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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씨로 사람들을 놀래운 김생 (711∼?)
김생은 후기신라시기 신비로운 글씨로 사람들을 놀래운 훌륭한 서예가였다. 그는 너무나도 비천한 가정에서 태여난것으로 하여 부모가 누구인지조차 잘 알지 못하였다. 그의 유명한 글씨는 상상을 초월하는 꾸준하고 피타는 노력의 결과였다. 여기저기 연분홍색꽃들이 만발하고 저 멀리 들판의 한끝에서 아지랑이가 아물거리는 어느해 화창한 봄날이였다. 다 찌그러져가는 초라한 집 한채가 동네에서 떨어져있었다. 보기에도 외로운 그 집의 문이 삐거덕거리며 열리더니 헐벗은 한 소년이 눈을 반짝이며 나와 산으로 올랐다. 그 소년은 나무를 하여 지게에 얹어놓고는 집으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땅바닥에 부지런히 글씨련습을 하였다. 처음에는 나무꼬챙이로 썼고 그다음은 나무를 태워 숯검댕이로 돌우에 썼다. 그리고 나무잎을 짓찧어 움켜쥐고 푸른색 글씨를 바위에 새겨보기도 하였다. 수년세월 하루와 같이 기울인 이러한 노력이 있음으로 하여 소년은 후세에 길이 전해지는 명필로 될수 있었다. 김생은 낮에는 힘든 일을 하면서도 짬시간마다 글을 써보았고 저녁이면 광솔불을 켜놓고 모래통우에서 부지런히 글씨를 련마하였다. 그가 글씨련습에 얼마나 많은 품을 들였는가 하는것은 어찌다 무엇이 생겨도 그것으로 먹과 붓을 구하여 글씨를 숙련하다보니 겨울에는 홑옷으로 지낸것만 봐도 잘 알수 있다. 사실인지는 알수 없으나 어느날 김생의 마을에 와있던 어느 한 선비가 우연히 그가 쓴 글씨를 보고 못내 감탄하면서 경상도 안동의 문필산에 가면 글씨솜씨가 더 늘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서예로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김생은 이 말을 듣자 즉시 려장을 갖추고 그곳을 향해 떠났다. 거기에 가니 과연 글씨가 뛰여난 로인이 제자들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치고있었다. 김생의 말을 들은 로인은 즉시 그에게 글을 씌워보고는 산중턱에 있는 굴을 가리키면서 저안에 들어가 글씨를 련습해보라고 하는것이였다. 그리하여 김생은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그 굴안에 들어가 글씨를 익히게 되였다. (후에 이 굴이 김생굴로 불리워졌다.)
가난하기가 이를데 없었던 그는 종이가 없어 닥나무잎을 따서 거기에 글을 써서는 흐르는 물에 던지군
하였다. 그가 글을 쓴 나무잎이 얼마나 많았던지 산골에서 흐르는 물이 먹물로 변하군 하였다.
김생굴 아래로는 흰구름 떠도는데 나무잎 수북하고 길 험하여 찾기 어려워라 먹물이 든 못이 졸졸 흘러내리니 후세에게 물려주어 글씨쓰게 함이런가
또한 16세기의 한 철학자는 자기의 저서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우리 나라 천년전에 글씨 잘 쓰는 천재 나왔다네 기이할손 그 필법 폭포옆에 남겼으니 아 그 누가
명사없다 탄식하리 그의 필적원본은 아쉽게도 없어진지 오래고 탑본이 있는데 그 하나가 백월서운비의 비문이다. 이 비문은 단목이라는 중이 김생의 글씨를 여기저기에서 모아다가 신라 경명왕(재위 917∼924)시기 비를 세우려다가 실현하지 못하였던것을 고려 광종(재위 950∼975)때에야 비로소 세운것이다. 이밖에 《대로원》, 백련사 편액과 안양사의 액자 그리고 창림사비들에 그의 글씨들이 전해져온다. 이밖에도 청룡사 액자와 고려사신 홍광이 송나라에 가지고갔던 김생의 행서와 초서로 쓴 책 그리고 해인사의 불경 등에도 기록되여 전해지고있다. 그중에서 백월서운비가 아주 유명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16세기초 사람인 리항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젊었을 때 김생의 필적을 비해당(리조4대왕 세종의 셋째아들-안평대군의 호)의 집고첩(서화를 모으는 화첩)에서 얻어보고 그 필체의 변화가 무궁함에 황홀하여 세상에 전하는것이 많지 못함을 한탄하였더니 영천으로 올무렵에 봉화현의 옛 절터에서 김생의 글씨를 새긴 비 하나가 홀로 남아있단 말을 들었다. 나는 이 세상에 드문 그 보물이 숲속에 묻혀있음을 애석히 여기고 또 거두어줄 사람도 없고 벌판에서 소의 뿔장난과 목동들의 불장난이 모두 념려되는것이였다. 그래서 그 군내사람인 전 참봉인 권현손과 함께 그 비의 위치를 토의한 끝에 자민루아래에 옮겼다. 그리고 울타리를 둘러막고 출입문에 쇠를 잠그었다. 비문을 본뜰 사람이 아니라면 출입을 못하게 하였으니 함부로 비를 훼손할가 념려되기때문이다. 이리하여 김생의 필적이 널리 퍼져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감상하게 되였으니 아- 천년동안에 황페화된 빈 골짜기에 버림을 받았던 돌이 일조에 넓은 장소에 옮겨져 세상에 귀중한 보물로 다시 사랑을 받게 되였구나.》 《약천집》에서는 《봉화의 옛 절터에 김생의 글을 모은 백월서운비가 있었는데 중종 기사년에 영천군수 리항이 자기가 관할하는 자민루아래에 옮겨다두었고 명종 임자년에 명나라사람이 와서 오래동안 있으면서 그 비문을 수천매 탑본하였다. 그런데 날이 추워 그 주변에 불을 피우고 밥을 끓여먹었기때문에 비가 많이 파손되였다.》고 하면서 김생의 귀중한 필적이 많이 못쓰게 된것을 한탄하였다. 또한 《동국금속평》에서는 백월서운비에 새긴 행서체들이 《호방하고 종횡자재하여 기이하다.》고 하였다. 18세기말 《해동명장전》의 저자인 홍량호(1724∼1802)는 또한 자기의 문집에서 김생의 글씨를 평가하면서 《내가 일찌기 김생의 글씨를 계림(경주)에서 찾아보았고 <대로원> 소편을 강진에서 보았으며 만덕산의 백련사에서 6자의 큰 글씨를 보았다. 그리고 또 전유암 서문과 기타 인본을 얻어다가 내 집에 장서하였다.》고 서술하였다. 그런데 이 《대로원》편액에 대한 전설이 아주 유명하게 전해져오고있다. 일인즉 홍량호가 《대로원》이라는 편액을 집 한쪽에 걸어두었는데 집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래서 반대방향에 다시 글을 써붙이였더니 집이 바로 섰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수 없지만 그만큼 김생의 글씨가 신비스럽다는데서 전해져온것만은 틀림이 없는것이다. 당시 김생의 명성은 다른 나라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였는데 그것은 그가 그 누구의 필법을 모방하거나 따라배운것이 아니라 자기의 독자적인 필법을 서예에 구현시킨것과 관련되여있다. 이에 대하여 성대중이라는 사람은 자기의 저서 《청성집》에서 김생과 당시 이웃나라의 유명한 서예가였던 왕희지의 글씨를 비교해보면서 그 차이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왕희지의 글씨는 부드럽고 자유로워 그 글씨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따뜻한 봄날에 멀리에서 아지랑이에 휩싸인 살구꽃을 바라보고있는것 같은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김생의 글씨는 오히려 그보다 더 늦게 피여나는 풍만하고 활짝 핀 모란꽃에 비기는것이 타당할것이다. 왕희지의 글씨에는 은은하고 녀성적인 성격이 떠돌고있다면 이와는 반대로 김생의 글씨에는 오히려 씩씩하고 따뜻한 기백이 한데 엉키여 사람들로 하여금 은은하게 깊은 신뢰에 잠기게 한다. 또 미천한 몸으로 일생동안 근면하고 성실하게 노력함으로써 력대 대가들의 우수한 특점을 섭취한 씩씩하고 호탕함을 발현시킨 그의 글씨는 왕희지와는 대조적인감을 느끼게 한다. 김생의 글씨의 획이 천근의 쇠뇌를 쏘아 1천명의 군사를 쓰러뜨리는감을 준다.》 이것은 김생의 서예수준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다. 리규보는 《동국리상국집》에서 《…마땅히 김생의 글씨를 신품의 글씨로 보면 제1로, 탄연의 글씨를 신품 제2로, 진양공 최씨의 글씨를 신품 제3으로, 류신의 글씨를 신품 제4로 쳐야 할것이다. 기타 사대부, 승려, 은사로서 글씨 잘 쓴 사람은 홍관… 등이 있는데 이들을 또한 묘품, 절품으로 차례를 론할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글씨를 보지 못한것도 있거니와 지금 그 우단점을 평가할수 없으니 모두 필적을 모아놓고 본 후에야 론하게 될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금후 넓은 식견을 가진 사람의 밝은 평가를 기다릴수밖에 없을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생은 한자글씨체인 예서와 행서, 초서를 막힘없이 잘 썼는데 당대 알려진 서예가들가운데서 글씨를 가장 잘 썼다고 한다. 서예의 일인자로 당대는 물론 후세에도 이러한 명예를 차지한것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진것이 아니였다. 자료에 의하면 김생은 어려서부터 시작한 붓글련습을 80살이 넘도록 하루도 중단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생은 비록 비천한 가문에서 나서자랐지만 뛰여난 글씨로 우리 나라는 물론 이웃나라의 옛 서예가들과 애호가들속에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명필중의 명필가였으며 서예발전에 무시할수 없는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되돌이 목록감 상 글 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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