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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2
화창하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고 하늘절반이 시꺼멓게 뭉개치며 날아드는 매지구름에 덮히더니 그쪽에서 먼 우뢰소리가 우르릉 울려왔다. 장대재쪽에서 날아오른 한떼의 새들이 그 우뢰소리에 쫓기는듯 하늘밑을 황급히 날아돌아 산탄처럼 흩어지며 보통문쪽으로 쏟아져내렸다. 뒤짐을 지고 창가에 서서 바깥하늘을 내다보시던 김정일동지께서는 박경섭에게로 천천히 돌아서시였다. 응접탁곁에 서있던 박경섭이 흥분된 얼굴로 그이를 우러러 쳐다보았다. 《촬영소들에서는 영화창조사업이 대단히 활기에 넘쳐 진행되고있습니다. 연출가들과 배우들의 기세도 참 좋습니다. 모두 열정에 넘쳐있습니다.》 《최승진연출가는 어느 작품을 맡았습니까?》 《그 동무만은 아직…》 그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아직도?…》 《저… 그가… 전에 받은 비판을 소화하지 못해서 그런다는 반영도 있고 서구예술에 대한 숭배심이 채 가셔지지 못해서 작품들의 세계를 절절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소리도 있지만 어제 만나 담화해봤는데 그런것 같지는 않습니다. 주관적으로는 흥분해있고 의욕도 높은데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망설이는것 같습니다.》 《위축해서 소심성에 빠진게 아니요? 재능있는 동무가 참… 그래서는 안되겠는데…》 그이께서는 다심하게 걱정하시였다. 《대담한… 불같은 심장이 없으면 문제작을 못내는데… 어떻게 하면 좋은가… 머리를 좀 쉬워야 하지 않을가? 동무도 좀 생각해보오.》 그이께서는 담배에 성냥불을 붙이시였다. 좀전의 심려깊은 안색은 가신듯 사라지고 매우 온화한 얼굴이였다. 《력사상의 실례를 보면 원쑤와의 싸움에서는 용감무쌍했지만 제편사람들에 대한 믿음에서는 소심하고 신경질적이고 비겁한 정치가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건 다 자기 사업과 정치와 인격의 견인력과 감화력에 대한 확신이 덜한데서 오는 정치적불안감때문이였소… 우리는 믿음에서 린색을 부리지 맙시다.》 박경섭은 다음 용건을 말씀드렸다. 《저… 까를로븨 바리국제영화축전준비위원회의 초청에 대해서는 내놓을 신통한 작품도 없는데 축하전문만 보내고 대표단 파견은 그만둘가 합니다.》 《그만두긴 왜 그만두겠소. 대표단을 파견합시다. 거기 참가해서 다른 나라 영화예술의 동향만 보고와도 어디요.》 《그럼 영화총국이나 촬영소 책임일군들로 두세명의 대표단을 무어서 보내겠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지도일군들보다 창작가들을 보내는것이 좋겠다고 하시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였다. 《누구를 보내겠소?》 《토론해보겠습니다.》 그이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활달한 걸음으로 응접탁둘레를 돌아 박경섭의 곁으로 다가오시였다. 《좋은 기회인데 우리 한번 크게 마음을 써보지 않겠소? 로영무동무하고 최승진동무를 보내는게 어떻소? 젊은 동무도 하나 끼워서… 갔던 걸음에 프랑스도 돌아보게 합시다.》 《예?…》 《어째 그 동무들이 적합하지 않소?》 《아니 그런건 아니지만…》 《허허, 크게 마음을 써보자는데 이러는군… 그 동무들은 영화부문에 오래 종사하면서 수고도 누구보다도 많이 한 동무들인데 크게 마음을 써줍시다. 승진동무한테는 서구예술에 대한 환상도 나무옹지처럼 말째게 배겨있는데 거기 예술이 지금 어떤 꼴이 돼가는가 제눈으로 직접 보게 되면 생각되는바가 좀 있을게요. 견문도 넓어지고 우리 문예정책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게 되면 앞으로 크게 은을 낼수 있소. 보냅시다!》 《예!》 이튿날 오전 10시, 박경섭은 자기 사무실에 로영무와 최승진, 강철룡을 불러 친애하는 김정일동지의 말씀을 전달하였다. 세사람이 밖으로 나오니 그사이 해비가 내려 가로수며 포도가 축축히 젖어있고 공기는 전에없이 눅눅하고 상쾌하였다. 그들은 거리에 나섰다. 최승진은 고개를 숙일사하고 뒤에서 따라왔고 로영무와 강철룡은 앞에서 걸었다. 철룡은 머리가 자꾸 핑 돌아 행인들을 두리번 두리번 돌아보는가 하면 하늘에 둥실 떠있는 얼음산같은 구름을 쳐다보기도 하였다. 모든것이 꿈만 같았다. 사람이란 이렇게 하루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존재인가! 어제까지만 하여도 저조한 연출대본과 그 연출가를 두고 걱정하다가 한기석이와 충돌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미혜의 사고와 외면, 형과의 감정마찰때문에 얼마나 신경이 날카로와졌고 괴로와했던가… 오늘아침에는 또 경리부에 가서 합숙에 들어갈 수속을 하였지… 그는 어떻게 촬영소까지 왔는지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어찌하여 아주 외면해버린 형이 못견디게 보고싶어 그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게 되였는지도 알지 못했다. 형은 출장가고 없었다. 형네 집에 전화를 걸었다. 형수는 소식을 듣더니 비명비슷한 소리를 내지르고는 이제 빠리에 가서 촌바우처럼 거리녀자들한테 홀려 다 털리우지 않는가 보라고 하며 깔깔 웃어댔다. 그리고는 자기가 려행준비를 맡아 해줄테니 어서 집으로 돌아오라고, 그러지 않으면 자기가 촬영소에 찾아가 끌어오겠노라고 을렀다. 그러나 이 시각 철룡은 형이나 형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미혜를 백배나 더 만나고싶었다. 설사 지난날 둘 사이에 무슨 오해나 불만이 있었다쳐도 이 크나큰 행복감속에서는 그런것들이 가뭇없이 녹아없어지고 감정이 투명하게 정화되여 하나로 융합될것 같았다. 어서 만나 함께 기쁨을 나누고 려행준비도 그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하고싶었다. 그러나 미혜는 아침에 출근했다는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소식을 듣고 철없이 기뻐하다가 사람들의 놀림에 들어 수집어서 어디에 숨어버렸는가. 기쁜김에 동심이 살아올라 숨박곡질하듯 깜찍하게 피해다니는것인가, 부탁하기전에 려행준비를 해주자고 어느 상점에라도 뛰여나갔는가… 행복한 상상이 깃을 펴고 날수록 그는 공연히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고 내놓고 찾아돌아다닐수 없게 되였으며 그래서 속이 더 달아올랐다. 사실 철룡은 사업상공로나 예술적지위로 보아 자기한테 차례진 행운이 분에 넘치는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으며 남의 자리에 들어선듯한 자격지심도 없지 않아 말과 웃음, 행동도 조심하게 되였던것이다. 오후에 부기실로 가서 전달에 맡겼던 저금통장을 찾아가지고 나오는데 얼굴이 해쓱해진 미혜가 꿈속에서처럼 소리없이 나타나 앞을 막아섰다. 처녀는 쌀쌀하게 웃어보이며 축하한다고 인사하였다. 그리고는 외면하며 저쪽으로 가버렸다. 미혜… 꿈결에도 그리며 가슴태웠던 그 처녀는 랭랭하게 식어들어 더 예뻐진 얼굴을 도고하게 쳐들고는 홱 돌아서 옆을 스쳐지나갔다. 철룡은 머리가 뗑해져 말도 제대로 못한채 탄력있게 걸어가는 처녀의 아름다운 자태를 지켜만보았다. 왜 저러는가?… 퇴근시간후 철룡은 미혜의 집으로 찾아갔는데 이번에는 다행히도 문이 걸려있지 않았다. 손기척도 없이 집안에 들어선 그는 성급히 신발을 벗고 아래방 문을 열었다. 미혜는 누울 차비를 하였는지 검은 바탕에 흰점이 촘촘히 배긴 낡은 달린옷바람으로 무릎을 굽히고 침대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는데 발치에 모포와 베개가 되는대로 놓여있었다. 처녀는 생기를 잃고 멍하게 풀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입가에 알릴듯 말듯 미소를 띠며 반색을 보였다. 방구석에 놓여있는 목각상에 젖은 수건이 되는데로 걸려져 무희의 방긋 웃는 얼굴 절반을 가리워버렸다. 달라진 처녀의 모색도 놀라왔지만 언제 와봐도 깨끗하게 정돈되여있던 방안의 모든것이 너저분하게 헝클어진듯한 인상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를 올롱해서 쳐다보는 눈이 어떻게 찾아왔느냐고 묻는듯했다. 남남간이 다 된 얼굴이다. 《미혜…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요?》 《량심에 걸리는게 없어요?》 《량심에? 그건 무슨 소리요?》 《…》 《터놓구 말하라구.》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키고있던 처녀의 눈에 진지한 빛이 어리는듯하였다. 《거기 좀 앉으세요.》 철룡은 의자에 앉았다. 《철룡동무… 언제나 저한테 솔직했지요?》 철룡은 대답을 안했다. 《기석오빠가 어떻게 돼서 참관단에서 빠지게 됐어요?》 들어갔다가 빠졌다는 소리인것 같았다. 철룡은 자기에게 무엇인가 치욕적인 혐의가 들씌위져있는듯한 느낌에 신경이 날카로와졌다. 《그건 모르겠소. 박경섭동지가 기석동무는 참 재수없다고 하면서 기관지염이 심하다는 소리를 했는데 그걸로 봐서 병때문인것 같소.》 《동무가 무슨 작용을 논건 없어요?》 《내가 무슨 작용을 논단말이요?》 《이전에 국제호텔식당에 가서 연출대본을 둘이 따로 하자고 의논한적이 있지요?》 《그걸 어떻게 아오? 기석이와 단둘이 한 이야기인데… 기석이가 말했소?》 처녀는 대답을 피하고 자기 말만 하였다. 《그걸 승진연출가나 영무연출가가 알지 않아요?》 《기석이가 말하지 않았으면 알수 없소.》 처녀는 안도의 한숨을 조용히 내쉬였다. 《됐어요… 그럼 됐어요…》 《기석이가 뭐라고 했소?》 《됐어요. 그 말은 그만두자요.》 철룡은 그가 자기를 비렬한짓과 련결시켜 의심했다는것을 느꼈다. 몹시 불쾌했다. 그러나 참았다. 참고 의자에서 침대의 처녀곁으로 옮겨앉아 어깨를 그러안았다. 이전과는 달리 그 어깨가 싸늘하고 딴딴하고 가냘프게 느껴졌다. 미혜는 물리치지 않고 고개만 반대쪽으로 틀었는데 흘러내린 머리칼사이로 목덜미의 살결이며 기미가 들여다보였다. 《미혜… 미혜… 동무는 뭔가 달라졌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절 어떻게 할 결심인가요?》 《어떻게 하다니… 그건 무슨 소리야?》 《모르는척하지 말아요. 우리는… 마지막 말을 할 때가 됐다고 봐요. 다 터놓고 말하자요.》 그리고 미혜는 떨리는 목소리로 철룡의 형님이 자기를 어떻게 반대한다는것을 낱낱이 이야기하였다. 어디서 들었는지 알수 없다. 그것은 철룡이가 이때까지 미혜한테 숨겨온 사실이였다. 철룡은 이마며 잔등에 식은 땀이 내배는것을 느꼈다. 그는 분김에 주먹을 내흔들며 소리쳤다. 《공연히 성분과 가정환경을 운운하면서 별치않은 일에서까지 사람들을 차별시하는 그런 사고방법과 관점을 나는 경멸하오. 증오하오! 우리 사회에 봉건적신분제와 비슷한 그런것이 있을수 있는가? 미혜, 사실 나는 이때까지 형을 무척 존경했고 자랑으로 여겨왔소. 그러나 그런 관점때문에 결별했소. 합숙에 들어갈 수속까지 해놓았소. 우리 문제에 대한 형의 간섭이 싫어… 이런데도 내 마음에 의심이 가오?》 미혜의 얼굴에는 까닭모를 의혹의 빛이 짙게 어리였다. 《요즘 와서야 엄마를 지난날의 생활경위때문에 내보냈다는걸 알게 되였어요. 나하고 운명을 결합하면 발전에 난관이 생기겠는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돼도 절 아끼겠어요? 동무의 인생목표는 보통예술인도 아니고 예술행정간부로 승진하는건데…》 이것도 처음 듣는 소리이다. 철룡은 어처구니없어 허구프게 웃다가 얼굴빛이 심각해졌다. 가슴에서 피가 뛰였다. 미혜는 쏘는듯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다가 스쳐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집에 어떤 소위처녀가 다닌다면서요? 형님 전우인 어느 장령의 녀동생이라든가…》 역시 처음 듣는 소리이다. 군의군관학교를 갓 졸업한 한 군의소 준의가 형이 감기같은데 걸리면 주사를 놓아준다고 다닌적이 있었다. 형과 막역한 사이인 장령의 녀동생이였다. 미혜자신도 그런것을 물어놓고 스스로 창피스러워지는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였다. 철룡은 가슴이 떨렸다. 《그런데?》 《됐어요…》 처녀는 눈길을 외로 돌리였다. 철룡은 진정이 모욕당한듯한 울분에 어깨가 오르내리고 숨결이 거칠어졌다. 어머니의 생활경위, 예술행정간부, 소위처녀… 모두 전에는 못듣던 소리들이다. 누구인가 터무니없이 훼방한것이 틀림없다. 《전 아무거나 평등한 조건에서 하고싶어요. 동정의 대상으로 떨어져 은혜를 베푸는듯한 그런 사랑은 받고싶지도 않아요. 사랑놀음은 이쪽에서 하고 일생의 반려는 다른쪽에서 구하는 그런 사람도 있다는데 난 동무를 그렇게 믿고싶지 않아요. 지금도…》 미혜의 타는듯한 눈에 이슬기가 반짝이였다. 철룡은 더 참을수 없어 주먹으로 침대를 내리쳤다. 《다 거짓말이요! 누가… 누가 그 따위 소리를 했소?》 《…》 《그게 누구요? 말하오!》 《나한테라고 벗이 없겠어요.》 그 소리에 철룡은 가슴 한귀가 툭 터지며 뜨끈뜨끈한것이 흘러내리는듯한 느낌과 함께 눈앞이 핑 돌아갔다. 자기아닌 그 미지의 《벗》에 대한 처녀의 믿음과 그의 이름을 끝내 대지 않는 의리심에 가슴이 뒤집혀졌다. 《요전에 집에 있었소? 내가 찾아왔을 때…》 《…》 《있었소? 어디 나갔댔소?》 《있었어요.》 《있으면서 어째 응대를 안했소? 부르기까지 했는데 …》 《…》 《누가 와있었소? 그 <벗>이란 사람이…》 미혜는 새빨갛게 피진 눈으로 그를 할깃 치떠보더니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나가줘요…》 처녀의 나직하면서도 울음섞인 목소리가 그의 가슴을 세차게 떠밀었다. 철룡은 무엇이 이렇듯 독한 반발을 불러있으켰는지 알지 못했다. 《미혜…》 처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구석쪽으로 가서 얼굴을 벽에 묻었다. 《사람을 뭘로 알아요? 동무하고 형하고 뭐가 달라요? 사람을 얕보지 말아요! 난 싫어요!》 《미혜…》 《…》 미혜는 가슴을 굳게 닫아맨듯 아무리 부르고 무슨 말을 해도 응대를 안했다. 벽에 붙어선 처녀의 윤나는 머리칼이며 미끈한 잔등으로 외면의 랭혹한 기운이 흐르는듯했다. 철룡은 열이 올라 어떻게 되여 일이 이렇게 되였는지 어렴풋이 느꼈을뿐 그 깊은 원인을 몰라 분통이 터져올랐다. 그는 마음이 잔뜩 헝클어지고 또 화김에 모진 소리를 망탕 퍼부었다. 그러다가 처녀의 한숨섞인 목소리를 똑똑히 듣게 되였다. 《산에 묻은 병들을 다 파내서 깨버려요. 거기서 안하면 내가 하겠어요.》 철룡은 종잡을수 없는 분격과 울분을 이기지 못해 복도로 나왔으며 공연히 이런다고 생각하면서도 문을 란폭하게 닫아버렸다. 안에서 가슴을 찢는듯한 흐느낌소리가 새여나왔다. 그 소리에 철룡은 한동안 못박힌듯 서있다가 훼방자에 대한 분격이 앞서 밖으로 나왔다. (훼방자는 한기석이다. 틀림없다!) 까닭없이 이런 생각이 뇌리에 번개쳤다. 거리로 나간 철룡은 사람들의 물결속을 허둥지둥 누벼나갔다. 부옇게 흐려진 눈앞에 모란봉과 대성산, 룡악산의 땅속에 박아넣은 유리병들이 어른거렸다. (형은 병원에 갔다가 한기석이를 만났다고 했다. 미혜도 그한테 문병갔다 오다가 차에 치울번했다. 그렇다, 불을 보듯이 명백하다. 그가 어간에서 형한테도, 미혜한테도 훼방을 놀았다. 그한테로 가자, 결판을 내고 떠나자!) 그가 건늠길을 건너가는데 바람을 일으키며 앞으로 지나가던 대형화물차가 아츠러운 마찰음을 내며 멎고 운전실에서 웬 사람이 환성을 지르며 뛰여내렸다. 《여-》 작업복차림의 배명준부국장이였다. 그는 달려와서 다짜고짜로 철룡의 손목을 잡아끌고 가로수밑으로 가더니 떠들썩하게 축하의 인사를 쏟아부었다. 《들었소. 축하하오. 아까 거리에서 형수님을 만났지요. 저자보러 뛰여다니더군요. 형님도 저녁에 오신다고 했소. 집에 일찌기 들어가시오.》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우리야 건설장에밖에 갈데가 있습니까. 허허허… 빠리, 에펠탑, 개선문… 잘- 보고 오시오. 돌아오면 인상담을 들으러 가겠습니다.》 남의 기쁨을 자기 기쁨으로 여길줄 아는 이 선량한 설계가는 취흥이라도 드는듯 얼굴이 벌개져서 그의 손등을 다정하게 쓸어만졌다. 《얼마나 큰… 큰 신임이요. 연출가선생한테 기대가 크신것 같습니다.》 배명준은 선망의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여러말을 더 한다음 작별인사를 하고는 웬일인지 한쪽다리를 절뚝거리며 차로 뛰여갔다. 가로수밑에 그냥 서서 파르스름한 연기를 날리며 멀어져가는 대형화물차 뒤꽁무니를 지켜보던 철룡은 문득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저려왔다. 모두 선망의 눈길로 쳐다보는 자기, 큰뜻에 떠받들려 먼길을 떠나는 자기로서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경박하게 의분을 터뜨리며 뛰여다닌것이 부끄러워났던것이다. 한기석의 말쑥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를 만나 무슨 소용인가, 훼방을 놀았다고 실토할것인가, 아니다, 수다스러운 말로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뗄것이다. 철룡은 이마살을 사납게 찌프리고 모두숨을 길게 내쉬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그 순간 다른 생각이 가슴을 쳤다. (그는 무슨 앙심에서 나를 이처럼 타격하는가?… 자기 의사를 따르지 않는다고?… 자기를 부정하고 비판한다고? 아니다. 나는 계책으로 승진의 길을 여는 그따위 진창길로 갈수 없다. 이런 타격을 받고 미혜와 아주 헤여진대도 천만에… 비틀거리지 않을테다…) 인도로 지나가는 행인들이 가로수밑에 심각한 얼굴로 서있는 그를 흘깃흘깃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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