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

 

제 4 장 

3

 

어머니! 

저는 앓지 않고 건강해요. 일도 잘하고 밥도 잘 먹구요… 

여기 평양은 벌써 화창한 봄, 봄이 왔어요. 모란봉기슭과 천리마동상아래쪽거리에 늘어선 나무들에 꽃들이 활짝 피여 멀리서 바라보면 연분홍구름이 뭉게치는것 같아요. 아침저녁은 좀 쌀쌀하지만 계절에 민감한 처녀애들은 어느새 모두 봄철옷으로 단장했어요. 

그래서 저도 어제 어머니가 그전에 해준 혼방직치마저고리를 옷장에서 꺼내 다리다가 그만 눈물을 짓게 되였어요. 거기는 아직도 날씨가 차겁겠지요?

어머니, 지난달 두번씩이나 보낸 편지를 받았겠는데 어째 회답이 없어요? 어디 편찮으신가요? 

그리운 어머니, 제 생활에서 생긴 변화에 대하여 알리고싶어 이렇게 갑자기 편지를 쓰게 되였어요. 놀라지 마세요. 전 철룡동무와 아주 헤여졌어요. 그 동무 형님이라는 사람이 엄마가 촬영소에서 나온 문제를 두고 여러가지 억측을 하면서 엄마의 과거생활까지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병원에 입원해있는 한기석오빠한테 찾아와서 여러모로 캐여묻다가 나중에는 제가 예술을 그만둬야 자기 집안으로 들어올수 있다고까지 하더라지 않아요. 기석오빠가 솔직히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전 아무것도 모를번했어요. 

엄마, 과거에 무엇을 잘못했어요? 아니, 아니예요. 전 엄마가 깨끗이 살아왔다는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요. 

어릴적부터 그것을 느꼈어요. 엄마가 경찰당국의 체포령이 내리자 서울을 떠나 38˚선을 넘을 때 저는 겨우 다섯살이였지만 지금도 그때의 한가지 일만은 기억에 생생해요. 

어머니는 그때 세상에 얼굴이 널리 알려진 배우였기때문에 분장으로 판판 다른 얼굴을 만들어가지고 기차에 탔어요. 그때 엄마는 눈섭을 굵게 그리고 입안에 솜을 넣어 볼을 부풀게 하여 얼굴인상을 험하게 했어요. 

철없는 나는 무섭다고 자꾸 칭얼거리며 그 솜을 빼버리고싶어 엄마입안에 손가락을 밀어넣자고 보채였어요.

엄마는 얼굴이 해쓱해져 얼른 내 입에 젖을 물리기도 하고 가슴에 꼭 붙안고 잔등을 다독여줬어요. 그때 엄마의 가슴이 쿵쿵 뛰던 소리가 지금도 들려오는것 같아요. 그것은 엄마의 깨끗한 량심이 고동치는 소리였어요. 

그 사람은 도대체 무슨 권리로 깨끗한 량심으로 예술을 해온 엄마의 지난날을 함부로 의심할가요. 높은 사회적지위때문에 아무나 허술이 여기고 얕보는것일가요. 만약 그의 누이나 어느 누가 엄마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과연 엄마처럼 꿋꿋이 살아올수 있었을가 하는 생각까지 들어요.

형님이 그런다고 해도 철룡동무만 사람이 참되면 모든것을 참았겠어요. 그러나 그도 자기형과 비슷한 사람이라는것을 느끼게 되였어요. 자기를 존중하지 않는… 상대의 도덕생활까지 함부로 의심하는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마음을 의지해요. 비굴해질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헤여졌어요. 결별을 선언했어요. 그런 사람과 혜여진건 잘된 일이지요. 엄마 저는 전혀… 전혀 괴롭지 않아요. 

기석오빠도 그의 형을 만나보고 너무 불쾌하여 그만두어도 나를 탓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귀중한 어머니, 저는 개인생활에서 실패했지만 상심하지 않고있어요. 이제부터 모든 잡념을 다 털어버리고 예술창조에 정열을 깡그리 쏟아붓겠어요. 엄마 몫까지 합하여 예술을 끝까지 하겠어요. 기석오빠랑 곁에 있기때문에 전 외롭지 않아요. 

한기석오빠는 요새 병원에 입원했는데 저는 이따금 문병가요. 나를 진심으로 돕자고 애써요. 아마 어머니와 사망한 자기 아버지와의 오랜 우정을 생각해서 그러는것 같아요. 얼마나 의지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기석오빠네는 모든 일이 다 잘되는데 말은 안해도 집때문에 좀 마음고생을 하는것 같아요. 

기석오빠네하구 집을 바꾸면 어떨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드는 때도 있어요… 

어머니, 인차 회답편지를 쓰세요. 

마음속으로 어머니의 두손을 꼭 감싸쥐며… 

                                         딸 미혜 올림

 

×

 

 연한 단풍잎무늬벽지를 깨끗이 바른데다가 군에서 생산되는 이불장이며 책상, 경대와 같은 가구들이 제자리에 방정하게 놓여 산뜻한 운치가 흐르는 아담한 방안에는 저녁해빛이 환히 들어 돋보기 없이도 편지를 읽을수 있었다. 이불장우에 겹놓인 두개의 낡은 외국제 려행용트렁크만 아니라면 이 방은 농촌문화주택의 보통살림방이나 조금도 다름없을것이다. 

책상에 마주앉아 딸의 편지를 두번세번 거듭 읽어가는 리명선의 단정하게 빗어넘긴 희끗희끗한 머리칼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듯싶었다. 

그가 촬영소에서 나올 때 주영도비서는 촬영소에 있은 전기간의 사업과 생활을 친절하게 총화해주면서 소소한 결함은 있었지만 총체적으로는 일을 잘했다는것이 당위원회의 평정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뒤따라 때문에 영화예술계에서 나가도 공로보장자의 대우를 받도록 해당 기관에 문건을 넘기기로 했다고 알려주었다. 고마왔다. 눈물겹도록 고마왔다. 일반사회에 나온 그는 시끄러운 일도 별로 없이 인차 수속이 되여 주영도비서의 말그대로 공로보장자의 대우를 받게 되였다. 

그러나 그것이 큰 기쁨으로는 되지 못했다. 한평생을 바쳐온 영화예술에서 떨어져나온 그는 허전함때문에 생활적인 의욕을 상실한 사람처럼 맥없이 방안에 누워있거나 우두커니 앉아있는 일이 태반이였다. 

미래는 거의 없고 긴 과거만 있는 그는 지나간 생활에 대한 추억으로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메꾸는수밖에 없었다. 그리고있을라니 마음과 몸에 곰팽이가 끼는것 같았다. 사람이란 추억만으로는 살수 없는 존재였다. 

경로동직장에 나갔다. 거기서 일하니 말동무도 생기고 가슴에 새로운 의욕도 움텄다. 그 의욕이란 모두 자기의 희망인 미혜와 관련되는것이였다. 미혜를 잘 뒤받침해주어 영화예술에 크게 이바지하도록 하자. 철룡이를 사위로 맞아들여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려보자. 이렇게 결심하니 활기가 되살아올랐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생겼다. 한때 세상에 얼굴이 널리 알려졌던 명배우, 화보와 달력, 그림엽서에까지 그 우아한 미모의 사진이 실렸던 녀배우가 경로동직장에서 아이들의 완구를 만든다는 사실이 사람들속에 여러가지 의혹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던것이다.

그리하여 지난 시기 적대분자들의 준동으로 인한 어떤 미지의 사건과 관련된 혐의가 있다느니 어느 예술가나 어떤 국가 경제기관의 일군과 불순한 정사가 있었다느니 하는 따위의 여론이 돌았던것이다. 

미혜는 그것들이 엄청난 허위라는것을 잘 알고있었지만 몹시 분해하고 괴로와하였다. 허위도 사람의 영상에 더러운 흔적을 남길수 있는 일정한 능력을 가지기때문이다. 

리명선은 괴로와하는 딸을 볼적마다 명우나 가인의 마지막 행복은 늙어서 추한 인상을 남기기전에 요절하는것이라는 어느 옛 미학자의 말을 상기했다. 

그는 어느덧 딸에게 도움은 커녕 부담만 끼친다는 병적인 가책이 가슴속에 자라올랐다. 게다가 더 심해진 위장병이 그를 괴롭혔다. 

비가 억수로 퍼붓는 어느날 집에 뛰여든 조카가 구원의 손길을 뻗쳐준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먼 북방 산간벽지에서 지질탐사대에 근무하고있는 조카는 평양회의에 올라 왔다가 들렸었는데 앓아누운 그를 보더니 자기고장으로 당장 내려가자고 했다. 자기네 탐사구역에서 약수가 발견됐는데 어떤 고질적인 위장병에도 특효라는것이 검증되였다는것이였다. 

리명선은 조카네 집에서 몇달 떠받들려 지내면서 약수치료를 받았는데 후한 인심과 약수덕인지 병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건강도 괜찮아졌다. 그러나 식솔이 많은 조카네 집에 그냥 눌러있자니 미안한 생각이 없지 않았다. 

때마침 지질탐사대마을을 찾은 군당책임비서가 그의 사정이야기를 듣고는 병원도 가까운 읍에 내려와있으면서 약수치료를 받으라고 권했다. 그리고는 읍농장 문화주택마을에 깨끗한 방까지 하나 주선해주었다. 

조카네 식구들이 한사코 말리는것을 겨우 뿌리치고 거처를 옮긴 그는 한두해 걸리더라도 아예 병의 뿌리를 뽑자고 결심하여 읍에 림시거주까지 붙이였다.

그리고는 병치료만 받으며 그냥 빈둥거릴수 없어 어느날 군당으로 찾아가 책임비서에게 아무일이나 하고싶다는 의향을 내비쳤더니 치료여가를 리용해서 이따금 군문화사업이나 도와주면 고맙겠다고 하면서 읍농장의 부대로력명단에 이름을 넣어주었다. 

아마 그는 부대로력으로 있으면서 가벼운 로동을 하면 건강에도 좋고 약간한 수입도 차례질수 있다는것을 타산한것 같았다. 

농장원들은 영화들을 통하여 얼굴을 익힌 리명선을 이미부터 가까이 지낸 친지처럼 대하였다.  

그들은 리명선이 자기네한테 와있는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다. 

결혼잔치같은것이 있어 먼곳에서 친척들이 오거나 자신들이 그러루한 일로 먼곳의 친척집에 가게 되면 의례 리명선의 이야기를 화제에 올려 자기네 고장에 와있다고 자랑하였다. 

그가 농장밭에 나가 영양단지 만드는 일같은것에 손을 대면 못하게 말리는가 하면 어디 이런 일을 할줄 아는가 보자는듯 빙 둘러서서 너그러운 미소들을 머금고 구경하기도 했다. 쉴참에는 그를 둘러싸고 오만가지 질문들을 다 했다. 그와 영화에 대하여 끝없이 물어보며 영화를 만드는 일과 농사를 짓는 일이 어느편이 더 힘들고 더 재미나는지 가늠해보는것 같았다. 그리고 배우들의 가정생활에 대하여, 부부관계에 대하여 물었고 방은 어떻게 꾸리고 살며 부엌세간은 어떤것을 쓰는지 알고싶어했다. 

한평생 농사를 지으며 백리밖에도 못나가보았다는 남정네처럼 생긴 아낙네는 그의 곱고 매츨한 손과 자기 넉가래같은 손을 비교해보면서 가슴을 찌르는 소리를 했다. 

우리가 지어보낸 낟알을 먹고 살아왔겠는데 거기서는 손이 이렇게 곱다고… 그러다가 그의 머리칼을 흘깃 쳐다보더니 농사일밖에 모르는 자기네는 손부터 늙어가는데 거기서는 머리부터 센다고 하며 한숨을 내쉬였다. 

농장원들은 먹을것이 좀 생겨도 바가지나 사발에 담아들고 그한테로 뛰여왔다. 아침에 문을 열고 밖에 나갔다가 누구인가 밤사이에 바싹 마른 땔나무단들을 마당가에 무져놓은것을 띄여보고 깜짝 놀란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유치원에 다니는 조무래기들까지 부모들이 따라다니지 말라고 엄하게 단속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자꾸 보고싶어 널바자의 틈새기나 나무옹지구멍으로 문쪽을 들여다보며 울바자밑에 오래도록 옹기종기 붙어있는것이였다. 

그는 자기한테로 쏠리는 근로하는 사람들의 이 모든 사랑과 관심속에서 조선사람처럼 예술을 사랑하는 인민, 예술적인 민족이 어디 있으랴싶어 때때로 깊은 상념에 잠기게 되였으며 영화예술에 대한 그들의 애정과 기대도 민족성과 결부시켜 가슴뜨겁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영화예술계에서 비록 떨어져나왔지만 그리고 영화예술과 옛동지들에 대하여 의견과 섭섭한 마음이 전혀 없는것도 아니지만 좋지 못한 소리 한마디 안했다. 

그렇게 한것은 또한 자기 인격에 대한 자각뿐아니라 순박한 마음들이 정서적위안을 얻으며 리상적으로 그려보는 그 세계에 조금이라도 흠이 가거나 그늘이 드리우게 하고싶지 않아서였다. 

리명선은 널바자의 틈새기와 나무옹지구멍에서 초롱초롱 빛나던 그 눈동자들을 숨져도 잊지 못할것 같았다. 그 눈동자들을 통하여 민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농장원들의 마음이 자기 한평생의 예술생활을 꿰뚫어보는것 같아서였다. 

사실 그는 농장원들의 사랑어린 보살핌을 받으면 받을수록 아리숭한 가책을 느끼며 지난날을 더듬어보게 되군하였다. 

예술창조와 개인생활에서 뉘우쳐지는것이 한두가지 아니고 량심과 선행으로 채우지 못한 부끄러운 공백들이 환히 보이는듯 하여 남몰래 괴로움에 잠기는 때도 있었다. 

그는 영화계에서 활동하던 때보다 그 세계를 아주 떠난 지금에 와서 자신의 예술생활을 놓고 전에 없던 반성을 하게 되는것이였다. 그러나 이제는 지난날의 빈 공백을 무엇으로써도 메꿀수 없다는것을 생각할 때 울적한 가운데 가슴이 쓰려나지 않을수 없었다.

배우단에서 오는 편지마다에는 놀라운 소식들이 적혀있었다. 절망하여 쓰러진 최승진의 집으로 김정일동지께서 몸소 찾아오셨다는것이며 그이께서 영화예술을 친히 지도하시여 촬영소로 자주 나오신다는 등 영화계에서 일어나는 가지가지 눈부신 변혁들에 대하여 써보냈던것이다. 리명선은 가슴저린 후회에 잠겼다. 그때 앞뒤를 재지 않고 왜 그렇게 훌쩍 영화계를 떠나고말았던가. 

마침내 그는 여기에서나마 영화예술에 보탬이 될수 있는 일을 하리라고 마음먹게 되였다. 그가 이제 와서 영화예술을 위하여 할수 있는일이란 자기를 통하여 영화계를 상상할수 있는 농장원들앞에서 영화예술과 영화예술인들의 체면이 깎이지 않도록 처신하고 행동하는것이였다. 

그래서 그는 농장밭에 일하러 나갈 때에조차 머리단장과 옷차림에 마음을 썼고 방안을 거두거나 마당청소를 할 때에도 놀라운 정성을 쏟아부었다. 말 몇마디를 해도 문화적으로, 옳바른 뜻을 담아서 하려고 애썼다.… 

이렇게 생활하는 그에게 있어서 미혜의 편지는 청천벽력과 같은것이였다. 

그애들이 갈라지다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엄마를 달래기 위하여 전혀 괴롭지 않다고 쓴 딸의 심정이 안겨와 가슴이 찢어지는듯 아파났다. 전혀…전혀 괴롭지 않다는 그 말이 참지 못할 괴로움의 고백처럼 느껴졌다. 철룡이와 그의 형에 대한 노여움이 불길처럼 가슴에서 타오르다가 미혜의 지나친 자존심이 이런 파탄을 가져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윽고 가슴이 좀 가라앉자 한가닥의 의혹이 실연기처럼 피여올랐다. 그것은 한기석이 어떻게 되여 미혜의 개인문제에 깊이 끼여들게 되였는가 하는것이였다. 미혜에 대한 그의 각별한 호의와 관심도 웬일인지 께름하게 여겨졌다. 미혜가 그것을 부모들의 우정과 결부시켜 해석하고있는데는 더욱 의아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미혜의 아버지가 병사한 다음 내내 독신으로 지낸 그는 진정에 넘친 혹은 허위가 섞인 구애의 눈길에 한두번만 쫓긴것이 아니였지만 절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개별적인 남성들과 우정이 깊어지는것조차 될수록 피할려고 했었다. 고인이 된 남편에 대한 렬녀다운 충정때문이나 이성에 대한 갈망이 전혀 없어서가 아니였다. 

성애를 속박하는 모든 계률을 뿌리치고 세상이 뭐라고 하든 구애의 눈길을 보내는 남성의 품으로 달려가고싶은적도 없지 않아 있었다. 

락엽이 우수수 흩날리고 차거운 달빛이 창문으로 흘러드는 가을밤 고독감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내여 운적도 있었다. 그러나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자기는 예술가이고 인민이라고 하는 존엄있는 호칭으로 불리우는, 세상사람들이 자기를 다 알고있다는 지각때문이였다. 순간의 환락을 한평생의 창조적로동으로 획득한 명예에 흙탕칠을 하고싶지 않았고 엄청나게 과장되여 세상에 돌아갈 소문도 두려웠는지 모른다. 

독실한 절제가 자기 본위적인 랭담성으로 오해되고 주위에서 여러가지 비난과 뜻밖의 불만이 일어나 마음을 괴롭혀도 속이 흔들려 값눅은 열정에 몸을 맡길대신 의지를 가다듬고 자기를 지켜왔다. 이것은 세상이 모르는, 딸조차 눈치채지 못한 독신녀성의 어려운 싸움이였다. 보통직업의 행복한 녀인들은 짐작조차 할수 없는 슬픔이고 고행이였다. 

그에게는 이성과의 각별한 우정이 없었다. 지난날 리명선은 연극극장 녀배우들의 말을 통하여 한기석의 아버지인 연극연출가 한민에 대한 희미한 인식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예술창조에서는 요구성이 매우 강하며 개인생활에서는 자신과 남에게 꼭같이 엄격한데 인간적인 매력은 덜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리명선은 작가예술인들의 회합같은데서 이따금 한민을 만났는데 그저 눈인사나 하고 지나치군하였다.  그런데 부모들의 우정이란 무슨 소리인가. 편지를 보면 한기석이 미혜를 남달리 보살펴주고 나가서 뒤에서 은근히 조종하고있는것 같으며 미혜 또한 그를 몹시 따르고있는것이 틀림없었다. 

리명선은 어머니로서 이 일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불안해야 할지 또 한기석이를 고맙게 여겨야 할지, 께름직하게 여겨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먼곳에 딸자식을 두고있는 어머니의 로파심이 더 커서 딸한테 이렇게 편지하리라 마음먹었다. 

(미혜, 귀여운 내 딸아! 설사 몇몇 사람들이 나를 의심하는 소리를 듣는다해도 그건 공연한 편견이니 절대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당을 철석같이 믿어라. 이 엄마는 여태 당에 대해 한번도 의심을 품은 적이 없다. 당조직도 또한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때까지 마음 편안히 지내올수 있었다. 의심하지 말라. 털끝만치도… 철룡이 형되는분에 대해서도 너무 나삐 생각지 말아라. 혈친의 일생이 결정되는 혼사에서는 누구나 신경을 날카롭게 세워 좋은것, 나쁜것을 다 알아보자고 할수 있는것이란다. 엄마는 미혜가 너무 경솔하게 속단하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구나. 너의 자존심이 언제나 탈이야.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보는것이 어떠냐… 집문제에 대하여 말한다면 벌써부터 양보해주고싶었다. 누구나 중요하게 활동하고있는 사람한테. 우리 둘이야 보통주택에 들어도 넉근하지 않느냐… 한기석동무 일이 고맙기는 하지만 어느 한사람 말만 듣고 행동하지 말아라…) 

리명선은 밖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을 때에야 비로소 얼굴을 들었다. 

문밖에서 분조장의 걸걸한 목소리가 울렸다. 

《배우오마니-》 

그는 목이 잠겨 가까스로 대답했다. 

《녜-》 

《바람을 쐬지 않을려우? 새 영화가 왔는데 청년분조애들이 함께 보구파 설설 끓어요-》 

새로 왔다는 영화는 《한 자위단원의 운명》이였다.

군문화회관은 영화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로 초만원이였는데 회관안에 들어와 앉은 사람들보다 밖에서 붐비는 사람들이 몇배나 더 많은것 같았다. 밖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그냥 들려오는가 하면 창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회관을 들부시겠다는 위혁적인 소리까지 흘러들어왔다. 그러다가 일이 어떻게 되였는지 중간통로로 사람들이 정신없이 밀려들고 창문들이 벌컥벌컥 열리며 날파람있는 청년들이 안으로 뛰여들었다. 삽시간에 회관안은 수라장이 되고말았다. 영사막앞에 나타난 회관 관장이 안경알을 번뜩이며 창문으로 날아든 청년들에게 험악한 욕설을 퍼붓더니 장소관계로 영화를 고등중학교 운동장에서 하게 된다고 소리쳤다. 

리명선은 청년분조원들에게 에워싸여 앉아 영화를 보았다. 호기심 많은 처녀분조원들은 화면에 나타나는 배우들의 나이며 고향, 출신학교, 가정에 대하여 소곤소곤 물었는데 그는 처음에는 묻는것족족 귀속말로 대주다가 얼마 안있어 대답을 전혀 못하게 되였다. 영화에 심취되여서였다. 작품은 자위단에 끌려간 농민청년의 눈물겨운 생활을 펼쳐보이면서 투쟁만이 살길이라는 생활철학에로 관중을 이끌어가고있었다. 전에없이 진실한 생활묘사와 놀라운 화면구도, 인물들의 뚜렷한 개성, 가슴을 치는 철학적인 대사, 심금을 뒤흔드는 음악, 눈부시게 선명한 화조… 영사막에 흐르는 화면에서는 불같은 열정과 소심과 답습, 틀을 짓부시는 개척자의 호탕한 기백이 풍겨왔다. 가슴에 육박해드는 생동한 형상들의 박력에 숨이 막히는듯하였다. 

리명선은 자기가 버리고온 창조의 세계에서 일어나고있는 변혁이 가늠되였으며 그 변혁의 불길속으로 뛰여들고싶은 욕망이 터져올라 몸부림치다가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며 얼굴을 싸쥐였다. 

(이제 무슨 면목으로 돌아간담… 돌아간들 받아줄가…) 

옆에 앉은 처녀가 그의 팔을 흔들며 어디 아픈가고 물었다. 

리명선은 정신없이 얼어나 사람들속을 황황히 누비며 운동장밖으로 나왔다.

그는 어둠속에 묻힌 길을 따라 어디라없이 허둥지둥 걸어갔다. 

(내가 촬영소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철룡의 형되는분도 그런 의심을 품었겠는가… 나때문에 저 애들의 사랑까지 깨지지 않았는가. 아, 내가…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그는 입을 싸쥐며 눈물을 삼켰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