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

 

제 6 장

8

  

주영도는 박경섭의 전화를 받고 이틀동안 로영무, 강철룡을 비롯한 여러 제작단성원들과 담화하는 과정에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되였다. 

로영무는 한기석에게 불만이 있는것 같은데 그의 흠에 대하여 까밝혀 말하지 않았다. 다른 제작단성원들은 그에 대한 의견을 적지 않게 이야기하였다. 

한기석은 이전부터 부연출로 있는것을 불명예스럽게 여겨왔으며 로영무가 림시로 연출을 맡자 뒤에서 그의 무능을 자주 개탄했었다. 장례날에는 최승진이 림종전에 자기한테 작품을 맡기고싶어했노라고 했으며 연출가가 정식으로 임명되자 부연출사업에 열을 내지 않았다는것이였다. 

주영도는 마감으로 한기석을 만났는데 그는 처음부터 얼굴이 해쓱해서 항변해나섰다.

《작품을 맡고싶어한게 무엇이 잘못입니까. 상급당에 그만한 의견도 제기하지 못합니까? 여기서는 누구도 제 소원을 들어주지 않지,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제기했습니다. …사업에서 적극성을 내지 않은건 잘못했습니다. 사기가 없어 그랬습니다.》 

주영도는 엄엄한 얼굴로 그를 여겨보다가 담화를 그만두었다. 

그날 주영도는 한기석의 사람됨됨을 비로소 알아보았고 자기 지난날 사업을 두고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였다. 

(일찍부터 예술인들속에 깊이 들어가있었다면 저 동무 병집을 알고도 남았을것이다. 당일군도 능력이 제한된 개인인 이상 제 혼자 눈으로는 사람을 정확히 볼수 없다. 백명은 몰라도 적어도 열명, 다섯명의 눈으로는 사람을 볼줄 알아야 한다. 군중의 눈으로 사람을 봐야 실수가 없다. 당일군의 과오는 사람을 잘못보는… 바로 여기로부터 싹트는게 아닌가…) 

주영도는 개인생활에서 불행도 당하고 어려운 고비도 몇번 넘겼으나 예술인들한테 하소연하거나 도움을 청한적도 없었으며 그들의 가까운 이웃으로 지낸적도 없었던것 같았다. 휴식날에 그들과 장기판에 마주앉은 일도, 려행길에서 구수한 말동무로 된적도 별로 없었다. 

그는 예술인들한테 피가 통하는 벗이 아니라 교양자, 조직자, 결론자… 그리고 싫은 소리를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였다. 그는 예술인들의 당비서이고 예술인들은 그의 사업대상일뿐이였다. 그랬으니 일상 생활에서 사람들이 한기석이를 어떻게 보는지 잘 모를수밖에… 

그는 친애하는 김정일동지의 가르치심대로 당사업을 사람과의 사업으로 철저히 전환하고 이번 기회에 한기석의 결함도 고쳐줘야 하겠다고 속다짐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다 퇴근한 저녁녘에 중요한 창조성원들만 참가시키고 제작단 모임을 가지였는데 한기석은 그자리에서도 변명만 앞세우면서 자기비판을 성실하게 하지 않았다. 촬영가, 부촬영, 장치미술가들이 일어나서 그가 창조사업에서 열정이 없다고 충고하는 식으로 부드럽게 비판했으나 다음에 일어선 강철룡의 비판은 매우 신랄하였다.

《저도 한 부연출로서 작품을 맡아 연출하고싶은 생각이 없지 않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것이 생활의 희망이고 목적입니다. 때문에 연출을 맡으려고 한 기석동무 심정이 리해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석동무는 이 목적을 어떻게 달성하려고 했는가. 어떤 방법으로, 수법으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동무는 꾸준하고 진지한 탐구와 노력으로 예술적기량을 높이고 그것을 인정받는 방법이 아니라 남을 헐고 밀어제끼는 방법으로 그것을 달성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이전에 최승진연출가가 과오를 범하고 위축되였을 때엔 그를 밀어제끼려고 했으며 로영무연출가에 대해서는 뒤에서 무능하다고 시비했으며 자기가 속한 조직을 무시하고 상급당에 편지까지 내여 밀어제끼려고 했습니다. 우리 당이 령도하는 문학예술대오에서, 우리 사회에서 이런 수법이 통하는가? 어디서 배운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동무의 처세술과 인생관에 혐오를 느끼오!… 기석동무는 분명히…분명히 그렇습니다. 당에서 영화예술에 깊은 관심을 돌리고있는 이때에 어떻게나 두각을 나타내여 자기 공명을 떨치고 출세의 길을 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고… 자기 욕망대로 일이 안되니 뒤틀려져 창조사업에 열정을 내지 않았습니다. 기석동무한테 당의 의도를 진심으로 받들어… 자기를 다 버리고… 영화혁명에 투신하자는 생각이 있었는가?》 

방안공기는 팽팽하게 긴장되였다. 

철룡은 단숨을 몰아쉬다가 우리가 맡은 작품이 어떤 작품인가고 격하게 소리치고는 한기석은 이런 중대한 창조사업에 참가할수 있는 자격을 상실했기때문에 스스로 제작단에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가슴아프지만 터놓고 말하겠습니다. 창조사업을 한다 해도 제대로 하지 못할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량심에서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감정이 움틀수 없기때문입니다!》 

철룡이 앉자 한기석은 랭소가 어린듯한 눈매로 그를 돌아보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말하지 말자고 생각했고… 여태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터놓지 않을수 없습니다. 병원에서 승진연출가가 제손을 붙잡고 자기가 가더라도 작품을 맡아 잘 성사시켜달라고 당부한건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선 윤희아주머니한테서 들어 저 미혜동무도 알고있을것입니다. 그래서 작품을 맡자고 더 애를 썼습니다.》 

좌중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영도는 구석쪽의 장미혜를 돌아보았다. 

《미혜동무, 그렇소?》 

크게 뜬 눈으로 한기석을 쳐다보던 미혜는 질문을 받자 웬일인지 고개를 푹 숙였다. 온몸에 전률이 이는지 그의 어깨가 알릴듯말듯 떨렸다. 

한기석은 성급히 말을 이었다. 

《철룡동무는 저보고 공명이요 출세요 했는데 저는 그 말들을 정중하게 돌려주고싶습니다.》 

《비꼬지는 말구!》하고 주영도가 엄하게 일렀다. 

《좋습니다. 그럼 출세에 대해서 좀 말해봅시다. 철룡동무와 미혜동무 관계는 한때 우리 예술부서들에서 비밀이 아니였습니다. 그랬는데 어느 사이엔가 그 문제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슬그머니 사라졌습니다. 철룡동무가 미혜동무를 점점 멀리하다가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버렸기때문입니다. 왜 그랬는가?… 철룡동무, 나를 그렇게 보지 말고 마감까지 다 들은 다음 의견이 있으면 말하오… 왜 버렸는가? 형이 리명선동지의 해임에 정치적인 문제가 깔려있다고… 말하자면 과거생활에서 믿을수 없는 문제가 있기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반대해나서자 형 의사에 따라 리기주의, 출세주의로부터 미혜동무와 운명을 결합할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한 처녀를 유혹했다가 사정없이 버렸습니다. 출세주의로 말한다면 이런것이 아니겠는가…》 

주영도는 뜻밖에도 론제가 사랑문제에로 번지자 언짢은 얼굴로 한기석을 꾸짖었다.

《동무는 왜 사람들앞에서 그런 문제를 함부로 꺼내면서 야단이요?》 

《미혜동무한테는 참 안됐지만… 누가 진짜 출세주의인가 해명하자니 별수 없었습니다.》 

《그만두오.》 

철룡은 머리를 뒤로 젖혀 벽에 붙인채 눈을 꾹 내리감고있었는데 그의 입술이며 볼편으로 경련이 지나갔다. 

주영도는 측은한 눈매로 미혜쪽을 돌아보았다. 

《미혜동무, 미안하오. 그 문제는 후에 나하구 조용히 만나 이야기합시다.》 

처녀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인채 응대를 못하였다. 눈물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어깨가 조용히 물결쳤다. 

한기석이 할말이 있으면 하라는듯 처녀를 불렀다. 

《미혜동무!》 

미혜는 곁에서 말리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룡동무한텐 잘못이 없어요! 제가 물러나서 그렇게 됐어요.》 

《아, 아, 미혜동무, 그만두라는데…》 하고 주영도가 황급히 손짓했다. 

처녀는 그 무슨 의분때문인지 앉지 않았다. 

《기석동무 말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전 윤희아주머니한테서 그 비슷한 말도 듣지 못했어요!》 

한기석은 얼굴이 해쓱하게 질렸다. 

《기석동무한텐 철룡동무가 싫었어요. 철룡동무의 바른 생활태도와 바른 소리가 싫었어요. 그래서…》 

갑자기 강철룡이 움쭉 일어서려는것을 주영도가 손짓으로 제지시켰다. 철룡은 도로 앉았으나 불꽃튀는 눈으로 처녀를 치떠봤는데 그 눈빛은 이렇게 소리치는것 같았다. 

(나는 왜 건드려!) 

처녀는 그 기상에 눌려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웠다.

방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주영도는 쓴 입만 다시다가 잠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참 한심하오… 내 보기에도 기석동무가 그런 사상감정으로는 이 작품을 해내지 못할것 같소. 온몸과 마음이 몽땅 불이 돼도 모자라겠는데 그런 정신상태로 이 작품의 고상한 사상감정세계를 파악이나 할수 있겠소? 운명하기 직전까지 당에 충실하려고 애쓴 최승진연출가를 보오. 어째 그런 모범은 따르지 못하는가, 곁에 있으면서… 철룡동무 비판이 그르지 않소. 동무는 인생관을 고쳐야 되오. 사실 우리는… 예술위원회나 당위원회에서 동무를 큰 연출가로 키우자고 여러번 론의했댔소. …안되겠소. … 친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동무 소행때문에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아우?》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게 울리였으나 한기석은 몸을 떨며 얼굴을 쳐들었다. 주영도를 지켜보는 그의 크게 뜬 눈에 후회의 빛이 번뜩이였다. 

그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속에서 주영도의 목소리만 무겁게 울리였다. 

《누구나 충성심이 정말 쇠물처럼 끓지 않고는 당의 의도대로 자신들을 혁명화할수 없고 영화혁명도 해나갈수 없소!》 

 

× 

 

밤하늘에 널려 보석처럼 반짝이는 별무리들속에서 별찌 하나가 짤막한 점선을 그으며 날아떨어졌다. 그 하늘밑 가없는 대지의 어스름속을 하나의 넋이 신음소리를 내며 헤매고있었다. 

처녀는 발길이 가는대로 어디라없이 허둥허둥 걸음을 옮겨갔다. 바람에 머리칼이 날렸다. 장미혜는 모임이 끝난 다음 집으로 가지 못하고 들판으로 정신없이 달려나왔던것이다.

처녀는 자기가 어떻게 되여 경멸했던 사람을 그토록 두둔해나서고 제일 가까이 여기고 믿었던 사람을 그처럼 폭로하고 규탄하게 되였는지 딱히 알수 없었다. 그저 꿈속에서처럼 모든것이 비론리적으로 뒤엉켜버리고 머리속에서 바람소리같은것이 윙윙거릴뿐이였다. 한가지 사실만은 명백했다. 철룡의 환심을 사서 깨여진 감정을 되살리기 위하여 그런것은 아니였다. 절대 아니였다. 한기석이 윤희아주머니한테서 들어 미혜동무도 알것이라고 했을 때 눈앞이 아뜩해졌었다. 그런 일은 없었으며 그가 자기를 공모자로 끌어넣는데 모욕을 느꼈다. 소름이 끼쳤다. 가슴이 화들화들 떨려 몇순간 아무 소리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만 있었다. 그 몇순간에 지나간 모든 일들이 눈앞에 번개쳤다. 그리고 어제날에 진실로 믿었던것들이 뒤번져졌다. 철룡의 비판이 백번 옳은것으로 느껴졌다. 바른 소리에 대한 앙갚음으로 개인문제를 꺼내는 한기석이 비렬하게 느껴졌다. 대바른 철룡이 자기때문에 험하게 깎이우는것을 보고만 있을수 없었다. 이전 감정은 다 뒤로 제껴버리고 우선 그를 두둔하고싶어 가슴에서 불이 황황 일었다. 그래서 정신없이 일어나 그 불을 내뿜었으니 두서없는 소리로 되고 말았다. 

(나는 속았어… 속았어!) 

그가 이때까지 한 모든 말들이 죄다 거짓으로 느껴지며 무서운 의혹이 엄습해들었다. 

차거운 바람이 얼굴을 후려쳤다. 머리칼이 눈앞에 흩날리고 치마폭이 다리에 휘감겼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일사하고 바람을 맞받아 허둥허둥 걸어나갔다. 착잡한 생각들이 끝없이 갈마들었다. 철룡이 참관단에 망라되여 외국으로 가게 되였을 때 그는 병원에서 자기가 빠진것을 몹시 분해하였고 미혜는 그를 동정하였었다. 그는 영화예술인아빠트에 들고싶어했고 미혜는 그한테 자기 집을 양보해주자는 생각까지 하게 되였다. 최승진연출가가 갑자기 병이 들어 병원에 실려갔을 때 그는 몹시 흥분하였다. 그가 운명하자 고인의 미완성유고를 안고 촬영소로 돌아와 거기에 자기 착상들을 서둘러 적어넣으면서 이제는 자기가 작품을 맡게 될것 같다고 했다. 모든 사람들이 동지를 잃어 슬픔에 잠겨있을 때 그가 기쁨까지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앞으로의 연출에 대해서 생각하며 흥분에 떠있다는것을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혜는 그것을 느꼈다. 

미혜는 그때 한사람의 죽음에서 횡재라도 한듯 떠있는 사람을 본것 같은데도 그 심리를 량심과 도덕의 거울에 비껴보지 못했다. 그저 그것은 인간사회의 불가사의한 숙명이고 그래서 《죽은사람만 불쌍하다》는 속담도 생겼겠지 하고만 생각했다. 작품을 로영무연출가가 아주 맡게 된 바로 그제는 밤늦게 미혜를 찾아와 술냄새를 풍기며 자기 《팔자》를 개탄하고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그 어떤 미지의 신비적요인에 대하여 력설하며 자기만큼 일이 안되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행운은 언제나 자기만을 피하여 멀리도 아니고 가까운 코앞을 스쳐지나간다고 하였다. 분명히 이 세상에는 사람들에게 행과 불행, 흥과 망을 공평하게 분배하지 못하도록 작용하는 미지의 요인이 있고 그래서 인생의 성공률도 자질이나 노력에 정비례되지 않는것이라고 했다. 그 미지의 요인의 작용으로 자기한테 차례질수 있었던 행운을 넘겨받은 사람들은 어찌나 뻔뻔스러운지 미안하다는 소리는 고사하고 그런 기색조차 한번 보이지 않는다는것이였다. 빠리에 갔다온 강철룡이 그러했고 이번 작품을 맡게 된 로영무가 그러했다.…그러다가 로영무에게 험담을 퍼부었다. 박정한 선배, 교섭에 능한 수완가, 신인들을 짓밟는 끝없는 공명심… 

그때 미혜의 눈에 비쳐진것은 언제나 승진과 성공의 기회를 놓치는 불우한 재사의 모습뿐이였다. 

미혜는 그가 술기운과 화김에 그저 그런 소리를 하는것이며 어리석게도 재사의 그런 객기와 폭언은 아량으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부연 흙먼지바람이 처녀를 휘감으며 울부짖었다. 

미혜는 흑 느끼며 주춤거렸다.

(속았어… 속아서 내 스스로 귀중한 감정을 다 깨버렸어… 거짓을 모르는 정직한 사람은 정직한만큼 잘 속는다더니 나도 그래서 속았는가?…) 

미혜는 소리없이 울었다. 

《아-》 

그는 두손으로 귀를 싸쥐고 얼굴을 뒤로 젖히며 쓰러질듯이 비칠거렸다. 

총총한 별들이 기겁하여 저 하늘가로 멀어져가는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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