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삶을 꽃피워준 은혜로운 품                1) 나라의 중대사를 맡겨준 믿음


 

□ 오랜 지식인들을 나라의 역군으로

 

흔히 낡은 사회에서 복무한 오랜 지식인들은 인민이 주인된 새로운 사회제도가 서고 자신이 서야 할 위치가 변하는데 따라 사상정신적개변이라는 하나의 체험세계를 거치게 된다.

력사는 지난날 사회주의를 건설하던 여러 나라들에서의 오랜 지식인들의 이러한 사상적개변이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와 곡절많은 경력에 대한 우려, 지식인들에 대한 새 제도의 관용성여부 등 여러가지 문제로 하여 겪게 되는 정신적고뇌와 의혹때문이였다.

그러나 공화국의 오랜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정치사에 있어본적이 없는 믿음의 정치, 단결의 정치의 보호와 혜택속에서 스스로 혁명실천속에 뛰여들어 과학과 기술의 성과로 사회의 역군의 위치에 섰다. 그들이 건국의 첫 기슭에서부터 동요와 주저를 모르고 새 조선건설을 위한 보람찬 투쟁의 길을 걷게 된것은 일찍부터 로동자, 농민과 함께 지식인들을 혁명의 동력으로 보시고 그들을 한품에 안아 참다운 애국의 넋을 심어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의 믿음의 정치, 단결의 정치가 있었기때문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새 민주조선건설에서 무엇보다도 부족한것이 지식인이였지만 그들의 지식과 기술을 단지 복구건설에 써먹기 위한것으로만 보지 않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식인들이 가지고있는 지식과 기술을 보기에 앞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려는 그들의 마음을 더 중시하시였으며 그들이 스스로 애국심을 발휘하여 건국사업에 떨쳐나서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이 류다른 정치의 힘에 이끌리여 로태석선생도 애국의 고귀한 진리를 터득하며 공화국의 륭성번영을 위한 길에서 국가활동가로 성장하였다.

 

로태석(1919. 8. 25-1979. 12. 31) 국가활동가

주체42(1953)년 8월부터 함흥시 화학공장건설장에서 기사장, 주체44(1955)년 11월부터 국가계획위원회 화학건재국장, 부위원장, 주체68(1979)년 11월부터 정무원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등의 중책에서 사업. 주체61(1972)년 12월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주체67(1978)년 11월부터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사업.

 

전후인민경제복구발전을 위한 투쟁의 첫걸음을 내디딘지 얼마 안되던 1953년 12월 초순이였다.

이때 평양에서는 전후인민경제복구건설을 성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문제를 토의하는 중요한 회의가 여러날째 진행되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인민경제복구발전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흥남의 한 화학공장에서 온 기사장을 몸소 만나주시였다. 그가 바로 로태석선생이였다.

얼마전 이 공장을 찾으시였을 때 만나주시였던 그를 다시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화학공장사업이 어떻게 되고있는가에 대하여 료해하시였다.

그는 로동자, 기술자들이 위대한 수령님의 현지교시를 받들고 한결같이 떨쳐나서 공장의 참혹한 파괴정형을 조사한데 대하여서와 두단계로 나누어 공장복구사업을 추진하고있는데 대하여, 당장에 필요한 원료자재보장을 위하여 벽돌직장과 소형전기로를 건설하고있는데 대하여 보고드리였다.

공장복구에 대한 확고한 신심을 가지고 여러가지 복잡하게 제기되는 문제들을 침착하고 조리있게 이야기하는 그의 사업보고를 깊은 관심속에 다 들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매우 만족해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이 동무는 기술도 밝고 일에서도 성실한 우리 당의 보배요.》

위대한 수령님의 높은 평가를 받고 감격에 목메인 로태석선생의 눈앞에는 해방직후 새 조선건설에 이바지할 애국의 일념을 안고 북반부에 들어와 받아안은 사랑과 믿음이 되새겨졌다.

고향이 경상남도 밀양인 그는 해방전 갖은 모욕과 멸시를 받으며 현해탄을 건너 고학으로 대학공부를 하였던 오랜 지식인들중의 한사람이였다.

새 조선을 일떠세우는 사업에 자기의 지식과 기술을 깡그리 바칠 일념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온 로태석선생은 미제의 분렬책동으로 하여 국토분렬의 엄중한 정세가 조성되자 주저없이 북행길에 올랐었다.

당시 20대의 젊은 지식인이던 그가 단호히 쪽배에 몸을 싣고 사나운 파도를 헤치며 북행길에 오른것은 고학의 나날부터 열렬히 흠모해온 김일성장군님의 령도를 받는 북조선에 민족발전의 장래가 있다는 확고한 신념과 자기의 과학과 기술을 새 조국건설에 바치려는 애국열의에서였다.

그는 흥남지구인민공장과 흥남비료공장에서 일하면서 새 조국건설사업에 자기의 지혜와 열정을 다 바쳤다.

새 조국건설에서 지식인 한사람한사람이 귀중한 때에 스스로 북반부를 찾아와 나라의 경제발전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흥남지구인민공장에서 로동자들과 합심하여 열성껏 일하고있는 그의 남다른 애국열의와 량심을 귀중히 여기여 나라에서는 그에게 공장의 계획사업을 맡겨주었으며 전후에는 경공업발전과 농업생산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큰 화학공장의 건설기사장의 책임도 맡겨주었다.

이 거듭되는 크나큰 믿음에 깊이 감동된 로태석선생은 모든것이 파괴된 전후의 어려운 형편에서도 남다른 열성을 가지고 로동자들과 힘을 합쳐 공장복구에 달라붙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온 나라의 복구건설을 지휘하시는 분망하신 속에서도 주체42(1953)년 10월 중순 그가 일하는 화학공장을 찾아주시여 그를 몸소 만나주시였다.

훤칠한 키에 도수높은 안경을 낀 그가 바로 로태석선생임을 아시게 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쟁기간에 잘 있었는가, 다른 동무들한테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다정히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감격에 어쩔바를 몰라하는 그를 데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시며 공장의 파괴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자체의 힘으로 복구할수 있겠는가고 물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너무나 어려운 형편을 생각하여 미처 대답을 올리지 못하는 그에게 모든것을 다 우리의 힘으로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로동계급의 힘과 지혜를 발동하고 인민대중에게 의거하여 일을 내민다면 전후복구건설의 어려운 과업을 빛나게 수행해나갈수 있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공장의 복구건설방향과 방도, 복구단계를 환히 밝혀주시며 압축기를 빨리 복구정비하여 카바이드를 생산할데 대하여, 농민들에게 하루속히 화학비료를 보내줄데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파괴된 공장을 돌아보신데 이어 공장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공장복구사업을 2계단으로 나누어 하되 파괴정형을 구체적으로 조사장악하여 선후차를 옳게 정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이처럼 공장의 복구건설방향과 방도, 복구단계를 환히 밝혀주시고도 또다시 가까이 부르시여 기술도 밝고 일에서도 성실한 우리 당의 보배라고 높이 평가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르는 로태석선생의 눈가에는 뜨거운것이 흘러내렸다.

그는 회의에 참가하고 집으로 돌아와 안해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기지 못했다면야 나같은것이 어떻게 오늘과 같은 영광을 누릴수 있겠소.

내 한몸 다 바쳐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신임에 어김없이 보답하겠소.》

그는 절세의 위인을 모신 조선의 지식인된 긍지와 행복을 다시금 깊이 간직하고 나라와 민족의 륭성번영을 위한 애국의 길에 자기의 모든것을 바쳐나갔다. 그는 그후 당과 국가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일하면서, 특히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하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력사상 처음으로 제시하신 인민경제계획의 일원화체계를 관철하기 위한 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기에 위병때문에 신고를 하면서도 이악하게 일하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로태석》이 아니라 《강태석》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로태석선생을 굳게 믿으시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에게 거듭되는 믿음과 은정을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부 편협한 사람들이 오랜 지식인이 어떻게 국가의 요직에 있을수 있는가, 그에게 어떻게 국가계획사업같은 중요한 일을 맡길수 있는가고 시비질해나설 때에는 그를 가까이 불러주시고 동무는 해방직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온갖 풍상고초를 다 겪은 동무라고, 누가 뭐라고 하든지 나는 동무를 믿는다고, 그러니 마음놓고 일하라고, 당이 있는 한 동무를 그 누구도 다치지 못한다고 하시며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이 위대한 운명의 태양의 손길에 이끌리여 로태석선생은 그후 정무원 부총리, 정무원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의 중책을 맡았으며 새로운 전망계획을 세우거나 국가경제사업과 관련하여 중요한 대책을 세울 때마다 중요한 과업을 맡아 책임적으로 수행하군 하였다.

이러한 그를 두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로태석동무는 우리 당의 훌륭한 기술자라고, 우리의 귀중한 보배라고 하시며 그에게 크나큰 은정을 거듭 안겨주시였다.

이렇듯 오랜 지식인들을 한품에 안아 운명을 꽃피워주는 절세의 위인의 품, 공화국의 품이 있어 로태석선생은 오늘도 애국렬사로 영생하는 삶을 누리고있다.

공화국의 품에 안겨 운명을 꽃피운 오랜 지식인출신의 일군들가운데는 최성세선생도 있다.

 

최성세(1915. 4. 30-1968. 12. 19) 국가활동가

해방후부터 산업국 전기처 부처장, 산업성 전기관리국 부국장, 산업부문 내각참사, 국가기술위원회 위원장,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내각설계총국 참의 등의 중책에서 사업.

 

일제식민지통치시기 갖은 수모와 멸시를 받으며 대학을 졸업한 최성세선생이였지만 그에게는 자기의 기술과 지식을 바칠 품, 진정한 어머니조국이 없었다. 공부를 하고도 자기의 리상과 포부를 참답게 꽃피울 제 나라가 없는 식민지지식인의 뼈아픈 설음과 고통, 그것은 정녕 말로써는 이루 다 표현할수 없는것이였다.

날이 갈수록 그의 가슴속에는 기술이 있고 지식이 있기 전에 제 나라, 제 주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파고들었다.

이러했던 최성세선생이였기에 해방을 맞이하였을 때의 감격과 기쁨은 더없이 컸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의 기쁨이였다. 미제가 강점한 남조선땅에서 그에게 차례진것은 일제식민지통치시기보다 더욱 가혹한 박해와 수난뿐이였다.

해방직후 서울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과학기술을 배워주려던 그의 희망은 미제의 총칼에 의해 무참히 꺾이웠고 《국립서울대학교안》을 반대하였다는 《죄》로 하여 진보적인 교수들과 함께 대학에서 쫓겨나기까지 하였다. 나중에는 남조선과학기술련맹 서기장으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자던 소망마저 탄압의 구두발에 짓밟히고말았다.

학교는 있어도 조국과 민족을 위한 교육이 없는 사회, 교수는 있어도 민족의 행복을 위한 과학기술보급이 없는 세상, 이런 땅에서는 지식인의 참된 리상과 포부를 실현할수 없었다.

바로 이러하였던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와닿았다. 언제나 마음속으로 흠모해온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서 평양으로 불러주신것이다.

평양에 도착한 그가 위대한 수령님을 처음으로 만나뵈온것은 주체36(1947)년 4월말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두손을 뜨겁게 잡아주시며 그간 고생이 얼마나 많았는가고, 왔다는 보고를 받고 동무를 인차 만나려 하였는데 이렇게 오늘에야 겨우 시간을 내였다고 다정하게 말씀하시였다.

이날 남조선지식인들의 처지에 대하여, 그가 서울에서 무슨 일을 하였는가에 대하여 하나하나 물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미더운 눈길로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최성세동무, 어떻습니까, 북반부에 와서 나와 같이 일해볼 생각은 없습니까?》

최성세선생은 너무도 황송하여 무엇이라고 선뜻 대답을 올릴수 없었다.

서울에 있을 때 그는 자기가 북조선에 가면 어느 공장의 기사가 아니면 학교교단에 서겠다고 이야기하군 하였다. 자기와 같은 평범한 전기기술자가 온 민족이 우러러 경모하는 김일성장군님을 가까이 모시고 일한다는것은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는 최성세선생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믿음이 너무도 크고 고마워 최성세선생은 《장군님!》 하고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환희와 격정에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자애로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윽고 《좋소, 그럼 같이 일해봅시다.》라고 말씀하시였다.

이렇게 최성세선생을 새 조선의 기틀을 쌓아가는 건국성업에 참가시켜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산업국 전기처 부처장, 산업성 전기관리국 부국장, 산업부문 내각참사, 국가기술위원회 위원장 등 중요한 직책들을 맡겨주시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라의 전력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도로부터 사업방법과 작풍에 이르기까지 국가활동가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갖추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이러한 크나큰 믿음의 손길에 이끌려 그는 공화국에서의 첫 전동기생산에서 핵심적역할을 하였으며 평양변전소와 보선소에 잠입한 적간첩암해분자들의 책동을 적발분쇄하는데서도 그리고 대규모전력생산기지인 수풍발전소대보수공사에서도 크게 한몫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려운 일을 맡겨도 책임적으로 착실하게 해내는 그를 신뢰하시며 현지지도의 길에서 만나시여 걸린 문제들을 풀어주기도 하시고 밤중에 전화로 안부를 물으시며 너무 무리해서는 안된다고 따뜻이 보살펴주기도 하시였다. 그러시고도 수령님께서는 수풍발전소보수공사가 성과적으로 끝났을 때에는 최성세동무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일을 잘하였다고, 그 동무는 아주 재간있고 충실한 동무라고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해방전쟁의 재진격시기 평양시의 파괴된 송배전망을 복구할 어려운 과업을 맡아 책임적으로 수행한 그를 최고사령부로 불러주시고 그가 엄혹한 시련속에서도 맡은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데 대하여 과분한 치하를 하여주시였다. 그를 현지지도의 길에 데리고다니시며 일을 배워주시였고 외국방문에도 함께 수행하도록 하시면서 사업과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9(1960)년 가을 일부 편협한 사람들이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하던 그에 대하여 시비질할 때에도 절대로 최성세동무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그에 대해서는 내가 보증한다고, 다시 잘 알아보아야 한다고 여러차례나 간곡히 말씀하시며 그의 운명을 보살펴주시였다.

최성세선생은 자신을 그토록 믿고 내세워주시는 절세의 위인의 크나큰 은정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사회주의건설의 중요한 초소마다에서 더욱 열정을 바쳐 일하였다.

그는 전기기관차생산에서 중요한 부분인 수은정류기제작이 걸렸을 때에는 자진하여 전기공장에 나가 로동자, 기술자들과 함께 탐구와 창조의 낮과 밤을 보냈으며 평양과 북창화력발전소건설이 시작되였을 때에는 그 공사현장에 내려가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이러하던 그가 어느 한 발전소능력확장을 위한 현지조사를 하던중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유능한 기술자를 너무도 일찍 잃었다고, 그 동무는 해방후부터 우리와 같이 일하면서 민주건설과 사회주의건설에 많은 공헌을 한 동무라고, 그는 당과 혁명에 끝까지 충실한 동무였다고 하시며 못내 애석해하시였다.

이 말씀은 지난날 갈길 몰라 헤매이던 한 지식인의 운명을 영생의 높은 언덕에 내세워주시는 한없이 고귀한 은정이고 표창이였다.

이렇듯 위대한 사랑과 믿음의 품에 안겼기에 로태석, 최성세선생들만이 아니라 남조선에서 북으로 들어온 지식인출신의 수많은 사람들이 유능한 국가활동가로 인생년륜을 새기며 자기의 운명을 참답게 꽃피울수 있었고 오늘도 조국이 알고 민족이 기억하는 애국렬사로 영생하게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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