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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5
로영무가 좀 늦어서 제작단에 돌아오니 강철룡이 려관뜨락에서 서성거리고있었다. 매우 초조한 얼굴이였다. 《손영실의 연기가 더 안됩니다. 순희를 욱박지르는 그 속에 눈먼 동생에 대한 동정과 애정, 세상에 대한 원한까지 터져나와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말해줬는데도 이거 참 … 제일 겉감정밖에 표현 못합니다.》 《여보게, 오늘은 다 잊고 푹 쉬지 않겠나. 래일아침에 방도를 토론해보자구. 아침에는 누구나 현명해진다는데…》 《아닙니다. 연출가동지, 무슨 문제가 있습니다. 저럴수야 있습니까. 담화해보지 않겠습니까?》 로영무는 자신도 불안했기에 저녁식사를 마치고 손영실을 불렀다. 처녀는 인차 왔다. 그는 아래방에서 처녀와 단둘이 마주앉아 이것저것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작단생활에서 애로되는것은 없는가, 아픈데는 없는가고 여러모로 따져물었다. 처녀는 없다고 하였다. 《집에서는 모두 무사한가?》 스치는 말로 물었다. 《예…》 《누구한테선가 어머니가 앓는다는 소리를 들은것 같은데…》 《괜찮아요…》 처녀는 눈길을 아래로 떨구었다. 로영무는 모두숨을 후- 내쉬였다. 《영실이… 힘들지? 음? 자주 반복련습을 요구하니까 싫지 않아?》 처녀는 억울한 오해라도 당하는듯 몹시 당황해서 얼굴을 쳐들었다. 《아니… 아니예요. 잘 안돼서 안타깝지 열번… 백번 련습해도 좋아요!》 《너무 조급해말라구. 어떤 큰 예술가도 구체적인 형상작업에서는 하찮은 세부에 걸려 며칠씩 애를 먹는 경우가 있거든. 순희를 욱박지르는 그 장면을 후에 찍고 감옥으로 찾아가는 장면을 먼저 찍을가 해…》 《아이, 그럼 어떻게 해요? 연출가동지, 밤새워 련습해서라도 꼭 해결하겠어요. 순서대로 계획대로 찍자요!》 처녀는 불꽃튀는듯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절절하게 간청하였다. 로영무는 윤기가 오르는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감한 정서와 총명한 두뇌, 괜찮은 표현의 재능에 이런 열정까지 지닌 처녀가 도대체 어디에 걸려 연기가 막혔을가싶어 더욱 애가 끓어번졌던것이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도무지 알길 없는 대상으로 여겨지는 처녀를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처녀는 그 눈길을 피하여 고개를 외로 틀었는데 윤나는 머리칼이 굽이쳐 흘러내린 아담한 귀밑에 드러난 하얀 살갗이 어린 처녀의 생명감과 함께 여린 마음을 내비쳐주는듯했다. 로영무는 애끓는 마음을 터뜨려 더 캐여묻고싶었으나 애처로운 마음이 앞서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는 처녀를 돌려보내고 웃방으로 올라가 창조성원들에게 제작단의 녀동무들중에서 누가 손영실이와 제일 가까운가고 물었다. 누구인가 장미혜라고 하였다. 곧 장미혜가 불리워왔다. 《요새 영실동무 생활에서 느낀게 없소?》 《예?》 《동무한테 무슨 소릴 한건 없소?》 《무슨 소리요?》 《요새 기분이 왜 저렇소?》 《연기가 안돼서 그러지요 뭐…》 장미혜는 눈을 새침하게 내리깔았다. 그날밤 자기 방으로 돌아온 미혜는 자리에 들어 모포를 푹 뒤집어썼으나 잠들지 못하였다. 연출가에게 한 대답은 거짓이였다. 손영실은 요전 촬영이 끝난 다음 잡관목들속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를 하였다. 그는 인생문제에 눈이 갓 트기 시작하는 나이의 처녀로서는 지나칠 정도로 호기심을 드러내여 연출가를 찾아온 녀자에 대하여 여러모로 캐여물었다. 미혜는 한때 촬영소안에 풍설로 돌아갔던 최승진과 정은주의 사연이며 거기에 끌려든 로영무의 처사에 대하여 간추려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로파심에서 이것은 지난 세월이 오랜 예술가들의 생활에 던진 그늘이라고 덧붙였다. 《우리 연출가동지가 사망한 그 연출가한테 그 녀자 소식을 십여년동안이나 알려주지 않았다는게 사실인가요?》 《그건 아마 사실인것 같아.》 《아이 끔찍해…》 《뭐가 끔찍해?》 《그래서 그 녀자 일생을 불행하게 만들어놓지 않았어요?》 《뭐라구? 그럼 우리 연출가가 그 녀자를 불행에 빠뜨렸다는거냐? 참 한심하구나.》 《내가 어리다고 감추지 말아요. 나도 좀 알아요.》 《누가 무슨 소릴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녀자 일생을 망쳐놓은건 물러간 저 낡은 세상이야. 예술인들을 천대하고 멸시한 일제의 식민지사회야. 우리는 그 사회를 상상도 못해. 그런데 누구한테서 무슨 소릴 들었기에 애꿎은 연출가동지를 그처럼 험하게 몰아?》 손영실은 그의 말을 듣는것 같지 않았다. 이윽고 처녀는 딴전을 부리는것인지 매우 애매한 소리를 하였다. 자기는 예술계에 갓 들어왔기때문에 아무것도 몰라서 묻는것이라면서 만약 이 세상에 랭혹하다고 할가, 비량심적이라고 할가 어쨌든 그 비슷한 예술가가 있다면 그런 사람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훌륭한 예술작품을 창조할수 있느냐고 묻는것이였다. 미혜는 뜻밖의 물음에 의아해졌으나 한창 알고싶은것이 많을 신인배우로서는 물을수도 있는 문제라고 여겨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는 예술적형상이란 창작가의 사상과 감정의 솔직한 표현이고 고백이기때문에 그런 사람이 아름답고 고상한 형상을 창조할수는 절대로 없다고, 자기가 아는 한에 있어서는 훌륭한 예술작품뒤에는 언제나 훌륭한 인간, 예술가가 서있다고 하였다. 그러고도 답변이 충분하지 못한것 같아 만약 더러운 량심을 지닌 사람이 그 어떤 예술 비슷한것을 만들어냈다면 그것은 어디서 모방했거나 표절한것이지 절대 그의 독자적인 사색의 창조물일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손영실은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가 만약 어떤 배우가 자기 연출가한테 인간적인 의혹이 들고 믿음이 얇아지는 경우에도 그의 의도에 맞는 연기형상을 할수 있느냐고 물었다. 미혜는 더이상 참을수 없어 처녀의 팔굽을 와락 잡아쥐고 마구 흔들어대였다. 《영실아! 영실아! 너 … 너… 어떻게 된거냐? 너 우리 연출가를 념두에 두고 말하지? 그렇지?… 그렇지?…》 손영실은 갑자기 울먹이며 머리를 끄덕였다. 《너 미쳤구나. 우리 연출가동지같은 사람이 어디 있게? 그렇게 선한 사람을 … 너 돌았니? 도깨비한테 홀렸어?》 《아니… 아니예요. 그렇게… 그렇게 될가봐 두려워… 연출가동지를 나삐 여기게 될가봐… 그게 두려워 이것저것 묻게 됐어요.》 《뭐라구?》 《우리 엄마는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이 눈빛에, 얼굴에, 겉에 풍긴다고 했어요. 그래서 초면에도 인차 믿게 되고 마음이 훌 통하게 된다고…》 미혜는 놀라서 크게 뜬 눈으로 처녀를 지켜보며 한숨을 호-내쉬였다. 《너… 연출가한테 그렇게 안되니?》 《안돼요…》 처녀는 후더운 물기로 눈언저리를 적시였다. 《안돼요!… 혼자 련습할땐 되는것 같다가도 연출가동지앞에 서면 떠올랐던 감정도 움츠러들어요. 언니, 왜 … 왜 이럴가요?》 《바보… 공연히 어려워하니까 그렇지? 꽁해서 …》 《어려운건 아니예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어렵지도 않대… 그럼 너한테 뭐가 있구나! 헛신경을 쓰며 말째게 생각하면서 … 병들었어! 에익, 주인공이 이 모양이니 영화는 다 망했다.》 미혜는 분을 참지 못해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고개를 숙이고 손등으로 눈물만 훔치던 처녀가 문득 얼굴을 쳐들었다. 그리고 단숨을 몰아쉬다가 놀라운 사실을 토설하였다. 동생이 엄마 병에 대하여 써보낸 편지를 언제인가 동무들한테 경솔하게 보인 일… 뿌리칠수 없는 걱정… 어디서 들었는지 강철룡부연출이 꽃동산에서 그 소식을 귀띔했을 때 연출가의 외면… 《엿들은건 잘못이지만… 언니, 그 일때문인지… 연출가가 연기에 대한 요구를 높일수록 전 움츠러들게 됐어요. 잘하자고 애쓰다가도 저 사람이 웃으라면 웃고 울라면 우는 꼭두각시가 되겠는가… 이런 생각이 문득 드는 때도…》 장미혜는 참지 못하고 벌떡 뛰여일어났다. 《알아보자, 어째 그랬는가? 어떻게 된 일인가? 연출가동지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야!》 처녀는 화닥 놀라 그의 팔을 붙잡고 매달려 눈물을 휘뿌렸다. 《안돼요! 그러지 말아요. 속상하고 신경이 약해져 공연한 소릴 한건데…》 밤이 깊도록 모대기던 장미혜는 자리를 차고 뛰여일었다. 집집의 창문들에는 모두 불빛이 꺼졌는데 웬일인지 리려관에는 불이 환히 켜져있었다. 그 불빛에 마을길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어디서 서리가 내리는지 밤공기는 습하고 차거웠다. 리려관쪽으로 총총히 걸음을 옮겨가던 미혜는 이쪽으로 다가오던 누군가의 그림자가 앞을 막아서는바람에 주춤 멎어섰다. 《어딜 가오?》 철룡이였다. 《연출가동지한테 볼일이 있어서요.》 《열쇠는 여기로 가지고왔댔소?》 《…?》 처녀는 너무나도 중뿔난 물음에 그를 빤히 지켜만 보았다. 《열쇠… 집열쇠말이요.》 《그건 왜 물어요?》 곱지 못한 목소리였다. 그가 아직 싱겁게도 자기 생활을 보살피려드는것 같아서였다. 그를 따끔하게 쏘아주고싶은 얄궂은 생각이 가슴에서 옴지락거렸다. 《남의 집 열쇠에까지 관심을 돌리는걸 보니 마음이 퍽 한가한게지요? 아니면 무슨 절도범의 흉내라도 내고싶은가요? 열쇠는 여기 호주머니속에 있어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꺼내드리지요,》 《바보…!》 철룡이 거칠게 소리쳤다. 《어떤 똑똑한 녀자두 가슴속에 맹꽁이 한마리씩은 배겨있다더니 이거야 참…》 《뭐라구요?》 《제작처장이 밤차로 왔소. 동무 어머니가 평양에 올라갔단말이요. 당에서 불러… 문을 열지 못해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있단말이요.》 《아니 정말인가요?》 《김정일동지께서 한생을 깨끗하게 살아온 예술인이라고 평가하시면서 어머니를 부르셨소.》 《엄마를요!》 미혜는 하늘땅이 뒤집혀지는것 같았다. 머리가 핑 돌았다. 그리고 채찍에 얻어맞은듯 가슴이 얼얼해졌다. 이윽하여 정신을 수습한 미혜는 자기앞에 철룡이가 그냥 서있으며 그의 얼굴에 미소같은것이 어려있는것을 느꼈다. 《축하하오…》 웬일인지 그 목소리에 단념하고도 가슴태우며 바라던 그 무엇이 없는것 같았다. 《이 밤중에 연출가동지는 왜…?》 《영실이때문에 그래요.》 《저녁에는 별문제 없다더니 동무는 도대체… 연출가도 자야 할게 아니요.》 《아이, 무슨 대책이 있어야지, 영실한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두 알기나 해요?》 《정 만나겠으면 래일아침 만나오.》 철룡은 돌아섰다. 미혜는 모욕감에 입술이 떨렸다.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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