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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2
이튿날 그들이 루브르궁미술관앞 뜨락으로 걸어들어가는데 앞장에 섰던 앙드레 뻬르망이 흠칫 놀라 멎어서며 미술관 현관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세사람을 흘깃 돌아보았는데 그 얼굴에서 난처한 기색이 언뜻 엿보였다. 거기에는 한 처녀가 검은 색의 커다란 구식트렁크를 들고 층계밑으로 내려섰다. 일전에 보았던 그의 딸인듯하였다. 처녀는 그늘진 얼굴이였다. 어깨에 흘러내린 금발이 바람에 흩날리며 얼굴절반을 가리우군하였다. 로인과 처녀는 층계밑에 마주서서 수군수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트렁크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것을 자주 내려다보군하였다. 무엇때문인지 처녀는 자꾸 도리머리를 젓는가 하면 어깨를 신경질적으로 흔들고 로인은 무엇인가 달래며 설복하다가 애걸하는것 같았다. 이윽고 로인이 뾰로통해진 처녀를 데리고 세사람앞으로 걸어와 인사를 시키며 자기 외동딸이고 자기 자랑이고 희망인 크리쓰띤 뻬르망이라고 했다. 처녀는 금발에 파란눈이고 갸름한 얼굴, 보기 좋은 중키이나 어깨가 앙상하고 가슴도 얇아 전체적으로 빈약하고 쌀쌀한 인상을 주었다. 처녀의 목밑에 걸려있는 자그마한 은빛 십자가의 반짝거림이 그런 인상을 강조하는듯했다. 그러나 인사를 나누며 웃을 때 보니 매우 지적이면서도 상냥스러운 독특한 미의 얼굴이고 전체적인 인상도 그 웃음과 함께 돌변하여 다정다감한 정까지 풍겨주는것이였다. 로영무가 고개를 숙여 크리스띤 뻬르망의 손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을 때 그 처녀는 이것이 유럽에 온 동방사람들한테서 흔히 보게 되는 객기가 아니라는것을 직감하고 좀 당황해하였다. 그러다가 자기네한테서도 사라져가는 고전적례절로 호의와 존중을 표시해주는 상대의 지체와 인격에 눌린듯 한쪽무릎을 약간 꺾으며 고개를 다소곳이 숙였다. 철룡은 크리스띤의 손을 꽉 잡아쥐고 흔들었다. 처녀는 손이 아픈지 한쪽 어깨를 낮출사하며 입을 반쯤 벌리기까지 했다. 곁에 서있는 아버지는 그저 쓸쓸하게 웃기만 하였다. 크리스띤은 얼굴이 발개져 인차 트렁크를 들고 떠나갔다. 로인은 우수에 젖은 눈으로 딸의 뒤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어디 멀리로 떠나는가요?》 하고 철룡이 물었다. 《…》 《무슨 좋지 못한 일이라도 생겼는가요?》 로인은 상관말라는듯 손을 홱 내젓고는 다시 활기를 띠며 돌아섰다. 일행이 미술박물관쪽으로 걸음을 옮길 때 로영무는 최승진이 손목을 잡는바람에 좀 뒤로 떨어졌다. 최승진이 못마땅한 얼굴로 나직이 말했다. 《철룡이가 너무 뜬게 아니요?》 앙드레 뻬르망은 사실주의적화풍의 벽화들앞에서는 해설을 안했다. 볼만한것이 없다는듯 앞에서 걸어가며 이따금 그들을 흘깃흘깃 돌아보군하였다. 외국의 젊은 관광객들도 그런 벽화들은 대충 훑어보며 지나갔는데 개중에는 그림을 전혀 보지 않고 무엇인가를 쩝쩝 씹으며 저희들끼리 히히덕거리면서 산책을 하는 기분으로 걸어가는 남녀들도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심각한것을 싫어하고 인간의 사색을 고달픈 육체로동처럼 여겨 유흥장의 오락취미밖에 붙이지 못한 경박한 부류의 청년들인것 같았다. 유럽문명권에 살면서도 조형예술에 대한 감상과 같은 고상한 취미를 붙이지 못하여 무궁한 미의 세계를 한평생 모르고 지낼 그런 청년들을 측은하게 여겨보는데 밤빛곱슬머리에 수염을 더부룩하게 기른 녀석이 한 그림에 대고 주먹질을 하며 무엇이라고 지껄여댔다. 그 그림은 아련하게 웃고있는 예쁘장한 농촌녀자의 초상화였다. 송동무의 번역에 의하면 그 녀석이 지껄인 소리란 이런것이였다. 《여, 처녀, 네가 나한테 무슨 상관이야 ? 액틀속의 그림이니까 팔을 잡아 끌어내올수도 없구 옷을 벗길수두 없단말이야. 실용성이 없는 모든것은 다 거짓이다. 프랑스여, 차라리 산 녀자들을 액틀속에 넣어 세워놓으라!》 놈팽이의 허리에 한팔을 감고있는 처녀는 그 소리가 우스워죽겠다는듯 입을 싸쥐고 캐득거렸다. 로영무는 그 놈팽이가 조선전선에서 불구가 되여 돌아간 어느 《련합국군》대포밥의 후예일수도 있지 않을가싶어 몸서리를 쳤다. 관광객들중에는 간혹 미술에 대한 신중한 애호가들도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늙은이들이였는데 한 로부부는 젊은것들한테서 떨어져 걸어가다가는 명화앞에 손에 손을 잡고 가지런히 서서 귀속말로 소곤소곤 속삭이기도 하고 감동되여 눈물을 머금기도 했으며 때때로 그림앞으로 다가가 작자의 이름을 들여다보고는 머리를 끄덕이는것이였다. 셋이 그런 관객들과 벗하여 그림들앞을 천천히 지나가는데 뻬르망이 대폭의 한 라체화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해설조차 안하던 그가 어찌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젊고 아름다운 녀자가 나무그림자가 드리운 개울에 들어서서 목욕하는 그림이였다. 앙드레 뻬르망은 호기심이 끓는 갈색눈으로 철룡이를 빤히 지켜보았다. 《아름답지요?》 《예…》 《색정은 느끼지 않습니까?》 《색정이요?》 《예… 바로 색정말입니다.》 로영무와 최승진이 긴장된 얼굴로 여겨보고 송동무가 루추한 질문에 자꾸 걸려들지 말고 어서 자리를 뜨라는듯 꿈쩍꿈쩍 눈짓을 했다. 철룡은 두 일행의 얼굴표정과 외교일군의 눈짓, 그리고 자기를 무엇에로인가 꼬드겨보자는 속심인 로인의 기색에 불쾌감이 드는지 좀 거칠게 대답했다. 《뭘 색정까지 느끼겠습니까. 아주 평화로운 목가적인 정서를 느낍니다.》 그리고는 어줍게 웃었다. 《솔직한 대답입니까?》 《당신은 우리한테 거짓말을 했는가요?》 뻬르망로인은 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요.》 《색마들의 병든 감각만이 저기서 색정을 느낄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평화를 느낍니다. 그리고 더 보태면 인간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저기에 색정은 없습니다.》 최승진이 끼여들었다. 《뻬르망씨, 저건 루네싼스 썩 이전작품이 아닙니까? 그때 화가들이 색정을 고취하자고 저런 라체화를 그렸던가요?》 앙드레 뻬르망은 순식간에 얼굴이 벌개져 한손으로 이마를 찰싹 때려보였다. 《내가 혼돈을 일으켰댔습니다. 나이탓에… 회화예술에 라체화가 본격적으로 나타난것은 루네싼스바람이 불자부터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이 옳습니다. 신의 세계가 아니라 지상에서, 인간생활에서, 인간자체에서 아름다움과 위안을 찾자는 강력한 지향으로… 모든 인간적인 요소들을 질식시켜온 종교의 잔혹한 계률과 자아희생, 금욕주의, 고행을 례찬해온 허위적인 설교에 대한 반발로… 봉건적인 구속과 압제에 대한 반항으로… 화가들은 라체화를 그렸습니다. 처음에는 선을 인간의 모습으로 끌어내려 거기에 인간적인 미를 부여해서 녀신의 라체상을 묘사했고 그다음에는 인간자체의 아름다움을 그렸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미의식발전에서 하나의 혁신이였습니다. 그때 창조된 라체상들은 개성해방에 대한 호소이고 인간례찬의 송가입니다. 그리고 인문주의철학사상의 회화적표현입니다.》 뻬르망은 변명조로 내리엮고는 또다시 철룡이를 과녁으로 삼았다. 《여기서 듣기에는 동방에서는 화가들이 라체화를 그리지 못한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못하는게 아니라 안합니다.》 《어째서요?》 《어짼가구요? 풍습과 전통때문입니다. 우리 나라 화가들은 예로부터 산수화나 풍속도 초상같은것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러니까 예술에 성문제도 전혀 반영되지 않는가요?》 《성문제요?》 《예…》 《사랑문제와 성문제를 갈라놓고 본다면 그렇습니다.》 《믿기 어렵습니다. 성생활도 인간생활의 중요한 부분인데 예술이 그런 문제를 배제한다면 당신네 예술이 인간생활을 폭넓게 전면적으로 반영한 예술이라고 말할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째 성문제와 같은 그런 복잡한 문제를 외면합니까? 시끄러워서? 저급한 문제여서? 내가 알기에는 당신네가 존경하는 레닌과 같은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도 한때 그 저급한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적이 있습니다. 성해방론을 반대해서… 저급하든 어쨌든 예술이 인생문제에 해답을 주자면 사람들이 남몰래 깊은 관심을 돌리고있는 그런 문제에도 해답을 줘야 하지 않습니까. 당신들은 그것이 공개되는것을 두려워하지요?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지요. 그래서 정치가 그것을 덮어버리고 예술이 그것을 외면하지요? 그렇지요?》 철룡은 문제제기가 본격화되자 가슴이 서늘하게 식어드는지 얼굴빛이 해쓱해졌다. 《뻬르망선생, 우리는 예술이 사회적의의가 있는 문제를 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성이 있는 문제를… 당신이 열중하고있는 성문제로 말하면, 우리한테는 그것이 문란해져 사회적문제로 제기된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정치가 덮어버릴것도 없고 예술이 외면할것도 없습니다. 없는 문제를 억지로 만들어서 반영할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그 어떤 표현의 자유, 공개의 자유가 있다는것을 시위하기 위해서… 사회적문제의 공개에 대하여 말하면 우리는 관료주의와 같은 우리 사회적문제의 사상정치적인 문제까지 영화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합니다. 그것에 비하면 성같은건 너무 하찮은 문제입니다.》 맹랑한 문제의 공담으로 시간을 보내는것이 안타까와 로영무는 팔목시계를 들여다보며 퉁명스럽게 일렀다. 《철룡이, 우리 나라에 성병환자가 한명도 없다는걸 말해주라구. 그게 제일 설득력있는 대답일거야.》 송동무가 그 말을 받아 통역하자 앙드레 뻬르망은 놀란 눈으로 로영무를 쳐다보았으나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한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거기서는 예술에 성생활도 전혀 반영하지 않고있습니까?》 최승진이 대답하였다. 《그렇다고 볼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도 인간생활의 중요한 리면인데…》 《그렇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능적인 생활입니다. 만약에 예술이 섭취와 배설, 성, 번식과 같은 본능적생활까지 다 반영한다면 그건 생물학의 한 분과이지 예술은 벌써 아닐것입니다. 때문에 성에 빠진 작가들은 례외없이 예술자체를 저조하게 만들었고 자가당착에 빠져 자신도 다 망해버렸습니다. 거기서 탐구할것이나 새로 발견할것이란 생물학적문제외에 아무것도 없기때문입니다.》 빠리시민은 더 묻지 않았다. 일행은 다시 움직였다. 로영무가 언짢은 눈길로 철룡을 돌아보는데 최승진이 곁에 와서 좋지 않은 얼굴로 속삭이였다. 《령감이 흉물이요! 우리를 시궁창같은데 끌어들이자고 꾀한것 같소. 우리가 동정심때문에 속히운게 아닌지 모르겠소.》 일행은 다른 미술관으로 찾아가 휴계실로 들어갔다. 그들은 흥분을 드러내지 않고 장의자들에 걸터앉아 묵묵히 레몬수만 마셨다. 남미주에서 관광온듯한 한떼의 청춘남녀들이 우르르 밀려들어와 선채로 레몬수며 코카꼴라 등을 마셔버리고는 담배내와 값눅은 향수냄새, 땀내를 풍기며 떠들썩하게 다음방쪽으로 밀려갔다. 이윽고 그쪽방에서 녀자의 자극적인 탄성이 터져올랐다. 련이어 들려오는 속삭임, 웅성거림… 보지 않고도 환희로 설레이는 그쪽의 공기를 느낄수 있었다. 《저 방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고 로영무가 물었다. 앙드레 뻬르망은 그들의 엄엄한 기상에 좀 주눅이 든듯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저 방에서부터 회화예술의 본격적인 세계가 펼쳐집니다. 당신들은 이때까지는 무미건조한 사실주의의 오솔길을 걸어왔습니다.》 《어째 사실주의를 무미건조하다고 합니까?》 하고 최승진이 공격자세를 보였다. 《상대적으로 그렇다는것입니다. 우리 현대회화예술의 전위에 섰던 창작가들은 벌써 일찌기 령감을 구속하는 사실주의멍에를 벗어던졌습니다. 사실주의는 꼬지끄문화를 밀어버린 루네싼스문명이 우리한테 넘겨준 유산인데 그 기운이 19세기까지는 뻗쳐올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말에 와서는 맥이 진해졌고 호미나 낫처럼 낡은 쟁기로 돼버렸지요. 농경의 견지에서 보면 뜨락또르의 시대가 왔지요. 한때 프랑스사람들이 사실주의조류에 대해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자연주의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까지 본 다음 그리는 방법이다. 비판적사실주의는 보기만 하고 그리는 방법이다. 사회주의적사실주의라는것은 만져보거나 보지도 않고 듣기만 하고 그리는 방법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사실주의에 대한 터무니없는 비방이 아닙니까?》하고 로영무가 감정을 감추며 부드럽게 물었다. 《당신들한테는 비방으로 들리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과학적인 근거를 가진 부정이고 비판입니다.》 《어떤 근거 말입니까?》 앙드레 뻬르망은 대답했다. 《한가지 례를 들겠습니다. 우리가 이때까지 보아온 회화작품들은 례외없이 하나의 시점에서 대상을 보고 그린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묘사대상은 립체적인 존재이지요. 하나의 시점에서 립체의 전모를 파악할수 있습니까? 결국 립체의 한 겉면만을 그리고 다른 면들은 겨우 암시했을뿐입니다. 겨우 암시밖에 하지 못한 바로 여기에 사실주의회화의 항변 못할 제한성이 있습니다. 3차원적구도라는 그의 원근법으로는 이 난점을 도저히 해결할수 없지요. 또 한가지… 고전회화들은 모두 정지된 시점에서 대상을 보고 그린것들입니다. 정지… 절대적정지란 있는가요? 과학은 그것이 없다는것을 증명한지 오랩니다. 정지란 가상적인것이고 허위입니다. 따라서 정지된… 허위적인 그런 시점에서 그린 작품들을 진실한것이라고 믿을수 있겠습니까. 시점이 허위적인것만큼 그것들도 허위이다! 현대의 리성은 이렇게 소리칩니다. 대상도 시점도 다 영원한 운동속에 있는것만큼 운동속에서 포착된 상을 그림에 옮겨야 진실에 가까운 화폭을 얻을수 있는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로영무는 눈을 내리뜨며 랭소를 머금었다. 《당신은 왜 웃습니까?》 《어쩐지 비예술적인 론리같아서 그럽니다… 미안합니다.》 《당신한테는 이것이 웃어넘길수 있는 단순한 문제로 여겨집니까?》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술이 천상의것이 아니고 지상의 진실을 추구해야 된다는것을 고려할 때 과학적인 진리는 외면해서는 안되지요. 더구나 지금은 과학의 시대가 아닙니까. 이것은 과학기술의 시대에 사는 현대인류의 미의식에 관한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뻬르망씨, 당신의 그 말에는 완전히 동감입니다.》 《그럼 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합시다.》 세사람은 로인의 뒤를 따라 다음방으로 들어갔다. 벽에 걸려있는 추상파그림들이 보이자 로영무는 걸음을 늦추며 웃음어린 얼굴로 말했다. 《허 이건 굉장한 판이구만!》 《대충 보지 않겠소?》 하고 최승진이 경계심을 드러내였다. 《글쎄… 어릴적 일이 생각나누만… 언젠가 한번은 어머니를 따라 장거리로 가다가 송장과 맞다든적이 있소. 술에 취해 길바닥에 곤드라졌다가 그만 얼어죽은것 같았소. 내가 덜컥 겁을 먹고 뒤걸음치려는데 어머니가 내손을 꼭 붙잡았소. 이런때는 가까이 가서 냄새가 역하더라도 찬찬히 여겨봐야 귀신이 붙지 못한다고 하지 않겠소… 이왕 맞다든바치고 우리 어머니 말대로 해보지 않겠소?》 최승진이도 철룡이도 웃었다. 뻬르망로인이 무슨 소리를 하는가 해서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그 로인에 대한 감정과는 관계없이 대폭, 소폭의 그림들 앞으로 다가가며 이번 기회에 퇴페미술에 대한 리해를 똑바로 가져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그 어떤 랭소의 빛이나 반감, 적의를 경솔하게 드러내지 않고 진지한 눈빛으로 그림들을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화폭속에서 색조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고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고 하더니 명암이 어디로인가 사라졌다. 그리고 진홍, 암청과 같은 원색들이 두드러지고 화폭의 색갈이 자연의 색갈과 분리되기 시작했다. 시커먼 나무잎사귀, 누렇고 퍼렇고 불그무레한 반점들이 범벅이 되여 점점이 찍힌 어둑한 하늘, 시뻘겋고 누런 색갈을 미친듯이 뒤섞어 발라놓아 피고름의 흐름처럼 느껴지는 강물… 다음에는 화폭의 선들이 전률하며 되는대로 이그러지기 시작하며 인체와 자연의 모든 비례와 조화며 균형들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몸체의 길이 절반만큼 뽑아진 목, 얼굴의 웃부분을 가득 채운 커다란 한개의 눈, 개미만한 말, 말만한 파리, 집보다 더 큰 창문… 이상한것은 그것들이 만화적인 과장처럼 웃음을 자아내지 않고 시체에서처럼 서늘한 그 무엇을 풍기는것이였다. 어떤 화폭에서는 몸체는 건장한데 다리가 해골로 된 사람이 진흙빛의 사막을 걸어가고있었다. 아름다운 육체미의 녀자의 젖가슴에서 뽑아낸 서랍에서 용수철이며 잘다란 치차, 나사못따위들이 튀여나오고있었다. 인체가 분해되여 괴이하게 이그러진 머리, 머리보다 더 큰 발… 가느다란 몸통이 컴컴한 하늘에서 날아돌고있었다. 그러다가 그런 괴이한 형상마저도 가뭇없이 사라지고 흐릿한 륜곽이나 희미한 형체마저 없는 기하학적인 직선과 곡선들, 녹아서 이그러진 연덩이나 깨진 돌쪼각, 쇠쪼각 같은 괴이한 립체들과 착잡하게 뒤엉켜 돌아갔다. 정삼각형과 겹쳐진 길쭉한 구형, 캄캄한 공간에 튀여올라 전률하는듯한 우불구불한 무정형의 곡선, 아무런 형체도 없는 시뻘건 색갈의 파도, 회색빛의 공간에서 무엇인지 도무지 알수 없는 그 어떤 유들유들한것과 곡선같은것들이 기묘하게 교차되여 란무하고있었다. 정신착란증이 일어나는것 같았다. 《보십시오. 얼마나 비범한 화폭들입니까! 당신들은 놀랍겠지요? 미의식에 나타난 이 변혁은 생물계에서 보게 되는 미지의 충격에 의한 돌연변이의 신비와 같은것이기때문에 인간의 지능으로는 그 비밀을 철저히 발굴해낼수 없다고 봅니다. 한 미학자가 어떤 추상파화가를 붙잡고 왜 그렇게 그리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심한 모욕을 느껴 〈내가 아는가!〉고 소리쳤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그들이 아연해져 아무말도 못하자 앙드레 뻬르망은 더 기세등등하여 손가락으로 아래쪽을 엇비스듬히 내찌르며 극적인 동작을 연출하였다. 《감각도 없는 고루한자들이여, 너희들이나 그 원인을 찾아 머리를 썩이라!》 그리고는 스스로도 어색한지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 저 마네의 그림을 보면서 구체적인 과정을 살펴봅시다. 마네는 저렇게 빠리적인 향락생활의 단면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저 얼싸안고 춤추는 남녀들의 얼굴과 저 풀밭에 앉아있는 녀자의 관능적인 피부색을 보십시오. 밝은 색이 눈부시게 강조되였습니다. 이때까지 사실주의회화에서 흔히 보던 어두운 색갈은 저 육체의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수 없습니다. 음영을 쫓아버렸기때문입니다. 남부프랑스의 해빛이 쨍쨍한 자연속에서 자라 밝은 빛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있는 천성이 그를 혁신의 길로 추동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때부터 화가들은 모두 색과 빛에 열중하게 되였습니다. 자연의 색이 아니라 자기 눈에 감각된 색을 포착하여 화폭에 옮기려는 시도가 하나의 경향으로 되여 인상파가 나왔습니다. 보십시오. 회화의 색은 자연의 구속에서 해방되였습니다. 인상파의 전위들중에는 자신의 시각에 불만을 느낀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자연의 대상이 반사하는 빛을 스펙트르 분석하여 7원색의 비례로 회화의 색을 정하는데까지 이르렀지요. 칠원색이야말로 색의 본질이고 진실이 아니겠습니까. 색의 본질로 육박해들어갑니다. 대상의 선, 색, 형태를 분석하고 거기에 대상에 대한 지식과 체험까지 합친다음 의식속에 종합된 그것을 추상하여 〈물체로서의 회화〉를 창조합니다. 보는것처럼 현대회화는 자연모방이라는 관념에서 발전해온 종래의 회화와도 완전히 다른 자유로운 창조물로 승격되였습니다. 회화와 미술전반에 대한 리해도 이전시대와는 비교할수 없이 풍부해졌습니다. 대상을 관찰하는데서 하나의 고정된 시점이 아니라 설계도와 같이 몇개의 각도에서 관찰하고 거기에 대상에 대한 지식과 체험까지 종합하는 방법만이라도 생각해보십시오. 그후에 나타난 초현실주의는 시점을 의식의 더 깊은 내부에까지 침투시켰습니다. 그래서 의식밑의 세계를 회화에 담을수 있게 되였습니다. 저 그림을 보십시오. 황갈색화염의 회오리속에서 전률하는 저 피얼룩같은 반점들은 인간의 본원적인 정욕을 표현한것입니다. 회화예술이 어디까지 나가고있습니까!》 뻬르망은 의기양양해서 력설하며 그들의 얼굴표정을 흘끔흘끔 엿보았다. 최승진은 웬일인지 갑자기 얼굴이 캄캄하게 질려 미간을 찌프릴사하고 눈을 내리뜨고있었는데 설명도 듣지 않는것 같았다. 무슨 생각이 그를 괴롭히는지 알수 없었다. 강철룡은 울기가 오른 사람처럼 얼굴이 벌개져 이따금 의아한 눈으로 빠리시민을 빤히 쳐다보기도 하고 심취된듯 그림을 들여다보기도 하였다. 로영무는 환멸감을 참을수 없어 해설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걸음을 앞으로 옮겨갔다. 뻬르망은 그를 따라오며 계속 쏟아부었다. 《회화의 이런 발전에는 장애가 전혀 없은것이 아닙니다. 무서운 저항이 있었습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각종 고루한 화파들이 사실주의에 대한 도승같은 신앙심을 품고 현대미술의 전위들을 공격했지요. 회화에서 선, 색, 음영, 구도… 모든 조형적요소들을 추방한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미학적인 방종이고 란동이다. 이건 추상미술도 아니다. 추상예술의 시조인 꼬지끄미술을 보라. 거기에는 인간의 기하학적 정신이 론리적으로 전개되여있었다. 그런데 현대추상미술에서 그런 티끝만한 요소도 찾아볼수 있는가. 그러자 추상파의 천재들은 항변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아니다. 우린 순 추상이라는 의미에서 꼬지끄정신을 계승했다. 우리한테 기하학적선도 전혀 없는것이 아니다. 루네싼스의 기둥과 벽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던 꼬지끄의 생명이 오늘 폭발적으로 터져나와 추상파미술로 꽃피였다. 별별 목소리들이 다 터져올랐습니다. 론쟁이 붙었지요. 예술잡지들과 신문지상에서 치렬한 공방전이 벌어졌습니다. 싸움은 지상에서만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쌀론에서, 구락부에서, 대학강실에서, 지어는 저 쁘로뉴숲속에서 결투가 있었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이것은 미의식분야에서의 공민전쟁이였습니다. 사람들의 기호가 싸움을 가라앉혔지요. 사람들은 사실주의회화보다 추상파회화를 열광적으로 환영했고 돈을 아끼지 않고 그것들을 사들였습니다. 돈은 공명정대한 재판관이였습니다. 그림이 팔리지 않아 호구지책도 없게 된 완고한 사실주의 고집쟁이들은 도승이 산중 암자에서 배를 곯으며 도를 닦는것처럼 뒤골목의 화실에 구겨박혀 붓장난이나 하는 가련한 신세가 되였지요. 허허허…》 그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 최승진은 정원수의 그늘속에 못박힌듯 서서 무슨 생각에 골똘하는지 자기 발끝쪽에 눈길을 떨어뜨리고 움직일줄 몰랐다. 나무잎사귀들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어른거리고 눈섭이며 턱밑에 맺힌 땀방울들이 구슬처럼 반짝이였다. 로영무는 조심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디 불편하오?》 최승진은 놀라서 얼굴을 들었다. 《허, 굉장한걸 봤구만.》 그는 허거프게 웃었다. 그리고는 뻬르망로인이 가까이에 서있는것도 개의치 않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로형, 저… 저 늙은놈팽이를 돈이나 줘서 쫓아버리지 않겠소? 추상파미치광이요!》 《너무 흥분하지 말라구. 우리 기준으로 여기 사람들을 대할수야 없지 않는가.》 앙드레 뻬르망은 자기 소리를 한다는것을 눈치챈듯 그들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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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나온 일행이 거리의 매점에 들려 레몬수로 목을 추길 때 최승진은 속에서 메스꺼움이라도 이는지 불쾌한 얼굴로 한모금 마시는척만 하였다. 그들은 쎄느강가의 유보도로 나가 산책하였다. 뻬르망이 옆에 있어 모두 별로 말이 없었다. 입만 벌리면 론전의 불길이 확 일것만 같았다. 뻬르망로인은 또다시 철룡이를 흘끔흘끔 훔쳐보았는데 역시 그를 만만한 과녁으로 여기는것 같았다. 룩쎈부르그공원 장의자에 일행이 걸터앉아 땀을 들일 때 드디여 불꽃이 튀였다. 《젊은이는 어째 추상파미술을 보고는 한마디 말도 안하오?》 로영무가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할말이 없다구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입을 열면 아름답지 못한 소리만 나오겠는데 손님으로 와서 남의 문화에 욕설을 퍼붓는다면 그게 무슨 례절이겠습니까. 그저 인식하는것으로 그쳐야지요.》 뻬르망로인은 그를 빤히 지켜보았다. 《당신은 욕설을 퍼붓고싶을 정도로 그처럼 불만이 큰가요? 추상파미술은 현대예술의 전위에 서있고 또 현대인들은 다 열광적으로 환영하여 박수갈채를 보내고있습니다.》 《다는 아닙니다. 우선 나만해도 현대인의 사람이 아닙니까. 그리고 또 박수갈채를 보낸다고 다 훌륭한것 아니지요. 류행심리란것도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아무것도 리해하지 못하면서 남들이 박수를 치니까 따라서 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온 유럽… 온 인류가 박수를 쳐도 제 마음에 안들면 혼자 박수를 안치겠다는 배심이군요.》 《자기 감정에 공감이 안되고 리성에 납득이 안되는걸 어떻게 박수갈채로 환영합니까?》 《만약 당신이 빠리시민이고 세상사람들이 다 입고다니는 류행복이 아니라 시대에 퍽 뒤떨어져보이는 옷을 입고 저 오페라가나 꼰꼴드광장을 지나간다고 합시다. 당신은 사람들의 주목을 끕니다. 야유와 조소를 받을수도 있고 모욕을 당할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냥 그 옷을 입고다니겠습니까?》 《글쎄요. 빠리시민이 안돼봐서 모르겠지만 다른 어디서라도 진짜 옷문제라면 류행에 너무 엇서고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미의식… 예술조류와 같은 그런 신중한 문제에서는 절대 무원칙하게 류행심리를 따르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무슨 배심으로 무슨 신념으로 그렇게 말합니까? 추상파미술이 류행심리때문에 환영받는다는 말은 처음 들어봅니다. 당신은 추상파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알고 그렇게 속단합니까?》 《깊이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미술이 아닌 미술이 그렇게 환영을 받는다면 다르게야 해석할수 없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오늘 단조성때문에 겨우 마지막까지 봤습니다.》 《단조하다구요? 아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게 다양한 화폭들이 당신한테는 단조롭게 느껴졌단말입니까?》 《다양하고 천태만상이긴 하지만 하나같이 허황하기때문에… 그 일관된 허황성때문에 정말 단조로워… 따분해서 겨우 봤습니다. 나는 거기서 진정한 추상도 얼마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당신한테는 저것들이 다 뭘로 보입니까. 통털어 미술이 아니란 말입니까?》 《대답하기전에 제가 한두가지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저 작품들을 여기 사람들은 잘 리해합니까?》 《글쎄요… 당신한테 터놓고 말하면… 아마 거의 다 리해하지 못할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술과 인민대중사이에 장벽이 가로놓인게 아닙니까?》 《그건 무지의 장벽입니다.》 《인민들이 리해하기 쉽게 창작하여 그 장벽을 허물어버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면 예술을 통속화해서 시민들의 리해수준에까지 낮추어야 합니다. 이것은 퇴보이고 타락입니다.》 《타락이요?》 《그렇습니다. 일반 관객들한테 깊은 리해가 무슨 필요하겠습니까. 그림을 보고 제나름으로 무엇인가 느끼면 되는것입니다. 느끼지 못하면 할수 없고… 예술가는 단 한사람이라도 좋으니 사회의 가장 최고급의 감수성을 기준으로 해서 창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술이 상승발전합니다.》 《우리하구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대중의 리해와 공감이 없으면 예술이나 무엇이나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 묻겠습니다.》 《어서…》 《저 추상파미술들에서 여기 사람들은 어떤 미감을 느낍니까? 당신자신은 거기서 그 어떤 아름다움을 느낍니까?》 《미감이라구요? 아름다움이라구요? 여보시오. 미술이 외형적미를 추구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것은 아득한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시대와 함께 미술의 사명도 달라졌습니다. 현대회화예술은 사실주의회화가 대상으로 삼았던 외형적미를 제껴버리고 그 내부로 육박해들어가 본질을 해부하고 분석합니다. 화가는 그 해부되고 분석된 본질을 추상하여 화폭에 표현합니다.》 《그건 모두 사실과 맞지 않는 말입니다. 사실주의회화가 외형적미를 통하여 내적미를 표현했고 내용과 형식의 통일속에서 미를 창조했다는것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외형적미를 제껴버리고 대상의 순수한 본질을 분석한다는것은 미술의 본성에도 맞지 않는 말입니다. 물리학이나 생리학이면 몰라도… 그 해부요 분석이요 하는것은 미의 해체, 파괴를 의미하지 않습니까. 나는 오늘 현대회화들을 보면서 그것을 절감했습니다. 이 흐름은 정말 리해할수 없는것입니다.…》 로영무는 이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지만 그 흐름이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핵분렬처럼 위험한것이고 미의식발전의 견지에서 보면 하나의 력사적반동이라고 소리치고싶었다. 뻬르망로인은 바위돌로 굳어진듯 까딱 움직이지 않고 그를 지켜보았다. 크게 뜬 로인의 눈이 섬광처럼 타올랐다. 내내 잠자코있던 최승진이 로인을 돌아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뻬르망씨, 미안하지만 당신은 추상파와 어떤 인연을 맺고있습니까?》 로인은 아픈 타격이라도 받은듯 눈을 괴롭게 내리뜨고 볼편을 떨었다. 그의 우묵한 눈확에 비분의 그늘같은것이 어른거렸다. 로인은 신음소리와도 같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의 눈은 더 적라라하게 묻는군요. 추상파를 선전하고 몇푼이나 받아먹는가고… 대답하지요… 대답하지요…》 그다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로인이 미친듯이 외마디 탄성을 내지르며 로영무와 최승진의 손들을 잡아끌어 자기 가슴에 붙이고 무섭게 몸부림쳤던것이다. 《용서하시오! 벗들, 용서하시오!》 그의 눈에 눈물이 끓었다. 로인은 채머리를 떨며 이때까지 자기본색을 감추고있은것을 용서해달라고 거듭 사죄하였다.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벗들, 나는 당신들의 벗이요.》 알고보니 로인은 추상파들의 공격에 움츠러든 사실주의화파의 한 병사였다. 로인은 말했다. 《나는 동방에서 온 당신들의 신념을 가늠해보고싶었습니다. 그래서 놈들이 우리를 찌르던 그 날창을 모두 당신들의 가슴에 돌려대봤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신랄한 반박에서, 침묵에서, 말없는 분노, 눈에 어린 환멸과 멸시, 증오의 빛에서 당신들의 건전한 미의식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어떤 신념에 안받침되여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친구들, 우리는 참된 미를 지키는 성전에서 같은 참호에 엎드려있구려. 우리는 말하자면 전우들입니다!》 최승진이 그의 손을 와락 잡아쥐며 부르짖었다. 《여보시오!…》 로인의 눈에 눈물이 떨었다. 《당신들은 어떻게 돼서 눌렸는가요?》 로인은 손등으로 눈물을 빗씻었다. 《아, 그건 복잡한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금력때문이지요. 부르죠아지의 금력때문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의 생명도, 사랑도, 정조도 다 상품으로 만들어버린 자본이 예술까지 상품으로 만들어버렸기때문입니다. 추상의 경향은 마네와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시작됐고 그들은 빠리의 향락생활을 그리지 않았습니까. 이 의미심장한 일치가 추상미술의 진로를 열어놓은 단서로 되였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자연에서 유리된 밝은 색채의 그 그림들은 취미가 저속한 부르죠아지들의 향락기분에 꼭 들어맞았습니다. 놈팽이들은 그런 그림들은 후한 값으로 사들여 그 작자들을 부유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미술품은 어느덧 비누나 양말같은 소비품처럼 상품이 되고 돈, 시장가격에 의해 그 가치가 오르내리게 되였습니다. 돈벌이에 얼이 빠진 미술가들은 창녀들처럼 량심을 버리고 부르죠아지들의 취미에 아부하여 해괴망측한 그림들을 망탕 그려냈습니다. 미술은 추상도 아니고 아주 퇴페화되였지요. 나도 그런 흐름속에 휘말려들었댔습니다. 먼저 공격의 불을 뿜은것은 사실주의화파들이였습니다. 그 공격은 나의 심혼을 흔들어놓았습니다. 나는 수치심을 느꼈댔습니다. 나는 돈의 노예로 될수 없었습니다. 창녀로 될수 없었습니다. 나는 추상파라고 자칭하는 그들 퇴페의 진영을 결연히 떠나 사실주의화풍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온갖 비난과 조소를 다 퍼부었습니다. 변절자, 예술의 락오자라고… 그들은 나를 포함한 우리 사실주의화파를 시대에 뒤떨어진 고루한 자들, 환상의 날개가 없어 땅에서 뚱기적거리는 타조, 게사니로 조롱했습니다. 내 그림은 특히 팔리지 않게 되였지요. 생활난이 숨통을 무섭게 눌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미의식을 타락시키는 마약과도 같은 그런 퇴페적인 그림을 더는 그릴수 없었습니다. 오늘도 화가들은 돈… 돈때문에 이 류파에서 저 류파로 방황하고있습니다. 노벨상수상자인 존경하는 나의 스승, 루돌프 오이켄이 쓴 이런 문장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인도하는 별이 없어 시간의 파도에 떠내려가고있다…〉 내가 죽지 않은것은 기적입니다. 나를 죽음과 타락에서 구원해준건 크리스띤이지요. 그애는 나의 일루의 희망이였습니다. 나는 절망과 슬픔이 가슴에 차넘칠 때마다 그애를 안고 프랑스문화사를 옛말로 이야기해주며 아득한 옛날에 따뜻한 남쪽에서 루네싼스바람이 불어와 꼬지끄의 추상주의를 밀어버리던것처럼 이제 어느때인가 반드시 새 루네싼스의 바람, 문예부흥의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고, 그때면 아버지도 부르죠아나리님들 못지 않게 되고 우리 크리스띤은 옛날의 공주처럼 차려입고 맛나는 과자랑 실과랑 맘껏 먹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애는 내말을 죄다 알아들은듯 방긋 웃었습니다. 어린것의 그런 웃음을 보면 가슴속의 슬픔도 괴로움도 다 녹아없어지는것 같았지요.》 로인은 가슴이 터지도록 한숨을 내쉬였다. 《나의 안해는 매우 선량한 녀자였는데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도망쳐버렸습니다. 나는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행복을 찾아 날아가라고… 나와 크리스띤만이 이 세상에 댕그랗게 남았지요. 나는 엄마없이 자라는 그애가 불쌍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 키웠습니다. 그 애가 한떨기 꽃처럼 피여나는것을 보는것이 나의 유일한 기쁨이고 행복이였지요. 한데 그애는 나이를 점점 먹으면서 다른 애들한테는 다 있는 엄마가 자기한테만은 없다는것을 생각하게 됐으며 마침내 그 까닭을 알게 됐지요. 그 애한테는 엄마가 떠나간것도, 째지게 가난한것도… 모든 불행의 화근이 다 이 아비 화풍에 있었지요. 철이 들자 그애는 나더러 화풍을 바꾸어 남들처럼 그림을 그려 돈을 벌자고 졸랐지요. 애걸했지요. 내가 제말에 등을 돌리자 그애는 나를 원망하고 내 화풍을 미워하게 되고 나중에는 반발적으로 추상파미술의 숭배자가 되더니 모든 기성의 관념과 도덕을 우습게 여기게 되였지요. 퇴페화가들한테 돈에 팔려 모델을 서면서 옷을 벗고 짐승같은짓을 하면서도 수치를 모르게 되였습니다. 이건 나한테 이중의 타격이고 참을수 없는 고통이였습니다. 나는 미칠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그 애 목을 조이며 죽여버리겠다고 위협도 해보고 발밑에 엎드려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고 울며 불며 빌기도 했지요. 천성이 착한 그 애는 이 아비가 불쌍했던지 좀 누그러졌지요.… 말이 난김에 한마디 더하면 오늘 나한테는 매우 슬픈 리별이 있었습니다. 자기 예술과의… 전우들사이에야 무엇을 감추겠습니까.》 크리스띤은 얼마전 한 영화업자한테 배우로 채용되여 대부호의 방종한 딸역을 맡았는데 연출가가 제작비난으로 의상과 소도구들을 자비로 갖출것을 요구했다는것이였다. 프랑스에는 대영화기업체들이 없기때문에 새로 발족된 가난한 제작단체들에서는 종종 이런 일이 생긴다면서 돈은 없지, 그렇다고 모처럼 차례진 행운과 성공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겠고 그래서 딸은 아버지의 회화작품들을 골동품시장에 내다 팔자고 졸랐다는것이다. 《한생의 력작들이 골동품수집광들의 손에 헐값으로 넘어간다고 생각하니 대답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 참 기막힌 일이지요… 딸애는 자살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하는수 없이 허락했지요. 그애는 아까 그림들이 든 트렁크를 들고와서 골동품시장에 나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구두쇠는 서너점만이라도 남겨달라고 해서 그 애 마음을 또 괴롭혔습니다. 너무 허전해서 그랬지요. 자기 창작품에 대한 애착이란 이렇게 검질기다니까요. 허…》 로영무가 측은한 눈매로 로인을 돌아보며 나직이 물었다. 《그래서 몽땅 다 보냈습니까?》 《예…》 《그런줄 알았더라면 우리가 몇점 샀겠는데요. 당신에 대한 기념으로…》 《제 그림을 보고싶다구요? 아직 팔리지 않았을텐데… 보고싶다구요. 내가 인차 가져올가요? 같이 가서 볼가요? 골동품시장도 구경할겸…》 로인은 행운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헤덤비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나이에도 어울리지 않게 아첨기있는 웃음까지 웃어보이며 로영무에게 말했다. 《크리스띤은 바탕이 선한 애여서 당신들한테 그림을 한점씩 아주 헐값으로 선사할수 있습니다. 상봉기념으로…》 일행은 그를 따라 거리로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쎄느강을 건너 어느 한 거리의 골동품시장으로 갔다. 시장은 빠리의 골동품애호가들과 외국관광객들로 붐비였다. 로인을 따라 사람들속을 누벼나가는 로영무는 자기들이 가고있는쪽 어디에서인가 아름다운 크리스띤이 아버지의 그림들을 팔고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미친듯한 춤판이 그들의 앞길을 막았다. 처마밑에 색이 바랜 붉은무늬차일을 친 점방앞에서 장발에 수염을 기르고 청바지를 입은 청년들과 짧은 치마에 너펄거리는 웃옷을 걸친 처녀들 수십명이 한데 어울려 광란적인 춤을 추며 돌아갔던것이다. 어깨들에 멘 록음기들에서 울려나오는 자극적인 음악, 손벽도 치고 발도 구르고 허리를 끝없이 굽신거리는가 하면 젖가슴이며 엉뎅이를 좌우로 흔들어대는 음란한 춤동작, 원시인들의 야성같은 남자들의 부르짖음, 처녀들의 바스라지는 웃음소리, 제멋대로 놀아나는 어깨며 팔, 무릎의 기괴한 동작들, 가락맞게 들썩이는 밤빛머리들의 파도, 발밑에서 피여오르는 먼지구름속에서 언뜻거리는 무슨 종이쪼박지와 천쪼박지 같은것들… 점방주인인듯한 뚱뚱보로파가 뻬르망로인에게 달려와 숨이 턱에 닿아 부르짖는 소리를 송동무가 제때에 번역하였다. 이들은 도바해협을 건너온 망나니 관광객들이다. 이 놈팽이들은 도박장에서 딴 돈으로 크리스띤의 그림을 모조리 사서 하나하나 찢어버리고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이런 춤판을 벌렸다.… 그 춤판의 회오리속에서 크리스띤이 얼에 빠진 멍청한 얼굴로 비칠거리며 걸어나오다가 놈팽이들이 밀치는바람에 앞으로 엎어졌다. 란무하는 다리들사이로 먼지구름속에 딩구는 처녀의 모습이 언뜻거렸다. 뻬르망로인은 화들화들 떨다가 두주먹을 머리우에 쳐들고 흔들어대며 미친듯이 부르짖었다. 《아- 망종들아-》 로영무와 최승진은 달려가서 느침을 흘리며 비틀거리는 로인을 부축했고 강철룡은 위혁적인 함성을 내지르며 춤판에 뛰여들어가 크리스띤을 끌어내왔다. 얼마후 처녀는 아버지를 끼고 저쪽 붐비는 사람들속으로 멀어져갔는데 가련한 로인은 제정신이 아니여서 벗들을 돌아보지도 못하였다. 셋은 그날밤 가슴들이 저려 오래동안 잠들지 못하였다. 최승진은 동정심이 북받쳐 래일 무엇이나 사들고 그의 집으로 찾아가 위로하고 안내보수도 푼푼히 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은 다르게 뒤집혔다. 이튿날 아침, 송동무가 호텔방으로 뛰여들어와 지난밤 빼르망로인이 뇌익혈로 사망하였다고 알렸던것이다. 최승진은 부들부들 떨며 일어나 파란 섬광이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지켜보다가 휘파람같은 소리로 뇌까렸다. 《이건… 살인이요…》 일행은 몽마르뜨르공동묘지로 찾아가 앙드레 뻬르망로인의 장의에 참가하였는데 묘지까지 따라온 조객은 고인의 수제자인듯한 중년의 화가 세사람뿐이였다. 로영무가 일행을 대표하여 묘석앞에 노란 장미꽃다발을 놓자 모두 고개를 숙여 묵도하였다. 흙속에 묻힌 넋은 아무런 응대도 못하였다. 그저 로인이 이 세상을 떠나며 마감으로 웨친 《망종들아-》 하는 소리의 여운만이 괴괴한 정적속에 실안개처럼 떠도는듯하였다. 그들이 고개를 들고 조객들에게 다시 조의를 표할 때 최승진이 어째 고인의 딸은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조객들중의 한사람이 딱한 표정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오늘아침 지방도시로 현지촬영을 떠나게 되여 아버지의 령전에 놓아달라고 꽃 한송이만 전하고는 떠나갔다는것이였다. 《뭐라구요?》 갑자기 최승진이 격한 소리로 물었다. 그 조객은 놀라서 최승진을 쳐다보았으나 응대를 못하고 고개를 맥없이 숙이였다. 그들이 너무 기막히고 허무하여 나무십자가밑에서 벌써 시들기 시작하는 꽃송이를 굽어보는데 가까운 몽마르뜨르언덕의 교회에서 치는 둔중한 종소리가 대기를 무섭게 흔들며 울려왔다. 가슴을 뒤흔들고 찢어발기는듯한 그 울림소리는 맹수의 포효성같기도 하고 구슬픈 호곡소리와도 같았다. 땅-땅-떵- 최승진은 갑자기 가슴을 와락 움켜쥐며 몸부림치다가 옆쪽으로 허둥지둥 걸어나갔다. 넋을 앗아가는듯한 종소리가 그 무슨 생리적작용을 하였는지, 심장에 어떤 타격이 왔는지 알수 없었다. 그는 몇걸음 못가서 허리를 구부정하고 서더니 메스꺼움이 나는지 한손으로 입을 싸쥐며 딸꾹질을 하였다. 로영무는 놀라서 달려나가 그를 부축하였다. 《승진이, 여보게!》 최승진은 얼굴이 흙빛으로 질려 부들부들 떨다가 물기어린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로형, 내가 무엇에… 어떤것에 눌려있었는가 말이요, 허허…》 허거프면서도 통쾌한 웃음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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