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 장 8
이튿날밤 상현리마을앞 시내가에서는 두 그림자가 얼마간의 사이를 두고 어디로인가 정신없이 걸음을 다그치고있었다. 두 그림자의 움직임에서는 운명의 낭떠러지로 돌진해나가는듯한 무분별이 느껴졌다. 앞에 선것은 강철룡이고 뒤따르는것은 장미혜였다. 무엇때문에 그들이 밤중에 이런 외진데로 나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달빛이 환한 가을밤은 교교한 정적속에 묻혀있었다. 우중충한 버드나무들도 풀잎들도 숨을 죽이고있었다. 철룡은 단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어디라없이 허둥지둥 걸어나가다가 멎어서 터슬터슬한 버드나무그루를 한손으로 짚고 씨근거리였다. 처녀의 발자욱소리가 다가왔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위혁적으로 부르짖었다. 《다가오지 말어. 가만두지 않겠소!》 처녀는 그 험한 기상에 겁을 먹었는지 서너걸음 뒤에 와 멎어서 쌀쌀한 목소리로 말했다. 《좀 말을 하자요.》 《무슨 말을… 이자 다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달밤을 즐기자고 나왔댔소. 들어가오.》 《한번만 더 말해요.》 《…》 《정말 절 용서해요?》 《용서했다지 않았소. 몇번 말해야 되오. 다 잊어버리겠다고 하지 않았소.》 《거짓말… 거짓말이예요.》 미혜는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눈을 보면 다 알아요. 저한테서 모욕당한 일이 가슴에서 내려가지 않아 그러지요? 동무는 하나도 용서하지 않고 어느 하나도 잊지 않았지요?》 철룡은 차거운 버드나무그루에 이마를 붙이고 단숨을 거칠게 몰아쉬였다. (그렇다. 잊지 않았다. 하나도… 하나도… 아니 그따위 모욕은 잊을수도 있어…) 그는 이전에는 미혜를 용서할수 있었으나 처녀가 어머니의 소식을 들은 다음 갑자기 접근해오자 이전 일들이 되살아오르며 가슴에 불이 일어 견딜수 없었던것이다. 《철룡동무… 제 사정을 좀 들어봐요. 우리가 이전처럼 될수 없다는걸 잘 알아요.… 전 신념이 없이 살았어요.》 《…》 《제작처장이 어머니편지를 가져왔어요. 그 편지를 읽고 얼마나 가책이 됐는지 몰라요. 전… 어머니처럼… 그렇게 변함없이 당을 믿지 못했어요.》 처녀는 갑자기 눈물을 삼켰다. 《신념이 없으니 아무한테나 의지하게 되더군요.》 《…》 《동무한테야 이런 하소연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동무의 차거운 눈을 볼 때마다 가슴이 얼어들고 괴로와죽겠어요. 분장사고도 그래서… 지금같아선 또 사고를 칠것만 같아요. 속이 정 안내려가면… 그렇게 안내려가면 절 때리든지 어떻게 해요!》 미혜는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간청하엿다. 《때리라요. 밟아죽이라요!… 그리구 속을 풀어요. 동무야 남자가 아닌가요. 왜 품고만 있어요? 맘껏 터뜨려요.》 《…》 《왜 가만 있어요? 때리지도 않고 용서도 안하고… 그럼 어떻게 살아요. 한 제작단에서 어떻게 일해요?》 《…》 《그럼 제가 다른 제작단에 갔으면 좋겠어요? 눈앞에서 아주 사라지라요?》 (가든지 사라지든지 나한테 무슨 상관인가…) 처녀는 그의 침묵에 질겁하여 몸을 떠는듯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원망의 부르짖음소리를 정신없이 터뜨렸다. 《왜 절 내버려뒀어요. 잘못 놀아나는걸 보면서도… 어느땐 이슬이 되면 눈에 넣고 다니겠다더니… 거기선 책임이 없어요?》 가슴을 찢는듯 한 흐느낌소리가 터져올랐다. 책임이라는 그 한마디 소리가 철룡의 가슴을 선뜩 찔렀다. 그리고 까닭모를 아리숭한 가책이 들며 마음이 산란해졌다. 철룡은 버드나무곁을 떠나 앞쪽으로 스적스적 걸어나가 시내가의 모래불에 주저앉았다. 머리를 싸쥐였다. 미혜가 문을 닫아걸고 응대를 안하던 일, 외국참관으로 떠나기 전 매섭게 반발해나섰던 일… 그때 모욕감과 환멸감에 물러날것이 아니라 인내성을 가지고 그 까닭을 끝까지 캐여봤다면 모든 원인들이 밝혀지고 일이 달리 되였을지도 모른다. 외국참관에서 돌아와서도 그후에도 얼마든지 해명할수 있는 문제인데 자존심만 날카로와져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찌 생각하면 그렇게 안한것이 잘한 일인것 같기도 했다. 형이 사회적편견으로 반대하고 한기석이 훼방을 했지만 그쯤한데 흔들린 처녀이라면 헤여져 아까울게 없지 않는가. 미혜도 그렇고… 그러나 인차 다른 생각이 머리를 쳐든다. (분장실에서 나서 분장실에서 자랐다는 저 처녀야 인생체험도 깊지 못해 흔들릴수도 있지 않는가… 누구인가 사랑이란 향락이나 감정놀음이기 전에 책임감… 한 운명에 대한 엄숙한 책임감이라고 했었지. 나한테는 과연 그런 책임감이 있었는가…) 처녀가 옆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철룡동무, 다 잊자요… 형님이 우리 엄마를 찾아왔더군요. 편지에 그렇게 써있어요.》 《형이?…》 철룡은 놀라서 돌아보았다. 《우리 관계를 이야기한것 같아요. 이런 소리를 한다고 비웃지 말아요. 이제는 형의 지지가 동무한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걸 잘 알기때문에 그저 소식으로 전하는거예요.》 《알고있소.》 그의 목소리를 좀 퉁명스러웠다. 《그럼 안심하겠어요.》 《그전에 산들에 묻었던 병들을 다 깨버리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했소? 다 깨버렸소, 어쨌소?》 《…》 《어째 못했소?》 《그걸 그렇게 원해요? 이번 올라가서 다… 죄다 깨버리겠어요. 산산 부셔버리겠어요!》 처녀는 비명비슷한 소리를 지르며 락엽이 흩날리는 버들방천쪽으로 허둥지둥 뛰여갔다. 철룡은 후닥닥 뛰여일어나 목청껏 불렀다. 《미혜!》 그 위혁적인 소리에 처녀는 전기에라도 닿은듯 와뜰 놀라며 멎어섰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겁먹은 눈으로 그를 빤히 지켜보다가 반발하듯 홱 돌아서 어둠속으로 뛰여들어갔다.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