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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6
그이께서는 전화로 박경섭을 찾아 급한 일이 생겨 오후 늦어서야 돌아올것 같다고 하시면서 혼자서 리명선을 만나라고 이르시엿다. 리명선에게 기쁨과 행복감을 한껏 안겨주고싶었던 박경섭은 너무 아쉽고 섭섭하여 한동안 송수화기를 놓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었다. 그는 리명선을 인차 부르려다가 생각을 돌려 오후 늦게까지 기다려보자고 마음먹었다. 오후 3시 촬영소로부터 로영무네가 현지에서 촬영한 작업필림이 올라와 그이를 더욱 안타깝게 기다리게 되였다. 그러나 오후 5시가 지나고 창밖에 어스름이 내려도 그이께서는 돌아오시지 못하였다. 그는 하는수 없이 리명선을 불렀다. 머리를 단정히 다듬고 연한 미색치마저고리로 소박하게 단장한 리명선은 젊은 지도원에게 안내되여 조심스럽게 방에 들어섰다. 그는 문앞에까지 나와 맞아주는 박경섭에게 반겨웃으며 인사했으나 미소어린 눈에서는 기쁨과 감격뿐아니라 긴장과 불안의 빛도 느껴졌다. 박경섭은 몇마디 인사말을 나눈다음 응접탁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앉아서는 오래간만에 만났다는 내색은 전혀 내비치지 않고 흔연하게 세태적인 이야기부터 꺼내였다. 《열쇠가 없어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댔는데 그래 문은 열었습니까?》 리명선은 당중앙위원회에 들어와서 자기집 열쇠이야기를 듣게 되자 그 어떤 혈연적인 친근감을 느끼는지 눈에 물기가 어리는듯 했다. 그는 눈길을 다소곳이 떨구고 마른침을 삼키고는 인차 밝은 얼굴이 되여 대답했다. 《제작처장동무랑 배우단에서랑 몇동무들이 와서 암만 곁쇠질을 해봐야 열려야지요. 그래서 죄없는 자물쇠와 미혜가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몰라요. 나중에는 제작처장동무가 화김에 쇠망치로 자물쇠를 깠습니다.》 《거 잘했습니다. 허허허…》 리명선은 따라웃다가 얼른 소매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굽을 찍었다. 박경섭은 계속하여 건강상태며 가정형편을 물어보면서 그의 달라진 모색에 은근히 마음을 썼다. 꽃나이시절에는 조선녀성의 정신미와 비운의 모습을 상징했었고 중년이 되여서는 총을 잡은 처녀로 화면에 나타나 사람들을 원쑤격멸의 성전에로 부르던 오랜 녀배우의 얼굴은 세월이 가차없이 그려놓은 주름살에도 불구하고 옛모색을 어지간히 간직하고있었다. 그러나 볕에 그슬린 얼굴과 손이며 엉성하게 높아진듯한 어깨, 눈꼬리에 패인 주름살에 어리는 구슬픈 미소는 남몰래 체험한 심뇌와 좌절감의 흔적으로 느껴지면서 어딘지 모르게 산촌의 늙은 녀교원과 같은 인상을 풍기였다. 그의 넋에서 예술가의 시정은 꺼져버린듯하였다. 《촬영기앞에 다시 서볼 생각은 없습니까?》 《제가요?》 《예… 지금 로역배우들이 매우 적습니다.》 《저야 이제 어떻게…》 대답은 그랬으나 눈에는 생기가 빛났다. 《사실 오늘 김정일동지께서 동무를 만나시겠다고 하셨는데 사정이 생겨 제가 혼자서 만나게 되였습니다.》 리명선은 얼굴빛이 경건해져 저고리앞섶을 여미였다. 박경섭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영화예술인대오로 다시 돌아오고싶어하는 리명선동무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시여 동무를 촬영소에 복직시키도록 배려하여주셨습니다. 리명선동무가 왜정때에도, 해방직후 서울에서도 공화국북반부로 들어온 이후에도 량심적으로 살았으며 열정적으로 예술활동을 하였다고 높이 평가해주시면서 잘 돌봐줘야겠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습니다.》 리명선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어깨가 조용히 오르내렸다. 박경섭은 잠시 말을 끊고 격정을 눌렀다. 《이 사랑과 배려를 길이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자리에 앉자 리명선은 손수건으로 눈을 훔치고는 일어나서 《오고싶었습니다.…》 하고 울음섞인 목소리로 한마디 하고는 그만 설음이 터져올라 한손으로 입을 싸쥐였다. 그의 어깨가 물결쳤다. 그는 격정에 몸을 주체할길 없어 자리에 주저앉아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박경섭이도 눈언저리가 벌개져 한동안 말을 못했다. 《나도 정말 기쁩니다.》 리명선은 좀 진정이 되자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집에 가서 푹 쉬고 래일아침 촬영소에 나가보십시오… 앞으로 영화에 출연하는것도 좋지만 신인배우들을 키우는데 힘을 넣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니라 김정일동지의 뜻입니다.》 《저야 사실 그때 좌절감에 져서 도피해간거나 같은데 그분이 어떻게 … 저한테까지 이런 관심을 돌려주십니까?》 《리명선동무가 병때문에 고생하다가 년로보장에 넘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얼마나 가슴아파하셨는지 모릅니다. 남반부에서 우리를 찾아들어와 내내 혼자 지낸 녀성인데 곁에서 어떻게 보살폈으면 병을 그렇게 키웠느냐고, 병이 생겼으면 어째 제때에 대책을 취해서 고쳐주지 못했느냐고… 그리고 본인이야 정신적타격도 컸겠지만 미안해서 년로보장에 넘겨달라고 했겠는데 사람의 운명을 그렇게 실무적으로 처리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몹시 나무람하셨습니다. 나는 정말 그 의리심과 인정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저 사망한 최승진동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엔 그를 살려보자고 얼마나 애쓰셨는지 압니까.》 박경섭은 괴로운 얼굴로 한숨을 조용히 내쉬였다. 《그이에 비하면 우린 정말 매정한들입니다. 나는 김정일동지를 가까이에 모시고 사업하면서 철두철미한 원칙성에 감동되는 경우도 많지만 다감다정한 인정때문에 몰래 눈물을 삼킨 일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만약 누가 나한테 인간으로서의 김정일동지는 어떤분인가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리성과 감성, 의지와 인정이 인격속에 가장 조화롭게 체현된분이라고…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리명선은 그윽하게 빛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저는 정말 아는것이 너무 적어요.》 《명선동무, 그이께서는 수령님께서 해방직후부터 명선동무를 얼마나 귀중히 여겼는가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수령님께서 아끼고 사랑하신 인재들을 계속 보살펴주시려는것은 그이의 확고한 사업신조인것 같습니다. 나는 이 점에서도 수령님에 대한 그이의 절대적인 충실성을 느낍니다.… 정말 우리 다같이 보답해야 됩니다.》 《예… 힘껏 일하겠어요. 어떻게나 보답하겠습니다.》 박경섭은 의자등받이에 몸을 젖힐사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일도 마음껏 하고 여생의 락도 한껏 누리십시오. 사위랑도 어서 맞아서… 참 미혜가 철룡이하구 관계에서 좀 곡절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댔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리명선은 입가에 서글픈 미소를 그리였다. 《아주 남남이 된것 같아요.》 전화종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전화기우의 빨간 신호등이 깜빡거렸다. 박경섭은 순간에 얼굴빛이 긴장해져 그 전화기로 가서 송수화기를 들었다. 《예… 박경섭이 전화를 받습니다! 예… 예…》 감도가 좋은 송수화기에서 울리는 음성이 리명선에게까지 흘러왔다. 그 녀자는 무례하게 엿듣는것 같아 고개를 약간 외로 돌리며 조용히 눈을 내리떴다. 듣지 않으려고 애쓸수록 흘러오는 음성이 더더욱 선명해지며 가슴을 울리였다. 《…얼굴이야 상했겠지… 목소리는 변하지 않았소?》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소? 참 다행이요! 내가 꼭 만나자고 했는데 미안하게 됐소. 미안하오…》 리명선은 비로소 이것이 자기에 대한 통화이며 저쪽에서 말씀하는분이 누구이시라는것을 직감하고 고개를 떨어뜨리며 한손으로 이마를 싸쥐였다. 가슴이 쿵쿵 뛰고 눈앞에 희부연 안개가 소용돌이치는듯하면서 좌절감으로 촬영소를 떠났던 일, 영화예술과 그 벗들을 멀리하고 체험한 고독감과 가책과 온갖 괴로움들이 먼 번개빛의 희미한 번쩍거림처럼 뇌리에 어른거렸다. 뜨거운것이 억누를수 없는 힘으로 목에 차오르며 숨이 막혔다. 《… 예술적감각이 아주 무뎌지지 않았는지… 그랬으면 야단입니다. 문학 예술부문에 대한 교시들과 당정책도 공부시키고 그 사이에 나온 영화들도 다 보여줘야겠소.》 《예… 예…》 《감각을 … 예술적감각을 빨리… 완전히 회복할수 있도록 잘 보살펴줘야 하겠습니다.…》 리명선은 그만 허물어지듯이 응접탁에 엎어져 소리를 내여 흐느껴 울었다. 이마를 고인 손등에 흘러내린 재빛머리칼이 끝없이 물결쳤다. 박경섭이 언제 다가왔는지 팔을 잡아흔든다. 《아, 아 이러지 말고… 전화를 받으십시오. 출장지에 계시는 김정일동지께서 전화하십니다. 목소리라도 듣고싶다고 하시며 바꾸랍니다.》 그 녀자는 어떻게 몸매를 수습하고 송수화기를 받아들었는지 몰랐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건강은 어떻습니까?》 수화구에서 목소리만이 아니라 힘찬 기운과 열이 파도쳐나오는듯하여 가슴이 확 달아오르고 온몸을 후들후들 떨게 되였다. 《건강은 … 건강은 … 좋아졌습니다.》 《됐습니다. 그거 참 다행입니다! 그러나 년세가 있는것만큼 조심해야 됩니다.》 《예…》 리명선은 목이 점점 더 메여 간신히 대답하였다. 《자기 몸이라고 해서 자기자신의것으로만 여겨서는 안됩니다. 우리 영화예술의 귀중한 밑천이고 재부입니다. 알겠습니까? 때문에 앞으로 생활총화에서는 건강관리를 어떻게 했는가 하는 문제를 잊지 말고 자주 총화지어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예?》 《예… 예…》 《아니 오늘은 좋은 날인데 목소리가 왜 그렇습니까? 한번 시원하게 웃어보십시오. 좀 들어봅시다. 웃음소리를 들어보면 건강이 정말 좋아졌는가 알수 있겠는데… 허허허…》 어느덧 소녀의 마음이 된 리명선은 웃어보려고 입술을 떨다가 그만 설음같은것이 터져올라 흐느끼고 말았다. 송수화기를 가슴우에 붙안은채… 어찌하여 수도의 불빛바다는 저리도 생동하게 반짝이며 불빛바다가 다정한 미소처럼 보이는것일가. 거리의 대기는 이리도 상쾌하고 감미로우며 또 하늘은 저리도 시원하게 틔여있는것인가. 아, 세상과 생활이란 이렇듯 애정에 넘쳐있고 아름답고 고상하고 백년이고 천년이고 살며 일해보고싶도록 좋은것이였는가! 박경섭의 바래움을 받으며 밖에 나온 리명선은 세상에 새로 태여난듯, 그것도 가장 행복한 운명을 지니고 태여난듯한 환희로 머리가 핑 돌았다. 이어 나이를 너무 먹었다는 한탄과 함께 오래 살아 한껏 일하고싶은 욕망이 불길처럼 피여오르며 가슴을 저릿하게 지지였다. 그가 박경섭이와 혜여져 접수실밖으로 총총히 걸어나오는데 체구가 우람한 사람이 앞을 막아서며 푸접이 좋게 허리를 굽석 꺾어 인사했다. 《리명선동지가 아닙니까? 》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다. 《강세룡이라고 합니다. 철룡이 형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리명선은 가슴에 넘치는 행복감으로 하여 이전의 감정을 잊고 반겨 인사했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시내에 쫙 퍼진 소문을 듣고 촬영소에 가니 여기로 오셨다더군요. 그래 달려와서 기다렸습니다.》 《고마와요…》 《지난날 노여웠지요? 저를 용서하십시오.》 《다 지나간 일인데 무얼 이러십니까.》 《사실은 하고싶은 얘기도 있구해서…》 길건너 주차장쪽에서 승용차 한대가 서서히 미끄러져 오더니 그들곁에 와 멎어섰다. 강세룡이 차문을 열며 어서 타라고 권하였다. 리명선은 갑자기 얼굴빛이 달라지며 걸어가겠다고 쌀쌀하게 사양하였다. 강세룡은 거의 우격다짐으로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젊은이들처럼 밀고당기는 힘내기도 할수 없어 녀자편이 지고말았다. 가볍지 않은 인생문제가 실린 차는 가로등불빛이 밝은 거리로 천천히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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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동지께서는 이튿날 오후에야 돌아오시였다. 그이께서는 《꽃파는 처녀》필림이 현지에서 올라왔다는 보고를 받으시자 못내 기뻐하며 편집이 끝나면 인차 보자고 하시였다. 이튿날 오전 김정일동지께서 두번이나 필림현상이 끝났느냐고 물어보시였는데 오후 박경섭이 필림이 현상되여 편집실로 넘어간것을 보고드리자 흥분된 음성으로 촬영소에 나가보자고 하시는것이였다. 편집기앞에 나란히 앉아 필림을 편집하던 윤희와 철룡은 그이께서 방에 들어서시자 너무도 뜻밖이고 당황하여 의자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났으나 인사드리는것도 잊고 엉거주춤 굳어졌다. 박경섭과 함께 그이를 따라 들어온 총장과 부총장도 어쩔바를 모르고 서성거리기만 하였다. 방안에 신선한 기운이 감도는듯하였다. 그이께서는 편집기앞에 선 윤희를 보고 못내 기뻐하시였으며 철룡이도 인차 알아보고 손을 뜨겁게 잡아주며 현지에 나가있는 연출가와 촬영가, 창조성원들이 다 건강한가고 물으시였다. 북방의 바람에 얼굴이 검스럼하게 탄 철룡은 병사처럼 차렷자세를 취하며 다 건강하다고 힘차게 대답하였다. 그 대답에 밝은 미소를 지으신 그이께서 철룡의 목에 걸린 필림을 조심스럽게 들어 불빛에 비쳐보며 아주 빨리 찍었다고, 수고스럽게 찍은건데 가위질을 주의해서 하라고 다심하게 이르시였다. 이윽고 윤희와 철룡은 그이의 손짓에 순응하여 다시 기대앞에 앉아 편집작업을 계속하였다. 그이께서는 총장이 갖다놓은 의자에 앉아 두사람의 머리사이로 편집기의 희푸르스름한 화면을 주의깊이 내다보다가 배우들의 연기며 현지의 촬영조건에 대하여 철룡에게 조용조용 물으시는가 하면 가위로 필림을 자를 때마다 너무 자르지 않는가 마음을 쓰시였다. 그이의 뒤쪽에 앉아있는 박경섭은 자꾸 목이 메여올라 마른침만 삼키고있었다. (얼마나 관심이 깊으면 이러시겠는가…) 그이의 주의집중과 여느사람들의 초긴장으로 하여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몰랐는데 소리없이 다가온 총장이 팔을 건드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켜서야 박경섭은 식사시간이 퍽 지났음을 깨닫고 펄쩍 놀랐다. 그는 허리를 구부정하고 김정일동지께로 다가가 귀속말로 시간을 알려드렸다. 그이께서는 긴장한 사색의 빛이 력연한 안색으로 돌아보며 괜찮다고, 오늘 저녁에는 내가 수고하는 동무들한테 한턱 쓰고싶어 집에 말해두었으니 이제 식사가 올것이라고 하시면서 함께 밤을 새워보자고 말씀하시였다. 모두 더 당황해지고 송구스러움과 감격에 어쩔바를 모르며 술렁거리였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환하게 생긴 젊은 일군이 식사가 든 지함을 들고 방에 들어섰다. 총장과 부총장이 얼굴빛까지 해쓱해져 이런 작업장에서 어떻게 식사를 하시겠는가고, 그이를 촬영소식당에 모시자고 수군수군 의논하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의자에서 일어나 활달하게 걸어나오며 손을 저으시였다. 《아니… 아니… 괜찮소. 농장원들도 정 일이 바쁘면 밭머리에서 참을 드는데 여기도 좋습니다!》 그이께서는 총장과 부총장이 식탁대신으로 책상을 들어오는것도 굳이 말리시며 여기서 가정적으로 빙 둘러앉아 저녁을 들자고 하시였다. 방바닥에 전장짜리 백지 여러장을 깔고 그우에 깨끗한 보를 펴고 식사를 풀어놓으니 네댓사람분의 푸짐한 저녁상이 되였다. 그이께서는 편집기뒤에 숨은 윤희며 의자곁에 얼어붙어 서있는 철룡을 끌어다가 자리에 눌러앉히고 소탈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수저까지 쥐여주시였다. 꿇어앉아 겨우 수저를 받아든 윤희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것을 감추려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이께서는 윤희에게 무엇이라고 이르려다가 말고 옹송그리고 앉아있는 철룡에게 롱말을 던지시였다. 《대장부 앉음새가 그게 뭔가. 그래가지고야 먹는게 속에 떨어지겠나. 상을 좀 보라구. 반주가 없는게 좀 유감이지? 응? 그건 이제 영화만 잘 만들면 불이 펄펄 이는걸 내겠소!》 《정말입니까?》 철룡의 입에서 얼결에 튀여나온 소리에 그이께서는 무릎을 치며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됐어!… 됐어!》 윤희도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방긋 웃었다. 밥상머리에 단란한 가정의 화기가 도는듯하였다. 그이께서는 몸을 뒤로 젖혀 저만치에 서서 벙글거리는 박경섭을 돌아보며 총장과 부총장은 어디 갔는가고 물으시였다. 박경섭이 복도로 나가니 문곁에서 부총장과 함께 서성거리던 총장이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불같은 말을 토로하였다. 《저희들은 괜찮습니다. 이 저녁… 이 밤을 일생 잊지 않겠습니다!》 안쪽에서 그이의 유쾌한 음성이 울렸다. 《거기선 뭘하오- 또 회의요- 그 졸장부들을 당장 끌어오오!》 밤이 깊어 편집작업이 끝나자 김정일동지께서는 필림을 시사실의 고성능영사기에 걸고 영화흐름을 보자고 하시였다. 아늑한 시사실에는 정숙이 깃들어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시사실에 들어오시자 객석의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아 연출대본을 펼치고 한장 또 한장 번져가며 촬영된 장면들을 더듬어보시였다. 그이의 곁에 자리를 잡은 총장과 부총장은 물론 박경섭도 전에 없는 흥분과 긴장감에 사로잡혀 그이께서 번져가시는 연출대본에 눈길을 주고는 어떤 물음에나 대답할 차비를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이께서는 표식도 하고 밑줄도 그어가며 작중인물들의 대사들을 다 읽어보시고는 화면을 보자고 하시였다. 총장이 신호단추를 누르자 암전이 되였다. 영사막에 절묘한 바위들이 삐죽삐죽 솟은 우중충한 산발들이 흐르더니 연분홍, 진분홍의 불길이 휩쓸고있는 야산이 펼쳐진다. 그 불길들은 망울이 졌거나 활짝 핀 진달래덤불들이다. 진달래는 산꼭대기, 산중턱, 기슭, 어디에나 다 피였다. 그리고 각가지 꽃들이 애솔둘레에도, 너럭바위곁에도, 고목들밑에도, 어느 집안 선조의 오랜 묘지곁에도 탐스럽게 피여 바람결에 야드르르한 꽃잎들을 한들거린다. 화조가 어찌나 밝은지 고개를 숙인 꽃순이며 이파리에 흐르는 이슬, 방싯 벌려진 꽃망울속의 발깃한 색조까지 다 가려보인다. 그 꽃동산에서 싱그러운 봄기운이 풍겨나와 가슴에 뭉클 안겨드는듯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저으기 놀라신 안색으로 총장을 돌아보시였다. 《저게 다 생화들이 아니요? 거기에 눈이 내렸다는데 어디서 저렇게 많이 가져왔소?》 《회성사람들이 촬영을 돕자고 피운겝니다.》 《군당책임비서는 한개 리에만 포치했다던데…》 《소문을 듣고 군안의 숱한 집에서 피웠답니다. 지어는 린접군의 가까운 마을에서까지…》 《그랬군… 아마 우리 조선사람들처럼 예술적인 민족은 세상에 드물거요.》 《당을 받드는 인민들의 지성인것 같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화면을 바라보시였다. 그이의 시선이 화면으로 옮겨지자 시사실의 공기마저 긴장된 사색의 세계에로 잠겨드는듯하였다. 가난이 흐르는 초라한 옷차림의 꽃분이가 다래끼를 옆에 안고 동산으로 걸어오른다. 눈물겨운 인생을 돕자고 앞을 다투어 피여난듯 여기저기에서 불길처럼 날름거리는 진달래를 둘러보는 처녀의 얼굴이 이름할수 없는 기쁨으로 밝아진다. 처녀는 처음에는 꽃들이 어디로 숨어버릴가봐 겁나하는듯 헤덤비며 달려나가 아무 꽃이나 마구 꺾다가 더 이쁜꽃, 더 탐스럽게 망울진 꽃들을 골라서 꺾기 시작한다. 설레이는 꽃잎들, 자기를 먼저 꺾어달라 조르는듯 처녀의 팔이며 볼이며 치마자락에 감겨드는 꽃들, 꽃들이 잡관목덤불속에서도, 애솔뒤에서도, 너럭바위곁에서도 얼굴을 빠끔히 내밀며 손저어부른다. 꽃분이는 어느 꽃을 먼저 꺾었으면 좋을지 몰라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손등으로 쓸어올리며 한숨을 호 내쉰다. 이 꽃들을 팔아 약을 사오면 어머니를 구원할수 있겠다고 생각하는듯 처녀의 얼굴이 환히 밝아진다. 꽃잎들에 맺힌 이슬은 처녀의 가슴에서 떨어진 기쁨의 눈물인듯… 꽃분이는 다시 걸음을 옮겨가며 진달래를 한가지 또 한가지 정성담아 꺾는다. 꽃을 꺾는 처녀의 눈에 미소가 어리고 희망의 빛이 반짝인다. 꽃분이는 꽃을 꺾다가 허리를 펴고 먼 마을쪽을 바라보는데 마음은 벌써 어머니의 머리맡에 가있는듯 그 눈이 살뜰한 위안의 말을 속삭이며 그지없이 부드럽게 빛난다. (저것이다. 바로 저것이다.) 하고 박경섭은 속으로 웨쳤다. 여기저기 옮겨가며 꽃을 꺾는 처녀의 그 모습들에서는 매번 그의 작은 가슴속에서 찰랑거리는 감정의 물결이 뚜렷이 느껴진다. 꽃들의 인상은 점점 흐려지고 처녀의 갸륵한 마음과 수정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운 넋이 화면에 가득차서 설레이는듯하다. 박경섭은 자기의 공감과 흥분이 커질수록 그이의 평가가 어떨지 몰라 가슴을 더더욱 조이게 되였다. 꽃동산장면이 끝나자 불이 켜졌다. 김정일동지께서는 한점의 그림자도 없는 흰 영사막에서 한동안 눈길을 떼시지 못하다가 흥분된 안색으로 박경섭을 돌아보시였다. 《저 동무가 몇살이던가?》 《17살입니다.》 《동무 보기에는 연기가 어떻소?》 《괜찮은것 같습니다.》 《아주 잘하오. 어머니를 위하는 마음이 뜨겁게 안겨오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진실하고 섬세하게 형상되였소. 어머니에 대한 사랑… 이것은 사람의 가슴에 제일 처음으로 움트는 감정이 아니겠소. 그리고 자라면 우정으로, 련정으로, 향토애, 웅심깊은 조국애, 아량이 넓은 인간애로 꽃펴날수 있는 심혼의 씨앗이라고 할수 있지. 때문에 이 작품에서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잘 그리는것은 주인공의 성장과 주제사상의 울림을 크게 하는데 매우 중요하오. 로영무동무하고 전체 창조성원들에게 이 문제를 특별히 강조해주어야 하겠습니다.》 《예…》 총장이 그이의 말씀을 받아쓰며 조용히 대답하였다. 《주인공이 이렇게만 연기를 해주면 괜찮겠소. 17살이라… 금년봄에 청산리에 나갔다가 처음 만나보았소. 그날 배우양성소동무들도 촬영소예술인들과 같이 청산리에 나가 모내기를 도와주고있었소. 그때는 철없는 처녀애같더니… 재능이 있군… 로영무연출가의 수고도 컸겠지만…》 박경섭이 미소어린 얼굴로 말씀드렸다. 《전국적인 판도에서 찾아보고 고른 동무가 아닙니까.》 《다음장면을 봅시다.》 영사막에는 꽃분이와 순희가 약을 사가지고 오다가 비를 맞고 나무밑에서 오돌오돌 떠는 장면, 꽃분이가 감옥의 오빠를 찾아가는 장면이 흘러지나가고 마름의 생활이 비쳐졌다. 지주집뜨락에서 다리를 절뚝거리며 오락가락 서성거리는 마름… 고목밑에서 언니를 기다리는 순희…퇴마루에 거드름스럽게 앉아있는 지주에게 무엇이라고 귀띔하는 마름… 김정일동지께서는 웬일인지 마름장면을 다시 돌리라고 하시였다. 영사막에 마름장면이 다시 비쳐지자 그이께서는 팔굽으로 앞탁을 짚고 흘러가는 화면을 주의깊이 바라보시였다. 박경섭은 어둠속에서도 그이의 안색이 흐려진것을 느꼈다. 불이 켜졌을 때 그이께서는 의아한 안색으로 박경섭을 돌아보시였다. 《이자 그 장면들은 하루에 찍은것들이요?》 《이틀에 나누어 찍은것 같습니다.》 《이틀에? 하루밤사이에 버짐이 옮겨질수 있는가?》 마름의 이마에 그려진 버짐을 념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인것 같았다. 《버짐 말입니까?》 《느끼지 못했소? 두 장면에서 버짐의 위치가 다르오. 약간 흔들렸소. 분장사가 누구입니까?》 《장미혜입니다.… 리명선동무의 딸입니다.》 《그 동무가 어머니 소식을 듣고 지내 흥분된게 아닌가요?》 《알아보겠습니다.》 그이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였다가 말씀을 이으시였다. 《꽃분이가 감옥의 오빠를 찾아가는 장면이 좀 무의미합니다. 그 장면을 주인공의 성격발전과 밀착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오빠한테로 찾아가는 먼길에서 꽃분이는 자기 고향마을의 범위를 벗어나 사회적모순을 더 폭넓게 느낄수 있습니다. 번개가 치고 비나 퍼붓게 해서는 의미가 뚜렷하지 못합니다. 꽃분이가 길을 가면서 철도부설장에서 고역에 시달리는 로동자들도 보고 철쇄에 묶인채로 맨발로 끌려가는 수인들도 보면서 나라없는 민족의 수난도 느끼고 왜놈들도 더 증오하게 되도록 형상하는것이 어떻습니까? 그래야 시대상도 나오고…》 총장과 부총장은 그 말씀에 공감되여 머리를 끄덕이며 수첩장우로 펜을 달리였다. 그이께서는 총체적인 인상을 정리하시는듯 명상적인 눈으로 영사막의 웃쪽 한점을 이윽토록 지켜보시였다. 《전반적으로는 괜찮은데… 동무들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어딘지 모르게 주인공의 연기수준이 한결같지 못한것 같습니다. 어떤데서는 굳어져보이고 어떤데서는 감정… 넘치던 감정이… 잦아들고…》 그이께서는 감정의 오묘한 흐름을 만져보시는듯 약간 쳐든 손으로 허공을 어루쓸며 이야기하시였다. 《나올듯나올듯하다가 마는데… 움츠러드는지… 감정을 아주 놓치고마는지…》 그이께서 갑자기 량옆을 돌아보며 누구인가를 찾으시였다. 《부연출동무가 왜 보이지 않소?》 영사실의 뒤쪽 구석에서 강철룡이 벌떡 일어섰다. 《아니 동무는 왜 거기 있습니까? 주인인데…》 박경섭이 나오라고 손짓하였다. 강철룡은 뒤좌석들에 관중들이 앉아있기라도 한듯 허리를 구부정하고 껑충 껑충 뛰여나왔다. 그가 박경섭의 곁에 오자 그이께서 부드럽게 물으시였다. 《현지 촬영계획에는 꽃분이가 감옥의 오빠를 찾아가는 장면전에 순희를 윽박지르는 장면을 찍게 되여있는데 어째 그 장면이 빠졌소?》 《찍지 못했습니다.》 《못찍었소?》 《예… 연기가 영 해결되지 않습니다.》 《거기는 감정이 좀 복잡하지… 어린 동무가 그럴수 있소. 그 동무한테 다른 애로는 없는가?》 《없습니다…》 강철룡은 얼굴이 벌개졌다 . 《없다…》 《저… 어머니가 앓는것 같습니다. 감기인지…》 그이께서는 앉으라고 손짓하고는 총장과 부총장을 돌아보시였다. 《주인공의 연기수준을 결정적으로 높이도록 제작단에 요구해야 하겠습니다. 이 작품의 총체적인 감정흐름은 원한의 축적과 폭발입니다. 꽃분이가 지주놈에게 불화로를 던지는 장면은 억눌려 살아온 인민대중의 세기적인 원한의 폭발을 상징하고있습니다. 이 장면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강렬한 호소성을 띠자면 꽃분이의 피눈물나는 체험세계, 그의 가슴에 원한이 쌓이는 과정이 진실하게 형상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하여 력사의 주체인 인민대중은 투쟁을 통해서만 삶의 길을 개척할수 있다는 위대한 진리를 밝혀주자고 합니다. 어린 배우에게 참 무거운 짐이 실렸습니다.…》 그이께서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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