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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4
이튿날 따스하고 부드러운 해빛이 골안에 깔리고 흐르는 시내물이 파란 하늘을 담아싣고 반짝일 때 강철룡은 배우들의 연기련습을 보아주고 숙소로 돌아오고있었다. 그는 속이 여간 타끓지 않았다. 어제 촬영한 꽃동산 장면에서 꽃분이의 연기며 방금전에 보아준 순희의 연기도 다 만족스럽지 못했던것이다. 그는 배우연기로써 영화의 장면장면들을 인간세계의 아름답고 고상한 심혼과 정서로 충만시키고싶었는데 기준을 너무 높이 세운탓인지 어느 장면의 연기형상이나 다 만족스럽지 못했고 생각하면 할수록 불만이 커갔다. 하지만 신심이 넘치고 의욕이 북받쳐 잠바앞섶을 열어헤치고 휘파람을 불며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길가의 언덕받이에서 나이 지숙한 장치사가 내려와서 자기네가 세운 《고목》을 좀 보아달라고 하였다. 언덕받이에 서있는 고목이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한기석이 맡은 장면의 촬영을 위해 세운것이였다. 그 나무밑에서 순희가 언니를 기다리고 거기로 마름놈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장면을 찍어야 했다. 밑둥이 흉하게 구새먹은 그 《고목》은 수백년세월의 비바람에 부대껴 우둘투둘 마디진 가지들이 험상하게 뒤틀리고 뒤엉켜서 어찌 보면 어릴적 꿈속에서 본듯한 하늘로 엇비스듬히 날아오르는 괴물같은 형상이였다. 철룡이 이마에 손채양을 붙이고 그 창조물을 유심히 쳐다보는데 장치사가 한숨을 내쉬였다. 《다섯번이나 고쳐세웠소. 한기석부연출이 변덕인지 뭔지… 자기가 하라는대로 했는데도 이래서 마음에 안든다 저래서 신통치 않다 하는데 참 속상해서… 이번엔 흐뭇한지 별소리 없지만 아직 저기 앉아있소. 올라가 좀 봐주고가오.》 그가 언덕받이로 뛰여올라가자 고목곁에서 한기석이 일어섰다. 그는 사색적이면서도 괴로운듯한 얼굴로 말을 건네였다. 《어떻소. 연출가의 형상의도에 맞을것 같소?》 철룡이 두손을 허리에 올리고 다시 《고목》을 쳐다보는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까치 두마리가 야단스럽게 우짖으며 그우에서 날아돌다가 가지에 내려앉았다. 그는 《고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한기석이 어떠냐고 다시 묻자 다른 소리가 나갔다. 《이만하면 되겠지…》 《됐다구? 나는 왜 이런가. 또 아니거든… 어딘지 모르게 아닌데가 있는것 같으면서…》 《글쎄… 이 나무밑에서 순희가 언니를 기다리지… 허전하고 불안해진 순희… 의지할데가 없는 순희의 심리와 이 나무 형태미가 어울려야겠는데… 너무 안전감을 주는 대칭도형이 아닌가?》 《그런가? …》 《저 한쪽 가지들을 두어대 잘라버리면 어떨가… 가서 연출가동지한테 봐달라고 하겠소.》 철룡이 《고목》곁을 떠나 열댓걸음 걸어나왔는데 등뒤에서 무엇인가 우지직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놀라서 돌아보니 한기석이 《고목》을 어깨로 떠밀어 넘어뜨리고있었다. 기겁한 까치들이 하늘로 날아오르며 다급한 비명을 내질렀다. 철룡은 놀라서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아흔들었다. 《기석이, 여보게, 왜 이러나?》 그는 몸부림치며 부르짖었다. 《이건 아니요, 아니야! 자기 량심을 속일수 없어!》 그의 눈에 섬광이 번뜩이였다. 철룡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지난날의 일들이 모두 하찮게 여겨지며 그를 부둥켜 안아주고싶어졌다. 얼마후 그가 리려관으로 돌아오니 연출가가 배우들의 연기수준에 대하여 물었다. 《순희도 그렇고 꽃분이는 더 막혔습니다. 순희를 욱박지르는 장면이 전혀 안됩니다! 몇번 시켜봤는데 안돼요!》 그것은 눈먼 순희가 언니를 돕는다고 읍거리에 나온것을 꽃분이가 골목으로 끌고가서 누가 시키지 않는 일을 하랬느냐고 욱박지르는 하나의 눈물겨운 장면이였다. 로영무는 배우들한테 련습시간을 더 주어야 하겠다고 하면서 촬영을 래일로 미루자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다음에 찍을 촬영장소들을 돌아보고 오겠소. 꽃분이가 감옥의 오빠를 찾아가는 700리길 서경이 마음에 안드오. 사진을 봐서는 20년대, 30년대 풍경같지 않거든.》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였다. 제작단의 긴장되고 무거운 공기속에서 벗어나 자연의 신선한 대기속으로 들어가 머리를 식히며 혼자 조용히 사색하고싶은 심정도 있었던것이다. 그는 혼자 차를 타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차가 멀리로 달려나오고 차창밖으로 낯선 가을풍경이 흘러지나가는데도 그의 마음은 제작단의 공기속에 점점 깊이 휘말려드는듯하였다. 꽃분이의 해쓱한 얼굴이 눈앞에 자꾸 어른거렸다. 17살의 이 처녀는 중요한 역을 맡고 뭇사람들의 사랑과 선망의 눈길에 휩싸였지만 용케도 들뜸이 없이 작품연구와 연기훈련에 골몰해왔으며 연출의도에 따라 그어주는 감정의 복잡하고 기복이 심한 곡선을 아슬아슬하게 따라오며 탈선도 좀 있었지만 그래도 꽃분이의 갸륵한 심정을 소박하게 표현했었다. 그런데 아주 막혀버렸다. 감옥의 오빠를 찾아가는 길에 대해서는 촬영성원들속에서 특히 의견이 분분했다. 단조롭고 흐름이 처진다는것이다. 아주 생략해버리자는 의견까지 있다.… 촬영순서를 바꾸어 순희를 욱박지르는 장면을 뒤로 밀고 감옥의 오빠를 찾아가는 장면을 먼저 찍으면 어떨가… 그는 차를 타고, 차가 못가는데는 걸어서 가깝고 먼곳의 산촌길들을 모조리 돌아보며 꽃분이가 오빠를 찾아가는 칠백리길의 서경을 가늠해보았다. 나무지팽이를 짚고 숨이 턱에 닿아 헐썩거리며 산꼭대기들에 톺아올라가 골짜기를 따라 굽이쳐나간 길을 여러 각도로 부감해보기도 하였다. 마감으로 올라간 산꼭대기에서 내려오다가는 굴러서 허리까지 상할번하였다. 산중턱에서 벗겨져 날아난 구두를 도로 찾아신는데 목구멍에서 겨불내가 풍겨올랐다. 머리우에서 설레이는 나무가지들사이로 서쪽 하늘에 기울어진 해가 바라보였다. 어찌보면 해는 아득한 하늘이 아니라 바로 그 나무가지들에 걸려 백열로 이글거리는듯하였다. 그것은 나무가지들을 온통 쇠물빛으로 물들이다가 갑자기 그 무슨 폭발이라도 인듯 눈부신 백광의 빛줄기들을 사방으로 내뿜는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감옥으로 찾아가는 심리를 자연서경의 변화로 보여주고 거기에 극적인 음악까지 받쳐주면 단조성도, 지루감도 면할수 있다. 음산한 바람… 몰려오는 비구름… 번개… 비… 그속으로 걸어가는 꽃분이… 험한 길… 낭떠러지…) 로영무는 그 무슨 금맥이라도 찾아낸 사람처럼 기쁨에 휩싸여 주먹으로 공기를 내리치며 뛰여일어났다. (주인공이 연기만 잘해주면 된다!) 문득 자기와 그 처녀와의 사이가 정상이 아닌듯한 의혹이 얼음쪼각처럼 선뜩 가슴을 찔렀다. 어딘지 모르게 정이 흐르지 않고 마음이 통하지 않는것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그와의 사이를 차단하고있는것 같았다. 그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몽롱한 안개, 투명하고 매끄러운 유리판같기도 하고 아무리 두드려도 울리지 않는 담벽처럼 과장되여 안겨왔다. 왜…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상서롭지 못한 느낌이 드는가… 그는 곁에 서있는 나무그루를 짚고 거기에 이마를 붙이며 창조생활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나어린 배우를 주인공으로 삼고 영화를 만들므로 이렇게 속을 썩이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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