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녀시절에 대의원으로, 로력영웅으로
녀성은 부드럽고 아름다우면서도 강직하고 힘있는 사회적존재이다. 녀성이 있음으로 하여 사회와 가정에 웃음꽃이 피여나며 생활의 향기가 넘쳐난다. 그러나 녀성들의 존엄과 권리도 그것을 보장해주는 가장 인민적인 사회제도에서만 실현될수 있다. 오늘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제도에서 사는 선군조선의 녀성들은 자신들의 존엄과 권리를 마음껏 향유하고있으며 정당, 사회단체들과 여러 국가기관, 기업소의 책임일군으로, 각급 주권기관의 대의원, 영웅, 명예칭호, 학위학직소유자들로 자라나 조국과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애국의 한길에서 당당히 몫을 하고있다. 이러한 녀성들가운데는 지난날 남조선에서 갖은 천대와 멸시를 받다가 공화국의 품을 찾아와 자기의 삶을 꽃피운 녀성들이 적지 않다. 서울의 로동자였던 김태선선생도 그러한 녀성들중의 한사람이다. 공화국창건이 선포된 후의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얼마전 뽈스까의 와르샤와에서 진행된 국제로동청년대회에 대표로 참가하였던 여러명의 남녀청년들을 만나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정중히 인사를 올리는 그들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며 따뜻이 안부를 물으시였다. 그러시고는 자신의 건강을 축원하는 녀성대표에게 앓지는 않았는가, 숙소는 어디 잡았는가, 불편한 점은 없는가고 다정하게 물으시였다. 그가 바로 서울에서 온 청년대표 김태선선생이였다. 《장군님, 장군님덕분으로 국제로동청년대회에 대표로 선출되여 갔다왔으니…》 눈굽을 적시며 올리는 그의 대답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무들이 보고싶었다고 하시면서 키가 작고 체소한 그에게 남조선청년대표로서 국제로동청년대회에 참가하고온 기분이 어떤가고 물으시였다. 그는 대회기간 새 조선건설에 떨쳐나선 조선청년들의 불굴의 기개와 름름한 모습에 각국의 대표들이 감탄하면서 조선청년대표들을 언제나 앞자리에 내세워준 사실이며 회의가 끝난 후 제2차 세계대전시기 참변을 겪은 오슈벵찜수용소를 비롯하여 여러곳을 돌아보는 기회에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목청껏 부르던 이야기를 신이 나서 말씀드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서울로동자대표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시다가 와르샤와에 가서 새 조선 청년들의 본때를 잘 보여주었다고, 정말 장하다고 못내 만족해하시였다. 너무도 허물없이 대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르는 김태선선생에게는 온갖 무권리속에 흘러온 지난날의 일들이 어제일이런듯 삼삼히 떠올랐다. 해방전 품팔이로 떠돌이하는 부모들을 따라 경기도와 경상북도, 강원도 등지를 이리저리 헤매이던 김태선선생은 일찍 어머니와 세 동생을 잃었다. 굶어죽지 않기 위해 그의 아버지와 언니, 남동생은 뿔뿔이 헤여지고말았다. 그는 남의 집 아이보개로, 지주집 머슴으로 유년시절을 보내였다. 16살의 나이에 그가 겨우 찾은 일자리는 서울의 어느 한 견직공장 직포공이였다. 일제가 패망하자 그는 로동자조직에 망라되여 일본인공장주를 내쫓고 공장운영에 참가하였으며 투쟁속에서 각성되고 성장하였다. 《해방자》의 탈을 쓰고 남조선에 기여든 미제는 저들의 주구들을 규합하여 로동자들의 투쟁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어느 한 방직공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연약한 처녀의 몸이였지만 미제와 그 주구들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언제나 앞장섰다. 그 과정에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지만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남조선로동청년대표로 력사적인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다. 김태선선생은 평범한 직포공이 국사를 론의하는 중대한 회의에 대표로 선출되였다고 생각하니 꼭 꿈을 꾸는것 같았다. 북녘땅에 들어서니 별세상이였다. 로동자들이 주인이 되여 활개치고 어디서나 건국의 마치소리가 드높이 울리고있었다. (여기가 바로 로동자들의 참세상이로구나.) 따뜻한 인정을 모르고 살던 그에게 옷과 생활필수품까지 안겨졌을 때의 감격이 얼마나 컸으랴. 뜻밖에도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 남조선녀성대표들에게 특별히 치마저고리를 두벌씩 해주시였다. 그는 세상만복을 독차지한것만 같았다.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한 대표들모두가 그러했던것처럼 언제나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러 흠모하여마지 않던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처음 뵈옵는 김태선선생의 가슴은 남다른 감격과 환희로 세차게 끓어번지였다. 그때의 그 감격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번에는 또다시 자기를 남조선청년대표로 국제무대에까지 내세워주시였으니 그 은정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할수 있었으랴. 김태선선생은 고마움에 젖어오는 마음을 안고 위대한 수령님께 감사의 인사를 다시금 올리였다. 원래 뽈스까에서 진행되는 국제로동청년대회에 갈 4명의 대표들은 이미 선발되여있었다. 그들은 수속을 끝내고 려장까지 다 갖추어놓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화국을 대표하여 나갈 대표단구성에 대하여 알아보시다가 일군들에게 북반부청년들만 가서는 안된다고, 지금 남조선로동청년들이 조국통일을 위하여 얼마나 피어린 투쟁을 벌리고있는가고, 그들도 보내야 한다고, 우리는 무엇을 하나 해도 언제나 통일된 조국을 생각해야 하며 남녘겨레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리하여 김태선선생이 와르샤와에서 진행된 국제로동청년대회에 공화국의 청년대표로 참가하게 되였고 오늘은 이렇게 또다시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게 되였던것이다. 이날 믿음에 찬 시선으로 김태선선생을 비롯한 청년대표들을 바라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유구한 력사와 슬기로운 문화로 빛나는 우리 나라는 절대로 둘로 갈라져서는 안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는 참다운 인민의 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였다고 하시면서 김태선동무는 이번에 진행된 선거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되였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지난날 길가의 조약돌마냥 버림받던 어제날의 직포공을, 그것도 20살밖에 안되는 처녀가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국사를 론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되였다는 생각에 그는 눈물을 쏟고야말았다. 조국과 민족앞에 빛나는 위훈을 세운 영웅도 아닌 그가 이렇듯 행복의 상상봉에 설수 있게 된것은 민족의 위대한 어버이의 사랑과 믿음의 품이 있었기때문이다. 김태선선생은 이날의 영광과 감격을 심장에 안고 조국통일을 위한 거세찬 격류속에 뛰여들어 온넋을 그 길에 바쳤다. 가렬한 조국해방전쟁의 포화속에서도 그는 자기를 존엄높은 자주적인간으로 키워주신 백두산위인들의 사랑을 한시도 잊지 않고 언제나 수령의 명령을 무조건 철저히 집행하였다. 인민군대에 의하여 해방된 서울의 명동극장에서 진행된 의용군탄원호소모임에서 그는 남녘의 청년들에게 미제를 때려부시는 성전에 떨쳐나서자고 웨치며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선창하였고 열기띤 연설도 하며 그들을 고무하였다. 바로 이런 열정적인 활동이 있어 서울에서만도 수많은 남녀청년들이 의용군에 탄원해나섰다. 1950년 7월 14일부의 《로동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었다. 《…요새 해방된 서울에서 무엇보다도 감격적인 풍경은 젊은이들이 다투어 의용군을 지망해나서는 일이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두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모두 의용병을 지망하여나서고있으며 어떤 대학에서는 전학생이 다 지원하고나선 일까지 있다.… 그들은 명랑한 얼굴로 풀빛의 의용병의 모자와 제복을 입고 젊은이다운 생기있는 걸음으로 대렬에 참가하고있다. 의용병지원자들의 궐기회의들에는 실로 씩씩하고 감격적인 풍경이 많다. 명동극장에서 열린 가두민청원들의 궐기회의는 소박한 젊은이들의 끓어오르는 열정이 그대로 쏟아져나오는듯 한 노호와 절규의 회합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그를 잊지 않으시고 그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애국의 삶을 참답게 빛내여나가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며 온갖 사랑과 은정을 다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모스크바에서 열린 10월혁명 35돐 기념행사에 참가할 조선로동자대표로 보내도록 하시였으며 전선에서 소환하여 학교에서 공부시키도록 하시고 졸업후에는 조선인민군 군관대렬에 세워주시였다. 그러시고도 단발머리처녀로 자신앞에 섰던 그를 늘 잊지 못하시며 전국어머니대회를 비롯한 뜻깊은 계기들에 자신의 곁에 불러주시는 커다란 영광을 거듭 안겨주시였다. 이것을 어찌 한 녀성에게만 베풀어진 사랑과 믿음이라고 하겠는가. 위대한 수령님의 그 사랑은 남녘겨레들, 아니 온 민족의 가슴마다에 그늘없이 흘러든 고귀한 사랑과 믿음이였다. 이처럼 조국과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에서 삶을 빛내여주는 어머니조국의 품에 안겼기에 《직기바다의 갈매기》로 불리운 리화순녀성도 자기의 삶을 참답게 빛내일수 있었다.
고향이 남반부인 그는 일찌기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살다가 생활이 너무 가난하여 7살때 부자집 아이보개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는 부자집에 가서 몸종으로, 아이보개로 시달리면서 매일 가해지는 욕설과 매질에 온몸이 퍼렇게 멍들군 하였다. 도망가려고 애도 써보고 데리러 오겠다던 어머니를 기다려 담장안을 빙빙 돌며 밤을 새우기도 하였으나 앞길은 캄캄하기만 하였다.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나 서울이 해방되자 어머니를 찾아 거리를 헤매이던 그는 8살의 어린 나이에 후퇴하는 인민군군인들의 등에 업혀 공화국으로 들어오게 되였다. 공화국의 품속에서 아무런 근심걱정없이 학원을 졸업한 그는 지난날 헐벗었던 우리 인민들에게 하루빨리 더 좋은 옷감을 마련해주시려는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뜻을 받들고 평양방직공장(오늘의 평양종합방직공장)에서 직포공으로서 보람찬 삶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다기대운동의 앞장에서 질풍같이 내달렸다. 1964년 4월부터 《8》자형순회방법을 비롯한 10여건의 기술혁신안을 받아들여 다기대운동의 첫 봉화를 든 그는 해마다 직기수를 늘여 매해 년간계획을 4월말전으로 초과수행하였으며 《직기바다의 갈매기》로 온 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또한 7개년계획을 4년 5개월 앞당겨 470%로 초과수행하면서도 1등품의 비중을 91. 2%로 올리였고 많은 로동자들을 기능공으로 양성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런 리화순녀성을 여러차례 만나주시면서 지난날 천덕꾸러기로 버림받던 그를 온 나라가 다 아는 로력혁신자로 내세워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를 처음으로 만나주신것은 주체53(1964)년 10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방직공장을 찾아주신 수령님께서는 그가 일하는 작업장에까지 몸소 오시여 그를 만나주시고 동행한 외국손님에게 모범로동자라고 소개까지 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그에게 어디 아픈데는 없는가, 일이 힘들지 않는가고 다정히 물어주시였으며 앞으로도 건강하여 일을 잘하라고 뜨겁게 고무해주시였다. 이듬해 8월 또다시 공장을 찾으시여 리화순녀성을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혼자서 55대의 기대를 맡아보면서 년간계획을 끝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이 동무가 이 많은 기계를 혼자서 보는데 벌써 5월 4일에 년간계획을 끝냈다고, 정말 장하다고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이뿐이 아니였다. 주체57(1968)년 5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제2차 전국천리마작업반운동선구자대회에 참가한 리화순녀성을 몸소 만나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자신의 곁에 앉혀주시고 지금 몇대의 기대를 맡아보는가를 물으시였다. 72대를 보고있다는 그의 대답을 들으신 수령님께서는 《72대? 그것 참 대단하구만. 어디 여기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나에게 좀 설명해주오.》라고 하시며 수첩과 연필까지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설명과 함께 좀더 노력해서 80대의 직기를 맡아보겠다는 결심을 들어주시고 대단하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걸으면 하루에 얼마나 걷는것으로 되는가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180리를 걷는것으로 된다는 대답을 들으신 그이께서는 매일 180리를 걸어야 한단말이지라고 되뇌이시더니 매일 그렇게 걸으면 다리가 아프지 않는가고 걱정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렇게 하면 얼마 안가서 조국이 통일될것이고 하루 180리씩 가면 이내 남반부에 갈수 있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린 동무가 참으로 용하다고 거듭 치하하시면서 《이번에 우리는 당중앙위원회비서국회의에서 동무에 대한 사업보고를 듣고 로력영웅칭호를 주기로 했소.》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순간 처녀방직공의 두볼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거치른 남녘땅에서 길가의 조약돌마냥 버림받고 천대받던 자기를 구원해주시고 키워주시고 보람찬 일터에 세워주신것만도 감사하기 이를데 없는데 온 나라가 다 아는 영웅으로까지 내세워주시는 절세의 위인의 사랑과 은정에 가슴이 후더워났던것이다. 그는 가슴벅차게 깨달았다. 어머니조국의 품, 영원한 사랑의 품이 있어 그렇듯 보람찬 삶이 있고 아름다운 미래가 있다는것을… 그 품속에서 리화순녀성은 로력영웅으로, 나라의 정사를 론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김일성훈장》수훈자로 자라날수 있었다. 정녕 녀성의 지위를 최상의 경지에 올려세워준 공화국의 따사로운 품이 있어 지난날 지지리도 못살던 김태선, 리화순녀성들뿐아니라 남조선에서 여러 경로를 통하여 북으로 들어온 수많은 녀성들이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당당히 차지하고 녀성으로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복된 삶을 마음껏 누릴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