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

 

제 3 장

 

5

 

 

아직은 누구도 만나보고싶지 않았다. 누구하고도 말하고싶지 않았다. 불에 덴듯 가슴이 얼얼했다. 이때까지 불편없이 지내온 사무실이 벽으로 둘러싸이고 천반으로 짓눌린 정립방체의 페쇄된 공간처럼 느껴졌다. 사무실에서 집으로 들어간다는것은 정립방체의 한공간에서 다른 공간에로의 위치이동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자기 생활이 있고 안해가 있는 그 립방체의 공간이 갑자기 틀에 박힌 도식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로영무는 퇴근길에서 벗어나 부근농촌의 짚검불더미에 벌렁 드러눕게 되였다. 시크무레하고 향긋한 짚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늘에는 희부연 은하수가 가로비꼈고 별들이 한벌 깔려 유난스레 반짝이고있었다.  

(이것은 확실히 발견이다. 보통발견이 아니다. 위대라는 말을 붙일만한 그런 발견이다. 우리 영화예술의 거듭되는 실패를 두고 우리들중 어느 누가 전통과 결부시켜 생각했던가. 어느 누가… 어느 창작가… 어느 지도일군이… 뿌리가 약한 나무는 바람에 쓰러지기 쉽다. 얼마나 많은 뜻을 암시하는 말씀인가. 진리란 발견해놓고보면 이렇게 간단한것인가…) 

로영무는 번듯이 누운채로 찬공기를 한껏 들이켰다가 후 내뿜었다. 

그는 오늘 그이의 말씀을 들으며 많은것이 생략된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응당한 지적, 응당한 비판, 응당한 규탄이 없었기때문인지도 모른다. 말씀없이 생략된 그 무언의 공간을 찾아 더듬어나가니 가슴이 은근히 저려들었다. 

(아,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나는 오늘 그이께서 꼽아나가시는 작품들중에서 《피바다》와 《혈분만국회》밖에 알지 못했다. 나머지 작품들은 전혀 처음 듣는것들이였다. 쉑스피어나 체호브의 작품들은 하찮은것까지 다 알고있으면서도 제 나라, 제 민족의 유산은 이름조차 모르고있었으니 내가 과연 국적이나 있는 예술가인가. 그래도 버젓이 조선예술가라고 얼굴을 쳐들고 다녔다. 이런 문외한, 이런 철면피한이 어디 있는가. 

…이제라도 자기가 창작한 모든 작품들을 검토해봐야 한다. 이전의 값눅은 찬사에서 위안을 얻지 말고 무자비하게 수술해봐야 한다. 내 작품의 혈액형은 과연 어떤것이였는가. 거기에 우리 인민들의 혁명성은 어느 정도로 어떻게 형상되였는가. 순수한 조선적인 아름다운 정서와 풍습, 세태생활은 어떻게 반영되였는가. 인물들의 성격, 구성과 속도, 작품의 시작과 결말은 조선적인것이였는가. 수치스럽게도 남을 모방한것은 없었는가… 아, 나이 50이 지나 이런 반성을 하게 되였으니 통탄할 일이다.…) 

뒤쪽에서 발자욱소리가 저벅저벅 났다. 서로 가로채며 열정적으로 내뿜는 남자와 녀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일으켜 뒤쪽을 돌아보니 두 그림자가 이쪽으로 나란히 걸어오는것이 바라보였다. 그것이 강철룡이와 장미혜라는것을 알아본 순간 로영무는 일어설가 하다가 도로 눕고말았다. 

(저들이 어떻게 여기로 나왔는가?) 

《정말 뜻밖이였어. 나를 찾으실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소. 꿈만 같아.》 

《공부를 많이 하라고까지 하셨는데 어째 훌륭한 예술가가 되겠다고 기운차게 대답올리지 못했어요.》 

《그렇게 안되더라니까. 목이 꽉 메면서… 참 이상해, 어떻게 내 이름을… 나같은 병사를 찾으셨는지…》 

《난 알아요… 알아요.》 

《나도 모르겠는데 동무가 어떻게 알아?》 

《리치를 따져봐요. 승진연출가네 집에 모여 <광풍>을 잔뜩 춰올릴 때 거기서 의견을 말한게 혼자뿐이였다면서요?》 

《의견은 무슨 의견… 한마디 하다가 말았는데…》 

《한마디라도 그건 정의감의 불꽃이였거든요. 그 사실을 누구를 통하여 아시게 되였는지 알아요? 그리고 그 불꽃이 귀중해서 이름을 기억해두셨는지도 모르지요.》 

《그럴가? 아니… 아니…》 

《틀림없어요. 결혼문제까지 물어보신걸 봐요. 얼마나 관심이 깊으시면…》

《미혜 자꾸 이러지 말라구. 심장이 터지는것 같아.》 

《터지면 뭐라나요. 이런 좋은날에야…》 

그들은 짚검불더미 바로 뒤에까지 와서 멎어섰다. 

《미혜!》 

《…》 

《미혜!》 

《왜 그래요?》 

《모두 우리 영화에 대통운이 들었다고 했어.》 

《분발하세요… 그이께서 와계시는동안 우리 분장실에서는 어쨌는지 알아요. 모두 숨을 죽이고 앉아있었어요. 볼일이 있어 자리를 떠도 조용조용 걸어다니고요. 그이의 음성이 우리 구석진 분장실에까지 들려오는것 같아서…》 

《미혜…》 

《…》 

《미혜…》 

《왜 그래요?》 

거칠어지는 숨소리… 

로영무는 잠시 나이와 지체로써 젊은이들의 속삭임에 호기심을 품고 엿듣는다는것이 속된짓인것 같아 손으로 귀까지 막지는 않았지만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저녀석이 뜬김에 처녀를 안고 여기에 엎어져 딩굴면 어찌는가…)  

잔등에 식은 땀이 내배는듯하였다. 

발치에서 바스락소리가 나더니 무엇인가 신발바닥이며 뒤축을 톡톡 건드렸다. 쥐새끼가 틀림없었다. 

(고약한놈, 숨도 쉬지 않고있으니까 아주 송장이 된줄로 아는게로구나. 좀더 가만있으면 발가락을 갉아먹자구 접어들텐데… 어. 수난자여, 참을수밖에…) 

《그날 내가 떠난 다음 형님이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아니…》

《뭐라고 했지요?》 

《아니… 뭐라긴…》 

 젊은이들은 돌아서는것 같았다. 

《우리 형님을 만나보니 인상이 어떻소?》 

《인상?… 좋더군요. 건설위원회 부위원장… 그렇게 높은 간부의 환대를 받아보긴 난생 처음이예요. 군복을 입으면 중장쯤으로 보이겠더군요.》 

《중장? 하하…》 

《철룡동무, 그런데 어째 어머니가 촬영소에서 나온데 대해서 그렇게 관심이 커요? 두번이나 캐여물으니까 좀 별난 생각이 들더군요.》 

《그랬던가. 그래서 불쾌했소?》 

《아니, 그저 좀.》 

《섭섭해서 그랬겠지. 나도 참 섭섭하오. 오늘은 더욱 그래, 이런때 그냥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소.》 

《정말 그래요. 영화를 하느라고 한평생 고생하다가 앞길이 열리니까… 며칠을 못참아서…》 

《왜 떠나갔소?… 왜 그랬소?》 

《…몰라요.》 

발자국소리가 멀어져가자 로영무는 짚검불더미에서 일어나 뒤잔등에 붙은 짚검불을 툭툭 털었다. 

가지런히 걸어가는 처녀총각의 그림자가 어둠속으로 어른거리며 녹아들어가고있었다. 그들이 걸어가는쪽 저 멀리 촬영소와 주택지구에 불빛이 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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