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삶을 꽃피워준 은혜로운 품                1) 나라의 중대사를 맡겨준 믿음


 

□ 평범한 의학자를 의료기관의 책임일군으로

 

예로부터 의술은 인술이라는 말이 전해져오고있다. 여기에는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고 사회를 발전시켜나가는데서 보건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뜻이 담겨져있다.

이런것으로 하여 매개 나라와 민족의 보건형편은 그 나라와 민족의 문명정도와 발전정도를 가늠케 하는 중요한 척도의 하나로 된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고 사회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보건도 근로인민대중의 생명과 건강보호를 최우선적인 과제로 내세우는 인민적인 보건제도하에서만 자기의 사명과 역할을 다할수 있다.

이것을 지난날 일제식민지통치와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의 《군정》통치밑에서 의사의 숭고한 사명을 돈에 의해 롱락당하다가 애국의 일념으로 북반부를 찾아와 인민보건부문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한 의학자들의 한생이 잘 보여준다.

해방전 일제는 조선사람의 보건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돌리지 않았다.

해방이 되여 인민주권이 세워짐에 따라 보건사업은 근본적으로 개선되여 병원과 진료소들이 많이 늘어나고있었으나 현실발전의 요구에 보건사업을 따라세우자면 부족되는 의사문제부터 시급히 해결하여야 했다.

이로부터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남조선에서 미제와 그 주구들의 박해를 받으며 고통받는 많은 의학자들이 북에 들어올것을 희망해나서고있는 조건에서 그들을 데려오는 사업을 매우 중시하였다.

이리하여 남반부에서 많은 의학자들이 삼엄한 38°선을 넘어 북반부로 들어왔다.

그들모두가 북반부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인민을 위한 참된 보건일군으로 자라났다. 이러한 사람들중에 리호림선생도 있다.

 

리호림(1907. 10. 10-1995. 9. 1) 의학자

주체39(1950)년까지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 교원, 강좌장, 평양의학대학 교무부학장으로 사업. 그후 주요병원들에서 과장, 원장을 거쳐 고문원장으로 사업. 《김일성훈장》수훈자, 후보원사(1952년), 교수(1949년), 박사(1949년).

 

충청북도 제천의 한 농촌마을에서 태여난 그는 서울에서 중학을 마친 후 의학과학을 탐구할 포부를 안고 일본에 건너가 의과대학을 다니였다. 대학을 졸업하였으나 식민지지식인의 불우한 처지는 면할수 없었다.

조선사람이라는 단 한가지 리유로 연구사업은 고사하고 일자리조차 구할수 없었던 리호림선생은 간난신고끝에 일본에 있는 어느 한 대학의 연구소에 취직하게 되였다. 허나 그곳에서 리호림선생에게 차례지는 일이라는것이 기껏해야 일본인과학자들의 심부름이나 해주고 보조적역할이나 하는것뿐이였다.

나라잃은 백성은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는 말의 참뜻을 뼈저리게 느낀 리호림선생은 일본에서의 과학탐구를 단념하고 서울에 돌아와 세브란스의전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짬짬이 연구사업을 해보려고 노력을 다하였으나 식민지지식인에게 차례지는 설음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모든것을 단념하고 자그마한 개인병원을 차려놓고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해방이 되였어도 그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에 나붙은 포고문들과 어지러운 미제의 군화소리, 일제식민지통치때와 같이 거리를 활보하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몰골… 이것이 당시 서울의 모습이였다.

자기의 답답한 심정을 쏟아놓을 길이 없어 모대기던 리호림선생은 그때 북조선에 대한 감격적인 소식을 전해듣게 되였다.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의 력사적인 개선연설소식과 북반부에 가서 그이를 직접 만나뵙고 돌아온 인사들의 이야기, 건국열의로 들끓는 북반부의 소식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는 전민족이 굳게 단결하여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해나가야 한다고 하신 김일성장군님의 말씀은 캄캄하기만 하던 리호림선생의 앞길에 해빛과도 같은 밝은 빛을 뿌려주었고 인민의 새 생활이 약동하는 북반부의 모습은 한없는 견인력으로 그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허나 일본에 건너가 대학공부를 하고 또 개인병원까지 운영하던 자기를 북에서 어떻게 대해줄것인가 하는 걱정이 은연중 그의 마음을 괴롭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 지식인들을 귀중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마음껏 과학을 탐구할수 있도록 온갖 조건을 마련해주신다는 소식을 들은 리호림선생은 남쪽땅에 남아있고싶은 미련을 깡그리 날려버렸다.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가리키시는 길만이 우리 조국과 민족이 나아갈 길이다. 가자, 장군님께서 계시는 평양으로!)

이렇게 결심을 내린 리호림선생은 위대한 태양의 품을 찾아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38°선을 넘어 북반부로 들어왔다.

평양에 도착한지 얼마후 리호림선생은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 교원이 되였으며 그처럼 소원하던 연구사업을 마음껏 할수 있게 되였다.

그러던 주체35(1946)년 12월 어느날 그는 뜻밖에도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옵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며 《선생님이 서울에서 한달전에 들어왔습니까?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자신의 곁에 앉히시고 서울형편을 알아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있다지요. 매우 훌륭한 일을 하고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간부가 매우 부족합니다. 앞으로 일을 많이 해야 하겠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계속하여 조선혁명의 전도와 인테리들이 놀아야 할 역할에 대하여, 특히 의학자들이 새 조국건설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이날 오래동안 귀중한 시간을 내시여 그의 가슴속에 애국의 열정을 심어주신 수령님께서는 그와 헤여지실 때에는 몸소 문밖에까지 나오시여 두손을 다시금 잡아주시며 나라와 인민을 위해 힘껏 일해줄것을 믿는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부터 리호림선생을 자주 만나주시면서 그로 하여금 인민들의 건강증진과 나라의 보건사업발전에 자기의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쳐나가도록 끊임없이 이끌어주시였다.

리호림선생이 북조선보건련맹사업을 맡아보고있을 때였다.

북조선보건련맹은 당시 개업하고있거나 개인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을 교양하여 국가병원에 받아들이며 보건일군들을 새 민주조선건설에 적극 참가시키기 위한 사명을 지니고 조직된 사회단체였다. 리호림선생은 사회적책임이란 져본적도 없고 또 능력도 없는 자기가 이 임무를 어떻게 하면 원만히 수행해낼수 있겠는가 하는 근심으로 남몰래 속만 태웠을뿐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인 주체36(1947)년 가을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바쁘신 가운데서도 리호림선생을 불러주시고 보건련맹사업정형을 료해하시였다.

일을 잘하지 못한 자책감으로 하여 리호림선생이 대답도 변변히 올리지 못하고 낯을 붉히고있는것을 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친부모의 심정그대로 잘못을 하나하나 일깨워주시며 사업방향을 자세히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학강의도 중요하지만 보건련맹사업이 보다 중요하며 보건련맹이 일을 잘하면 오랜 인테리들을 교양개조하는데서 큰 역할을 할수 있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보건련맹은 개업하는 의사들을 널리 포섭하고 교양함으로써 그들이 자진하여 국가기관에 들어와 사업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사업은 매우 힘든 사업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순한 행정사업이 아니라 사람들을 교양개조하는 사업이기때문입니다. 우선 나이젊은 사람들부터 포섭교양하여야 합니다. 교양은 새 조국건설에 대한 당의 로선과 정책을 알려주고 새 조국건설에서 보건일군들이 담당수행해야 할 임무와 역할에 대하여 알려주는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업경험도 어리고 능력도 부족하다보니 일이 좀 힘들다는 리호림선생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으시고 크게 웃으시며 혁명을 하자면 모든 문제에 대하여 다 알고있어야 하며 여러가지 일들을 다 해보아야 한다고 부드럽게 타일러주시였다. 그러시고 자신께서 도와줄터이니 근심말고 군중들속에서 배우면서 일해나가라고 고무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가르치신대로 그는 개인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을 국가병원에 받아들이는 사업을 보건련맹사업의 중심고리로 틀어쥐고 힘있게 밀고나갔다. 그리하여 북조선에서는 해방후 불과 몇해 안되는 사이에 개인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을 국가병원에 받아들이는 사업을 성과적으로 끝마칠수 있었으며 보건련맹은 보건부문 일군들을 새 조선건설사업에 적극 불러일으키는데 크게 이바지할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세월이 흐를수록 리호림선생의 사업과 생활에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며 그가 인민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보건일군의 사명과 역할을 다해나가도록 보살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준엄하였던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전선군의로 활동하던 그를 오래동안 가까이 데리고다니시며 그의 정치생활을 보살펴주시고 손잡아 이끌어주시였으며 그후 의료기관의 책임일군으로 키우기 위하여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후에는 그에게 큰 병원의 원장직책을 맡겨주시고 병원일을 맡아하느라고 마음쓰는 그를 도와주시려 몸소 만나주시고는 환자치료와 병원관리운영에서 나서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또한 그가 환자치료에서 신심을 가지지 못할 때에는 우리 일군들의 치료는 우리가 해야 한다고, 동무들은 단순한 기술일군이 아니라 혁명을 하고있는 혁명가들이라고 하시며 환자치료에서 성과를 거둘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안겨주시였다.

그 믿음, 그 사랑속에서 리호림선생은 《김일성훈장》 수훈자, 후보원사, 교수, 박사의 영예를 지닐수 있었고 수십년간 나라의 큰 병원의 원장으로 사업하면서 인간생명의 기사로서의 나라와 민족앞에 지닌 자기의 사명과 역할을 다해나갈수 있었다.

후보원사, 교수, 박사이며 인민의사였던 최응석선생도 이러한 믿음과 사랑속에서 자기의 삶을 값높이 빛내일수 있었다.

 

최응석(1914. 2. 2-1998. 4. 24) 의학자

주체35(1946)년부터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 부학부장 겸 북조선중앙병원(오늘의 평양의학대학병원) 원장, 북조선보건련맹 위원장으로 사업. 그후 조선적십자병원 원장, 의학과학원 원장, 보건성 물질대사연구중심 책임자 겸 김만유병원 물질대사과 과장으로 사업. 인민의사(1992년), 후보원사(1952년), 교수(1949년), 박사(1949년).

 

 해방후 서울에서 갓 들어와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 부학부장, 북조선중앙병원(오늘의 평양의학대학병원) 원장, 북조선보건련맹 위원장으로 사업하던 최응석선생은 어느날 뜻밖에도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

최응석선생을 반갑게 맞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학교육과 의학과학연구사업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지나온 생활경위에 대하여 일일이 물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으시다가 평양사람인 그가 어떻게 되여 서울로 가게 되였는가고 다시금 물으시였다.

최응석선생은 평양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의학박사의 학위를 받고도 조선사람이라는 리유로 병원에도 들어갈수 없었던 사실이며 재일조선류학생들과 지식인들속에서 애국사상을 고취한것이 《죄》로 되여 형무소에 갇혀있다가 나온 후 서울에서 해방을 맞이한데 대하여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나시여 해방전에 고생이 많았겠다고 하시면서 새 조국건설을 위해 과학자들이 할 일에 대하여, 우리 나라 의학과학이 나아갈 앞길에 대하여 세세히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이후에도 보건사업에서 중요한 문제들이 제기될 때마다 최응석선생을 가까이 불러주시여 의논도 해주시며 그가 맡은 일을 잘하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이 은혜로운 사랑의 손길에 이끌려 그는 1949년에는 공화국의 의학박사, 교수의 학위학직을 받았으며 과학원이 창설될 때에는 첫 후보원사의 영예를 지니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응석선생을 능력있는 인민보건일군으로 키워주시였을뿐아니라 그의 신상에 풍파가 들씌워졌을 때에는 그를 보증하시고 정치적생명을 보호해주시였다.

1956년 8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있은 후 더는 헤여날수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은 이런 기회에 많은 사람들을 물고늘어져 혁명대오의 통일단결에 저애를 주려고 책동하였다.

이자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해방직후부터 품들여 키우신 적지 않은 일군들, 특히 남조선에서 들어온 오랜 지식인들에게 있지도 않은 루명을 씌워 그들을 어떻게 하나 혁명대오에서 떼여내려고 책동하였다.

그러한 모해로 하여 최응석선생의 신상에도 화가 닥쳐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응석선생문제에 대한 보고를 받으시고 일군들에게 항일무장투쟁시기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하시면서 일제가 《민생단》을 조작하여 우리 혁명대렬을 안으로부터 허물어보려고 책동하였던 사실에 대하여, 놈들의 간교한 술책에 넘어간 좌경분자들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민생단》이라는 루명을 쓰고 모해학살된 사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이렇게 함부로 사람을 의심하면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몹쓸 사람으로 만든다고 하시면서 누가 그따위 짓을 했는가고, 누가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라고 했는가고, 당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누가 그런 혐의를 씌우라고 했는가고 엄하게 질책하시였다.

격노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안광에는 푸른 불이 일었고 그이의 말씀은 가슴이 얼어들만큼 서리발쳤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는 충실하고 일 잘하는 동무요, 이런 사람을 믿지 않고 누구를 믿겠소, 사람에 대한 문제는 언제나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보아야 하오, 우리는 어느때나 사람을 믿어야 하오라고 준절히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른 모든 잘못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용서하실수 있으셔도 사람에 대한 문제, 사람의 운명과 관련된 잘못에 대해서는 비록 그것이 아무리 가벼운것일지라도 절대로 양보하지 않으시였다.

자산계급출신인 최응석선생이 자기의 출신과 결별하고 인민을 위하여 자기의 땀을 아낌없이 바치며 뛰여다닌것은 위대한 수령님과 조선로동당을 믿었기때문이였다. 그가 당에 충실하며 인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기때문에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은 그를 당의 품에서 떼여내려고 책동한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단호하신 어조로 그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그것은 내가 보증할수 있다고 하시면서 정말 가슴아픈 일이요,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되였으니 말이지 어떻게 될번 하였소, 아까운 사람을 영영 잃을번 하였소, 그러나 이젠 다 해명되였으니 일없소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최응석선생의 운명을 구원해주시기 위하여 이처럼 마음쓰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러 일군들모두가 숭엄한 감정에 휩싸였다.

나쁜놈들의 더러운 모해에 걸려들었던 최응석선생의 운명은 이렇게 구원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위축되여 일에서 맥을 놓을세라 몸소 댁에 불러 일을 더 잘하라고 고무해주시였고 그후에도 그가 뜻밖에 당한 봉변으로 하여 아직도 기를 펴지 못하는것 같으시여 이제는 머리를 높이 추켜들고 앞으로 나가라고, 용기와 신심에 넘쳐 일하라고 고무해주시면서 자신의 가까이에서 일할수 있도록 크나큰 믿음과 영광을 안겨주시였다.

최응석선생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믿음에는 정녕 그끝을 알수 없는 무한한 인정세계가 펼쳐져있었다.

리호림선생과 최응석선생이 받아안은 행복과 영광, 그것이 어찌 그들에게만 차례진 행운이고 복이겠는가.

거기에는 진정 남조선에서 들어온 의학자들과 의료일군들, 아니 남조선에서 정의와 진리의 길을 찾아 북으로 들어온 모든 사람들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신임과 기대, 뜨거운 사랑이 대하마냥 맥맥히 흐르고있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의 그처럼 넓고 따사로운 사랑, 크나큰 믿음이 있었기에 남조선에서 들어온 수많은 의학자, 의료일군들이 나라의 보건사업을 발전시키며 인민의 건강을 지켜가는 길에서 핵심적역할을 하였으며 인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참된 인민의 복무자로 자라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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