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근대시기 민족미술을 빛내인 장승업

(1843∼1897)
 

 

장승업은 자를 경유, 호를 오원, 취면거사, 문수산인, 대원인이라 하였으며 도화서 화원으로서 한때 감찰벼슬을 지냈다.

그는 일찌기 부모를 잃고 서울로 옮겨와 리응원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그림그리는 방법을 익혔다. 리응원은 서화를 수집하고 아이들에게 그림그리는것을 배워주군 하였다.

장승업은 주인집 아이들이 그림공부하는것을 늘 부러워하면서 매일밤 아이들이 다 잠든 뒤면 쉬지 않고 그림그리기에 열중하였다.

초기에는 꽃과 새를 그려보기 시작하였는데 하루하루 그림솜씨가 눈에 띄게 달라지자 주인집 아이들이 깜짝 놀라 감탄하게 되였고 주인의 눈에도 들어 그림을 그리고싶은대로 그릴수 있게 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림공부에 더욱 열중할수 있었다.

장승업은 이때 서울장안에서 사는 조정규의 손자 조석진과 안중식 등 소년들과 가까이 지내게 되였고 리응원, 오경석의 집에서 김홍도의 화조화들과 인물주제화들, 변상벽의 그림들과 김두량의 그림 등 명화들을 보면서 화가로서의 안목을 넓혀나갔다.

그리고 안견과 강희안의 그림에서 탁 트인 먹색을, 리정과 김명국에게서 호방한 기상을, 김홍도와 리인문에게서 담담한 기법을 계승하면서 자기 화법을 익혀나갔다.

그는 풍경화나 인물화에서 묘한 솜씨를 발휘하였을뿐아니라 화조화나 동물화, 정물화에서도 특기를 보여주어 근대회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는 화필을 들기에 앞서 큰 꽃잎과 작은 꽃잎의 모양새와 색갈의 명암에 대하여, 날아가는 새와 앉아있는 새들의 동작의 차이에 대하여 유심히 관찰하군 하였다.

이처럼 대상의 특성을 파악하기에 힘쓴 결과 그림을 실감이 나게 잘 그려 명성이 자자하였고 마침내 도화서 화원으로 뽑히게 되였다. 이때부터 그는 직업적인 화가로서 미술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서는 《매화》, 《련못가의 물촉새》, 《목동》, 《게》, 《기러기》, 《군마도》, 《말》, 《매》, 《가을》 등이 있는데 이 그림들은 이 시기 미술을 대표하는 국보적작품들이라고 볼수 있다. 그가운데서도 《매화》와 《련못가의 물촉새》는 화가의 특기를 잘 살린 우수한 작품들이다.

그림 《련못가의 물촉새》는 흔히 련못에서 볼수 있는 련꽃과 갈대, 물고기와 새를 부드러운 필법과 연한 색조로 조용하고 아늑한 정서속에 형상하고있다. 물기있는 부드러운 붓질로 탐스러운 련꽃과 련잎을 그리고 청초한 갈대와 그우에 날아와 앉은 색갈고운 물촉새를 단붓질법으로 능란하게 처리하였다.

이 그림은 부드러우면서도 선명한것을 좋아하는 우리 인민의 정서적미감을 잘 반영하였다.

그의 그림들은 실물을 보는것처럼 금시 꽃이 피여나고 말이 걸어나오고 매가 저 하늘을 날아오를것 같은감을 주고있다.

그림 《매》는 대상의 특질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단붓질로써 한순간에 그려낸 성공작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이 그림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보고 또다시 보군 하였다.

장승업은 정력적인 창작활동으로 조선미술사에 남는 우수한 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조선미술박물관에만도 수많이 보존전시되여있다.

그는 범, 말, 사슴, 개, 고양이, 다람쥐, 기러기, 제비, 앵무새, 매, 닭, 까치, 학, 참새, 오리 등 동물들과 매화, 국화, 수선화, 민들레, 장미, 소나무, 버드나무, 오동나무 그리고 각종 물고기 등을 실감이 나게 화판우에 재현시키였다.

그는 꾸준한 탐구와 노력으로 여러 묘사기법들에 정통하였을뿐아니라 단붓질법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의 기량을 가지고있었다.

홍백매화를 10폭에 담은 《홍백매》는 낡은 틀을 깨버린 새로운 풍경화이다.

화가는 대담하게 큰 매화나무의 중간부분을 대화폭의 전면에 묘사해놓았다. 모진 세월의 풍파속에서 줄기는 거칠어지고 가지는 휘여졌으나 봄을 맞아 가지마다에 향기로운 꽃들을 아름답게 피여올리는 매화나무그림에는 불의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았던 화가의 강의한 성격과 의지가 비껴있다.

장승업은 한평생 가난을 면치 못하고 나이 40이 넘어서야 겨우 한칸짜리 초가집을 얻어 거기에 자기 몸을 담그고 살았지만 권세에 아부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하기에 그는 자기와 같은 처지의 인민들이 요구하는 그림들은 다른것을 다 제껴놓고 그려주었지만 봉건통치배들이 요구하는 그림은 절대로 그려주지 않았고 설사 왕이 요구하는 그림이라 하더라도 구실을 붙여가며 끝까지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여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당시 궁중의 병풍을 그려야 할 과제가 제기되자 신하들은 고종왕에게 오원 장승업의 그림재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를 추천하였다. 하여 그는 임금앞에 불리워가게 되였고 그림을 그리라는 직접적인 분부를 받게 되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일생에서 처음되는 대접을 받았지만 병풍을 그릴 마음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그래서 빠져나올 구멍수만 찾다가 물감구입을 구실로 궁중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군졸들에게 잡히여 다시 궁궐로 끌려들어가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그림을 구상하는체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파수병들이 졸고있는 틈을 타서 또다시 탈출하였다. 하지만 다시 붙잡히여 포도청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말았다. 왕명을 어겼으니 틀림없는 사형이였다. 이런 때 장승업의 덕을 본적 있는 한 재상이 나서서 루루이 구실을 붙여 두둔해주어 그는 겨우 목숨을 부지할수 있었다.

그후에도 그는 재상의 집에서 그림을 그려달라는 청을 받았지만 역시 이 구실, 저 구실을 붙여 끝내 그려주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봉건관료배들에 대한 그의 항거정신의 발현이였다.

특히 장승업은 반일감정이 매우 높은 화가였다.

그는 임오군인폭동(1882)이 일어나던 해 봄에 서울 원남동에 자그마한 집 한채를 마련하고 비분과 울분의 심정을 필묵에 빌어 호소하였으며 《민비살해사건》에 대한 소식을 들은 다음에는 일제에 대한 증오심이 더 강해져 분격을 터쳐놓군 하였다. 그가 일본침략군을 얼마나 증오하였던지 당시 놈들이 둥지를 틀고있던 서울의 진고개와 왜놈들이 차려놓은 상점거리에는 일생동안 단 한번도 발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당대 사회의 부패상과 일제에 대한 증오와 규탄의 사상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지 못한것이 그의 제한성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전통적인 조선화의 우수성을 견지하고 19세기 후반기 우리 민족의 근대회화를 빛나게 장식하였으며 조석진, 안중식, 리도영 등 제자들을 가르쳐 민족미술의 대를 잇도록 하는데 이바지한 재능있는 미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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