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당은 선생님을 믿습니다》
기름진 땅에 뿌려진 씨앗이라 하여도 가꾸어주고 키워주는 따뜻한 손길이 없다면 훌륭한 열매를 기대할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먼길을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는 위대한 태양의 빛발을 떠나 참된 삶이 가꾸어질수 없다. 해방후 남조선의 정치정세는 매우 복잡하였지만 이 혼란되고 첨예하게 대립된 정치정세속에서도 남조선사회에는 하나의 뚜렷한 흐름이 이루어져있었다. 그것은 민족재생의 은인이신 김일성장군님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따르는 인민들의 열화와 같은 마음과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에 위하여 위대한 변혁의 새 력사가 펼쳐지는 북조선현실에 대한 절대적인 공감이였다. 해방직후 남조선에서 각이한 정견을 가진 인사들, 수많은 지식인들, 지어 우익정객들까지 결연히 북행길에 오른것은 력사의 흐름에 합류한 의로운 행동이기도 하였다. 주체35(1946)년 여름이였다. 공장마다에서는 건국의 마치소리 높이 울리고 농촌마다에서는 난생처음 분여받은 제땅에서 첫해농사를 지어가는 농민들의 기쁨에 겨운 노래소리가 그칠새 없었다. 바로 이러한 때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평양을 떠나 남쪽으로 가고계시였다. 허헌선생이 북반부땅에 들어섰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몸소 마중가시는 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미전부터 허헌선생에 대하여 잘 알고계시였다.
1910년대초 대학을 고학으로 졸업하고 량심적인 변호사로서 일찍부터 민족주의운동에 몸을 담은 허헌선생은 3. 1운동때에도 그리고 그후 여러차례에 걸치는 《공산당검거사건》때에도 법정에 출두하여 조선인애국자들과 혁명가들을 변호한것으로 하여 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였다. 그는 특히 항일투사 김책을 비롯한 조선의 진정한 혁명가들과 애국적인민들을 자진하여 무료로 변호하면서 일제의 조선강점을 단죄하고 우리 인민의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법정투쟁을 벌렸다. 그는 《신간회》조직사업에도 참가하였으며 그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되여 반일애국력량을 단합시키기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또한 력사적인 보천보전투에서 커다란 고무를 받고 민족이 낳은 항일의 전설적영웅 김일성장군님께서 조직령도하시는 항일무장투쟁자료들을 수집하여 인민들에게 소개선전하였으며 국내 여러 지역에서 애국적인 지하활동을 벌렸다. 이로 하여 일제에게 여러번 체포투옥되였으며 변호사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하였다. 이름있는 애국인사이며 민족주의자인 허헌선생은 해방후 미《군정》의 실시로 해방의 감격이 꿈과 같이 사라지고 다시금 암흑천지로 전변된 남조선의 혼탁된 정세를 수습하실분은 오직 김일성장군님뿐이시므로 하루속히 서울로 오시여 나라를 옳은 길로 이끌어주실것을 간절히 청원하는 편지를 수령님께 올린적이 있었다. 편지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고결한 애국심에 감동되시여 장문의 회답서신을 보내시였다. 서신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난날 민족이 겪은 망국의 피의 교훈을 다시금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미국에 대한 환상을 철저히 경계하고 옳은 건국자세를 가지며 파쟁을 경계하고 광범한 애국적민주력량의 단결을 강화하여야 한다는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민족이 나아갈 길로부터 한 개인의 운명에 이르기까지 사활적인 문제들을 정확히 밝혀준 위대한 수령님의 친서를 받아안은 허헌선생은 암흑속에 비쳐든 광명을 보듯 환희와 격동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후 광범한 통일애국력량을 묶어세우기 위한 투쟁을 줄기차게 벌려나가면서도 위대한 수령님을 직접 만나뵈옵고 그이의 가르치심을 받으려는 생각을 늘 하고있던 허헌선생이 기회를 만들어 평양으로 온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외국방문중에 계시였으므로 허헌선생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수령님의 초상화만 소중히 가슴에 안은채 서울로 돌아갔다. 외국방문에서 돌아오시여 이 사실을 아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선을 헤치고 먼길을 찾아온 그를 그냥 돌려보냈다고 못내 서운해하시였다. 허헌선생이 먼길을 찾아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채 되돌아간 사실을 두고 마음을 써오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얼마후 그를 불러주시였다. 이렇게 되여 허헌선생은 서둘러 북행길에 다시 올랐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마중가시게 된것이다. 38°선을 넘어 신생의 기운이 넘치는 북반부땅에 들어서서 어느 한 숙소에서 잠시 피로를 풀고있던 허헌선생은 미끄러지듯 숙소앞으로 들어서는 승용차에 눈길을 보내는 순간 자기 눈을 의심하였다. 늘 가슴에 품고다니는 초상사진의 모습 그대로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해빛같이 환한 미소를 머금으신채 차에서 내리시는것이였다. 백두산전설을 들어오던 그 시절부터 우러러 흠모하며 사무치게 그리웠던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의 이름을 다정히 불러주시며 지척에 서계시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먼길을 몸소 마중까지 나오실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허헌선생은 너무도 감격하고 환희에 휩싸여 그만 수령님께 두손을 맡긴채 어깨만 들먹이였다. 이윽고 마음을 진정한 허헌선생이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처럼 먼길을 몸소 마중나오신데 대하여 황송함을 금치 못해하자 수령님께서는 선생을 제대로 도와드리지 못해서 오히려 안되였다고, 지난번에 선생이 평양까지 찾아왔다가 헛수고를 했고 또 이렇게 년로한 몸으로 험한 길을 오는데 어찌 평양에 앉아서 선생을 맞을수 있겠는가고 겸허하게 말씀하시였다. 이날 허물없이 대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고매한 인품에 이끌려 허헌선생은 어려움도 잊고 남조선에서 민주력량의 단합사업이 잘 진척되지 않아 겪고있는 마음속고충을 다 털어놓았다. 그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조선에서 3당합당을 반드시 이룩하여야 한다고, 단결은 승리를 가져오며 분렬은 패배를 의미하기때문이라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우리의 모든 경험은 오늘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민주주의적발전은 오직 로동계급을 비롯하여 농민, 수공업자, 인테리, 상인, 기업가 할것없이 전체 인민대중을 집결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 힘에 의하여서만 이루어질수 있다는것을 똑똑히 가르쳐주고있다고 말씀하시였다. 이윽하여 수령님께서는 남조선의 민주정당들과 사회단체들속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들어있는것이 사실이라고, 우리는 그 사람들을 꾸준히 교양하여 옳은 길에 들어서게 하여야 한다고, 우리 민족대렬내부가 서로 분렬되여 옥신각신하는것은 바로 반동세력이 원하는것이라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우리는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하며 여기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모든 애국적민주력량의 통일을 위하여, 특히 근로인민대중의 단결을 강화하기 위하여 3당합당은 반드시 이룩하여야 하며 전체 근로자들과 전체 인민의 단합된 힘에 의거하여 반동세력을 물리치고 조국의 통일독립을 달성하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합당사업에서 나서는 어려운 문제들을 극복해나갈수 있는 방도들에 대하여서도 하나하나 가르쳐주고나시여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 당은 선생님을 믿습니다.》 남조선에서의 민주세력의 단합문제를 전적으로 맡긴다는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을 받아안은 허헌선생은 눈뿌리가 저려나고 뜨거운것이 솟아오름을 금할수 없었다. 예로부터 산은 나무와 함께 살고 사람은 믿음과 함께 살아온다는 말이 전해져오고있지만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장 고결한 미덕으로 여기시는 위대한 수령님앞에서 너무도 감격한 허헌선생은 뜨거운 감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보답의 맹세를 가슴속깊이 다지고 또 다지였다. 그리하여 허헌선생은 그후 많은 어려움속에서도 남조선에서의 3당합당사업을 수령님의 뜻대로 추진시켰으며 남조선로동당 위원장,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한 성원으로 나라의 통일과 민주력량의 단합을 위한 사업을 활발히 벌려나갈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북반부로 들어온 그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에서 삶을 빛내여나가도록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혁명투쟁경험도 별로 없고 국가활동경험도 없는 그에게 당과 국가의 중책을 맡겨주시고 사업방법으로부터 사업작풍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을뿐아니라 나이도 많고 자주 앓는 그의 건강문제와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극진히 보살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준엄하였던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일부 편협한 사람들이 허헌선생을 시비해나설 때에는 허헌동지는 얼마나 좋은분입니까, 우리 당은 허헌동지를 아끼고 사랑합니다, 허헌동지는 정의를 위해서는 절대로 굽히지 않는 강의한 혁명적의지를 지닌분입니다라고 하시며 그의 운명을 전적으로 보호해주시였다. 그리고 그가 생일 60돐을 제대로 쇠지 못한것이 못내 가슴에 걸리시여 전쟁의 가렬한 환경속에서도 60돐생일연을 성대하게 차려주시였으며 그 다음날 최고사령부에서 다시 생일연을 차리시고 자신께서도 참석하시여 그를 축복해주시였다. 이런 사랑과 믿음이 있어 허헌선생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의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성원,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그후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의 중임을 지니고 새 조국건설과 조국의 자주적통일, 민족의 륭성번영과 후대교육을 위하여 헌신분투할수 있었다. 1951년 8월 어느날 당시 지방에 자리잡고있던 김일성종합대학 개학식에 참가하기 위해 길을 떠나 범람하는 강을 건느던 허헌선생은 그만 미제의 폭격에 배가 뒤집히는통에 희생되였다. 이 뜻밖의 소식에 접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것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으시여 거듭 알아보시고 틀림이 없음을 확인하시자 비통한 심정을 금치 못하시며 그의 시신을 찾기 위한 긴급조치를 취하시였다. 무섭게 사품치는 강물속에서 이미 바다로 떠내려갔을지도 모르는 시체를 찾기는 어려웠다. 현지에 나가있는 일군으로부터 더는 허헌선생을 찾을 길 없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바다밑을 다 뒤져서라도 꼭 찾아야 한다고 간곡하게 말씀하시며 전선정황이 매우 긴장한 때였으나 수천명의 군인들과 많은 배들을 동원하도록 몸소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여 해당 일군들에게 강에서만 찾지 말고 바다에서도 찾으며 혹시 물에 밀려 북쪽으로 떠내려갔을수도 있으니 남쪽바다에서만 찾지 말고 북쪽바다에서도 기어이 찾으라고 당부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허헌선생이 희생된 때로부터 16일만에 북쪽바다가에서 그의 시신을 찾게 되였다. 허헌선생의 장례식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적들의 대규모적인 《하기공세》가 시작되여 최고사령부를 잠시도 뜨실수 없으시였지만 령구가 안치되여있는 모란봉지하극장에 몸소 나오시여 아무리 어떻다한들 허헌선생이 마지막 가는 길에 내가 나오지 않을수 없다고, 나오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어서 나왔다고 하시면서 맨앞에서 몸소 령구를 메시고 모란봉지하극장의 높은 계단을 오르시였다. 최고사령부에 돌아오시여 긴장한 사업을 하시는 가운데서도 허헌선생에 대한 생각을 놓지 못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날 석양녘에 또다시 허헌선생의 묘소를 찾아주시였다. 고인에 대한 추억과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을 잃은 슬픔을 누를수 없으신듯 오래도록 분묘앞을 떠나지 못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새로 판 자리가 보이지 않도록 분묘주변에 잔디를 더 입혀야 하겠다고, 미제놈들이 어떤짓을 할지 알겠는가고, 새로 만든 분묘라는것이 알리지 않도록 잔디를 잘 입혀야 한다고 뜨겁게 당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량심적인 민족주의자로부터 진정한 혁명가로 인생전환하여 애국의 삶을 빛내인 허헌선생을 잊지 못해하시였다. 어느해 공화국창건기념일을 앞두고 공화국이 걸어온 지난날을 더듬어보시던 수령님께서는 허헌선생이 생각나시여 그의 혈육이라도 가까이 있어서 명절을 쇠였으면 좋겠다고 하시며 초대내각의 문화선전상을 한 딸 허정숙선생을 가까이 불러주시였다. 그리고 현지지도의 길에서 허헌선생의 자취가 어려있는 장소를 지나실 때면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허헌선생은 애국심이 강한 참으로 좋은분이였다고 감회깊이 추억하시며 그를 잃은 애석함을 금치 못해하시였다. 그러시고도 애국렬사릉이 새로 건립되였을 때에는 그를 그곳에 안치하도록 해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안겨주시였다. 공화국의 품에 안겨 위대한 령도자의 각별한 믿음속에 애국의 삶을 꽃피우고 빛내인 사람들가운데는 초대내각의 보건상이였던 리병남선생도 있다.
이 땅에 망국의 비운이 짙어가던 20세기 초엽 충청남도 천안에서 대대로 농사도 하며 고려치료를 해온 가정에서 태여난 리병남선생은 서울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소아과 의사자격을 받았다. 그는 조선민족의 우수성을 선전했다는 죄아닌 《죄》로 하여 일제의 박해를 받았으며 조선민족의 《렬등성》에 대한 론문을 발표할것을 강요당하였다. 여기에서 환멸을 느끼고 울분을 금할수 없었던 그는 학계와 인연을 끊고 1942년에 서울 종로구에 《리병남소아과의원》을 차려놓았다. 해방을 맞아 서울의 어느 한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의학과학 및 교육활동을 벌리던 그는 1947년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투쟁에 참가하였다는 리유로 대학에서 쫓겨난 후 또다시 《리병남소아과의원》을 차려놓고 애국적인 민주주의운동을 물심량면으로 적극 도와주었다. 그는 남조선의학협회 부회장 겸 서울시의사회 부회장, 남조선보건련맹 보건정책위원장 등 여러 사회단체의 책임적위치에서 활동하면서 미제와 그 주구들의 민족분렬책동을 반대하는 2. 7구국투쟁과 《5. 10단선》반대투쟁에도 참가한것으로 하여 2차에 걸쳐 체포되였다. 이처럼 일제의 식민지통치와 미《군정》하에서 민족적량심과 지조를 지켜온 리병남선생이였기에 미제와 그 주구들의 《단선단정》책동을 짓부시고 통일적인 중앙정부수립을 위한 북남조선총선거가 진행될 때 그 투쟁대렬에 서슴없이 뛰여들었고 량심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38°선을 넘어 북행길에 오를수 있었다. 그가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처음으로 만나뵈온것은 주체37(1948)년 8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해주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을 앞두고 진행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가 열리였다. 바로 이 회의에 참석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휴식시간에 주석단성원들과 함께 서울시 종로구에서 선거된 무소속출신의 리병남선생도 몸소 만나주시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인사를 올리는 그의 두손을 따뜻이 잡아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아, 의사선생이구만. 선생에 대해서는 이미 말을 들어 알고있습니다. 북반부에 온지 한달이 되였는데 그간 건강은 어떻습니까?》 온 겨레가 민족의 태양으로 우러르는 절세의 위인께서 평범한 소아과 의사에 불과한 자기를 알고계실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던 리병남선생은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미 려운형선생을 비롯하여 남조선에서 찾아오는 민주인사들로부터 여러 애국적인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시는 과정에 그에 대해서도 알게 되시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집식구들이 선생이 북조선에 온것을 알고있는가, 집을 떠난지 한달이 되였으니 가족들이 몹시 걱정하고있을것이라고 말씀하신데 이어 그간 북조선의 여러곳을 다녀본 소감을 물으시였다. 비록 짧은 기간이였지만 가는 곳마다에서 약동하는 북반부의 현실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던 그는 이렇게 말씀올리였다. 《남조선은 수라장같으나 여기 북조선은 들어서는 첫날부터 진정한 내 나라라는것을 절감하였습니다. …남조선어린이들은 학교도 못 가고 거리를 헤매고있는데 여기 어린이들이 희망찬 노래를 부르며 마음껏 배우고 뛰노는것을 보니 참으로 장군님의 치하에서 사는 인민의 행복과 기쁨을 가슴후덥게 느끼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남반부는 주인이 없는탓이라고, 어서 미제국주의자들을 내쫓고 조국을 통일하여 남반부도 인민이 주인된 세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이를 위해서도 앞으로 우리 함께 일을 더 많이 하자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렇듯 지난날 민족적량심과 지조를 지키기 위해 애써오던 리병남선생을 한품에 안아주시고 초대내각구성에서 보건상의 직책을 주어 그가 자기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부 편협한 사람들이 그의 높은 직책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시비해나설 때에는 리병남동무는 내가 믿는다고, 그래 그가 보건상으로 일할수 없는 리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그가 지난날 어떻게 살아왔고 또 그의 경력이 어떠한가 하는것보다도 그 동무의 가슴에 간직된 민족적량심을 더 굳게 믿고 그와 함께 손잡고 나아갈것이라고 하시며 믿음의 성벽을 더 든든히 다져주시였다. 그리고 그가 서울에 두고온 가족들의 소식을 몰라 괴로워할 때에는 그것을 몸소 알아봐주시고 가족들을 평양으로 데려오도록 대책을 세워주시였다. 이뿐이 아니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나라의 중임을 맡아안고 일을 잘하도록 하나하나 가르쳐주시며 이끌어주시였다. 주체37(1948)년 9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리병남선생은 지방병원들의 의료기구상태와 치료사업정형을 료해하기 위해 첫 출장을 떠나려고 하였다. 이 사실을 아시고 그를 집무실로 불러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간에 있은 사업정형에 대하여 알아보시며 사업에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문제들에 대하여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공화국정부의 보건시책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돈벌이가 기본목적으로 되여있는 자본주의나라들의 보건제도와는 달리 인민들의 건강증진이라고 하시면서 앞으로 일체 의료봉사를 무료로 실시해야 한다고 하시였다. 계속하여 그가 지방출장길에서 해야 할 사업들에 대하여 가르쳐주신 수령님께서는 보건일군들, 특히 의사들에게 돈보다 사람이 더 귀중하다는것을 깨우쳐주어 그들이 인민의 건강과 생명을 책임적으로 돌보게 하는데 깊은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무상치료제와 의료일군들을 사람을 귀중히 여기는 정신으로 교양하는 문제며 인민의 건강과 생명을 책임적으로 돌보게 하는 문제에 대하여서는 전혀 생각도 못하고있던 리병남선생이였다. 하기에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에서 큰 충격을 받고 그이의 가르치심대로 신심과 열정에 넘쳐 보건부문 사업을 지도해나갔다. 미제에 의하여 강요된 조국해방전쟁은 투쟁속에서 단련된 투사도 아니며 풍상고초속에서 세련된 정치인도 아닌 리병남선생에게 있어서 참으로 엄혹한 시련이였다. 하지만 절세의 위인의 가르치심과 극진한 보살피심이 있어 그는 준엄한 시련을 이겨낼수 있었고 군대와 인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어렵고 책임적인 사업을 감당해나갈수 있었다.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 이날 내각비상회의를 소집하신데 이어 리병남선생에게 보건사업을 전시체제로 개편할데 대한 지시를 보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날 밤 그를 가까이 불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전선형편을 알려주신 다음 우리가 전쟁에서 입게 되는 피해중에서도 가장 가슴아픈것은 인명피해이라고, 도시와 공장이 파괴되는것도 가슴아프지만 그것은 다시 복구하고 건설하면 된다고, 그러나 사람이 죽는것은 무엇으로써도 보상할수 없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전쟁첫날의 이 긴박한 시각에 밤이 깊었지만 보건부문 사업을 속히 전시체제로 개편하기 위한 대책을 토의하자고 보건상동무를 찾았다고 하시였다. 인민에 대한 한없이 숭고하고 고결한 사랑이 뜨겁게 닿아오는 말씀을 받아안는 리병남선생의 가슴속에는 그이에 대한 다함없는 감사와 흠모의 정이 가득차올랐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날 밤 먼동이 터올무렵까지 그에게 당면하여 해야 할 사업과 앞으로 전쟁이 가렬해지고 적들의 만행이 로골화되는데 따라 보건부문에서 해야 할 과업들을 밝혀주시였다. 리병남선생은 자신의 어깨우에 얼마나 무겁고도 숭고한 과업이 지워져있는가를 가슴뿌듯이 느끼면서 전쟁의 승리를 위한 성스러운 위업에 자기의 모든 정열을 다 바쳤다. 그는 짧은 시일안에 전시환경에 맞게 공화국의 도처에 후방병원들을 꾸리였으며 남진하는 인민군부대들에 군의들을 긴급히 보내주는 사업을 성과적으로 진행하였다. 한편 인민군대에 의하여 서울이 해방되자 그곳에 나가 단 며칠사이에 서울시에 있는 수많은 의사들이 공화국정부를 지지하여나서게 하였으며 남반부해방지역의 보건사업을 신속히 정비하고 그 지역 인민들의 건강을 보호하는 사업을 성과적으로 조직진행하는데 기여하였다. 믿음에 대한 보답에 더 큰 믿음이 따랐다. 초대내각의 보건상이였던 그는 가장 준엄한 전쟁시기에 중장의 군사칭호를 수여받은데 이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군의국장의 직무를 겸임하게 되였으며 조선로동당원의 당원증을 가슴에 품게 되였다. 무소속출신으로부터 어깨에 장령의 별을 얹은 어엿한 혁명가로 성장한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후복구건설과 사회주의건설의 나날에도 그를 자주 만나주시면서 맡겨진 일을 잘하도록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온 나라 인민들이 가장 우월한 보건제도의 혜택을 마음껏 누릴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때로는 리병남선생을 부르시여 새 과업도 주시고 때로는 크고작은 회의에 참가시켜주시면서 보건부문 사업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을 세워주시였다. 그리고 보건부문 사업을 지도하실 때면 그를 데리고다니시면서 임무도 주시고 사업방법도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고도 그가 전쟁시기에도 일을 잘하였고 오늘도 일을 잘하고있다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것이 생의 활력소가 되여 리병남선생은 마를줄 모르는 열정으로 사회주의보건제도의 우월성을 빛내이는데 심혼을 다 바쳤다. 이렇게 남조선에서 들어온 애국적인사들은 새 조국건설을 위한 실천투쟁속에서, 준엄한 전쟁의 불길속에서 능력있는 국가활동가로, 운명의 행운아로 보람찬 삶을 창조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