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

 

제 7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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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동지께서는 매일과도 같이 촬영소에 내려와 《꽃파는 처녀》의 연출대본수여식이며 의도발표회에 참가하시였으며 제작단의 촬영준비를 친히 보살펴주시였다.

촬영소의 공기는 팽팽하게 긴장되여있으면서도 명절날처럼 환희와 열정, 흥분으로 설레였다.

로영무는 자기가 생애에서 가장 의의있는 시기에 들어섰다는 가슴뿌듯한 감격을 느꼈으며 이 세상에 새로 태여난듯한 환희에도 종종 휩싸이군하였다. 지난날의 모든것은 별반 의의가 없고 의의있고 값있고 보람있는 일은 모두 앞에 있는것 같았다. 오랜 연출생활의 체험으로 로영무는 연출가의 정서상태와 표정이 제작단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있어 우선 자신이 작품의 시대상과 인물들의 성격을 진지하게 연구하였으며 언짢은 일이 생겨도 낯색을 흐리지 않고 늘 밝으면서도 사려깊고 사색적인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였다.

촬영현지로 떠나기 위한 준비에 온 제작단이 들끓고있던 어느날 오후 로영무가 현지촬영계획서를 가지고 당중앙위원회 해당부서로 떠나려는데 한기석이 유쾌한 얼굴로 앞을 막아섰다. 그러한 《사신》으로는 내가 제격이라고 롱말까지 섞어가면서 자기가 가겠노라고 했다. 제작단에 할 일이 많았던 로영무는 그가 여간 고맙지 않았다. 그는 비판받은후 모든 일에 적극적이였다.

한기석이 떠나서 세시간쯤 지나 박경섭이로부터 로영무한테 직접 전화가 왔다. 현지촬영계획서를 가진 한기석이 자기를 찾아 시당으로 나갔다는데 자기는 그 사이 대극장에 왔다고 하면서 그가 아직도 안오는것으로 보아 촬영소로 돌아간것이 아닌가고 물었다. 박경섭은 오늘밤중으로 그 계획서를 김정일동지께 올리지 않으면 여러날이 지나야 지도받을 기회가 다시 생긴다고 하면서 몹시 초조해하였다. 무엇인가 혼란이 일어난것이 틀림없었다. 한기석은 박경섭이 대극장에 간것을 모르고 이 기관에서 저 기관으로 찾아다니는것 같았다.

로영무는 당황해져 구체적인 타산도 없 한기석을 찾아 떠났다. 시내로 달려나온 그는 중앙우편국옆에 이르러서야 자기가 막연하고 황당한 걸음을 걸었다는것을 깨달았다.

어디에나 사람들의 물결이 붐비는 이 넓은 시내에서 신장 170센치메터의 그를 찾기란 풀밭에 떨어진 바늘을 찾기보다 더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제작단에 있는 그 계획서의 부본을 복사해서 올려보내면 간단히 해결될수 있는것인데 어째서 그런 생각을 못했는지 알수 없었다. 그는 너무 어이없어 주먹으로 제 머리를 툭 치고는 제작단에 곧 전화를 걸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중앙우편국의 시내공중전화실들앞에는 사랑에 빠진듯한 청춘남녀들이 차례를 기다리고있어 끼여들것 같지 못했다.

로영무는 어디에 가면 전화를 헐하게 걸수 있을가싶어 대통로로 나가 모란봉쪽으로 스적스적 걸어내려갔다.

대동강호텔앞을 지나 고급리발관앞에 이르러 그는 무심결에 리발실안을 들여다보았는데 넓은 유리창안의 푸르싱싱한 고무나무가지들사이에 웬 서류봉투가 끼여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한기석에게 줘보낸 봉투였다.

제작단의 《사신》은 리발의자에 엇비스듬히 누워있고 나이지숙한 아바이리발사가 그의 얼굴에 비누거품을 허옇게 칠하고있었다.

로영무는 반가움보다도 놀라움이 더 컸다. 그는 안을 들여다보다가 슬그머니 물러나 벽에 등을 붙이고 섰다. 한기석은 온 시내를 헤매였거나 시당에까지 가보고 단념했을수 있었다. 어쨌든 리발의자에 누워있는 그를 보니 아연해지고 불쾌해졌다. 그런가 하면 태평스러운 마음이 천진하게도 여겨졌다. 한편 일이 이렇게 된것은 박경섭의 분망한 사업때문이지 그의 탓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이런 공교로운 일로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싶지 않았다.

천성이 성실한 로영무는 이제 그가 당황해하고 죄송스러워하리라는 생각이 들자 대기실에서 리발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가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박경섭의 독촉을 생각하면 그렇게 할수 없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리발실문을 조용히 열었다.

그는 리발하는 손님들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누구의 주의도 끌지 않도록 허리를 약간 구부정하고 발끝으로 조심조심 걸어들어가 리발사의 량해를 구하고 한기석의 어깨를 부드럽게 건드렸다.

한기석은 민감하게 반응하여 눈을 떴다. 그는 무슨 생각에 골똘해있었는지 서늘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로영무는 고무나무쪽을 가리키며 저걸 가져가겠노라고 했다. 한기석은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듯 당황한 빛을 띠며 리발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로영무는 젊은이의 어깨를 눌러 도로 눕히고는 마음을 가라앉혀주려고 비누거품이 허연 눈섭이며 턱밑을 살펴보는척했다. 그리고는 리발사아바이한테 평양에서도 손꼽히는 미남인데 잘 손질해달라 부탁하고 기석에게 눈을 끔쩍해보였다.

서류봉투를 안고 밖으로 나온 그는 스스로도 기분이 좋고 마음이 홀가분해져 대극장쪽으로 헐떡거리며 뛰여갔다.

대극장의 후문접수에서는 그의 신분을 깐깐히 확인하고 안에 전화를 걸어 승인을 받은 다음에야 출입증을 떼주었다.

대극장안의 공기는 팽팽하게 긴장되여있었다. 가극 《피바다》의 시연회가 시작되여 무대뒤쪽의 복도들과 대기실, 분장실들은 역인물로 분장한 수백명의 배우들로 붐비였다.

로영무는 모험을 즐기는 젊은이의 마음이 되여 그들속을 거침없이 누벼나가 객석쪽의 복도로 빠져나갔다. 거기는 무대뒤쪽과는 달리 숙연한 정숙이 깃들어있었다. 무리등불빛이 쪽무이마루바닥에 어려있는 넓고 긴 복도에는 인적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무대쪽에서 울려나오는 관현악의 은은한 선률만 공기를 조용히 흔들고있을뿐이였다.

로영무는 방음장치가 된 두꺼운 가죽문쪽으로 다가가 문틈에 볼을 대고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이였다. 안에서는 말소리, 기침소리 하나 없고 서정적인 음악의 세계가 바다처럼 설레이고있는듯했다.

누구인가 팔굽을 잡아채였다. 관리원인듯한 코에 안경을 느슨하게 건 강마르고 작달막한 중년녀인이였다.

《누구세요?

《들어가면 안됩니까?

《아-니, 이 손님이? 정신이 있어요? 만날분이 있으면 휴계실에서 기다려요.

녀인은 언짢은 눈길로 그의 아래우를 훑어보고는 따라오라는듯 휴계실쪽으로 걸어갔다.

로영무는 한숨을 짓고 그의 뒤를 따랐다.

얼마후 그는 관리원과 장의자에 가지런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게 되였다.

가극극장의 오랜 의상사였던 그 녀자는 젊어서 한때는 단역이나 군중역으로 무대에 나선적도 더러 있었는데 지금은 위생실이나 복도의 청소나 하니 모두 얕보아 어느 누구도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한숨지었다.

그 녀자는 좀 수다스러운편이나 오랜 의상사생활에서 들은 풍월도 있어 예술과 예술인들의 뒤생활에 대하여 많은것을 알고있는것 같았다.

《뒤쪽으로 해서 슬그머니 들어가면 안될가요?

관리원은 문외한의 소리라는듯 약간 멸시적인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안됩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화상영하고는 달라요. 문소리가 나도 그렇고 복도의 빛이 흘러들어가도 분위기… 분위기가 다 깨져요. 가극이니까요.

《허 가극이라… 그럼 그만둡시다.

《노엽게 생각 말아요. 지금 모두 얼마나 긴장돼있는지 알아요? 총장동지랑 연출가선생이랑 모두 식은땀을 흘리며 앉아있을거예요. 관통련습을 다섯번이나 했는데 매번 엄청난 실수가 생겼고 형상이 뜻대로 되지 않았거든요. 김정일동지께서 거의 매일 나와 지도해주셨고 노래만 해도 2천여곡이나 친히 들어보고 골라주셨는데 무대형상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겠어요. 이번 가극만 잘되면 이런 새 형식의 혁명가극들이 수태 쏟아져나온대요. <꽃파는 처녀>, 한 자위단원의 뭐라는거랑, <밀림아 이야기하라>랑… 어떻게 되겠는지…》

관리원은 조용히 한숨까지 내쉬였다.

《처음부터 된다 안된다 론쟁도 많더니 에휴…》

로영무는 문득 고일명에 대한 우려감이 다시 되살아올라 마음이 긴장되였다.

《론쟁이 많았던게지요?

《위생실청소나 하는 우리까지 알게 됐으니 더 말할게 있나요. 새 작품을 창조할 때면 론쟁이 있기마련이지만 이번엔 완전히 새 형식의 가극이거든요. 노래들은 몽땅 절가형식이고 방창, 환상무용, 립체적인 무대장치, 주고받는 말들은 모두 대사로 하고… 완전히 혁명이야요. 고일명선생을 아세요? 작곡가 말이예요.

《예… 좀…》

로영무는 가슴이 뜨끔해졌다.

《그 선생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가요? 그 선생도 저기 시연회에 참가했는가요?

《참가했겠지요.

《극장에서 그 선생은 평판이 어떤가요?

그가 지나친 호기심을 드러낸탓인지 그 녀자는 움츠러들었다.

《글쎄요… 청소나 하는 잠뱅이가 그런것까지야 어떻게 알겠어요.

그리고는 가슴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였다.

《에휴-… 모두 밤을 패며 련습했는데요… 어떤 배우들은 무대뒤에서 잠간 쪽잠을 자고는 새벽까지 련습했어요. 출퇴근시간이 다 없어졌지요. 가족들까지 떨쳐나서 식사를 지어오고 간식을 가져오고… 어떻게 되겠는지…》

관리원은 불안감에 앉아있을수 없는지 어디로인가 나가버렸다.

로영무는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여 앉아있다가 갑갑증이 나서 복도로 다시 나가 공연히 왔다갔다 거닐며 무대쪽에서 울려나오는 합창소리에 귀를 기울이였다.

갑자기 만세의 함성이 울려나왔다. 그 함성은 그칠줄 모르고 계속 터져올랐다. 복도의 공기가 설레였다. 가극속의 만세소리인지 객석에서 터져오르는 함성인지 분간할수 없었다.

로영무가 얼떠름해져 두리번거리는데 측면 출입구쪽에서 아까 그 관리원이 뛰여오며 끝났다고 손짓하였다.

그가 출입구쪽으로 달려가는데 출입문이 열리며 김정일동지께서 흥분된 안색으로 활달하게 걸어나오시고 그뒤로 서영림을 비롯한 가극단일군들이 우르르 밀려나왔다. 그들속에서 박경섭이며 리문학의 얼굴도 보였다.

박경섭은 인차 로영무를 알아보고 그에게로 다가와서 현지촬영계획서가 든 서류봉투만 받아가지고는 래일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귀빈실쪽으로 뛰여갔다.

로영무는 서운한 생각이 없지 않아 돌아서지 못하고 그냥 서있다가 안에서 쏟아져나오는 예술인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그들은 흥분과 격정에 넘쳐 진정 못하고 설레이면서 왁작 떠들어대였다.

《성공… 대성공이요!

《방창이 정말 좋구만!

《<피바다가>가 저렇게 울릴줄은 몰랐소!

《그이께서 무대를 향해 박수를 쳐주실 때 눈물이 쏟아져 겨우 참았소!

로영무는 그들속에 혹시 고일명이 있지 않을가싶어 두리번거리였다.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한테나 그를 못봤느냐고 물어보고싶었지만 창피한 생각이 앞서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로영무는 미심결에 객석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아직도 높다란 천정밑에서 환성의 메아리가 날아도는듯한 관람석의 저쪽구석에 한사람이 앞의자의 등받이에 이마를 붙이고 엎드려있었다. 고일명이 틀림없었다.

로영무는 그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고형…》

그는 모진 비감에 이그러진듯한 얼굴로 홱 돌아보더니 신경질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는 한마디 인사말도 없이 통로를 따라 출입구쪽으로 결패스럽게 걸어나갔다.

로영무는 가슴이 서늘하게 식어들어 그의 뒤를 따라갔다.

고일명은 극장밖으로 나가 대동강쪽으로 걸음을 다그쳤는데 강안 유보도의 화강석란간앞에 이르러 뒤따라온 그를 돌아보며 사정하듯이 말했다.

《왜 여기까지 따라왔소? 제발 날 좀 내버려두오. 난 혼자 있고싶소. 혼자 좀 생각해보고싶소.

《여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제발… 말시키지 말아주오.

《그럼 돌아가겠네. 젠장 괴벽을 좀 작작 부리라구. 우리 둘사이에야 말 못할게 뭐 있는가.》 로영무는 울컥해져서 좋지 못한 소리가 나갔다.

고일명은 그를 외면하여 화강석란간에 배를 붙이고 대동강의 흐름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번들거리는 물결이 반사하는 가로등불빛이 그의 얼굴에 어른어른 그림자를 그리였다.

《아…》 그는 이렇게 탄식하며 가슴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였다.

《저이는 과연 어떤분인가. 어떤 심장을 지니신분이요? 시연회에 그이가 나타나자 나는 자책감과 또 두려움도 없지 않아 동무들뒤에 숨다싶이 했네. 누구한테나 얼굴을 보이고싶지 않았네. 그이는 객석에 들어와 자리를 잡으시자 내가 어째 보이지 않느냐고 나부터 찾았소. 가까이 와서 앉으라고 하셨네… 가극이 끝났을 때는 나를 돌아보시며 어떠냐고 진지한 안색으로 물으셨네. 나는 그런 진지한 얼굴을 여태 본적이 없소. 그이 발치에 엎드리고싶었소. 가극은 정말… 정말 훌륭하네. 이건 완전히 새것이요! 세상에 이런 가극은 없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될 가능성을 보지 못했는가. 리문학이와 다른 동무들의 말을 고집스럽게 믿지 않았는가. 우리 조선사람들은 정신문화령역에서는 새것을… 위대한것을 창조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때문인가. 나는 과연 어떤놈인가, 혼자서 깊이… 깊이 생각해보고싶네… 날 건드리지 말아주오…》

로영무는 가슴을 누르던 무거운 시름이 순간에 녹아내리면서 이름할수 없는 기쁨이 솟구쳐올랐다.

그는 고일명의 두손을 으스러지게 잡아쥐고 말없이 그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이러지 말구 좀 걷자구.

이윽고 그들은 대동문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내려갔다. 둘 다 말이 없었다.

시원한 강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대동강은 기슭의 갖가지 불빛들을 다 담아싣고 유유히 흐르고있었다. 소리는 없으나 거창한 흐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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