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성덕태자상》을 생동하게 그린 아좌

(6세기 중엽∼7세기초)
 

 

아마 력사에는 유명한 화가로서 이름을 남긴 왕자가 흔치 않을것이다.

그런데 력사에 남은 《성덕태자상》을 훌륭히 그려낸 화가 아좌는 왕족이였다.

아좌는 백제의 제27대왕인 위덕왕(재위 554∼598)의 아들이였을뿐아니라 6세기 말엽부터 7세기초까지 일본에서 활동한 유명한 화가였다.

세나라시기에 제일먼저 일본땅에 진출하기 시작한것은 백제사람들이였다.

그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일본의 북규슈일대에 대대적으로 진출하여 커다란 문화적영향을 주었다.

백제학자 왕인은 일본에 건너가 글 모르던 그곳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천자문을 가르쳤고 태량미태는 건물의 축조기술을 전습시켜주었다.

여기서 회화도 례외로 되지 않았다. 5세기 중엽에 처음으로 일본땅에 건너간 백제의 화가 인사라아는 그곳 사람들에게 그림그리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리하여 백제의 영향력은 북규슈의 서부일대를 벗어나 세또내해연안지방과 가와찌, 야마또일대에까지 미치였다.

그런데 5세기이후부터 일본에 미치는 고구려의 영향력이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6세기이후 고구려는 삼국통일을 실현하는데 유리한 환경을 마련할 목적으로 백제편에 섰을뿐아니라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강화하였다. 일본에서는 고구려의 사신을 높이 우대하군 하였다. 이러한 결과 《쯔루가》 등 70개 국에 살던 1 795명의 고구려사람들은 고려군을 설치하고 하나의 세력으로까지 등장하게 되였다.

아좌가 조국을 떠나기 몇해전인 587년 야마또왕정에서는 정치와 종교, 문화상에서 매우 큰 변화와 흔적을 남긴 중대한 사변이 일어나 친백제세력인 소가노 우마꼬(소가씨)가 정권을 장악하고 왕녀를 골라 왕의 자리에 앉혀놓았다.

이 왕이 593년에 즉위한 야마또왕정의 추고녀왕(스미꼬)이였다.

왕족신분을 지닌탓에 왕위를 넘겨받기는 했으나 녀자의 몸으로 정사를 돌볼 형편이 못되자 추고녀왕은 자기의 친오래비의 아들이며 사위인 인물을 내세워 정사를 보도록 하였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성덕태자였다.

그런데 주목할만 한것은 야마또왕정의 실권자들인 소가노 우마꼬나 성덕태자는 다 조선계통이주민들의 후손이거나 그들과 련계가 깊은 인물들이였다는것이다. 《고사기》를 비롯한 일본의 력사책들의 자료에 의하면 소가노 우마꼬는 소가씨문벌의 우두머리로서 그의 먼 조상은 백제사람이였다고 한다.

이런 력사적배경으로 하여 백제는 야마또왕정의 권력층과 긴밀한 련계를 가지고있었다. 바로 백제의 위덕왕은 야마또왕정의 실권자로 된 성덕태자와 더 가깝게 지내려는 목적으로 자기 아들 아좌를 파견하였던것이다.

아좌일행을 태운 배는 순풍을 안고 기세좋게 달리였다. 배가 일본경내에 들어서서부터는 내내 해안을 끼고 달리였다.

뭍에서는 한창 봄빛이 무르녹고있었다.

소나무가 빼곡이 자란 검푸른 섬들이 잔잔한 바다우에 흑진주를 뿌린듯이 점점이 흩어져있는데 그 푸른 바다에 뿌리박고 일어선 해안의 기묘한 바위와 절벽들을 온통 불태우며 이른봄 꽃들이 한껏 피고있었다. 활짝 핀 벗꽃은 흰구름처럼 산허리에 걸려 흐느적거렸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이 모든것들은 물론 눈길을 끌만큼 색조가 아름답게 보이기는 했으나 조국의 산천처럼 힘차고 씩씩한 멋은 없었다.

일행은 배에서 내려 마중나온 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이까루가궁전에 다달았다.

성덕태자는 근신들과 함께 궁전뜰에까지 나와서 기다리다가 일행을 맞이하였다.

이때부터 아좌는 성덕태자의 국빈으로 초대되여 궁안에서 살게 되였다.

왕궁에서 살고있는 아좌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것을 알게 된 성덕태자는 한번 그림솜씨를 보자고 청하였다.

아좌는 아버지의 당부를 언제나 잊지 않고있는터이라 곧 승인을 하고 성덕태자의 모상을 그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성덕태자상》을 막상 그리자니 마음이 불안하였고 손이 잘 놀려지지 않았다.

이때 문득 일본에서 화법을 가르쳐주던 고구려의 화가 담징의 말이 떠올랐다.

《화가란 남이 느끼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찾아낼줄 아는 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그런 까닭에 화가가 그린 꽃이 실재한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경우도 있는것이고 더 못한 경우도 있게 되는것이다. 아름다움은 화가의 정신에 의해 다시 이룩되는것이지 결코 실재한것 그대로가 아닌것이다. 그러니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기에 힘쓰고 찾은 아름다움을 제 마음 쏟아놓듯 화면우에 쏟아놓기에 힘써야 하는것이다.》

아좌는 화가가 어떤 정열과 뜻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야 하는가를 가르쳐준 스승의 이 말을 평생 가슴속에 간직하였다.

그리하여 아좌는 온갖 정력과 심혈을 다 기울여 마침내 성덕태자를 만족시켜줄만 한 그림을 완성해냈다.

이 그림이 일명 《성덕태자상》으로 불리우는 그림이다.

그림은 량옆에 어린 두 《왕태자》를 데리고 서있는 태자를 그린 3인상인데 섬세한 필치와 담박한 색채, 인물들의 개별적특징을 포착하고 예리하게 표현한 회화적형상의 솜씨는 화가의 뛰여난 재능을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총체적으로 형상이 섬세하고 생동하여 작품은 당시 조선화의 높은 발전수준, 오랜 전통과 우수한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아좌의 이러한 회화적솜씨는 고구려의 발전된 회화수법과 신통히도 같다.

그것은 아좌가 고구려의 화가 담징에게서 미술을 배운것과 관련되여있었다. 비록 왕자의 신분을 가지고 태여났으나 일본에 와서 담징의 그림솜씨와 인격에 탄복된 아좌는 신하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그의 제자가 되여 열심히 미술을 배운것이였다.

아좌의 그림수법과 구도형식은 일본에 있는 고구려적색채가 강한 《다까마쯔무덤》벽화에서도 그 공통성을 찾아볼수 있다. 다시말하여 무덤벽화들에 그려진 인물형상에 표현된 색채가 《성덕태자상》의 인물형상색채와 신통히도 같은것이다.

이와 같이 아좌는 《성덕태자상》과 같은 걸작을 남겨놓음으로써 재능있는 화가로 널리 알려져있다.

《성덕태자상》은 지금 일본에 현존하는 미술작품들가운데서 가장 오래된것의 하나로서 조선화의 발전수준과 화법을 정확히 밝힐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작품으로 되고있다.

참으로 아좌는 독특한 조선화의 기법으로 《성덕태자상》을 훌륭하게 형상해냄으로써 우리 민족미술의 우수성을 힘있게 과시한 이름있는 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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