서 재능은 있어도 그것을 꽃피울수 없었던 김의용, 리단선생들만이 아니라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영화미술가였던 인민예술가 김혜일, 평양미술대학 학부장이며 공훈예술가, 부교수였던 송영백, 평양미술대학 강좌장이였던 김용준,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위원장이였던 리석호 등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예술적재능을 활짝 꽃피울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