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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5
최승진의 집에서 나온 강철룡은 전차정류소쪽으로 곧바로 걸어나갔다. 흩날리는 눈송이들이 화끈거리는 얼굴을 산뜻산뜻 스치였다. 한기석이 뒤따라와 그의 팔을 끼였다. 《여 철룡이, 성났댔는가. 그쯤한 롱담에… 졸장부야. 천하에 졸장부라니까. 동무가 술좌석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소릴 하니까 아닌밤중에 홍두깨같이… 분위기를 돌리자구 그랬어. 정 용서안되면 내 눈판에 엎드려 절을 하지. 절을…》 술에 잔뜩 취한 한기석은 비틀거리면서 눈길에 엎드리려고 했다. 철룡은 그를 끌어올리며 언짢게 소리쳤다. 《자, 자, 빨리 가자구!》 둘은 서로 붙안고 걸어갔다. 《철룡이, 그래두 나만한 벗이 없는줄 알라구. 이자 오면서 보니까 미혜네 집에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았더군. 동무가 승진연출가네 집에 왔다가 들리지 않을가 해서 기다리는지도 몰라.》 철룡은 얼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우중층한 아빠트의 모든 창문들에 어둠이 서려있었으나 유독 최승진이네와 장미혜네 창문들에서만 불빛이 환히 흘러나오고있었다. 《가라구 가. 오늘밤에 아예 결판을 내라구 결판을… 어머니도 없겠다. 남아장부가 한번 마음먹으면 다지 그냥 질질 끌기만 하겠나.》 철룡은 취기때문인지 미혜가 못견디게 그리워났다. 처녀의 윤이 흐르는 머리칼, 그윽하게 빛나면서도 쌀쌀한 빛이 서려도는듯한 동실한 눈, 맑은 웃음소리… 모든것이 그리워났다. 《발동이 안걸리는 모양인데 자, 내가 불도젤이 돼서 떠밀어주지.》 한기석은 철룡의 배에 머리를 박고 기운껏 떠밀었다. 《부르릉…》 철룡이 문을 여니 미혜는 기겁한 얼굴로 주춤 물러서기까지 했다. 《아니…》 그리고는 들어오라는 소리도 없이 홱 돌아서 세면장쪽으로 가버렸다. 철룡은 어정쩡해서 문밖에 서있다가 제발로 들어갔다. 그는 미혜의 방 창곁의 책상앞에 마주앉아 처녀가 들어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미혜는 들어오지 않았다. 세면장쪽에서는 수도물이 흘러내리는 소리와 빨래질소리만 계속 들려왔다. 수도물이 흘러내리는 그 소리가 물이 아니라 시간이 철철 흘러버리는 소리로 들렸다. 미혜의 어머니가 병치료때문에 강서료양소로 떠나가자 그는 될수록 처녀만 사는 이 집으로 자주 찾아오지 않으려고 했다. 동네사람들속에서 미혜의 얼굴을 깎아내릴수도 있고 또 방종한 놈팽이처럼 보호자가 없는 공간을 노리는 소행인것 같아서였다. 그의 자존심이 잦은 방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철룡은 비로소 누구의 몇마디 소리에 속이 흔들려 여태 지켜온 절제를 허물고 이런 밤중에 그것도 술냄새를 풍기며 찾아온것이 어리석게 생각되였다. 미혜도 그래서 불쾌해진것이 분명했다. 서가에 가쯘하게 꽂혀있는 책들과 원탁우에 나란히 놓인 분장도안들, 화분밑에 깐 정갈한 꽃수받치개, 알른거리는 장판… 방안의 모든것들이 자기 예술을 사랑하고 성품이 단정한 처녀의 정신적면모를 보여주는듯하였다. 철룡은 미혜가 들어오지 않는것이 전혀 고깝지 않았다. 오히려 자책감이 들며 기다리는 사이에 머리가 맑아지는듯하였다. 그는 마음같아서는 일어서 나오고싶었으나 그럴수도 없어 앞벽에 붙어있는 사진액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액틀속의 약간 퇴색한 사진에서는 한창시절의 아름다운 녀배우 리명선이 사내아이처럼 머리를 빤빤히 깎은 딸 미혜를 안고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있었다. 그것은 미혜의 백날사진이였다. 제대군인의 순박한 열정으로 사랑에 빠진 철룡이 처녀를 따라 이 집으로 처음 찾아왔을 때 미혜는 그 사진을 가리키며 이건 어머니, 이건 장미혜동지라고 웃으며 말하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들이 저보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분장실에서 나서 분장실에서 자랐다고 해요. 호호호… 아무데서나 생활적이 못된다고 그러지요. 그러나 저만큼 생활을 사랑하고 생활적인 녀자도 드물거예요.》 철룡에게는 그 말이 여간 재미나고 뜻깊게 들리지 않았다. 어릴적에는 물론 군대복무기간 영화에 그토록 마음이 팔려있으면서도 이름난 녀배우 리명선의 딸과 운명적인 인연이 맺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철룡은 그날 이 방에 처음 들어서서 자기가 성장한 농민가정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생활체취에 가슴을 울렁거리며 이것저것 둘러보았다. 리명선의 손때가 배여있는듯한 양복장들이며 삼면거울이 붙은 크고 번쩍거리는 경대, 품위있는 무늬가 그려진 창가림, 방구석에 세워진 무희의 목각상,… 보는것마다가 예술적향기를 풍기고있어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었다. 강철룡은 군대에 복무할 때 련대의 젊은 군관들이 결혼식을 한다든지 그들에게로 약혼녀가 찾아온날이면 자기에게도 언제인가는 저런 날이 올것이며 그리고 절대 범상하지 않고 어떤 비상한 인연을 통해서만 사랑이라고 하는 신비로운 감정이 움틀것이라고 공상했었다. 그러나 미혜와의 관계에서는 전혀 비상한 사연이란 없었다. 있었다면 일상적인 사업속에서 한가지 우스운 일이 있었고 그것이 계기로 되여 뜻밖의 감정이 싹튼것 같았다. 그는 부연출로 배치되여 1년이 지나 력사물주제의 작품을 형상하는 한 제작단에 미혜와 함께 망라되여 일한적이 있었다. 그때까지 철룡의 눈에 비쳐진 미혜는 그저 한 분장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개성적인 미모로 하여 연출가들이 탐나하지만 배우의 성공과 관련된 그 어떤 유혹에도 끌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기 직무를 지키고있는 처녀였다. 제작단은 실내촬영장에서 몇장면을 찍고 곧 력사유적들이 많은 개성으로 가서 야외촬영을 계속하였다. 어느날 미혜가 촬영을 앞두고 선비의 수염을 잃어버렸다고 얼굴이 새까매져 돌아갔다. 온 제작단이 떨쳐나서 려관방들이며 야외촬영장들을 샅샅이 뒤졌으나 그 수염은 나타나지 않았다. 선비역을 맡은 배우는 억울한 혐의를 뒤집어쓴 사람처럼 얼굴이 벌개져서 자기는 촬영이 끝난 다음 수염을 분장사한테 바쳤노라고 우겨댔다. 미혜는 그것을 받았다거나 받지 않았다거나 하는 소리도 없이 그저 울상이 되여 돌아갔다. 사람들은 안타까운 나머지 그까짓 수염이야 하나 제꺽 새롭게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처녀를 위로하였다. 미혜는 그 소리를 분장미술에 대한 홀시로 받아들였던지 발끈해졌다. 창작이 계렬식생산인줄 아느냐고 쏘아붙이면서… 무슨 수를 써도 잃어버린것과 꼭 같은 수염은 절대 만들어낼수 없다는것이였다. 그것은 보통수염도 아니고 좌천되여 초야에 묻혀버린 절개굳센 량반의 고결한 성품과 그 허전한 인생의 슬픔을 표현하는 형상세부이기때문에 자기가 한달동안이나 고심하여 창작한것이라고 하면서 눈물까지 보였다. 사람들은 여러가지로 방도를 모색하다가 개성에 작중인물인 선비와 비슷한 용모의 로인들이 있을수 있는데 그들을 잘 설득하여 수염 몇오리씩 잘라오자는 안을 내놓았다. 제작단장은 모두 정신들이 있는가, 구습에 완고한 이 지방에서는 절대 그렇게 할수 없다고 엄하게 꾸짖었다. 제작단은 촬영을 중지하는가 마는가 하는 난처한 궁지에 빠졌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철룡은 그 수염이 자기 호주머니에 들어있는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제야 이틀전일이 생각났다. 선비역을 맡은 배우가 점심시간에 촬영장곁의 간이식당에서 숟가락질하기 거치장스러운 수염을 식탁에 떼놓고 식사하고는 그냥 나갔는데 그것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던것이다. 철룡은 그때 작품의 전반적인 조화와는 관계없이 자기에게 대사화면을 몇개 더 달라고 요구하는 주인공배우와의 론쟁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그 일을 까마득히 잊었던것이다. 수염을 분장사에게 넘겨준 다음 연출가는 기쁜김에 철룡의 어깨를 툭 치며 공연히 처녀를 울렸다고 하면서 과시 강고민이라고 웃어댔다. 철룡은 처녀에게 여간 미안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촬영의 전기간 그를 극진히 보살펴주고 도와주었다. 영화가 세상에 나간 다음 그는 신수사납게도 여름감기에 걸려 합숙에 누워있게 되였다. 어느날 생각지도 않았던 미혜가 문병와서 반시간가량 앉아있다 갔는데 밤에 그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한달후 그들은 남다른 사이로 되였다. 그때 철룡에게는 사랑이란 누구도 없는데서 둘이 함께 있고싶은 감정이고 욕망이였다. 그래서 휴일이나 명절날이면 처녀를 끌고 사람들의 눈을 멀리 피하여 교외의 숲속을 돌아다녔다. 미혜는 까다롭게 굴지 않고 순순히 응하였다. 늦어서 첫 사랑을 체험하는 제대군인의 끝없는 열정과 처녀의 순진하고 장난기 심한 마음은 한데 어울려져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별의별 환락을 다 궁리해냈다. 철룡이 까마득한 살구나무로 기여올라가 가지를 마구 흔들어 열매를 털면 처녀는 밑에서 좋아라 손벽을 치며 돌아치면서 그것들을 주어모았다. 《선물찾기》를 시작하여 철룡이 수풀속을 돌아치다가 나리꽃 한송이를 꺾어가지고 뛰여가서 처녀에게 선물로 내밀면 미혜는 등뒤에 감추었던 밥알꽃송이를 보란듯이 내미는것이였다. 철룡이 싸리버섯을 내밀면 처녀는 어느새 어디서 땄는지 참나무버섯을 내밀었다. 철룡이 돌쪼각을 내밀면 미혜는 모래 한줌을 내밀었다. 나리꽃과 밥알꽃, 싸리버섯과 참나무버섯, 돌쪼각과 모래 한줌… 보지 않고도 맞아떨어지는 이런 류사한 일치가 너무 신기하고 기뻐서 행복감에 한껏 도취된 둘은 풀밭에 가지런히 누워 나무가지들사이로 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미래를 공상하였다. 공상속에 그려지는 그들의 미래는 영화연출가와 분장예술가의 조화로운 가정이였으며 보람찬 창조생활이였다. 철룡은 공상에 잠겼다가도 아이들처럼 천진란만해져 힘살이 꿈틀거리는 팔뚝자랑을 했고 미혜는 살결고운 팔에 도드라진 두개의 우두자리를 보이며 자기 몸에는 이 두개의 상처밖에는 없다고 자랑하였다. 때로는 공연한 트집을 걸어 다투기도 하였다. 때로는 예술적인 문제를 가지고 열이 나서 론쟁도 하였다. 철룡은 미혜와의 공통점을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하여 미술사를 부지런히 공부했고 미혜는 철룡의 마음에 더 들려고 그의 식성에 따라 매운 음식도 꺼려하지 않고 먹다가는 입을 싸쥐고 맴돌이쳤다. 철룡은 그것이 재미나서 큰소리로 웃어댔고 미혜는 그런다고 주먹으로 그의 잔등을 콩당콩당 때렸다. 철룡은 언제인가 구라파의 한 시인이 사랑의 열정을 이기지 못하여 거목의 뿌리를 붓으로 삼아 저 하늘에 가득 <내 그대를 사랑하노라>고 써놓고싶다고 노래한 시를 읽고 너무 표현이 과장되였다고 비난한적이 있었는데 지금에는 그 심정이 어느정도 리해되였다. 그는 하늘에는 글을 써놓고싶지 않았지만 땅에는 사랑의 표적을 남기고싶었다. 그래서 미혜가 무척 좋아했고 그 시절 어느 식료상점에나 흔해빠졌던 칼피스를 여러병 사들고 길을 떠났으며 그것을 마시고는 빈병을 땅속에 깊이 박아넣으면서 미혜더러 20년이나 30년이 지나 이자리에 다시 찾아와서 오늘을 추억하자고 했다. 한번은 처녀가 입김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서서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 철룡은 그 물음에 당황해져 잠시 망설이다가 기지있게 대답했다. 미혜가 이슬로 될수 있다면 그를 늘 눈에 넣고다니겠노라고… 처녀는 전률이 오는듯 몸을 떨며 한번 이슬이 되여봤으면… 하고 탄식했다. 빈병은 모란봉의 숲속에도, 대성산 기슭에도, 장수산 중턱에도 묻혔다. 그렇게 병들을 묻고나면 그 산들이 모두 사랑의 증견자, 사랑의 기념비로 느껴졌으며 그 산들이 허물어져 없어지지 않는 한 자기네 사랑의 약속도 허물어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가슴에 바위처럼 들어앉은것이였다.… 침대우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검은 남자장갑이 눈길을 끌었다. 무척 눈에 익은 장갑이였으나 누가 저런것을 끼고다니던지 생각나지 않았다. 이때 미혜가 들어왔다. 처녀는 세타소매를 팔굽까지 걷어올려 시뻘겋게 드러난 팔에서 물기를 털며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비릿한 빨래비누냄새가 풍겨왔다. 처녀는 빨래를 성급하게 한탓인지 빨갛게 홍조가 타오른 얼굴로 숨소리를 쌔근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나는 묵은 빨래를 둬두고는 잠도 못자요. 그리고 처벌이였어요. 밤늦게 술마시고 찾아온… 정신이 좀 맑아졌어요?》 철룡은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오늘저녁 승진연출가동지네 집에 모였다지요? 잘 놀았어요?》 《괜찮았소.》 《전 촬영때문에 남아있었는데 모두 퇴근한 다음 박경섭동지로부터 부총장동지한테 전화가 왔어요. 수령님께서 영화가 좋다는데 어서 보고싶다고 하셨대요. 얼마나 좋을가…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요?》 《내 얼굴이 어떤가?》 (저건 한기석이 장갑이다. 틀림없어. 그의 장갑이 어떻게 여기와 있는가?) 촉기빠른 미혜는 그의 눈길이 흘깃 갔던데를 돌아보더니 그 장갑을 쥐여들어 무릎우에 올려놓으며 한기석이 장갑이라고 했다. 《코가 터져 손가락이 나오게 됐어요. 기워주자고 가져왔어요.》 철룡은 언제부터 그렇게 가까와졌느냐고 묻자다가 처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가봐 그만두었다. 《한가지 물어보면 솔직히 말하겠소?》 《내가 언제 솔직하지 않은적이 있어요?》 《기석동무한테 무슨 소릴 한적이 있소?》 《아니… 무슨 소린데요?》 《나한테 무슨 불만이 있다거나 속이 탄다거나 그러루한…》 《그가 뭐라고 해요?》 《그저 그러루한 소리요.》 《어마나, 그래서 이 밤중에 찾아왔군요. 호호호… 어린애처럼… 언제 철이 들가… 자기가 이전에 나한테 말하구서… 맑은 호수를 보면 누구나 돌이나 흙덩이 같은걸 던져보고싶어 못견딘다고… 어떻게 흐려지는가. 어떻게 파문이 이는가 보고싶어서… 깊이가 얼마나 되는가 알고싶어서… 그래서 자그마한 흙덩이를 던졌겠는데 뭘 그래요.》 철룡은 어줍게 웃었다. 《아니, 그래 온건 아니요.》 처녀는 눈을 곱게 흘기였다. 《철룡동무… 기석오빠하고 사이좋게 지내요. 엄마하고 그의 아버지하고 옛날부터 아는 사이였고 부모들의 그 인연때문에 우리도 좀 가까와요. 약간… 가까이 지내겠어요?… 싫어요?… 싫으면 좋도록 해요.》 《싫고 좋고가 있는가, 같은 부서, 같은 부연출인데… 우린 가까운 사이요.》 《그래도 싫어하는것 같은데요… 좋아요. 우리는 국가들의 관계처럼 벗의 원쑤는 나의 원쑤다, 벗의 벗은 나의 벗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련대성의 부담을 지지 말자요. 개인들사이에 그런다는건 좀 별스럽지 않아요?》 《아니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미혜가 좋아하면 그만큼 우리들사이는 멀어지오.》 《아이, 꼭자다…》 미혜는 무릎우의 장갑을 침대머리쪽으로 던져버리고는 탄력있게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왔다. 처녀는 한손으로 책상모서리를 짚고 비스듬히 서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습관된 체취가 뭉클 안겨들었다. 《철룡동무…》 처녀는 살뜰한 정을 담아 나직이 속삭였다. 《어째 나를 산속으로만 끌고다녀요?》 《그게 싫소?》 《싫은건 아니지만 남들이 다 하는것처럼 하고싶어요.》 《남들이…?》 《어째 집에 가자는 소리는 한번도 안해요?… 남들이 다 하는것을…》 (남들이… 남들이… 남들은 어떻게 하는가. 사랑다음에는 약혼… 다음엔 결혼…가정…) 《형님이랑 형수님한테랑 인사도 하고 얼굴도 익히구싶어요.》 그것은 기다리고 기다리면서도 두려워했던것이였다. 행복감에 가슴이 터지는듯했다. 그리고 그만큼 불안감이 엄습해들었다. 철룡은 의자를 뒤로 밀어버리고는 벌떡 일어섰다. 굽실굽실 흘러내린 처녀의 윤나는 머리가 가까이에서 향기를 풍겼다. 《우리집에 가고싶어?》 미혜는 머리를 끄덕였다. 《걱정말아요… 얌전하게 굴게요.》 철룡은 처녀의 따뜻한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때 출입문이 열리고 미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느냐?》 둘은 화닥 놀라 물러섰다. 미혜는 황황히 복도로 뛰여나갔다. 《아이, 엄마, 어떻게 이런 밤중에…?》 《료양소에서 여기로 오는 차편이 있어서 떠났다.》 《거기 약수가 맞아요?》 《모르겠다. 꼴을 보려마.》 《얼굴이 좀 좋아진것 같은데요.》 《좋아지긴…》 미혜가 무엇이라고 귀속말로 속삭이는것 같더니 걸어들어오는 발자국소리가 났다. 보통아낙네들의 나들이차림처럼 수수한 치마저고리를 입은 리명선이 방안에 꼿꼿이 서있는 철룡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놀라운 기색을 애써 감추면서 총각의 인사에 린색한 미소로써 대답했다. 《너무 늦었구만…》 그리고는 아무말없이 문앞을 지나 웃방으로 들어갔다. 미혜가 따라들어가 소곤소곤 변명하는 소리가 나더니 리명선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해한다. 리해해…》 《승진아저씨 작품이 시사회에서 대절찬을 받았어요. 그래서 연출실에서랑 그 집에 다 모였더랬어요. 축하하러…》 《그래?… 그렇게 걸작이냐? 아유- 이제야 우리 영화계에 볕이 드는 모양이구나… 료양소에서는 이제 돌아가면 사직해서 년로보장에 넘어가자고 마음먹었더랬는데…》 《엄마, 이런때 왜 사직하겠어요. 그런 생각 말아요.》 철룡은 그자리에 엉거주춤 서서 등골에 식은 땀을 느끼며 모녀의 이야기를 듣고있었다. 되돌이 목록감 상 글 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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