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

 

제 8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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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난 어느날 오후 1시가 거의 되여서였다. 상현리로 들어오는 달구지길을 따라 한 청년이 저고리앞섶을 다 헤쳐놓고 마라손선수처럼 헐썩거리며 뛰여오고있었다. 군에 갔던 강철룡이였다. 성난듯이 찌프린 얼굴로는 땀물이 철철 흘러내렸다. 돌아오다가 제작단의 갱생차가 고장이 생겨 나머지 오리길을 단숨에 뛰여온 그였다. 

철룡은 김정일동지께서 제작단의 현지촬영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돌리고있는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으며 이제 그이께서 여기서 촬영한 필림을 친히 보아주시리라는것도 믿어의심치 않았다. 때문에 그는 촬영을 잘해보자고 담당연출가를 도와 마른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뛰여다녔다. 

평양에서는 주영도비서의 부탁으로 제작처장이 전화를 걸었는데 그가 전한 소식이며 당부들은 모두 심중한것들이였다. 

제작단이 현지로 떠난 다음에도 친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꽃분이의 연기형상을 두고 매우 걱정하고계시는데 연출가가 손영실의 연기지도에 더 힘을 넣으라는 당부였다. 

그리고 사망한 최승진연출가의 안해가 제작단에 새로 임명되여 필림편집을 맡게 되였다고 했다.

그다음 소식은 더욱 놀라운것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 현지촬영한 필림들이 언제 올라오는가고 두번이나 전화로 알아보시였다는것이였다. 

강철룡은 고장이 생긴 자동차에 멍청히 앉아있을수 없었다. 

그가 동구앞에 이르렀을 때 산비탈에서 촬영장소를 돌아보던 한기석이 길에 내려섰다. 

철룡은 그와 나란히 마을로 걸어들어오며 갔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김정일동지께서 두번이나 전화하셨소. 우리 필림이 언제 올라오는가…》 

《다그쳐야겠군. 우린 현지에 와서두 너무 어물거린단말이요. 배우들한테 계속 생활연구만 시키면서…》 

《꽃분이 연기때문에 그러겠지…》 

《이러다가 서리라도 내리면 어쩐다…》 

그리고는 둘 사이에 말이 끊어졌다. 

연출가의 두 방조자는 나란히 걸어갔으나 제나름의 생각을 좇고있었다… 한기석은 그가 지금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있을가하고 마음을 썼다. 그는 모임에서 비판을 받은후 며칠동안 후회와 함께 온갖 불길한 억측에 시달리며 숨을 죽이고 지내였다. 어느날 주영도비서로부터 친애하는 그이께서 부연출들의 발전에 대하여 얼마나 배려하고계시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다음에야 비로소 마음이 풀리며 가책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비행을 저지른것이 자기자신이 아니라 그 어떤 괴물의 작간처럼 문득문득 느껴지는것이였다. 그 괴물이란 자기 량심에 깃들어 병들게 한… 그래서 자기를 추동한 공명심, 출세욕, 시기심… 아, 그것들이 그렇게 영악한 감정인가, 나의 량심은 왜 그 영악한 괴물을 뿌리쳐버리지 못했고 일찌기 숨통을 눌러버리지 못했는가, 량심이 허약했기때문인가… 그는 밥맛까지 잃고 남몰래 번민했으나 겉으로는 흔연한척하면서 이전보다 더 활기에 넘쳐 일했다. 어떤 때는 그 허세가 어리석게 여겨져 얼굴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지나간 일을 다 잊은듯 누구 하나 상기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량심을 더 자극하였다. 그리고 철룡이와 미혜가 아주 멀어지게 된데는 자기 책임도 있다는, 자신의 감정과 발언도 일정한 작용을 놀았으리라는 그 가책으로 못견디게 괴로왔다. 그때 그는 문병온 미혜한테 경솔하게도 강세룡이 한 말들을 그대로 전했었다. 아니, 경솔성때문만이 아니였다. 

숨졌다가 다시 살아나도 또다시 예술의 길을 걸으리라는 제나름의 신념으로 살아온 한기석은 풍채좋은 그 일군의 예술인들에 대한 저속한 발언을 우선 자기 인생관과 아버지의 일생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거기에 철룡에 대한 반감과 시기심까지 더해져 그에 대한 험구로 될수 있는 말을 하면서도 가책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때의 자기 깊은 심리만이라도 철룡에게 말해주고싶었지만 구차스러운 변명인것 같아 참아왔는데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할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싶었다. 

기석은 철룡을 흘깃 돌아보았다. 

철룡은 눈을 지그시 내리뜨고 걸으며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고있었다.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있었던것이다. 한기석은 요새 아주 과묵한 사람이 되여버렸으며 아무 일에나 중뿔나게 얼굴을 내미는 일이 없어졌다. 철룡이 자기하고 단둘이 있기를 피하는듯했고 부득이하여 마주서게 되면 어떤 문제에서나 양보하는 립장에 서는것 같았다. 인간이란 자기 비도덕성이 뭇사람들에게 공개되고 여론화되여야 비로소 수치심과 죄의식까지 느끼게 되는 기이한 존재인가… 자기가 저도 모르게 너무 랭담하게 대하고있는것이 아닐가. 옹졸하게 지나간 일로 괴롭히지 말자. 그의 속심이야 어떻든지 모든것을 선의로 해석하며 도와주자. 오직 영화창조를 위하여… 

이때 저 앞쪽에서 장미혜가 목에 감은 흰 머리수건자락을 나풋거리며 마을길을 건너가다가 머리를 갸웃하고 이쪽을 빤히 여겨보았다. 그러다가 바람에라도 날리는듯 날렵하게 길을 뛰여건너 저쪽 집모퉁이로 사라졌다. 못볼것이라도 본듯 주춤 멎어섰던 두 사람은 서로 돌아보지도 못하고 걸음을 떼였다. 

눈확에 침울한 그늘이 비낀 한기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용서안되지?… 그럼 그렇다구 말하게…》 

《여, 다른 생각말구 영화를 잘 만들자구… 난 영화만 잘된다면 그까짓 감정쯤은 다 줴팽가치겠어!》 

한기석은 외면하고있어 그의 눈에 뜨거운것이 번쩍거리는것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려관앞에서 때마침 식사를 하고 나오는 연출가와 만났다. 

철룡이 전화받은 내용을 죄다 말하자 로영무는 몹시 당황해하며 부르짖었다. 

《두번이나 알아보셨단말이요?》 

《예…》 

연출가는 얼굴빛이 초조해졌다. 

《래일부터 촬영에 들어가겠소. 빨리 식사하고 촬영장소로 나오라구. 꽃동산을 조성해야겠소!》 

《리에 알렸습니까?》 

《알렸소. 집집에서 피운 꽃은 래일아침에 나오라구 했소.》 

오후, 제작단의 모든 성원들이 동구앞 야산에 나가 꽃동산을 조성하는 작업을 하였다. 장치사들은 장치직장에서 만든 《바위》들을 가깝고 먼곳에 보기좋게 배치해놓았으며 다른 제작단성원들은 장치미술가가 시키는대로 산비탈에 널려서 봄철의 자연미에 어울리지 않는것들을 청소해내는 작업을 하였다. 그들은 산비탈에 널려서 가둑나무들의 누렇게 황이 든 잎사귀들을 뜯어버리고 도토리알들을 털어버렸으며 너무 크게 자란 새며 풀대들을 뽑아버렸다. 

강철룡은 장치미술가와 함께 이리저리 뛰여다니며 지내 말끔하게 걷어내면 오히려 인위적인 감이 난다고 소리치는가 하면 애솔들에 휘감긴 마른넝쿨같은것은 그냥 둬두는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일렀다. 그러다가 철룡은 솔검불을 쓸어내는 한 연화사에게로 뛰여가서 이건 인민반의 아침청소와는 다르다고 퉁을 주며 한 세부의 비진실성이 전체 화폭의 예술적인 조화를 파괴할수 있다고 꾸짖었다. 

그러자 연화사는 얼굴이 벌개져 반대의견을 말하였다. 이고장은 가을바람도 겨울의 눈바람도 세차기때문에 솔검불이 한곳에 이렇게 무드기 쌓여있을수 없다는것이였다. 

《그거야 이고장이야기구 작품속의 고장을 생각해야지.》 

《아니 작품속의 고장이야 여기보다 더 북쪽인데 그러니까 바람도 더 세찰게 아니요?》 

《그렇게 띄워놓구 생각하지 말라구. 좀 지형도 보구 자연의 리치도 생각해보란말이요. 꽃들은 남향받이 양지쪽에 많이 피네. 그런데 북쪽땅의 가을과 겨울에 부는 바람은 거의 다 서북풍이거든. 그러니까 이런 양지쪽은 바람의 피해를 덜 입을게 아닌가.》 

연화사는 빙긋 웃어보이고는 엉뚱한 묘안을 꺼낸다. 

《이 솔검불속에 산짐승의 잠자리나 발자취 같은걸 내는게 어떨가?》 

《그건 괜찮소. 촬영가가 포착해주겠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정리작업이 끝난 다음 산등성이며 산비탈, 밭머리, 들판에 촬영소에서 만들어온 26종에 달하는 1만 5천송이의 생화같은 종이꽃들을 자연스럽게 꽂아놓았다. 그것은 이른봄에 피여나는 진달래와 개나리로부터 시작하여 철쭉꽃, 살구꽃, 패랭이꽃, 동지꽃, 나리꽃, 앵초, 도라지, 범부채, 만수국, 함박꽃, 목련꽃 등이였다. 그리고 꽃의 몇십배나 되는 《나무잎》, 《풀잎》들로 땅을 덮었다. 

어느덧 가을의 한산한 서경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봄의 생기와 훈향이 약동하는 산야가 펼쳐졌다. 

제작단성원들은 자기들이 창조한 봄경치에 황홀해져 감탄사를 련발하며 그것을 탄상하였다. 

산비탈밑에서는 촬영가가 이동차우에 허리를 구부정하고 서서 촬영기의 렌즈를 통하여 꽃동산의 전경을 내다보고있었다. 작업복차림의 부촬영과 조명사가 이동차를 조심조심 밀었다. 이동차가 서서히 미끄러져나갔다.

촬영가는 촬영기에서 눈을 떼지 않고 꽃동산의 애솔들과 잡관목덤불, 《진달래꽃》들이며 《너럭바위》, 《선바위》들을 훑어보다가 이동차를 세우고 《바위》들과 《꽃》들을 약간씩 옮기라고 소리쳤다. 그의 의도대로 《꽃》들이며 《바위》들의 위치가 수정되였다. 

그때 상현리로 내려오던 군당책임비서가 길가에 차를 세우고 그들에게로 찾아들어왔다. 

강철룡은 그를 반갑게 맞아 로영무에게로 데리고가서 인사시켰다. 책임비서는 두손으로 로영무의 손을 뜨겁게 잡아흔들며 수고한다고 거듭 인사말을 하였다. 

곁에 서있던 한기석은 그저 머리만 약간 숙여보이는것으로써 인사를 대신하고는 색안경을 꺼내 끼고 꽃동산을 둘러보면서 이젠 그만들 하고 내려오라고 소리쳤다. 

상현리가 고향인 사람좋은 책임비서는 어릴적부터 늘 보아온 야산의 인상이 판판 달라진것이 놀라와 입가에 느슨한 미소를 띠였다. 그는 로영무에게 이때까지 영화촬영하는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는데 오늘은 끝까지 구경하겠노라고 하였다. 

로영무는 그에게 이 꽃동산이 어릴적의 꽃동산과 비슷한가고 물었다. 

책임비서는 비슷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어렸을적에는 진달래가 저것보다 썩 많이 피여 마을조무래기들이 이발이 퍼렇게 되도록 그것을 따먹었고 집집마다 진달래를 따다가 꽃떡까지 해먹었노라고 대답하였다. 

이제 상현리에서 피운 꽃들을 촬영기위치로부터 가까운 산비탈 여기저기에 꽂아놓으면 봄의 운치가 한결 더 살아오를것이였다. 

그래서 마음속이 흐뭇해진 로영무는 꽃동산의 장치미술에 대하여 까다로운 의견을 제기하지 않고 인차 촬영전에 진행되는 배우의 연기련습에 들어갔다. 

철룡이 다래끼를 안은 꽃분이를 데려와 촬영기앞에 세웠다. 부촬영이 뛰여나가 로출계를 처녀의 얼굴이며 저고리가까이에 대여 감광도를 측정하고 해빛의 밝기를 재여본 다음 그 수자를 촬영가에게 조용히 불러주었다.

자기를 위하여 펼쳐진 봄의 황홀한 서경속에 꽃분이로 되여 서게 된 손영실은 너무 흥분되고 긴장되여 이마며 코등에 땀까지 내배였다. 

로영무는 순간에 표정이 근엄해졌다. 그는 일상적으로 배우들이 역세계에서 살도록 요구했지만 이러한 때에는 그들한테 티끌만한 잡념이라도 끼여들세라 신경을 날카롭게 세워 경계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위혁하는듯 얼굴빛이 험해지더니 모든것을 빨아들이는듯한 탐욕적인 눈으로 앞에 펼쳐진 봄의 서경이며 그속에 서있는 배우, 촬영가, 조명사들을 둘러보고는 그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려고 한손을 머리우로 서서히 들어올려 공기를 그러쥐였다. 그 단순한 손놀림은 미술적인 힘을 지닌듯 삽시에 공기를 팽팽하게 긴장시키고 사람들의 신경과 감정과 의지를 휘여잡아 그들모두를 열광적인 흥분속으로 떠밀어넣는것 같았다. 

《촬영준비!》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조명사들은 일제히 반사판을 들어 배우를 비치고 두 부촬영은 이동차에 붙으며 앞으로 내밀 차비를 하였다. 

반사판에서 오는 해빛을 받아 꽃분이의 얼굴이 감빛으로 피여나자 로영무는 그지없이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고 배우를 몇순간 여겨보더니 그러쥐였던 손을 풀며 공기를 내리베였다. 

《촬영!》 

그 부드러운 구령이 생명과 자유와 활력을 준듯 꽃분이는 생기에 넘쳐 달려나가며 꽃을 꺾어 다래끼에 넣는 시늉을 하고 이동차는 그를 따라 서서히 앞으로 미끄러져나갔다. 대기도 환희에 설레이는듯했다. 

꽃분이는 이 꽃밭에서 저 꽃밭으로 뛰여가며 꽃을 꺾었다. 이동차우의 촬영가는 허리를 구부정한채 촬영기에 눈을 붙이고있었다. 

연출가는 두손으로 무릎을 짚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처녀를 지켜보다가 아래입술을 깨물며 눈을 지그시 내려감았다.

연기형상의 세부들이 자기 표상속에 그려진 형상세부들과 여러군데에서 맞지 않는것이였다. 실패에 대한 예감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첫 장면부터 이러면 어찌는가!) 

가슴팍에 식은땀이 내배는듯하였다. 

강철룡은 연출가의 불만이며 그 원인까지 직감한듯 꽃분이한테로 뛰여갔다. 

민감한 처녀는 무엇인가 잘못되였다는것을 느끼고 주눅이 든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철룡은 부드럽게 일렀다. 

《대체로 괜찮소. 괜찮게 됐어… 조금만 더 잘하면 되겠소. 이자 꽃을 꺾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나?》 

처녀는 저고리고름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했다. 

《이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촬영기앞에 서니 이상해요. 연기가 어떤가 하는 생각만 들어요. 돌아서도 촬영기렌즈가 빤히 보이는것 같아요.》 

《주의가 분산됐구만, 촬영기렌즈도, 연기도 절대 생각하지 말아야 돼. 꽃분이가 아닌가. 집에서 앓고있는 어머니만 생각해야 돼. 어머니만…》 

《그래야겠는데 잘 안돼요. 어머니 생각도 좀 했어요.》 

《좀 했다구? 좀 해서는 안돼. 전적으로 어머니 생각만 해야지. 어머니때문에… 꽃을 팔아 어머니 약을 사자고 꽃따러 온게 아닌가… 그러니 더 고운 꽃을 만날적마다 얼마나 기쁘겠어. 어떤 때는 고운줄 알고 달려가보니 마음에 안들수도 있거든. 그러니까 한꽃에서 다른 꽃에로 옮겨갈적마다 얼굴표정이 자연히 달라질게 아닌가. 어떤 때는 얼굴이 활짝 밝아지고 미소를 머금고… 어떤 때는 실망하여 시무룩해지기도 하고… 그런데 이자는 얼굴표정에 너무나 변화가 없었어. 같은 표정이야. 촬영기렌즈, 그놈이 방해군이였구만. 그걸 아예 무시하라구. 없는것으로…》

깊은 생각에 잠겼던 처녀가 고개를 들며 난감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괜찮아, 다음번엔 잘될것 같아!》 

신경이 날카로와진 로영무한테는 배우를 계발하는 부연출의 말소리가 죄다 들려와 뇌리에 메아리쳤는데 그것들이 다 본질을 찌르지 못하는 허황한 소리처럼 느껴졌다. 목안이 바싹바싹 말라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배우한테로 뛰여갔다. 

처녀는 해쓱하게 질린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활짝 핀 꽃만 그냥 꺾으면 어찌나? 10여리나 되는 장거리로 나가는 사이에 시들어버릴수도 있고… 또 하루밤 집에서 묵여가지구 팔러 갈수도 있지 않나. 망울진걸… 필가말가한걸 꺾으라구. 어제밤에도 말해줬는데 다른데 정신이 팔린게 아닌가? 응?》 

처녀는 알았다고 겨우 응대를 하며 머리를 다소곳이 숙였다. 

로영무는 말을 더 하려다가 처녀를 혼란에 빠뜨릴가봐 그만두고 자기 자리로 돌아왔는데 어느새 따라왔는지 강철룡이 그의 팔굽을 슬쩍 건드리며 무슨 암시인지 난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좀… 갈앉혀주십시오…》 

무슨 소리인지 알수 없었다. 부연출은 손을 들어 무엇인가 누르는 시늉을 하며 나직이 속삭였다. 

《좀… 좀… 어제야 알았는데… 떠나기전에 편지를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앓는다는…》 

곁에 선 한기석이 환절기니까 감기겠지 하고 중얼거렸다. 

로영무는 언짢은 눈길을 철룡에게 던지고는 돌아서서 주먹을 높이 쳐들어 흔들었다. 

《자- 자- 주의를 집중해서-》 

그는 배우한테 신심을 주기 위하여 일부러 유쾌한 목소리로 웨쳤다. 

《잘- 될수 있소! 자, 다시! 한두번만 더 해보구 오늘은 푹 쉬자구. 촬영은 래일부터 하겠어!》

 

× 

 

로영무는 밤이 깊어 자리에 누웠으나 촬영장에서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있던 처녀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려 잠들지 못했다. 처녀가 매우 총명하고 다감하게 생각되는가 하면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는 목석으로 여겨져 한숨까지 나갔는데 잠이 들어서는 그 순진한 존재가 트렁크를 들고 어디로인가 멀리로 떠나가는 꿈을 꾸었다. 화닥 놀라 눈을 뜨니 창문에 희붐한 빛이 어려있었다. 

그는 어수선한 기분속에 보름달이 뜬 모양이라고 생각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가 아주 깊은 잠에 녹아떨어졌다. 

이른아침, 밖에서 누구인가 새되게 소리치고 벅작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영무는 가슴이 선뜩해져 자리를 차고 뛰여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는 순간에 안개바다속에 빠진듯 아무것도 볼수 없었다. 흰빛이 눈앞을 가리우고 머리속이 쩡 얼어드는듯했다. 

언제 나왔는지 강철룡이 곁으로 다가서며 부르짖었다. 

《밤새 눈이 쏟아졌습니다. 꽃동산이 다 죽탕이 된것 같습니다.》 

로영무는 얼이 나간 사람처럼 멍청한 얼굴로 눈이 하얗게 덮인 산야를 바라보다가 허리를 굽혀 눈 한줌을 쥐여들었다. 햇솜같이 정갈한 눈은 인차 주먹안에서 눅눅해지며 손가락들짬으로 물기가 내배였다. 

(한송이도 성한게 없겠구나…) 

그는 정신없이 내달렸다. 강철룡이 뒤를 따랐다. 눈은 무릎아래를 쳤다. 

눈에 묻힌 꽃동산의 비탈로 웬 사람이 미끄러지면서 달려내려왔다. 한기석이였다. 그의 손에 후줄근해진 꽃가지들이 들려있었다. 

한기석은 그것들을 흔들어보이며 격하게 소리쳤다. 

《다 이 모양이 됐습니다… 젠장!》 

《다 그렇소?》 

《어제 인차 촬영하는건데… 어쩌자구 이렇게 어물거립니까, 예?》

로영무는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순간에 폴싹 늙어버린듯 허리를 구부정하고 우들우들 떨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그의 손에서 꽃가지를 받아들고 불이 황황 이는 눈으로 송이들을 들여다보았다. 

《아하, 이 일을 어찌는가!》 

로영무는 애끓는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가없이 넓은 부연 하늘에서는 고즈넉한 정적속에서 구름들이 어디로인가 흘러가고있었다. 구름들이 아니라 딛고선 땅이 실패의 낭떠러지로 밀려가는듯하였다. 

《연출가동지, 황해도나 어디 따뜻한데로 옮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안돼, 승진동무가 여기 지형에 맞게 연출대본을 작성했네. 촬영대본도 그렇구…》 

그는 눈에 미끄러져 쓰러지고 딩굴면서 산비탈로 기여올라가 넋없이 산등성이를 헤매였다. 15 000송이나 되는 꽃들이 거의다 눈에 묻혀버리고 나무밑이나 바위곁에 꽂아놓은것들만 눈우로 꽃송이나 이파리들을 내밀고있었다. 

그는 단숨을 헉헉 몰아쉬며 두손으로 정신없이 눈을 헤집고 묻혀버린 꽃가지들을 쓸어만져보았다. 거의 다 눈에 젖어 이지러졌으나 성한것들도 있었다. 

언제 달려왔는지 강철룡이 앞을 막아섰다. 

《연출가동지, 성한것들도 많습니다. 눈을 치고 꽃동산을 복구합시다!》 

로영무는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라구?》 

《해가 뜨면 날이 더워져 다 젖어 못쓰게 되고맙니다. 제작단을 몽땅 동원해서 빨리 눈을 칩시다!》 

로영무는 자기와 그의 마음이 하나의 지향으로 융합되여있다는 기쁨에 가슴이 후더워졌다.

어디서 딩굴었는지 온통 눈투성이인 철룡은 우에 작업복저고리도 걸치지 않고 내의바람이였다. 잠자리에서 곧장 뛰여나온 모양이였다. 

《감기 들겠네!》 

철룡은 그 소리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해뜨기전에 빨리 하자고 소리치고는 홱 돌아서 아래쪽으로 정신없이 뛰여내려갔다. 

그는 내의바람인채로 마을의 숙소들로 뛰여다니며 제작단원들을 불러일으켰다. 

온 제작단이 눈치기에 떨쳐나섰다. 

리에서 묵은 군당책임비서가 어떻게 알고 달려나와 그 광경을 보고 마을로 달려가 리당비서와 관리위원장을 비롯한 숱한 농장원들을 이끌고나와 눈치기를 도왔다. 눈을 쓸어내고 꽃들을 살리는 류다른 작업이 벌어졌다. 산등성이와 비탈에 눈가루들을 뽀얗게 날리고 웨침소리, 떠들어대는 소리가 그칠줄 몰랐다. 

농장원들은 눈을 쓸어낸 다음 처처에 우등불을 피워 그 열기로 공기를 덥히고 땅바닥의 눈을 녹였다. 

로영무는 복구되여가는 《꽃동산》을 돌아보다가 비자루를 짚고 머리를 숙인채 무슨 생각인가 골똘하고있는 한기석을 띄여보았다. 손맥이 풀려서인지, 무슨 가책에 시달리고있는지 알수 없었다. 

작업은 오후까지 계속되였다. 못쓰게 된 꽃들을 걷어내고 상현리농장원들이 피운 꽃들을 그자리들에 꽂아놓으니 퍽 빈약하기는 하나 꽃동산이 회복되였다. 

실눈을 짓고 그 꽃동산을 둘러보던 로영무는 아쉬운 감에 가슴이 쓰렸지만 촬영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촬영성원들은 다시 활기를 띠고 이동차를 끌어온다, 촬영기를 설치한다, 조명기구들을 준비한다 분주히 뛰여다녔다. 

꽃분이는 다래끼를 안고 다시 촬영기앞에 나섰다. 

그때 무엇때문인지 뒤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것 같고 환희에 넘친 부르짖음소리들이 들려왔다.

《히야- 저걸… 저걸 보라구!》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원 저런!…》 

철룡은 의아해서 돌아봤다. 큰길과 저 앞산의 고개길과 버덩의 지름길을 따라 숱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밀려오고있었는데 그들의 가슴과 어깨와 머리우에서는 연분홍의 불길같은것이 날름거리고있었다. 

이동차우의 촬영가가 주먹으로 허공을 내리치며 격한 소리로 부르짖었다. 

《여- 꽃이로구나! 꽃이요, 꽃! 사람들이 꽃을 피워가지고 온단말이요! 동무들, 봄이 오오- 우리 마중가자구-》 

촬영가가 이동차에서 뛰여내려 큰길쪽으로 달려나가자 배우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제작단성원들이 뒤를 따랐다. 

어느덧 그들은 큰길과 밭가운데서 꽃을 들고오는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졌다. 

책임비서만이 이동차곁에 우두커니 서서 그들쪽을 바라보고있었다. 

그의 곁으로 뛰여온 로영무가 숨을 헐썩거리며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책임비서는 기쁨에 겨워있으면서도 저으기 난처한 얼굴이였다. 

《허 이거 참… 저도 모르고있었습니다. 어떤 집들에서 꽃을 피운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렇게 많을줄은 몰랐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 전화하신 다음 조직적으로는 상현리에만 포치했는데, 허 이거 참…》 

철룡은 얼굴빛이 심각해져 예술인들과 한데 어울려 웃고 떠들면서 걸어오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진달래꽃이 가득 담긴 버치를 인 녀배우곁에서 땀을 씻으며 따라오는 아낙네, 꽃이 든 바께쯔를 량쪽에서 들고 걸어오는 젊은이들, 손에 손마다 꽃병을 들고 종종 걸음을 치는 어린이들, 한묶음의 미나리며 약초를 비닐보자기에 싸들고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영예군인…

로영무는 모진 가책에라도 시달리는 사람처럼 얼굴빛이 컴컴하게 꺼져 책임비서에게 말을 건네였다. 

《한평생 영화를 찍어왔지만 이런 일은 정말 처음입니다.》 

《예… 저도 이렇게 될줄은 몰랐습니다.》 

《저 꽃으로 산을 몽땅 뒤덮겠습니다. 봄향기가 하늘땅에 진동하게… 그리구 영화를 찍겠습니다!》 

등뒤에서 가느란 흐느낌소리같은것이 들려왔다. 

꽃분이가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있었다. 

철룡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울기는… 연기를 명심해서 하라구.》 

두시간후 촬영이 끝났다. 꽃을 가지고 왔다가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제작단성원들도 모두 촬영장소를 떠나갔다. 

로영무는 제일 마감으로 산비탈을 내리다가 소나무뒤에  웬 젊은 녀자가 숨어있는것을 띄여보았다. 

수박색치마저고리로 나들이차림을 했고 얼굴이 감스럼하게 탄 그 녀자는 무엇을 주저하는지 소나무가지들사이로 이쪽을 빤히 내다보다가 누를길없는 격정에 떠밀리는듯 후닥닥 뛰여나왔다. 

《선생님!》 

로영무는 그 녀자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가슴을 찌르는 부르짖음소리에 놀라 주춤 물러서기까지 했다. 

《누군가? …》 

《선생님, 저예요, 수옥이…》 

《뭐라구?》 

달려와서 스스럼없이 팔에 매달리는 정은주의 딸은 예전에 촬영소로 찾아왔던 가무잡잡한 얼굴의 가냘픈 처녀애가 아니였다. 

안정된 직업과 신혼생활의 행복때문인지 얼굴이 환하고 몸매가 푸드러진 젊고 아름답고 건실해보이는 농촌녀성이였다. 단지 수집음과 반가움에 겨워 이슬기를 반짝이며 쳐다보는 눈에서만 이전의 고집스럽던 처녀애의 인상이 약간 느껴질뿐이였다.

떨리는 손으로 수옥의 팔을 더듬더듬 쓸어만지는 로영무의 눈에 회억의 눈물이 어리였다. 

《이게 얼마만인가, 응…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선생님》 

로영무는 그제야 십여년전 수옥의 편지마다에 이웃 리의 주소가 적혀있던것을 상기했다. 

《어떻게 여길 왔어… 내가 여기 와있다는걸 어떻게 알구?》 

《어머니가 피운 꽃을 가지고왔어요.》 

《꽃을!》 

《우리는 이 상현리 바로 이웃동네에서 살아요. 여기 집집에서 꽃을 피운다지 않겠어요. 최승진선생님이 촬영온다는 소문도 듣고요… 어머니가… 글쎄 엄마가 우리도 꽃을 피우자고 하지 않겠어요.》 

《어머니가 꽃을…?》 

로영무는 최승진이 여기 와서 그 꽃을 받았으면 얼마나 감개가 깊었으랴싶으면서 가슴이 쓰려났다. 

《그 꽃을 누구한테 줬나. 어디… 어디 꽂혔나?》 

《아까 부연출이란분한테 드렸는데 저기… 저 너럭바위곁에 꽂았어요.》 

《어머니는 편안하냐?》 

《…》 

수옥은 대답대신 고개를 외로 틀고는 저고리고름을 눈에 가져갔다. 

《무슨 일이 생겼느냐?》 

《보름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뭐라구?》 

《최승진선생님이 사망했다는 부고를 신문에서 보고 몹시 울었어요. 그다음 병이 더 심해졌는데 미음 한숟가락 들지 못하면서두 꽃에는 잊지 않고 물을 주고 정성을 다 기울였어요. 그러다가 그만…》

로영무는 가슴이 찢어지는듯 아파나고 눈앞이 흐려졌다. 

《어머니 심정을 생각해서… 꽃을 가지고 달려왔어요.》 

《나는 수옥이가 온줄 전혀 몰랐구나.… 그 꽃이 어디… 어디 꽂혔다구?》 

《저기 저 너럭바위곁에요…》 

수옥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흑 느끼며 입을 싸쥐였다. 

얼마후 두사람은 산비탈을 가지런히 걸어내려왔다. 그들은 저 아래쪽 후미진곳 잡관목들속에서 불꽃같은 눈이 자기들을 지켜보고있다는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였다. 

 

×

 

손영실은 자기 연출가에게 그토록 다정하고 스스럼없이 구는 저 낯선 녀자가 무척 부러워나며 가슴속에서 시기심 비슷한것까지 끓어올랐다. 

(아이, 누굴가?…) 

촬영이 끝났을 때 연출가는 수고했다고 하고는 땅에 놓았던 연출대본을 들어 흙먼지를 툭툭 털어서 겨드랑이에 끼더니 더 무슨 말 없이 웃쪽으로 걸어올라갔다.  

가슴이 섬찟해졌다. 어째 괜찮게 됐어… 아니면 잘됐어… 하지 않고 수고했다고 할가, 수고했다, 수고했다… 얼마나 애매한 말인가. 그 말이 없는 재간에 용케 했다는 소리처럼 느껴져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들었다. 

연기형상이 연출가의 의도대로 되지 않은듯싶은 불안감에 휩싸인 그는 창조성원들이 산에서 내려가고있었지만 잡관목들속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는데 두사람이 가지런히 걸어내려왔다. 낯선 녀자는 연출가의 한손을 잡고 걸어내려오며 무슨 말인가 끝없이 다정하게 하였다. 

손영실은 그 녀자와 자기를 은근히 비교해보게 되였다. 

(나는 왜 저러지 못할가…)

그는 연출가와 자기사이에 어딘지 모르게 간격이 있다는것을 비로소 어렴풋이 느꼈다. 

청춘의 꽃망울이 터지는 시절에 이른 이 처녀는 배역이 발표된 날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로 된듯싶어 딸에 대한 자랑으로 여생을 살아가는 먼 산간읍의 어머니에게 긴 편지를 썼었다. 눈물을 방울방울 떨구며… 얼마후 엄마가 아니라 동생한테서 회답편지가 날아왔는데 그속에서 놀라운 소식이 흘러나왔다. 

엄마가 옛날에 살던 영진포에 갔다왔는데 어디가 아픈지 요즘 자리에 내내 누워있으며 끼니도 겨우 짓는다는것이였다. 

무슨 병일가? … 혹시 무슨 불길한 일이라도…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세상에는 행운이 차례진 사람에게 꼭 앙갚음하고야마는 악마가 있는것 같았다. 집걱정은 연기련습중에도 무시로 그를 사로잡아 가슴을 산란하게 만들었다. 연출가한테 집사정을 말할가 하는 생각이 여러번 들었으나 웬일인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왜 이럴가?… 왜?… 

《거기서 뭘하나?》 

분장가방을 든 장미혜가 잡관목들을 헤치며 활달하게 다가왔다. 

처녀는 가까스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니… 그저 좀… 아까 연출가동지하고 같이 내려간 녀잔 누구예요?》 

《그 녀자?》 

장미혜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곁에 앉았다. 

둘은 거기에 오래동안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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