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

 

제 6 장

2

 

장미혜는 아침부터 구석진데 있는 분장실에 배겨서 가발 머리태, 눈섭, 속눈섭 등 분장요소들을 만지고있었다. 

심드렁해진 얼굴이였다. 그는 처음부터 《꽃파는 처녀》의 분장을 맡고싶은 생각이 불같았다. 그런데 조명사, 장치사들까지 다 정식으로 임명하면서도 그한테만은 림시로 맡으라고 하였다. 기량때문인가, 다른 무슨 까닭으로 고려중인가… 미혜는 남달리 차별당하는것 같아 심드렁해있었는데 아침에 로영무연출가가 갑자기 오늘중으로 분장준비상태를 보겠다고 했던것이다. 그래서 분장궤짝들을 모조리 열어놓고 고르고 또 골라봤지만 눈섭 하나 마음에 드는것이 없었다. 

원작에 제시된 인물들의 성격이며 생활조건에 어울리지 않았던것이다. 꽃분이의 머리태며 꽃분이 어머니의 머리에 씌워줄 가발 그리고 약방로인의 수염도 신통한것이 없었다. 

의학서적에 의하면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의 머리칼은 기름기가 없는것이 특징인데 로인용의 어느 가발에서나 윤기가 흘렀다. 그것은 이전에 제작된 영화들에 등장한 지주마누라나 유한부인들을 위하여 만든 가발이였기때문이다. 

몇개 있는 농촌할머니의 가발은 너무 많이 써서 다 헐어빠진것들이였다. 약방로인의 수염으로 골라낸것들도 원작을 연구하며 머리속에 그려진 표상과는 맞지 않았다. 약방로인이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웃수염끝이 노르스름하게 퇴색해졌을수 있는데 그런것이 없었다.

미혜는 속상하여 호- 한숨을 쉬며 허리를 펴고 일어나 공연히 서성거리다가 분장의자에 기대여 멍하니 창문쪽을 내다보았다. 여름내 무성한 나무그늘속에 묻혀있던 창문에 한가닥의 해빛이 비껴내려 어른거리고 넙적한 활엽수잎사귀 두잎이 한들거리며 날아내리다가 창유리를 슬쩍 건드리고는 아래로 미끄러져떨어졌다. 

미혜는 문득 마음이 산란해졌다. 창유리를 건드린 자연의 손기척이 처녀의 가슴에 야릇한 파문을 일으켜 저물어가는 여름, 다가오는 가을을 상기시키고 깨여진 사랑의 아픈 추억을 불러일으켰던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행은 병원에 입원한 한기석에게 문병갔던 그날부터 시작되였다. 그때 한기석은 누구한테서 들었는지 강철룡이 외국에 파견되는 참관단에 망라되였다는것을 벌써 알고있었다. 그는 국제호텔식당에서 강철룡에게 한 소리를 그가 두 연출가에게 말했기때문에 그들의 반대로 자기가 참관단에서 밀려난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했다. 

미혜는 그 소리가 믿어지지 않았다. 철룡은 비렬한데가 없는 사람이였다. 그가 눈을 내리깔고 응대를 안하자 한기석은 작고한 자기 아버지와 미혜어머니의 오랜 우정을 상기하면서 이때까지 관심을 돌리지 못했다고 사과하고는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어제 철룡의 형이 문병삼아 찾아와서 미혜의 어머니에 대하여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그런 유명한 녀배우가 왜 갑자기 촬영소에서 나가게 되였는가, 년로보장에 넘겼다는것이 과연 사실인가. 과거 생활이 문제로 되였다는 말도 있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고 캐여물었다는것이였다. 그리고 체모에 어울리지 않는 호기심을 가지고 녀성예술인들의 가정생활과 도덕생활에 대하여 여러모로 묻고는 자기는 일찍부터 동생이 예술인을 배우자로 선택하는 경우에도 처녀가 예술을 포기하는 조건에서만 혼인을 성사시켜줄 생각이였다고 하더라는것이였다.

미혜는 모욕감에 가슴이 떨렸다. 그런 편견에 웃음이 나가기도 했다. 예술가의 가정에서 자라나 머리끝까지 예술로 차있는 한기석이도 같은 감정에 얼굴이 해쓱해져 그 사람이 나한테까지 찾아온걸 보면 철룡이가 형을 설복하지 못한것이 분명하며 가정에서 그의 지위를 짐작할수 있다고 하였다. 

미혜는 이때까지 자기앞에 나타난 철룡이만을 보았지 그의 생활의 내면에 대하여서는 전혀 모르고있은것 같은 의혹이 들었다. 그래서 철룡의 생활에 대하여 아는것을 죄다 말해달라고 졸랐다. 한기석은 그에 대하여 좋은 말을 많이 하다가 괴로운 얼굴로 좋지 못한 소리도 몇마디 하였다. 믿을수 없는 소리지만 체계적인 예술교육을 받지 못한 철룡이 제대군인의 흙묻은 군화발로 영화예술이라는 이 서정적인 세계에 뛰여들수 있은것도 형의 덕이라는 말이 한때 있었다. 철룡의 인생목표는 재능으로 인민에게 복무하는것이 아니라 영화예술이라는 이 매력적인 세계에서 형에 못지 않은 행정자리를 차지하자는것이다. 예술창조에만 몰두하여 다른것에는 전혀 무관심한 사람들속에서는 어느 부문에서보다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헐하다고 타산한것 같다는 소리도 있었다고 하였다. 뒤이어 요즘 군대병원에 근무하는 한 소위처녀가 그의 집에 이따금씩 드나드는데 그 처녀는 철룡의 형의 전우인 어느 장령의 막내녀동생이라고 했다. 

한기석은 철룡이 사랑놀음의 단맛은 이쪽에서 실컷 보고 일생의 반려는 다른쪽에서 구할 놈팽이는 아니지만 이 모든것을 고려하여 깊이 생각해보라고 진심으로 타일렀다. 

미혜는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오다가 차에 치울번하였다. 

그날 미혜는 문을 안으로 걸고 방구석에 홀로 누워 자기 운명을 두고 별의별 생각을 다하였다. 철룡이 찾아온것을 알고도 응대를 안했다. 누구든 만나고싶지 않았다. 한번 본적없는 소위처녀의 환영이 자꾸 떠올라 마음을 괴롭혔다.

고마운 사회의 혜택을 한껏 받아 우유빛으로 환하게 피여난 미모의 얼굴에 조국에 대한 헌신적복무와 청춘의 희생정신을 상징하는 군복… 의상직장에 가면 늘 마음이 끌려 장난삼아 입고 자기 모습을 슬그머니 거울에 비쳐봤던 그 단정한 군복차림은 처녀의 용모를 얼마나 싱싱하게 살릴것인가. 군복은 상점에서 팔지 않는다. 그것은 조국이 입혀주는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 처녀군관이 조국이 내세우는 혼인상대처럼 여겨졌다. 가슴이 미여지고 불길이 활활 솟구치는듯 목안이 타올랐다. 

미혜는 난생처음으로 체험하는 이런 감정이 질투라는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 빠져도 녀성의 감정생활에서 제일 수치스러운 약점이라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리라 속다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그 환영이며 착잡한 감정들을 다 지워버리고 철룡이만을 생각했다. 그를 믿고싶었다. 그를 만나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다짐을 받아내고싶었다. 며칠후 집으로 찾아온 철룡의 대답은 너무 명백하고 선선하기때문에 도리여 의심이 갈 정도였는데 그가 마지막에 열을 내며 따진 문제가 간신히 지켜온 믿음을 산산 허물어버렸다. 

《요전에 집에 있었소? 내가 찾아왔을 때…》 

《있으면서 어째 응대를 안했소?》 

《누가 와있었소? 그 <벗>이란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허술히 여기고 얕보면 이러겠는가… 한기석의 말이 죄다 맞는것 같았다. 외국참관에서 돌아온 철룡의 얼굴표정과 생활에서는 삶의 목표가 뚜렷한 사람의 강력한 지향성이 느껴졌다. 그는 영화창조에만 몰두하고 다른것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는것 같았다. 미혜를 만나도 그저 반갑게 인사하고 지나갈뿐이였다. 이전 일들을 다 잊었는지 그저 그렇게 가장하는것인지 도무지 알수 없었다. 미련이란 검질긴것이여서 미혜는 그의 심중을 다시 알아보고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좀처럼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창문에 비낀 나무그림자가 어른거리면서 고요한 방안에 저물어가는 계절의 서글픈 정취를 불어넣는듯했다. 

분장의자에 기대여 생각에 잠겼던 미혜는 갑자기 그 무슨 예감에 가슴이 활랑거렸다. 

(혹시 로영무연출가가 바쁘면… 그가 오지 않을가…) 

미혜는 서둘러 방안을 거두고 분장궤짝들을 정리하였다. 그러다가 한개의 늙은이수염을 손바닥우에 올려놓고 오도카니 앉아 유심히 살펴보게 되였다. 언제인가 잃어버려 눈물을 짰던 그 수염같았다. 그것이 철룡의 호주머니에서 나졌던 일이 생각났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게 되였다. 

미혜는 그 수염과 다른 수염들을 모두 꺼내서 웬일인지 눈에 잘 띄는 분장거울밑에 주런이 놓게 되였다. 

예감대로 강철룡이 왔다. 언제나와도 같이 잠바앞섶을 열어놓았는데 안에 입은 와이샤쯔의 흰 목깃과 열정적인 눈때문인지 침침하던 분장실에 선풍이 불어든듯싶었다. 

그는 가발, 머리태, 낭자, 눈섭, 속눈섭 등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서 다 새로 만들어야 되겠다고 했다. 

《작중인물들의 직업과 나이에 잘 맞지 않을것 같소. 원작은 읽었소?》 

《대본만 읽었어요…》 

《원작을 연구해야지…》 

《전 림시분공을 받았어요. 이제 누가 임명되겠지요…》 

철룡은 그 말에는 아랑곳없이 분장거울앞으로 가서 수염들을 하나하나 만져보았는데 미혜는 거울에 비쳐진 그의 얼굴만 지켜보았다. 그의 눈에 아무런 부드러운 빛도 살아나지 않았다. 미혜가 아까 쥐였던 그 수염을 만져보면서도 입가에 미소 한점 떠오르지 않았다. 

《연출가가 요구성을 대단히 높이는데 이것들도 좀 염색을 하든지 어떻게 해야 되겠어.》 

그리고는 무엇을 경계하는지 인차 나가버렸다.

미혜는 파랗게 얼어서 문가에 기대여 서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아무것도 남아있는것이 없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으면서 련애장난을 한것인지… 기석오빠의 말이 옳다. 전적으로 옳다. 그의 말은 훼방도 중상도 아니다. 진심으로 한 충고였다. 

철룡은 자기 형의 꼭두각시이고 그림자이다. 철룡에 대한 반발로 그가 싫어하는 한기석에게 한껏 의지하고싶었다. 

방에 홀로 남자 미혜는 분장의자에 앉아 거울속에서 내다보는 처녀와 눈을 맞추었다. 그 처녀가 자기인가 하는 의혹이 들었다. 

최근에 와서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자기 모습이란 험상궂기 짝이 없는것인데 거울속의 처녀는 총체적으로는 서리맞은 인상이나 예쁘장한 얼굴에 곧은 마음이 내비친듯한 생동한 눈매로 이쪽을 빤히 내다보고있었다. 단지 입술이 좀 말라보이고 눈꼬리에 바늘로 그어놓은듯한 주름살이 아리숭하게 느껴질뿐이다. 

(사람이란 정말 강하지…) 

미혜는 서글픈 미소를 머금고 한손을 들어 이마며 볼, 목을 부드럽게 쓸어만져보았다. 그러다가 거기에 철룡의 뜨거운 입김이 수없이 스쳤다는 생각이 들어 몸서리를 쳤다. 

뒤에서 문소리가 났다. 

미혜는 몸의 한부분을 드러내놓고 있기라도 한듯 화닥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한기석이 들어왔다. 미혜는 분장의자에서 뛰여내리며 반기였다. 

《병원서 와요?》 

《비서동지가 방에 없구만.》 

《연출가동지는 어때요?》

《묻지 말라구…》 

그는 음산한데서 온 사람처럼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며 을씨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연출대본은 어떻게 됐어요?》 

《그게 문제가 아니야… 누구한테나 절대… 절대… 말하지 말라구.》

한기석은 이렇게 오금을 박고는 온 세상이 무서워하는 불치의 병명을 말하고 여러차례의 실험검사결과 최승진연출가가 오래전부터 그 병에 걸려있었다는것이 밝혀졌다고 했다. 

미혜는 비명을 터뜨리지 않으려고 입을 싸쥐였다. 숨도 쉬지 못했다. 상복을 입은 윤희의 처량한 모습이 언뜻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영화야 어떻게 만들겠지… 참 안됐어. 안됐단 말이야. 병원에 가서도 대본을 수정하느라고 내내 배를 그러안고 앉아 끙끙거렸댔는데… 나는 며칠전부터 이상하게 여겼댔어. 전경화면에 중경을 주고 특대사화면이 자꾸 반복되지 않겠어… 벌써 제정신이 아니였단말이야. 아, 인생이란 참…》

엄습해드는 허무감에 몸을 주체하기 어려운듯 그는 헐어빠진 분장의자의 팔걸이를 붙잡고 머리를 밑으로 떨군채 잠자코 있었다. 

미혜는 그한테 무슨 위로라도 해주고싶었으나 목안에 단재가 찬듯 말이 나가지 않았다. 

한기석은 갑자기 기분을 돌려 허구프게 웃고는 분장의자에 올라앉아 두손으로 푸시시하게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만졌다. 

《병원에 가서 며칠 머리도 빗지 못했더니 이런 꼴이 됐군… 빗이 없나?》 

미혜는 위생복주머니에서 분장빗을 꺼내주었다. 한기석은 빗살을 흑 불고는 머리를 대충 빗어넘겼다. 

《내가 잘 빗어드릴가요?》 

《괜찮아. 누가 보면 별나게 생각하겠어.》 

《이맘땐 누구도 안와요.》 

《됐어…》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손으로 볼이며 턱밑을 쓸어만지면서 분장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미혜…》

《…》 

그는 격한 감정을 누르고있는지 눈이 열기를 뿜으며 번쩍이였다. 

《분장미술가의 눈으로 보면 어때? 내 이 얼굴을 소재로 해서 긍정인물을 만들기 헐할가 부정인물을 만들기 헐할가? 어느쪽인가?》 

미혜는 분장의자등받이뒤에 붙어서 의아한 눈으로 거울속의 그를 내다보았다. 미혜는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라 입을 다물고있었다. 롱담으로 돌리고싶지만 어째서인지 속이 긴장되며 그렇게 되지 않았다. 

《로영무연출가는… 그 령감 얼굴은…?》 

《…》 

《생명이 떠나간 사람의 얼굴을 보라. 거기에는 부정기도 긍정기도 아무것도 없다.… 미혜는 언제인가 이렇게 말하며 자연적인 상태에서 부정기있는 얼굴이나 긍정기있는 얼굴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고 주장했지,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다고… 내면세계가 눈빛에 내배고 얼굴힘살과 살갗의 긴장은 이렇게 저렇게 조종해서 모양을 잡아놓는데 따라 부정이나 긍정기가 생긴다고… 늘 그렇게 주장했지? 그래서 우리 연출가들이 타고난 미모의 배우들만 긍정인물로 쓴다고 늘 불평을 부리구.》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생활속에서 봐요. 그다지 잘 생기지 않았지만 아름답고 고상한 감정을 풍기는 얼굴이 얼마나 많아요. 그건 내면세계때문이야요. 흉한 심보를 가진 사람의 얼굴에는 어느 구석엔가 흉한데가 있어요.》 

《허허, 참 누구나 미혜앞에 서긴 무섭겠는걸… 그럼 로영무연출가 얼굴은 어떤가?》 

《배우가 아니고 연출가기때문에 한번도 분석적으로 보지 않았어요. 분장예술의 대상밖이니까… 그런데 그 연출가 얼굴에 대해선 어째 그렇게 마음을 써요. 갑자기 무슨 역이라도 맡고싶어하는가요?》

《아니… 사람속이란 잘 모르겠거든. 최승진연출가가 불치의 병이라니까 벌써부터 제작단을 제것처럼 틀어쥐고 기승을 부린다는 소리가 있어. 효과사들을 먼 산골로 쫓아보냈다면서? 아직 숨쉬고있는데 그러는 법이 어디 있나…》 

미혜는 자신이 수모라도 당한듯 얼굴이 해쓱해졌다. 

《누가 그래요? 정말 터무니 없어요… 림시로 제작단을 맡겼으니 잘 돕자고 그러는데… 남의 성실한 마음을 이렇게 전도해놓는 법이 어디 있어요. 언제나 최승진연출가의 연출의도를 따라야 한다고, 그래야 영화가 잘된다고 강조해요.》 

《표방이야 그렇게 하겠지… 나도 처음엔 믿어지지 않아 미혜처럼 기분이 좋지 못했어… 아득한 옛날에도 왕이 림종에 이르면 왕세자들사이에 암투가 벌어졌다지 않아. 왕권은 커녕 한줌만한 재산을 누가 가지겠는가 하는 상속문제때문에 화목하던 형제들이 으르렁거렸다는 이야기는 얼마나 많은가…》 

《그건 까마득한 옛날이야기고 우리 시대… 우리 시대에야 어떻게 그런 일이… 그 비슷한 일이라도 있을수 있어요?》 

《우리 시대란말이지… 나는 아마 시대긍정의 감정이 약해서 그런 소리에 넘어간 모양이구나. … 좌우간 성녀아주머니한테라두 조용히 일러주는게 좋겠어. 운명하기전까지는 너무 그러지 말라구… 제것이 다 된것처럼… 참, 미혜는 아직 우리 제작단에 정식으로 임명되지 못했지?》 

미혜는 그 말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뛰놀았다. 

《저만은 어째 림시예요?》 

《알아보겠어. 부총장한테두 말하구 당비서동지한테두 내가 직접 제기하겠어. 제작단에서 요구하면 다지.》 

《이번 작품엔 꼭 참가하고싶어요.》 

《알겠어…》 

한기석은 당위원회로 간다고 인차 방에서 나갔다.

 

× 

 

컴컴한 얼굴로 한기석의 이야기를 듣고난 주영도는 한손으로 무겁게 숙어진 이마를 싸쥐고는 말이 없었다. 손등에 흘러내린 까만 머리칼이 보일듯말듯 떨렸다. 

《이렇게 되니까 지난 시기 일들이 후회되는게 많구만. 비판이랑 너무 가혹하지 않았는지… 가슴에 맺혀있는게 없는지…》 

주영도는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피워물고 한기석에게도 권했는데 눈에 물기가 번들거렸다. 

그와 응접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한기석이 엉거주춤 일어나 담배를 받아지며 위로하듯이 말했다.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맺혀있기는 뭐가 맺혀있겠습니까. 참, 안되긴 안됐지만… 그만하면 잘 지냈지요…》 

《아주머니는 그냥 곁에 붙어있소?》 

《예…》 

《그렇게 젊은 나이에… 아 참 안됐소.》 

주영도는 타들어간 담배꽁초의 불을 재털이에 비벼 꺼버렸다. 재털이에서 파르스름한 실연기가 피여오르다가 사라졌다. 

《기석동무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겠소? 병원에 그냥 있는게 좋겠소. 제작단에 나오겠소?》 

《이제 제가 병원에 있어 무얼 하겠습니까. 제작단에 나와있어야 될것 같습니다.》 

《연출대본은 다 됐소?》 

《아직… 3분지 2정도밖에 고치지 못했습니다.》 

《힘들테지…》 

《앓으면서 하다나니… 연출가동지가 정말 고생을 합니다. 정 못견디겠으면 누워있다가 아픔이 조금 가셔지면 일어나 배를 그러안고 한장면, 한장면 써나갑니다. 밤중에도 하고 새벽에도 하고 곁에서 보느라면 정말 피를 흘리며 포복전진해서 기여가는 병사가 생각나거든요. 남아있는 마지막 기운을 다 바쳐 기여가는 병사같습니다. 어떤때는 정신이 헛갈리는지 왕청같이 써놓아 제가 다시 다 고쳐쓰지 않으면 안됐습니다. 이제는 안될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예 걷어가지고 나올가 합니다.》 

《그렇게 하는게 좋겠는가. 정신만 차리면 대본원고를 찾는다는데 아주 걷어가지고 나오면 큰 타격을 주지 않겠소?》 

《이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채 그냥 떠날것 같습니다.…》 

주영도는 얼굴빛이 더 어두워졌다. 그는 말라들어 껍질이 인 입술을 오무려 누기를 줄뿐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참 야단입니다. 그렇게 되면 작품을 누가 맡아하겠습니까?》 

《작품?…》 주영도는 그것이 아득히 먼 세계의 일인듯 거의 방심한 얼굴이였다. 

《예…》 

《지금 로영무연출가가 림시 대리하고있지…》 

《예. 승진연출가하고 같이 대본을 써보니까 대담하고 독창적인 연출수법이 요구되는 작품입니다. 두리뭉실하게 연출해서는 절대 안되겠습니다. 누구나 젊은 사람한테… 고루하지 않고 감각이 생신한 신진연출가한테 맡겨봤으면 좋겠습니다.》 

《…》 

《모두 발견하지 못하니까 그렇지요. 부연출들중에서 철룡동무나 누구한테 맡겨도 저는 적극 돕겠습니다. 도와서 명작을 만들겠습니다. 꼭 만들겠습니다!》 

한기석의 눈동자에서는 파란 섬광같은것이 빛발쳐나왔다. 주영도는 침울한 눈으로 그를 여겨보다가 손을 홱 내저었다. 

《됐소. 그만두자구.》 

한기석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괴로와 한손으로 이마를 싸쥐고있는 주영도에게 인사하고 나가다가 다시 돌아섰다.

《저… 비서동지, 장미혜동무한테는 어째 분장을 림시로 맡겼습니까.?》 

주영도는 그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부총장한테 물어보라구… 아마 다른 제작단에서 먼저 요구했을거요.》 

《우리한테 주십시오.》 

《부총장한테 가서 토론하라는데…》 

한기석은 그의 돌변된 기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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